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9/22 – 26)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여수 애양원(4)
시편 84: 5절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1920년 대 나환자의 수는 6백여 명에 이르자, 광주나병원의 소재지 봉선리는 비좁았습니다. 더구나 “봉선리 채소밭에서 난 채소에 문둥이 균이 붙어 있다.”는 소문이 돌자 광주 사람들의 태도는 확 달라졌습니다. 선교부는 나병원 이전 계획을 수립하고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여수반도에 위치한 율촌면 신풍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진집사의 설명입니다. “일제시대 간척 사업을 혀서 지금은 육지처럼 자유롭게 드나드는 곳이 되었지만 그때는 밀물 때 바닷물이 들어오면 섬이 되었다더만요….애장살이라 혀서 애가 죽으면 갖다 버리는 곳이었응께 헐값에 땅을 살 수 있었을 겁니다.” 1927년 20만 평이 넘는 신풍리 땅을 확보한 후 2년에 걸쳐 은밀히 병원과 환자를 옮겼는데, 여수나 순천 사람들이 알면 소동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순천(or 여수)나병원 시대가 열렸습니다. 1935년 명칭 공모 결과 ‘애양원(愛養院)’이라 하였으나, 선교사들은 기부자의 이름을 따 ‘비더울프요양원’으로 해방 후에는 ‘윌슨요양원’으로 불렀습니다. 누가 가난과 질병을 축복이라고 하겠습니까만, 주님은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눅6:20)이기 때문입니다. 가난·질병·고통 등을 원하는 사람은 없지만, 살다보면 이 과정을 통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에 서서 신실하게 살아가면 그런 삶 자체가 의로운 제사입니다. 하물며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겨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면 그 의는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보아스가 그렇습니다.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시112:9).

전도서 4:15절
”모든 사람들이 왕이 된 그를 따랐다.”(쉬운성경)

13절, 14절, 15절은 각각 다른 왕을 언급합니다. 13절은 늙고 어리석은 왕, 14절은 가난하나 지혜로워 그 왕을 대체한 젊은 왕, 15절은 그 젊은 왕을 대신한 세 번째 왕으로서, 전도자는 이 세상이 주는 영광은 일시적이며 궁극적으로는 의미 없음을 말합니다. 본절의 요점은 14절의 젊은이가 어리석은 늙은 왕을 대신하여 권좌에 오르나 단명하였고, 두 번째 젊은이가 그를 대신하여 권좌에 오르니 모든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왕에게 일시적인 성공을 가져다 줄 수 있지만, 그의 가장 큰 소원인 장기집권과 혈육에 의한 계승을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조선 문종은 젊고 지혜로워 세종 말기 8년을 섭정하였으나, 병약하여 재위 2년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죽기 전 어린 단종(11살)을 신하들에게 부탁하나, 동생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등극하니 그가 세조입니다. 그의 13년 간의 통치는 왕권 강화와 제도 정비에 힘썼으며 《경국대전》 편찬을 시작하는 등 조선의 법치 기반을 마련했지만, 즉위 과정에서의 정변과 조카 단종의 죽음 등은 역사적 논란을 남겼습니다. 또한, 북왕국 최초의 왕 여로보암의 22년 간의 통치는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였다”는 열왕기 기자의 평가를 받았고, 그의 사후 아들 나답이 계승하나 통치 2년만에 신하 바아사에 죽임을 당합니다(BC 900). 북왕국의 역사 200년은 그야말로 정변의 역사였습니다. 한 역사가는 “신이 가장 미워하는 자들에게 권력을 던져 주사 철저히 파멸케 하신다”고까지 묘사하였는데, 우리는 섬김을 받는 길이 아니라 섬기는 그 길로 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시편62:11).

전도서 4:16절
”그러나 그가 다스리는 무리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이후의 세대는 아무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것 역시 허무한 일이요, 바람을 잡는 것이다.”(쉬운성경)

13~16절을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15절에 등장하는 ‘다음 세대의 젊은이’를 따랐는데, 그는 13~14절의 지혜로운 젊은이를 대신한 인물이다. 그 지혜로운 젊은이는 낮은 신분에서 왕위에 오른 자로, 13절의 늙고 어리석은 왕을 대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언급된 이 인기 있는 왕조차도 결국 백성들은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현실에 직면한 솔로몬이 허무를 느낀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왕이 되는 것 역시 “허무한 일이요, 바람을 잡는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정치 권력은 사람의 인기가 바탕인데, 그 인기는 바람과 같습니다. 한 번 불면 대단하나 곧 사라져 흔적도 없어집니다. 권력을 쫓는 것은 그 바람을 쫓는 것과 같이 무의미합니다. 그것이 노년, 지혜, 인기와 함께한다 해도 소용 없습니다. 과거가 그러했듯,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후대 사람들도 똑 같아서, 처음에는 열렬히 환영했던 자를 곧 싫증내고 외면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처럼, ‘오늘은 호산나 내일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것입니다. 왕들이 자신이 기쁘게 하려 애썼던 백성들에게 이렇게 무시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큰 슬픔입니다. 사람에게는 믿음도, 변함없는 충성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주님은 늘 신실하셔서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만사의 결론을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켜라. 이것이 사람이 해야 할 본분이다.”(전12:13,쉬운성경).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유대인의 도시 베이트 쉐아림
로마서 10:2절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탈무드는 모세오경 다음으로 중요한 유대교 문헌으로 크게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유대교의 구전 율법이 집대성된 문서 ‘미쉬나’(AD200년)이며, 다른 하나는 모세오경과 미쉬나에 주석과 해석을 덧붙인 ‘게마라’(AD500년)입니다. AD 70년 멸망당한 유대인들은 그들의 율법을 문서화하여 유대교와 유대민족을 보존해야만 했습니다. 그 노력이 구전 율법의 편집이었고, AD 220년경 랍비 유다 하나시가 갈릴리 주변 베이트 쉐아림과 찌포리를 중심으로 완성한 미쉬나입니다. ‘베이트 쉐아림’(= 두 개의 문을 가진 집의 뜻)은 나사렛의 남서쪽 25km에 있고 고대 유대인들의 공동묘지가 유명합니다. 랍비 하나시가 묻힌 후에 유대인들의 주요 매장지가 되었고, 유대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율법 중심의 정체성을 보존하고자 했던 곳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율법에 열심인 유대인들을 탄식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부활로 증거하신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힘써 자신들의 해석(=미쉬나)을 따라서 율법의 의를 세우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롬10:4)이 되시므로, 복음의 관점에서 ‘베이트 쉐아림’은 버림받은 율법주의자들의 무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고 섬기려 하면 하나님을 열심히 반대하게 된다는 역설이 바로 ‘베이트 쉐아림’의 존재입니다. 영생은 성경해석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그 본질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교제입니다(요17:3).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경건과 자족, 참된 유익의 길
디모데전서 4:8절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敬虔)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육체의 연습은 건강을 낳지만 그것은 ‘약간의 유익’입니다. 그 반면 경건은 삶의 모든 영역- 가정·직장·인간관계·고난·성공 등 – 에 큰 유익을 줍니다. 경건한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성공 속에서도 교만하지 않으며,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살아갑니다. 이는 그가 모든 환경에서 “하나님과의 바른관계”가 유지되도록 늘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많은 이 세상에서 ‘경건’이 열매 맺으려면 ‘자족(自足)’이 수반되야 합니다. 여기서 “자족”이란 하나님 안에서 충분함을 누리는 마음입니다. 세상은 더 많은 것을 가지라고 말하지만, 자족은 이미 주어진 것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는 능력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진미를 거절하고도 만족했고, 바울은 풍부에도, 궁핍에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들의 경건은 자족을 통해 더욱 깊어졌고, 그 삶은 흔들리지 않는 평안과 능력을 드러냈습니다. 경건은 삶의 방향을 바로잡아 주고, 자족은 그 길을 흔들림 없이 걷게 합니다. 경건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라면, 자족은 그분의 공급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이 둘이 함께할 때, 우리는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더 많은 소유인가, 더 깊은 관계인가. 경건과 자족은 우리를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살아가게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금생과 내생에 모두 유익한 삶, 참된 복의 길입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딤전 6:6).

매일묵상(2024/9/15-19)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여수 애양원(3)
요한복음 16:13절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26년 전 이덕주 교수는 진칠용 집사의 안내를 받아 애양원을 답사하였습니다. 진집사는 1958년 서울서 대학 재학 중 발병하여 애양원에 들어왔습니다. 치료 후 ‘환자 직원’으로 근무하다 은퇴하고 매점을 운영하면서 애양원 역사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이교수가 애양원 역사의 산 증인들을 만나게 하는 등 구석구석을 안내하였는데, 애양원은 이야기와 역사로 가득 찬 곳입니다. 90년 전에도 같았는데, 당시 원장 윌슨(1880-1963)의 선교 편지 중 한 대목입니다. “순천에서 남동쪽으로 14마일 정도 가면 최근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여수항이 나오고 그곳에 730명 환자가 수용되어 있는 비더울프 나환자촌이 있습니다….요양원 부지 안으로 들어서면 수위 조씨를 만나게 됩니다. 조씨는 비록 손은 일그러졌지만 정신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이곳에 수용된 남녀노소 모든 환자들의 이름과 주소는 물론 그들의 가정 내력까지 들려줄 것입니다.” ‘“비더울프요양원”은 일제강점기 당시, 상당한 운영 자금을 기부한 후원자의 이름을 따른 애양원의 또 다른 명칭입니다. 작은 나환자 요양원조차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안내자가 필요하듯, 우주의 전 역사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알고 그분의 뜻을 따르려면 하나님의 영의 가르침과 인도가 있어야만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적용하는 삶이 중심이며, 목적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이란 주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16:14).

전도서 4: 13절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13-16절의 단락은 이미 살펴 본 주제 – “해 아래에서 지혜는 어리석음보다 뛰어나지만, 그 장점들도 결국에는 사라진다.”(2:12-17) – 를 다른 각도에서 예증합니다. 본절은 두 인물을 소개하며3측면에서 대조합니다. ① 사회적 지위: 가난 vs. 왕. ② 나이: 젊음 vs. 노년. ③ 지혜의 유무: 지혜 vs. 어리석음. 지혜와 어리석음의 대조가 핵심으로 그 당시 통념을 깨고 지혜는 나이나 사회적 지위 등 모든 외적 조건을 초월할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통상, 왕은 지혜롭고 존경받는 존재이며, 젊은이는 미숙하고 배워야 할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 단락은 젊음, 가난, 심지어 감옥에 있는 처지조차도 지혜로 극복될 수 있지만, 늙은 왕이라도 지혜로운 충고를 받지 못하면 어리석은 자임을 선포합니다. 충고를 무시하는 태도는 어리석은 자의 명백한 특징이며, 특히 지도자인 왕에게는 치명적입니다. 그는 바벨론 마지막 왕 벨드사살과 같이 왕국을 빼앗길 것은, 충고를 거부하는 지도자는 지도자 자격을 이미 상실하였다고 하나님은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지혜를 ‘듣는 태도’와 깊이 연결짓고 있으며(잠언 12:15), 나이, 지위, 배경을 초월합니다. 가장 어리석은 자는 지혜 중의 지혜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자로서, 그 어리석음은 일시적 실패에 그치지 않고 영원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주님은 이러한 자를 ‘그 믿음을 모래 위에 세운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시험이 닥칠 때 그의 믿음은 쉽게 무너지고 그 무너짐은 심각할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6:46).

전도서 4: 14절
“그는 자기의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났을지라도 감옥에서 나와 왕이 되었음이니라”

13,14절의 주제는 “지혜가 이끄는 인생의 반전”입니다. 서두에 나오는 ‘그’는 13절의 ‘가난하나 지혜로운 젊은이’ or ‘늙고 어리석은 왕’ 중 누구이겠습니까? 만약 전자라면, 그 젊은이는 태어나면서부터 가난하고 감옥이라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했지만 지혜로 왕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단순히 신분 상승을 다루지 않고, “지혜가 인생의 방향을 바꾼다”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요셉의 인생이 비슷합니다. 그는 가난한 집안의 출신도 아니고 감옥에 갇힌 것도 억울한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로 감옥에서 나와 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렸습니다. 만약 후자의 해석이 맞다면, 지금은 늙고 완고해진 왕 역시 한때는 지혜로운 젊은이로서 가난과 감옥의 시절을 겪었지만, 그 지혜로 왕위에 올랐던 인물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그는 점차 완고해졌고, 결국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혜를 상실한 자의 비극입니다. 지혜란 단순히 한때의 능력이 아니라,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실천되어야 할 태도라는 교훈을 깨닫게 하는 대목입니다. 사울 왕이 그 예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을 겸손하게 수용하면서 사무엘의 인도를 따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으나 권세가 강해지자 교만하여 사무엘의 충고를 거절하고 자기 욕심을 따라 통치하였습니다. 결국 왕의 자리는 다윗에게 넘어갑니다. 지혜는 낮은 자리에서도 우리를 높이지만, 교만은 높은 자리에서도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지혜 중의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는 듣고 순종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듣고는 잊어버리는 자입니까?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아합의 므깃도
열왕기상 9:15절
“솔로몬 왕이 역군을 일으킨 까닭은 이러하니 여호와의 성전과 자기 왕궁과 밀로와 예루살렘 성과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을 건축하려 하였음이라”

므깃도는 지중해변에서 동쪽의 내륙으로 연결되는 와디 아라(Wadi Ara)길과 남쪽 이집트에서 북쪽 중동지역으로 가는 ‘바다 길’이 교차하는 지정학적 요지입니다. 솔로몬이 다윗의 왕국을 계승했을 때 그는 분명 이 중요한 도시를 요새화해야만 하였습니다. 따라서, 성서는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을 견고하게 할 때 하솔, 게셀과 더불어 므깃도에 성을 건축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왕상 9:15), 고고학자들은 솔로몬의 병거성을 므깃도에서 정확히 밝혀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합의 시대에 므깃도는 요새화되었고 아합의 건축물 중 상당부분이 솔로몬 시대의 건축물과 겹쳐져 건축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왕국시대의 모습 재현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아합 시대의 므깃도를 들어서면 거대한 돌을 깎아 쌓아 올린 성문을 통과해야만 하는데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성문은 솔로몬 시대와 달리 전체가 ‘4방 성문’이었고, 병거가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넓었습니다. 물론 이중문을 설치하고 앗수르에서 발견된 문들처럼 청동을 입혔을 것입니다. 아합은 22년 동안(BC871-853) 북이스라엘 왕국을 통치하였지만, 성경은 아합을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17:25)로 평가합니다(열상16-22장). 아합은 세속적 관점에서 볼 때 부국강병을 추구한 실용주의적 통치자였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실패한 왕일 뿐입니다. 세속적 성공이 영적 실패를 덮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성공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입니까?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19:24).

히브리서 3:7,8절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흔히 가나안을 천국의 상징으로 이해하나, 가나안은 단순한 미래의 장소가 아닌, 오늘날 신자가 믿음으로 누릴 수 있는 영적 유산의 한 형태입니다(워랜 와이즈비). 히브리서 기자는 광야는 순종을 시험하는 장소로, 가나안은 시험을 통과 시 받는 축복의 상징으로 봅니다. 물론 가나안의 축복은 궁극적인 구원인 부활의 축복을 내포합니다만,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을 따르면,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자 할 때 그 유산은 매우 유익합니다. 그 영적 유산은 이렇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는 광야에서 죽었는데,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신명기는 ‘두 번째 율법”을 뜻합니다.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가 적과 싸워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면 무기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율법에 대한 순종’은 전쟁할 때는 하나님의 도움을 위해, 그후에는 유업으로 받은 땅에 계속 거주하는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광야 여정을 회고하면서 그 율법을 해석·선포합니다(신1:1-8). 슬프게도, 이들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주님을 떠나 우상으로 돌아섰고 모두 쫓겨납니다(BC586). 누구든지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와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삶’이 중요합니다. 부활이라는 완전한 안식이 올 때까지 히브리서 기자는 권면합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3:13).

매일묵상(2025/09/8-12)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여수 애양원(2)
누가복음 10:36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1909년 포사이드가 데리고 온 그 한센 여인을 맡아 돌본 의사는 광주 제중원 원장 로버트 윌슨(29살)이었습니다. 그들은 한센병 여인이 그리스도를 믿는지 아니면 종교가 무엇인지를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포사이드는 ‘조선의 버림받은 나환자를 내버려 둬선 안 된다’는 강한 메시지를 남긴 채 목포로 돌아간 후 그 나환자는 죽었으나, 윌슨은 그 나환자 사역에 40년을 바칩니다. 포사이드는 조선판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고, 윌슨은 강도 만난 자를 맡은 조선판 주막집 주인이라 하겠습니다. 그후 윌슨은 한센인을 위한 숙소와 병원을 세우는데(1913년), 이것이 한국 최초의 나병원 광주 나병원입니다(1936년 여수 애양원으로 개칭). 윌슨은 1948년 은퇴할 때까지 40년 동안 1만 명이 넘는 나환자를 돌보았습니다. 윌슨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그는 주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윌슨이 나환자 사역에 힘을 쏟은 주 목적은 선교 즉, 한센인들의 영혼구원입니다. 둘째, 선배 의료선교사인 포사이드가 길가에 쓰러진 한센병 여인을 데리고 오자, 광주 의료원에 있던 모든 선교사들은 냉담했지만 사랑으로 돌보는 모습이 그의 롤모델이 됩니다. 셋째, 고통받는 나환자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지혜도 생겨납니다. 나환자는 장기간 격리되어 살아야 하기에 농장 등을 가꾸면서 자활 자립이 중요합니다. 애양원은 이런 사업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이 3가지가 필요합니다: ①주님에 대한 사랑, ②이웃에 대한 사랑(지혜), ③그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계기 혹은 롤모델이 그것입니다.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37).

전도서 4:11절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1절은 10절과 함께 9절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두 사람’은 남편과 아내를 지칭할 수도 있지만, 보다 일반적으로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지역은 낮에는 기온이 높지만, 밤에는 급격히 떨어져 춥기 때문에, 야영 시 두 사람이 가까이 붙어 자면 체온 유지에 상당한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한 추위와 따뜻함이란 물리적 현상을 넘어 인간 관계의 유익을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단순한 생존의 지혜를 넘어, 공동체적 삶의 필요성과 동행의 가치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즉,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추위도, 함께할 때 따뜻함으로 바뀔 수 있기에, 고독한 현대인들은 깊은 울림 갖게 됩니다. 고립된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대 속에서, 함께함의 따뜻함은 여전히 유효한 진리이며, 신앙 공동체의 본질을 되새기게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신 모습(막 6:7)은 좋은 예입니다. 홀로가 아닌 함께 걸을 때, 믿음은 더욱 견고해지고 사명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바울 역시 디모데, 실라, 누가와 함께 복음의 길을 걸으며 동역의 힘을 증언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서로의 필요를 채우고 떡을 떼며 교제했던 모습(행 2:42–47)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함께함의 따뜻함이 얼마나 귀한지를 일깨워줍니다. 신앙은 혼자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고 함께 견디며 함께 자라나는 것입니다. 전도서의 말씀은 바로 그 공동체적 믿음의 온기를 우리에게 다시금 불어넣습니다. “서로를 살펴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4,25).

전도서 4:12절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본절은 여행이란 소재를 통해 우정의 유익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또 다시 강조합니다. 옛날에는 도시나 마을을 벗어나면 위험하였습니다. 혼자일 경우 강도들의 표적이 되기 쉽지만, 두 사람이면 맞서고, 세 명 이상이면 이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절은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속담으로 공동체의 힘을 상징적으로 마무리합니다. 이 말씀은 가족이나 공동체 생활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말 것을 시사합니다. 예를 들어, 부부 중 한 사람이 늙거나 병들었을 때 건강한 배우자의 돌봄은 필수적이며, 두 사람 모두 불편할 경우 자녀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인생 동반자 관계가 제공하는 동행, 온기, 안전이라는 막대한 가치를 지닌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말하는 ‘허무함’의 문제를 공동체가 완전히 해결해주지는 못합니다. 결국 인간은 죽기에, 하나님 없는 인생은 본질적으로 허무합니다. 한편, 이 구절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유익을 넘어 신앙 공동체의 본질을 가르쳐줍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 중 하나는 성도들의 유익입니다. 함께할 때 우리는 교제와 위로, 가르침을 통해 서로를 돌보고 많은 유익을 나눌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도와 관련하여 교회는 특별한 응답의 약속이 있습니다(약 5:14–15). 사도행전 12장에서 야고보가 순교하고 베드로가 옥에 갇혀 처형될 위기를 맞았을 때, 교회는 무력으로 대응하지 않고 모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천사를 보내 베드로를 감옥에서 구출하셨습니다. 교회가 기도에 힘써야 하는 이유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므깃도
여호수아 12:21절
“하나는 다아낙 왕이요 하나는 므깃도 왕이요”

본절은 도시 ‘므깃도’가 성서에 처음 등장한 구절로, 가나안 정복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항하였던 므깃도의 왕은 여호수아에게 멸망당합니다. 주전 7000년께부터 시작된 므깃도 언덕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가장 지리적 입지가 좋은 장소로 갈멜산 능선을 타고 동쪽으로 내려가면 이스르엘 골짜기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합니다. 저는 2009년 이스라엘 성지순례 시 방문하였습니다. 므깃도는 이스르엘 골짜기(큰 평야임) 가운데 우뚝 솟은 언덕을 기반으로 요새가 세워졌고, 올라가면 사방으로 이스르엘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누가 보아도 요충지입니다. 솔로몬이 이를 모를리 없어, 므깃도를 철병거성의 하나로 건축하였고, 고대 무역로인 해변의 길이 통과하여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습니다. 또한, 고대 중동의 문서들에서도 므깃도는 자주 전쟁터로 등장합니다. 요시야 왕이 애굽 왕 느고를 막다 전사한 곳도 여기입니다. 따라서, 므깃도는 고대로부터 국가 간 끊임없는 쟁탈 대상되었는데, 자그마치 26번의 도시 층들이 발견될 정도입니다. 고고학자들이 므깃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일찍 발굴에 착수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중 아합 시대 유적들 -성문, 마구간, 요새 구조 등 – 의 발굴은 성경과 고고학을 연결하는 중요한 단서들입니다. 므깃도의 왕은 여호수아가 죽이나, 이 땅을 배정받은 므낫세 지파는 성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이후 므깃도의 실질적 개발과 통치는 용맹한 다윗 왕도 해내지 못하고, 지혜의 왕 솔로몬까지 4백 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공동체의 순종과 지혜는 하나님의 약속 성취에 필수적 요소임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수1:3).

잠언 20:7절
“의인은 흠 없이 살며,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다”(새번역)


지금은 작고하신 100대 부자 중 한 분이 김경일 박사에게 부탁하였습니다. “김교수, 나는 진짜 이 궁금증은 풀고 가고 싶어, 누가 잘될까?”  “어느 집 자식이 잘될까?” 김교수는 연구팀 두개를 선발하여, 첫 번째 팀에게는 전국을 뒤져 ‘그 집 애들은 참 잘돼’라는 말이 회자되는 아이들의 명단을 작성해 오도록 하고, 다음 팀에게는 앞의 팀이 제출한 명단을 주고 이 명단의 공통점을 찾도록 하였습니다. 부모의 학력, 소득, 직업 모든 것이 달랐지만 그 아이들 간에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교수님, 이 명단의 아이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이 아이들의 부모가 다른 집 아이들에게도 따뜻합니다.” 왜 그럴까요? 김교수는 “내 자식이 아닌 남의 자식에게도 밥을 주는 부모! 남의 부하에게도 따뜻한 상사, 다른 학생들에게도 도움을 주는 선생”은 한국의 관계주의 문화를 감안하면 자녀들이 잘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심리학적 근거). 한편, 본절은 의인의 후손이 복을 받는다고 선언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부모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자’고 다짐하며, 부모의 삶을 통해 겸손과 주님 경외하는 법을 배웁니다. 잠언(22:4)은 그들에게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드러내어, 그들의 축복의 원천을 밝힙니다(성경적 근거). 자녀는 부모의 등을 보면서 자란다는 속담처럼, 의인은 자신의 생활방식을 지켜보는 자녀들에게 좋은 롤 모델입니다. 신자의 롤 모델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아직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바라는 형통과 축복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훌륭한 롤 모델입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눅7:35).

매일묵상(2025/9/1 – 5)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여수 애양원(1)
누가복음 10:36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E. 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조선 선교사들이 행한 아름다운 일 중 하나가 한국 나환자 치료의 요람인 애양원의 설립과 헌신입니다. 애양원은 선교사 포사이드(1873-1918)에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09년 포사이드는 선교사 오웬(1967-1909)의 치료를 위해 두 청년의 안내를 받으며 광주로 가던 중 길에 쓰러진 나환자(여자)를 발견합니다. 나환자는 나병이란 강도를 만난 분들입니다. 어느날 자신이 나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면, 그 가정은 슬픔으로 초토화되고, 얼마 후 가정에서 쫓겨납니다. 그리고 구걸하면서 정처 없이 방황하다가 죽습니다. 그 여성 나환자도 같았습니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말에서 내려 나환자를 팔로 안아 말 위에 태우는 과정에서 그녀는 지팡이를 떨어뜨렸습니다. 포사이드는 안내하는 한 청년에게 괜찮다면서 잡아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합니다. 광주로 데려간 그 환자는 얼마 후 죽고 말았지만, 소문을 듣고 나환자들은 광주로 몰려들었습니다. 닥터 포사이드의 선한 행동은 닥터 윌슨 및 여타 선교사들과 최흥종 모두에게 충격을 줍니다. 선교사들은 1911년 환자들을 위한 초가집을 마련했고, 1912년 영국 에딘버러구라협회에서 보내 준 헌금으로 별도 건물을 마련했는데, 이것이 광주나병원의 출발입니다. 닥터 윌슨은 애양원 원장으로 일생 봉직하였고, 지팡이를 잡지 못한 그  청년은 그 일을 계기로 중생하고, 한국 나병환자의 대부가 됩니다 오방 최흥종 목사(1880-1966)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전도서 4:9절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7–8절에서는 가족도 없이 재산만을 쫓는 한 부자의 삶을 통해 인생의 허무를 보여줍니다. 그 허무의 극복은 9–12절에서 제시되는데, ‘협력하는 삶’이며, 9절은 협력의 장점을 강조합니다. 본문에서 ‘두 사람’은 단순히 숫자 ‘둘’을 넘어, 공동체와 협력의 개념을 포함합니다. ‘상’은 히브리어 ‘사카르’에서 유래된 말로, 상급·보상·품삯을 뜻하나, 여기서는 ‘협력을 통한 성공과 열매’를 의미합니다. 인생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문제에 직면합니다.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있지만, 누군가와 함께할 때 더 수월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더 큰 성취감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전도자는 외로움 속에 살아가는 자들, 특히 이웃과의 관계에 무관심한 구두쇠 부자에게 공동체적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대표적인 예는 결혼입니다. 하나님은 결혼 제도를 통해 두 사람이 사랑을 기반으로 가정을 이루게 하신 뒤, 자녀라는 귀한 선물을 주십니다. 이는  부부가 협력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양육하라는 뜻이죠! 따라서, 결혼이란 단순한 제도나 육체의 결합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수단입니다. 전도서의 메시지와 결혼 제도의 본질은 모두 ‘관계’와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웃과 함께 살아갈 때, 우리는 풍성하고 의미있는 삶을 경험하며, 세상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이 교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적용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주님의 뜻을 행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힘을 합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한다면, 주님은 ‘좋은 상’을 주실 것입니다.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잠언 15:22).

전도서 4:10절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본절은 원인 접속사 ‘키’(왜냐하면)로 시작되어, 앞절에서 말한 ‘함께하는 삶의 유익’에 대한 근거를 제시합니다. 본절의 소재는 여정이며, 주제는 단순합니다: “여행 중 넘어지더라도 동반자가 있다면 그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여기서 ‘넘어짐’은 단순히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넘어, 절벽이나 구덩이에 빠지는 심각한 상황을 암시하며, 인생의 고난 전반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확장됩니다. 누구나 살아가며 넘어질 수 있고, 그 순간 곁에 누군가가 없다면 더 큰 낭패를 겪게 됩니다. 본절은 이를 ‘화’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화’는 실패나 외로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세상은 자아 실현과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복이라 말합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세상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 사이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나사로는 병들고 외롭고 가난하게 죽었기에 세상적으로는 실패자처럼 보였지만,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의 가난과 질병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막지 못했습니다. 반면, 세상적 성공을 누렸던 부자는 ‘모세와 선지자’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에 죽어 음부에 떨어졌습니다. 나사로가 병들고 가난하여 도움을 절실히 요청했을 때, 부자는 그에게 선행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행동으로 증명할 수 있는 은혜의 순간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2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아합의 하솔
예레미야 49:33절
“하솔은 큰 뱀의 거처가 되어 영원히 황폐하리니 거기 사는 사람이나 그 가운데에 머물러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리라 하시니라”

솔로몬의 철병거성들 중 하솔은 아합의 시대(BC8세기 중엽)에 확장되었습니다. 특히 하솔 서쪽의 요새는 넓이는 25×21m, 벽의 두께는 2m에 달했고, 거대한 지하 물 저장고를 갖추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비나 물이 부족하여, 물의 확보는 통치자의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그 지하 물저장고는 하솔의 남서쪽에 있으며, 46m 깊이로 암반까지 닿아 있습니다. 갱의 입구는 한 변이 15m의 사각형이며, 총 123개의 석회반죽으로 된 계단이 만들어져 있고, 계단을 내려가면(19m) 비스듬한 경사를 만납니다. 그 경사면 계단을 따라 다시 25m를 내려가면 지하수와 빗물을 모아놓은 저장고가 있습니다. 고대 하솔의 여인들은 물을 길어 항아리에 담아 이고 매일 이 저장고를 오르내렸을 것입니다. 성밖 적들에게 보이지 않는 수자원이었으며 하솔 주민의 생명의 보고였지만,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은 하솔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영적 전쟁의 연속입니다. 이는 성령님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을 만들어 내기 위함이고, 싸움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적 즉 마귀와 그 사자들입니다. 그들은 거짓된 생각을 우리의 머리에 쏘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 무기 및 보호장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 진리와 거룩의 무장 및 믿음의 방패입니다. 주님의 지원을 위해 성령님 안에서 쉬지말고 기도해야죠! 성패는 갈등 속에 숨겨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서(지성), 의와 화평을 만들어 내는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사랑의 의지).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7).

마태복음 5:9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9절의 화평은 복음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구약의 약속된 메시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평을 이루신 사건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화평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힘없이, 그러나 복수를 외치지 않고 의연히 죽어가셨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 15:39)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준비되지 않은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1세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로마와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 파국으로 끝났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인내하며 겸손히 기다리는 자들에게 약속하셨지, 하나님의 손을 억지로 움직여 ‘화평’이라는 자아실현의 목표를 이루려는 자들에게는 아닙니다. ‘화평’이 고귀해도,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단지 자아실현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화평의 모델은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떠난 세상을 다시 당신과 화목케 하시려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값비싼 희생을 치루셨습니다. 갈등 속에서 화평을 만들어 내려면 한 쪽의 희생과 다른 쪽의 인정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세상적 화평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참된 화평은, 마음이 가난하며, 애통하며, 온유하며, 의에 주리며, 긍휼을 베풀며, 마음이 청결한 요소를 다 갖추어야 가능합니다. 그때 우리는 희생을 감내하고 의를 위한 박해로 기꺼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갈등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애쓰며 기도하십시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