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6/6/22-26)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서문교회(2)
창세기 12: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성 밖’에 위치했던 서문교회는 ‘외지 출신’ 목사와 장로들이 많았습니다. 초대 장로 김필수(1908년)는 경기도 안성 출신으로 해리슨 선교사를 따라 전주에 왔고 후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승두는 두번 째 장로(1911년)로 서울 출신이며 레이놀즈를 도와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 왔다가 전주에 정착합니다. 191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평북 의주 출신 김병농 목사가 부임하였고, 1914년에는 충남 서천군 출신 김인전 목사가 부임했습니다. 김대전 장로(김인전 목사의 사촌)의 증언입니다. “한산 토박이였던 저희 집안에서는 서울서 감역 벼슬 하시던 큰아버님이 처음 믿으셨는디 한문 성경을 읽고서 믿기루 작정하셨대요. 그때 두 아드님(김인전·김수전)을 비롯해서 집안 전체가 개종했지요…. 집안 장손이신 김인전 목사님이 전주 서문교회에 청빙 받아 내려오시자 한산에 있던 집안 식구들도 따라 왔는디 그때 저의 아버님도 장조카를 따라 전주로 오신게요.” 장손 따라 이주하는 ‘조선 양반 전통’에서 믿음으로 고향을 떠나는 ‘아브라함 신앙 전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같이 서문교회가 ‘성 밖’에 세워지고, 외지 출신 목사와 장로들이 모여 교회를 세워 간 과정은 단순한 이주의 이야기가 아니라 믿음의 순종과 헌신의 역사입니다. 그들은 세속적 안정을 버리고, 복음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이 믿음의 결단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이루는 씨앗이 되었고, 서문교회는 그 순종 위에 세워진 신앙의 집입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

전도서 8:7절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본절은 인간 지혜의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냅니다. 즉,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라는 말은 인간의 실존적 한계에 대한 고백입니다. 앞서 전도자는 “모든 일에는 때와 판단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질서를 두셨고, 모든 일에는 적절한 시기와 방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와 판단을 인간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그 무지 때문에 인간은 불안과 고난을 겪습니다. 지혜자초자 예외는 아닙니다. 전도자는 지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현재의 상황을 판단하는 데 유익합니다. 다만, 모든 결과를 예측하거나, 미래를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지혜가 가진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이 경우 미래에 대한 무지는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이유입니다. 미래를 모르는 우리는 하나님께 묻고, 성공 여부를 하나님께 맡기고, 바른 길을 걸어갑니다(잠언3:5-7). 이것이 믿음의 삶이며 신실한 삶입니다. 왕 사울은 이의 부정적인 예입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 직면한 사울은 사무엘이 약속 한 날에 오지 않고 백성은 흩어지자 승리를 위해 스스로 제사를 드립니다(삼상13장). 그는 사무엘을 존중하지 못하고 사무엘의 제사 권한을 침탈하였습니다. 뒤 늦게 온 사무엘은 사울의 왕국이 타인에게 넘어갈 것을 예언합니다. 40년 뒤 사울이 전사하자 왕국은 다윗에게 넘어갑니다. 사울의 왕국은 하나님의 사람인 사무엘의 지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사울 자신의 왕국으로 서 갔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은 어떻습니까?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시편37:3)

전도서 8:8절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본절은 인간의 무지를 넘어 인간의 무력함을 네 가지 영역에서 보여줍니다. 따라서, “미래를 알 수 없다”(7절)는 말은 이제 “미래를 바꿀 수도 없다”는 말로 확장됩니다. 첫째, 바람입니다. 권세가 큰 왕도 바람을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둘째, 죽음입니다.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다”는 말은 인간의 절대적 한계를 선언합니다. 지혜자, 권력자, 악인,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하지 못합니다. 셋째, 전쟁 중입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개인의 힘으로 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처한 거대한 역사적·사회적 상황을 통제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넷째, 악이 악인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악인은 자신의 꾀나 권력으로 위기를 모면하거나, 번영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궁극적으로는 보호받지 못합니다. 인간은 바람도, 죽음도, 전쟁도, 악의 결과도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자기의 한계를 알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는 죽을 병에 걸리자, 자신이 주님 앞에서 선하고, 의롭게 살았음을 상기시키며 통곡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은 그를 들으시고 이적을 보이시며 그의 수명을 15년 연장하셨습니다. 그러나 병고침을 받은 히스기야는 교만하여서 이적을 보고 찾아온 바벨론 사신들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어리석게도 자신의 영광(무기고, 내탕고 등)을 드러냅니다. 사신이 떠나자 이사야가 와서 유다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는 하나님의 결정을 선포하였고, 100년 후 성취됩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언 22: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므깃도(5)
열왕기하 9:27절
“유다의 왕 아하시야가 이를 보고 정원의 정자 길로 도망하니 예후가…치니 그가 므깃도까지 도망하여 거기서 죽은지라”

므깃도 성 안에서 고대 마구간이 발굴되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말은 왕과 군대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전략적 자산입니다. 솔로몬은 병거 1,400대와 마병 12,000 명을 두었고(왕상 10:26), 그의 병거성 중 하나가 므깃도로 생각됩니다. 실제로 므깃도에서는 솔로몬 시대에 건축되었다가 아합 시대에 재건된 마구간 건물이 두 구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잘 다듬은 돌로 지어진 행정시설로, 내부는 돌기둥으로 세 구역으로 나뉘고, 가운데는 흙바닥, 양쪽은 자갈로 포장되었습니다. 약 450마리의 말을 수용한 것 같습니다. 앗수르의 기록에 따르면, 아합은 주전 853년 칼카르 전투에 병거 2천 대를 보냈습니다. 또한 므깃도에서는 비트 힐라니라 불리는 시리아식 왕궁 건물도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두 개의 길고 좁은 방으로 구성된 2층 구조의 건물로, 현관 역할을 하는 기둥방과 왕이 행정을 보던 보좌의 방이 특징입니다. 이 건물은 솔로몬 궁전(열상7장)과 매우 유사하며, 종려나무 문양의 기둥머리 등 성경적 건축 요소가 실제 고고학 자료에서 확인되었습니다. 모세율법은 왕은 ‘말을 많이 두지 말라’(신17:16)고 명령합니다만, 강해지려는 왕의 본능과 충돌하는 규정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이 규정을 무시하고 많은 말과 마병을 두었고, 아합도 같았습니다. 오늘날 말에 해당하는 것은 재력과 권력, 인간관계입니다. 누구나 위기가 찾아옵니다. 이때 “나는 무엇을, 누구를 의지할까?”를 생각하면, 우리의 답은 하나입니다. “주 예수님!”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편20:7)

믿음과 느헤미야(3)
느헤미야 1:5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은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19세기 말 조선 사람들은 땅을 배처럼 물 위에 떠 있는 존재로 여겨, 깊이 파면 나라가 가라앉는다고 믿어서 우물조차 깊이 파지 못하였습니다. 선교사 제임스 홀이 평양에 가서 보니 물이 크게 오염되어 있었고, 원인은 우물을 얕게 판 결과였습니다. 홀 선교사는 그들을 설득해 우물을 깊이 팠고 깨끗한 물을 얻어 전염병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잘못된 세계관은 현실을 가두지만, 진리의 눈은 생명을 살립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느 1:5)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신다는 히브리인의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도 세상적으로는 고레스 왕의 정책이었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당신의 종으로 사용하셨다고 말합니다. 느헤미야 역시 그 섭리를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은 더욱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의 주님으로 세우시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가십니다. 이미 주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대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하셨다는 복음은 단순한 소식이 아니라, “예수께서 주님이시니 그분께 순종하라”는 왕의 칙령(=케리그마)입니다. 참된 믿음의 세계관은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그 눈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보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