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6/2/2-6)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누가복음 13:19절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세례교인이 생기면서 전주 선교는 활기를 띠고 작은 시작들이 만들어집니다. 1897년 가을 레이놀즈 부인이 자기 집에서 여성들을 주일학교 형태로 가르쳤는데 이것이 기전여학교의 출발입니다. 이듬해인 1898년 12월 잉골드가 한옥 초가집에서 병원을 열었으니 이것이 예수병원의 출발입니다. 1900. 9월 레이놀즈가 사랑방에서 김창국을 가르쳤으니 이것이 신흥학교의 출발입니다. 이로써 완산 언덕 아래 은송리에는 교회와 병원, 학교로 이루어지는 삼각 선교 거점이 마련됩니다. 이후은송리 선교 근거지는 이씨 왕가의 성역화 정책 때문에 화산동 언덕 일대로 이전합니다. 비록 7년 만에 끝났으나 은송리 선교부는 전주와 전라도 선교의 요람입니다. 여기는 전주에서 첫 예배의 장소요, 첫 세례 교인을 배출하였고, 오늘의 전주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그리고 예수병원이 시작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선교사들보다 앞서 내려와 전도한 정해원의 활동은 전주 선교를 위해 그 의미가 적지 않습니다. 그의 작은 시작이 전주와 전라도 전체의 복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덕주 교수는 정해원의 집을 수소문 끝에 찾아 내자 기념관으로의 매입을 피력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고 결국 헐렸습니다(2004년). 오늘날도 미미한 출발로 보이지만 하나님께 드려진 헌신은 지역과 시대를 변화시킨 씨앗이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스가랴 선지자 시대에도 같았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백성들은 초라한 성전을 20년에 걸쳐 간신히 준공하였으나, 이 성전은 500년 간 이스라엘 예배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슥4:10a).

전도서 7:1절 – 구조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오늘은 새로운 단락인 7장 1–14절의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단락은 1절에서부터 잠언 형식의 교훈 12개가 나오고 13-14절이 결론을 맺습니다. 1–12절의 대부분은 “더 나음(better-than)” 형식의 잠언들입니다. 이는 6장 10–12절의 질문, 즉 “사람에게 무엇이 참으로 좋은가?”라는 물음에 대한 전도자의 간접적 답변입니다. 전도자가 보기에 절대적으로 좋은 것은 없지만, 상대적으로 더 나은 가치들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잠언들에는 죽음과 지혜·우매라는 두 주제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좋다’, ‘지혜’, ‘마음’, ‘우매자’ 같은 단어가 되풀이 되고 있어 문단의 통일성을 갖추었습니다. 결론부인 13–14절은 새로운 단락이 아니라 앞선 잠언들을 결론짓습니다. 특히 7장 14절은 미래의 불확실성 문제를 다시 언급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과 고난의 시기 모두를 받아들이도록 권고합니다. 이 단락은 봉투구조(inclusion)란 문학적 기교를 갖추어서, ‘좋다’와 ‘날’이라는 단어가 문단의 처음(1절)과 끝(14절)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 결과 1–12절의 금지적 성격의 잠언들 전체가 13–14절에 의해 하나의 교훈적 단락으로 완성됩니다(머피). 내일부터 1-14절 단락의 각 구절을 묵상할 예정입니다. 잠언과 전도서가 주는 삶의 지혜는 비록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햇빛을 보는 자들에게 상대적으로 유익합니다. 따라서, ‘지혜가 주는 더 나은 길’을 곰곰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전7:14,새번역).

전도서 7:1절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본절은 두 개의 잠언을 병치하여 외적 성공보다 ‘좋은 이름’을 귀히 여기며, 인간의 연약함과 삶의 한계를 정직하게 바라보게 합니다. 전단은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중요함을 강조하는데,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 자체이며, ‘좋은 기름’은 고대인의 사치품으로 물질적 부요를 상징합니다. 그 의미는, 물질적 풍요보다 의를 추구하며 명예롭게 살아가라는 교훈입니다. 좋은 평판은 물질적 부요보다 가치 있고 오래지속 되기에, 잠언 역시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22:1)을 권고합니다. 그러나, ‘의로움’ 없는 ‘좋은 이름’은 불가능하며, 하나님의 말씀 없는 ‘의로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같이 성경 말씀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해서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후단은 좀 충격적인데, 전도자의 독특한 통찰 때문입니다. 아이가 출생하면 기쁨과 기대감으로 설레지만, 그로 인해 인생무상이나 인간의 한계를 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출생한 날은 부조리하고 불확실한 삶을 시작하는 날이지만, 만약 ‘좋은 이름’을 갖고 있다면 죽는 날은 그 명예를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새기는 날입니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지 530년이 흘렀지만 그분의 충절이 기려지나, 그 당시의 부자는 기억됨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율곡과 이순신은 모두 같은 덕수 이씨로, 두 분은 먼 친족입니다. 그러나 덕수 이씨 후손들은 이순신의 정신을 물려받아 무관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어떻게 살고 죽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좋은 기름’이 아니라, ‘좋은 이름’은 최후의 심판과도 깊이 연결되었므로, 신자들은 본절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서 영원히 살리로다”(시37:29).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거라사(2)
마가복음 5: 13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 동쪽의 거라사인들 지역에 이르자 귀신 들린 한 사람을 만나 치유하신 사건입니다(막5:1-20; 눅8:26-39). 거라사의 위치로, 요르단 수도 암만 북쪽 48km에 위치한 제라쉬가 먼저 거론되지만, 갈릴리 호수로부터 60km 떨어져 있어, 2000마리 돼지 떼의 죽음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갈릴리 남동쪽 해안의 쿠르시 유적이 주목되었습니다. 그 유적은 비잔틴 수도원으로 호수와 연결된 도로, 모자이크로 장식된 교회, 지하 통로 등을 갖춘 대규모 복합 건물의 흔적입니다. 주후 749년 지진 이후 폐허가 되었지만, 이곳이 데가볼리 지역에 속했고, 호수 인근이라는 점에서 돼지 떼 사건의 실제 배경지로 더 설득력을 가집니다. 또한, 비잔틴 시대 수도원도 발굴되었는데, 이 사건을 기념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마태복음은 같은 사건이 가다라(마8:28)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가다라는 현재 갈릴리 호수 남동쪽 야르묵 골짜기에 위치한 하맛 가다라로 보여집니다. 이런 지명 차이는, 데가볼리 지역의 복잡한 지리 구조, 작은 마을 대신 큰 도시 이름을 대표 지명으로 쓰는 관행, 사본 전승 과정에서의 지명 혼동 가능성 등 때문입니다. 비록 성경의 지리적·역사적 연구는 이해를 돕지만, 복음서는 예수의 권세와 구원 사역에 대한 증언이 목적입니다. 따라서, 본 사건 기록의 목적인 예수님의 구원이 모든 경계를 넘어 온 세상으로 확장될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빌립보서 4:5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4절)고 명령한 뒤, 이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관용’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에이케스’는 온유함을 넘어, 자기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지 않고 상대를 품어주는 너그러움, 억울함을 감내할 수 있는 마음의 넓이, 사람을 대할 때의 부드러움과 포용성을 의미합니다. 이 관용은 교회와 세상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야 합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주님의 재림이나(시간), 혹은 주님의 임재(거리) 모두 가능합니다. 이같은 종말론적 소망이나 현실적 주님의 임재에 대한 믿음은 우리 삶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물론, 전절에 언급된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우리가 관용을 베푸는 내적 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는 기뻐할 수 없는 많은 상황이 존재하나, 현실에서는 주님의 도우심이 있고, 후에는 영원한 나라가 기다린다는 소망을 생각하면,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 주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의식은 다른 사람들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큰 동기가 됩니다. 이는 주님이 어떠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요일4:17). 따라서, ‘너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사도의 권면은 합당합니다. 약 15년 전 사도 바울은 마가로 인해 바나바와 다투고 각자의 길로 갔습니다. 이후 바나바는 생질인 마가를 포용하여 바울도 인정하는 유용한 복음의 그릇으로 키워냈습니다. ‘관용’은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한 특질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언 19:1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