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9/22 – 26)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여수 애양원(4)
시편 84: 5절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1920년 대 나환자의 수는 6백여 명에 이르자, 광주나병원의 소재지 봉선리는 비좁았습니다. 더구나 “봉선리 채소밭에서 난 채소에 문둥이 균이 붙어 있다.”는 소문이 돌자 광주 사람들의 태도는 확 달라졌습니다. 선교부는 나병원 이전 계획을 수립하고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여수반도에 위치한 율촌면 신풍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진집사의 설명입니다. “일제시대 간척 사업을 혀서 지금은 육지처럼 자유롭게 드나드는 곳이 되었지만 그때는 밀물 때 바닷물이 들어오면 섬이 되었다더만요….애장살이라 혀서 애가 죽으면 갖다 버리는 곳이었응께 헐값에 땅을 살 수 있었을 겁니다.” 1927년 20만 평이 넘는 신풍리 땅을 확보한 후 2년에 걸쳐 은밀히 병원과 환자를 옮겼는데, 여수나 순천 사람들이 알면 소동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순천(or 여수)나병원 시대가 열렸습니다. 1935년 명칭 공모 결과 ‘애양원(愛養院)’이라 하였으나, 선교사들은 기부자의 이름을 따 ‘비더울프요양원’으로 해방 후에는 ‘윌슨요양원’으로 불렀습니다. 누가 가난과 질병을 축복이라고 하겠습니까만, 주님은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눅6:20)이기 때문입니다. 가난·질병·고통 등을 원하는 사람은 없지만, 살다보면 이 과정을 통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에 서서 신실하게 살아가면 그런 삶 자체가 의로운 제사입니다. 하물며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겨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면 그 의는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보아스가 그렇습니다.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시112:9).

전도서 4:15절
”모든 사람들이 왕이 된 그를 따랐다.”(쉬운성경)

13절, 14절, 15절은 각각 다른 왕을 언급합니다. 13절은 늙고 어리석은 왕, 14절은 가난하나 지혜로워 그 왕을 대체한 젊은 왕, 15절은 그 젊은 왕을 대신한 세 번째 왕으로서, 전도자는 이 세상이 주는 영광은 일시적이며 궁극적으로는 의미 없음을 말합니다. 본절의 요점은 14절의 젊은이가 어리석은 늙은 왕을 대신하여 권좌에 오르나 단명하였고, 두 번째 젊은이가 그를 대신하여 권좌에 오르니 모든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왕에게 일시적인 성공을 가져다 줄 수 있지만, 그의 가장 큰 소원인 장기집권과 혈육에 의한 계승을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조선 문종은 젊고 지혜로워 세종 말기 8년을 섭정하였으나, 병약하여 재위 2년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죽기 전 어린 단종(11살)을 신하들에게 부탁하나, 동생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등극하니 그가 세조입니다. 그의 13년 간의 통치는 왕권 강화와 제도 정비에 힘썼으며 《경국대전》 편찬을 시작하는 등 조선의 법치 기반을 마련했지만, 즉위 과정에서의 정변과 조카 단종의 죽음 등은 역사적 논란을 남겼습니다. 또한, 북왕국 최초의 왕 여로보암의 22년 간의 통치는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였다”는 열왕기 기자의 평가를 받았고, 그의 사후 아들 나답이 계승하나 통치 2년만에 신하 바아사에 죽임을 당합니다(BC 900). 북왕국의 역사 200년은 그야말로 정변의 역사였습니다. 한 역사가는 “신이 가장 미워하는 자들에게 권력을 던져 주사 철저히 파멸케 하신다”고까지 묘사하였는데, 우리는 섬김을 받는 길이 아니라 섬기는 그 길로 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시편62:11).

전도서 4:16절
”그러나 그가 다스리는 무리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이후의 세대는 아무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것 역시 허무한 일이요, 바람을 잡는 것이다.”(쉬운성경)

13~16절을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15절에 등장하는 ‘다음 세대의 젊은이’를 따랐는데, 그는 13~14절의 지혜로운 젊은이를 대신한 인물이다. 그 지혜로운 젊은이는 낮은 신분에서 왕위에 오른 자로, 13절의 늙고 어리석은 왕을 대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언급된 이 인기 있는 왕조차도 결국 백성들은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현실에 직면한 솔로몬이 허무를 느낀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왕이 되는 것 역시 “허무한 일이요, 바람을 잡는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정치 권력은 사람의 인기가 바탕인데, 그 인기는 바람과 같습니다. 한 번 불면 대단하나 곧 사라져 흔적도 없어집니다. 권력을 쫓는 것은 그 바람을 쫓는 것과 같이 무의미합니다. 그것이 노년, 지혜, 인기와 함께한다 해도 소용 없습니다. 과거가 그러했듯,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후대 사람들도 똑 같아서, 처음에는 열렬히 환영했던 자를 곧 싫증내고 외면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처럼, ‘오늘은 호산나 내일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것입니다. 왕들이 자신이 기쁘게 하려 애썼던 백성들에게 이렇게 무시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큰 슬픔입니다. 사람에게는 믿음도, 변함없는 충성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주님은 늘 신실하셔서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만사의 결론을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켜라. 이것이 사람이 해야 할 본분이다.”(전12:13,쉬운성경).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유대인의 도시 베이트 쉐아림
로마서 10:2절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탈무드는 모세오경 다음으로 중요한 유대교 문헌으로 크게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유대교의 구전 율법이 집대성된 문서 ‘미쉬나’(AD200년)이며, 다른 하나는 모세오경과 미쉬나에 주석과 해석을 덧붙인 ‘게마라’(AD500년)입니다. AD 70년 멸망당한 유대인들은 그들의 율법을 문서화하여 유대교와 유대민족을 보존해야만 했습니다. 그 노력이 구전 율법의 편집이었고, AD 220년경 랍비 유다 하나시가 갈릴리 주변 베이트 쉐아림과 찌포리를 중심으로 완성한 미쉬나입니다. ‘베이트 쉐아림’(= 두 개의 문을 가진 집의 뜻)은 나사렛의 남서쪽 25km에 있고 고대 유대인들의 공동묘지가 유명합니다. 랍비 하나시가 묻힌 후에 유대인들의 주요 매장지가 되었고, 유대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율법 중심의 정체성을 보존하고자 했던 곳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율법에 열심인 유대인들을 탄식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부활로 증거하신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힘써 자신들의 해석(=미쉬나)을 따라서 율법의 의를 세우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롬10:4)이 되시므로, 복음의 관점에서 ‘베이트 쉐아림’은 버림받은 율법주의자들의 무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고 섬기려 하면 하나님을 열심히 반대하게 된다는 역설이 바로 ‘베이트 쉐아림’의 존재입니다. 영생은 성경해석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그 본질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교제입니다(요17:3).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경건과 자족, 참된 유익의 길
디모데전서 4:8절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敬虔)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육체의 연습은 건강을 낳지만 그것은 ‘약간의 유익’입니다. 그 반면 경건은 삶의 모든 영역- 가정·직장·인간관계·고난·성공 등 – 에 큰 유익을 줍니다. 경건한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성공 속에서도 교만하지 않으며,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살아갑니다. 이는 그가 모든 환경에서 “하나님과의 바른관계”가 유지되도록 늘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많은 이 세상에서 ‘경건’이 열매 맺으려면 ‘자족(自足)’이 수반되야 합니다. 여기서 “자족”이란 하나님 안에서 충분함을 누리는 마음입니다. 세상은 더 많은 것을 가지라고 말하지만, 자족은 이미 주어진 것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는 능력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진미를 거절하고도 만족했고, 바울은 풍부에도, 궁핍에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들의 경건은 자족을 통해 더욱 깊어졌고, 그 삶은 흔들리지 않는 평안과 능력을 드러냈습니다. 경건은 삶의 방향을 바로잡아 주고, 자족은 그 길을 흔들림 없이 걷게 합니다. 경건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라면, 자족은 그분의 공급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이 둘이 함께할 때, 우리는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더 많은 소유인가, 더 깊은 관계인가. 경건과 자족은 우리를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살아가게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금생과 내생에 모두 유익한 삶, 참된 복의 길입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딤전 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