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6/824-28)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3)
창세기 12: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자익 목사의 며느리의 계속된 말입니다. “..긍께 머슴살이 한거지유 뭐. 근데 본시 영민하신 분이라 주인 집 아들들이 한문 공부하는 것을 밖에서 듣고는 천자문을 외우셨대유. 쓸질은 모르셨구유. 스무살이 넘어설랑 같은 동네 살던 김씨 집안에서 보니깐 성실하니 일을 잘허니께 사위를 삼았는디 독립허라구 논 닷마지기까지 받았다 이말이유. 그리구선 언젠가 서양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되앗는디 조덕삼 씨 하구 한 날 한 시에 세례 받고 교회를 시작하셨대유. 인자 선교사 조사가 되어선 외지로 전도하러 다니셨는디 어느 핸가 살림 밑천으로 받은 논 닷마지기를 팔아선 소식두 없이 사라지셨대유. 처갓집에선 배은망덕한 놈이라구 욕도 많이 했대유. 인자 육개월만에 집으로 왔는디 상투를 싹둑 자르고 양복을 해 입구 딴 사람이 되서 나타났시유. 긍께 그 사이에 평양 신학교에 들어갔다 이말이유. 장인은 비록 예수를 안 믿었지만 신사가 되서 돌아온 사위를 보고는 생각을 바꿨대유.” 시아버지의 이야기는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는” 아브라함과 다를 바 없습니다. 가난이 싫어 고향을 떠난 10대 고아 소년에게 금산은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자익이 인정받은 것은 성실과 그에 터잡은 실력입니다. 마치 요셉과 같습니다. 종으로 팔렸을 때나,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나, 바로의 총리가 되었을 때나 요셉은 성실하였고 그 동안 연마한 실력을 발휘합니다. 성실과 실력은 하나님이 높이시는 길로서, 우리가 갖추고 있어야 할 덕목입니다.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그는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언22:29)


전도서 9: 8절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본절은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삶을 기쁨으로 준비하라는 명령입니다. 전도자는 허무 속에서 쾌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아는 자가 하나님이 주신 오늘을 축제처럼 살아가라는 신앙적 명령을 내립니다. 흰 옷은 고대에서 축제와 기쁨의 상징이었고, 머리에 바르는 기름은 환대와 풍성함의 상징이었습니다. 전도자의 말씀 대로 덧없는 삶 속에서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쁨을 적극적으로 누려야 합니다. 신약은 이 기쁨을 더 확장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임을 말합니다. 희락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닙니다. 의가 세워지고, 평강이 자리 잡을 때 성령께서 주시는 종말론적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상황을 넘어서는 기쁨이며,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기쁨입니다. 메시야가 오실 때 모든 사람은 이 희락을 누리게 됩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은 바로 이 종말론적 기쁨의 상징입니다. 잔치의 기쁨이 끊어지려는 순간, 예수님은 더 좋은 포도주를 주심으로 메시야의 시대에 임한 새롭고 넘치는 종말론적 기쁨을 드러내셨습니다. 확실히 신약의 기쁨은 전도자의 명령과 차원이 다릅니다. 전도자는 허무 속에서 기쁨을 찾으라 했지만, 주님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영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허무 자체가 없습니다. 소망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이 영생의 보증이십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의 가정은 바울의 전도로 하나님을 믿고 이런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행16:34).

전도서 9: 9절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본절은 현실은 허무하나 하나님이 주신 ‘관계의 기쁨’을 붙잡을 것을 교훈합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라.” 전도자는 삶이 덧없지만, 하나님은 여러 기쁨들을 선물로 주셨음을 밝힙니다. 즉, 먹고 마시는 기쁨(9:7), 흰 옷과 기름의 기쁨(9:8), 그리고 본절의 관계의 기쁨이 그 예입니다. 부부의 사랑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기쁨이며, 수고 중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우리의 몫이나 사람마다 갖지는 못합니다. 실로, 결혼생활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들이 누리는 복입니다(잠언18:22). 어제도 언급되었지만, 신약은,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임을 선포합니다. 여기서 ‘희락’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의와 평강이 자리 잡을 때 성령께서 주시는 종말론적 기쁨입니다. 이 세상의 순간적 즐거움을 넘어, 부활의 소망을 갖고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고 있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그 성격은 잃어버린 양이 하나님께 돌아올 때 잘 드러납니다. 누가복음의 증언입니다. 삭개오는 돌감람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고 있던 중 부르심을 듣고 기뻐하며 곧장 내려와 집으로 영접합니다. 그때 “죄인의 집에 들어간다”고 이웃들이 수군거리자, 회개하여 “주여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토색한 것이 있으면 네 갑절로 갚겠습니다”고 말씀드리자, 주님은 구원을 선포하며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말씀하십니다(눅19:9). 삭개오는 후에 가이샤라의 주교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가이사랴(3)
사도행전 25: 1절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가이사랴는 로마총독의 관저가 있었으며 로마로 압송되기 전 바울의 재판과 증언(행 25장) 등이 행해진 곳입니다. 가이사랴는 초기 기독교 복음 전파와 신학의 중요한 중심지였습니다. 가이사랴 해변을 내려다보면 바다 속에 잠긴 거대한 방파제의 선명한 흔적이 보입니다. 헤롯이 바다 속에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항구의 기초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묵묵히 쌓아 올린 구조물이 전체 항구를 지탱했습니다. 짐배 위에 시멘트를 붓고 다시 그 위에 짐배를 얹어 바다 속으로 가라앉히는 작업을 반복했고, 북쪽 방파제는 거대한 나무 틀을 바다에 띄운 뒤 잠수부들이 밀어 넣어 시멘트를 채워 올렸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수면 아래에서 이루어졌지만, 그 숨은 기초가 항구의 위용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솔로몬 성전도 같습니다. 성전이 세워질 때 망치나 도끼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돌들은 이미 보이지 않는 채석장에서 다듬어져 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은 숨은 자리에서의 준비가 만들어낸 열매였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보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쌓아 올린 기초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충실히 준비된 사람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가이사랴의 방파제처럼, 우리의 신앙도 깊은 곳에서 단단히 세워져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보다 숨은 충실함이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기초를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기초가 흔들리지 않을 때, 삶의 항구도 견고하게 서게 됩니다. 우리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믿음은 신념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1,2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단순한 주관적 신념이 아닙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능력, 형제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갈멜 산에서 하나님의 불을 경험한 엘리야는 누구보다 강한 믿음의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심판한 그의 담대함은 인간의 용기를 넘어선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이세벨이 “내일 너를 죽이겠다”는 말 한마디에 그의 마음은 무너졌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에서 브엘세바를 지나 광야까지 약 300km를 도망가서 한 로뎀나무 밑에서 쓰러집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책망하는 대신 천사를 보내 떡과 물을 공급하심으로 지친 종을 일으키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힘을 얻은 엘리야가 호렙 산에 이르자, 하나님은 “내가 남겨 둔 칠천 명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모르는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미래를 준비하고 계셨고, 엘리야의 사명도 다시 세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를 만나 제자 삼으라고 명령하심으로, 고독한 엘리야에게 형제 사랑을 경험케 하십니다. 믿음은 홀로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서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자랍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혼란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고, 외로움 속에서 형제 사랑을 회복할 때 믿음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현실을 해석하고 견디게 하는 힘이 됩니다. 우리도 엘리야처럼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먹이시고, 깨우시고, 다시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매일묵상(2026/8/17-21)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2)
시편 113:7,8절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금산교회의 창립자의 한 분인 이자익 목사는 8남매를 두었으나, 지금은 자녀들 역시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전의 셋째 아들 이성환 집사는 아버지에 대하여 “내는 아버지를 잘 몰러, 일주일이면 하루나 집에 들어오실랑가? 집에 오셔두 자식들한테 얼매나 엄하셨는디…”하면서 “엄하신 목사”로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말년의 이자익 목사를 모셨던 며느리 김양호 권사는 소상히 언급합니다. “긍께, 시아버님은 경상남도 남해군에 사는 장수 이씨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나셨는디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여섯 살 때 친척집에 들어가 살았는디 허구헌날 일만 시켰대유 글씨, 오죽 했으먼 열두 살 땐가 고향을 떠나셨대유. 인자 배를 타고 하동을 거쳐 순천으로 해서 금산까지 와서는 팟정이에서 포목장사를 하는 조덕삼 씨네 집에 들어가 마부 노릇을 하게 된거지……” 이렇게 이자익 목사의 어린 시절은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그를 빚으셨고, 결국 장로, 목사, 총회장으로 세우셨습니다. 요셉도 같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버림받았고, 노예로 팔렸으며,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수모까지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요셉을 빚으셨고, 결국 애굽의 총리로 세워 많은 생명을 살리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역경에 놓이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신실해야 합니다(시편37:3-6). 요셉과 이자익은 청년의 때에 모두 성실하였습니다. 다음 주에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편84:11).

전도서 9:6절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 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


살아 있는 동안만 우리는 사랑하고, 미워하고, 질투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감정의 종결입니다. 죽은 자는 사랑도, 미움도, 질투도 없습니다. 그들은 관계 속에서 움직이지 못하며, 이 땅에서의 모든 몫이 끝났습니다. 전도자는 삶의 고통을 숨기지 않지만, 죽음의 절대적 종결성을 직면하면서 삶이 주는 작은 가능성을 강조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만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설 수 있고, 사랑을 회복할 수 있으며,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신약은 이 메시지를 더 깊고 더 무겁게 확장합니다. 죽음은 감정의 종결일 뿐 아니라, 최후의 심판으로 이어지는 문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감정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죄책감은 회개로 이끌며, 질투와 미움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부수어뜨립니다. 살아 있는 동안만 우리는 회개할 수 있고, 믿음을 고백할 수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더 이상 선택이 없습니다. 심판만이 남습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길 가시던 중 예수께서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을 보시고,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요9:4)고 하셨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사랑, 미움, 질투 등 모든 감정을 이끌어 갈 그 한 방향입니다. 선을 행할 능력과 지혜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12:17).

전도서 9:7절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본절은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도 삶을 붙잡을 것을 가르칩니다. “너의 음식물을 기쁨으로 먹고, 네 포도주를 즐겁게 마시라”는 말씀은 단순한 쾌락을 뜻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불가피함을 직면한 전도자의 결론으로 감사함을 갖고 삶을 누리는 모습입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이 이미 우리의 삶을 기쁘게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망을 결정하셨어도, 삶의 기쁨 역시 허락하셨습니다. 삶은 덧없지만, 그 덧없음 속에서도 하나님은 기쁨을 선물로 주산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모든 것을 종결시키나, 경건한 신자들은 오늘을 감사히 살아갈 줄 압니다. 신약은 이 말씀을 완성합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죽음 이후에도 끝나지 않는 기쁨—죄사함과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전도자가 말한 “하나님이 이미 네 행위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선언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실현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 앞에서 허무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씻김 받고, 그분의 부활로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며 기뻐하는 삶은 단순한 일상의 즐거움이 아니라, 죄사함 받은 자의 감사와 영생의 기쁨을 누리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실 때, 떡과 잔을 들어 거듭 감사하셨습니다. 죽음을 알고도 거듭 감사하시는 그 순간은,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의 선언입니다. 전도서의 “먹고 마시라”는 명령은 우리 주님에 의해 이렇게 완성되었습니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26).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가이사랴(2)

사도행전 11:11절
“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가이사랴는 헤롯대왕이 주전 30년경 건설하기 전까지 ‘스트라톤의 탑’이라 불리던 작은 항구였습니다. 주전 3세기 베니게 사람들이 사용했으나, 지중해의 강한 남서풍과 해안 절벽의 거센 바람으로 항구로서는 부적합하여 버려졌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로마의 후원을 받아 이곳을 새롭게 개발하며, 인공적으로 300척의 배가 동시에 정박할 수 있는 10만㎡ 규모의 거대한 항구를 건설했습니다. 그는 이 항구를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기리기 위해 ‘세바스토스 항구’라 명명했습니다. 이 항구는 자연 지형을 이용하지 않고 완전히 인공적으로 조성된 세계 최초의 대형 항구 중 하나로, 당시 로마의 기술력과 헤롯의 건축적 야망을 보여줍니다. 가이사랴는 이후 로마 군대의 주둔지이자 헤롯의 궁전이 자리한 도시가 되었으며(행 10장, 12장), 그의 아들 헤롯 아켈라오가 통치했으나 실정으로 인해 로마 총독이 파견되었습니다. 총독은 가이사랴를 행정 수도로 삼고 유대를 통치했습니다. 이곳은 로마 시대를 거쳐 비잔틴, 초기 이슬람, 십자군 시대까지 번성하였습니다. 본절에서 누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가 가이사랴에서 무너졌음을 밝힙니다. 베드로는 이곳에서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기 전까지, 복음은 유대인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고 말씀하시며,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의 집으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에 복음의 문은 모든 이방 민족에게 열려졌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사랑 곧 회복의 길
로마서 12:15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정신과 의사 나종호 박사는 말합니다. “열심히, 성실히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닥친 트라우마와 불행으로 인해 인생이 180도 달라지게 됩니다.” 나 박사는 자신이 만난 환자 중 노숙자가 있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대기업 임원이었지만, 아내를 잃은 뒤 마약에 중독되어 사회적으로 몰락했습니다. 그 과정을 보며 그는 깨달았습니다. 사회가 말하는 성공은 신기루 같고, 우리가 이룬 것에는 노력뿐 아니라 운도 많이 작용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과 타인에게 관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괜찮을 수 없습니다. 그 자체를 이해하고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해야 합니다. 나박사와 같은 전문가의 도움이나 따뜻한 말 한마디는 큰 격려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신비한 모습으로 자주 나타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고 희생하며 배려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의 풍랑에서 위협받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구원받을 것을 알려주었으며, 그 말을 믿고 안심합니다(하나님의 계획). 그리고 구조받은 멜리데라는 섬에서 이질에 걸려 고생하는 추장과 여러 환자들에게 안수하여 고칩니다(하나님의 능력). 그러나,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서 70킬로 떨어진 ‘압비오 광장”에 다다랐을 때, 마중 나온 형제들을 보고서 마음에 담대함을 얻었다고 누가는 증언합니다(형제 사랑). 형제 사랑이란 다 그런 것이죠! 여러 가지 인생의 풍랑에 시달리는 우리는 이 세 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매일묵상(2026/8/10-14)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
사무엘 16:10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본절은 소년 목동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신 하나님의 기준을 보여줍니다. “전라도 목사가 경상도 가서 목회에 성공한 예는 찾기 어려워도 전라도 와서 목회에 성공한 경상도 목사는 많다.” 한 호남교회사가의 지론입니다. 이를 증명하듯이, 경북 경산 출신인 배은희 목사는 전라도 ‘모교회’인 전주 서문교회의 전성기 15년(1921-1936년)동안 목회하였고 ‘사랑의 원자탄’으로 유명한 여수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도 본래 경남 함안 출신으로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지만 그의 목회와 순교는 전라도 여수 땅에서 이루어졌고 그 기념관도 여수에 있습니다. 아마도 전라도가 경상도보다는 외지인들에 대한 배척이 덜했던 것 같습니다. 이자익(1879-1958)목사도 그렇습니다. 경남 남해 출신인 이자익 목사는 전북 김제와 정읍에서 목회하였고 전북 노회장을 거쳐 조선예수교 총회장을 3번 역임한 바 있습니다. 한 번 들은 것은 잊지 않았으며 복잡한 장로교 헌법과 규칙을 줄줄 꿰고 있어 ‘법통’(法通) 총회장으로 불렸습니다. 특히 머슴의 신분이었으나 주인 조덕삼을 제치고 먼저 장로로 피택된 된 사건은 유명합니다. 그 머슴은 후에 목사가 됩니다. 이런 이자익 목사를 배출한 교회가 지금까지 ‘ㄱ’자 예배당을 간직하고 있는 금산교회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출신과 지역은 장벽이 아니라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어디서든, 그분의 뜻에 따라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쓰임받는 기준은 오직 깨끗하게 준비된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2:21).

전도서 9:4절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전도자는 “살아 있는 자에게는 소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망은 막연한 낙관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만 누릴 수 있는 작은 가능성, 돌이킬 기회, 하나님 앞에서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뜻합니다. 죽음은 모든 활동을 끝내지만, 살아 있음은 비록 미약해도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문을 열어 둡니다(전9:10). 전도자는 이 진리를 강조하려고 후단에서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개는 가장 비천한 존재였고, 사자는 가장 존귀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개는 비천해도 움직이고, 느끼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전도자는 바로 이 작은 활동성을 살아 있음의 가치로 봅니다. 살아 있는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고, 잘못된 길에서 돌아설 수 있으며,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구분을 지우지만, 살아 있음은 하나님 앞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남겨 둡니다. 본절은 신약의 관점에서 구원과 관련된 중요한 교훈을 내포합니다 ㅡ “살아 있음은 하나님 앞에서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십자가 위에서 회개한 강도의 예가 있습니다. 만약 그 강도가 죽었다면 더 이상의 선택도 회개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강도는 다리가 꺾이기 직전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주님은 즉각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살아 있음은 큰 선물입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

전도서 9:5절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9장은 인간 존재의 가장 냉정한 현실을 말합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공통된 운명입니다. 의인과 악인,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경건한 자와 불경건한 자 모두가 이 운명 앞에서 평등해집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죽음의 보편성을 말하면서도, 살아 있는 자가 가진 작은 우위를 강조합니다. 그 우위는 의식, 곧 자기 인식입니다. 살아 있는 자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인식은 비극적이나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또한 제공합니다. 즉 살아 있음은 하나님 앞에서 다시 선택할 여지를 갖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기억도, 감정도, 행동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몫이 끝났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자는 하나님께 돌아설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며, 삶의 방향도 새롭게 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전도서 9:4–5절이 주는 분명한 교훈입니다. 한편, 죽음을 아는 의식, 그것은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부르심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부활의 소망으로 이끕니다. 히스기야는 죽음이 임박하자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였으며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하셨습니다. 히스기야는 죽음을 알았고, 그 인식 때문에 하나님께 돌이켰으며, 그 돌이킴이 그의 삶을 새롭게 만든 예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기회는 늘 주어지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만 사랑하고, 회개하며, 순종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가이사랴
사도행전 10:24절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가이사랴는 헤롯대왕이 건설한 신약 시대의 항구도시입니다. 헤롯대왕은 로마 문화를 유입하고 로마와 직접 연결되는 관문을 만들기 위해 항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욥바는 유대인들의 거주지였고, 그 유대인들은 로마화를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헤롯은 이두메아 출신이란 약점을 가졌기에 욥바를 로마식 도시로 바꾸지 못하고 새로운 항구도시를 건설한 것입니다. ‘가이사랴’라 명명한 이유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가이사랴의 위치는 욥바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지중해 연안입니다. 헤롯은 이곳에 거대한 인공항, 원형경기장, 신전, 행정시설을 갖춘 로마식 도시를 완성했습니다. 이후 가이사랴는 로마 총독부가 자리한 정치 중심지이자, 기독교가 확장되는 중요한 도시로 성장합니다. 요세푸스는 가이사랴의 아름다움과 규모를 상세히 기록했고, 1959년 링크 부부의 탐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발굴되고 있습니다. 본절은 베드로가 가이샤라에 있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여 복음을 선포한 사실을 증언합니다. 이 사건은 유대인 중심의 복음이 이방인에게 확장되는 결정적 전환점이었습니다(행10장, 11장). 일곱 집사 중 한 명인 전도자 빌립은 세 명의 딸과 함께 가이샤라에 거주하였고, 바울은 2년 간 가택연금을 당합니다. 그는 총독의 재판을 거쳐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압송됩니다. 비록 가이사랴는 로마 권력의 상징이었지만, 하나님은 그곳을 복음 확장의 거점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의 편견으로 하나님을 제한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언16:4).

시편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우울함과 관련하여, 나종호 박사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감정을 기록하며 스스로 조절하라. 기분이 좋았던 날 무엇을 했는지, 어떤 행동이 스트레스를 만들었는지 점검하는 것입니다. 글쓰기나 운동처럼 자신을 회복시키는 활동을 정해진 주기로 실천하면 감정의 흐름이 안정됩니다. 둘째는 자책을 내려놓아라. 성공은 노력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시기· 우연· 환경이라는 요소가 개입합니다. 따라서, 자신과 타인에게 관대해져야 합니다. 여기에 심리학은 왜곡된 사고를 교정하는 인지행동치료, 활동을 회복시키는 행동활성화, 관계 유지, 수면·식사·운동 관리 같은 보완적 처방을 더합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다루데 유익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문제를 감정이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에서 찾습니다. 심리학은 스스로 행복을 만들라고 말하나, 우울과 불안의 뿌리에는 죄책감, 두려움, 영적 공허가 자리합니다. 이것은 감정 조절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 관대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에서 회복의 길을 찾습니다. 죄를 범한 다윗의 회복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는 죄를 회개했고, 말씀을 붙들었고, 성령께서 떠나지 않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성령님 안에서 새 생명, 즉 의와 평강과 기쁨을 누리면 우울은 자연히 사라집니다(롬14:17). 이때 심리학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집니다(롬5:5). 사랑과 우울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면(하나님께 아뢰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매일묵상(2026/8/3-7)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서문교회(7)
시편 133:1절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인생을 살다 보면 좋은 일과 어려운 일을 모두 겪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기에 갈등이 생기기 쉽고, 때로는 분열의 아픔을 겪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연합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됨을 지켜 나가는 일입니다. 서문교회 배은희 목사가 “조선의 성자”라 부른 방애인 선생은 스물셋에 장질부사로 별세하여 화산동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묘는 오랫동안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확인한 김대전·김연수 두 장로는 교회에 알리고, 묘소를 서문교회 묘지로 이장했습니다(1999년). 또한 서문교회는 『전주 서문교회 100년사』를 출판한 뒤, 100주년 기념 예배당 지하에 “역사 자료실”을 마련하여 교회와 호남 선교의 귀한 자료들을 전시했습니다. 방문객도 크게 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랑과 헌신이 세운 아름다운 역사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교회를 이끈 당회장 목사의 은퇴 후 후임을 세우는 과정에서 심각한 내분이 일어났고, 김대전 장로를 비롯한 많은 “뿌리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후 서문교회를 여러 차례 답사한 이덕주 교수는 김대전 장로를 다시 만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서문교회의 역사는 분명한 사실을 말합니다. 사랑과 헌신은 공동체를 세우지만, 분열은 그 유산을 무너뜨립니다. 연합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 그리고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할 때 공동체는 다시 하나가 됩니다.겸손함과 온유함으로 깍듯이 대하십시오.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십시오.”(엡 4:2, 새번역)

전도서 9:2절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본절은 의인과 악인, 선인과 죄인, 깨끗한 자와 부정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드리지 않는 자, 맹세하는 자와 맹세를 피하는 자를 나열합니다. 이 구분은 율법과 지혜가 강조하는 바이나, 이 차이들은 죽음 앞에서 무너집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이라는 동일한 운명을 향해 걸어갑니다. 윤리적 차이도, 종교적 차이도, 제의적 차이도 죽음 앞에서는 힘을 잃습니다. 그러나 허무가 그 결론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인간을 철저히 낮추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마지막 날 모두 부활할 때 생명은 사망을 삼키고 승리할 것입니다(고전15:54-56). 그러나, 이 땅에서는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받을 수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있습니다(눅16장). 생전에 부자는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죽은 뒤에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당하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 안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간 것입니다. 나사로의 ‘의’가 언급되지 않았으나, 부자의 허물은 분명합니다. 문 앞에서 고통당하는 나사로를 무시하였습니다. 가인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민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빌2:12).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2:28).

전도서 9:3절
“모두가 다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잘못된 일 가운데 하나다. 더욱이, 사람들은 마음에 사악과 광증을 품고 살다가 결국에는 죽고 만다.”(새번역)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은 죽음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합니다. 의인과 악인, 지혜자와 우매자 모두에게 임합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죽음 자체보다,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을 안타까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에 사악과 광증을 품고 살다가 결국에는 죽는다”고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악’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성을, ‘광기’는 하나님 없이도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뜻합니다. 사람은 죽음을 알면서도 욕망을 쫓고, 하나님보다 자신의 계획을 신뢰합니다. 전도자가 말하는 인간의 광증입니다. ‘결국에는 죽고 만다’라는 말로 돌연 끝나는 본절처럼 죽음은 갑자기 찾아옵니다. 인간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계획과 자랑은 죽음 앞에서 무너집니다. 누가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이 사실을 날카롭게 드러냅니다(눅12:16-21). 그 부자는 더 큰 창고를 짓고 오래도록 풍요를 누리려고 계획하나, 하나님은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겠다”고 결정하십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계산에는 하나님도, 죽음도 없습니다. 그의 죽음은 돌발적으로 찾아오지만, 어리석게도 부자는 이 현실을 무시합니다. 따라서 본절은 죽음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죽음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서 오늘을 지혜롭게 살라는 권면입니다. 죽음을 잊어버리는 삶은 헛된 욕망으로 끝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넘어 영원한 소망으로 이어집니다(롬6:23).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욥바
사도행전 11:13절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많은 욥바 사람들은 죽은 다비다를 살린 베드로의 표적을 보고 주께 돌아왔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욥바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전에는 헬라가 지배를 하여 프톨레미 1세 소테르(주전 367-283)는 욥바에 수비병을 주둔시켰습니다. 이후 헬라에 맞선 유다의 마카비 가문은 욥바를 공격하였고, 약 20년 뒤 시몬 마카비가 욥바를 정복합니다(주전 142년). 시몬 마카비는 셀레우코스 왕조에서 독립하여 하스모니안 왕조(주전 142~63년)를 창립하였으며, 항구 욥바는 하스모니안 왕조의 경제, 군사 기반을 크게 강화시킵니다. 80년이 지나 하스모니안 왕조가 폼페이우스에게 복속되자(주전 63년), 욥바는 다시 이방인(로마)의 지배에 들어갑니다. 한편, 헤롯 대왕이 욥바의 로마화를 시도하자, 유대인들은 강력히 저항하였습니다. 이에 헤롯은 욥바 북쪽 40km 지점에 새로운 항구도시 가이사랴를 건설하게 됩니다(주전 30년경). 욥바는 유대인의 작은 항구로 남아 있다가 1세기 이후 기독교 도시로 성장하였습니다. 한때 수많은 나라가 차지하려 했던 욥바는 복음이 이방 세계로 나아가는 관문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항구를 차지하여 번영하려고 싸웠지만, 하나님은 아무런 다툼 없이 그 항구를 통해 화평의 복음을 전 세계로 보내셨습니다. 세상적인 영토와 번영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2:44).

하나님의 도우심
로마서 12:15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모든 사람이 문제를 갖고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우울증, 무기력 등에 빠집니다. 우울증이란 과거 혹은 먼 미래에 너무 사로잡혀 일상 생활 자체가 힘든 경우입니다. 가족들이 “식사했니?” 하면서, 지속적인 관심을 표현해야 합니다. 물론, 따뜻한 마음을 갖고 해야 하지요. 우울해 보이면, “내게 말해라…대화를 나누면 된다”고 하면서, 혼자되지 않게 해 주어야 합니다. 예일대 의과대학교 교수인 나종호 박사의 레지던트 동기는 극단적 선택을 하여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 교수는 바로 그 전 주에 함께 당직을 선 적이 있습니다. 외롭게 밤을 새운 그 친구에게 ‘잘 지내고 있냐?’하고 문자로 물었더니, 그는 ‘바쁘진 않은데 왜인지 모르게 혼자인 것 같다’고 답했습니다. 나 교수는 친구의 그 회신에 ‘그때 (내가) 조금 더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했더라면…’하고 후회한 뒤, “내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한 명만 있어도 그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나교수의 이런 조언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역시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위로나 따뜻한 말, 즉 사랑으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무거운 바위는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하고 말한다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군대 귀신이 거라사 광인을 붙잡았듯이, 죄의 힘 또는 마귀의 유혹의 힘이 우리를 사로잡으려고 하는 경우입니다. 이땐 지체 없이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막9:29). 그러면, 주님은 강한 자 마귀를 결박하고 참 자유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매일묵상(2026/7/27-31)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서문교회(6)
로마서 12: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서문교회의 종탑 옆에 또 하나 기념물이 있습니다. 1943년 4월에 ‘교회 창립 50주년’을 맞아 세운 기념비입니다. 비석은 화강암의 4각 기둥 형태로 꼭대기에 십자가를 깍아 세웠습니다. 당대 ‘전주 명필’ 설송 최규상의 예서체입니다. 표기법이 특이합니다. 비명 전문이 한자입니다. 일제 말기라 한글을 쓰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간단하게 ‘1893年’이라고 하면 될 것을 ‘명치 26년 계사년 주후1893년’과 같이 복잡하게 표기되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은 미국과 전쟁 중이라 ‘서기’ 연호를 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명치’ ‘대정’ ‘소화’ 같은 일본 연호를 대놓고 쓰기도 뭣해서 생각해 낸 것이 ‘을미(1895)’ ‘을사(1905)’ ‘무진(1928)’과 같은 간지(60갑자) 연호였습니다. 서기 연호를 사용 시에는 일본 연호를 함께 병기하여 감시와 탄압을 완화하려 했습니다. 비석 우측면에 건립연도를 ‘主後一九四三年’과 ‘昭和 十八年’나란히 새겨진 것도 그 때문이나 해방 후 ‘昭和’란 연호를 시멘트로 발라 읽을 수 없었습니다. 비석의 글씨에는 시대의 억압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비석을 세운 교회의 마음에는 하나님 앞에서 흔들리지 않으려는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의 믿음이 떠오릅니다. 포로로 잡혀가 바벨론의 언어와 교육을 받고, 이름은 바뀌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그 청년들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연호와 정권은 바뀌어도 그리스도는 변하지 않으며, 그분을 향한 교회의 사랑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전도서 8:17절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본절은 8장의 최종 결론입니다. 전도자는 오랜 탐구 끝에 지혜의 한계를 선언하는데, 이른바 “회의적 결론” 입니다(롱맨). 아무리 깊이 연구해도, 아무리 밤낮으로 고민해도,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지혜로 그 전모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지혜자조차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는 전도서 전체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3:11; 7:25–29; 9:12; 11:5). 전도자는 자연, 역사,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알 수 없었습니다. ‘계시의 부재’ 때문입니다(라우하). 그러나, ‘죽은 자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의 계시를 가진 신약은 분명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첫째, 악인들이 존경받고 장수하며 아무런 벌도 받지 않은채 죽는 경우(10,11), 전도자는 다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다.’란 권고를 할 뿐입니다. 신약에 따르면 그것은 악인에 대한 저주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악인은 마지막 날 부활하여 영원한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둘째, 악인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의 경우(14), 전도자는 ‘헛되다’고 토로하며 작은 일상을 즐기라고 권면합니다. 신약은 고난 속에서 의인이 하늘에 상을 쌓고 있음을 말합니다. 마지막 날, 의인은 부활하여 의로우신 재판장에게서 반드시 상을 받습니다. 전도자는 계시의 부재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파악하지 못했지만, 신약의 성도는 계시의 빛 아래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됩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전도서 9: 1절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본절은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의인과 지혜자의 삶조차 모두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음을 밝힙니다. 그들이 어떤 길을 걷게 될지는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의인이라 해서 사랑만 받고, 악인이라 해서 미움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사랑과 미움, 형통과 고난이 섞인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현실입니다. 전도자는 이 혼합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합니다. 의인도 고난을 겪고, 악인도 형통을 누립니다. 삶의 경험은 기대와 다르게 흘러갑니다. 지혜로운 자조차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함은 물론, 미래의 “사랑과 미움의 비율”조차 예측불가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 부족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이 가진 본질적 한계입니다. 지혜는 이런 문제점을 인정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하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인간은 경험을 기준으로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주권으로 세상을 이끄십니다. 의인의 고난이 실패를 의미하지 않고, 악인의 형통이 승리를 의미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리고, 감옥에 갇히는 등, 그의 삶은 파란만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높이사 만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십니다. 요셉의 삶은 하나님의 주권적 작품입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으로 인도하심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승리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욥바
여호수아 19:46절
“메얄곤과 락곤과 욥바 맞은편 경계까지라”

욥바 주민들은 철병거가 있었기에, 욥바를 배정받은 단 지파는 밀려나 북쪽의 라이스 땅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이 시기 욥바에서는 블레셋의 토기와 흔적이 발견되어, 이곳이 가나안 사람들이 아닌, 에게 혹은 갑돌 출신 블레셋의 도시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안드로메다라는 욥바의 공주 이야기도 이 지역의 비(非)가나안적 문화 배경을 반영합니다. 블레셋의 신전은 두 기둥이 지붕을 받치는 큰 규모였고, 바닥에서는 사자 해골이 발견되어 ‘사자 신전’이라 불립니다. 한때 욥바는 솔로몬이 베니게의 백향목을 들여온 항구로 알려졌으나, 최근 발굴에 따르면 실제 항구는 북쪽 5km 떨어진 텔 카실레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히스기야 시대에도 욥바는 아스글론 영지였고, 산헤립이 가나안 정복 시에 함락되었습니다(주전 701년). 이후 앗수르가 멸망하자 욥바는 바빌론의 손에 넘어갔고, 알렉산더가 가나안을 점령했을 때는 시돈·두로와 함께 헬라 도시가 되었습니다(주전 332년). 가나안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약속된 유업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완전히 정복한 적이 없었고, 바벨론, 헬라, 로마와 같은 강대국도 이긴 적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당신의 백성에 대한 믿음의 신실함을 시험코자 함입니다. 둘째, 세상은 아무리 완벽해 보여도 영원한 기업이 아닙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약할 때 신자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세가지는 오늘날도 같습니다. 따라서, 좋은 환경과 직장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신실하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

다니엘 1:8절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바벨론에서 포로 다니엘(17살)은 친구 3명과 함께 뽑혀 바벨론의 학문을 배우게 됩니다. 대단한 영예였지만, 왕의 진미는 먼저 우상 말둑에게 진상된 후 배정되기 때문에 다니엘은 먹지 않고자 결심합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가 행한 것은 도덕적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지키려는 결단입니다. 하나님은 지혜와 총명을 더하셨고, 그는 제국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영국 국회의원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는 작은 체구와 약한 시력, 정치적 약세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날을 늘 기억하면서, 두 가지 사명을 붙들었습니다; “노예무역을 막고, 관습을 개혁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노예제도는 단순한 사회문제가 아니라 영국이 회개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죄악이었습니다. 그의 폐지법안은 20년 동안 기득권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1807년 노예무역이, 1833년 노예제도 자체가 폐지됩니다. 윌버포스는 사흘 뒤 세상을 떠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의로운 삶은 착함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열매 맺으려면, 반대와 질시 등 고난은 당연합니다. 이 때문에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습니다. 오늘 우리도 같은 부르심을 받았음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이다. 만약 우리가 그분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을 받고 있다면, 진실로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이다”(롬8:17,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