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6/1/26-30)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갈라디아 6: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

동학혁명이 진압되자 선교사들은 다시 전주에 내려왔으나(1895.2), 이미 선교의 기반은 사라졌습니다. 레이놀즈의 보고입니다. “세례지원자 여섯 명 중에 딱 한 사람만 이번 봄에 우리에게 나타나서 장날만 아니면 매주일 3마일을 걸어서 우리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다른 사람과 달리 그는 ‘밝고도 특별한 별’ 처럼 비쳤습니다만 몇 주 후에는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한 대가로 10달러를 요구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했겠습니까?”(the Christian Observer, 1895. 10. 9). 레이놀즈는 그를 ‘쌀 교인’이란 불렀습니다. 은송리 선교사 동네를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장터에 나가 전도지를 나누어 주어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서양 귀신 나가라’고 외쳐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1500달러를 들여 선교부지를 넓혔고, 해리슨(=하위겸)과 여의사 잉골드에 의해 시약소가 세워지고 치료받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전주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집니다. 마침내 다섯 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1897.7). 테이트의 집안 일을 도와주던 소년 김창국(14세)과 그의 어머니(강씨), 옆집의 유씨 부인, 함씨 부인, 그리고 김내윤 등 입니다. 사람들은 선한 일을 경험해야 마음문이 열리고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은 자신의 재물을 들여 주님의 선교를 섬긴 여인들을 기록하는데, 그들 모두는 병고침을 통해 주님의 선한심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눅 8:2-3).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의 주님을 따라 선한 행실로 믿음의 표지를 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6:10).

전도서 6:11절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나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본절은 “말이 많으면 의미는 줄어들고, 삶의 본질적 문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는 내용이며, “말을 아끼라”는 조언을 넘어서 인간의 근본적 무력함을 보여줍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말은 아무 유익도 없습니다. 말의 증가는 허무의 증가일 뿐이기에, 말의 한계를 인정할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이는 말은 때로 진실을 밝히는 도구이지만, 많은 경우 불만과 불안의 출구가 되어 더 큰 허무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고난 속에서는 많은 말보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잠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로운 욥 역시 고난을 당하자 비로소 이 교훈을 배웁니다. 고난이 오자 욥은 많은 말로 고통과 억울함을 토로합니다. 친구들과 논쟁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고, 하나님께 이유를 묻고 따지기도 하다가, 다 부질 없음을 깨닫자 침묵합니다. 그래서 욥은 자기보다 연소한 엘리후의 통박을 받아도 잠잠합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고 욥과 장시간 변론하시자, 비로소 욥은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회개합니다. 그뿐 아니라, 욥은 이를 통해 하나님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말로 삶을 통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분의 신비 앞에 조용히 서게 됩니다. 한편,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들에게 욥을 통해 속죄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욥이 친구들을 위해 제사드리자, 하나님은 욥의 고난을 회복시킵니다. 고난의 목적을 다 이루신 것이죠! 실로 그분은 지혜롭고도 가장 자비하신 분이십니다(약5:11).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42:3).

전도서 6:12절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본절은 인간의 한계를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인간은 무엇이 진정 자기에게 좋은지조차 모르는 존재입니다. 또한 삶은 짧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수많은 선택 앞에서 흔들리며, 모든 것은 그림자 같이 스쳐 지나갑니다. 이러한 인간의 무지와 불확실함은 단순한 현실 진단의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 결과 세상은 교만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처럼’ 될 수 없음을 인정하게 하는 진실의 거울로 작동하고 있지만, 그래도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메시지를 읽어 내는 신학과 설교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미래를 예측하려 애쓰나 모조리 실패합니다. 전도자는 담담히 말합니다. “인생은 그림자와 같아서, 스스로의 앞날조차 알 수 없다.” 이 고백은 교만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도록 이끕니다. 미래는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무엇이 참으로 좋은지 판단할 능력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림자 같은 인생이지만, 그 그림자를 비추는 빛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한계를 인정할 때 비로소 참된 평안과 지혜는 시작됩니다. 다윗이 좋은 예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길 때 계명을 벗어나서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려고 수단 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수없이 불확실한 상황과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께 묻고 또 물어 지혜를 얻었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거라사(1)
마가복음 5: 1절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신약 시대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고, 유대인과 로마인이 함께 살며 서로 다른 문화적 관습을 유지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종교적 기념일 외에 매일 일을 했지만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고, 돼지고기나 비늘 없는 생선은 먹지 않는 등 음식 규례 또한 크게 달랐습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호수 동편, 헬라·로마 문화권이었던 데가볼리 지역으로 가셨고, 그곳에서 무덤 사이에 살며 쇠고랑도 끊을 만큼 강한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났습니다. 예수께서 귀신을 내쫓자 귀신들은 2000마리 돼지 떼로 들어가 몰사시켰고, 치유된 남자는 데가볼리 지역에서 예수께 받은 은혜를 전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데가볼리는 다메섹, 스키토볼리스, 가다라, 거라사 등 10개 도시의 연합체로, 돼지를 기르던 헬라·로마 문화권이었습니다. 사건의 정확한 장소는 ‘가다라’(마8:28)인지 ‘거라사’(막5:1;눅8:26)인지 논란이 있으나, 두 도시 모두 데가볼리에 속해 있었기에 갈릴리 동편의 이방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임은 분명합니다. 이 사건은 예수의 권세가 문화·지역·영적 장벽을 넘어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이 꺼리던 이방 지역, 돼지를 기르던 로마 문화권에서도 예수의 능력은 동일하였습니다. 또한 귀신 들린 자가 완전히 회복되어 곧바로 복음의 증인이 된 모습은, 예수의 구원이 단순한 치유를 넘어 삶의 방향을 바꾸는 능력임을 드러냅니다. 그 이방인이자 광인은 모든 사람 심지어 자신에게도 버림받았지만, 하나님은 회복시키고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의 본질과 능력을 다시 깨닫게 합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1:16).

빌립보서 4: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도착한 때는 AD 50년 경입니다. 먼저 강가에 모인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나 주님은 유대교에 입교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의 마음만을 여십니다(행16:14). 그러므로, 전도는 우리가 하나 영접은 주님의 몫입니다. 이어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치유하고, 옥터가 흔들리는 기적과 함께 간수와 그의 가족 전부를 구원합니다. 거라사의 광인의 치유와 구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복음은 지역, 성별, 인종을 구별하지 않고, 구원은 영혼 뿐 아니라 육신의 치유와 삶의 방향 전환까지 포함합니다. 최초의 신자 루디아의 집에 교회는 세워졌고, 누가를 목회자로 남겨둔 후 바울 일행은 떠났습니다(행16:10-40;17:1). 6년이 지나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의 끝무렵 빌립보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누가는 다시 합류합니다(행20:5).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성전에서 잡혀 2년 간 가이샤라에서 가택 연금을 당합니다. 빌립보인들은 이때 선교헌금을 보냈고, 바울이 감사의 편지를 쓴 것이 빌립보서입니다(AD60년). 사도는 언제 풀려날지 몰랐지만 기쁨이 넘쳤는데,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빌립보서는 예수 중심의 복음 메시지와 경험된 믿음에 그 토대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즉 구원하신 주님에 대한 사랑,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경험, 고난을 은혜로 보는 믿음, 주님의 통치와 기도 응답의 확신(자족의 비밀),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견고한 인식입니다. 이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에 이르고자 하는 과정으로부터 생겨났으며, 영생의 정의와 부합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