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6/10/12-16)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9)
왕기상 6:4절
“성전을 위하여 창틀 있는 붙박이 창문을 내고”

‘ㄱ’자 예배당은 자연석을 다듬어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사각기둥을 세웠으며 하인방 아래 환기 구멍을 내고 중인방과 상인방 사이에 창문을 해 달았습니다. 지붕은 홑처마에 우진각 지붕 형태를 하고 있는데 처음엔 초가로 해 올렸다가 1920년대 함석지붕으로 바꾸었으며 해방 후 지금의 시멘트 기와로 올렸습니다. 남쪽과 동쪽의 출입문은 여닫이 격자무늬 종이문입니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 통마루 바닥에 오르면 천장 가구가 그대로 드러난 연등천장에다 칸막이가 없는 통간(通間) 건물이 주는 시원함에 압도됩니다. 다만 천장과 벽면에 칠한 흰색 수성페인트 가루 때문에 들보가 뿌옇게 변한 것이 아쉽습니다. 천장 가구는 납도리 5량식(= 깍은 단면이 납작한 도리가 5개)인데 지붕 용마루를 받치고 있는 마루도리와 가운데 중도리를 겹으로 올린 것이 탄탄한 느낌입니다. 휘어 자란 아름드리 소나무를 자연 그대로 다듬어 올린 대들보가 육중합니다. 건물 북서쪽 모서리에 있는 강단(5평)은 2단으로 꾸며 결과적으로 3층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 전래의 제단 구조이면서 동시에 뜰-성소-지성소로 이루어지는 구약 성막의 3중 구조를 상징합니다. 복음의 토착화를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백향목, 금장식, 성소와 지성소의 3중 구조, 이스라엘의 건축 전통이 총동원된 건축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의 진정한 가치는 하나님의 임재에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이스라엘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냈듯, 복음은 ‘ㄱ’자 예배당이란 한국의 전통 건축 속에서뿌리내리고 성령께서 임재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전도서 10:3절
“우매한 자는 길을 갈 때에도 지혜가 부족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가 우매함을 말하느니라”

지혜로운 마음은 삶을 바르게 이끌지만, 어리석은 마음은 말과 행동에서 자신의 우매를 알립니다. 이는 길을 걸어가는 작은 행동 속에서도 여실히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매함이란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마음의 결핍,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결핍된 상태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면 삶은 자연스럽게 빗나가고, 그 빗나감은 숨길 수 없습니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걷는 길로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사울은 왕으로서 많은 지식을 가졌지만,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점점 우매함을 드러냈고, 질투와 두려움이 그의 길을 어둡게 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방향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능력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에 있습니다.우리 삶도 같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면 지혜가 행동 속에 드러나고, 작은 선택 속에서도 바른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면 우매함이 말과 행동 속에서 드러나고, 자신도 모르게 잘못된 길을 가게 됩니다. 이 같이 마음은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심축입니다. 지혜는 바로 이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작은 교만, 작은 욕망, 작은 방심이 마음의 방향을 바꾸고, 삶 전체를 뒤흔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일을 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살핍니다. 그때 삶은 오른쪽 길, 즉 하나님 뜻에 합한 길로 나아갑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4:23).

전도서 10:4절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손함이 큰 허물을 용서 받게 하느니라”

본절은 실천적 잠언으로 지혜가 실제 삶 속에서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전도자는 “지도자가 화를 낼 때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말하며, 분노한 상관이나 권력자 앞에서 지혜로운 태도를 취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고대의 궁정 지혜와 연결되며, 잠언과 다른 지혜문학에서도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롱맨은 이 구절을 “분노한 지도자 앞에서 부드러운 태도가 갈등을 해결한다는 실용적 지혜”로 설명합니다. ‘공손함’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페’는 ‘온유함’을 나타냅니다. 이는 단순한 부드러움이 아니라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황을 치유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히브리어 어근이 ‘치유하다’(rpʾ)와 ‘가라앉히다’(rph) 사이에 걸쳐 있는 것도 이중적 의미를 암시합니다. 즉, 온유함은 관계를 치유하고, 분노를 가라앉히는 힘을 가진 태도입니다. 전도자는 또한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담습니다. 첫째, 도망치거나 회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회피는 지도자의 의심을 더 키우고 분노를 악화시킵니다. 둘째, 침착함으로 상황을 안정시키라는 뜻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위기 속에서도 마음을 지키고, 부드러운 태도로 갈등을 완화합니다. 전도서 8장 2–9절은 “왕의 분노를 피하라”고 말하는 것과 모순처럼 보이지만, 상황이 다릅니다. 8장은 일반적 권력의 위험을 말하고, 10장은 이미 분노가 자신을 향한 상황입니다. 본절을 요약하면, “지혜는 힘 있는 자 앞에서 두려움이나 충돌이 아니라, 침착함과 온유함을 드러낸다.” 이것이 지혜자가 가는 오른 쪽 길입니다(잠10:2).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언15:1).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가이사랴(9)
사도행전 9:30절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주후 69년 베스파시아누스가 가이사랴를 유대의 수도로 삼은 이후, 이 도시는 로마 권력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주후 70년 디도의 예루살렘 정복을 기념하기 위해 가이사랴에서는 대규모 검투사 경기가 열렸고, 고고학적 기록과 요세푸스에 따르면 약 2,500명의 유대인이 이 경기장에서 학살되었습니다. 가이사랴의 경기장과 원형극장은 로마의 잔혹한 오락과 제국의 힘을 드러내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은 이 도시가 단지 로마의 도시만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가이사랴에는 초기 기독교의 흔적이 깊게 남아 있습니다. 발굴된 주후 6세기 교회 유적,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집터, 그리고 초대교부 오리겐과 유세비우스가 활동했던 도서관·신학센터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오리겐은 이곳에서 성서주석과 신학 작업을 완성했고, 사도시대부터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기까지의 초대 교회의 역사를 쓴 유세비우스는 가이사랴의 주교였습니다. 또한 가이사랴 항구 주변에서는 로마 총독부 건물과 바울이 갇혔던 감옥으로 추정되는 공간이 발견되어, 사도행전의 역사성을 뒷받침합니다. 가이사랴는 바울이 유대인의 위협을 피해 도망한 도시였고(행 9:30), 로마로 가기 전 2년 동안 복음을 증언한 자리였으며(행 24장), 베드로가 이방인(고넬료)에게 처음 침례를 베풀었던 곳입니다(행 10장). 로마의 피비린내 나는 경기장이 있던 도시가, 불과 100여 년 후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음은 고고학과 성경이 함께 증언하는 놀라운 역사의 반전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만유의 주로서 통치하심을 믿어야 변화하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5:5).

「빵, 자유 그리고 복음」
요한복음 8: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 땅의 소산을 먹은 다음 날, 만나가 그쳤습니다. 이제 약속의 땅에서 빵과 자유를 얻으려면 싸워야 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빵’을 얻기 위한 투쟁의 역사입니다. 고대부터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에게 호소했고, 종교는 죄와 죽음뿐 아니라 ‘빵’의 문제와도 깊이 결부되었습니다. 그러나 ‘빵’의 문제는 곧 ‘자유’의 문제입니다. 또스또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이 재림 예수에게 한 말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원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유의 무거운 책임을 견디지 못해 빵과 안전을 제공하는 권위에 자신을 맡기려 한다. 그런데 네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기에 인간은 불행해졌다.” 대심문관의 논지는 분명합니다. 인간은 자유보다 빵을 택하고, 진리보다 안정을 택하며, 결국 스스로 속박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정반대의 길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빵 때문에 자유를 포기하는 존재가 아니라, 진리를 통해 참된 자유를 누리는 존재임을 말씀하십니다. 즉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은 생존 문제의 부정이 아니라, 인간은 빵을 넘어서는 존재라는 선언입니다. 복음은 빵을 주되 자유를 빼앗지 않으며, 자유를 주되 빵 문제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알아야 자유를 얻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결국 ‘빵, 자유, 그리고 복음’은 인간이 무엇을 의지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질문입니다: 인간 자신이냐 하나님이냐?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6).

매일묵상(2026/10/5-9)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9)
고린도전서 3: 16절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본문은 1908년 4월 3일, 금산교회 ‘ㄱ’자 예배당 여자 석 상량문에 기록된 성경구절입니다. 이후 80년이 지나 새 예배당을 지을 당시 오래된 ‘ㄱ’자 예배당을 헐고 그 자리에서 새 예배당을 짓자는 교인도 있었지만, 이인수 목사는 ‘문화적 가치가 있는 ‘ㄱ’자 예배당을 그대로 보존하고 새 예배당을 지으려 하니 도와 달라’고 해야 모금도 될 것이라며 교인들을 설득해서 교회 앞마당 유광학교의 자리에 새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1988년 총 6천만 원 들여 벽돌 예배당(78평)을 짓자 교인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ㄱ’자 예배당은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상당합니다. 모악산 너머 배재에 있던 전주 이씨 집안의 재실을 옮겨다 지은 것이라는데 건물 구조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중부지방의 단층 고패집 형태입니다. 남북으로 다섯 칸 집을 앉히고 북쪽 모서리에서 동쪽으로 두 칸 집을 이어 붙여 외형으로 보면 ㄱ자를 뒤집어 놓은 형태인데 모두 합쳐 27평입니다. 전라북도 역시 그 가치를 인정하여 1997년 도지방문화재 136호로 지정하였습니다. 1908년에 세워졌으나 아직도 주일학교 교육관 등으로 사용됩니다. 바로 이웃한 천년 고찰 금산사에 비해, 금산교회의 ‘ㄱ’자 예배당은 작고 초라해 보였지만, 그 안에는 118년의 신앙의 흔적, 박해와 혼란을 견딘 믿음, 복음의 씨앗을 지켜낸 공동체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이의 보존은 단순한 건물 보존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작은 공간을 통해 이루신 은혜의 역사를 기억하고 이어가려는 신앙적 선택입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13:32).

전도서 10:1절
“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느니라”


본절은 전도서 9장 마지막 절, “지혜는 무기보다 강하지만,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뜨린다”(9:18)는 말씀을 일상적 이미지로 구체화합니다. 이는 “작은 악이 큰 선을 망가뜨리는 원리를 가장 생생하게 드러낸 구절”(롱맨)입니다. 전도자는 먼저 일상적이고 매우 구체적인 이미지를 제시합니다. 향기로운 기름 속에 작은 파리 한 마리가 떨어지면, 그 귀한 기름 전체가 악취로 변하는데, 지혜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지혜와 영예는 향기로운 기름처럼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단 한 조각의 우매, 단 한 번의 어리석은 행동, 단 한 사람의 잘못이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나아만의 의복과 은에 대한 탐욕 때문에 부패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으며, 아간의 금과 의복에 대한 탐욕은 전 이스라엘을 패배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끈질긴 유혹을 이겨내었습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다니는 영전에서 틈을 보이면 죄악이 들어옵니다. 무릇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또한, 오늘날도 우리가 쌓은 모든 선과 업적이 단 한 번의 실수나 어리석은 행동으로 무너질 수 있으므로 늘 겸손하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말씀은 큰 위로가 되는데, 지혜와 존귀도 적은 우매로 무너진다는 전도서의 허무가 복음의 능력으로 극복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전도서 10:2절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

본절은 지혜와 우매의 차이를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이미지로 보여줍니다. 지혜로운 자는 오른쪽으로, 우매한 자는 왼쪽으로 간다는 전도자의 말은, 단순한 방향의 차이가 아니라, 삶의 방향성과 존재의 질을 가르는 근본적 차이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롱맨은 이 절을 “지혜와 우매가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는 사실을 두 시각에서 보여주는 전형적 대구 잠언”으로 설명합니다. 오른쪽과 왼쪽은 고대 세계에서 종종 선과 악, 안정과 불안, 능력과 무능을 상징했습니다. 비록 전도자가 이 상징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지혜가 우월하고 우매가 열등하다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지혜는 삶을 바르게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가나, 우매는 삶을 빗나가게 하고 파괴로 이끕니다. 지혜와 우매는 단순한 성향의 차이가 아니라, 삶 전체를 다른 길로 이끄는 방향성의 차이입니다. 여기서 지혜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지혜는 단순한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지혜는 하나님을 향한 방향이며, 우매는 자기 중심의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마음은 오른쪽으로—하나님을 향한 길로—나아가지만, 우매한 마음은 왼쪽으로—자기 욕망과 죄의 길로—흘러갑니다. 룻기에는 룻과 오르바라는 두 여인의 선택이 등장합니다. 오르바는 자신의 길—익숙함과 안전을 향한 길—로 돌아갔습니다. 그 길은 왼쪽의 길처럼 보입니다. 반면 룻은 하나님을 향한 길—믿음과 헌신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은 오른쪽의 길이었고, 결국 그녀는 다윗과 메시아의 계보에 섰습니다. 두 사람의 방향의 차이가 인생 전체, 나아가 영원한 운명까지 바꾸었습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가이사랴(8)
사도행전 12:23절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로마의 극장은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라, 제국의 권력과 문화를 드러내는 상징적 공간이었습니다. 그리스가 자연 언덕을 활용해 연극을 했다면, 로마는 그 언덕을 건물로 재현하여 계단식 관중석과 웅장한 무대를 갖춘 극장을 만들었습니다. 헤롯대왕은 로마의 건축 문화를 유대 땅에 이식하며 가이사랴에 3,500명을 수용하는 대형 극장을 세웠습니다.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이 극장은 로마식 반원형 구조, 무대 뒤편의 장식벽, 그리고 귀족석을 갖춘 전형적인 로마 극장의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극장이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연설하던 장소로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12장 역시 헤롯 아그립바 1세에 대하여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가이샤라의 극장 중앙에는 귀족과 고위층이 앉던 특별석이 있었고, 헤롯 아그립바(1세)는 예루살렘에서 야고보를 참수하고 가이사랴로 내려왔다가 이 자리에서 연설하였습니다(행12:19-23). 오늘날 가이사랴 극장은 발굴과 복원을 통해 거의 완전한 형태로 서 있으면서, 현대 공연도 열리는 살아 있는 유적이 되었습니다. 고대의 돌과 계단은 여전히 그 시대의 권력, 영광, 그리고 심판의 흔적을 품고 있습니다. 왕이 연설하고, 백성이 환호하고, 권력이 빛나던 공간이었으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헤롯의 교만을 꺾으셨습니다. 본절은 그 심판을 증언합니다. 헤롯 아그립바(1세)의 연설을 듣고 백성들이 “이것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소리다!”라고 외쳤을 때, 헤롯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습니다. 주의 사자가 치자 벌레에게 먹혀 죽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떡보다 말씀」
마태복음 4:4절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이집트 혁명의 불씨는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빵을 달라”는 절규였습니다. 러시아의 밀 수출 중단으로 빵값이 폭등하자 민심은 폭발했고, 30년간 권력을 잡았던 무바라크는 무너졌습니다. 빵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 필요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먹기 위해 일하고, 가족을 위해 땀을 흘립니다. 성경도 죄 이후 인간에게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라”고 말씀합니다(창 3:19). 그러므로 노동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삶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주리신 예수께서 마귀에게 대답하신 본문의 취지는, 떡은 필요하나 떡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신을 위한 떡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더 필요합니다. 이는 떡이 우리의 하루를 연장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 하루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하되 노동을 하나님보다 앞세우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땀을 흘려도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천지의 주인을 아는 우리의 노동은 두려움에 매인 노예의 일이 아니라 감사가 담긴 섬김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떡을 얻기 위해 일하지만, 마음까지 떡에 빼앗기지는 않습니다. 손에는 일을 붙들고,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떡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떡보다 더 귀한 생명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노동은 감사가 되고, 우리의 하루는 예배가 됩니다. 우리는 떡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떡을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6:11).

매일묵상(2026/9/28-10/2)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8)
고린도후서 4:8절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바알숭배가 이스라엘을 뒤덮은 시대, 왕도, 백성도, 제사장도 모두 혼합주의에 빠졌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엘리야 한 사람을 세우사 당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금산은 미륵 불교, 증산도 신자들이 자주 찾는 종교성지입니다. 강일순의 무덤이 있는 모악산 ‘성지’에는 증산도 계열 교단이 50여 개에 달합니다. 미륵 불교의 본산인 금산사를 찾는 불교인들도 많습니다. 금산리 주민 가운데 70% 이상이 불교나 증산교, 혹은 도덕교, 용화교 같은 신흥종교를 신봉합니다. 1994년 재부임하여 2019년 은퇴한 이인수 목사는 “온갖 사교(邪敎)와 전쟁하는 각오로 목회를 한다”고 말합니다. “제가 이곳에 전도사로 부임해 와 보니까 젊은이는 아예 없고 옛날 교인이나 그 후손들도 대부분 외지로 나가고 없었어요. 다른 곳에선 이미 사라진지 오랜 ‘ㄱ’자 예배당에서 노인 열 서너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데 착잡하더군요. 6·25사변을 전후로 3년 동안 예배당이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쓰인 적이 있는데…창문틀에 인민위원회 위원 같은 명단과 ‘김일성 장군 만세’, ‘공화국 쟁취’ 같은 낙서가 그대로 남아 있더군요.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새 예배당을 짓기로 하고 모금운동을 하여 1988년 78평 벽돌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ㄱ’자 예배당은 역사적 유물로 보존시켰는데 그 가치를 깨달은 이인수 목사의 공헌입니다. 금산의 혼란 속에서 교회가 다시 서고 복음이 보존된 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참된 분을 알게 하신 은혜 때문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전도서 9:18절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

본절은 지혜의 우월성과 취약성을 말합니다. 지혜는 무기보다 강합니다. 작은 성읍을 구한 것도 지혜였습니다.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뜨린다”는 말처럼 취약한 면도 있습니다. 탁월한 지혜조차 인간의 죄성과 어리석음 앞에서는 언제든 파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아간 한 사람의 탐욕이 이스라엘 전체를 패배로 몰아넣었습니다. 아이 성은 작은 성이었고, 이스라엘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아간의 죄 하나가 공동체 전체를 무너뜨렸습니다. 지혜로운 전략도, 강한 군사력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도 아간 한 사람의 죄가 파괴한 것입니다.그러나 성경은 또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의 죄가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한 사람의 순종은 공동체를 살릴 수 있습니다. 예로서, 노아 한 사람의 순종으로 그의 가족은 홍수에서 구원받았습니다. 복음은 이 진리를 환히 드러내는데, 그리스도의 순종 하나가 인류 전체를 살렸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지혜의 절정이며,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 자리입니다. 이 지혜는 무기보다 강하고, 죄보다 깊으며, 죽음보다 강합니다. 이 지혜를 붙드는 자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이 마음에서 희미해지면, 이 지혜도 삶의 능력이 되지 못하고 옛이야기로 남습니다. 그때 신앙은 의의 열매를 잃습니다. 참된 지혜는 주님을 경외하며 복음을 실천하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만이 죄의 파괴력을 이기고, 공동체를 세우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1:10).

전도서 9장 전체의 묵상
전도서 9:1절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9장에서 전도자는 먼저 인간의 삶을 평가합니다(1–10). 그는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악한 자 모두가 동일한 결말—죽음—을 맞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죽음은 인간의 모든 수고와 성취를 무의미하게 만들며, 인간의 지혜와 경건함조차 죽음 앞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이 냉정한 현실 속에서 전도자는 역설적으로 “오늘의 기쁨을 붙들라”고 권면합니다. 이어 전도자는 인간의 삶이 능력이나 지혜가 아니라 ‘때와 우연’에 의해 좌우됨을 말합니다. 빠른 자가 경주에 이기지 못하고, 강한 자가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며, 지혜로운 자가 성공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인간은 그 때를 알지 못합니다. 인간의 통제력은 극히 제한적입니다(11-12). 끝으로, 지혜의 한계가 언급됩니다. 지혜는 성읍을 구할 만큼 강력하지만, 가난한 자의 지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잊혀지므로, 지혜 역시 허무합니다. 더구나 무기보다 강한 지혜조차 인간의 죄성과 어리석음 앞에서는 언제든 파괴될 수 있습니다(아간의 죄). 누가복음 12장은 주인의 귀가 때를 모르는 종들에 관한 비유가 있습니다. 지혜로운 종은 언제든 주인을 맞을 준비를 하며, 주인의 뜻을 따라 성실히 살아갑니다. 반면 어리석은 종은 주인이 늦게 올 것이라 생각하고 방탕하게 살다가 돌연히 심판을 맞습니다. 죽음은 예고 없이 오고, 인간은 때를 알지 못하나, 주님을 경외하는 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전9:1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가이사랴(7)
이사야 35:6절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이스라엘은 겨울에만 비가 오는 건조한 기후 때문에, 도시가 성장하려면 반드시 안정적인 수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이사랴는 샘이 없는 지역이라 초기에는 빗물과 작은 우물에 의존하였습니다. 인구가 늘어나자 헤롯대왕은 도시의 생존을 위해 로마식 도수교를 건설했습니다. 수로는 마치 길고 좁은 다리를 연상케 합니다. 진흙벽돌을 쌓아 만든 다리는 아래 부분은 아치 형태로 연결되어 있고 윗부분은 현대의 수로처럼 물이 지나갈 수 있는 수관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수로는 갈멜산 기슭에서 시작해 가이사랴까지 21km를 이어졌으며, 아치형 기단 위에 물길을 올려 중력만으로 물을 흐르게 하는 정교한 기술이 적용되었습니다. 조사에 따르면 수로의 기울기는 1km당 약 1m 내외로 조정되어, 당시로서는 놀라운 정밀도입니다. 도시가 더 성장하자 주후 130년경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탄니님 강에서부터 새로운 수로를 건설해 기존 헤롯 수로와 연결했고, 물길의 폭을 확장했습니다. 이 두 수로는 십자군 시대까지 사용되면서 가이사랴의 생명줄 역할을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해안가를 따라 길게 서 있는 수로의 잔해는 고대 로마 공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이며, 성지순례객들에게는 좋은 포토존이 되어 주기도 합니다. 고고학은 말합니다. “가이사랴는 물이 없던 도시였지만, 누군가의 헌신과 기술이 물을 흐르게 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물이 없는 자리에서도 생명의 역사를 흐르게 하신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5).

하나님의 능력을 믿자!
시편 121:2절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인간의 삶을 “실천적 사랑을 배우는 공간”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인간은 행복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행복에 이른다”고 쓰고 있습니다. 인문학은 이 말을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설명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 불가능에 절망하지 말라”는 진리를 가르칩니다. 이 경우 고통은 인간의 힘을 드러내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김혜자 부친 김용택 선생(한국의 2호 경제학박사)은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정부의 요직을 맡았지만, 네 번의 국회의원 낙선 끝에 판잣집으로 내려앉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만한 집도 없는 친구가 많다. 대붕의 큰 뜻을 너희가 어찌 알겠느냐.” 하면서 청렴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1984). 여러분, 무엇을 위해 살아갑니까? 대붕의 길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 자녀, 교회, 이웃, 나라와 민족을 섬기는 삶, 그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삶입니다. 그 길에는 위험이 도사립니다. 손해도 있고, 실패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근거로 믿음을 세웠듯, 우리는 만유의 머리되신 부활하신 주님을 근거로 안심합니다. 우리는 대붕의 큰 뜻을 다 알지 못하나, 한 가지는 압니다.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는 죄의 길에서 돌이키고, 불평의 길을 버리고, 절망의 길에서 일어나 주님을 따르는 길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이며 능력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사랑을 선택하는 삶, 그 길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길입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1:22).

매일묵상(2026/9/21-23)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7)
갈라디아서 4:13절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건강 문제로 갈라디아에 머무를 때 세워졌는데, 섭리 중에 세워진 교회도 많습니다. 처음에 ‘팟정이교회’로 불리던 금산교회는 1892년 내한한 선교사 테이트(1862-1929)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데이트는 1901년 이후 익산 등 전주 서남부 지역 선교를 맡아 나귀를 타고 순회하였는데, 1904년 어간에 금산 팟정이 마을에서 이자익과 조덕삼을 만났습니다. 테이트는 교회법 이론에 밝아, 1907년 독로회 창설 때 한국 장로교회의 법과 체계의 기틀을 마련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성실하고 암기력이 뛰어난 이자익(1882-1958)에게 기대를 걸었습니다. 이자익이 훗날 ‘법통’ 총회장이 된 것도 테이트의 영향 때문이었고, 이자익은 테이트의 ‘믿음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디모데’로 불렸습니다. 이자익은 ‘옛 주인’ 조덕삼과 함께 테이트가 전하는 ‘구세주’(救世主)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를 시작했는데, 그 당시는 ‘제세주’(濟世主)를 자칭한 강일순이 ‘후천개벽’을 선포하며 추종자들을 모악산 자락으로 불러 모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와 증산교가 같은 시기에 “세상을 구원한다.”는 같은 메시지를 전하며 금산에 들어온 셈입니다. 두 종교의 경쟁은 불가피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복음을 전도받은 사마리아 여인이 생각납니다. 그 여인이 혼란 속에서 참된 구원을 만났듯, 금산의 종교적 혼란 속에서도 조덕삼과 이자익은 참된 구세주 예수를 만났습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요4:42).

전도서 9:16절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나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앞절에서 전도자는 한 가난한 지혜자가 성을 구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가진 것도 없고 사회적 힘도 없었지만, 그의 지혜는 성을 살릴 만큼 강력했습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분명히 말합니다. “지혜가 힘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곧 역설이 나타납니다. 그렇게 성을 구한 사람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지혜는 당장의 위기에서는 힘보다 뛰어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지혜마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이것이 전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그 지혜의 한계입니다. 다윗의 삶도 비슷하였습니다. 그는 골리앗 앞에서 군대의 힘이나 갑옷이 아니라 믿음과 지혜, 그리고 용맹으로 이겼습니다. 이에 공로를 인정하여 상을 주려던 사울은 돌연 변하여 다윗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사람의 기억과 평가는 쉽게 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인정이나 사람들의 기억을 삶의 보상으로 삼는다면 허무를 경험하게 됩니다. 지혜롭게 살았는데도 잊힐 수 있고, 충성했는데도 인정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사람에게 잊힌 지혜자의 말과 달리 하나님의 지혜인 복음과 그 삶은 영원합니다(벧전 1:25; 요일2:17). 인간의 기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지혜는 한 시대를 살릴 수 있어도 결국 잊힙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주님의 복음은 시대를 넘어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름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억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를 믿어 죄사함 받고 복음에 근거한 의를 생산하는 현실적 이유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40:8).

전도서 9:17절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세상에서는 큰 소리, 강한 목소리와 화려한 말, 많은 사람을 거느린 자의 외침이 힘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지혜자의 말은 조용하지만 우매한 자들의 지도자의 고함보다 낫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뚜렷한 대조가 있습니다. 한쪽에는 조용한 지혜자의 말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어리석은 자들을 이끄는 지도자의 외침이 있지만, 후자가 큰 영향력을 가지고 큰 소리로 외쳐도 지혜자의 조용한 말 한마디보다 못합니다. 진리는 목소리의 크기로 증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말은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그 내용 자체로 사람을 설득하고 생명을 살립니다. 좋은 예가 갈멜 산의 대결입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큰 소리로 부르짖고 자신들의 몸을 상하게 하며 외쳤습니다. 그러나 저녁까지 아무 응답도 없었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고 간절히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드러냈습니다. 많은 외침은 무의미했으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한 사람의 진실한 말은 열납되었고 백성의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우리도 큰 소리에 쉽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말하고, 강한 사람이 주장하며, 세상의 여론이 한 방향으로 흐를 때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무엇이 더 크게 들리는가보다 무엇이 참된 말씀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기적으로 치유하셨으나, 바리새인들의 질시를 당하자 조용히 떠나셨습니다.이에 마태는 이사야의 성취를 증언하는데(사42:1-3), 온유와 겸손한 삶의 모범이 되십니다.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마12:19).

매일묵상(2026/8/31-9/4)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4)
히브리서 11: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이덕주 교수는 물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금산으로 왔을까요? 경상도 남애 섬에서 이곳 전라도 산골까지 들어오게 된 어린 이자익의 동기가 궁금했습니다. 셋째 아들 이성환 집사의 설명입니다. “나가 금산면장을 혀서 아는디, 여그 금산이 본시 전국 팔도 오색 잡놈덜이 몰려드는 곳이 아닌가벼? 징게 맹갱 외야들에서 농사짓넌 집이 많응께 머슴살이라도 할려고 오는 사람덜이 많았고, 여그서 금이 난다고 혀서 금 캐러 오는 사람덜도 많았제. 그 뿐인가? 구한말부터 모악산 자락에 잡술 하는 사람덜이 전국 각지서 몰려 들었제. 하먼, 금산에 본토배기는 삼분지 일도 안 되야.” 한반도 제일의 곡창이라는 “징게, 맹갱”(金堤, 萬頃) 평야가 있어 살기에 넉넉했고, 사금이 나와 일확천금을 노리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것입니다. 빈손으로 들어왔더라도 자기하기에 따라 부를 일굴 수 있는 곳이 금산이었습니다. 어린 이자익은 생존을 위해 금산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현실의 길 위에서 하나님은 그를 만나 주셨고, 머슴살이의 자리에서 목회자의 길로 부르셨습니다. 신앙의 부르심은 언제나 우리가 서 있는 현실에서 시작됩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나안으로 나아갔지만, 그의 시선은 눈앞의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더 큰 도성을 향해 있었습니다(히11:10). 750년 뒤 그의 후손은 여호수아의 지도 하에 가나안 땅을 차지합니다. 믿음은 현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걸으며 그분이 이루실 것을 믿고 살아가는 힘입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11:10).

전도서 9: 10절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본절은 전도자의 가장 강한 권면입니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하라.” 전도자는 삶의 허무를 말하지만, 그 허무 속에서도 주어진 기회를 붙잡으라고 명령합니다. 죽음은 모든 가능성을 끝내며,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습니다. 해 아래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지금뿐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미루지 말고, 주어진 기회를 즉시 붙잡으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단순한 근면의 권면이 아니라, 기회가 있을 때 행동하라는 신앙적 현실주의입니다. 신약에서 더 깊게 확장됩니다. 예수님은 “때가 아직 낮이니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요9:4). 밤이 오면 아무도 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주어진 시간과 기회를 붙잡고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삶은 “지금 해야 할 일을 지금 하는 삶”이었습니다. 바울도 “세월을 아끼라”고 말합니다. 이는 시간이 짧기 때문이 아니라, 기회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과 행할 일을 주셨습니다. 전도자는 죽음의 종결성을 강조하며 지금 행동하라 말하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심판과 연결하십니다.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고 돌아온 주인은 그들의 행한 일을 심판합니다. 달란트를 묻어둔 종은 기회를 사용하지 않은 죄로 영원한 벌을 받습니다. 기회는 현재에만 주어집니다. 종말이 오면 더 이상 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행위는 심판 때 밝히 드러나며, 지금의 충성은 영원한 기쁨으로 이어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깨어 있으라. 너희가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 25:13).

전도서 9: 11절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인간의 능력, 지혜, 경험이 삶의 결과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삶이 ‘때’와 ‘우연’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학자 롱맨은 이 절을 “전도자의 현실주의가 가장 날카롭게 드러나는 구절”이라 말합니다. 본절은 능력이 결과를 결정한다고 믿는 인간의 기대를 무너뜨립니다. 빠른 자가 항상 이기지 않고, 강한 자가 항상 승리하지 않으며, 지혜로운 자가 항상 성공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운명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능력을 갖추었다 하여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지혜는 확실히 우매보다 우월합니다. 그러나 그 지혜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며,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더 나아가 인생은 능력과 노력보다 더 큰 힘—때와 우연—에 의해 흔들립니다. 이것이 전도자가 말하는 허무의 본질입니다. 인간의 능력은 결과를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회를 구하며 겸손히 살아가야 합니다. “때와 우연”에 대한 본절의 가르침은, 신약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로 더 깊게 해석됩니다. 능력, 속도,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때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진리가 선포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과 구원조차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에 달려 있음을 고백합니다(롬9:11). 신자는 믿음 가운데 늘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롬9:11).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가이사랴(4)
사도행전 8: 40절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가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전도자 빌립은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뒤 아소도와 여러 성을 거쳐 가이사랴에 정착하였고 딸 넷을 두었습니다(행 21:8–9). 가이사랴의 항구 세바스토스는 헤롯대왕이 주전 30년경 지중해 연안에 건설한 거대한 인공 항구입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해양 건축 기술이 적용되었고, 요세푸스는 이 항구가 아테네의 피라에우스 항구에 견줄 만큼 크고 아름다웠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주후 1~2세기 거대한 쓰나미로 심각한 손상을 입었으며, 고고학 조사에 따르면 헤롯이 사용한 콘크리트는 로마 본토의 것보다 약해 구조적 결함도 있었습니다. 결국 항구는 비잔틴 시대 이후 더 이상 사용되지 못하고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오늘날 가이사랴는 이스라엘 유물청과 해양고고학자들의 지속적인 연구로 많은 부분이 발굴되었지만, 항구 전체를 완전히 복원하기에는 여전히 많은 부분이 소실된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가이사랴는 로마 시대의 웅장함과 신약 시대 복음의 역사가 함께 숨 쉬는 중요한 유적지로 남아 있습니다. 이 같이 항구 세바스토스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과 권력으로 세워졌지만 자연의 힘 앞에서 무너져 바다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에서 하나님은 베드로와 고넬료를 만나게 하시고 이방 선교의 문을 여셨습니다. 인간의 건축은 사라졌지만 하나님의 구속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항구 뿐 아니라, 인간의 기술과 권력으로 지어진 모든 것이 ‘모래 위의 집’과 같은 운명입니다. 그 반면, 복음의 역사는 ‘반석 위의 집’처럼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모든 것이 가능한 하나님.
마태복음 19:26절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부자 청년은 영생을 얻고자 달려왔습니다. 그는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하며, 무엇이 더 필요한지 물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사랑하사 한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 재물이 많은 청년은 심히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그를 본 주님은 제자들에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심히 어려운데,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놀란 제자들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고 대답하셨습니다.청년의 문제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재물은 세상에서 유용하나 하나님의 나라의 입구를 막는 큰 장애물입니다. 더 나아가 재물은 인간의 마음을 왜곡시키고 죄를 부추깁니다. ‘파우스트’(괴테)의 한 대목입니다: “우리가 금을 파놓으면 도둑질, 오입질이 생겨나고, 오만한 자에게 무기를 주어 대량학살을 꿈꾸게 하지요 세 가지 계율을 여기는 놈 다른 계율 역시 지키지 않는 법 이 모든 게 우리의 잘못은 아니죠” 그러나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부자 청년과 대조되는 분이 선지자 엘리사입니다. 그는 24마리의 소를 부릴 만큼 유복하였지만, 엘리야의 부름을 받자 다 버리고 엘리야를 따랐습니다. 그는 엘리야의 승천을 목격했고, 요단 강을 가르고 마른 땅으로 건넜습니다. 또한, 엘리야의 갑절의 영감을 받아서 불신앙의 북 이스라엘 왕국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입증하였습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

매일묵상(2026/824-28)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3)
창세기 12: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자익 목사의 며느리의 계속된 말입니다. “..긍께 머슴살이 한거지유 뭐. 근데 본시 영민하신 분이라 주인 집 아들들이 한문 공부하는 것을 밖에서 듣고는 천자문을 외우셨대유. 쓸질은 모르셨구유. 스무살이 넘어설랑 같은 동네 살던 김씨 집안에서 보니깐 성실하니 일을 잘허니께 사위를 삼았는디 독립허라구 논 닷마지기까지 받았다 이말이유. 그리구선 언젠가 서양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되앗는디 조덕삼 씨 하구 한 날 한 시에 세례 받고 교회를 시작하셨대유. 인자 선교사 조사가 되어선 외지로 전도하러 다니셨는디 어느 핸가 살림 밑천으로 받은 논 닷마지기를 팔아선 소식두 없이 사라지셨대유. 처갓집에선 배은망덕한 놈이라구 욕도 많이 했대유. 인자 육개월만에 집으로 왔는디 상투를 싹둑 자르고 양복을 해 입구 딴 사람이 되서 나타났시유. 긍께 그 사이에 평양 신학교에 들어갔다 이말이유. 장인은 비록 예수를 안 믿었지만 신사가 되서 돌아온 사위를 보고는 생각을 바꿨대유.” 시아버지의 이야기는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는” 아브라함과 다를 바 없습니다. 가난이 싫어 고향을 떠난 10대 고아 소년에게 금산은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자익이 인정받은 것은 성실과 그에 터잡은 실력입니다. 마치 요셉과 같습니다. 종으로 팔렸을 때나,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나, 바로의 총리가 되었을 때나 요셉은 성실하였고 그 동안 연마한 실력을 발휘합니다. 성실과 실력은 하나님이 높이시는 길로서, 우리가 갖추고 있어야 할 덕목입니다.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그는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언22:29)


전도서 9: 8절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본절은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삶을 기쁨으로 준비하라는 명령입니다. 전도자는 허무 속에서 쾌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아는 자가 하나님이 주신 오늘을 축제처럼 살아가라는 신앙적 명령을 내립니다. 흰 옷은 고대에서 축제와 기쁨의 상징이었고, 머리에 바르는 기름은 환대와 풍성함의 상징이었습니다. 전도자의 말씀 대로 덧없는 삶 속에서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쁨을 적극적으로 누려야 합니다. 신약은 이 기쁨을 더 확장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임을 말합니다. 희락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닙니다. 의가 세워지고, 평강이 자리 잡을 때 성령께서 주시는 종말론적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상황을 넘어서는 기쁨이며,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기쁨입니다. 메시야가 오실 때 모든 사람은 이 희락을 누리게 됩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은 바로 이 종말론적 기쁨의 상징입니다. 잔치의 기쁨이 끊어지려는 순간, 예수님은 더 좋은 포도주를 주심으로 메시야의 시대에 임한 새롭고 넘치는 종말론적 기쁨을 드러내셨습니다. 확실히 신약의 기쁨은 전도자의 명령과 차원이 다릅니다. 전도자는 허무 속에서 기쁨을 찾으라 했지만, 주님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영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허무 자체가 없습니다. 소망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이 영생의 보증이십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의 가정은 바울의 전도로 하나님을 믿고 이런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행16:34).

전도서 9: 9절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본절은 현실은 허무하나 하나님이 주신 ‘관계의 기쁨’을 붙잡을 것을 교훈합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라.” 전도자는 삶이 덧없지만, 하나님은 여러 기쁨들을 선물로 주셨음을 밝힙니다. 즉, 먹고 마시는 기쁨(9:7), 흰 옷과 기름의 기쁨(9:8), 그리고 본절의 관계의 기쁨이 그 예입니다. 부부의 사랑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기쁨이며, 수고 중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우리의 몫이나 사람마다 갖지는 못합니다. 실로, 결혼생활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들이 누리는 복입니다(잠언18:22). 어제도 언급되었지만, 신약은,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임을 선포합니다. 여기서 ‘희락’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의와 평강이 자리 잡을 때 성령께서 주시는 종말론적 기쁨입니다. 이 세상의 순간적 즐거움을 넘어, 부활의 소망을 갖고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고 있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그 성격은 잃어버린 양이 하나님께 돌아올 때 잘 드러납니다. 누가복음의 증언입니다. 삭개오는 돌감람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고 있던 중 부르심을 듣고 기뻐하며 곧장 내려와 집으로 영접합니다. 그때 “죄인의 집에 들어간다”고 이웃들이 수군거리자, 회개하여 “주여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토색한 것이 있으면 네 갑절로 갚겠습니다”고 말씀드리자, 주님은 구원을 선포하며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말씀하십니다(눅19:9). 삭개오는 후에 가이샤라의 주교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가이사랴(3)
사도행전 25: 1절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가이사랴는 로마총독의 관저가 있었으며 로마로 압송되기 전 바울의 재판과 증언(행 25장) 등이 행해진 곳입니다. 가이사랴는 초기 기독교 복음 전파와 신학의 중요한 중심지였습니다. 가이사랴 해변을 내려다보면 바다 속에 잠긴 거대한 방파제의 선명한 흔적이 보입니다. 헤롯이 바다 속에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항구의 기초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묵묵히 쌓아 올린 구조물이 전체 항구를 지탱했습니다. 짐배 위에 시멘트를 붓고 다시 그 위에 짐배를 얹어 바다 속으로 가라앉히는 작업을 반복했고, 북쪽 방파제는 거대한 나무 틀을 바다에 띄운 뒤 잠수부들이 밀어 넣어 시멘트를 채워 올렸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수면 아래에서 이루어졌지만, 그 숨은 기초가 항구의 위용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솔로몬 성전도 같습니다. 성전이 세워질 때 망치나 도끼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돌들은 이미 보이지 않는 채석장에서 다듬어져 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은 숨은 자리에서의 준비가 만들어낸 열매였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보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쌓아 올린 기초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충실히 준비된 사람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가이사랴의 방파제처럼, 우리의 신앙도 깊은 곳에서 단단히 세워져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보다 숨은 충실함이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기초를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기초가 흔들리지 않을 때, 삶의 항구도 견고하게 서게 됩니다. 우리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믿음은 신념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1,2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단순한 주관적 신념이 아닙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능력, 형제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갈멜 산에서 하나님의 불을 경험한 엘리야는 누구보다 강한 믿음의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심판한 그의 담대함은 인간의 용기를 넘어선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이세벨이 “내일 너를 죽이겠다”는 말 한마디에 그의 마음은 무너졌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에서 브엘세바를 지나 광야까지 약 300km를 도망가서 한 로뎀나무 밑에서 쓰러집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책망하는 대신 천사를 보내 떡과 물을 공급하심으로 지친 종을 일으키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힘을 얻은 엘리야가 호렙 산에 이르자, 하나님은 “내가 남겨 둔 칠천 명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모르는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미래를 준비하고 계셨고, 엘리야의 사명도 다시 세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를 만나 제자 삼으라고 명령하심으로, 고독한 엘리야에게 형제 사랑을 경험케 하십니다. 믿음은 홀로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서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자랍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혼란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고, 외로움 속에서 형제 사랑을 회복할 때 믿음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현실을 해석하고 견디게 하는 힘이 됩니다. 우리도 엘리야처럼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먹이시고, 깨우시고, 다시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매일묵상(2026/8/17-21)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2)
시편 113:7,8절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금산교회의 창립자의 한 분인 이자익 목사는 8남매를 두었으나, 지금은 자녀들 역시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전의 셋째 아들 이성환 집사는 아버지에 대하여 “내는 아버지를 잘 몰러, 일주일이면 하루나 집에 들어오실랑가? 집에 오셔두 자식들한테 얼매나 엄하셨는디…”하면서 “엄하신 목사”로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말년의 이자익 목사를 모셨던 며느리 김양호 권사는 소상히 언급합니다. “긍께, 시아버님은 경상남도 남해군에 사는 장수 이씨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나셨는디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여섯 살 때 친척집에 들어가 살았는디 허구헌날 일만 시켰대유 글씨, 오죽 했으먼 열두 살 땐가 고향을 떠나셨대유. 인자 배를 타고 하동을 거쳐 순천으로 해서 금산까지 와서는 팟정이에서 포목장사를 하는 조덕삼 씨네 집에 들어가 마부 노릇을 하게 된거지……” 이렇게 이자익 목사의 어린 시절은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그를 빚으셨고, 결국 장로, 목사, 총회장으로 세우셨습니다. 요셉도 같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버림받았고, 노예로 팔렸으며,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수모까지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요셉을 빚으셨고, 결국 애굽의 총리로 세워 많은 생명을 살리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역경에 놓이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신실해야 합니다(시편37:3-6). 요셉과 이자익은 청년의 때에 모두 성실하였습니다. 다음 주에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편84:11).

전도서 9:6절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 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


살아 있는 동안만 우리는 사랑하고, 미워하고, 질투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감정의 종결입니다. 죽은 자는 사랑도, 미움도, 질투도 없습니다. 그들은 관계 속에서 움직이지 못하며, 이 땅에서의 모든 몫이 끝났습니다. 전도자는 삶의 고통을 숨기지 않지만, 죽음의 절대적 종결성을 직면하면서 삶이 주는 작은 가능성을 강조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만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설 수 있고, 사랑을 회복할 수 있으며,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신약은 이 메시지를 더 깊고 더 무겁게 확장합니다. 죽음은 감정의 종결일 뿐 아니라, 최후의 심판으로 이어지는 문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감정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죄책감은 회개로 이끌며, 질투와 미움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부수어뜨립니다. 살아 있는 동안만 우리는 회개할 수 있고, 믿음을 고백할 수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더 이상 선택이 없습니다. 심판만이 남습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길 가시던 중 예수께서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을 보시고,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요9:4)고 하셨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사랑, 미움, 질투 등 모든 감정을 이끌어 갈 그 한 방향입니다. 선을 행할 능력과 지혜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12:17).

전도서 9:7절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본절은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도 삶을 붙잡을 것을 가르칩니다. “너의 음식물을 기쁨으로 먹고, 네 포도주를 즐겁게 마시라”는 말씀은 단순한 쾌락을 뜻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불가피함을 직면한 전도자의 결론으로 감사함을 갖고 삶을 누리는 모습입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이 이미 우리의 삶을 기쁘게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망을 결정하셨어도, 삶의 기쁨 역시 허락하셨습니다. 삶은 덧없지만, 그 덧없음 속에서도 하나님은 기쁨을 선물로 주산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모든 것을 종결시키나, 경건한 신자들은 오늘을 감사히 살아갈 줄 압니다. 신약은 이 말씀을 완성합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죽음 이후에도 끝나지 않는 기쁨—죄사함과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전도자가 말한 “하나님이 이미 네 행위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선언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실현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 앞에서 허무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씻김 받고, 그분의 부활로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며 기뻐하는 삶은 단순한 일상의 즐거움이 아니라, 죄사함 받은 자의 감사와 영생의 기쁨을 누리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실 때, 떡과 잔을 들어 거듭 감사하셨습니다. 죽음을 알고도 거듭 감사하시는 그 순간은,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의 선언입니다. 전도서의 “먹고 마시라”는 명령은 우리 주님에 의해 이렇게 완성되었습니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26).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가이사랴(2)

사도행전 11:11절
“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가이사랴는 헤롯대왕이 주전 30년경 건설하기 전까지 ‘스트라톤의 탑’이라 불리던 작은 항구였습니다. 주전 3세기 베니게 사람들이 사용했으나, 지중해의 강한 남서풍과 해안 절벽의 거센 바람으로 항구로서는 부적합하여 버려졌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로마의 후원을 받아 이곳을 새롭게 개발하며, 인공적으로 300척의 배가 동시에 정박할 수 있는 10만㎡ 규모의 거대한 항구를 건설했습니다. 그는 이 항구를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기리기 위해 ‘세바스토스 항구’라 명명했습니다. 이 항구는 자연 지형을 이용하지 않고 완전히 인공적으로 조성된 세계 최초의 대형 항구 중 하나로, 당시 로마의 기술력과 헤롯의 건축적 야망을 보여줍니다. 가이사랴는 이후 로마 군대의 주둔지이자 헤롯의 궁전이 자리한 도시가 되었으며(행 10장, 12장), 그의 아들 헤롯 아켈라오가 통치했으나 실정으로 인해 로마 총독이 파견되었습니다. 총독은 가이사랴를 행정 수도로 삼고 유대를 통치했습니다. 이곳은 로마 시대를 거쳐 비잔틴, 초기 이슬람, 십자군 시대까지 번성하였습니다. 본절에서 누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가 가이사랴에서 무너졌음을 밝힙니다. 베드로는 이곳에서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기 전까지, 복음은 유대인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고 말씀하시며,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의 집으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에 복음의 문은 모든 이방 민족에게 열려졌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사랑 곧 회복의 길
로마서 12:15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정신과 의사 나종호 박사는 말합니다. “열심히, 성실히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닥친 트라우마와 불행으로 인해 인생이 180도 달라지게 됩니다.” 나 박사는 자신이 만난 환자 중 노숙자가 있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대기업 임원이었지만, 아내를 잃은 뒤 마약에 중독되어 사회적으로 몰락했습니다. 그 과정을 보며 그는 깨달았습니다. 사회가 말하는 성공은 신기루 같고, 우리가 이룬 것에는 노력뿐 아니라 운도 많이 작용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과 타인에게 관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괜찮을 수 없습니다. 그 자체를 이해하고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해야 합니다. 나박사와 같은 전문가의 도움이나 따뜻한 말 한마디는 큰 격려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신비한 모습으로 자주 나타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고 희생하며 배려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의 풍랑에서 위협받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구원받을 것을 알려주었으며, 그 말을 믿고 안심합니다(하나님의 계획). 그리고 구조받은 멜리데라는 섬에서 이질에 걸려 고생하는 추장과 여러 환자들에게 안수하여 고칩니다(하나님의 능력). 그러나,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서 70킬로 떨어진 ‘압비오 광장”에 다다랐을 때, 마중 나온 형제들을 보고서 마음에 담대함을 얻었다고 누가는 증언합니다(형제 사랑). 형제 사랑이란 다 그런 것이죠! 여러 가지 인생의 풍랑에 시달리는 우리는 이 세 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매일묵상(2026/8/10-14)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
사무엘 16:10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본절은 소년 목동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신 하나님의 기준을 보여줍니다. “전라도 목사가 경상도 가서 목회에 성공한 예는 찾기 어려워도 전라도 와서 목회에 성공한 경상도 목사는 많다.” 한 호남교회사가의 지론입니다. 이를 증명하듯이, 경북 경산 출신인 배은희 목사는 전라도 ‘모교회’인 전주 서문교회의 전성기 15년(1921-1936년)동안 목회하였고 ‘사랑의 원자탄’으로 유명한 여수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도 본래 경남 함안 출신으로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지만 그의 목회와 순교는 전라도 여수 땅에서 이루어졌고 그 기념관도 여수에 있습니다. 아마도 전라도가 경상도보다는 외지인들에 대한 배척이 덜했던 것 같습니다. 이자익(1879-1958)목사도 그렇습니다. 경남 남해 출신인 이자익 목사는 전북 김제와 정읍에서 목회하였고 전북 노회장을 거쳐 조선예수교 총회장을 3번 역임한 바 있습니다. 한 번 들은 것은 잊지 않았으며 복잡한 장로교 헌법과 규칙을 줄줄 꿰고 있어 ‘법통’(法通) 총회장으로 불렸습니다. 특히 머슴의 신분이었으나 주인 조덕삼을 제치고 먼저 장로로 피택된 된 사건은 유명합니다. 그 머슴은 후에 목사가 됩니다. 이런 이자익 목사를 배출한 교회가 지금까지 ‘ㄱ’자 예배당을 간직하고 있는 금산교회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출신과 지역은 장벽이 아니라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어디서든, 그분의 뜻에 따라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쓰임받는 기준은 오직 깨끗하게 준비된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2:21).

전도서 9:4절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전도자는 “살아 있는 자에게는 소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망은 막연한 낙관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만 누릴 수 있는 작은 가능성, 돌이킬 기회, 하나님 앞에서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뜻합니다. 죽음은 모든 활동을 끝내지만, 살아 있음은 비록 미약해도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문을 열어 둡니다(전9:10). 전도자는 이 진리를 강조하려고 후단에서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개는 가장 비천한 존재였고, 사자는 가장 존귀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개는 비천해도 움직이고, 느끼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전도자는 바로 이 작은 활동성을 살아 있음의 가치로 봅니다. 살아 있는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고, 잘못된 길에서 돌아설 수 있으며,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구분을 지우지만, 살아 있음은 하나님 앞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남겨 둡니다. 본절은 신약의 관점에서 구원과 관련된 중요한 교훈을 내포합니다 ㅡ “살아 있음은 하나님 앞에서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십자가 위에서 회개한 강도의 예가 있습니다. 만약 그 강도가 죽었다면 더 이상의 선택도 회개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강도는 다리가 꺾이기 직전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주님은 즉각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살아 있음은 큰 선물입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

전도서 9:5절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9장은 인간 존재의 가장 냉정한 현실을 말합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공통된 운명입니다. 의인과 악인,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경건한 자와 불경건한 자 모두가 이 운명 앞에서 평등해집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죽음의 보편성을 말하면서도, 살아 있는 자가 가진 작은 우위를 강조합니다. 그 우위는 의식, 곧 자기 인식입니다. 살아 있는 자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인식은 비극적이나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또한 제공합니다. 즉 살아 있음은 하나님 앞에서 다시 선택할 여지를 갖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기억도, 감정도, 행동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몫이 끝났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자는 하나님께 돌아설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며, 삶의 방향도 새롭게 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전도서 9:4–5절이 주는 분명한 교훈입니다. 한편, 죽음을 아는 의식, 그것은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부르심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부활의 소망으로 이끕니다. 히스기야는 죽음이 임박하자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였으며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하셨습니다. 히스기야는 죽음을 알았고, 그 인식 때문에 하나님께 돌이켰으며, 그 돌이킴이 그의 삶을 새롭게 만든 예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기회는 늘 주어지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만 사랑하고, 회개하며, 순종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가이사랴
사도행전 10:24절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가이사랴는 헤롯대왕이 건설한 신약 시대의 항구도시입니다. 헤롯대왕은 로마 문화를 유입하고 로마와 직접 연결되는 관문을 만들기 위해 항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욥바는 유대인들의 거주지였고, 그 유대인들은 로마화를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헤롯은 이두메아 출신이란 약점을 가졌기에 욥바를 로마식 도시로 바꾸지 못하고 새로운 항구도시를 건설한 것입니다. ‘가이사랴’라 명명한 이유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가이사랴의 위치는 욥바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지중해 연안입니다. 헤롯은 이곳에 거대한 인공항, 원형경기장, 신전, 행정시설을 갖춘 로마식 도시를 완성했습니다. 이후 가이사랴는 로마 총독부가 자리한 정치 중심지이자, 기독교가 확장되는 중요한 도시로 성장합니다. 요세푸스는 가이사랴의 아름다움과 규모를 상세히 기록했고, 1959년 링크 부부의 탐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발굴되고 있습니다. 본절은 베드로가 가이샤라에 있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여 복음을 선포한 사실을 증언합니다. 이 사건은 유대인 중심의 복음이 이방인에게 확장되는 결정적 전환점이었습니다(행10장, 11장). 일곱 집사 중 한 명인 전도자 빌립은 세 명의 딸과 함께 가이샤라에 거주하였고, 바울은 2년 간 가택연금을 당합니다. 그는 총독의 재판을 거쳐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압송됩니다. 비록 가이사랴는 로마 권력의 상징이었지만, 하나님은 그곳을 복음 확장의 거점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의 편견으로 하나님을 제한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언16:4).

시편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우울함과 관련하여, 나종호 박사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감정을 기록하며 스스로 조절하라. 기분이 좋았던 날 무엇을 했는지, 어떤 행동이 스트레스를 만들었는지 점검하는 것입니다. 글쓰기나 운동처럼 자신을 회복시키는 활동을 정해진 주기로 실천하면 감정의 흐름이 안정됩니다. 둘째는 자책을 내려놓아라. 성공은 노력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시기· 우연· 환경이라는 요소가 개입합니다. 따라서, 자신과 타인에게 관대해져야 합니다. 여기에 심리학은 왜곡된 사고를 교정하는 인지행동치료, 활동을 회복시키는 행동활성화, 관계 유지, 수면·식사·운동 관리 같은 보완적 처방을 더합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다루데 유익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문제를 감정이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에서 찾습니다. 심리학은 스스로 행복을 만들라고 말하나, 우울과 불안의 뿌리에는 죄책감, 두려움, 영적 공허가 자리합니다. 이것은 감정 조절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 관대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에서 회복의 길을 찾습니다. 죄를 범한 다윗의 회복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는 죄를 회개했고, 말씀을 붙들었고, 성령께서 떠나지 않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성령님 안에서 새 생명, 즉 의와 평강과 기쁨을 누리면 우울은 자연히 사라집니다(롬14:17). 이때 심리학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집니다(롬5:5). 사랑과 우울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면(하나님께 아뢰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매일묵상(2026/8/3-7)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서문교회(7)
시편 133:1절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인생을 살다 보면 좋은 일과 어려운 일을 모두 겪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기에 갈등이 생기기 쉽고, 때로는 분열의 아픔을 겪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연합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됨을 지켜 나가는 일입니다. 서문교회 배은희 목사가 “조선의 성자”라 부른 방애인 선생은 스물셋에 장질부사로 별세하여 화산동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묘는 오랫동안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확인한 김대전·김연수 두 장로는 교회에 알리고, 묘소를 서문교회 묘지로 이장했습니다(1999년). 또한 서문교회는 『전주 서문교회 100년사』를 출판한 뒤, 100주년 기념 예배당 지하에 “역사 자료실”을 마련하여 교회와 호남 선교의 귀한 자료들을 전시했습니다. 방문객도 크게 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랑과 헌신이 세운 아름다운 역사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교회를 이끈 당회장 목사의 은퇴 후 후임을 세우는 과정에서 심각한 내분이 일어났고, 김대전 장로를 비롯한 많은 “뿌리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후 서문교회를 여러 차례 답사한 이덕주 교수는 김대전 장로를 다시 만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서문교회의 역사는 분명한 사실을 말합니다. 사랑과 헌신은 공동체를 세우지만, 분열은 그 유산을 무너뜨립니다. 연합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 그리고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할 때 공동체는 다시 하나가 됩니다.“겸손함과 온유함으로 깍듯이 대하십시오.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십시오.”(엡 4:2, 새번역)

전도서 9:2절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본절은 의인과 악인, 선인과 죄인, 깨끗한 자와 부정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드리지 않는 자, 맹세하는 자와 맹세를 피하는 자를 나열합니다. 이 구분은 율법과 지혜가 강조하는 바이나, 이 차이들은 죽음 앞에서 무너집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이라는 동일한 운명을 향해 걸어갑니다. 윤리적 차이도, 종교적 차이도, 제의적 차이도 죽음 앞에서는 힘을 잃습니다. 그러나 허무가 그 결론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인간을 철저히 낮추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마지막 날 모두 부활할 때 생명은 사망을 삼키고 승리할 것입니다(고전15:54-56). 그러나, 이 땅에서는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받을 수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있습니다(눅16장). 생전에 부자는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죽은 뒤에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당하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 안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간 것입니다. 나사로의 ‘의’가 언급되지 않았으나, 부자의 허물은 분명합니다. 문 앞에서 고통당하는 나사로를 무시하였습니다. 가인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민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빌2:12).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2:28).

전도서 9:3절
“모두가 다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잘못된 일 가운데 하나다. 더욱이, 사람들은 마음에 사악과 광증을 품고 살다가 결국에는 죽고 만다.”(새번역)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은 죽음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합니다. 의인과 악인, 지혜자와 우매자 모두에게 임합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죽음 자체보다,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을 안타까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에 사악과 광증을 품고 살다가 결국에는 죽는다”고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악’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성을, ‘광기’는 하나님 없이도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뜻합니다. 사람은 죽음을 알면서도 욕망을 쫓고, 하나님보다 자신의 계획을 신뢰합니다. 전도자가 말하는 인간의 광증입니다. ‘결국에는 죽고 만다’라는 말로 돌연 끝나는 본절처럼 죽음은 갑자기 찾아옵니다. 인간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계획과 자랑은 죽음 앞에서 무너집니다. 누가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이 사실을 날카롭게 드러냅니다(눅12:16-21). 그 부자는 더 큰 창고를 짓고 오래도록 풍요를 누리려고 계획하나, 하나님은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겠다”고 결정하십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계산에는 하나님도, 죽음도 없습니다. 그의 죽음은 돌발적으로 찾아오지만, 어리석게도 부자는 이 현실을 무시합니다. 따라서 본절은 죽음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죽음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서 오늘을 지혜롭게 살라는 권면입니다. 죽음을 잊어버리는 삶은 헛된 욕망으로 끝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넘어 영원한 소망으로 이어집니다(롬6:23).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욥바
사도행전 11:13절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많은 욥바 사람들은 죽은 다비다를 살린 베드로의 표적을 보고 주께 돌아왔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욥바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전에는 헬라가 지배를 하여 프톨레미 1세 소테르(주전 367-283)는 욥바에 수비병을 주둔시켰습니다. 이후 헬라에 맞선 유다의 마카비 가문은 욥바를 공격하였고, 약 20년 뒤 시몬 마카비가 욥바를 정복합니다(주전 142년). 시몬 마카비는 셀레우코스 왕조에서 독립하여 하스모니안 왕조(주전 142~63년)를 창립하였으며, 항구 욥바는 하스모니안 왕조의 경제, 군사 기반을 크게 강화시킵니다. 80년이 지나 하스모니안 왕조가 폼페이우스에게 복속되자(주전 63년), 욥바는 다시 이방인(로마)의 지배에 들어갑니다. 한편, 헤롯 대왕이 욥바의 로마화를 시도하자, 유대인들은 강력히 저항하였습니다. 이에 헤롯은 욥바 북쪽 40km 지점에 새로운 항구도시 가이사랴를 건설하게 됩니다(주전 30년경). 욥바는 유대인의 작은 항구로 남아 있다가 1세기 이후 기독교 도시로 성장하였습니다. 한때 수많은 나라가 차지하려 했던 욥바는 복음이 이방 세계로 나아가는 관문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항구를 차지하여 번영하려고 싸웠지만, 하나님은 아무런 다툼 없이 그 항구를 통해 화평의 복음을 전 세계로 보내셨습니다. 세상적인 영토와 번영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2:44).

하나님의 도우심
로마서 12:15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모든 사람이 문제를 갖고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우울증, 무기력 등에 빠집니다. 우울증이란 과거 혹은 먼 미래에 너무 사로잡혀 일상 생활 자체가 힘든 경우입니다. 가족들이 “식사했니?” 하면서, 지속적인 관심을 표현해야 합니다. 물론, 따뜻한 마음을 갖고 해야 하지요. 우울해 보이면, “내게 말해라…대화를 나누면 된다”고 하면서, 혼자되지 않게 해 주어야 합니다. 예일대 의과대학교 교수인 나종호 박사의 레지던트 동기는 극단적 선택을 하여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 교수는 바로 그 전 주에 함께 당직을 선 적이 있습니다. 외롭게 밤을 새운 그 친구에게 ‘잘 지내고 있냐?’하고 문자로 물었더니, 그는 ‘바쁘진 않은데 왜인지 모르게 혼자인 것 같다’고 답했습니다. 나 교수는 친구의 그 회신에 ‘그때 (내가) 조금 더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했더라면…’하고 후회한 뒤, “내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한 명만 있어도 그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나교수의 이런 조언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역시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위로나 따뜻한 말, 즉 사랑으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무거운 바위는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하고 말한다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군대 귀신이 거라사 광인을 붙잡았듯이, 죄의 힘 또는 마귀의 유혹의 힘이 우리를 사로잡으려고 하는 경우입니다. 이땐 지체 없이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막9:29). 그러면, 주님은 강한 자 마귀를 결박하고 참 자유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매일묵상(2026/7/27-31)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서문교회(6)
로마서 12: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서문교회의 종탑 옆에 또 하나 기념물이 있습니다. 1943년 4월에 ‘교회 창립 50주년’을 맞아 세운 기념비입니다. 비석은 화강암의 4각 기둥 형태로 꼭대기에 십자가를 깍아 세웠습니다. 당대 ‘전주 명필’ 설송 최규상의 예서체입니다. 표기법이 특이합니다. 비명 전문이 한자입니다. 일제 말기라 한글을 쓰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간단하게 ‘1893年’이라고 하면 될 것을 ‘명치 26년 계사년 주후1893년’과 같이 복잡하게 표기되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은 미국과 전쟁 중이라 ‘서기’ 연호를 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명치’ ‘대정’ ‘소화’ 같은 일본 연호를 대놓고 쓰기도 뭣해서 생각해 낸 것이 ‘을미(1895)’ ‘을사(1905)’ ‘무진(1928)’과 같은 간지(60갑자) 연호였습니다. 서기 연호를 사용 시에는 일본 연호를 함께 병기하여 감시와 탄압을 완화하려 했습니다. 비석 우측면에 건립연도를 ‘主後一九四三年’과 ‘昭和 十八年’나란히 새겨진 것도 그 때문이나 해방 후 ‘昭和’란 연호를 시멘트로 발라 읽을 수 없었습니다. 비석의 글씨에는 시대의 억압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비석을 세운 교회의 마음에는 하나님 앞에서 흔들리지 않으려는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의 믿음이 떠오릅니다. 포로로 잡혀가 바벨론의 언어와 교육을 받고, 이름은 바뀌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그 청년들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연호와 정권은 바뀌어도 그리스도는 변하지 않으며, 그분을 향한 교회의 사랑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전도서 8:17절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본절은 8장의 최종 결론입니다. 전도자는 오랜 탐구 끝에 지혜의 한계를 선언하는데, 이른바 “회의적 결론” 입니다(롱맨). 아무리 깊이 연구해도, 아무리 밤낮으로 고민해도,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지혜로 그 전모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지혜자조차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는 전도서 전체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3:11; 7:25–29; 9:12; 11:5). 전도자는 자연, 역사,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알 수 없었습니다. ‘계시의 부재’ 때문입니다(라우하). 그러나, ‘죽은 자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의 계시를 가진 신약은 분명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첫째, 악인들이 존경받고 장수하며 아무런 벌도 받지 않은채 죽는 경우(10,11), 전도자는 다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다.’란 권고를 할 뿐입니다. 신약에 따르면 그것은 악인에 대한 저주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악인은 마지막 날 부활하여 영원한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둘째, 악인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의 경우(14), 전도자는 ‘헛되다’고 토로하며 작은 일상을 즐기라고 권면합니다. 신약은 고난 속에서 의인이 하늘에 상을 쌓고 있음을 말합니다. 마지막 날, 의인은 부활하여 의로우신 재판장에게서 반드시 상을 받습니다. 전도자는 계시의 부재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파악하지 못했지만, 신약의 성도는 계시의 빛 아래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됩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전도서 9: 1절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본절은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의인과 지혜자의 삶조차 모두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음을 밝힙니다. 그들이 어떤 길을 걷게 될지는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의인이라 해서 사랑만 받고, 악인이라 해서 미움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사랑과 미움, 형통과 고난이 섞인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현실입니다. 전도자는 이 혼합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합니다. 의인도 고난을 겪고, 악인도 형통을 누립니다. 삶의 경험은 기대와 다르게 흘러갑니다. 지혜로운 자조차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함은 물론, 미래의 “사랑과 미움의 비율”조차 예측불가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 부족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이 가진 본질적 한계입니다. 지혜는 이런 문제점을 인정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하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인간은 경험을 기준으로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주권으로 세상을 이끄십니다. 의인의 고난이 실패를 의미하지 않고, 악인의 형통이 승리를 의미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리고, 감옥에 갇히는 등, 그의 삶은 파란만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높이사 만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십니다. 요셉의 삶은 하나님의 주권적 작품입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으로 인도하심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승리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욥바
여호수아 19:46절
“메얄곤과 락곤과 욥바 맞은편 경계까지라”

욥바 주민들은 철병거가 있었기에, 욥바를 배정받은 단 지파는 밀려나 북쪽의 라이스 땅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이 시기 욥바에서는 블레셋의 토기와 흔적이 발견되어, 이곳이 가나안 사람들이 아닌, 에게 혹은 갑돌 출신 블레셋의 도시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안드로메다라는 욥바의 공주 이야기도 이 지역의 비(非)가나안적 문화 배경을 반영합니다. 블레셋의 신전은 두 기둥이 지붕을 받치는 큰 규모였고, 바닥에서는 사자 해골이 발견되어 ‘사자 신전’이라 불립니다. 한때 욥바는 솔로몬이 베니게의 백향목을 들여온 항구로 알려졌으나, 최근 발굴에 따르면 실제 항구는 북쪽 5km 떨어진 텔 카실레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히스기야 시대에도 욥바는 아스글론 영지였고, 산헤립이 가나안 정복 시에 함락되었습니다(주전 701년). 이후 앗수르가 멸망하자 욥바는 바빌론의 손에 넘어갔고, 알렉산더가 가나안을 점령했을 때는 시돈·두로와 함께 헬라 도시가 되었습니다(주전 332년). 가나안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약속된 유업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완전히 정복한 적이 없었고, 바벨론, 헬라, 로마와 같은 강대국도 이긴 적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당신의 백성에 대한 믿음의 신실함을 시험코자 함입니다. 둘째, 세상은 아무리 완벽해 보여도 영원한 기업이 아닙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약할 때 신자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세가지는 오늘날도 같습니다. 따라서, 좋은 환경과 직장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신실하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

다니엘 1:8절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바벨론에서 포로 다니엘(17살)은 친구 3명과 함께 뽑혀 바벨론의 학문을 배우게 됩니다. 대단한 영예였지만, 왕의 진미는 먼저 우상 말둑에게 진상된 후 배정되기 때문에 다니엘은 먹지 않고자 결심합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가 행한 것은 도덕적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지키려는 결단입니다. 하나님은 지혜와 총명을 더하셨고, 그는 제국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영국 국회의원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는 작은 체구와 약한 시력, 정치적 약세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날을 늘 기억하면서, 두 가지 사명을 붙들었습니다; “노예무역을 막고, 관습을 개혁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노예제도는 단순한 사회문제가 아니라 영국이 회개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죄악이었습니다. 그의 폐지법안은 20년 동안 기득권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1807년 노예무역이, 1833년 노예제도 자체가 폐지됩니다. 윌버포스는 사흘 뒤 세상을 떠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의로운 삶은 착함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열매 맺으려면, 반대와 질시 등 고난은 당연합니다. 이 때문에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습니다. 오늘 우리도 같은 부르심을 받았음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이다. 만약 우리가 그분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을 받고 있다면, 진실로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이다”(롬8:17,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