매일말씀나눔

2018. 11.12 – 16

로마서 14장에 나오는 음식과 날자의 문제에서 바울은 ‘연약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견해를 잘못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바울은 채식가가 아니었고 우상의 고기를 먹지 못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고,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이교의 제사가 고기를 더럽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거리낌 없이 오히려 감사하며 고기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같은 장 후반부(13-23절)와 고린도전서 8장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연약한’ 그리스도인 앞에서 일부러 고기를 삼가는 것이 옳습니다. 행여 연약한 형제를 양심에 거리끼는 일로 유도하여 죄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제한합니다. 성경이 성결한 양심을 매우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양심이란 무오하지 않으며 교육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양심에 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과는 별도로, 우리는 절대로 다른 사람의 양심을 침해해서는 안됩니다. 설령 다른 사람의 양심이 잘못되어 있을 때라도 마찬가지입니다(물론 우상 앞에 드린 고기를 먹는다는 것과 같은 사소한 문제들일 때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14: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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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흥미진진한 전기와 자서전은 단순히 주인공의 사연만 들려주는 책이 아니라 그의 비밀을 밝혀주는 책입니다. 그렇다고 책의 주인공이 실은 악당이나 은근한 술꾼이었다는 식으로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비밀을 폭로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삶의 방향과 동력, 헌신의 대상과 동기가 밝히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의 인생에서 정말 흥미로운 점은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가입니다. 그는 무엇을 위해 또는 누구를 위해 살고 있는가? 물론 삶의 목적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목적을 찾다가 실패하여 실존적인 비관론에 빠졌을 수도 있고, 아니면 기질적으로 방랑벽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삶이라는 바다에서 플랑크톤처럼 그저 바람과 물결에 휩쓸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정반대로, 마치 사나운 귀신에 쫓기듯 뭔가에 쫓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채울 수 없는 욕심 특히 재물욕, 권력욕이나 명예욕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진정 인간다운 인간의 한 표지는 고결한 목표를 이타적으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사업체나 기업에서 ‘관리’ 기술을 개발한 사람들은 그 동일한 원리를 사생활에도 적용하여 각자 자기만의 목표를 수립하도록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정신 건강의 한 조건이 아닐까 합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은 삶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의 의미는 무엇이고, 삶의 목표는 무엇으로 설정했으며, 그것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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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0.29 – 11.2

캔터베리 대주교를 지낸 고 마이클 램지는 서품식에서 ‘슬픔과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권면하면서 ‘주 안에서 기뻐함’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나라이고 환경이며 숨쉬는 대기임을 아는 것입니다. 성 아우그스티누스는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나라’라고 했습니다. 그 나라에 사는 우리는 현재의 슬픈 상황에서 달아나지 않고(오히려 그런 슬픔에 더 민감해질 수 있겠지요) 하나님과 천국을 보는 영원의 시각으로 살아갑니다. 현재 우리들의 교회가 회의와 불안과 소극적인 태도와 무기력에 빠져 있는 것은 다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혼의 나라인 하나님과 함께 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 나라에서 우리는 엄연히 문제에 부딪히지만 또한 성도의 기쁨에 동참합니다.” 한 마디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과도 같은 내용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업적과 그분이 돌보신다는 약속을 믿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꾼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그러나 그 자세는 부득이함이 아니요 기쁨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 있기 때문입니다. 공기가 우리 공간에 있는지 여부는 손을 들어 휘들러 보면 알 수 있듯이, 주님께서 우리 중에 계시는 지의 여부는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 충분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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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0. 22 – 26

다시 존 스토트 목사님의 책 “내 삶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로 돌아와서 ‘그리스도의 연합’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첫 번째는 이미 기술한 바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옛 생활에 죽었을 뿐 아니라 새 생활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죄와 죄책과 속박이라는 옛 생활이 끝났을 뿐 아니라 용서와 능력과 자유라는 새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음뿐 아니라 부활에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지닌 큰 열망은 갈수록 더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몸으로 부활하신 일은 자연적인 부패의 과정을 묶어버렸을 뿐 아니라 초월하신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그분의 부활을 역사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표출된 정점으로 그립니다. 부활은 우주의 창조에 비견됩니다. 사실 그것은 새로운 창조 행위이기 때문입니다(참고, 엡1:19이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표출된 하나님의 능력은 또한 우리를 소외와 속박의 죽음에서 살리심으로 표출되었고, 악을 우리의 발아래 두심으로 오늘 우리의 삶에도 표출될 수 있는 것입니다(엡1:19 – 2:10).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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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0. 15 – 19

전도자 선다 싱의 책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없이》의 대목 가운데 ‘그리스도 없는 비그리스도인들”에 등장하는 전도 일화를 보겠습니다. 선다 싱은 로프에 발을 묶고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좌우로 움직이면서 고행하는 어느 분을 만났습니다. 선다 싱은 그 고행자가 묶은 발을 풀고 쉴 때에 그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무슨 동기로 그런 고행을 하며, 무슨 유익을 얻었습니까?” 그러자 그 고행자는 “지금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지만, 당신이 사드후(고행자의 뜻임) 형제이기 때문에 몇마디 설명해주겠소. 창조주가 사람을 태어나게 할 때 머리를 밑으로 하도록 만들었소. 바로 이것이 내 자신의 경배와 고행을 하는 방식이요. 세상의 눈에는 그것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나 자신과 모든 사람이 기억하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가 죄에 얽매여 있을 때, 세상이 보기에는 바로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창조주가 보기에 우리는 머리를 거꾸로 돌린 것이요. 나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다는 만족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안팎으로 내 자신을 개혁하기를 원하고 있소!” 그러자 선다 싱은 “세상이 거꾸로 되어 있는 것도 맞고 우리는 그들의 방식을 채택하지 말아야만 하나, 어떻게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능력을 넘어가는 일이어서 사랑의 주님이 인간이 되신 것이고 그 결과 우리를 죄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하게 하여주셨습니다.” 그러자 그 고행자는 더 이상 대화를 하기 원하지 않는다는 표식을 보였고 선다 싱은 일어나 갔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런 가혹한 고행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고행자는 자신이 만족하고 평안을 얻을 정도로 자신을 개혁할 수 있는 어떤 진보도 없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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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0. 8 – 12

선다 싱은 인도의 시크교 집안에 태어나 열다섯 살 때 환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 회심했고, 그 사실을 즉시 가족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는 후에 “가족 중 일부는 내가 미쳤다고 했고 일부는 내가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나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을 때 내가 겪었던 비참한 불안에 비하면 박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야흐로 환난과 박해가 시작되었지만 그것을 견디어 내는 것이 내게는 어렵지 않았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얼마 후 선다 싱은 집을 떠나 순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1929년에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없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책을 펴냈는데, 취지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삶과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는 삶의 차이를 보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은 “그리스도 없는 불신자들” 2장은 “그리스도 있는 불신자들”은 침례는 받지 않았으나 ‘비밀리에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을 말하고, 3장은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것으로, “그리스도를 전혀 체험하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 그들은 속 빈 강정이요 영혼없는 몸과 같다”고 쓰고 있습니다. 4장은 “그리스도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관해 적으면서 자신의 경험과 믿음을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계신 것과 없는 것의 차이를 한 마디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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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0. 1-5

‘그리스도와 함께’ 이 말은 즉시 장례식과 묘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빌1:23)는 말씀이 비문으로 가장 많이 쓰이며, 때로 그것을 ‘그리스도와 함께’로 줄여서 쓰기 때문입니다. 2세기전 사셨다가 지금은 주님과 함께 있는 리처드 백스터 목사님의 시를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 주님, 제가 죽은지 사는지는 제가 걱정할 바 아니옵니다. 주를 사랑하고 섬기는 본분만 은혜로 저에게 허락하소서./ 제가 지날 죽음의 어두운 방 주님도 친히 지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나아오는 자는 이 문으로 들어야만 합니다./ 제가 그 생을 잘 모르고 제 믿음의 눈이 침침하여도, 주께서 다 아시니 족하오며 주와 함께 있으리니 족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와 함께” 라는 말은 현재 우리가 이해하고 경험하는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 그분과의 친밀한 인격적 교류를 가리킵니다. 사실 그때 누릴 그분의 직접적인 임재에 비하면 지금 그분의 백성들 가운데 함께하시는 그분의 임재는 차라리 부재에 가깝습니다. 그 임재 안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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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9. 27-28

진정한 자유와 만족은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있습니다. 이에 대한 그분 자신의 주장을 다시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9-30). 어째서 그런 것일까요? 내 신념이나 행동에 조금이라도 통제가 가해지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믿을 바를 일러주신다면 우리의 사고가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으며, 그분이 우리에게 행동방식을 지시하신다면 우리의 의지가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멍에와 자신의 자유를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란 오직 하나의 권위 아래 있을 때에만 자유로우니 그것은 바로 진리의 권위입니다. 생각이 거짓을 믿는다면 자유롭지 않고, 오히려 망상과 오류의 굴레 아래 놓이게 됩니다. 사고란 진리를 믿을 때에만 자유롭습니다. 문제의 진리가 과학의 진리이든 성경 진리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중력의 법칙을 깨닫고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믿을 때 비로서 우주 여행이 가능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삶을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둘 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여기에 진정한 자유와 만족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17:17).

생각이 진리의 권위 하에 있을 때에만 자유로운 것처럼 비슷하게 의지(뜻)도 오직 하나의 권위 아래 있을 때에만 자유로우니 그것은 바로 의의 권위입니다. 의지가 그리스도께 불순종하면 자유롭지 않고 오히려 아집과 정욕의 굴레 아래 놓이게 됩니다. 의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기준에 순종할 때에만 자유롭습니다. 누군가 왜 그러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실재의 순리라고 답할 수박에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진리와 선이시며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이성적인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분의 진리를 탐색하고 믿어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지성을 갖추어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또 우리를 도덕적인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자신의 법을 기록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도덕법은 이질적인 기준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꼭 맞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양심과 성경에 ‘기록하신’ 도덕법은 그분 자신의 속성인 영원한 의와 근본적으로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고는 그분의 진리를 믿어 자유를 얻고 우리의 의지는 그분의 법에 순종하여 자유를 얻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의 멍에는 ‘쉽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꼭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참된 안식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벗는 데 있지 않고 달게 지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 아래’ 우리는 가장 자유롭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이고 진리를 알게 되리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8:31-32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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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9. 17 -21

순종과 관련하여 현대인들은 별로 달가워 하지 않습니다. 또 혹자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유의 삶인데 순종과 자유는 서로 배타적이므로 순종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일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순종에서 나옴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율법 아래 있지 않다’(예, 갈5:18)는 바울의 표어를 가져다 잘못 적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의 세계는 폐기되었으며,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제외한 모든 절대 기준에서 자유로워졌다는 뜻이라고 결론을 비약합니다. 전혀 잘못된 해석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율법의 의를 이루게 하려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죽으셨다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 안에 법을 기록하려고 성령을 주셨다는 것 역시 말한 바 있습니다(롬8:3-4; 고후3:3, 6). 구약성경의 선지서에는 하나님의 두 가지 약속, 즉 자신의 백성 안에 성령을 주신다는 약속과 그들 안에 법을 두신다는 약속(참고, 겔36:27; 렘31:33) 사이에 사실상 전혀 구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수용되는 면에서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며, 거룩함을 이루는 면에서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성령님의 능력 아래 있는 것입니다 (참고, 롬6:14; 갈5:18). 그러나 도덕적 기준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면에서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고전9:21)라는 것을 고백하여야만 합니다. 사실 도덕적 순종이라는 요건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주권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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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9.10 – 14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5), 이 말씀은 우리 삶에 실천적인 목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군대의 병사들처럼 종종 반항적이고 때로 불온한 우리 마음의 무수한 생각을 사로잡아 그분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분께 순종하여 참 자유를 얻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둔다는 것은 우리의 이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계시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생각에 복종시킨다는 이 개념은 오늘날 교회에서 다분히 무시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베다니의 마리아를 닮은 사람들이 너무 적습니다. 마리아는 시간을 내어 예수님의 발아래에 앉아 말씀을 들었건만 우리는 그러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 삶은 너무 바쁩니다. 마르다처럼 우리도 활동주의자입니다. 우리는 묵상을 낯설어하며, 침묵보다 소음, 고요한 묵상보다 분주한 활동이 더 성미에 맞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이런 기도를 드려야만 합니다. “우리의 모든 몸부림이 잦아들기까지/ 주의 고요한 정적의 이슬을 내리소서/ 우리의 영의 염려와 근심을 제하시고/ 안온한 삶으로 고백하게 하소서/ 주의 아름다운 평안을, 주의 아름다운 평안을, ……”(J.G. 위티어).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1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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