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6/3/23-27)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시편 102:26절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1910년, 기전여학교는 현재의 예수병원 본관 자리에 아름다운 2층 홍벽돌 교사를 신축했습니다. 당시 이 건물은 호남 지역 여성 교육의 요람이었으며, 상징적인 근대 건축물이었습니다. 1960년대 들어 예수병원은 현대식 종합병원으로 도약하기 위해 대규모 부지와 새로운 건물이 절실했습니다. 이때 홍벽돌 교사 자리에 예수병원이 들어서고, 학교는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습니다. 그 아래쪽으로 린튼, 보이어 같은 선교사들이 살던 ‘양관’ 들도 모두 헐렸고, 신흥학교의 해방 전 건물로는 강당으로 지은 ‘스미스기념관’(1936년) 만 남아 있습니다. 강당 옆 ‘리차드슨관’(1928년)은 1982년 화재로 전소되었습니다. 해방 후 건축한 ‘인톤기념관’ 옆으로 <희현당사적비>(1707년)와 <희현당중수사적비>(1784년)가 나란히 서 있는데, 1905년 신흥학교를 지을 때 발굴하여 다시 세운 것입니다. 답사하던 이덕주 교수는 일제시대 신흥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항일투쟁을 기리는 비석 하나쯤 있을 법한데 하며 아쉬워 합니다만, 있다한들 천 년 후에는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 기전학교와 예수병원은 시대의 요구와 인간의 필요에 따라 건물과 장소는 변해왔지만, “학생을 길러내고 병든 자를 치유한다”는 본래의 목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과 시대는 변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의 부르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라질 건물이나 기념비에 의미를 두지 말고,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을 붙잡아야 합니다.“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전도서 7:12절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

본절은 지혜와 재물의 유익과 차이를 보여주나, 지혜 역시 하나님의 섭리를 넘지 못하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교훈으로 이끕니다. 먼저, 전도자는 지혜와 재물을 모두 ‘그늘’(보호)로 비유합니다. 보호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둘은 모두 삶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재물은 현실적 필요를 채우지만, 지혜는 그 지혜자의 삶을 살피고 안전한 길로 인도하여 생명을 보호하므로 우월합니다. 여기서 ‘생명’은 단순한 이 세상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할 때 갖게 되는 참된 의미와 인생의 방향을 포함하고, 신약에서는 영생을 의미합니다(요20:31). 그러므로 참된 지혜을 얻으려면 복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좋은 예가 부자이자 관원이었던 청년이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왔으나,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어 하늘에 보화를 쌓은 뒤, 와서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에 근심하며 갔습니다. 그는 재물은 가지고 세상의 삶은 보호받았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생명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마19:16-22).  그러나 이 지혜조차도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지혜도 인생의 ‘구부러진 것’을 곧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1:15; 7:13). 누가 선천적 맹인을 고치거나 마음의 악을 제거하거나 죽은 자를 살리겠습니까?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꾸지 못합니다. 지혜와 재물의 그늘은 모두 제한적이고 인생은 여전히 ‘수수께끼’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히 그분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언9:10).

전도서 7:13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앞선 두 절에서 전도자는 재물은 그 소유자의 현실적 필요를 채워 주지만 살리지는 못하고, 지혜는 생명을 보호하나 죽지 않게 하거나 삶의 의미를 주지는 못합니다. 즉, 지혜조차 인생의 만능열쇠는 아닙니다. 그 대표적 한계로 본절은 하나님의 섭리를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굽은 면’을 인생에 장치하셨습니다. 건강·재물·자녀 모든 것을 가졌는데, 가정의 불화로 누리지 못하는 경우 등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해결되는 문제이나, 인간의 존재감과 탐욕 때문에 서로 싸우는 것이지요! 그 이외에도 죄, 질병, 죽음, 악한 마음, 예기치 못한 사건들 등은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사람이 곧게 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삶의 불가해성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강조로서, 인간으로 하나님을 찾게 하는 결정적 동인입니다. 한편, 복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치료약이요,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에 대한 답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셔서 구부러진 것들- 맹인, 나병, 죽은 자들을 살리심, 죄인의 회개 등 -을 치유하셨는데, 구부러진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굽은 면이 발생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은 ‘새옹지마’를 새기며 체념하나,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이 하시는 일을 경험할 수 있다는 소망 가운데 기뻐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선천성 맹인)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벧산/ 벧 스안
사무엘상31:12절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

벧산은 원래 므낫세 지파의 몫이나 원주민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고, 이어 블레셋이 차지합니다. 블레셋은 길보아 전투에서 승리한 뒤 사울의 시체를 성벽에 매달아 이스라엘을 조롱하였습니다. 이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가서 시신을 수습하여 40년 전 자신들을 구원한 사울에게 보답하였음을 본절이 보여줍니다. 다윗은 벧산을 정복하고 솔로몬은 갈릴리 행정 중심지로 삼았지만(BC970), 이후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와 헬라 제국을 거쳐 이름도 스키토볼리로 바뀌고 로마의 지배 아래 놓입니다(BC63). 벧산(스키토볼리)은 데가볼리 열 도시 가운데 가장 크고 번영한 로마 도시로 성장하여, 로마식 도로인 카르도를 중심으로 극장, 목욕장, 신전 등 화려한 건축물들이 세워졌습니다. 특히 도시 입구의 웅장한 석문은 스키토볼리 주변 지역과 구별되는 로마 도시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질문이 떠 오릅니다. 왜 므낫세 지파는 분배된 벧산을 정복하지 못하고, 또 다윗이 정복한 그 도시는 끝내 이방인에게 넘어갔을까요? 또, 벧산이 꽃피운 문화는 왜 이방 문화였을까요? 첫째 원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방인들과 이방문화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인지 여부를 확인하고 계셨습니다. 이른바 ‘남은 자’ 사상입니다. 그들은 벧산이라는 세상의 기업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기업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의 믿음이자 소망입니다. “(모세는)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6).


하나님의 그 은혜
로마서 5:21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본절은 구원의 역사 중에 드러난 하나님의 목적을 요약합니다. 예수께서 오시기 이전에는 죄의 권세가 사망 안에서 통치하였으나, 지금은 더 큰 권세가 왔으니 ‘그 은혜’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그 은혜’ 말입니다. ‘그 은혜’는 지금 ‘의’를 통해 통치합니다. ‘의’란 16~19절에서 말하는 ‘의의 그 선물’인데, ‘의롭다 하심을 받음’(16)과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통치’(17)를 지칭합니다. 전자는 칭의로, 후자는 성화로 표현되며 구원 사건의 두 측면입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의 통치로 죄가 정복되었습니다. 신자들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정죄받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 은혜’의 통치는 단순히 ‘의롭다”라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내린 선언을 넘어 실제의 삶에서 ‘의’를 만들어 내는데, 이들이 택함받은 사람이요 중생한 신자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그 은혜’에 감사하고 자신을 위해 죽으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힘들고 손해되더라도, 단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합니다. 이것이 성령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따라서, ‘의의 그 선물’은 반드시 변화된 삶을 포함하며 그 마지막은 영생입니다. 이 영생의 완전한 실현은 부활 시이지만, 현재의 악한 세대에 이미 침투하였고, 영생을 가진 신자들은 마음의 악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능력 때문이죠!(롬8:1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매일묵상(2026/3/16-20)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누가복음 12:33절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많이 변했지요. 그 많던 선교부 땅도 다 넘어가고 집도 대부분 헐렸고. 이젠 흔적만 남았어요”(송기철). 이 말처럼, 화산동 선교부의 모습은 크게 변했습니다. 일제가 사립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이를 거부하고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를 폐교했고(1939. 9), 예수병원에 가미다나 설치를 강요하자 역시 문을 닫고 전주를 떠남으로, 예수에 대한 믿음의 정절을 지켰습니다. 일제는 선교부의 땅과 건물 일체를 몰수했으나, 해방 후 선교부는 돌아와 땅을 되찾았습니다. 비록 6.25 전쟁 중에는 공산군과 국군이 번갈아 점령하면서 시설이 많이 파괴되었지만, 휴전 후, 신흥과 기전이 안정을 되찾았고 예수병원과 성경학원도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1970년대가 들어서자, 남장로회는 “한국 교회는 이제 충분히 자립할 역량이 있다”고 판단하여, 화산동의 방대한 부지를 학교, 병원, 노회 등을 통해 한국 교회와 사회에 이양하고 1980년대까지는 모두 철수하여 100년의 선교를 마무리 하였습니다. 또한 선교부가 세운 병원과 학교의 설립 이념(의료 선교, 기독교 교육)을 한국 교회가 계승토록 하였습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남장로회는 병들고 가난한 한국 민족을 구제하고 섬김으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지혜를 보여주었고, 화산동의 모든 것을 한국 교회에 내어줌으로써 신앙 유산 전수의 참된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창18:19a,새번역).

전도서 7:10절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

본문은 힘든 현실 앞에서 “그때가 좋았지”라고 말하는 태도의 어리석음을 지적합니다. ‘지혜가 아니다’라는 표현은 어리석음을 에두르는 말로 3천 년 전에도 과거의 감상에 젖어 살았던 사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가나안을 향해 전진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은 잊고, 고기와 생선, 파와 마늘, 부추, 오이, 수박을 먹던 기억만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양식인 만나를 매일 아침 기적으로 내려주셨지만, 그 은혜에는 감사하지 않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주셨으나 그들의 영혼을 파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탐욕을 부린 무리들을 큰 재앙으로 심판하사 죽이셨으니, 그곳의 이름이 ‘기브롯 핫다아와(탐욕의 무덤들)로 불리운 이유입니다(민 11장). 전도자는 말합니다. 모든 일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함께 존재한다고(전 7:14). 그럼에도 현재는 어둡고 과거는 모두 좋았다고 여기는 관점은 하나님의 섭리를 보지 못한 채 그분을 불신하고 불평하는 태도입니다. 더구나 우리의 기억은 선택적입니다. “옛날이 더 좋았다”는 말은 대개 정확한 평가가 아니라 감정의 반응일 뿐입니다. 지혜는 감정이 아니라 진실을 보게 하는 능력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과거를 기준으로 현재를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이 오늘 주신 현실 속에서 길을 찾습니다. 이때 예수의 제자들은 믿음의 훈련을 통해 주님의 뜻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입니다(마 5:13).“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5:5).

전도서 7:11절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이 되도다”

전도자는 지혜를 물질적 재산에 비유하며, 그것이 인생을 지탱하는 든든한 기반임을 말합니다. 당시 유산은 단순한 상속재산이 아니라 가문을 지키고 삶을 안정시키는 생존의 토대였습니다. 전도자는 이 이미지를 통해, 지혜가 삶을 살아가는 데 얼마나 실제적이며 우리를 보호하는 힘이 되는지를 강조합니다. 본문이 위치한 문맥입니다. 먼저, 7–10절은 지혜 없는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분노에 쉽게 흔들리고, 과거를 미화하며 현재를 부정하는 태도는 지혜가 아닙니다. 그리고 7:11–12절은 지혜의 필요성을 설명합니다. 지혜는 유산처럼 안정적이며, 그늘처럼 보호를 주고, 무엇보다 생명을 지킵니다. 지혜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현실을 해석하여 견디게 하고, 해결책도 주기 때문입니다. 7:13–14절은 지혜의 실제적 적용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사람이 곧게 할 수 없으므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지혜는 인생의 밝은 날과 어두운 날 모두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보게 하는 눈입니다. 본절은 지혜가 물질적 유산과 같이 아름답다고 하나, 실제에서는 유산보다 더 귀한 자산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하는 보호막입니다(12절). 무엇보다 지혜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하나님께 재물이나 장수가 아니라 재판하는 지혜인 ‘듣는 마음’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왕궁으로 돌아온 솔로몬은 친자 분별 재판을 지혜롭게 판결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갖고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야 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벧산/ 벧 스안
마가복음5:20절
“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벧산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여러 번 무대에 등장한 도시지만, 헬라 시대에 이르러 그 이름은 사라지고 스키토볼리가 되었고 예수님 당시에도 그렇게 불렸습니다. 스키토볼리란 이란을 근원지로 하여 용병 생활을 했던 스키티아인들의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벧산에 스키티아 출신 용병들이 정착하면서 도시의 성격은 점점 헬라 문화 중심지로 변했고, 데가볼리의 핵심 도시로 자리 잡았습니다.  극장, 신전, 체육장 등 화려한 헬라 문명이 이곳을 채웠고, 스키토볼리는 세계사 속에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함 뒤에는 유대 신앙과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헬라 문화의 압박 속에서 유대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저항했고, 마카비 시대에는 이 도시가 반헬라 운동의 격전지가 되었습니다. 대제사장 요나단이 이곳에서 전사했고, 결국 유대인들은 도시를 불태우며 헬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스키토볼리의 역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세상은 언제나 화려한 문화와 매력적인 가치로 우리를 끌어당기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그 속에서도 정체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편리함과 풍요로움이 신앙을 대체하려 할 때,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유대인들이 헬라 문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려 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세상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진정한 승리는 세상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선택하는 데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빌립보서 4: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불천노불이과’(不遷怒 不貳過)란 ‘노를 옮기지 않고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공자가애왕에게 답하면서 안연을 회상한 말입니다. 안연은 공자를 배우기 좋아한 천재로서 그 명석함은 자공을 능가하였습니다. 그는 대나무 밥과 석회석이 많은 물을 먹으며 누추한 거리에서 살았습니다(단표누항). 그러나 벼슬도 마다하고 배워 실천하기를 좋아하였으니 안빈낙도(安貧樂道)의 모범입니다. 그가 실천한 공자의 사상은 ‘인’(仁, 어질다)입니다. 안연이 ‘어짐이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공자는 ‘극기복례’와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라’는 실천지침을 주었고, 그는 행함을 다짐하였습니다. 공자는 평범하게 생각했다가 그의 행함을 보고 놀랍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모범이 있고, 주님을 배운 바울의 삶이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권능을 행하였지만 풍부와 궁핍의 모든 상황에서도 자족하는 비밀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내게 능력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고 고백합니다. 풍부할 때는 교만하지 않도록, 궁핍하고 박해를 받을 때는 낙망하지 않도록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은혜를 경험한 것이죠! 이것이 안연과 결정적 차이입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이 만유의 통치자이심을 깨닫는 과정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경건과 사랑으로 이끌어 갈 때, 성령님은 각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 행하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공자의 형상이 아니라 주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니, 실로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

매일묵상(2026/3/9-13)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느헤미야 8: 8절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에서 돌아온 뒤, 에스라가 율법책을 낭독하는 장면입니다. 백성은 율법의 말씀을 듣고 모두 울었습니다. 말씀을 배우면 감동이 오고, 그 감동은 삶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복음이 이 땅에 들어왔을 때도 같았습니다. 전주의 남장로교 선교부는 성경 교육에 힘을 쏟았습니다. 서원고개 아래쪽에는 남녀 성경학원이 있었습니다. 1909년 무렵부터 사경회를 확대시켜 농한기 때 한달씩 모여 성경을 배우는 ‘달(月) 성경학교’로 시작해 정규성경학원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남자 성경학원은 전주 북부지방 선교를 담당했던 매커첸이 주로 맡아보았는데, 1921년에는 화산동 189번지 언덕에 2층 교사를 마련하고 ‘전북남성경학원’이라 하였습니다. 여자 성경학원도 1928년에 남자성경학원 아래쪽, 화산동 190번지에 2층 벽돌 교사를 마련하고 ‘한예정성경학교’라 하였습니다. ‘한예정’은 1909년 남편과 함께 내한해서 전주에서 활약하다가 1922년 11월, 안식년 휴가 중 미국에서 별세한 클라크 부인의 한국이름입니다. 한예정성경학교는 1961년 광주 이일여자성경학교와 합동하여 ‘한일여자신학교’(현, 한일신학대학교)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전주 양반과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서원고개’에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과 학교, 성경학원이 들어서면서 교육, 의료, 복음이라는 삼각 선교 구도가 정착됩니다. 이렇게 구한말 선교사들과 성경학교의 헌신의 결과 조선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말씀을 가까이하고 배워, 공동체와 세상을 밝히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119:105).

전도서 7:8절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 8절은 “끝이 시작보다 낫다”는 지혜의 원리를 통해,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특히 인내와 겸손—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일을 착수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결실을 맺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이는 성실하고 근면한 삶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단은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고 선언하고, 후단은 좋은 끝을 위해 중요한 태도는 ‘참는 마음’임을 밝힙니다. 어리석은 자는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자기 중심적 사고를 합니다. 그는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거나 만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생각대로 성급히 일을 추진하다가 그르치는데, 시간과 상황을 조절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참는 마음을 가진 겸손한 자는 계획을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며, 온유하고 지혜롭게 자신의 일을 단도리합니다. 본절은 유익한 결과를 얻으려면 조급함을 버리고 불리한 환경 중에도 인내하며 겸손할 것을 교훈하는데, 하나님의 섭리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본절의 교훈을 터득한 분은 모세입니다. 모세는 젊은 시절 자신의 손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려고 성급하게 애굽 사람을 죽이자마자 발각되어 광야로 피신합니다. 그는 40년 동안 이드로의 양을 치면서 하나님의 섭리와 인내를 배운 뒤,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여 내는 사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책무는 백성의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계명들이 간직되지 않은 어떤 사람도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3:23).

전도서 7:9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본절은 8절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8절의 “참는 마음”은 본절에서 “급한 마음”이라는 반대 개념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전단에서, “급한 마음”은 “노를 발하는” 태도로 이어지는데,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고 분개하기 때문입니다. 문맥 상 이것은 어리석은 자의 오만한 분노로서, 후단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우매자의 품에 머문다”는 표현은 분노가 잠시 스쳐 지나가는 감정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터 잡은 상태를 말합니다. 실상 분노는 단순한 기질의 문제를 떠나, 마음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 지표입니다. 후단은 어리석음의 특징은 분노가 마음속에 눌러앉은 자로서, 전단은 그것이 급히 표출되는 모습을 묘사하여, 수욕을 참고 후일을 도모하는 지혜자와 대조를 이룹니다. 사람의 됨됨이는 결국 마음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표출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눅6:45).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약 1:20)는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에 분노 대신 사랑과 지혜가 머물게 해야 합니다. 갈멜의 부자 나발이 도망자 신세였던 다윗을 모욕하자, 분노한 다윗은 나발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때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음식과 함께 다윗에게 나아가, 분노로 인해 명예를 더럽히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다윗은 번뜩 깨닫고 노를 거두어들입니다. 미련한 나발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며칠 뒤 생을 마감했으나, 다윗에게는 어떤 구설이나 흠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분노가 아닌 지혜와 인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거니와,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잠언14:29)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벧산/ 벧 스안
열왕기상 4:12절
“ 다아낙과 므깃도와 이스르엘 아래 사르단 가에 있는 벧스안 온 땅은 아힐룻의 아들 바아나가 맡았으니 벧스안에서부터 아벨므홀라에 이르고 욕느암 바깥까지 미쳤으며”

블레셋이 길보아산 전투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죽인 뒤, 그 시신을 벧산 성벽에 못 박아 전시한 사건(삼상 31:10–12)은 이 도시가 당시 블레셋의 북부 지배 거점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고고학적으로 벧산은 주전 10세기경 대규모 화재로 파괴된 흔적이 발견되는데, 많은 학자들은 이 시기를 다윗의 정복 활동과 연결합니다. 즉, 다윗은 사울 왕가를 모욕한 블레셋의 거점을 제거하여 이스라엘 왕권의 명예 회복과 북부 지역의 안정을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이후 벧산은 이스라엘의 행정 체계 안으로 편입됩니다. 솔로몬 시대 벧산에서는 행정 건물, 이스라엘식 토기, 관료적 활동의 흔적 등이 발견되어, 이 도시가 왕국의 북부 행정 중심지였음을 보여줍니다. 남북 왕국이 분열되면서 벧산은 북이스라엘의 도시가 되었으나, 여전히 갈릴리 지역의 중요한 행정·군사 요충지였다가 앗시리아에 의해 파괴됩니다(BC732). 이렇게 볼 때 벧산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사울 왕조의 몰락, 다윗 왕조의 부상, 이스라엘 왕국의 행정적 확장, 북왕국의 멸망 이라는 성경 역사의 전환점마다 등장하여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울의 죽음과 벧산에서의 치욕은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왕권을 유지하려 했던 결과이나, 반대로 다윗은 오랜 시간 기다림과 인내 속에서 하나님의 때와 방식으로 왕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벧산은 다시 이스라엘의 도시로 회복된 점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편127:1).

생각하고 실천하는 신앙(3)
빌립보서 4:9절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8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사고기준 6가지- 참됨, 고상함, 옳바름, 정결함, 사랑스러움, 칭찬받을만함- 를 제시한 후, 이 덕목들의 실천을 언급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삶을 본 적이 있습니다.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이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 이들은 많이 맞고 옥에 갇혔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찬미를 드리자 주님은 감동하사 옥터를 진동시켜 모든 쇠사슬을 풀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죄수 중 아무도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적을 목격한 간수는 복음을 받아들였고, 빌립보에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행16장). 또한, 바울은 직접 자신의 삶을 상기시키며(빌3:1-16) 교회가 자신을 효과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보기로 삼도록 권면합니다. 따라서,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서 본받아야 할 것들을 본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방이라는 주제가 늘 동행합니다. 이는 평강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삶에만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서신의 서두(1:2)에서처럼 자주 수신자들이 평강하기를 기도하는데, 본절은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말씀에 따라 삶을 정돈한 사람들 중에 있다.” 여기에는 올바르고 질서 잡힌 생각과 선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포함됩니다. 따라서 평강에 대한 두 가지 지침은 서로 보완적입니다. ①불안의 해결책은 ‘기도하라’(4:6.7). ②무질서한 삶의 해결책은 정신적, 실제적 훈련을 통해 바로잡아라’(4:8.9).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