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6/10/12-16)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9)
왕기상 6:4절
“성전을 위하여 창틀 있는 붙박이 창문을 내고”

‘ㄱ’자 예배당은 자연석을 다듬어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사각기둥을 세웠으며 하인방 아래 환기 구멍을 내고 중인방과 상인방 사이에 창문을 해 달았습니다. 지붕은 홑처마에 우진각 지붕 형태를 하고 있는데 처음엔 초가로 해 올렸다가 1920년대 함석지붕으로 바꾸었으며 해방 후 지금의 시멘트 기와로 올렸습니다. 남쪽과 동쪽의 출입문은 여닫이 격자무늬 종이문입니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 통마루 바닥에 오르면 천장 가구가 그대로 드러난 연등천장에다 칸막이가 없는 통간(通間) 건물이 주는 시원함에 압도됩니다. 다만 천장과 벽면에 칠한 흰색 수성페인트 가루 때문에 들보가 뿌옇게 변한 것이 아쉽습니다. 천장 가구는 납도리 5량식(= 깍은 단면이 납작한 도리가 5개)인데 지붕 용마루를 받치고 있는 마루도리와 가운데 중도리를 겹으로 올린 것이 탄탄한 느낌입니다. 휘어 자란 아름드리 소나무를 자연 그대로 다듬어 올린 대들보가 육중합니다. 건물 북서쪽 모서리에 있는 강단(5평)은 2단으로 꾸며 결과적으로 3층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 전래의 제단 구조이면서 동시에 뜰-성소-지성소로 이루어지는 구약 성막의 3중 구조를 상징합니다. 복음의 토착화를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백향목, 금장식, 성소와 지성소의 3중 구조, 이스라엘의 건축 전통이 총동원된 건축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의 진정한 가치는 하나님의 임재에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이스라엘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냈듯, 복음은 ‘ㄱ’자 예배당이란 한국의 전통 건축 속에서뿌리내리고 성령께서 임재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전도서 10:3절
“우매한 자는 길을 갈 때에도 지혜가 부족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가 우매함을 말하느니라”

지혜로운 마음은 삶을 바르게 이끌지만, 어리석은 마음은 말과 행동에서 자신의 우매를 알립니다. 이는 길을 걸어가는 작은 행동 속에서도 여실히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매함이란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마음의 결핍,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결핍된 상태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면 삶은 자연스럽게 빗나가고, 그 빗나감은 숨길 수 없습니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걷는 길로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사울은 왕으로서 많은 지식을 가졌지만,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점점 우매함을 드러냈고, 질투와 두려움이 그의 길을 어둡게 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방향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능력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에 있습니다.우리 삶도 같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면 지혜가 행동 속에 드러나고, 작은 선택 속에서도 바른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면 우매함이 말과 행동 속에서 드러나고, 자신도 모르게 잘못된 길을 가게 됩니다. 이 같이 마음은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심축입니다. 지혜는 바로 이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작은 교만, 작은 욕망, 작은 방심이 마음의 방향을 바꾸고, 삶 전체를 뒤흔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일을 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살핍니다. 그때 삶은 오른쪽 길, 즉 하나님 뜻에 합한 길로 나아갑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4:23).

전도서 10:4절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손함이 큰 허물을 용서 받게 하느니라”

본절은 실천적 잠언으로 지혜가 실제 삶 속에서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전도자는 “지도자가 화를 낼 때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말하며, 분노한 상관이나 권력자 앞에서 지혜로운 태도를 취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고대의 궁정 지혜와 연결되며, 잠언과 다른 지혜문학에서도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롱맨은 이 구절을 “분노한 지도자 앞에서 부드러운 태도가 갈등을 해결한다는 실용적 지혜”로 설명합니다. ‘공손함’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페’는 ‘온유함’을 나타냅니다. 이는 단순한 부드러움이 아니라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황을 치유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히브리어 어근이 ‘치유하다’(rpʾ)와 ‘가라앉히다’(rph) 사이에 걸쳐 있는 것도 이중적 의미를 암시합니다. 즉, 온유함은 관계를 치유하고, 분노를 가라앉히는 힘을 가진 태도입니다. 전도자는 또한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담습니다. 첫째, 도망치거나 회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회피는 지도자의 의심을 더 키우고 분노를 악화시킵니다. 둘째, 침착함으로 상황을 안정시키라는 뜻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위기 속에서도 마음을 지키고, 부드러운 태도로 갈등을 완화합니다. 전도서 8장 2–9절은 “왕의 분노를 피하라”고 말하는 것과 모순처럼 보이지만, 상황이 다릅니다. 8장은 일반적 권력의 위험을 말하고, 10장은 이미 분노가 자신을 향한 상황입니다. 본절을 요약하면, “지혜는 힘 있는 자 앞에서 두려움이나 충돌이 아니라, 침착함과 온유함을 드러낸다.” 이것이 지혜자가 가는 오른 쪽 길입니다(잠10:2).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언15:1).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가이사랴(9)
사도행전 9:30절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주후 69년 베스파시아누스가 가이사랴를 유대의 수도로 삼은 이후, 이 도시는 로마 권력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주후 70년 디도의 예루살렘 정복을 기념하기 위해 가이사랴에서는 대규모 검투사 경기가 열렸고, 고고학적 기록과 요세푸스에 따르면 약 2,500명의 유대인이 이 경기장에서 학살되었습니다. 가이사랴의 경기장과 원형극장은 로마의 잔혹한 오락과 제국의 힘을 드러내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은 이 도시가 단지 로마의 도시만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가이사랴에는 초기 기독교의 흔적이 깊게 남아 있습니다. 발굴된 주후 6세기 교회 유적,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집터, 그리고 초대교부 오리겐과 유세비우스가 활동했던 도서관·신학센터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오리겐은 이곳에서 성서주석과 신학 작업을 완성했고, 사도시대부터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기까지의 초대 교회의 역사를 쓴 유세비우스는 가이사랴의 주교였습니다. 또한 가이사랴 항구 주변에서는 로마 총독부 건물과 바울이 갇혔던 감옥으로 추정되는 공간이 발견되어, 사도행전의 역사성을 뒷받침합니다. 가이사랴는 바울이 유대인의 위협을 피해 도망한 도시였고(행 9:30), 로마로 가기 전 2년 동안 복음을 증언한 자리였으며(행 24장), 베드로가 이방인(고넬료)에게 처음 침례를 베풀었던 곳입니다(행 10장). 로마의 피비린내 나는 경기장이 있던 도시가, 불과 100여 년 후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음은 고고학과 성경이 함께 증언하는 놀라운 역사의 반전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만유의 주로서 통치하심을 믿어야 변화하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5:5).

「빵, 자유 그리고 복음」
요한복음 8: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 땅의 소산을 먹은 다음 날, 만나가 그쳤습니다. 이제 약속의 땅에서 빵과 자유를 얻으려면 싸워야 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빵’을 얻기 위한 투쟁의 역사입니다. 고대부터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에게 호소했고, 종교는 죄와 죽음뿐 아니라 ‘빵’의 문제와도 깊이 결부되었습니다. 그러나 ‘빵’의 문제는 곧 ‘자유’의 문제입니다. 또스또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이 재림 예수에게 한 말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원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유의 무거운 책임을 견디지 못해 빵과 안전을 제공하는 권위에 자신을 맡기려 한다. 그런데 네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기에 인간은 불행해졌다.” 대심문관의 논지는 분명합니다. 인간은 자유보다 빵을 택하고, 진리보다 안정을 택하며, 결국 스스로 속박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정반대의 길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빵 때문에 자유를 포기하는 존재가 아니라, 진리를 통해 참된 자유를 누리는 존재임을 말씀하십니다. 즉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은 생존 문제의 부정이 아니라, 인간은 빵을 넘어서는 존재라는 선언입니다. 복음은 빵을 주되 자유를 빼앗지 않으며, 자유를 주되 빵 문제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알아야 자유를 얻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결국 ‘빵, 자유, 그리고 복음’은 인간이 무엇을 의지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질문입니다: 인간 자신이냐 하나님이냐?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6).

매일묵상(2026/10/5-9)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9)
고린도전서 3: 16절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본문은 1908년 4월 3일, 금산교회 ‘ㄱ’자 예배당 여자 석 상량문에 기록된 성경구절입니다. 이후 80년이 지나 새 예배당을 지을 당시 오래된 ‘ㄱ’자 예배당을 헐고 그 자리에서 새 예배당을 짓자는 교인도 있었지만, 이인수 목사는 ‘문화적 가치가 있는 ‘ㄱ’자 예배당을 그대로 보존하고 새 예배당을 지으려 하니 도와 달라’고 해야 모금도 될 것이라며 교인들을 설득해서 교회 앞마당 유광학교의 자리에 새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1988년 총 6천만 원 들여 벽돌 예배당(78평)을 짓자 교인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ㄱ’자 예배당은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상당합니다. 모악산 너머 배재에 있던 전주 이씨 집안의 재실을 옮겨다 지은 것이라는데 건물 구조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중부지방의 단층 고패집 형태입니다. 남북으로 다섯 칸 집을 앉히고 북쪽 모서리에서 동쪽으로 두 칸 집을 이어 붙여 외형으로 보면 ㄱ자를 뒤집어 놓은 형태인데 모두 합쳐 27평입니다. 전라북도 역시 그 가치를 인정하여 1997년 도지방문화재 136호로 지정하였습니다. 1908년에 세워졌으나 아직도 주일학교 교육관 등으로 사용됩니다. 바로 이웃한 천년 고찰 금산사에 비해, 금산교회의 ‘ㄱ’자 예배당은 작고 초라해 보였지만, 그 안에는 118년의 신앙의 흔적, 박해와 혼란을 견딘 믿음, 복음의 씨앗을 지켜낸 공동체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이의 보존은 단순한 건물 보존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작은 공간을 통해 이루신 은혜의 역사를 기억하고 이어가려는 신앙적 선택입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13:32).

전도서 10:1절
“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느니라”


본절은 전도서 9장 마지막 절, “지혜는 무기보다 강하지만,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뜨린다”(9:18)는 말씀을 일상적 이미지로 구체화합니다. 이는 “작은 악이 큰 선을 망가뜨리는 원리를 가장 생생하게 드러낸 구절”(롱맨)입니다. 전도자는 먼저 일상적이고 매우 구체적인 이미지를 제시합니다. 향기로운 기름 속에 작은 파리 한 마리가 떨어지면, 그 귀한 기름 전체가 악취로 변하는데, 지혜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지혜와 영예는 향기로운 기름처럼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단 한 조각의 우매, 단 한 번의 어리석은 행동, 단 한 사람의 잘못이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나아만의 의복과 은에 대한 탐욕 때문에 부패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으며, 아간의 금과 의복에 대한 탐욕은 전 이스라엘을 패배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끈질긴 유혹을 이겨내었습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다니는 영전에서 틈을 보이면 죄악이 들어옵니다. 무릇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또한, 오늘날도 우리가 쌓은 모든 선과 업적이 단 한 번의 실수나 어리석은 행동으로 무너질 수 있으므로 늘 겸손하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말씀은 큰 위로가 되는데, 지혜와 존귀도 적은 우매로 무너진다는 전도서의 허무가 복음의 능력으로 극복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전도서 10:2절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

본절은 지혜와 우매의 차이를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이미지로 보여줍니다. 지혜로운 자는 오른쪽으로, 우매한 자는 왼쪽으로 간다는 전도자의 말은, 단순한 방향의 차이가 아니라, 삶의 방향성과 존재의 질을 가르는 근본적 차이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롱맨은 이 절을 “지혜와 우매가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는 사실을 두 시각에서 보여주는 전형적 대구 잠언”으로 설명합니다. 오른쪽과 왼쪽은 고대 세계에서 종종 선과 악, 안정과 불안, 능력과 무능을 상징했습니다. 비록 전도자가 이 상징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지혜가 우월하고 우매가 열등하다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지혜는 삶을 바르게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가나, 우매는 삶을 빗나가게 하고 파괴로 이끕니다. 지혜와 우매는 단순한 성향의 차이가 아니라, 삶 전체를 다른 길로 이끄는 방향성의 차이입니다. 여기서 지혜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지혜는 단순한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지혜는 하나님을 향한 방향이며, 우매는 자기 중심의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마음은 오른쪽으로—하나님을 향한 길로—나아가지만, 우매한 마음은 왼쪽으로—자기 욕망과 죄의 길로—흘러갑니다. 룻기에는 룻과 오르바라는 두 여인의 선택이 등장합니다. 오르바는 자신의 길—익숙함과 안전을 향한 길—로 돌아갔습니다. 그 길은 왼쪽의 길처럼 보입니다. 반면 룻은 하나님을 향한 길—믿음과 헌신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은 오른쪽의 길이었고, 결국 그녀는 다윗과 메시아의 계보에 섰습니다. 두 사람의 방향의 차이가 인생 전체, 나아가 영원한 운명까지 바꾸었습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가이사랴(8)
사도행전 12:23절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로마의 극장은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라, 제국의 권력과 문화를 드러내는 상징적 공간이었습니다. 그리스가 자연 언덕을 활용해 연극을 했다면, 로마는 그 언덕을 건물로 재현하여 계단식 관중석과 웅장한 무대를 갖춘 극장을 만들었습니다. 헤롯대왕은 로마의 건축 문화를 유대 땅에 이식하며 가이사랴에 3,500명을 수용하는 대형 극장을 세웠습니다.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이 극장은 로마식 반원형 구조, 무대 뒤편의 장식벽, 그리고 귀족석을 갖춘 전형적인 로마 극장의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극장이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연설하던 장소로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12장 역시 헤롯 아그립바 1세에 대하여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가이샤라의 극장 중앙에는 귀족과 고위층이 앉던 특별석이 있었고, 헤롯 아그립바(1세)는 예루살렘에서 야고보를 참수하고 가이사랴로 내려왔다가 이 자리에서 연설하였습니다(행12:19-23). 오늘날 가이사랴 극장은 발굴과 복원을 통해 거의 완전한 형태로 서 있으면서, 현대 공연도 열리는 살아 있는 유적이 되었습니다. 고대의 돌과 계단은 여전히 그 시대의 권력, 영광, 그리고 심판의 흔적을 품고 있습니다. 왕이 연설하고, 백성이 환호하고, 권력이 빛나던 공간이었으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헤롯의 교만을 꺾으셨습니다. 본절은 그 심판을 증언합니다. 헤롯 아그립바(1세)의 연설을 듣고 백성들이 “이것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소리다!”라고 외쳤을 때, 헤롯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습니다. 주의 사자가 치자 벌레에게 먹혀 죽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떡보다 말씀」
마태복음 4:4절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이집트 혁명의 불씨는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빵을 달라”는 절규였습니다. 러시아의 밀 수출 중단으로 빵값이 폭등하자 민심은 폭발했고, 30년간 권력을 잡았던 무바라크는 무너졌습니다. 빵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 필요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먹기 위해 일하고, 가족을 위해 땀을 흘립니다. 성경도 죄 이후 인간에게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라”고 말씀합니다(창 3:19). 그러므로 노동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삶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주리신 예수께서 마귀에게 대답하신 본문의 취지는, 떡은 필요하나 떡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신을 위한 떡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더 필요합니다. 이는 떡이 우리의 하루를 연장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 하루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하되 노동을 하나님보다 앞세우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땀을 흘려도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천지의 주인을 아는 우리의 노동은 두려움에 매인 노예의 일이 아니라 감사가 담긴 섬김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떡을 얻기 위해 일하지만, 마음까지 떡에 빼앗기지는 않습니다. 손에는 일을 붙들고,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떡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떡보다 더 귀한 생명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노동은 감사가 되고, 우리의 하루는 예배가 됩니다. 우리는 떡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떡을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6:11).

매일묵상(2026/9/28-10/2)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8)
고린도후서 4:8절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바알숭배가 이스라엘을 뒤덮은 시대, 왕도, 백성도, 제사장도 모두 혼합주의에 빠졌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엘리야 한 사람을 세우사 당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금산은 미륵 불교, 증산도 신자들이 자주 찾는 종교성지입니다. 강일순의 무덤이 있는 모악산 ‘성지’에는 증산도 계열 교단이 50여 개에 달합니다. 미륵 불교의 본산인 금산사를 찾는 불교인들도 많습니다. 금산리 주민 가운데 70% 이상이 불교나 증산교, 혹은 도덕교, 용화교 같은 신흥종교를 신봉합니다. 1994년 재부임하여 2019년 은퇴한 이인수 목사는 “온갖 사교(邪敎)와 전쟁하는 각오로 목회를 한다”고 말합니다. “제가 이곳에 전도사로 부임해 와 보니까 젊은이는 아예 없고 옛날 교인이나 그 후손들도 대부분 외지로 나가고 없었어요. 다른 곳에선 이미 사라진지 오랜 ‘ㄱ’자 예배당에서 노인 열 서너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데 착잡하더군요. 6·25사변을 전후로 3년 동안 예배당이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쓰인 적이 있는데…창문틀에 인민위원회 위원 같은 명단과 ‘김일성 장군 만세’, ‘공화국 쟁취’ 같은 낙서가 그대로 남아 있더군요.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새 예배당을 짓기로 하고 모금운동을 하여 1988년 78평 벽돌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ㄱ’자 예배당은 역사적 유물로 보존시켰는데 그 가치를 깨달은 이인수 목사의 공헌입니다. 금산의 혼란 속에서 교회가 다시 서고 복음이 보존된 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참된 분을 알게 하신 은혜 때문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전도서 9:18절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

본절은 지혜의 우월성과 취약성을 말합니다. 지혜는 무기보다 강합니다. 작은 성읍을 구한 것도 지혜였습니다.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뜨린다”는 말처럼 취약한 면도 있습니다. 탁월한 지혜조차 인간의 죄성과 어리석음 앞에서는 언제든 파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아간 한 사람의 탐욕이 이스라엘 전체를 패배로 몰아넣었습니다. 아이 성은 작은 성이었고, 이스라엘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아간의 죄 하나가 공동체 전체를 무너뜨렸습니다. 지혜로운 전략도, 강한 군사력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도 아간 한 사람의 죄가 파괴한 것입니다.그러나 성경은 또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의 죄가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한 사람의 순종은 공동체를 살릴 수 있습니다. 예로서, 노아 한 사람의 순종으로 그의 가족은 홍수에서 구원받았습니다. 복음은 이 진리를 환히 드러내는데, 그리스도의 순종 하나가 인류 전체를 살렸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지혜의 절정이며,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 자리입니다. 이 지혜는 무기보다 강하고, 죄보다 깊으며, 죽음보다 강합니다. 이 지혜를 붙드는 자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이 마음에서 희미해지면, 이 지혜도 삶의 능력이 되지 못하고 옛이야기로 남습니다. 그때 신앙은 의의 열매를 잃습니다. 참된 지혜는 주님을 경외하며 복음을 실천하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만이 죄의 파괴력을 이기고, 공동체를 세우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1:10).

전도서 9장 전체의 묵상
전도서 9:1절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9장에서 전도자는 먼저 인간의 삶을 평가합니다(1–10). 그는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악한 자 모두가 동일한 결말—죽음—을 맞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죽음은 인간의 모든 수고와 성취를 무의미하게 만들며, 인간의 지혜와 경건함조차 죽음 앞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이 냉정한 현실 속에서 전도자는 역설적으로 “오늘의 기쁨을 붙들라”고 권면합니다. 이어 전도자는 인간의 삶이 능력이나 지혜가 아니라 ‘때와 우연’에 의해 좌우됨을 말합니다. 빠른 자가 경주에 이기지 못하고, 강한 자가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며, 지혜로운 자가 성공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인간은 그 때를 알지 못합니다. 인간의 통제력은 극히 제한적입니다(11-12). 끝으로, 지혜의 한계가 언급됩니다. 지혜는 성읍을 구할 만큼 강력하지만, 가난한 자의 지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잊혀지므로, 지혜 역시 허무합니다. 더구나 무기보다 강한 지혜조차 인간의 죄성과 어리석음 앞에서는 언제든 파괴될 수 있습니다(아간의 죄). 누가복음 12장은 주인의 귀가 때를 모르는 종들에 관한 비유가 있습니다. 지혜로운 종은 언제든 주인을 맞을 준비를 하며, 주인의 뜻을 따라 성실히 살아갑니다. 반면 어리석은 종은 주인이 늦게 올 것이라 생각하고 방탕하게 살다가 돌연히 심판을 맞습니다. 죽음은 예고 없이 오고, 인간은 때를 알지 못하나, 주님을 경외하는 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전9:1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가이사랴(7)
이사야 35:6절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이스라엘은 겨울에만 비가 오는 건조한 기후 때문에, 도시가 성장하려면 반드시 안정적인 수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이사랴는 샘이 없는 지역이라 초기에는 빗물과 작은 우물에 의존하였습니다. 인구가 늘어나자 헤롯대왕은 도시의 생존을 위해 로마식 도수교를 건설했습니다. 수로는 마치 길고 좁은 다리를 연상케 합니다. 진흙벽돌을 쌓아 만든 다리는 아래 부분은 아치 형태로 연결되어 있고 윗부분은 현대의 수로처럼 물이 지나갈 수 있는 수관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수로는 갈멜산 기슭에서 시작해 가이사랴까지 21km를 이어졌으며, 아치형 기단 위에 물길을 올려 중력만으로 물을 흐르게 하는 정교한 기술이 적용되었습니다. 조사에 따르면 수로의 기울기는 1km당 약 1m 내외로 조정되어, 당시로서는 놀라운 정밀도입니다. 도시가 더 성장하자 주후 130년경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탄니님 강에서부터 새로운 수로를 건설해 기존 헤롯 수로와 연결했고, 물길의 폭을 확장했습니다. 이 두 수로는 십자군 시대까지 사용되면서 가이사랴의 생명줄 역할을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해안가를 따라 길게 서 있는 수로의 잔해는 고대 로마 공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이며, 성지순례객들에게는 좋은 포토존이 되어 주기도 합니다. 고고학은 말합니다. “가이사랴는 물이 없던 도시였지만, 누군가의 헌신과 기술이 물을 흐르게 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물이 없는 자리에서도 생명의 역사를 흐르게 하신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5).

하나님의 능력을 믿자!
시편 121:2절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인간의 삶을 “실천적 사랑을 배우는 공간”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인간은 행복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행복에 이른다”고 쓰고 있습니다. 인문학은 이 말을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설명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 불가능에 절망하지 말라”는 진리를 가르칩니다. 이 경우 고통은 인간의 힘을 드러내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김혜자 부친 김용택 선생(한국의 2호 경제학박사)은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정부의 요직을 맡았지만, 네 번의 국회의원 낙선 끝에 판잣집으로 내려앉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만한 집도 없는 친구가 많다. 대붕의 큰 뜻을 너희가 어찌 알겠느냐.” 하면서 청렴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1984). 여러분, 무엇을 위해 살아갑니까? 대붕의 길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 자녀, 교회, 이웃, 나라와 민족을 섬기는 삶, 그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삶입니다. 그 길에는 위험이 도사립니다. 손해도 있고, 실패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근거로 믿음을 세웠듯, 우리는 만유의 머리되신 부활하신 주님을 근거로 안심합니다. 우리는 대붕의 큰 뜻을 다 알지 못하나, 한 가지는 압니다.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는 죄의 길에서 돌이키고, 불평의 길을 버리고, 절망의 길에서 일어나 주님을 따르는 길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이며 능력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사랑을 선택하는 삶, 그 길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길입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