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6/7/13-17)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서문교회(5)
다니엘 3:17절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국가가 멸망하고, 우상숭배가 강제된 상황 하에서 다니엘은 사자굴을, 세 친구는 풀무불이란 각 시험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이방에 드러냈습니다. 배은희 목사 뒤이어, 전남 옥과 출신 김세열 목사가 부임한 기간은 민족의 수난기였습니다(1936~50년). 1937년 신사참배를 거부한 선교사들이 학교를 폐쇄하고 한국을 떠난 후 교회는 무방비 상태로 일제의 탄압과 통제를 받았습니다. 목사와 교인들이 신사로 끌려 나갔으며 예배당까지 가미다나가 설치되었습니다. 해방과 6·25 전쟁 후 빈번한 장로교회 분열 중에도 서문교회는 ‘보수적’ 장로교 노선을 지켰지만, 일부 교인들은 이탈하고 주변 교회들은 교단을 달리하여 교류를 끊었습니다. 따라서, 서문교회는 전주의 모교회이면서도 장로교 선교부나 다수 교회들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이 같은 시련 속에서 서문교회 예배당과 주변 환경도 많이 변했습니다. 1905년 은송리 ‘선교사 사택’을 옮겨 예배당으로 사용하다가 1911년 건물 오른쪽 모서리에 32평짜리 벽돌건물을 내붙여 ‘ㄱ’자 예배당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고딕’ 붉은 벽돌 예배당(1935년)으로 대체되었고, 고딕 예배당은 지금의 방주형 예배당(1983년, 790평)을 지을 때 헐렸으며, 예배당 옆으로 ‘100주년기념관’이 건축되었습니다(1993년). 서문교회는 일제의 탄압, 신사참배 강요, 교단 분열, 주변 교회의 이탈 등 여러 격변을 겪었지만 믿음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견뎌낸 공동체라 하겠습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14:12).  

전도서 8:13절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전도자는 세상에서 한 가지 모순을 발견합니다. 악인이 때로는 형통하고 오래 사는 것처럼 보이며, 의인은 고난을 겪고 잊혀지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현실은 하나님이 선하시고 정의로우시다는 믿음을 흔들 수 있는 강한 시험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이 모순을 이유로 악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는 현실은 혼란하나 경건한 사람이 더 잘됨을 고백합니다. 악인의 번영은 길어 보이나 실체 없는 그림자와 같을 뿐이고, 하나님을 떠난 삶은 허무로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삶은 작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본절의 긴장과 그에 따른 전도자의 교훈은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비록, 악한 사람이 성공하고, 정직한 사람이 손해를 보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경험지만, 눈앞의 현실만을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그분의 정의는 반드시 세워질 것입니다. 이 진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가장 분명합니다. 의로우신 예수께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악한 자들은 잠시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정의를 세우셨습니다. 사자굴로 던져진 다니엘도 구원받았습니다. 의인의 길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경건한 자가 잘 될 것이다”라는 전도자의 고백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현실의 모순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복된 길입니다. 악인의 번영은 잠시뿐이며 인내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약1:12).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전도서 8:14절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도자는 의인이 악인의 몫을 받고, 악인이 의인의 몫을 받는 현실을 보면서 “이것도 헛되다”고 고백합니다. 전도자의 고민은 단순한 철학적 질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탄식입니다. “왜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가? 왜 악한 사람이 잘되는가?” 전도자는 이 질문을 끝내 해결하지 못한 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사건을 우리 앞에 제시합니다. 바로 스데반의 죽음입니다. 스데반은 의인이었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했고, 지혜와 은혜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말은 의인답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짓 증언을 당하고, 돌에 맞아 죽습니다. 전도자의 말처럼 의인이 악인의 몫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주의 영광을 보고 기쁨으로 죽음을 맞습니다. 또한,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위하여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바울과 베드로의 마지막도 같았습니다. 이런 것들은 부활의 승리를 증언합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전도자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의인이 억울하게 죽을 수 있지만, 그 죽음은 패배가 아닙니다. 악인이 승리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잠시뿐입니다. 스데반은 예수께서 성취하신 부활의 영광을 미리 맛본 것이고, 그의 용서와 기쁨 역시 하나님의 정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현실의 모순은 커 보일 수 있으나, 주님의 정의를 믿고 신실하게 살아야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욥바
요나 1:2절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욥바는 텔아비브에 있는 절경의 도시입니다. 가나안 정복 당시 욥바는 철병거를 보유하여 단 지파는 점령하지 못합니다. 다윗·솔로몬 시대에는 해양 무역 세력인 두로와 시돈의 영향 하에 있어, 무력점령 대신 우호조약을 맺고 욥바를 공동무역항으로 사용했습니다. 욥바가 유대인에게 점령 통합된 때는 1200년 뒤인 마카비 시대(BC 2세기)입니다. 욥바는 항만이 없는 이스라엘을 위한 지중해 항구도시여서 시돈과 두로에서 벌목한 백향목은 욥바를 통해 육지로 들어왔습니다(대하 2:16; 스 37). 이 같이 욥바는 오랜 역사를 가졌고 오늘날까지도 인구가 밀집하여 고고학적인 흔적들은 찾기 어렵습니다. 한편, 이 욥바는 선지자 요나와 관련이 있습니다. 요나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4km 떨어진 가드헤벨 출신입니다. 주님이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명령하셨으나, 그는 불순종하여 정반대 방향의 항구 욥바로 도망쳐서 “다시스로 가는 배”에 승선합니다. 그러나 요나의 배가 폭풍을 만나자 요나는 바다에 던져지고, 이어 물고기 배에 들어가 사흘 밤낮을 지냅니다. 회개한 요나는 다시 니느웨로 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잠시 빗나갈 수는 있어도, 결국 하나님이 예비하신 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겪은 불순종과 징계의 사건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예표로 기록됩니다(마12:40).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도 구속사의 빛으로 바꾸어 내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12:40).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3:6).


믿음과 느헤미야(6)
느헤미야 2:4절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상황에 정통했습니다. 지금 아닥사스다 왕은 예루살렘 지역을 안정시킬 신뢰할 만한 인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왕에게 오해를 받을 수 있었고, 명분도 약했기 때문에 섣불리 총독자리를 요청하지 못했습니다. 총독임명의 결정권은 왕이 아니라 왕을 움직이시는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점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성서적 세계관의 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왕을 통해 주어지며, 왕 역시 존중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그 좁은 계명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왕의 마음은 주님 손에 있다”(잠 21:1)는 말씀을 붙들고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동기는 분명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먼저, 느헤미야는 일의 주관자는 왕 아닥사스다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면서,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도록 왕의 허락을 위해 기도합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전 14:1)는 말씀처럼, 바른 동기를 갖고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느헤미야는 이미 마음으로 총독이 될 것을 결심하고 기도했지만 임의로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림은 무려 넉 달이었습니다.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고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분이십니다(전3:11). 따라서 ‘하나님의 때’를 깨닫기까지 계획을 갖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죠! 넉 달 후 적절한 상황에서 기도는 응답되었고 그는 예루살렘 회복의 핵심 인물로 세워졌습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새번역).

매일묵상(2026/7/6-10)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서문교회(5)
마태복음 13:31,32절
“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김인전 목사 후임으로 경북 경산 출신 배은희 목사가 부임했습니다(1921년). 배은희 목사가 담임했던 15년 동안 꾸준하게 교세가 성장하여 시내 완산교회(1926년), 중앙교회(1930년), 동부교회(1934년) 등을 분립했습니다. 또 서문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전주 기독교청년회와 여자기독교청년회가 조직되었고, 전라도 최초로 전주유치원(1921년)도 설립하였습니다. 배은희 목사는 소외계층 선교에 관심이 깊어 1925년 ‘무산아동’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나중에 숭덕학교가 되었습니다. 또한 1927년 전주 여자기독교청년회가 서문교회 전도실을 빌려 시작한 전주고아원은 1931년 서문교회 옆 골목, 일본인 유흥시설을 인수하였습니다. 이 전주고아원은 ‘처녀 선생’ 방애인의 고아 사랑이 유명합니다. 기전여학교 선생이었던 방애인은 고아원에 지극한 정성을 쏟았습니다. 전주 사람들은 그녀가 고아를 업고 추운 밤길을 가는 모습, 다리 밑에서 거지나 ‘나병환자’를 끌어안고 기도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습니다. 결국 장질부사에 걸려 별세 하였는데(1933년) 당시 나이 스물넷이었습니다. 배은희 목사는 그녀를 ‘조선의 성자’라 불렀습니다. 서문교회는 단순히 교세가 커진 것이 아니라 고아원 설립, 무산아동 학교 설립, YMCA·YWCA 조직, 소외계층 선교, 그리고 방애인의 희생적 사랑 등, 이 모든 ‘사랑의 실천’이 교회의 진정한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13:33).

전도서 8:11절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본절은 악의 번성은 심판의 지연 때문임을 통찰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본래 악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그 마음의 모든 계획이 악합니다(창6:5). 그런데 심판이 지연되면, 그 악은 억제되지 않고 오히려 대담해집니다. 이는 악인은 하나님이 없다거나 혹은 하나님이 보지 않는다고 착각하고 있고, 사회는 악을 제어할 힘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해 아래의 큰 모순”으로 전도자는 개탄합니다. 그러나 심판의 지연이 심판의 부재는 아닙니다. 즉시는 아니라 하더라도 심판은 반드시 오는데,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최후의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히 9:27). 심판의 지연은 하나님의 인내와 주권의 신비에 속합니다. 하나님은 당장 악을 제거하기보다, 때로는 회개할 기회를 주시려고, 때로는 당신의 큰 계획 속에서 심판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제사장 엘리의 악한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예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며, 성막의 여인들과 음행하는 등 성막을 더럽히자, 하나님은 선지자와 어린 사무엘을 통해 엘리 집안의 심판을 거듭 선언하셨지만, 20년을 인내하시면서 회개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심판의 기한이 되자 아벡의 전투에서 두 사람을 함께 죽이시고, 130년 후에 엘리의 후손 아비아달이 왕 솔로몬에 의해 제사장직에서 파직됨으로 엘리 집안에 대한 심판을 완성하십니다(왕상2:27). 심판은 150년에 걸쳐 집행되었습니다. 따라서, 심판 지연 등 큰 모순을 겪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인내와 목적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시편37:9).

전도서 8:12절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본절 전반부는 전절(8:11절)에서 제기된 문제—악인이 심판받지 않고 오히려 장수하는 현실—을 다시 강조하며, 응보의 불일치를 토로합니다. “죄인은 백 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한다”는 관찰은, 전통적 지혜가 가르친 “장수는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교훈(잠 3:2, 16, 18)과 충돌합니다. 이는 단순한 예외가 아니라, 전도자가 반복해서 목격한 현실의 모순입니다. 그러나 후반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라는 전통적 가르침을 되풀이 합니다. 성경학자 롱맨은 이 부분이 전도자 자신의 견해가 아니라 전통적 지혜의 목소리를 인용한 것으로 평가합니다. 즉, 전도자가 평소 사용하는 동사 “알다(야다)”의 분사형은 이례적으로써, 고대 지혜 교사들이 전래하는 교훈을 전달할 때 사용하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8:14–15절에서 다시 악인과 의인의 처우가 뒤바뀐 현실의 모순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개탄합니다. 물론 응보의 교훈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전도자는 즉각적 보응은 부정하지만, 궁극적 보응은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현실에서는 악인이 일시적으로 번성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잘되고, 악인의 번영은 오래가지 못합니다(8:13). 따라서, 본절은 현실은 모순처럼 보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며, 악인의 번영은 일시적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바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다윗도 하나님을 신뢰하여 선을 행하며 그분의 성실에 기대어 살아가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시편37:3).”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편37: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므깃도(7)
열왕기하 23: 29절
“요시야 당시에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맞서 나갔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났을 때에 죽인지라”

므깃도는 고대 근동의 견고한 요새 중 하나였지만 앗수르에게 점령당하였습니다(BC722).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점복한 뒤 행정구역을 마깃두(므깃도)와 사메리나(사마리아)로 나눠 통치하였고 므깃도에는 앗수르식 건축 양식이 반영된 행정건물들이 세워졌습니다. 고고학적으로는 중앙에 직사각형 안뜰을 두고 사방에 방이 배치된 1052번, 1369번 건물이 대표적이며, 이는 앗수르 행정체계가 이 지역에 깊이 스며들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후 앗수르가 약화되고 바벨론이 세력을 확장하는 와중에, 요시야 왕은 북왕국 이스라엘 영토의 일부를 되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느고 왕이 앗수르를 돕기 위해 북상하자 요시야는 이를 저지하려고 므깃도에서 전투를 벌였고, 결국 그곳에서 전사합니다(왕하 23:29). 요시야는 경건하고 열정적인 왕이었으나 남유다가 처한 국제정세의 판단 능력은 부족했습니다. 인생에서 열심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듣고 분별하는 귀입니다.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자(BC586) 더 이상 므깃도는 재건되지 못하고 전쟁의 상징적 장소로만 남게 됩니다. 이스르엘 골짜기의 수 많은 전쟁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실패, 그리고 유다 왕국의 멸망 등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는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고, 결국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완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세상 일로 낙심하지 말고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재료 삼아 계획을 성취하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믿음과 느헤미야(5)
느헤미야 1:9절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느헤미야는 성경적 세계관을 갖춘 사람으로 역사와 세상을 신명기적 언약의 틀 안에서 해석하였고, 이 언약의 틀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 선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하면 축복이 오고, 불순종하면 저주가 임하며, 회개하면 반드시 회복이 주어진다는 언약입니다. 느헤미야는 불순종하여 멸망한 남유대 왕국(BC586)과 고레스 칙령(BC 538)을 통해 귀환한 역사를 통해 언약의 성취를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페르시아 왕의 신임을 받는 술관원이라는 독특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페르시아는 유대 땅을 지배하는 제국이었지만, 느헤미야는 그들을 하나님의 징계와 회복을 이루는 도구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제국의 통치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인 것입니다. 같은 믿음을 에스더와 모르드개도 갖고 왕후와 재상의 자리에 각 올랐습니다. 이 경우 부림절 사건은 단순한 하만의 음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권력의 중심에 유대인을 세우시고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시려는 섭리의 역사로 바뀝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제국 안에서 합법적 지위를 위해 노력하였고, 이 또한 하나님이 예비하신 회복의 길 중 하나였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도 같은 세계관을 가집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만유의 주로 임명받아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제사장으로 서서 어둠을 물리치고 의의 열매를 맺을 능력을 갖게 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매일묵상(2026/6/29-7/3)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서문교회(3)
히브리서 11: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차 받을 유업을 향하여 나아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아갔고.”


본절의 말씀은 김인전 목사의 생애를 그대로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 다 알지 못했지만, 교회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찾아 믿음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따라간 롯과 같이 그를 따라 김씨 가문은 이주하였습니다. 김인전 목사는 교회 안팍에서 추앙받았습니다. 한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유학자들을 만나러 향교를 자주 찾았는데 그때마다 세 살 위인 이거두리가 앞에서 “쉬이-물렀거라. 김목사님 나가신다.”하며 길을 열었다고 합니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그는 국권회복의 길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는데 있다고 인식하고, 가산을 출연하여 고향인 충남 서천군에 중등과정의 한영학교(韓英學校)를 설립하고(1906년), 교육계몽운동에 뛰어 들었습니다. 1910년 한입합방이 되자 학교를 숙부에게 인계하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 학교는 서북지역 독립운동의 요람이었습니다. 신학교 졸업(1914) 후 서문교회에 부임한 그는 목회 중에도 독립 의식을 꾸준히 고취하였습니다. 3·1운동 때에는 전주 지역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이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으로 항일투쟁을 벌였습니다. 1923년 별세하여 상해 외인묘지에 묻혔던 그의 유해는 1993년 8월 서울 국립묘지로 옮겨졌습니다. 아브라함이나 김인전 목사의 삶에서 보듯이 믿음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부르심은 무엇이겠습니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전도서 8:9절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

전도서 8:9절은 “해 아래에서 본 모든 것”이라는 말로 시작하며, 전도자가 실제 삶에서 관찰한 권력의 현실을 요약합니다. 그는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장하다(슐라트)”는 앞절에서 왕의 권세를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로, 권력을 가진 자가 타인을 억압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한편, 그 “해(악)”가 피해자에게만 임하는가?  아니면 가해자인 권력자에게도 돌아가는가? 전도자는 둘 다를 염두에 둡니다. 권력자는 타인을 해치지만, 그 악은 자신에게도 돌아옵니다. 전도서 5:13에서, “재물은 그 주인에게 해가 된다”는 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10절은 이 생각을 이어, 악한 권력자의 결말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한때 성전 출입을 자랑하며 스스로를 의롭다 여겼지만, 결국 죽고 묻히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집니다. 그들의 권력은 그들이 생각한 것만큼 크지 않았고, 그들의 악행도 영원히 지속되지 못합니다. 권력이나 권한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부당하게 사용해 타인을 해칠 수 있지만, 그 권력은 제한적이며 악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에스더서의 하만은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는 왕의 권세를 이용해 모르드개와 유대 민족을 멸하려 했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그 악한 계획은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왔습니다. 에스더의 왕비 된 위치, 모르드개의 선행과 그 기록의 망각 등 모든 과정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심판이었음을 증거합니다.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잠언11:21).

전도서 8:10절
“그런 후에 내가 본즉 악인들은 장사지낸 바 되어 거룩한 곳을 떠나 그들이 그렇게 행한 성읍 안에서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본절은 악인에 대한 심판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한탄합니다. 전도자는 악인의 장례를 지켜보며, 그들이 생전에 성전을 자주 드나들던 종교적 외식자였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배는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했고, 그들은 종교의 형식만 취한 채 그 정신을 부인하였습니다. 결국 자신들이 피조물에 불과함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5:2). 그들의 악은 이미 심판을 향해 무르익었지만, 생전에 심판은 없었고, 죽은 뒤에도 악행은 드러나지 않아 후대에 잊혀질 것입니다. 이를 본 전도자는 “헛되다”고 탄식합니다. 우리도 “왜 지금 악인에 대한 심판이 없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온다”(12:14)고 답합니다. 비록 우리에게 지연처럼 보이지만, 지연은 심판의 부재가 아닙니다. 악인이 사는 동안 심판을 피한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린 비극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이 기다립니다. 다윗의 성가대장 아삽도 이 진리를 깨닫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고 미워한 사실을 회개합니다. 그는 악인이 교만하고 권력을 남용해도 형통하며, 자손도 잘 되고, 죽을 때도 평안하나, 경건하게 살려는 자신은 병들고 가난하며 늙어 고통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배 중 악인에게는 영원한 파멸이,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교훈과 영원한 영광이 주어졌음을 깨닫고, 자신이 무지한 짐승과 같았음을 고백합니다(시편 73편).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 15: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므깃도(6)
열왕기하 20: 20절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업적과 저수지와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겨울에만 비가 오고 여름에는 한 방울의 비도 오지 않는 이스라엘에서 수자원을 확보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여러 유적지에서는 각 지역의 지형과 상황에 맞춘 독특한 급수시설들이 발견됩니다. 이러한 기후 조건은 전쟁을 하러 온 적군에게도 유리하지 않았습니다. 각 도시는 포위 중에도 물을 지키기 위해 땅속 깊이 터널을 파서 외부의 샘에 도달하는 비밀 통로를 마련했습니다. 1838년 발굴된 히스기야 터널은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BC 701).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의 침공을 대비하여 기혼샘의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약 533m 길이의 터널을 팠습니다. 두 팀이 양쪽에서 동시에 파 들어가 중간에서 정확히 만나게 된 이 공사는 고대 토목기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유적입니다. 므깃도에도 이와 유사한 급수시설이 있었습니다. 아합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시설은 언덕 꼭대기에서 소용돌이 모양의 층계를 따라 내려가 30m 깊이의 수직 수갱을 파고, 그 바닥에서 다시 성 밖의 샘까지 70m 길이의 수평 터널을 뚫은 구조였습니다. 샘은 적군이 볼 수 없도록 거대한 벽으로 가려져 있었습니다. 이같이 히스기야와 아합은 모두 전쟁을 대비해 수로·터널을 준비했지만, 두 사람의 ‘의지의 대상’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 결과 전자는 앗수르와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였고, 후자는 하나님이 아람과의 전쟁에서 전사토록 하셨습니다. 우리도 당연히 미래를 준비해야 하지만, 우리의 최종 의지처는 누구입니까?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언21:31).”

믿음과 느헤미야(4)
다니엘 1:2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사람의 믿음, 곧 세계관은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힘입니다. 느헤미야는 강대한 고레스 왕도 하나님의 도구여서, 고레스를 사용하여 유대 포로의 귀환을 이루신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권자로서 모든 나라와 왕들을 당신의 뜻대로 사용하신다는 성경적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느헤미야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약 150년 전에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다니엘도 같았습니다. 본절은 바벨론의 침공을 기록하면서 “주께서 여호야김을 그의 손에 넘기셨다”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느브갓네살의 군사적 승리였지만, 다니엘은 그 배후에 하나님의 주권을 보고 기록한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사건은 성경만의 기록이 아닙니다.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느브갓네살 연대기에도 유다 침공과 예루살렘 약탈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기록과 성경 기록의 차이는 해석에 있습니다. 세상은 제국의 힘을 말하나, 성경은 그 제국조차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말합니다. 다니엘과 느헤미야는 이 믿음으로 현실을 바라보았고, 그 믿음이 그들의 삶의 방향을 결정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 쪽을 선택합니까? 혼란과 불안이 가득한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역사를 주관하시며, 보이는 권력보다 더 크신 손으로 세상을 이끌고 계심을 믿고 있습니까? 이런 믿음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현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보이는 힘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을 더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단4:17).

매일묵상(2026/6/22-26)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서문교회(2)
창세기 12: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성 밖’에 위치했던 서문교회는 ‘외지 출신’ 목사와 장로들이 많았습니다. 초대 장로 김필수(1908년)는 경기도 안성 출신으로 해리슨 선교사를 따라 전주에 왔고 후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승두는 두번 째 장로(1911년)로 서울 출신이며 레이놀즈를 도와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 왔다가 전주에 정착합니다. 191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평북 의주 출신 김병농 목사가 부임하였고, 1914년에는 충남 서천군 출신 김인전 목사가 부임했습니다. 김대전 장로(김인전 목사의 사촌)의 증언입니다. “한산 토박이였던 저희 집안에서는 서울서 감역 벼슬 하시던 큰아버님이 처음 믿으셨는디 한문 성경을 읽고서 믿기루 작정하셨대요. 그때 두 아드님(김인전·김수전)을 비롯해서 집안 전체가 개종했지요…. 집안 장손이신 김인전 목사님이 전주 서문교회에 청빙 받아 내려오시자 한산에 있던 집안 식구들도 따라 왔는디 그때 저의 아버님도 장조카를 따라 전주로 오신게요.” 장손 따라 이주하는 ‘조선 양반 전통’에서 믿음으로 고향을 떠나는 ‘아브라함 신앙 전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같이 서문교회가 ‘성 밖’에 세워지고, 외지 출신 목사와 장로들이 모여 교회를 세워 간 과정은 단순한 이주의 이야기가 아니라 믿음의 순종과 헌신의 역사입니다. 그들은 세속적 안정을 버리고, 복음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이 믿음의 결단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이루는 씨앗이 되었고, 서문교회는 그 순종 위에 세워진 신앙의 집입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

전도서 8:7절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본절은 인간 지혜의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냅니다. 즉,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라는 말은 인간의 실존적 한계에 대한 고백입니다. 앞서 전도자는 “모든 일에는 때와 판단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질서를 두셨고, 모든 일에는 적절한 시기와 방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와 판단을 인간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그 무지 때문에 인간은 불안과 고난을 겪습니다. 지혜자초자 예외는 아닙니다. 전도자는 지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현재의 상황을 판단하는 데 유익합니다. 다만, 모든 결과를 예측하거나, 미래를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지혜가 가진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이 경우 미래에 대한 무지는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이유입니다. 미래를 모르는 우리는 하나님께 묻고, 성공 여부를 하나님께 맡기고, 바른 길을 걸어갑니다(잠언3:5-7). 이것이 믿음의 삶이며 신실한 삶입니다. 왕 사울은 이의 부정적인 예입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 직면한 사울은 사무엘이 약속 한 날에 오지 않고 백성은 흩어지자 승리를 위해 스스로 제사를 드립니다(삼상13장). 그는 사무엘을 존중하지 못하고 사무엘의 제사 권한을 침탈하였습니다. 뒤 늦게 온 사무엘은 사울의 왕국이 타인에게 넘어갈 것을 예언합니다. 40년 뒤 사울이 전사하자 왕국은 다윗에게 넘어갑니다. 사울의 왕국은 하나님의 사람인 사무엘의 지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사울 자신의 왕국으로 서 갔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은 어떻습니까?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시편37:3)

전도서 8:8절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본절은 인간의 무지를 넘어 인간의 무력함을 네 가지 영역에서 보여줍니다. 따라서, “미래를 알 수 없다”(7절)는 말은 이제 “미래를 바꿀 수도 없다”는 말로 확장됩니다. 첫째, 바람입니다. 권세가 큰 왕도 바람을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둘째, 죽음입니다.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다”는 말은 인간의 절대적 한계를 선언합니다. 지혜자, 권력자, 악인,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하지 못합니다. 셋째, 전쟁 중입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개인의 힘으로 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처한 거대한 역사적·사회적 상황을 통제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넷째, 악이 악인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악인은 자신의 꾀나 권력으로 위기를 모면하거나, 번영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궁극적으로는 보호받지 못합니다. 인간은 바람도, 죽음도, 전쟁도, 악의 결과도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자기의 한계를 알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는 죽을 병에 걸리자, 자신이 주님 앞에서 선하고, 의롭게 살았음을 상기시키며 통곡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은 그를 들으시고 이적을 보이시며 그의 수명을 15년 연장하셨습니다. 그러나 병고침을 받은 히스기야는 교만하여서 이적을 보고 찾아온 바벨론 사신들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어리석게도 자신의 영광(무기고, 내탕고 등)을 드러냅니다. 사신이 떠나자 이사야가 와서 유다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는 하나님의 결정을 선포하였고, 100년 후 성취됩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언 22: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므깃도(5)
열왕기하 9:27절
“유다의 왕 아하시야가 이를 보고 정원의 정자 길로 도망하니 예후가…치니 그가 므깃도까지 도망하여 거기서 죽은지라”

므깃도 성 안에서 고대 마구간이 발굴되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말은 왕과 군대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전략적 자산입니다. 솔로몬은 병거 1,400대와 마병 12,000 명을 두었고(왕상 10:26), 그의 병거성 중 하나가 므깃도로 생각됩니다. 실제로 므깃도에서는 솔로몬 시대에 건축되었다가 아합 시대에 재건된 마구간 건물이 두 구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잘 다듬은 돌로 지어진 행정시설로, 내부는 돌기둥으로 세 구역으로 나뉘고, 가운데는 흙바닥, 양쪽은 자갈로 포장되었습니다. 약 450마리의 말을 수용한 것 같습니다. 앗수르의 기록에 따르면, 아합은 주전 853년 칼카르 전투에 병거 2천 대를 보냈습니다. 또한 므깃도에서는 비트 힐라니라 불리는 시리아식 왕궁 건물도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두 개의 길고 좁은 방으로 구성된 2층 구조의 건물로, 현관 역할을 하는 기둥방과 왕이 행정을 보던 보좌의 방이 특징입니다. 이 건물은 솔로몬 궁전(열상7장)과 매우 유사하며, 종려나무 문양의 기둥머리 등 성경적 건축 요소가 실제 고고학 자료에서 확인되었습니다. 모세율법은 왕은 ‘말을 많이 두지 말라’(신17:16)고 명령합니다만, 강해지려는 왕의 본능과 충돌하는 규정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이 규정을 무시하고 많은 말과 마병을 두었고, 아합도 같았습니다. 오늘날 말에 해당하는 것은 재력과 권력, 인간관계입니다. 누구나 위기가 찾아옵니다. 이때 “나는 무엇을, 누구를 의지할까?”를 생각하면, 우리의 답은 하나입니다. “주 예수님!”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편20:7)

믿음과 느헤미야(3)
느헤미야 1:5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은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19세기 말 조선 사람들은 땅을 배처럼 물 위에 떠 있는 존재로 여겨, 깊이 파면 나라가 가라앉는다고 믿어서 우물조차 깊이 파지 못하였습니다. 선교사 제임스 홀이 평양에 가서 보니 물이 크게 오염되어 있었고, 원인은 우물을 얕게 판 결과였습니다. 홀 선교사는 그들을 설득해 우물을 깊이 팠고 깨끗한 물을 얻어 전염병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잘못된 세계관은 현실을 가두지만, 진리의 눈은 생명을 살립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느 1:5)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신다는 히브리인의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도 세상적으로는 고레스 왕의 정책이었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당신의 종으로 사용하셨다고 말합니다. 느헤미야 역시 그 섭리를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은 더욱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의 주님으로 세우시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가십니다. 이미 주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대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하셨다는 복음은 단순한 소식이 아니라, “예수께서 주님이시니 그분께 순종하라”는 왕의 칙령(=케리그마)입니다. 참된 믿음의 세계관은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그 눈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보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매일묵상(2025/6/15-19)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서문교회(1)
느헤미야 2:17절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유다 총독 느헤미야는 유다 방백과 귀족들을 모은 뒤, 예루살렘 성 중건의 취지와 하나님의 선하신 도움을 간증하였습니다. 그러자 유다의 각계각층이 연합하여, 많은 음모와 반대를 물리치고 52일 만에 성벽은 완성됩니다(느 3장-6장). ‘전주 이씨’ 양반 가문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1905년을 기점으로 전주 교회는 크게 성장합니다. 주일 예배는 3백 명이 넘어 예배당은 비좁았고, ‘양반 교인’의 참여로 용기를 얻은 선교사들은 새 예배당을 개울 건너 시내 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서문 밖에 미나리 밭 780평을 마련했습니다. 지금 서문교회가 위치한 곳입니다. ‘전주 양반’들이 교회에 나오면서 재정 형편도 좋아졌습니다. 예배당 건물은 정부 당국과 협의하여 은송리에 있던 테이트 사택을 옮겨 세웠습니다. 테이트 사택은 조선 기와 지붕을 올린 붉은 벽돌 건물(57평)이었는데 선교부가 화산동으로 옮긴 후 5년 동안 비어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교회를 ‘서문밖교회’라 했고 해방 후에 ‘서문교회’가 되었습니다. 전주 이씨 양반 가문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교회가 성장하고, 예배당이 확장되고, 재정이 안정되고, 지역 복음화가 가속화된 과정은 하나님께서 한 공동체의 마음을 움직여 교회를 세우시는 방식입니다. 돌이켜보면 ‘양반의 참여’는 단순한 교인의 증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시는 섭리의 시작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6).

전도서 8: 5절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전도자는 “명령을 지키는 자는 화를 모르리라”고 말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때와 판단”을 분별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단순히 권력 앞에서 순종하라는 말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지혜롭게 행동하는 법을 말합니다. 앞선 2–4절에서 전도자는 왕의 권세가 절대적으로 보이는 현실을 묘사했습니다. 왕의 말은 법이 되고, 그의 결정 앞에서 감히 따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모하게 맞서거나 감정적으로 행동한다면 화를 부르게 됩니다. 그렇다고, 권력자 앞에서 비굴한 처신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지혜자는 상황을 읽고 적절한 때를 분별합니다. 때로는 침묵이 지혜이고, 때로는 물러남이 용기입니다. 춘추시대 말기, 범려와 문종은 구천을 도와 월나라를 재건하고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습니다. 이때 범려는 구천의 성품을 꿰뚫어 보고는,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아진다.”(토사구팽)는 말로 문종에게 함께 월나라를 떠나자고 권고한 뒤 떠났지만, 문종은 듣지 않고 남아 있다 구천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지혜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낮추고 현실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지혜자는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셨기에(롬13:1) 때가 오기 전에는 지혜자 임의로 처리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주어졌으나 손대지 않고 불레셋으로 도피하여 사울을 심판하실 때를 기다렸습니다. 현실은 강해 보이나,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분별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언16:3).

전도서 8:6절
“무슨 일에든지 때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전도자는 5절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때와 판단”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 뒤, 6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무슨 일에든지 때와 판단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질서와 때를 정하셨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후단은 역설적 진실을 덧붙입니다.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하다” 즉, 때와 판단은 분명히 존재하나, 하나님만 그런 것들을 아시므로 인간은 큰 고통을 겪게 된다고 솔직히 토로합니다. ‘모든 일에 기한과 때’가 있지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3:11)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의 고난은 단순히 삶의 어려움 때문이 아닙니다.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인간의 근본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지혜자조차 능히 알아낼 수 없습니다(8:17). 전도자는 9장 11, 12절에서 이 주제를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인간의 지혜는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지혜는 모든 것을 아는 능력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미래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때로 “왜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언제 이 상황이 끝날까”를 묻지만, 하나님은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명철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길을 걷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성공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죠! 요셉과 다윗은 때를 알지 못해도 하나님을 신뢰하여 성공하였지만, 사울은 때도 모르고 하나님도 의지하지 않아 실패하였습니다. 그는 길보아 산에서 세 아들과 함께 전사합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3:6).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므깃도(4)
여호수아 12:21절
“하나는 다아낙 왕이요 하나는 므깃도 왕이요”

본절은 가나안 정복 당시 이미 므깃도 왕국의 존재를 알려줍니다. 이 므깃도에서 초기 청동기 시대(BC 3000~2000년)에 만들어진 거대한 원형 제단이 발굴되었습니다. 이 제단은 지름이 약 10m에 달하며 돌을 층층이 쌓아 단상을 이루고, 제단으로 오르는 계단과 낮은 난간이 설치되었습니다. 제단 주변에서는 불에 탄 어린 수양, 비둘기, 송아지의 뼈가 발견되어 당시 희생제사가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주전 14세기 아마르나 문서에는 므깃도가 마케티, 마키투 등으로 불리는 중요한 요새 도시로서, 견고한 성벽과 양쪽에 방이 있는 시리아식 성문을 갖췄습니다. 이 성문은 후대 솔로몬 시대에도 복구되어 재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주전 1478년 이집트 투트모세 3세가 가나안 연맹군과 므깃도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룩소르 카르낙 신전의 부조에 남아 있습니다. 므깃도는 철병거를 갖고 있어 므낫세 지파는 완전히 쫓아내지 못했습니다(삿 1:27). 이 시기의 유물로는 상아판에 새겨진 왕과 왕비, 시녀, 포로, 내시의 모습이 있으며, 이집트·앗수르 문화의 영향을 보여줍니다. 또한 2010년 발굴에서는 토기 주전자에 담긴 홍옥석 목걸이, 반지, 귀걸이 등이 발견되어 주전 1400~1000년경 므깃도의 귀족층의 부유한 삶을 보여줍니다. 므깃도 도시는 앗수르에 의해 멸망받았습니다(BC722). 무엇이 가장 의미 있는 삶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들은 영생의 소망을 갖고 주님의 뜻을 즐겁게 실천하면서 땀을 흘리는 수고 중에 희락을 누리기 때문입니다(전3:13).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눅12:30).

믿음과 느헤미야(2)
느헤미야 1:1절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신명기 28장은 이스라엘이 언약에 순종하면 축복, 불순종하면 형벌이 따른다고 말합니다. 결국 그들은 죄로 인해 북이스라엘은 앗수르(BC 722), 남유다는 바벨론(BC 586)에 의해 멸망하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후 바벨론이 BC 538년에 무너지자 약 5만 명이 귀환했지만, 대부분은 이방 땅에 남아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이루었고, 느헤미야도 그 후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1세 (재위 BC465-424)의 신임을 받는 술관원이었고,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영향력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제국의 충성스러운 관료였지만 동시에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이스라엘인이었습니다. 당시 성전은 재건되었으나 성벽은 무너진 채 방치되어 백성들이 외적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결심합니다. 마침 페르시아는 이집트 전쟁과 시리아 반란으로 서방 지역이 불안정했기에, 신뢰할 만한 인물을 유다 총독으로 보내는 것이 제국에도 유익한 상황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일을 위해 기도했고, 하나님은 넉 달 후 왕의 허락을 통해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기도를 들으셨고, 왕의 마음을 움직이셨으며, 제국의 상황까지 사용하여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셨다는 성경의 증언은 중요한 균형을 가르칩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타인의 유익이나 현실을 무시해서도 안 되고, 현실만 바라보다 하나님의 뜻을 잃어서도 안 됩니다. 믿음은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는 용기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16:9).

매일묵상(2026/6/8-12)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이거두리
마태복음 9:13절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본절은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마태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바리새인들이 보고 비난하자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이 예수께 잡힌 거두리 이보한은 무엇보다 전도인이었습니다. 그의 전도는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방향을 돌리라고 촉구하는 절박한 외침이었습니다. 그가 지긋지긋한 양반의 권위와 체통에서 벗어나 우월감과 교만, 거짓과 위선, 음모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자신을 자유케 한 복음의 평화와 기쁨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웃들에게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전도인만은 아니며, 조선을 사랑한 애국자였습니다. 전주 3‧13 만세 시위 때 걸인들을 이끌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그들의 긍지와 애국심을 일깨웠고 여러 차례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부자들과 기생들에게서 모은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상해 임시정부에 자주 보냈습니다. 한 번에 2만 원을 전달하였는데, 당시 쌀 한 말이 70~80전, 하루 품삯이 1원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그의 노고를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양반 신분을 내려놓고 전도를 본업으로 삼으며 걸인과 빈민의 친구가 되었고, 비밀리에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살아온 그는 1931년 완산동에서 별세하였습니다. 그의 장례에는 전라도의 걸인들이 모여 ‘걸인장’을 치렀는데, 상업은행을 창설한 전주 부자 박영철의 부친상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모였다고 전해집니다. 시간이 흘러도 거두리의 이름은 남아 있으나, 박영철과 그가 세운 상업은행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전도서 8:3절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본절은 왕 앞에서의 처신을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권력의 본질을 꿰뚫고 그에 따라 바른 처신을 합니다. 왕이란 원하는 바를 행하는 권력자입니다. 만약 왕의 결정이 내려졌다면, 그 결정은 집행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왕의 분노를 자극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본절이 경고하는 “악한 일”은 반역이나 음모가 아니라, 왕 앞에서 무리하게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이는 “나쁜 제안”에 가깝습니다. 이미 거절된 의견을 계속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지혜는 현실을 정확히 읽고, 때를 분별하며,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게 합니다. 우리 역시 직장, 가정, 혹은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생각을 밀어붙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고집과 논쟁으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물러나는 것이 더 큰 지혜이며, 관계를 지키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 전도자는 “왕 앞에서 서둘러 떠나지 말라”고 권면하나, 잠언은 왕이 분노할 때는 피하라고 조언합니다(잠언16:14). 상황에 따라 다른 처신이 필요합니다. 이는 비굴함이 아니라, 권위를 가진 자를 존중하며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겸손입니다. 에스더가 그 모범입니다. 그녀는 즉시 왕 앞에 나아가지 않고 금식하며 때를 기다렸습니다. 왕의 마음이 열릴 때를 분별했고, 지혜로운 접근으로 민족을 구했습니다. 농부가 파종과 추수의 때를 분별하며 기다리듯이, 지혜자는 적절한 상황의 도래를 기다립니다. 그는 말하고 침묵할 때,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알고 있어 마침내 의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잠언25:11).

전도서 8:4절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2-3절에서 전도자는 왕의 명령에 순복하고, 왕이 분노할 때는 조심히 처신할 것을 권면한 뒤, 본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왕의 말은 절대적이며, 그의 결정 앞에서 감히 따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전도자 시대의 왕권은 절대적입니다. 따라서, 첫째, 왕에게 책임을 물을 자가 없습니다. 이런 왕에게 맞서거나 고집을 부리는 것은 화를 부르는 “악한 일”이므로, 권력의 현실을 분별해야 합니다. 둘째, 욥은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욥 9:12)고 말합니다. 전도자는 이 표현을 인간 왕에게 적용하여, 권력 앞에서 지혜롭게 처신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는 절대적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왕도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는 존재임을 가르칩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왕궁 지붕에서 교만한 말을 하던 중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7년 동안 짐승처럼 살았던 사건이 그 예입니다(단 4장). 또한 잠언은 “왕의 마음은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신다”(잠 21:1)고 선언합니다. 전도서는 “현실의 권력”을 말하고, 잠언은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나, 지혜자는 이 둘을 모두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현실을 무시하지 않되, 권력의 최종 심판자가 하나님이심을 또한 잊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권력과 권위 앞에서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모하게 맞서는 것도, 비굴하게 굴복하는 것도 지혜가 아닙니다. 때를 알고, 말을 삼가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처신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언19:21).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므깃도(3)
열왕기상 9:15절
“솔로몬 왕이 역군을 일으킨 까닭은 이러하니 여호와의 성전과 자기 왕궁과 밀로와 예루살렘 성과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을 건축하려 하였음이라”

므깃도는 지중해 연안에서 동쪽 내륙으로 이어지는 와디 아라 길과 남쪽 이집트에서 북쪽 시리아·메소포타미아로 향하는 ‘바닷길’이 교차하는 지정학적 요충지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다윗 왕국을 계승한 후 예루살렘과 함께 하솔, 게셀, 그리고 므깃도를 요새화하였으며, 오늘 본문은 그가 이곳에 성을 건축했다고 기록합니다. 고고학자들은 솔로몬 시대의 병거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후대 건축물들이 겹겹이 쌓여 있어 명확한 윤곽을 밝히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합 시대의 므깃도는 확실히 요새화되었고, 그의 건축물 상당 부분이 솔로몬 시대의 구조와 중첩된다는 사실이 밝혀져 이스라엘 왕국 시대의 행정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아합 시대의 므깃도에 들어서면 거대한 돌을 다듬어 쌓은 성문을 지나게 되는데, 이 성문은 양쪽에 두 개씩의 방이 있는 ‘4방 성문’ 구조로 병거가 통과할 만큼 넓게 설계되었습니다. 또한 이중문과 청동 장식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함락된 이후에는 성문이 양쪽에 방 하나씩만 있는 ‘2방 성문’으로 개조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발굴은 므깃도가 고대 전쟁과 왕국 행정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이처럼 므깃도는 솔로몬과 아합이 요새화한 강력한 군사 도시였고, 거대한 성문과 병거성으로 고대 근동에서 손꼽히는 요새였지만, 앗수르에 무너졌습니다(BC722).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도움이시요 피난처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시편118:6).

믿음과 느헤미야(1)
느헤미야 1:11절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수년 전 갑자기 한 지인의 소천하셨다는 부고를 받고 세브란스 장례식장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80 후반의 권사님으로 혈압이 0으로 떨어졌으나 목사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자 다시 소생하여 기도를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기적과도 같은 이 체험은 유족들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주었지만, 그분들의 삶에 큰 변화는 주지 못했습니다. 사실 죽었다고 우리가 판단할 때도, 귀는 살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망자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여야 합니다. 다 듣고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장례식 후에는 망자에 대한 평가만이 남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난 그 권사님 사건이 남기는 큰 교훈은, 우리 각자도 결국 죽게 되며, 그 후에는 영원한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히9:27). 따라서, 주님의 속죄에 대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우리의 현실 또한 쉽지 않습니다.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 갈 것입니까? 먼저, 부활하신 주님이 만유를 통치하시며, 우리의 보호자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이는 성경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돌보신 실제 역사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전제된다면, 이 세상은 살만 합니다. 어려워도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을 돌보고자 한 술관원 느헤미야 역시 그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며 큰 응답을 받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    

매일묵상(2026/6/1-5)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이거두리(2)
마가복음 2:3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네 사람은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주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은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신 뒤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말씀하셨고, 그는 곧 일어나 모든 사람 앞에서 걸어 나갔습니다. 중풍병은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에게 선포된 죽음의 그림자이며,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영적 상태—곧 죄성—를 상징합니다. 육체의 병은 의사가 고치지만, 영혼의 병인 죄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치유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가 필요합니다. 거두리 이보한의 전도 일화입니다. 한 번은 집안의 진사 벼슬을 한 양반을 끈질기게 찾아가 전도하여 마침내 “다음 주일에 나가보세”라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진사는 주일이 가까워지자 멀리 떨어진 절로 숨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주일 아침, 거두리는 이미 절간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전날 밤 눈이 내린 것을 핑계로, 진사는 “양반 체면에 어찌 눈밭을 헤치고 가겠나, 다음으로 미루세”라고 하자, 거두리는 “걱정 마시고 따라만 오십시오”라며 앞장섰습니다. 진사가 따라 나서보니, 절간 마당에서 예배당까지 이어지는 30리 산길의 눈이 이미 말끔히 치워져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주일 예배에 참석했고, 그날 목사의 설교에 깊은 감동을 받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후에는 장로가 되었습니다. 전도는 사랑의 한 표현입니다. 사랑은 장애물을 제거해 주고, 대신 길을 열어주며, 상대가 주님께 나아올 수 있도록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도라는 사랑은 믿음의 눈이 열릴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사랑은)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7).

전도서 8:1절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사람의 내면이 변하면 얼굴도 변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비참한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 속에서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 마음의 무거움이 얼굴에 드러나자 아닥사스다 왕은 즉시 그의 근심을 알아차렸고, 결국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 유다 총독으로 파송됩니다(느 2:1–9). 내면의 상태가 얼굴에 드러난 대표적 장면입니다. 그러나 본절은 지혜가 사람의 얼굴을 밝히고, 굳고 사나운 표정까지 변화시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광채가 나게 한다’는 얼굴에 생기가 돌고 밝아진다는 뜻이며, ‘사나움’은 완고하고 굳어진 표정을 의미합니다. 지혜는 사람의 태도와 인격을 부드럽게 변화시키는 힘을 가졌습니다. 사실, 어리석은 사람은 쉽게 분노하고 얼굴이 굳어 있고 남을 정죄하지먄, 지혜로운 사람은 표정이 밝고 태도가 부드럽고 사람을 편안하게 합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자가 배워 지혜롭게 되면 당연히 얼굴조차 변하게 마련입니다. 지혜 중의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굴과 태도를 변화시킨 사례가 거듭 등장합니다.  한나는 제사장 엘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뒤 “다시는 근심 빛이 없었”습니다(삼상 1:18). 또한 사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후 살기등등한 표정과 태도가 사라지고,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이유는,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깨달을 때, 사람의 마음이 바뀌고 결국 얼굴과 삶 전체가 변화합니다.“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전도서 8:2절
“내가 권하노라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여러방면에서 바른 판단이 필요하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섭리 아래 세워진 왕에 대한 복종의 문제는 중요합니다(2-4절). 인간의 본성이 순종을 싫어하여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처럼, 왕에게 순종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왜 통치자에게 순종해야 할까요? 솔로몬은 그 이유를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한 것”에서 찾습니다. 그 맹세는 왕에 대한 충성 서약인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한 언약입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죽은 후 이스라엘 장로들이 헤브론에 모여 하나님 앞에서 다윗과 언약을 맺고 기름부어 왕으로 세운 사건이 그 예입니다(삼하 5:3). 물론 왕의 권한이 무제한은 아닙니다. 왕에 대한 순종은 왕이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점이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원리를 모든 권세로 확장합니다(롬13:1). 정당한 권세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순종이며, 불순종은 권세자의 칼을 부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양심 때문에 순종하라고 말하는데, 권세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정의실현의 역할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현실의 통치자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현하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선거를 통해 통치자를 세우고, 국민이 주기적으로 정치적 심판을 행함으로 권력의 남용이 없도록 통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더 성숙한 체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 선행이나, 국가의 정의나,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도 결국 ‘사랑’이라는 율법의 완성으로 귀결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13: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므깃도
역대하 35:22절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주전 609년 유다 왕 요시야는 므깃도에서 전사하는데, 애굽과 앗수르가 연합하여 바벨론과 대립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무리하게 군사적 개입을 시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역대기자는 느고의 말을 ‘하나님의 입에서 나왔다’고 평가합니다. 요시야는 정치적 판단을 잘못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고, 유다의 멸망을 앞당겼다는 사실은 바른 판단의 중요성을 일깨우지만, 바벨론 침공과 유다의 멸망을 보지 못한 것은 축복입니다. 므깃도 요새는 1925년 록펠러의 후원을 받은 시카고대학교 근동연구소에 의해 발굴이 시작되었습니다. 연구소는 아합 시대의 므깃도를 발굴하는 등 고고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지만 고고학 기술의 미흡으로 여러 문제들이 드러났습니다. 그에 따라, 현대고고학은 유적지 전체를 발굴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70% 이상을 남겨둡니다. 이후 이스라엘 장군이자 고고학자인 이갈 야딘이 히브리대학교 프로젝트로 1960~1971년 사이 네 차례 발굴을 진행했지만, 그 결과는 당시 출판되지 못하고 2005년에야 정리되어 보고서로 나왔습니다. 시카고대와 히브리대가 주로 철기 시대(이스라엘 왕국 시대)에 집중했다면, 1994년 이후 텔아비브대학교의 발굴은 청동기 시대, 즉 성서 이전 시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최근 발굴은 다양한 과학자들의 참여로 더 정확한 연대기와 시대상이 제시되어 그 학문적 성과가 큽니다. 이 세상은 지혜로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사랑 가운데서 행하되, 분별력과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1:9).

창세기 45:5절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본절은 유다의 효성과 형제사랑을 듣고 감동한 요셉이 자신들 드러내고 형제들의 죄를 용서하는장면입니다. 박혜란 목사는 『목사의 딸』에서 아버지 박윤선 박사의 신학과 인격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신학적 평가보다 더 깊은 상처는 부친의 편애 문제로 보입니다. 그녀는 전처 소생으로서 후처와 그 자녀들에 대한 부친의 편애는 그녀의 마음에 분노를 남겼습니다. 좋은 학벌, 3년의 신학공부, 난지도 목회, 기도, 성경 읽기로도 그 상처는 치유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녀는 한국교회의 우상화를 막으려고 책을 썼다고 하나, 자녀로서 아버지의 명예를 지켜야 할 부분까지 폭로한 점은 아쉬웠습니다. 또한 후처 소생들과의 대화 시도 없이 일방적 서술로 끝난 점도 한계로 보입니다. 그 반면, 유다는 편애 속에서 상처받고 범죄의 길로 갔지만, 세월 속에서 징계와 아버지의 슬픔을 보며 변화되었고, 결국 부친과 동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고 결단합니다. 감동한 요셉은 자신을 드러내며, 그들의 범죄를 용서합니다. 회개와 그에 따라 주어지는 용서는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과 행동의 변화이며, 그 시작은 사랑, 특히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세상에 보내사 우리를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결핍은 사람을 무너뜨리지만, 무너진 자리에서도 사랑은 치유와 회복의 힘을 갖고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형제 사랑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긴 야곱의 아들 요셉과 유다는 그 빛나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매일묵상(2026/5/25-29)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이거두리
호세아 6:6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선지자 호세아는 북왕국 말기(주전 8세기)에 활동했습니다. 이 시기는 겉으로는 풍요로웠지만, 실제로는 영적·도덕적 타락이 심하였기에 선지자는 백성들을 질타하였습니다. 그 중 본절은 “형식보다 사랑, 제사보다 관계”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담겼습니다.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자 바리새인들이 비난하였습니다. 그때 이 말씀을 인용하시며(마9:13)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 신앙이 아니라 실제적 사랑임을 강조하셨고, 회심한 이보한은 직설적으로 이 말씀을 실천합니다. 그는 서자 출신에다 어려서 열병으로 한쪽 눈을 잃었고 ‘반골’ 기질이 농후했습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교회의 제도권 밖에서 ‘파격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상갓집에서 노래해 주고 받은 품삯으로 거지들을 먹이거나, 혹은 그들을 끌고 부잣집으로 가서 거둬 먹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소작인들의 빚을 받아오기는커녕 오히려 빚을 탕감해주고 돌아온 이야기, 나무를 팔지 못한 나뭇꾼들을 부잣집에 데리고 다니면서 팔아준 이야기, 부잣집 아들과 거지의 옷을 바꿔 입힌 이야기, 거드름 피는 서울 양반들의 ‘줄 빰’ 돌린 이야기, 교인 변호사를 찾아가 ‘천국에 달아 두라.”며 돈을 빌려 거지들을 먹인 이야기 등, 전라도 땅에는 그의 선행에 관한 이야기들이 풍부합니다. 그 어려운 일제 시대 가난한 이들을 돌본 그의 행동은 율법보다 사랑, 형식보다 긍휼, 종교보다 사람을 선택한 용기 있는 삶입니다.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전도서 7:28절
“내 마음이 계속 찾아 보았으나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천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내가 찾았으나 이 모든 사람들 중에서 여자는 한 사람도 찾지 못하였느니라”

전도자는 인생 전체를 설명하는 궁극적 원리는 찾지 못했지만, 부지런한 탐구 끝에 세 가지 중요한 발견을 기록합니다. ① 악의 유혹은 파괴적이다(7:26) ② 덕 있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7:28) ③ 인간은 본래 정직하게 지음 받았으나 스스로 타락했다(7:29). 본절(28)은 두 번째 발견, 즉 인간의 도덕적 결핍에 대한 관찰입니다. “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극히 드물다는 뜻으로, 전도자는 “참된 덕을 가진 사람을 거의 찾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자는 한 사람도 찾지 못했다’는 표현은, 여자가 먼저 유혹되어 타락한 창세기의 증언을 반영하며, 인간 전체의 타락이란 29절의 결론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덕과 의를 갖춘 명철한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전도자뿐 아니라,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신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노아입니다. 노아는 홍수 이전의 시대, 즉 “모든 사람의 생각이 항상 악할 뿐”이던 시대(창 6:5)에 하나님이 찾으신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증언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롭게 살았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주신 홍수 심판의 경고를 받자 믿음으로 방주를 준비하고 자신과 가족을 구원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입니다(전12:14). 따라서, 겸손히 주님 뜻을 행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전도서 7:29절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본절은 전도자의 세 번째 관찰로서,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선택 결과임을 밝힙니다. 창세기 1–3장이 그 배경입니다(롱맨).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신 뒤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본절의 ‘정직함’은 인간이 하나님과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있는 도덕적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은 처음부터 악하거나 왜곡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선한 본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스스로 “많은 꾀”를 찾았습니다. “많은 꾀”는 단순한 계산이나 지적 활동이 아니라 악을 꾀하는 마음의 계략’이며, 창세기 6:5절,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롱맨).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정직함을 버리고 자기 욕망과 계산을 따라 악을 선택하는 존재로 변한 것입니다. 7:26–28절에서 전도자가 여자를 “죽음보다 쓰다”고 표현하거나 “천 사람 중 한 사람만 찾았다”고 말한 궁극적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특정 성별이 초점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보편적 타락이 강조되어 있는 것이며 일종의 문학적 장치입니다. 따라서, 남자나 여자나 모두 동일하게 타락했지만,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 같은 결론은 신구약 성경과 일치합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돌아간 뒤,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1).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스르엘 골짜기 – 므깃도
요한계시록 16:16절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므깃도는 지중해변을 이루는 갈멜산 능선을 타고 동쪽으로 내려가면 이스르엘 골짜기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며, 세 방향의 길이 만나는 교통의 핵심입니다: ①남북을 잇는 해변길, ②지중해에서 이스르엘 골짜기로 들어오는 와디 아라, ③요단 계곡으로 이어지는 동서 교통로. 따라서, “므깃도를 지배하는 자가 팔레스타인의 교통을 지배한다”고 일컬어집니다. 실제로 가서 보면 광대한 평야 가장자리에 우뚝 솟은 언덕입니다. 이 때문에 이 지역은 군사적 충돌이 반복되었습니다. 이 므깃도 언덕에서 무려 26개의 도시층이 발견되어 반복된 파괴 · 재건 · 전쟁을 보여주면서, 고고학적으로도 므깃도가 “전쟁의 역사 그 자체” 임을 증명합니다. 므깃도는 성경뿐 아니라 이집트·아시리아·바벨론 문서에도 등장합니다. 투트모세 3세의 유명한 므깃도 전투 기록에, “므깃도를 얻는 자는 천하를 얻는다”는 문구가 남아 있으며,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 에살핫돈, 아슈르바니팔의 원정 기록,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군사 이동 경로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므깃도는 전쟁의 장소로 등장하는데, 드보라와 바락이 야빈의 군대를 무찌른 곳(삿5장), 요시야 왕이 전사한 곳입니다(열하23장). 한편,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전쟁의 장소를 아마겟돈이라 부릅니다. 이는 히브리어 ‘할-므깃도’(므깃도 산)에서 온 말로써, 므깃도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하나님과 악의 세력의 최종적 충돌을 상징하는 종말론적 장소” 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므깃도의 역사를 보면서 인간의 전쟁은 반복되지만, 역사의 결말은 하나님이 결정하심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언21:31).

세상과 신자(6)
창세기 44:33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유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특별계시와 언약을 물려받았고, 할례의 표식도 몸에 가졌지만, 그의 삶은 자격 미달의 연속이었습니다. 동생 요셉을 팔아넘기고, 아버지를 속이고, 가정은 무너졌으며, 창녀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판 지 22년이 흐르자, 그는 이밀의 진정표보다 더 감동적인 웅변을 하고, 동생과 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나서 요셉을 감동시킵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했을까요?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거친 세파에서 살아가는 ‘노동의 은혜’입니다(창3:17-19). 아담의 자손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수고와 눈물은 죄를 치료하는 하나님의 약입니다. 이때, 유다는 땀 흘려 일하며 가정을 세우려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안되는 것을 깨닫습니다. 즉, 악한 두 아들의 죽음이란 하나님의 징계를 인내하면서, 악인의 집에는 평강이 없음을 경험한 것입니다. 둘째, 자신과 형제들의 거짓과 죄 때문에 당하는 아버지의 고뇌를 보았습니다. 셋째, 유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그들의 믿음의 삶을 반추하면서, 조상들을 돌보시는 하나님과, 조상들의 믿음과 소망을 배웠습니다. 그들의 삶의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언젠가 야곱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만민이 복을 받는다는 그 약속을 유다도 간직하였습니다. 이제 유다는 마흔이 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길이 인생의 본분임을 깨닫고 그의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12:11).

매일묵상(2026/5/11-15)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누가복음 13:21절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1905년) 2월 처음으로 교회에 고위층 두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뒷골목으로 해서 교회에 왔습니다. 후에 포사이드 박사가 부상을 입었고 저명한 이씨 집안 사람들이 휘장으로 갈라놓은 예배당 남자 석에 나타났습니다…그 결과 따뜻한 봄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전킨의 보고에 나온 두 사람은 10년 동안 관직에 있던 관리출신과 구한국 부대 장교 출인이었습니다. 이어서 ‘저명한 이씨 집안’ 사람들과 “김 주사, 이 주사”로 불리던 양반들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교회를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선교사를 “양대인”(洋大人)이라 부르면서 신변 보호를 받으러 나오는 교인들도 생겼는데, 그 결정적 계기가 ‘포사이드 사건’입니다. 1904년 9월에 내한한 포사이드는 곧바로 전주로 내려와 서원고개 언덕에 시약소를 차렸습니다. 그가 ‘저명한 이씨 집안’에 왕진을 간 것은 1905년 3월 11일입니다. 포사이드는 ‘강도’를 만나 중상을 입은 집 주인을 치료하고 그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그날 밤 ‘강도들’이 또 들이닥쳐 포사이드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혹자는 ‘강도들’은 의병들로서 일진회에 우호적인 ‘부자 양반’을 응징하였고, 그를 치료하러 간 ‘검은 양복’의 포사이드를 일본 경찰로 오인하여 공격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건 보다, 사건 다음입니다. 선교사 포사이드에 대해 감사와 송구한 마음으로 이씨 집안에서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고, 그 아들 중 이보한은 완전히 개종합니다. 실로 포사이드의 선행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6:10).

전도서 7:24절
“이미 있는 것은 멀고 또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전도자는 반복적 표현과 수사적 질문을 사용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이미 있는 것”이란 히브리어 완료형으로, 이미 일어났고 지금도 지속되는 하나님의 섭리를 가리킵니다. 그 안에는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만물의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멀고 또 깊고 깊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삼중 표현은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이해를 완전히 초월한다는 사실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깊음’은 하나님의 행위와 통치의 근간이 되는 절대적 지혜의 차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삶과 환경을 주권적으로 정하실 때, 인간은 그 앞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누가 통달하랴”라는 질문은 바로 그 사실을 선언하는 수사적 고백입니다. 이에 대한 두 가지 예증입니다. 첫째, 창조의 지혜입니다. 욥기에서 보듯이, 악어조차도 하나님의 깊은 지혜의 산물입니다. 단단한 갑옷 같은 표피, 온도에 따라 성별이 결정되는 신비로운 생태 등인데, 이것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새겨진 창조의 다양성입니다. 관리자인 우리는 겸손히 연구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둘째, 복음 속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아래 가두어 두셨는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함입니다(롬 11:32). 인간의 눈에는 이해되지 않는 방식이지만, 그 안에는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히 배우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생의 본질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혜의 시작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전도서 7:25절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연구하여 악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얼마나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전도자는 먼저 지혜의 한계를 인정한 뒤에도(7:23–24) 계속 탐구합니다. 그는 지혜와 명철을 살피며, 악이 얼마나 어리석고 파괴적인지 연구했습니다(7:25). 이것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의도적이고 철저한 탐구입니다. 지혜는 인간이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그렇다고 추구를 멈출 수 없는 가치입니다. 그 일환으로 전도자는 본절에서 악의 본질을 파헤쳤고 그 결론은 26절입니다. 26절은 악의 구체적 예—특히 유혹과 함정—를 제시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선택하라고 교훈합니다. 본절은 악은 단순한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 지혜의 반대편, 곧 어리석음과 미친 행동으로 나타남을 밝힙니다. 그러면 지혜란 무엇입니까? 지혜는 단순히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악을 악으로 미련함을 미련함으로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솔로몬은 일찍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아도니야를 처형하는 등 왕권을 확립합니다. 3년의 통치 후 그의 왕위는 견고해졌지만, 하나님이 맡기신 많은 백성들의 선악을 판단할 지혜의 부족을 절감합니다(왕상3:9). 이에 솔로몬은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자기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백성을 섬기기 위해 ‘듣는 마음’ 즉, 재판할 지혜를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후히 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웃을 살리고 세우는 지혜를 요청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후히 주실 것입니다(약1:5). 이것이 이웃 사랑이요 하나님 사랑입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1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다아낙
사사기 1:27절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다아낙(Taanach)은 이스르엘 평야 남단에 위치하며, 군사적·교역적으로 중요한 므깃도 근처의 전략적 요충지로 므낫세 지파의 성읍입니다. 지명은 ‘모래로 된 땅’이란 뜻이며, 여호수아가 정복한 가나안 31개 왕 중 하나였고 잇사갈 지파 내에 있던 므낫세의 고립 도시입니다. 다아낙은 1966년 발굴이 시작되었고, 가나안의 종교적 모습을 잘 묘사하는 제대(祭臺)가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습니다. 발굴된 제대는 주전 10세기로 추정되는 점토를 빚어 만들어졌고, 높이 53센티이며 모두 4층입니다. 여러 가지 종교적 형상들이 묘사되어 있고 꼭대기 부분이 안으로 살짝 움푹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제물을 올렸거나 제수를 담았던 것 같습니다. 제대는 마치 가나안 신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비록 4층으로 되어 있으나 이를 평면으로 재배치한다면 1층부터 입구로 보고 성소를 지나 마지막 신전의 가장 대표적인 신의 형상이 서 있는 곳까지 도착하는 구조로 볼 수 있습니다. 다아낙 제대의 존재는, 가나안 문화가 어떤 것이었는지, 그것이 왜 철저히 제거되어야 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실로 가나안의 우상 문화는 사사기 전체를 흔드는 영적 타락의 근원입니다. 이스라엘은 반복해서 넘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습니다. 이는 개인의 축복을 하나님의 계명보다 앞세운 결과입니다만, 진정한 복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언22:4).

세상과 신자(4)
창세기 44:33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본절은 유다가 애굽총리 요셉에게 베냐민 대신 자신이 종이 되겠다는 간곡한 요청입니다. 이전에 유다는 다른 형제들과 같이 아버지 야곱의 요셉에 대한 ‘편애’를 질투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팔고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유다는 두 아들을 잃었고, 뜻하지 않게 근친상간의 죄까지 저질러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의 고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지금 막내 동생 베냐민이 노예로 전락하는 갈림길에서 서자, 더 이상 불효하지 않도록 결단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효와 형제 사랑 계명의 선택입니다. 유다의 진정은 조모를 섬기고자 하는 이밀의 진정표보다 훨씬 숭고하며, 진정표의 일반계시에 비추어 탁월한 특별계시의 교훈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계명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결과 사랑의 열매를 많이 맺게 되며, 주님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리시고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로 발견됩니다. 한편, 22년 전 19살 유다는 곤경에 처한 이복동생 요셉을 미워하여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22년 후 41살의 유다는 요셉에 의해 똑같은 시험을 받지만, 자신을 희생하여 훌륭하게 통과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의 시험에서 실패하면 하나님은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계명을 통과하는 여부를 궁궁하게 여기십니다. 모두 주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축복을 갖기 바랍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12).

매일묵상(2026/5/4-8)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주서문교회
누가복음 13:19절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전주 서문교회는 1893년 6월, 서울에서 내려온 정해원이 은송리(동완산동)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구도자를 모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동학혁명으로 한동안 선교가 중단되었으나 3년 뒤 첫 세례교인이 나왔습니다(1897).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화산동으로 이전하나(1900) 교인들은 가난한 부녀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전주 양반들은 여전히 멀리서 바라만 보았습니다. 선교사들이 전주의 선비 문화를 알게 되자 책을 통한 전도를 시도했습니다. 1903년 전주 서문 바로 안쪽에 ‘책방’을 낸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예수교 책’을 팔 수 없어 교인 ‘임씨’를 통해 포목점을 내고 한 구석에 중국에서 들여온 한문 ‘서학서’(西學書)와 한글 전도 책들을 놓고 팔았습니다. ‘책’을 통한 전도는 주효했습니다. 선교사 전킨의 보고입니다. “(1905년) 2월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교회에 고위층 두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뒷골목으로 해서 교회에 왔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에 포사이드 박사가 부상을 입었고 저명한 이씨 집안 사람들이 휘장으로 갈라놓은 예배당 남자 석에 나타났습니다.”(The Korea Mission Field, 1905. 12.). 서문교회의 초기 역사는 단순한 개척 이야기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열매 맺는 모습을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헌신, 작은 씨앗 같은 전도, 눈물 섞인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전도서 7:22절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하였다는 것을 네 마음도 알고 있느니라”

본절은 21절의 권면을 뒷받침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모든 말에 마음을 둘 필요가 없는 이유는, 우리 역시 종종 남을 비방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말로 실수하고, 감정에 흔들리며, 때로는 상처 주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말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지 못하는 모순입니다. 비록 본절의 ‘저주’가 불평이나 투덜거림을 의미한다 해도, 입 밖에 나온 말은 죄가 됩니다. 전도자는 이러한 인간의 보편적 부패성과 연약함을 자기 성찰을 통해 바라봅니다. 자기 성찰은 인격 성숙의 중요한 과정이며, 관용을 낳는 어머니입니다. 베드로의 부인 사건이 좋은 예입니다. 그는 여종 앞에서 저주까지 하며 주님을 부인했지만, 곧바로 밖에 나가 통곡했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경고하신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가장 먼저 베드로를 찾아오셨고, 다시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은혜를 잊지 않았고, 그 경험은 그를 관용과 겸손을 갖춘 사도로 빚어냈습니다. 관용과 겸손은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질이며, 주님은 우리의 실패와 용서를 통해 이 자질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실패 앞에서 지나치게 낙망하지는 말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는 말씀 역시 간직하며 겸손히 살아야 합니다. 전도자는 20–22절을 통해 말합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다. 그러므로 타인의 말에 마음을 두지 말라. 너도 같은 실수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자기 성찰은 겸손을 낳고, 겸손은 관용을 낳습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길입니다. “사람이 분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은 그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자기의 영광이니라.”(잠언19:11).

전도서 7:23절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 하였도다”

본절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해 보았다”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이 모든 것”은 앞선 7:1–22 전체를 말하며, 동시에 전환적 표현입니다. 전도자는 자신의 탐구가 지혜에 의해 이끌린 실험적 탐구임을 다시 확인합니다(1:13; 2:3). 그는 인생의 복잡함과 불공평함, 인간의 불완전성을 지혜로 살펴본 뒤, 다시 한 번 “지혜를 얻고자 결심했다”고 말합니다.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는 표현은 강한 의지를 담은 동사형으로, 그의 결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결심은 곧 한계에 부딪힙니다. 전도자는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지혜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완전한 지혜에 도달할 수 없음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인정이 지혜의 문턱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깊이와 높이를 가짐으로 겸손은 핅수적입니다. 비록 지혜는 유산처럼 유익하기에 반드시 추구해야 하나, 동시에 완전히 붙잡을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사실 이 깨달음 자체가 지혜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조급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히 배우려는 자세가 참된 지혜의 길입니다. 욥은 경건한 삶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고난을 겪고 매우 혼란스러워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창조의 지혜를 드러내시자,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내가 깨닫지 못하던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라는 회개를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안 욥은 비로소 참된 지혜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1:7).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스르엘 성
열왕기하10:1절
“아합의 아들 칠십 명이 사마리아에 있는지라 예후가 편지들을 써서 사마리아에 보내서 이스르엘 귀족들 곧 장로들과 아합의 여러 아들을 교육하는 자들에게 전하니 일렀으되”

이스르엘은 아합 왕조의 실제 권력 중심지였습니다. 아합의 왕궁은 사마리아에도 있었지만, 이스르엘에는 별도의 거대한 왕궁과 군사 요새가 존재했습니다. 따라서 아합 왕조의 핵심 귀족·관리·군 지휘관 상당수가 이스르엘을 기반으로 활동했으며, 나봇의 포도원 사건도 이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를 입증하는 아합 시대 때 건설된 거대한 요새가 아랍어로도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의 어원이 남겨져 있었던 지린이라 불리는 유적지 근처에서 발굴되었습니다(1987년). 289×157m의 직사각형 궁전은 모나게 잘 다듬은 돌을 쌓아 기초를 만들어 건축한 성벽은 물론, 성벽의 각 모서리에는 망대가 있었고 성벽을 둘러 폭 8∼12m, 깊이 6.5m의 해자가 파져 있었습니다. 해자는 성벽을 둘러 웅덩이를 파 주로 물을 붓고 악어 같은 짐승을 풀어 놓아 적들이 성벽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하는 방어용 구조입니다. 망대와 해자를 통해 이 성이 상당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9세기 말 예후의 시대에 아람왕 하사엘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공격 앞에서 멸망하였습니다. 본절의 “아합의 아들들을 교육하는 자들”이란 표현은 의미심장합니다. 한 세대의 죄는 다음 세대의 성품 속에 저장됩니다. 아합의 죄에는 경건한 자녀들을 양육하지 못한 부분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무엇을 성공이라 가르치고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입니까, 아니면 생존과 권력입니까? 참된 안전은 주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언18:10).

세상과 신자(3)
창세기 49:8절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본절은 야곱의 유언 중 유다와 그 후손에 관한 대목입니다.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는 ‘찬송’이란 뜻이나 그의 삶은 ‘찬송’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는 요셉을 은 20량에 팔아넘긴 뒤, 아버지에게는 거짓말을 하여 22년 동안 슬픔 속에 살게 했습니다. 이후 가나안 사람과 사귀고 타락한 문화에 물든 그의 자녀들은 일찍 죽었으며, 며느리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와 수치스러운 관계를 맺는데 헷족속의 관습입니다. 그의 인생은 죄와 무너짐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한 유다를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선택하여 다윗 왕조와 그리스도를 일으키셨습니다. 즉 그의 가장 어두운 순간 속에서 베레스가 태어났고, 베레스의 계보에서 다윗,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이같이 유다의 죄와 실수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막지 못했고, 그 실패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더 깊이 드러났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유다와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실패하고, 무너지고, 부끄러운 선택을 할 때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끝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죄를 심판하시나, 동시에 구속의 길을 여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유다의 이야기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를 통해서도 구원의 길을 여신다.” 따라서, 우리는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그분 앞에 겸손히 돌아오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