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6/23-27)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린턴 가문의 ‘결핵 선교’
마태복음 10:12절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본문은 열두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 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부여하신 뒤 복음을 전하도록 파송하신 대목입니다. 19세기말과 20세기의 한국 선교사들은 ‘병원-학교-교회’ 삼각 전략을 통해 한국에 복음을 심었습니다. 교육과 관련된 대표적인 열매는 한국 최초의 미국 문학사 하란사(1875-1919)입니다. 그는 기혼녀로서 이화학당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는 중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한편, 휴 린턴이 세운 순천기독진료소는 6.25 전쟁 후 급속히 늘어나는 결핵 퇴치에 큰 공헌을 합니다. 순천기독진료소의 건물은 2층으로 왓츠 장로의 헌금(7천불)과 스와인하트 건축선교사의 작품입니다. 휴 린턴은 윌리엄 린턴의 3남이자 의사 인요한의 부친입니다.1926년 군산에서 출생하였고 1941년 강제 추방되었으나, 1953년 한국 선교사로 다시 와서 순천에서 활동하였습니다. 휴 린턴은 시골을 돌면서 교인을 돌보다 치료받지 못해 숨져가는 결핵 환자들을 보고, “이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우선 약을 먹여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고 판단합니다. 먼저, 여러 병원과 함께 결핵 퇴치 운동을 전개하였고, 자신이 직접 의료진을 데리고 환자를 찾아 다녔습니다. 환자들에게 “약만 먹으면 살 수 있다”고 설득하여 진료소로 데리고 와서 부인을 통해 치료하였으니, ‘결핵 선교사’라는 그의 별명은 정당합니다. 휴 린턴은 교통사고로 소천합니다(1984).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것인가?” 휴 린턴은 결핵환자를 보고 그 답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전3:12)

전도서 3:14절 하나님의 섭리의 영원성(2)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의 영원성을 언급한 전도자는, 그 결과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사람이 더 할 수도,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다는 완전성, 완결성, 충분성을 강조합니다. 실로 하나님은 완전하시며 그 행하시는 일 역시 완전하여 가감이 필요 없는 것은 물론 결코 가감 할 수도 없습니다. 이는 그분이 만물의 창조자이며 보존과 섭리의 주관자이기 때문입니다. “울면서 마속을 참하다”(읍참마속(泣斬馬謖)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이는 제갈량이 아끼는 부하 마속을 전쟁에서 패배한 책임을 물어 처형하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삼국지의 일화에서 나왔습니다. 책임자 마속은 부장 왕평의 반대에도 성이 아니라 산에 진을 폈으나, 뒤늦게 가정에 도착한 장합은 이를 보고 급수로를 끊고 들이쳐 마속을 궤멸시켰습니다. 마속은 ‘병법의 금기—높은 곳을 점해도 보급과 배후가 불안하면 취약하다’는 교훈을 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 양쪽 군대의 지혜자 제갈량이나 사마의의 기준에서 보면 마속은 그야말로 우장입니다. 하물며, 완전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할 때 가장 어리석은 자는 오직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완전성이 가장 잘 반영된 것이 하나님의 계명들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삶은 하나님 사랑, 자기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이 모두 조화를 이루는 유일한 삶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시편19:7)

전도서 3:14절 하나님의 섭리의 영원성(3)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인간은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법칙과 그분의 주권적 섭리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탄생, 노화, 병, 죽음, 성공, 실패, 사랑, 미움 그 어느 것 하나 인간의 뜻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삶을 받아들이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전도자 역시 그 진리를 고백합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서 주어진 복을 받아들이고 즐겁게 살아가야 하나(전9:7-10), 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하고,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경외’의 원어는 ‘야레’로서, ‘두려워하다, 위엄있다’ 등의 복합적 의미를 갖지만, 기본적으로 존경과 사랑에 토대를 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행위를 보시고,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좋은 사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의 시종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분의 행하심을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하다가 심판을 받습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족속을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불평을 쏟다가 광야에서 멸망 당하였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들은 돌보아 주심을 믿고 소망하면서 신실하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세상과의 차이인데,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롬5:5).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0:3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단
창세기 49:16절
“단도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처럼 자기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현대인의성경)


1830년 대 미국의 성경학자 에드워드 로빈슨은 이스라엘을 직접 답사하면서 수많은 성경 속의 도시들을 밝혀냈습니다. 그중 헬몬 산 폭포 옆의 ‘텔 엘-카디(= 심판의 언덕)’로 불리는 유적지를 발견하고 단 자손이 이동하여 살게 된 레셈(수19:4) 혹은 라이스 땅(삿18:1)으로 주장하였습니다. 학자들은 단 유적지인 텔 엘-카디가 성경의 ‘단’ 지역이고, 요단 강 이름의 어원이라는 데 이견이 없습니다. 즉, ‘단’은 심판의 뜻이라(창49:16) 유적지 이름의 어원과 유사하며, 옆의 폭포는 요단 강 수원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요단 강은 히브리어로 ‘야르덴’ 강입니다. ‘내려오다’라는 ‘야라드’와 ‘단’이라는 이름의 합성어로 ‘단 샘에서부터 내려오다’라는 의미입니다. 수원은 ‘단, 헬몬, 스닐’의 샘 3개인데 그중 단 샘이 가장 큽니다. 본문은 야곱의 임종 시 아들 단에 대한 예언입니다. 단은 라헬의 시녀 빌하의 후손이나 야곱은 정식 지파로 인정하였습니다. 가나안 정복 시 단 지파는 소라, 에스다올, 에글론, 욥바(현대의 야파) 등의 블레셋 지역을 배정 받았습니다(수19장). 단 지파는 용감하였지만(삼손), 블레셋의 강력한 저항철 병거로 인하여 그 일부가 ‘텔 엘-카디’(라이스)로 이주하여 모세의 손자 요나단을 제사장으로 삼고 우상숭배를 시작합니다(삿18:30,31).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이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제자들은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계명을 지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14:24).

전도서 3:9절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말콤 글래드웰의 책 「아웃라이어」는 성공한 사람들의 개인적 능력과 재능을 넘어선 환경적 요인(문화와 사회적)의 중요성을 주목합니다. 그의 여러 사례 중 ‘랭건과 오펜하이머’의 비교는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과학적 재능은 비슷하였지만, 랭건은 그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말목장 주인으로,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로서 맨하튼 프로젝트를 이끈 관리자로서의 명성까지 얻었습니다. 그는 한 개인이 자기 분야에 전문적 지식을 갖기 위해서는 10,000시간을 쏟으면 얻어지나, 그 전문성을 발휘할 사회와 문화의 테두리를 얻지 못하면 평범하거나 실패한 삶을 살아간다는 결론입니다. 중용되려고 13년을 돌아다닌 공자 역시 실패해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사회적, 가정적 환경과 개인의 노력이 성공에 미치는 영향은 각 어느 정도일까요? ‘운칠기삼(運七技三)’이 적절합니다.「요재지이」(포송령 작)는 그 유래를 말합니다. 한 선비가 계속 과거에 떨어지자 옥황상제에게 따집니다. 옥황상제는 정의의 신과 운명의 신에게 술 내기를 시키니 전자는 3잔, 후자는 7잔을 마셨습니다. 옥황상제는 선비를 불러 세상만사는 7할은 운명에, 3할은 운수에 지배되는 법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나, 운수로 표현되는 기회와 때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인간은 열심히 그릇이 되고, 하나님은 그 그릇 중에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그릇도 중요하나, 주인의 선택은 더 중요합니다. 문제는 희생과 섬김이 필요한 곳을 위한 그릇은 하나님이 언제나 선택하시나, 주님의 가르침을 간직한 제자들 이외에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2:27)  

매일묵상(2025/6/16-20)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원탁회
야고보서 1:2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1940년 말, ‘신사참배’에 비협조적인 선교사들이 강제 출국당한 뒤, 일제는 밀정을 풀어 순천 노회 소속 목사들의 행적을 주시하였습니다. 그 무렵 알렉산더병원 서무과장으로 있던 황두연 장로가 순천중앙교회 청년들을 모아 ‘원탁회’라는 성경공부 모임을 이끌었습니다. 경찰은 수상하게 여겨 회원 강창원의 집을 수색,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다’라는 일기를 압수하고 지도자 황 장로를 체포합니다. 또한, 천년왕국을 선전한 혐의로 당회장 박용희 목사 역시 체포하였습니다. 이어 순천노회에 소속된 교회의 목사들 18명 중 14명을 ‘재림 신앙’을 설교했다 하여 구속합니다. 이들은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형을 각 선고받아 옥고를 치뤘고, 특히 양용근 목사는 ‘옥중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순천 노회 소속은 아니나 여수 애양원교회의 손양원 목사와 은퇴 후 우학리교회에서 목회하던 이기풍 목사도 신사참배 문제로 구속 중이었으니 당시 순천노회에는 목사가 있는 교회를 찾아 보기 어려웠습니다. 순천중앙교회 앞마당에 있는 ‘추리 나무’ 두 그루는 암울했던 시절 교회와 노회가 겪은 수난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합니다. 도대체 신앙으로 인한 고난과 박해는 왜 있어야만 할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는 주님의 영적통치전략의 일환 때문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고난과 박해를 이겨낸 교회와 신자는 후대를 위하여 ‘금보다 귀한 믿음’(벧전1:7)의 유산을 확보하게 됩니다. 따라서, 베드로(벧전1:6,7), 바울(롬5:3-5), 야고보(약1:2,3) 세 사도 모두 기뻐하라고 외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1:6).

전도서 3:13절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최선의 삶이란,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12)과, “먹고 마시며 수고함으로 낙을 누림”이 들어 있는 삶이나, 이 또한 하나님의 선물로서(13),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누리지 못합니다. 이 지점에서 전도자는 신은 죽었으니,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성실하고 용기있게 살아가자는 니이체의 초인사상과 결별합니다. 제자의 삶의 큰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소망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과 2:24절은 유사합니다. 한편, ‘낙’은 히브리어 ‘토브(=좋음)’의 번역으로, 여기서는 ‘만족’을 뜻합니다. 먹고 마시고 수고함을 따르는 만족은 인생의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오아시스입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교제의 삶의 필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교제는 주로 식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먹고 마시다’라는 표현은 가족, 친척, 동료들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삶을 향유하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이웃과 함께 삶을 나누며 즐거워 하는 것은 행복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데, 전도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부각시킵니다. (2) 섭리와 즐거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무시하고 자아실현을 추구하거나, 욕망을 채우려는 ‘수고’는 헛되나(3:9),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면서 행하는 ‘수고’는 진정한 만족을 가져 옵니다. 또한, ‘수고’ 없는 게으른 삶, 남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는 삶은 성취감과 만족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를 배우는 제자의 삶은 이보다 한 차원 높은 영적 제사장의 삶입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살전5:15)

전도서 3:14절(1) 하나님의 섭리의 영원성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최선의 삶의 자세’를 논한(3:12,13) 전도자는, 하나님의 영원성에서 그 근거를 찾은 뒤, 그분에 대한 ‘경외’를 강조합니다. 전단은 하나님의 섭리는 영원히 존재하고, 유한한 인간은 거기에 가감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때와 기한을 정하시고(3:1-8), 그 안에서 행하시는데 이러한 방식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본절은 동사 ‘행하시는’을 미완료시제로 써서 계속 진행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영원까지 어느 하나도 예외가 없음을 교훈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은 불완전하고 불확실하여 염려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염려에서 해방되려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고난 속에서도 그분의 계명을 쫓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분이 이루시고, 고난의 밤 중에 우리가 행한 선들을 대낮처럼 밝히 드러내십니다(시37:5,6). 이때 하나님은 즐거워 하십니다. 인내를 믿음의 핵심요소로 꼽는 이유입니다(히12:1-3). 불순종한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사흘 후에 나오자 곧장 니느웨로 가서 전도하자, 니느웨에서 회개가 일어나고 그 성은 구원받습니다. 요나는 매우 실망하나, 이는 단순히 니느웨 백성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부활과 회개를 통한 구원의 예표였습니다. 따라서, 요나의 사건은 주님의 재림 시까지 인구에 회자되면서, 예수의 부활, 회개와 구원을 증거하는 근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함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눅11:3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갈릴리
누가복음 5:1절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본문은 갈릴리 해변에서 가르치신 주님의 모습을 전합니다. 갈릴리 호수는 길이 21km 너비 13km 전체 둘레는 53km이며 깊이는 43m입니다.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만을 나눈 지각변동으로 형성된 계곡에 위치해 있어 해수면이 해저 210m에 이릅니다. 덕분에 산으로 둘러싸인 온화한 기후를 갖고 강우량(평균 900∼1200mm)과 꽃, 나무도 많아 아름답습니다. 북쪽의 헬몬 산이 수원이며 남쪽으로 흘러 호수를 이루었고, 호수 남쪽에 접한 요단 강(100km)을 통해 사해까지 미칩니다. 구약은 이 호수를 ‘키노르’(=하프)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긴네렛(민34:11)으로 불렀습니다. 실제로 갈릴리 호수는 삼각형 모양이며 고대 근동의 하프처럼 생겼습니다. 신약 시대는 게네사렛(눅5:1)이라 불렀습니다. 이는 골짜기를 뜻하는 히브리어 ‘기노사르’가 어원으로 아마 계곡이란 지형적 모습을 따른 것 같습니다. 또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요6:1)로 불리기도 하는데,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를 기념하여 만든 해변 도시 디베랴에서 유래합니다. 구약시대에는 납달리 지파의 땅이었으나,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가나안 우상숭배의 영향이 컸습니다. 이사야의 증언처럼(사9:1,2) 갈릴리 지역은 많은 고통을 받았으나, 그 고통 받은 지역에 주님은 성령의 권능을 갖고 먼저 복음의 주무대로 삼습니다. 복음을 간직한 제자들이 배워야 할 지혜와 능력이며 또 사명입니다. 이로써 이사야의 예언은 성취됐습니다. 마태복음의 증언입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4:15,16)

요한복음 8:56절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야곱이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밧단아람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갔을 때, 미모의 외사촌 라헬을 아내로 맞기 위해 라반에게 7년 간 노동을 제공하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라반은 좋게 여겨 승락하니, 야곱은 그 고된 머슴살이 7년을 며칠 같이 여겼습니다(창29:20). 사랑하는 라헬과 함께 세워갈 가정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왜  주저하지 않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갔겠습니까? 자신이 경외하는 하나님이 직접 지으시고 경영하실 기반들을 가진 성, 즉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과 소망을 갖고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 신앙유산을 이삭과 야곱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기쁨과 소망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소망과, 자신의 후손을 통해 오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믿음을 갖고 100년을 천막에서 살았습니다. 본문은 주님이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약속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중에 쟁점으로 떠오른 아브라함을 다룹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은 자신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고 선언하시며, 자신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존재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거하셨다가, 돌에 맞을 뻔하셨죠!(요8:57-59). 그러나 주님은 부활로써 확증하셨습니다. 믿음 생활이란 아브라함처럼 주님의 뜻을 행하면서 기쁨으로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5,6)

매일묵상(2025/6/9-13)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사도행전 8:1절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본문에서 누가는 30년 전 스데반의 순교 후 몰아닥친 박해를 회고합니다. 이 박해로 사마리아와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고 결국 박해자 사울이 사도 바울로 회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1905년 여천(장천교회), 벌교(무만동교회), 광양(신황리교회)에서 교회가 먼저 세워지고, 이들의 전도로 순천읍에서도 최사집, 최정의, 김억평, 윤병열, 최사중, 김창수 등이 믿기 시작하여 1906년 순천중앙교회가 설립됩니다. 처음엔 서문안 강시섭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교인이 늘자 북문 밖 양사재(養士齋)로 옮겨 예배를 드렸습니다. 양사재는 숙종 때(1718년) 순천 부사 황익재가 석현 개울 건너 향림사 입구에 세운 유생교육기관이었지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것을 빌린 것입니다. 1910년 매곡동 144번지 현 위치에 ‘T자형’으로 목조 예배당(20평)을 지은 뒤 증축과 신축을 거쳐 1983년 지금의 현대식 벽돌 건물(789평)이 들어섰습니다. “일제말기 선교사님덜이 쫓겨 들어가시구, 박용희 목사님과 황두연 장로님이 원탁회 사건으로 잡혀가시구…..교인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지라. 새 세상이 올 것을 믿었응께.” “새 세상에 대한 믿음”은 광복이 아니라 재림신앙을 의미합니다. 일제는 신사참배 가결 후 순천노회를 주목하고 있었기에 박해는 필연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를 통해 후대의 믿음을 확립하셨으니,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는 주님의 영적통치전략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전도서3:12절(1)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12-15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성을 부여받은 사람의 바른 자세와 삶의 허무의 극복 방법을 구체화 합니다. 먼저, 12절은 전도자가 경험한 최선의 삶입니다. 원문 서두는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의미를 갖는 ‘야다’의 완료형을 사용하여, 전도자가 가만히 앉아 생각함으로 얻은 결론이 아니라 인생을 실제로 살아보고 나서 터득하였음을 알려줍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을 앞세우지 않고 자신의 지혜로 이것 저것을 얻고 쾌락을 누리며, 자아 실현을 해 보았지만,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삶의 결국은 허무로 귀결됨을 뼈에 사무치게 깨달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성경에서 말하는 소위 악인으로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본절은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해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기뻐하는 것이고, 둘째 능동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기뻐하며’의 원어는 능동 혹은 수동 모두 가능한데, 수동의 뜻이 좀 더 강합니다. ‘행복(幸福)’이란 단어가 ‘운’의 뜻을 내포하듯이, 행복은 노력으로만 얻어지기 보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은총을 누릴 때 옵니다. 하나님 만큼 선하신 분이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참된 행복을 위해 당신의 아들도 아낌 없이 내어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주신 삶을 기뻐하십시오! 어떤 형편에 있든지, 거기서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로부터 배우는 삶이 신앙생활입니다(마11:28-30). 만유의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에는 자족을 통한 평강이 있습니다. 내일은 ‘선을 행하는 것’을 묵상하겠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4:11)  

전도서3:12절(2)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또 하나의 행복 요소로 제시되는데, 본문에서 ‘선’이란 무엇일까요? 인생의 여정 중 즐거움을 누리라는 의미로도, 도덕적이고 신앙적인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단어 자체만 보면 후자에 가깝습니다. 이경우, ‘선을 행하는 것’이란 개인과 사회, 더 나아가 인류의 보편적 유익을 추구하고, 자신의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활용함을 말합니다. 그러나, 12절의 ‘선’은 13절에서 ‘낙’으로 번역된 ‘토브(=good)’이므로, 문맥상 전자가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즐거움을 누리도록 기회를 주셨을 때, 즐기면서 살아가라는 것이지만, 최선의 삶을 보면 이 두 가지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은총과 행복을 누리는 동시에(기뻐하며), 이웃에게 선행을 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보다 더 나은 삶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둘을 모두 갖추어야 하나 외식을 주의해야 합니다. 유대인의 종교법전 미쉬나는 ‘손을 씻고 음식을 먹으라’고 규정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를 따르지 않고 음식을 먹는 제자들을 비난하자, 주님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죄악된 생각임”을 밝히고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막7:18,19). 신앙의 핵심은 외적 규례가 아니라 마음의 정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음식을 대할 때 감사와 기쁨으로 받음은 물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4,5).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헤롯 가문
누가복음 3:1절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헤롯 대왕의 부친은 이두메 사람 안티파테르이며, 로마의 유대 지역 행정관에 임명(BC47) 받으나 암살당합니다. 둘째 아들 헤롯이 유대 왕위를 계승(BC37-4)하였고 그의 통치 말년 예수께서 태어나십니다. 헤롯은 이두메(에돔) 사람인 탓에 유대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헤롯 사후 유대 지역은 아켈라오, 갈릴리와 베레아는 헤롯 안티파스(BC 3~AD 39), 이두래와 드라고닛(→골란고원과 시리아 남부)은 빌립에게 각 분배되나(분봉왕). 아켈라오는 곧 파면되어 총독이 유대지역을 통치하며(AD 6), 디베리우스 황제 재임(AD14~37년) 중 침례 요한이 등장합니다(AD28,9년). 헤롯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 1세(AD 37~44)는 교회의 원수이지만(행12장), 유능한 왕으로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 베레아, 이두메 전 지역을 통치합니다. 그 아들 헤롯 아그립바 2세(AD44~70)는 헤롯의 마지막 왕(행 25, 26장)입니다. 이두메 사람인 헤롯 가문이 이스라엘을 통치하였으나 이두메아 사람들은 서서히 유대화되어 갔고, AD70년 로마가 이스라엘을 정복할 때 2만 명의 이두메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도왔습니다. 유대인은 지금까지 남아 있으나, 이두메아 사람들은 역사에서 사라졌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응하였다 하겠습니다(오바댜 등). 그러나 유대 땅을 마지막으로 다스린 민족이 이들임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역사적 경륜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됩니다. “그러나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의 예언을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벧후1:20,현대인의성경).

마태복음 6: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성실히, 열심히 살려는 인간에게는 두 종류의 삶이 놓여있습니다: 초인의 삶과 제자의 삶. 니이체를 따르면, 신은 죽었으므로 율법과 선악의 기준을 만들어 내던 신의 개념을 집어던지고, 닥쳐오는 인간의 문제들은 초인의 길을 걸으면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위버맨쉬’를 번역한 ‘초인’은 자신만이 가치척도가 되어 문제극복의 ‘힘’을 추구하고 책임과 약속을 지키는 새로운 인간상입니다. 따라서, ‘초인 철학’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중심의 사상이며, 그 열매는 사르트르의 실존사상입니다. 신이 없는 사르트르는 자유분방하게 살았습니다. 한편, 제자의 삶은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를 배우는 삶입니다. 우리 주님은 성부의 뜻을 받들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비록 하나님은 그분을 지극히 높여 만유의 주로 임명하셨으나, 주님의 목적은 언제나 성부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문제를 당할 경우 그분의 뜻을 배우는 절호의 기회로 보고 기뻐합니다(약1:2). 그리고 초인의 길이 아니라, 제자의 길 즉, 겸손히 계명을 지키며 주님의 도우심을 기도하고 인내합니다. 교부 이그나티우스(AD35∼107?)는 로마로 압송되어 가면서, “나는 비로소 제자가 되기 시작했다”는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초인의 길은 자신의 문제해결과 행복추구가 목표이고 늘 긴장하고 살아가나, 제자의 길은 자신을 부정하고 계명을 지켜 행하며 주님의 보상을 고대합니다. 그 보상은 금생 혹은 내생에 반드시 주어지기 때문에, 손해를 당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평강과 여유가 있습니다.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4)

매일묵상(2025/6/2-6)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왓츠기념 선교부
사도행전 12:5절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조지 왓츠 장로의 선교 헌금 약속을 기반으로 순천 선교부가 개척 된 때는 1912년 8월 이후입니다. 먼저, ‘건축 선교사’ 스와인하트(한국명 서로덕, 1911년 내한)를 순천에 보내어 선교사 사택을 짓는 한편, 교회와 전도 사업을 담당할 프레스턴과 코잇, 남학교를 세울 크레인(구례인)과 여학교를 세울 더피(두애란), 병원을 운영할 의사 티몬스(김로라)와 간호사 그리어(기안나), 여성 선교를 책임질 비거(백미다), 주일학교를 담임할 그랫(안채륜) 등으로 개척 선교단이 조직됩니다. 개척 선교단 중 1913년 4월 프레스턴과 코잇 가족이 선발로 떠납니다. 그러나, 코잇 가족은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은 사택 서재에서 지내다가 두 아이(네 살, 두 살)가 이질 걸려 죽고, 매곡동 뒷산 ‘아다무락’ 골짜기에 묻히게 됩니다. 그때 부인도 병에 걸려 회복이 어려웠지만, 선교사들과 교인들의 “뜨거운 기도”로 겨우 회복되었습니다. 코잇 부인을 위한 ‘중보기도’는 개척 선교사들의 각오를 굳히고, 선교사와 한국인 사이에 깊은 연대감을 형성합니다. 이 사건은 ‘불세례’(baptism of fire)로 불리워졌는데, 남편과 딸을 병으로 잃고도 43년 동안 조선 의료선교를 담당한 로제타 홀을 생각나게 합니다. 순천 선교부는 순탄하게 발전합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신유의 은사를 주셨으나, 인류에게 이성을 통해 의학을 발전시키고 질병을 과학적·체계적으로 치료토록 하였습니다. 순천 선교부는 주님의 이 뜻을 깨닫고 과학적·체계적인 선교를 시행함으로, 많은 의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행28:8)

전도서3:11절 (2)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만드시고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가 없다.”(현대인의성경)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본문을 중심으로 생각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로운영되는 세상의 관리자로 창조된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즉 영원한 것을 깨닫고 거기에 도달하려는 본성을 받았습니다. ‘영원’은 히브리어 ‘올람’의 번역으로, ‘올람’은 ‘영원(eternity)’혹은 ‘무지(ignorance)’의 뜻을 갖습니다. 만약 ‘무지’로 본다면, “사람의 마음속에 무지를 넣어주셔서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이해할 수 없다”(NET)가 되나, 문맥과 용례상 ‘영원’이란 의미가 압도적입니다. 문제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에 인간은 좌절한다는 점입니다. 존 야릭의 글입니다. “인간은 마음속에 “영원”을 품고 있다 – 그의 창조주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만드셨다. 인간은 자신의 단편적인 지식을 넘어 전체 구조의 더 깊은 의미를 깨닫고 싶어 하지만, 창조주는 피조물이 자신과 동등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를 위한 주된 장치는 ‘시간이란 베일”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 이상의 것의 존재를 알지만, 현재를 넘어 ‘영원’의 차원에서 역사와 사물을 볼 수 없습니다. 이는 인간이 당신을 경외하기 원하신 하나님의 뜻 때문이나(전3:14), 남 다른 지식과 힘을 부여받은 사람들의 교만과 범죄를 역사는 증언합니다. 은사를 가질수록 더욱 주님을 경외해야 하나 지혜자 솔로몬도 못하였습니다. 기도 이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언1:8)

전도서3:11절 (3)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만드시고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가 없다
.”(현대인의성경)           

본절의 세 번째 부분, “그러나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가 없다.”를 통해 인간의 유한성을 생각해 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관리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당연히 맡은 부분을 아는 것이지 창조주처럼 전부를 통째로 알지 못합니다. 문제는 불법적인 방법이지만 선악과를 먹으면 전부를 알 수 있다고 속인 뱀의 간계에 넘어간 것입니다. 관리자에서 주인의 위치로 올라가려는 마음 그것이 타락의 핵심이고 모든 불행의 출발점입니다.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고 있어 모든 동물보다 낫지만, 반면 유한성을 자각하지 못하면 불행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유한함을 인식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과 바른 교제를 갖기 때문입니다. 그 유한함은 죽음과 시간이란 두 개의 베일을 통해 분명히 자각되는 것은 내일 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든 사람은 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의 과정과 결과를 영원까지 완전히 아시나, 인간에게 영원의 영역은 오직 추측과 상상의 대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지 영원을 아는 마음을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주님 허락하시면 내가 이것 저것을 해 보리라”는 겸손한 태도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유한성 자각의 표시요 실패를 덜 합니다. 실로 사람이 유한성을 깨달으면 삶에 대한 바른 통찰을 갖게 됩니다. 이어지는 12절-15절에서 솔로몬은 바로 그점을 논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16:9).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두메아 사람들(3)
마태복음 2:16절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두메아 사람들의 도시 마레사의 유적들 중 하나는 지하 구조물 안의 올리브 압축실입니다. 방안에는 올리브가 담긴 주머니의 압축을 위한 거대한 돌추들이 널려 있고 다른 쪽에는 연자 맷돌 같은 맷돌들이 놓여 있는데, 여기서 올리브를 으깬 후 바구니에 담아 압축기로 기름을 짜냈을 것입니다. 또한, 바위를 깍아 만든 무덤들(BC 3-1세기), 특히 내부 벽화를 가진 시돈의 아폴로파네스 가족 무덤이 유명합니다. 무덤의 양면에는 시체를 눕힐 수 있는 벽감들, 거대한 항아리, 다양한 신화적 동물들의 벽화가 있습니다. 벽화는 악령을 물리치기 위한 까마귀들, 하데스를 지키는 머리 셋 달린 거대한 맹견 세르베루스, 사후세계를 상징하는 붉은 불새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도시 마레사는 알렉산더 대왕을 거쳐 시리아의 셀루시드 왕조의 통치를 받았으나, 곧 유대인들이 세운 하스모니아 왕조(BC164-63)의 지배 하에 들어갑니다. 하스모니아 왕조는 구약시대의 영토를 다시 차지하고 이두메니아 사람들을 유대교로 강제 개종시켜 큰 원성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전 63년 폼페이우스의 로마군에게 정복당한 후 이두메아 계통의 친 로마 정치인 헤롯이 유대지역을 통치합니다. 헤롯(BC37-4)은 잔혹한 통치를 펼쳤으나, 정치 안정과, 경제 발전, 성전과 가이샤르 항구를 세운 뛰어난 건축가였습니다. 헤롯 통치의 말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태어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시작합니다. 세상은 칼과 권력으로 확장하나 천국은 회개와 믿음 그리고 사랑으로 세워갑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

사도행전10:34,35절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가장 위대한 결단”(1982년)는 책에서 구봉서 등 총 24명이 간증합니다. 패턴은 불신자로 혹은 형식적 믿음으로 살다가 인생의 풍랑을 만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축복 받은 내용입니다. 가난과 병은 이 세대가 믿음을 갖게 된 계기입니다. 서두에 등장하는 김수웅 장로도 같습니다. 그는 불신자였던 젊은 시절 소금 장사를 하다가 사기를 당합니다. 전 재산을 잃고 엄청난 빚 때문에 정신병원에 입원하자, 담당 의사는 “종이 한 장은 쉽게 뚫리지만 종이 뒤에 벽이 있으면 뚫리지 않습니다. 믿음은 벽과 같은 것이니 절대자인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는 신앙의 권유를 합니다. 그는 자진하여 부흥회에 참석하고 주체할 수 없는 회개의 눈물과 함께 주님을 영접합니다. 이후 우연히 은사를 만나 30만원을 지원 받고 사업을 재개하여 성공하는데, 이 과정에서의 우여곡절과 주님의 돌보심을 간증합니다. 김 장로는 믿기 전에도 효자였으며, 믿고 나서는 더 효자가 되었습니다. 백부장 고넬료는 이방인으로 경건하고 많은 자선을 행하자, 그를 눈여겨 보신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사 베드로를 청해 복음을 듣도록 지시하십니다(행 10장). 오늘 본문에 나온 베드로의 고백과 같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이지만, 불신자 중에도 겸손히 부모공경과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은 부르심에 좀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하물며, 성령께서 그 마음에 오신 신자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더욱 더 힘써서,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은 것과 택하심을 받은 것을 굳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벧후1:10,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