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시편 102:26절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1910년, 기전여학교는 현재의 예수병원 본관 자리에 아름다운 2층 홍벽돌 교사를 신축했습니다. 당시 이 건물은 호남 지역 여성 교육의 요람이었으며, 상징적인 근대 건축물이었습니다. 1960년대 들어 예수병원은 현대식 종합병원으로 도약하기 위해 대규모 부지와 새로운 건물이 절실했습니다. 이때 홍벽돌 교사 자리에 예수병원이 들어서고, 학교는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습니다. 그 아래쪽으로 린튼, 보이어 같은 선교사들이 살던 ‘양관’ 들도 모두 헐렸고, 신흥학교의 해방 전 건물로는 강당으로 지은 ‘스미스기념관’(1936년) 만 남아 있습니다. 강당 옆 ‘리차드슨관’(1928년)은 1982년 화재로 전소되었습니다. 해방 후 건축한 ‘인톤기념관’ 옆으로 <희현당사적비>(1707년)와 <희현당중수사적비>(1784년)가 나란히 서 있는데, 1905년 신흥학교를 지을 때 발굴하여 다시 세운 것입니다. 답사하던 이덕주 교수는 일제시대 신흥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항일투쟁을 기리는 비석 하나쯤 있을 법한데 하며 아쉬워 합니다만, 있다한들 천 년 후에는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 기전학교와 예수병원은 시대의 요구와 인간의 필요에 따라 건물과 장소는 변해왔지만, “학생을 길러내고 병든 자를 치유한다”는 본래의 목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과 시대는 변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의 부르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라질 건물이나 기념비에 의미를 두지 말고,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을 붙잡아야 합니다.“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전도서 7:12절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
본절은 지혜와 재물의 유익과 차이를 보여주나, 지혜 역시 하나님의 섭리를 넘지 못하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교훈으로 이끕니다. 먼저, 전도자는 지혜와 재물을 모두 ‘그늘’(보호)로 비유합니다. 보호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둘은 모두 삶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재물은 현실적 필요를 채우지만, 지혜는 그 지혜자의 삶을 살피고 안전한 길로 인도하여 생명을 보호하므로 우월합니다. 여기서 ‘생명’은 단순한 이 세상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할 때 갖게 되는 참된 의미와 인생의 방향을 포함하고, 신약에서는 영생을 의미합니다(요20:31). 그러므로 참된 지혜을 얻으려면 복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좋은 예가 부자이자 관원이었던 청년이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왔으나,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어 하늘에 보화를 쌓은 뒤, 와서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에 근심하며 갔습니다. 그는 재물은 가지고 세상의 삶은 보호받았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생명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마19:16-22). 그러나 이 지혜조차도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지혜도 인생의 ‘구부러진 것’을 곧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1:15; 7:13). 누가 선천적 맹인을 고치거나 마음의 악을 제거하거나 죽은 자를 살리겠습니까?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꾸지 못합니다. 지혜와 재물의 그늘은 모두 제한적이고 인생은 여전히 ‘수수께끼’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히 그분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언9:10).
전도서 7:13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앞선 두 절에서 전도자는 재물은 그 소유자의 현실적 필요를 채워 주지만 살리지는 못하고, 지혜는 생명을 보호하나 죽지 않게 하거나 삶의 의미를 주지는 못합니다. 즉, 지혜조차 인생의 만능열쇠는 아닙니다. 그 대표적 한계로 본절은 하나님의 섭리를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굽은 면’을 인생에 장치하셨습니다. 건강·재물·자녀 모든 것을 가졌는데, 가정의 불화로 누리지 못하는 경우 등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해결되는 문제이나, 인간의 존재감과 탐욕 때문에 서로 싸우는 것이지요! 그 이외에도 죄, 질병, 죽음, 악한 마음, 예기치 못한 사건들 등은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사람이 곧게 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삶의 불가해성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강조로서, 인간으로 하나님을 찾게 하는 결정적 동인입니다. 한편, 복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치료약이요,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에 대한 답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셔서 구부러진 것들- 맹인, 나병, 죽은 자들을 살리심, 죄인의 회개 등 -을 치유하셨는데, 구부러진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굽은 면이 발생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은 ‘새옹지마’를 새기며 체념하나,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이 하시는 일을 경험할 수 있다는 소망 가운데 기뻐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선천성 맹인)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벧산/ 벧 스안
사무엘상31:12절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
벧산은 원래 므낫세 지파의 몫이나 원주민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고, 이어 블레셋이 차지합니다. 블레셋은 길보아 전투에서 승리한 뒤 사울의 시체를 성벽에 매달아 이스라엘을 조롱하였습니다. 이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가서 시신을 수습하여 40년 전 자신들을 구원한 사울에게 보답하였음을 본절이 보여줍니다. 다윗은 벧산을 정복하고 솔로몬은 갈릴리 행정 중심지로 삼았지만(BC970), 이후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와 헬라 제국을 거쳐 이름도 스키토볼리로 바뀌고 로마의 지배 아래 놓입니다(BC63). 벧산(스키토볼리)은 데가볼리 열 도시 가운데 가장 크고 번영한 로마 도시로 성장하여, 로마식 도로인 카르도를 중심으로 극장, 목욕장, 신전 등 화려한 건축물들이 세워졌습니다. 특히 도시 입구의 웅장한 석문은 스키토볼리 주변 지역과 구별되는 로마 도시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질문이 떠 오릅니다. 왜 므낫세 지파는 분배된 벧산을 정복하지 못하고, 또 다윗이 정복한 그 도시는 끝내 이방인에게 넘어갔을까요? 또, 벧산이 꽃피운 문화는 왜 이방 문화였을까요? 첫째 원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방인들과 이방문화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인지 여부를 확인하고 계셨습니다. 이른바 ‘남은 자’ 사상입니다. 그들은 벧산이라는 세상의 기업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기업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의 믿음이자 소망입니다. “(모세는)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6).
하나님의 그 은혜
로마서 5:21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본절은 구원의 역사 중에 드러난 하나님의 목적을 요약합니다. 예수께서 오시기 이전에는 죄의 권세가 사망 안에서 통치하였으나, 지금은 더 큰 권세가 왔으니 ‘그 은혜’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그 은혜’ 말입니다. ‘그 은혜’는 지금 ‘의’를 통해 통치합니다. ‘의’란 16~19절에서 말하는 ‘의의 그 선물’인데, ‘의롭다 하심을 받음’(16)과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통치’(17)를 지칭합니다. 전자는 칭의로, 후자는 성화로 표현되며 구원 사건의 두 측면입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의 통치로 죄가 정복되었습니다. 신자들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정죄받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 은혜’의 통치는 단순히 ‘의롭다”라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내린 선언을 넘어 실제의 삶에서 ‘의’를 만들어 내는데, 이들이 택함받은 사람이요 중생한 신자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그 은혜’에 감사하고 자신을 위해 죽으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힘들고 손해되더라도, 단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합니다. 이것이 성령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따라서, ‘의의 그 선물’은 반드시 변화된 삶을 포함하며 그 마지막은 영생입니다. 이 영생의 완전한 실현은 부활 시이지만, 현재의 악한 세대에 이미 침투하였고, 영생을 가진 신자들은 마음의 악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능력 때문이죠!(롬8:1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