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6/2/23-27)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시편 37:27절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선교사들은 ‘교육·의료·복음’이란 삼각 선교의 틀을 잡은 뒤, 1905년 옛 회현당 자리에 8칸 기와집을 지어 남자학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 ‘신학문당’이라 불리던 이 학교가 ‘신흥학교’의 출발입니다. 신흥학교는 1911년 양옥 교사와 한옥 기숙사를 마련했고, 1928년에는 지하 1층·지상 2층, 475평 규모의 웅장한 본관을 세웠습니다. 건축비 8만 원을 기부한 미국 교인 리차드슨의 이름을 따 ‘리차드슨관’이라 명명했습니다. 1936년에는 리차드슨 부인이 오빠 E. 스미스를 기념해 보낸 9천 달러로 165평 규모의 강당을 지어 ‘스미스기념관’이라 하였습니다. 여학교는 ‘서원너머’ 화산동 300번지에 세워졌습니다. 1904년 전킨 부인이 기틀을 잡았고, 1909년 벽돌 교사를 마련하면서 1908년 별세한 전킨 목사를 기념해 ‘전목사기념여자중학교’, 줄여서 ‘기전여학교’라 불렀습니다. 그 후 2층 벽돌 건물을 증축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100년이 넘은 선교의 역사 속에는 한 가지 공통된 주제가 흐릅니다. 바로 ‘선한 일’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선교사들은 일제와 양반 권세에 눌린 서민들에게 단순히 복음만 전하지 않았습니다. 조선 백성의 필요를 먼저 채우고 복음으로 이끄는 전략입니다. 복음과 선한 일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복음을 받아 새 사람이 되면 자연히 그리스도를 본받아 선한 일에 힘쓸 것이며, 이때 교육은 그 도구입니다. 선교사들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이름은 한민족의 마음 속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전도서 7:4절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본절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2)는 메시지를 또 반복하는데, 죽음의 현실을 직시하면 참된 지혜를 얻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우울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유한을 인정하여 오늘을 더 진지한 삶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즐거움만을 좇으며 현실을 외면합니다. 한편, 본절은 전도서 전체에서 반복되는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라’는 권면과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전도자는 때로는 즐거움을 최고의 선이라 말하면서도, 또 다른 곳에서는 그것을 어리석음으로 규정합니다. 이 모순처럼 보이는 긴장은 전도자가 전통적 지혜에 대해 깊은 회의와 갈등을 겪고 있음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즐거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죽음을 잊은 채 쾌락을 절대화하는 태도가 문제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죽음의 현실을 기억하면서도 하나님이 주신 일상의 기쁨을 감사함으로 누릴 것을 권면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삶의 기쁨을 누리되, 그것이 궁극이 아님을 기억합니다. 실로, 유한함을 아는 사람만이 참된 감사와 절제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죽음보다 마지막 심판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부활하여 몸으로 행한 것들을 따라 심판을 받게 됩니다. 좋은 예가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입니다(눅16장). 죽음이 오기까지 두 사람의 운명은 변하지 않았지만, 죽고 나서 두 사람의 운명은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뒤바뀌어집니다. 진실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전도서 7:5절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전도자는 7장에서 ‘지혜로운 삶의 태도’를 교훈합니다. 이를 위해 전도자는 ‘—보다 낫다’(better than) 라는 구문을 사용하여 참된 삶의 방향을 확연히 보여줍니다. 지혜자란 인생의 의미와 닥쳐올 운명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이고, 미련한 자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따라 즐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한 명의 지혜자가 주는 책망은 바보들의 합창보다 낫습니다. 책망은 듣기 불편하지만, 우리를 진짜 현실—특히 인간의 한계, 죄, 죽음, 책임—로 데려갑니다. 우리는 이런 불편하지만 진실한 말을 가치 있게 여겨야 하는데, 이는 진실과 직면하면 지혜가 오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아무리 즐겁고 달콤해도, 현실을 잊게 만드는 도피적 즐거움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 길은 패망의 길입니다. 다니엘서 5장은 벨사살 왕의 행태를 말합니다. 그는 바벨론의 마지막 왕입니다. 페르샤 군대가 바벨론 성을 둘러싸고 있었으나,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하여 온 금 그릇을 술 대접으로 삼고 잔치를 벌리며 우상들을 찬양하였습니다. 그 때 갑자기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 석회벽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너의 시대는 끝났고, 너는 기준에 미달하며, 너의 나라는 곧 무너질 것이다.”)이란 글자를 쓰는 장면을 보자 두려움에 사로잡힌 벨사살 왕은 다니엘을 호출하였습니다. 다니엘은 먼저 왕의 경박하고 불경건한 태도를 책망한 뒤, 나라가 페르샤에게 넘어갔음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날 밤 벨사살 왕은 페르샤 군대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BC 538).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잠언25:1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벧산/ 벧 스안
여호수아 17:16절
“요셉 자손이 이르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 하니”


벧산은 투트모세 3세(BC1479-1425)가 가나안을 정복한 이후 중요한 행정 중심지여서 이집트 제18–20왕조 문서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건물들은 정부 관료의 집, 곡식 저장고, 신전 등으로 대부분 이집트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신전은 가나안 신을 섬겼지만 건축 요소와 제의 용기, 조각상 등은 이집트적 특징을 지녔고, 이는 도시의 종교·문화적 혼합성을 보여줍니다. 관료들의 저택은 대형 구조에 중앙 홀과 여러 방을 갖춘 형태였으며, 건축 자재와 장신구 대부분이 이집트산이었습니다. 이는 벧산의 행정 관료들이 실제로 이집트인이었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세티 1세의 이름이 새겨진 조각상은 이집트가 가나안 도시들의 정복 상황을 기록하고 있어, 벧산이 이집트 지배의 중요한 거점임을 알려줍니다. 이집트의 지배력이 약화되는 시기에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있었지만, 므낫세 지파는 철병거가 있는 벧산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이윽고 가나안 문화와 우상숭배는 므낫세 지파를 타락시킵니다. 그 예가 사사 기드온의 부친입니다. 그는 바알의 제사장이었고, 그의 집에는 바알 신전이 있었습니다. 사사기 1장은 므낫세 지파에 벌어진 현상이 이스라엘 공통이었음을 증언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순종을 하되, 온전해야만 합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12:33).   

생각하고 행하는 신앙
빌립보서 4:8절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바울은 빌립보서 4장 8–9절에서 교회 공동체와 성도 개인이 어떤 마음가짐과 삶의 방향을 가져야 하는지를 제시합니다. 그는 단순히 “좋은 생각을 하라”는 수준을 넘어, 우리의 사고와 삶의 구조를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질서로 재편할 것을 권면합니다. 여기서 ‘(이것들을) 생각하라’의 원어 ‘로기제스세’는 ‘계산, 이성’을 뜻하는 ‘로고스’의 파생어로, 삶의 진로를 그 기준에 따라 계산하고 결정하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9절의 ‘행하라’는 동사는, 지식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바울의 일관된 신앙 이해를 보여 줍니다. 흥미로운 점은, 바울이 제시한 덕목들이 당시 세속 철학자들도 말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들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순히 윤리적 미덕을 나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과 동기 안에서만 이러한 덕목이 참되게 열매 맺을 수 있음을 전제합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적 삶의 핵심은 ‘무엇을 하느냐’보다 ‘누가 우리 안에서 그것을 이루시는가’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요청합니다: 첫째,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치들로 채우고 그것을 기준으로 삶을 정렬하라. 둘째, 그렇게 정돈된 마음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훈련하라. 다음 주에는 바울이 제시한 각각의 덕목을 살펴보며, 그 가치들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성령님의 열매로 나타날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16:8).

매일묵상(2026/2/19-2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벧산/ 벧 스안
여호수아 17:11절
“잇사갈과 아셀에도 므낫세의 소유가 있으니 곧 벧 스안과 그 마을들과 이블르암과 그 마을들과 돌의 주민과 그 마을들이요 또 엔돌 주민과 그 마을들과 다아낙 주민과 그 마을들과 므깃도 주민과 그 마을들 세 언덕 지역이라”


벧산(=평온의 집)은  갈릴리 호수 남쪽 약 27km 지점, 이스르엘 골짜기(평야)와 요단 골짜기가 만나는 곳에 자리해 물이 풍부하고 숲과 비옥한 농경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기원전 5000년경부터 사람이 거주해 왔으며,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과 해안에서 메소포타미아로 이어지는 길목이므로 교통·군사·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벧산은 예루살렘과 떨어져 있었고 갈릴리 지역에 속해 성서 시대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고고학적 관심은 일찍부터 집중되었습니. 텔 엘-후슨(‘요새 언덕’)이라 불린 고대 유적지에서 1920~30년대 발굴을 통해 기원전 3000년경의 마을과 기원전 2000년경의 공동묘지가 발견되었고, 언덕에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까지 20개 층의 거주 흔적도 밝혀졌습니다. 이후 히브리대학교의 발굴로 로마·비잔틴 시대 도시의 모습까지 드러났습니다. 구약성경은 벧산이 므낫세 지파에게 분배되었음을 말하는 본절에서 처음 언급하지만, 므낫세 지파는 이들을 쫓아내지 못합니다(수17:12) 이는 벧산은 교통의 중심지요 비옥한 자연 환경 덕분에 고대부터 강력한 가나안 도시국가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분배받았지만, 실제 점령은 쉽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벧산의 존재는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의 순종 사이의 긴장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히4:1).

빌립보서 4:7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에 대한 해답은 “하나님의 그 평강” 입니다. 바울은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첫째,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평강입니다. 환경이 좋아져서 혹은 필요가 채워져서 오는 평안이 아닙니다. 우리가 처한 외적 조건과 무관하게 주어지는 초월적 평강으로, 염려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침략하듯이 들어오는 하나님의 군사력입니다. 둘째, 그것은 “모든 지각에 뛰어납니다.” ‘지각’(知覺)은 ‘알아 깨닫는 능력’을 말하는데 인간의 인식 능력 전체를 의미하는 헬라어 ‘누스’의 번역입니다. 영어 성경은 통상 ‘understanding’(이해력)으로 번역합니다. ‘뛰어난’은 ‘히페레쿠사’(탁월한)의 번역입니다. 바울은 지각(이해력)과 평강을 대조하면서 ‘평강은 지각(이해력)보다 뛰어나다’고 말합니다. 그는 분명 지식이 불충분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이해와 깨달음 그리고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때로는 우리의 머리로 설명할 수 없거나 설명 자체가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하나님이 침묵하시는지, 왜 고난이 계속되는지 지식으로는 설명이 안 되거나, 설명해도 마음은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평강은 언제나 적절하며 마음의 필요를 채워줍니다. 즉 평강은 그 상황에 ‘항상 맞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셋째, 평강은 마음을 지킵니다. “지키다”는 군사를 보내 지킨다는 ‘프루레오’의 번역이며, 평강이란 하나님의 군사는 근심과 불안을 막아내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지키심을 받아 평안을 누립니다. 주기도문이 간결하게 표현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6:11).

매일묵상(2026/2/9-13)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야고보서 3:17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들 간에 화평이 이룩되었다”는 것이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복음은 생명력이 있어 말에 머물지 않고 선한 행동으로 자라나는데, 전주의 교육과 의료 사역은 화평의 복음이 그 땅에서 어떻게 구체적 현실이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선교사들은 1900년에 정부 요청으로 화산리(현, 중화산동) 서원고개 일대로 이전합니다. 이곳은 일찍이 향교(1441년), 화산서원(1624년) 회현당(1700년) 등이 설립되어 양반 자제를 가르쳤고, 황학대, 다가정, 청양정, 군자정 같은 정각들에서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습니다. 그러나 대원군과 동학혁명을 거치면서 서원과 누각들은 파괴되었고 양반 문화는 쇠퇴하고 있던 중 선교사들은 새로운 기독교 문화를 갖고 들어 왔습니다. 1897년 화산리 언덕 땅 3천여 평을 구입했으니 지금 예수병원 건너편 주차장과 선교사 묘지 동산 일대입니다. 1900년에 약 1만 평의 땅을 양도 받았으니, 지금 예수병원 간호전문대학과 신일아파트 자리입니다. 1905년 경 2만 5천 평을 구입했으니 지금 예수병원과 신흥 및 기전여학교 자리이며, 1910-11년에도 산 8만여 평을 마련했으니 구 예수병원 자리입니다. 그 후에도 계속 땅을 넓혀 1924년 당시 화산동 선교부는 전주천을 끼고 병풍처럼 둘러싼 14만여 평을 확보하고, 교육·의료·전도 사업을 확대시켜 나갔습니다. 다음 주에 보겠지만, 이 같은 선교 사업에 소요되는 막대한 재정은 주로 미국의 성도들이 기부하였습니다. 한국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이미 120년 전에 보여준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6:18).   

전도서 7:2절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1절은 일시적인 부귀영화보다 지속적인 명예의 소중함을 말하고, 2-4절은 일시적 즐거움보다, 마지막 운명인 죽음을 기억함으로 지혜를 얻으라고 교훈합니다. 본절은 ‘초상집에 간다’는 표현을 통해 죽음의 현실을 마음에 둘 때 비로소 지혜가 생김을 강조합니다. 잔칫집의 즐거움은 잠시지만, 초상집은 인간의 끝을 보게 하여 마음을 깨우칩니다. 죽음을 성찰하는 사람은 삶을 바르게 세우지만, 죽음을 잊은 사람은 쉽게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갈멜의 부자 나발이 그 예입니다. 그는 마치 잔칫집에 사는 사람처럼 먹고 마시며 자신의 성공과 부요함에 취해 있었습니다. 죽음을 마음에 두지 않았기에 자신을 도와준 다윗의 선행을 멸시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중재가 아니었다면 그는 다윗의 칼에 죽었을 것입니다. 이튿날 술에 깨어난 나발은 충격을 받아 열흘 만에 죽습니다. 나발의 죽음은 전도서가 말하는 교훈 그대입니다. 죽음을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은 지혜를 잃고, 지혜를 잃은 삶은 결국 파멸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죽음 자체보다 그 너머의 마지막 심판을 기억하며 살아갑니다. 죽음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미 해결되었습니다. 다만, 부활의 생명이 사망을 삼키는 그 날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 날 우리는 우리 일생을 주님 앞에서 결산해야 합니다(마25:14-30). 죽음을 성찰하는 사람은 삶이 겸손해지고, 마지막 심판을 마음에 둔 사람은 오늘의 삶을 주님의 뜻에 맞추어 살게 됩니다. 그 의는 마지막 날 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전도서 7:3절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본절은 “슬픔이 웃음보다 사람을 더 성숙하게 만든다”고 교훈합니다. ‘슬픔’은 ‘카아쓰’의 번역으로, 임신하지 못한 한나의 고통스러운 심경(삼상1:6), 다투는 배우자에 대한 근심(잠21:19) 등에 사용되어 고통에 대한 비참한 심경을 표현합니다. 초상집에서 죽음을 목격하고 인생의 유한함에서 느끼는 숙연함과 겸손함이 배어 있습니다. ‘웃음’은 세상이 주는 일시적 기쁨입니다. 전도자는 인생을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 슬픔이, 세상적이고 허탄한 웃음보다 낫다고 선언합니다. 지혜 문학의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고난은 사람의 내면을 정화하고 지혜를 갖게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세 번째 산에서 살아 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슬픔은 지혜를 얻는 수단 이상입니다. 슬픔은 하나님의 축복의 문으로, 이를 통해 우리의 믿음은 새롭게 빚어집니다. 한나가 좋은 예입니다. 아이가 없는 한나는 온 가족과 함께 실로의 성소로 매년제를 드리러 올라갔습니다. 대적 브닌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는 한나를 질투하여 심한 모욕의 말을 쏟아냈습니다. 남편 엘가나의 위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슬픔에 잠긴 한나는 모든 것이 가능한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서원합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신 뒤 사무엘을 낳게 하십니다. 한나는 5년 뒤 사무엘을 드려서 서원을 이행하였고, 하나님은 다섯 자녀를 더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은사를 주심으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고 한나의 가문은 크게 빛났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은 슬픔을 재료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거라사(3)
마가복음 5: 21절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건너편 거라사에 도착하여 군대 귀신들린 한 남자를 고치셨으나, 돼지 떼 2천 마리가 몰사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주민들은 예수님 일행이 떠날 것을 요청하였고 주님은 다시 갈릴리 지역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요르단의 제라쉬는 바로 그 ‘거라사’로 알려져 왔습니다. 제라쉬는 중동에서 가장 잘 보존된 로마 도시입니다. 1806년 제첸이 발굴을 시작하자 이미 주전 3200~1200년에 주거지가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주전 63년 로마의 정복 후에, 데가볼리 연합도시의 하나로 편입되었고, 주후 90년에는 로마의 아라비아 속주에 포함됩니다. 제라쉬는 ‘중동의 폼페이’라 불릴 만큼 보존 상태가 뛰어나며, 예수님 당시에는 상당히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는 방문하여 개선문을 세웠고, 아르테미스 신전도 이 즈음 건축되었습니다. 또한, 말경기장(1만 명)과 극장(3천석)을 갖추었으며, 인구는 2만~2만5000명 정도로 면적 80만㎡ 규모의 번영한 도시였습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거주하였으며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13개의 교회까지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침략 이후(AD 614) 쇠퇴했고, 주후 749년 지진으로 완전히 몰락했습니다. 지금은 유구한 역사와 현대적인 삶이 공존하는 도시로서, 관광 산업이 주된 경제 활동입니다. 도시의 형태와 경제 구조 및 통치하는 국가는 시대에 따라 바뀌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제라쉬의 역사는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치 않는 것을 붙드는 지혜를 갖게 합니다.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빌립보서 4:6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립보서 4:4-7절에서 바울은 3가지를 당부합니다. 첫째, 기뻐하고 기뻐하라(4), 둘째, 관용을 베풀어라(5), 셋째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아라(6). 그리고 염려의 해답은 하나님의 평강입니다(7). 본절은 염려를 다룹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마 6:25-34)에서 염려의 가장 흔한 원인들을 언급하셨습니다. 그것들은 신체를 의미하는 키(27), 옷(28), 음식과 음료(31), 그리고 미래(34)입니다. 복잡한 현대생활에서도 같음을 볼 때 해 아래 새것은 없습니다. 염려의 치료제는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입니다. 한나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 근심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본절은 기도를 묘사하는 세 단어를 말하는데, 실로 성도의 특권입니다: 기도, 간구, 구함. 기도’는 헬라어 ‘프로수케’의 번역이며, 가장 넓은 의미의 기도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다’는 뜻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간구’는 ‘데에시스’의 번역이며 특정한 필요 때문에 드리는 간절한 요청입니다- ‘하나님, 이것이 꼭 필요합니다!” 구함’은 ‘아이테마’의 번역으로, 구체적인 요청 목록입니다. 사도는 단순히 “기도하라”라고 하지 않고 ‘기도-간구-구함’이란 세 단어를 나란히 배치해 기도의 다양한 모습을 묘사하면서, 기도를 통해 염려가 치유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다만, 그 기도는 ‘감사의 태도’를 갖고 드려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문제가 일어날 수 없고, 하나님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또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받은 줄 믿고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

매일묵상(2026/2/2-6)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누가복음 13:19절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세례교인이 생기면서 전주 선교는 활기를 띠고 작은 시작들이 만들어집니다. 1897년 가을 레이놀즈 부인이 자기 집에서 여성들을 주일학교 형태로 가르쳤는데 이것이 기전여학교의 출발입니다. 이듬해인 1898년 12월 잉골드가 한옥 초가집에서 병원을 열었으니 이것이 예수병원의 출발입니다. 1900. 9월 레이놀즈가 사랑방에서 김창국을 가르쳤으니 이것이 신흥학교의 출발입니다. 이로써 완산 언덕 아래 은송리에는 교회와 병원, 학교로 이루어지는 삼각 선교 거점이 마련됩니다. 이후은송리 선교 근거지는 이씨 왕가의 성역화 정책 때문에 화산동 언덕 일대로 이전합니다. 비록 7년 만에 끝났으나 은송리 선교부는 전주와 전라도 선교의 요람입니다. 여기는 전주에서 첫 예배의 장소요, 첫 세례 교인을 배출하였고, 오늘의 전주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그리고 예수병원이 시작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선교사들보다 앞서 내려와 전도한 정해원의 활동은 전주 선교를 위해 그 의미가 적지 않습니다. 그의 작은 시작이 전주와 전라도 전체의 복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덕주 교수는 정해원의 집을 수소문 끝에 찾아 내자 기념관으로의 매입을 피력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고 결국 헐렸습니다(2004년). 오늘날도 미미한 출발로 보이지만 하나님께 드려진 헌신은 지역과 시대를 변화시킨 씨앗이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스가랴 선지자 시대에도 같았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백성들은 초라한 성전을 20년에 걸쳐 간신히 준공하였으나, 이 성전은 500년 간 이스라엘 예배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슥4:10a).

전도서 7:1절 – 구조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오늘은 새로운 단락인 7장 1–14절의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단락은 1절에서부터 잠언 형식의 교훈 12개가 나오고 13-14절이 결론을 맺습니다. 1–12절의 대부분은 “더 나음(better-than)” 형식의 잠언들입니다. 이는 6장 10–12절의 질문, 즉 “사람에게 무엇이 참으로 좋은가?”라는 물음에 대한 전도자의 간접적 답변입니다. 전도자가 보기에 절대적으로 좋은 것은 없지만, 상대적으로 더 나은 가치들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잠언들에는 죽음과 지혜·우매라는 두 주제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좋다’, ‘지혜’, ‘마음’, ‘우매자’ 같은 단어가 되풀이 되고 있어 문단의 통일성을 갖추었습니다. 결론부인 13–14절은 새로운 단락이 아니라 앞선 잠언들을 결론짓습니다. 특히 7장 14절은 미래의 불확실성 문제를 다시 언급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과 고난의 시기 모두를 받아들이도록 권고합니다. 이 단락은 봉투구조(inclusion)란 문학적 기교를 갖추어서, ‘좋다’와 ‘날’이라는 단어가 문단의 처음(1절)과 끝(14절)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 결과 1–12절의 금지적 성격의 잠언들 전체가 13–14절에 의해 하나의 교훈적 단락으로 완성됩니다(머피). 내일부터 1-14절 단락의 각 구절을 묵상할 예정입니다. 잠언과 전도서가 주는 삶의 지혜는 비록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햇빛을 보는 자들에게 상대적으로 유익합니다. 따라서, ‘지혜가 주는 더 나은 길’을 곰곰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전7:14,새번역).

전도서 7:1절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본절은 두 개의 잠언을 병치하여 외적 성공보다 ‘좋은 이름’을 귀히 여기며, 인간의 연약함과 삶의 한계를 정직하게 바라보게 합니다. 전단은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중요함을 강조하는데,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 자체이며, ‘좋은 기름’은 고대인의 사치품으로 물질적 부요를 상징합니다. 그 의미는, 물질적 풍요보다 의를 추구하며 명예롭게 살아가라는 교훈입니다. 좋은 평판은 물질적 부요보다 가치 있고 오래지속 되기에, 잠언 역시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22:1)을 권고합니다. 그러나, ‘의로움’ 없는 ‘좋은 이름’은 불가능하며, 하나님의 말씀 없는 ‘의로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같이 성경 말씀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해서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후단은 좀 충격적인데, 전도자의 독특한 통찰 때문입니다. 아이가 출생하면 기쁨과 기대감으로 설레지만, 그로 인해 인생무상이나 인간의 한계를 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출생한 날은 부조리하고 불확실한 삶을 시작하는 날이지만, 만약 ‘좋은 이름’을 갖고 있다면 죽는 날은 그 명예를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새기는 날입니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지 530년이 흘렀지만 그분의 충절이 기려지나, 그 당시의 부자는 기억됨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율곡과 이순신은 모두 같은 덕수 이씨로, 두 분은 먼 친족입니다. 그러나 덕수 이씨 후손들은 이순신의 정신을 물려받아 무관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어떻게 살고 죽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좋은 기름’이 아니라, ‘좋은 이름’은 최후의 심판과도 깊이 연결되었므로, 신자들은 본절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서 영원히 살리로다”(시37:29).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거라사(2)
마가복음 5: 13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 동쪽의 거라사인들 지역에 이르자 귀신 들린 한 사람을 만나 치유하신 사건입니다(막5:1-20; 눅8:26-39). 거라사의 위치로, 요르단 수도 암만 북쪽 48km에 위치한 제라쉬가 먼저 거론되지만, 갈릴리 호수로부터 60km 떨어져 있어, 2000마리 돼지 떼의 죽음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갈릴리 남동쪽 해안의 쿠르시 유적이 주목되었습니다. 그 유적은 비잔틴 수도원으로 호수와 연결된 도로, 모자이크로 장식된 교회, 지하 통로 등을 갖춘 대규모 복합 건물의 흔적입니다. 주후 749년 지진 이후 폐허가 되었지만, 이곳이 데가볼리 지역에 속했고, 호수 인근이라는 점에서 돼지 떼 사건의 실제 배경지로 더 설득력을 가집니다. 또한, 비잔틴 시대 수도원도 발굴되었는데, 이 사건을 기념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마태복음은 같은 사건이 가다라(마8:28)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가다라는 현재 갈릴리 호수 남동쪽 야르묵 골짜기에 위치한 하맛 가다라로 보여집니다. 이런 지명 차이는, 데가볼리 지역의 복잡한 지리 구조, 작은 마을 대신 큰 도시 이름을 대표 지명으로 쓰는 관행, 사본 전승 과정에서의 지명 혼동 가능성 등 때문입니다. 비록 성경의 지리적·역사적 연구는 이해를 돕지만, 복음서는 예수의 권세와 구원 사역에 대한 증언이 목적입니다. 따라서, 본 사건 기록의 목적인 예수님의 구원이 모든 경계를 넘어 온 세상으로 확장될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빌립보서 4:5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4절)고 명령한 뒤, 이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관용’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에이케스’는 온유함을 넘어, 자기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지 않고 상대를 품어주는 너그러움, 억울함을 감내할 수 있는 마음의 넓이, 사람을 대할 때의 부드러움과 포용성을 의미합니다. 이 관용은 교회와 세상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야 합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주님의 재림이나(시간), 혹은 주님의 임재(거리) 모두 가능합니다. 이같은 종말론적 소망이나 현실적 주님의 임재에 대한 믿음은 우리 삶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물론, 전절에 언급된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우리가 관용을 베푸는 내적 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는 기뻐할 수 없는 많은 상황이 존재하나, 현실에서는 주님의 도우심이 있고, 후에는 영원한 나라가 기다린다는 소망을 생각하면,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 주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의식은 다른 사람들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큰 동기가 됩니다. 이는 주님이 어떠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요일4:17). 따라서, ‘너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사도의 권면은 합당합니다. 약 15년 전 사도 바울은 마가로 인해 바나바와 다투고 각자의 길로 갔습니다. 이후 바나바는 생질인 마가를 포용하여 바울도 인정하는 유용한 복음의 그릇으로 키워냈습니다. ‘관용’은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한 특질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언 19:1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