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서문교회(3)
히브리서 11: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차 받을 유업을 향하여 나아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아갔고.”
본절의 말씀은 김인전 목사의 생애를 그대로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 다 알지 못했지만, 교회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찾아 믿음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따라간 롯과 같이 그를 따라 김씨 가문은 이주하였습니다. 김인전 목사는 교회 안팍에서 추앙받았습니다. 한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유학자들을 만나러 향교를 자주 찾았는데 그때마다 세 살 위인 이거두리가 앞에서 “쉬이-물렀거라. 김목사님 나가신다.”하며 길을 열었다고 합니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그는 국권회복의 길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는데 있다고 인식하고, 가산을 출연하여 고향인 충남 서천군에 중등과정의 한영학교(韓英學校)를 설립하고(1906년), 교육계몽운동에 뛰어 들었습니다. 1910년 한입합방이 되자 학교를 숙부에게 인계하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 학교는 서북지역 독립운동의 요람이었습니다. 신학교 졸업(1914) 후 서문교회에 부임한 그는 목회 중에도 독립 의식을 꾸준히 고취하였습니다. 3·1운동 때에는 전주 지역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이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으로 항일투쟁을 벌였습니다. 1923년 별세하여 상해 외인묘지에 묻혔던 그의 유해는 1993년 8월 서울 국립묘지로 옮겨졌습니다. 아브라함이나 김인전 목사의 삶에서 보듯이 믿음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부르심은 무엇이겠습니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전도서 8:9절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
전도서 8:9절은 “해 아래에서 본 모든 것”이라는 말로 시작하며, 전도자가 실제 삶에서 관찰한 권력의 현실을 요약합니다. 그는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장하다(슐라트)”는 앞절에서 왕의 권세를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로, 권력을 가진 자가 타인을 억압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한편, 그 “해(악)”가 피해자에게만 임하는가? 아니면 가해자인 권력자에게도 돌아가는가? 전도자는 둘 다를 염두에 둡니다. 권력자는 타인을 해치지만, 그 악은 자신에게도 돌아옵니다. 전도서 5:13에서, “재물은 그 주인에게 해가 된다”는 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10절은 이 생각을 이어, 악한 권력자의 결말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한때 성전 출입을 자랑하며 스스로를 의롭다 여겼지만, 결국 죽고 묻히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집니다. 그들의 권력은 그들이 생각한 것만큼 크지 않았고, 그들의 악행도 영원히 지속되지 못합니다. 권력이나 권한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부당하게 사용해 타인을 해칠 수 있지만, 그 권력은 제한적이며 악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에스더서의 하만은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는 왕의 권세를 이용해 모르드개와 유대 민족을 멸하려 했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그 악한 계획은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왔습니다. 에스더의 왕비 된 위치, 모르드개의 선행과 그 기록의 망각 등 모든 과정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심판이었음을 증거합니다.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잠언11:21).
전도서 8:10절
“그런 후에 내가 본즉 악인들은 장사지낸 바 되어 거룩한 곳을 떠나 그들이 그렇게 행한 성읍 안에서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본절은 악인에 대한 심판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한탄합니다. 전도자는 악인의 장례를 지켜보며, 그들이 생전에 성전을 자주 드나들던 종교적 외식자였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배는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했고, 그들은 종교의 형식만 취한 채 그 정신을 부인하였습니다. 결국 자신들이 피조물에 불과함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5:2). 그들의 악은 이미 심판을 향해 무르익었지만, 생전에 심판은 없었고, 죽은 뒤에도 악행은 드러나지 않아 후대에 잊혀질 것입니다. 이를 본 전도자는 “헛되다”고 탄식합니다. 우리도 “왜 지금 악인에 대한 심판이 없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온다”(12:14)고 답합니다. 비록 우리에게 지연처럼 보이지만, 지연은 심판의 부재가 아닙니다. 악인이 사는 동안 심판을 피한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린 비극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이 기다립니다. 다윗의 성가대장 아삽도 이 진리를 깨닫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고 미워한 사실을 회개합니다. 그는 악인이 교만하고 권력을 남용해도 형통하며, 자손도 잘 되고, 죽을 때도 평안하나, 경건하게 살려는 자신은 병들고 가난하며 늙어 고통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배 중 악인에게는 영원한 파멸이,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교훈과 영원한 영광이 주어졌음을 깨닫고, 자신이 무지한 짐승과 같았음을 고백합니다(시편 73편).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 15: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므깃도(6)
열왕기하 20: 20절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업적과 저수지와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겨울에만 비가 오고 여름에는 한 방울의 비도 오지 않는 이스라엘에서 수자원을 확보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여러 유적지에서는 각 지역의 지형과 상황에 맞춘 독특한 급수시설들이 발견됩니다. 이러한 기후 조건은 전쟁을 하러 온 적군에게도 유리하지 않았습니다. 각 도시는 포위 중에도 물을 지키기 위해 땅속 깊이 터널을 파서 외부의 샘에 도달하는 비밀 통로를 마련했습니다. 1838년 발굴된 히스기야 터널은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BC 701).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의 침공을 대비하여 기혼샘의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약 533m 길이의 터널을 팠습니다. 두 팀이 양쪽에서 동시에 파 들어가 중간에서 정확히 만나게 된 이 공사는 고대 토목기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유적입니다. 므깃도에도 이와 유사한 급수시설이 있었습니다. 아합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시설은 언덕 꼭대기에서 소용돌이 모양의 층계를 따라 내려가 30m 깊이의 수직 수갱을 파고, 그 바닥에서 다시 성 밖의 샘까지 70m 길이의 수평 터널을 뚫은 구조였습니다. 샘은 적군이 볼 수 없도록 거대한 벽으로 가려져 있었습니다. 이같이 히스기야와 아합은 모두 전쟁을 대비해 수로·터널을 준비했지만, 두 사람의 ‘의지의 대상’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 결과 전자는 앗수르와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였고, 후자는 하나님이 아람과의 전쟁에서 전사토록 하셨습니다. 우리도 당연히 미래를 준비해야 하지만, 우리의 최종 의지처는 누구입니까?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언21:31).”
믿음과 느헤미야(4)
다니엘 1:2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사람의 믿음, 곧 세계관은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힘입니다. 느헤미야는 강대한 고레스 왕도 하나님의 도구여서, 고레스를 사용하여 유대 포로의 귀환을 이루신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권자로서 모든 나라와 왕들을 당신의 뜻대로 사용하신다는 성경적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느헤미야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약 150년 전에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다니엘도 같았습니다. 본절은 바벨론의 침공을 기록하면서 “주께서 여호야김을 그의 손에 넘기셨다”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느브갓네살의 군사적 승리였지만, 다니엘은 그 배후에 하나님의 주권을 보고 기록한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사건은 성경만의 기록이 아닙니다.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느브갓네살 연대기에도 유다 침공과 예루살렘 약탈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기록과 성경 기록의 차이는 해석에 있습니다. 세상은 제국의 힘을 말하나, 성경은 그 제국조차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말합니다. 다니엘과 느헤미야는 이 믿음으로 현실을 바라보았고, 그 믿음이 그들의 삶의 방향을 결정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 쪽을 선택합니까? 혼란과 불안이 가득한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역사를 주관하시며, 보이는 권력보다 더 크신 손으로 세상을 이끌고 계심을 믿고 있습니까? 이런 믿음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현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보이는 힘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을 더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단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