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6/4/13-17)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여호수아 4:7절
“주님의 언약궤 앞에서 요단 강 물이 끊기었다는 것과, 언약궤가 요단 강을 지날 때에 요단 강 물이 끊기었으므로 그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토록 기념물이 된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해 주십시오.”

기전 여학교는 선교사의 기념비는 있지만, 항일투쟁과 관련된 ‘기전 결사대’ 기념비는 없습니다. 1915년 기전 학생 임영신, 오자현, 송귀내 등이 숭의 출신 박현숙 선생의 지도로 ‘구국결사대’를 조직해서 매일 구국 기도회를 갖고 ‘천황 사진에 먹칠하기’와 ‘쓰개치마 벗기 운동’을 벌였고, 3·1운동 때 임영신, 김공순, 김신희, 최애경 등 ‘14인 결사대’가 만세 시위를 주도 하였습니다. 광주학생사건 때도 문유덕, 전순덕, 신애덕, ‘삼총사’와 오원애 김순길, 이준례, 진태순 등 ‘결사대’가 만세시위를 이끌었습니다. 따라서, 기전 여학교는 이를 기념하는 무엇인가를 세워야 했습니다. 예전 경기고등학교의 교정에는 4.19 혁명 당시 희생당한 학생들의 기념 부조가 있어 항상 그때의 사건을 회상케 하였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초석입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불의에 항거하고 잘못된 제도의 개혁 노력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희생이 따르나, 치루어진 그 희생의 의미는 꼭 남겨야 합니다. 신앙유산도 같습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고, 반드시 하나님의 모든 가르침과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위해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 희생의 결과가 신앙유산이며, 비로소 후세에게 물려줄 수 있습니다. 신앙유산 없는 신앙은 겨우 자기만 구원받는 정도의 신앙입니다. 기복신앙의 한계이죠!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1:29).  

전도서 7:16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본절은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왜 그렇게까지 완전해지려 하는가?” 이는 우리 삶의 목적을 터치하는 말씀입니다.극단은 인간을 무너뜨리므로, 그 교훈의 핵심은 균형과 겸손입니다. 지나치게 의인(특히 종교적 의인)이 되려는 예는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의식적 율법을 지키려는 열심이 지나쳐 사람을 정죄하는 자리에 섰고, 그들의 의로움의 추구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무거운 갑옷이었습니다. 지나치게 지혜자가 되려는 사람의 예는 솔로몬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누렸지만, 그 지혜를 통제하지 못해 수많은 아내와 우상을 받아들이며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떠났습니다. 의로움도 지혜도 모두 좋은 것이나, 극단에 이르면 인간은 무너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상은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존재입니다. 세상은 이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도 많지만, 우리의 능력을 넘는 것은 더 많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도우심은 절대적입니다. 겸손히 그런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인간의 모습, 그것이 원래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이 목적을 모르고 지나친 ‘의’- 특히 종교적 ‘의’ – 를 추구한다면, ‘의’가 아니라 오히려 판단만 만들어 비판의 죄를 짓게 하며, 지혜의 지나친 추구는 자신을 과신하는 함정에 빠집니다. 전자는 하나님보다 율법을 더 사랑하고, 후자는 자신을 우상의 자리에 놓습니다. 마땅히 피해야 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6:8).

전도서 7:17절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17절은 16절과 구조적으로 평행을 이루며, 네 가지 성품—의로움, 지혜, 악함, 어리석음—을 두 축으로 대비시킵니다. 원문에는 세 가지(의로움, 지혜, 악함)에 대해서는 “지나치게”라는 수식을 붙이나 우매에 대해서는 없는데, 이는 전도자에게 어리석음은 절대 용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5절은 “의인이 망하고 악인이 장수하는” 모순된 현실의 증언입니다. 보응의 원리가 항상 작동하는 것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16절은 “지나치게 의로워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말라”고 경고했고, 이어 17절은 “지나치게 악하여 일찍 죽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모두 극단이 인간을 파멸로 이끔을 강조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전도자가 “지나친 악함”을 경고하면서도, 마치 “적당한 악함”의 여지를 남겨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9:2)는 말씀과 충돌하는 듯 보이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본절은 절대적 의가 아니라, 인생의 현실을 관찰하며 그 한계 속에서 “지혜롭게 살아남는 법”을 말합니다. 악인이 항상 장수하거나 형통하는 것은 아닐 뿐더러, 그 악함도 처세의 수준을 넘어 지나치면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는 지름길입니다. 그 파멸의 원인이 하나님의 심판인지, 악함의 결과인지는 명시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어 일찍 죽은 사람의 대표는 나발입니다. 나발은 부자였지만, 교만하고 분별력이 없어 다윗의 손에 죽을 뻔하게 된 사실을 뒤늦게 알자 충격을 받고 몸이 돌처럼 굳어져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악함과 어리석음의 길을 떠나, 겸손과 지혜의 길을 걷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잠언1: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스르엘 골짜기
열왕기상 21:1절
“그 일이 있은 후였습니다. 나봇이라는 사람이 이스르엘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밭은 아합의 궁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새번역)

이스르엘 골짜기는 아합이 탐냈던 나봇의 포도원이 있던 곳입니다. 아합은 포도원을 얻지 못하자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도 거부했고, 이를 본 이세벨은 거짓 증인을 세워 나봇을 돌로 쳐 죽여 빼앗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어 이세벨의 시신을 이스르엘의 개들이 먹게 될 것이라 선언하셨고, 15년이 흘러 예후의 반란으로 성취됩니다(열하9:30-37). 이 비극의 무대인 이스르엘 골짜기는, 번역이 골짜기이지 넓은 평야요 고대부터 이스라엘의 대표적 곡창지대입니다. 또한, “이스르엘”이란 이름은 “신이 밭을 갈다”는 뜻인데, 이름조차 이 땅의 비옥함을 반영합니다. 지질학적으로 약 200만 년 전 지중해와 요단 계곡 사이에서 형성된 충적 평야이며, 북쪽의 갈릴리, 남쪽의 사마리아 산지, 동쪽의 요단 계곡, 서쪽의 갈멜산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므깃도·벧산·이스르엘 등 주요 도시가 여기에 위치해 있으며, 초기 청동기(주전 4500–3300년) 유물이 발견되어 고고학적으로도 중요합니다. 특히 므깃도에서는 솔로몬 시대의 성문과 병거 도시 유적이 발굴되어 이 지역의 전략적·경제적 중요성을 입증합니다. 나봇의 포도원 사건에서 보듯이, 성경은 이 풍요로운 땅에서 인간의 탐욕이 일으킨 범죄와 전쟁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신 땅이라도, 그 선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순간 저주의 장소가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 가운데서 주신 것에 만족하는 법인 ‘자족’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4:11)

세상 창조의 목적과 사랑
갈라디아서 5:5절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전투기의 1세대는 제트기, 2세대는 초음속 제트기(미그21, F-5), 3세대는 레이다와 공대공 미사일(팬텀, 미그23, 25), 4세대는 첨단 항전장비(-F16, 15), 5세대는 스텔스(F-22, 35)로 특징지울 수 있습니다. 전투기 세대 구분 이유는 기술의 진보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3세대는 4세대를 당할 수 없습니다 1982년 베카계곡의 전투에서 F-15,16의 4세대와 미그23,25 3세대가 공중전을 하여 85:1로 승패가 4세대 승리로 판가름 났습니다. 그러나, 4세대도 5세대에는 아예 전투자체가 안됩니다. F-22와 F-15의 모의 공중전에서 144:0으로 F-15가 패배하였습니다. 스텔스인 5세대를 레이다로 탐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술이 전투기를 갈라놓듯이,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이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갈라놓습니다. 그 믿음은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서 아는 지성을 갖추고, 그것의 심장은 사랑이며, 그것의 에너지는 소망의 약속입니다. 세상 창조의 목적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선의 열매를 맺는데 있습니다. 좋은 예가 가정입니다. 가정에서는 가장 연약한 자가 가장 귀한 돌봄을 받는데, 사랑이외에는 해석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창조된 세상은 바로 이 목적을 이루도록 디자인되었습니다. 다른 목적- 명예, 재물, 욕망, 출세 – 이 우선시 되면 이구동성으로 그것은 잘못되었다고 규정합니다. 사랑의 첫 번째는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를 도외시 한 삶이 우상숭배이며, 이런 의미에서 무신론자들은 모두 우상숭배자들입니다. 띠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합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14)

매일묵상(2026/4/6-10)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요한일서 3:18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기전여학교에 오르는 언덕 길 옆에 1956년에 세운 <선교사 인톤 목사 · 인사례 여사 공적 기념비>가 있습니다. 윌리엄 린튼(인톤)은 1912년 내한해서 군산 영명학교와 전주 신흥학교 교장을 지냈고, 해방 후에는 신흥과 기전 재건 사업을 주도했으며 대전 한남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지낸 분입니다. 린튼 부인(인사례)은 광주 개척 선교사 벨의 딸로 태어나 1922년 린튼과 결혼해서 해방 후 기전여학교 교장을 역임했습니다. 송기철 장로의 회고입니다. “인톤 목사님은 아주 엄격하고 원리 원칙을 잘 따졌고 일본 사람을 아주 싫어 했어요. 일본 관리가 호구 조사를 나왔는대, ‘이 집 식구가 몇이오?’ 하니깐 손가락을 꼽아 보더니, ‘한 여섯 될라나?’ 하셨대요. 당시 자녀들은 미국에 유학 중이라 내외분만 살고 계셨는디 사정을 알고 있던 일본 사람이 ‘당신네 두 식구 뿐이잖소?’ 하니깐, ‘사람은 둘이지만 우리 집에 개가 한 마리, 쥐가 두 마리, 고양이가 한 마리 있는데 그들도 밥을 같이 먹고 있으니 우리 식구 아니요?’ 했다고 해요. 반면에 인사례 부인은 자상하고 정이 많았어요. 밤 새워 색실로 뜨개질을 해서 수건 같은 것을 만들어 시골 가난한 부인들에게 나누어주며 격려했지요.” 인톤 부부는 40년 간 전라지역 선교의 핵심 인물로서, 섬김이란 말이 아니라 행동이며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보여주는 삶입니다. 그의 셋째 아들 휴 린튼, 손자 스티브 린튼과 손자 존 린튼 모두 한국 선교를 위해 헌신한 분들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

전도서 7:14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본문은 인생의 밝음과 어두움, 좋은 날과 나쁜 날 모두를 하나님이 만드셨기에, 인간은 미래를 통제 못하고 다만 겸손히 수용하라는 교훈입니다(롱맨).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인생의 두 날을 섞어 놓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의지케 하시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지혜자도 내일을 모르고, 경건한 자도 고난을 피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한계입니다. 고생스러울 때는, “왜 이런 날이 왔는가”를 묻지 말고, “이 날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시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지만, 형제들의 질투를 받아 노예로 팔리고, 감옥에 갇힙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하게 하시자, 총리가 된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가정은 물론 만 백성의 생명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것입니다. 형제들이 두려워 하여 요셉에게 엎드려 용서를 구할 때에도 요셉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50:20)라고 말하며 간곡히 위로하였습니다. 요셉은 좋고 나쁜 모든 날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음을 알았으니, 미래가 보이지 않은 날에도 하나님은 모두의 선을 위해 길을 만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도 이렇습니다(롬8:28). 따라서, 기쁨의 날은 감사로 채우고, 고난의 날은 성찰과 신뢰로 채우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고 계십니다. 오늘이 어떤 날이든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사드리기 바랍니다.“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니라.”(잠언16:9).

전도서 7:15절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이라는 표현은 지혜롭고 부유했던 전도자의 삶조차 결국 덧없음을 고백하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사랑 없는 삶이 도달하는 종착점이며, 자기 유익만을 추구하는 타락한 세상이 겪는 영적 저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실천하는 사랑의 수고는 전혀 다릅니다. 그 삶은 보람과 소망이 넘칩니다. 이는 욥이나 요셉처럼 삶을 회고할 때 선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깨닫게 되고 그분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전단에서 언급한 “그 모든 일”은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 즉 그가 직접 경험한 삶의 모든 현실을 가리킵니다. 그 안에는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형통하며 장수하는, 우리가 기대하는 질서와는 전혀 다른 부조리한 현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도자는 이를 억지로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도 시험을 피할 수 없고, 심판받아야 할 악인이 오히려 번성하는 이유를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나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불확실하고 불가해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에 전도자는 왜곡된 세상에 당황해 하지 말며 하나님을 믿고 신실하게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에스더서의 증언입니다. 모르드개는 잠시 동안은 악한 자가 득세하나 이윽고 의로운 자를 높이고 악한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하였고, 그를 높이시자 동족 유대인들을 보호하며 지혜롭게 통치합니다. “악인은 백 번이나 죄를 짓고도 장수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알기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섬기는 사람들이 잘 될 것이다.”(전8:12,쉬운성경).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벧산/ 벧 스안
마태복음 24:2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본문은 성전 건물을 찬탄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로마 도시 스키토볼리(벧산)의운명도 같습니다. 도시 기둥들은 로마식 홈이 파여 있고 고린도·이오니아의 화려한 양식이 새겨져 있습니다. 도로마다 건설을 후원한 인물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남북을 가르는 실바누스 도로는 56m 길이에 7m 높이의 기둥이 입구를 지킵니다. 주변에는 디오니소스 신전, 바실리카 광장, 샘터, 목욕탕 등이 늘어서 있습니다. 도로는 검은 현무암으로 포장되었고 공공건물은 흰 석회석과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도시의 부유함을 보여줍니다. 특히 70×30m 규모의 바실리카 시장과 110m 지름의 극장은 7000명을 수용할 만큼 거대했습니다. 도시는 주후 363년 지진으로 파괴되었으나 409년 팔레스티나 세쿤다의 수도가 되며 다시 번영합니다. 로마가 기독교화되자 제우스 신전은 교회로 대체되고, 도로를 따라 교회와 회당이 함께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749년 강진으로 완전히 파괴돼 사라집니다. 어거스틴은 『신국론』에서 이 땅의 도성은 욕망과 권력 위에 세워지기 때문에 반드시 흔들리고 무너진다고 말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도성은 눈에 보이는 건축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백성의 삶 속에서 세워집니다. 스키토볼리의 흥망성쇠는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남깁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도성은 무너지는 돌과 기둥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삶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지혜의 자녀누가복음 7:35절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본문은 지혜는 말이 아니라 열매로 판명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은 침례 요한이 떡도 포도주도 먹고 마시지 아니하자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은 먹고 마시자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분의 사역이 맺은 회개의 열매들이 이분들의 삶과 일의 참됨을 증언합니다. 오늘날도 같습니다. 신앙은 말이나 주장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삶의 열매로 드러나며, 그 열매는 주님 뜻을 행하는 자녀, 제자 등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포사이드 선교사의 삶입니다. 그는 위급한 오웬 선교사를 치료하고자 광주 제중원으로 가던 중 길에서 죽어가는 한 나병환자를 발견하고, 손수 안아 자신의 말에 태워 갔습니다. 도착했을 때 오웬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포사이드의 헌신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그 나환자도 얼마 후 사망합니다. 그러나 조선판 선한 사마리아인의 그 모습은 세 사람의 인생을 바꿉니다. (1)후배 의사인 윌슨은 40년 동안 나환자들을 맡아 치료하면서 애양원을 설립하였고, (2) 청년 최흥종은 자신의 봉선동 토지 1000평을 나환자를 위해 기증하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된 후 나환자의 대부가 됩니다. (3) 오웬의 미망인 휘팅은 나환자와 함께 늦게 도착하여 남편을 치료하지 못한 포사이드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염을 두려워 하지 않고 성심껏 불쌍한 나환자를 치료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아, ‘나환자와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제목으로 미국 남장로본부에 선교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로써 포사이드의 행실은 세상에 알려집니다(1910).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매일묵상(2026/3/27-4/1)


종려주일과 월요일: 2026년 부활절은 4/5일입니다.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구약의 유월절과의 관계 때문에 춘분(3/20-양력)이 지나고 첫 보름달 후 첫 일요일을 부활하신 날로 정했습니다. 3/20일 후  첫 만월은 4/2일이며 그 후 첫 일요일은 4/5일입니다. 부활절 날짜가 결정되면 그 전 주가 고난주간입니다(3/29-4/5). 유월절 엿새 전 토요일(3/28),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잔치 중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주님의 장례를 예비한 사건이었습니다(요12:1-8). 이튿날 일요일(3/29, 종려주일), 주님은 감람산 동쪽 중턱에 위치한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가파른 언덕을 넘어가셨고, 벳바게에 이르자 오후였습니다.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향하시자(마21:1-11/ 슥9:9성취), 길에서 많은 사람들이 따랐는데(호산나 찬양), 약 두 달 전 죽은 나사로를 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요12:17-19). 군중들은 환호하였지만 주님은 당신을 거부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아시고 우셨습니다(눅19:41-44). 성전을 둘러보신 후 저녁이 되자 베다니로 가셨습니다(막11:11). 월요일(3/30) 아침 성전으로 가시다가 시장하여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가셨으나, 열매를 얻지 못하자 주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열매 맺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의 상징이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꾼들을 몰아내시는 등 정결케 하신 뒤, 날이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가셨습니다(막11:12-1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9:9).

화요일: 아침에 성전으로 가는 중, 어제 저주하신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본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묻자,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0-24)하시고, 형제를 용서해야 응답 받음을 교훈하십니다. 성전에 들어가시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왔습니다: “무슨 권위로 가르치는가?” 그러자 주님은 상속자를 죽이는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로 대답하십니다(막11:27-12:12). 바리새인들은 헤롯 당과 함께 와서 세금문제로 시험하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는 지혜의 말씀을 듣자 침묵합니다. 이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왔습니다. 사두개인들은 형제가 죽으면 다른 형제가 그 여자를 취할 수 있는 계대혼을 규정한 모세율법을 따라, 한 여자를 차례대로 취하고 죽은 7명의 형제의 예를 갖고 부활의 문제점을 제기하였습니다. 주님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른다고 책망하신 뒤, 부활 시에는 결혼이 없는 하늘의 천사들과 같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음을 가르치십니다(막12:13-27).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이나, 악인의 부활은 심판을 뜻합니다. 따라서 의인의 부활인 생명의 부활만이 의미가 있습니다(요5:28,2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1-52).

화요일: 성전에 계실 때 한 서기관이 가장 큰 계명을 물었습니다. 주님은 즉시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언급하십니다(막12:28-34). 그 지혜에 놀란 서기관들, 율법사들,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더 이상 질문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님이 되묻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을 마가복음은 증언합니다(막12:35-37). 주님은 성경을 잘못 가르치고, 또 이를 행하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을 질타하시고(마23장; 막12:38-40),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는 과부를 칭찬하십니다(막12:41-44). 성전에서 나가실 때 웅장한 성전을 감탄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철저한 파괴를 선언하십니다. 그날 저녁 제자들은 성전 파괴 시기와 주님이 다시오실 때의 징조를 물었습니다. 주님은 상세하게 답변을 주십니다(마24장, 막13장, 눅21장). 주님은 한 세대 내에 성전이 파괴될 것이고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쌓일 때 신속하게 성에서 빠져나올 것을 분부하시나, 주님의 재림일은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성전은 약 40년 뒤인 AD 70년 로마의 티토 장군에게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베다니로 가신 것으로 보이며 수요일에는 아무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5-46).

목요일: 유월절 하루 전 주님은 큰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유월절을 드셨습니다(눅22:7-13). 식사 중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제자들(가룟유다포함)의 발을 씻기시고 자리에 앉으사 다시 옷을 입으셨습니다. 영광의 주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인간이 되시고 죽고 부활하여 다시 영광의 자리에 앉는 모습의 축약입니다. 가룟 유다는 밀고하러 떠났으며, 베드로는 순교를 장담하자 주님의 경고가 이어지는 등 분위기는 침울하였습니다(요13장). 주님은 곧 영광(십자가와 부활)을 받으실 것과 성령님을 보낸다는 약속 후(요14:16,17,26;15:26;16:7-15), 모든 제자들(후에 믿을 신자들 포함)을 위한 대제사장의 기도를 드립니다(요17장). 찬미와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유다가 인솔하는 무리를 기다리면서, 1시간 동안 피땀의 기도와 함께 통곡합니다. 잡히시자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이어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안나스의 사위)에게 심문과 곤욕을 당합니다. 이 대제사장들은 수일 전 성전에서 ‘무슨 권세로 가르치냐?’고 주님께 직접 힐문한 자들입니다. “네가 찬송받으실 자의 아들이냐”는 가야바의 물음에, 주님은 ‘그렇다’고 하신 뒤 당신이 선지자 다니엘이 예언한(단7:13) 그 ‘인자 人子 Son of Man’임을 밝힙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선고를 내렸고(마26:62-66), 주님은 다시 능욕을 당하시는데(마26:67-68), 베드로는 3번 부인하였습니다(눅22:54-62). 이 같이 우리를 위한 주님의 고난은 700년 전 이사야 예언의 성취입니다(사53: 7-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이사야 53: 8).

금요일: 아침에 주님은 총독 빌라도와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를 왔다 갔다 하셨습니다(눅23:6-12). 결국 빌라도가 심문합니다: “네가 왕이냐?” 주님은 당신이 왕이나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당신은 진리를 증언하가 위해 세상에 왔음을 밝힙니다(요18:36-37). 진리란 복음을 뜻하며, 복음온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하에 있으나, 주 예수께서 보냄을 받아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하셨으며, 이를 믿는 자는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죄가 없었지만, 군중들의 위세에 눌린 총독은 십자가의 형을 선고합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7마디를 하셨습니다 (오전9시-오후3시). (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2) 한 명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4) “내가 목마르다”(요19:28) (5) 오후 3시경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  (6) 이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23:46) (7)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요19:30). 오후 3시는 유대인들이 1,500년 동안 유월절 양을 잡아온 바로 그 시간입니다(출12:6). 부자이자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주님의 시체를 받아, 자기 묘실에 둠으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됩니다(마27:59-60;사53:9). 사흘 뒤 부활 시까지 무덤에 계셨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주님의 죽으심이 대속의 죽음인 것을 잘 설명합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

매일묵상(2026/3/23-27)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시편 102:26절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1910년, 기전여학교는 현재의 예수병원 본관 자리에 아름다운 2층 홍벽돌 교사를 신축했습니다. 당시 이 건물은 호남 지역 여성 교육의 요람이었으며, 상징적인 근대 건축물이었습니다. 1960년대 들어 예수병원은 현대식 종합병원으로 도약하기 위해 대규모 부지와 새로운 건물이 절실했습니다. 이때 홍벽돌 교사 자리에 예수병원이 들어서고, 학교는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습니다. 그 아래쪽으로 린튼, 보이어 같은 선교사들이 살던 ‘양관’ 들도 모두 헐렸고, 신흥학교의 해방 전 건물로는 강당으로 지은 ‘스미스기념관’(1936년) 만 남아 있습니다. 강당 옆 ‘리차드슨관’(1928년)은 1982년 화재로 전소되었습니다. 해방 후 건축한 ‘인톤기념관’ 옆으로 <희현당사적비>(1707년)와 <희현당중수사적비>(1784년)가 나란히 서 있는데, 1905년 신흥학교를 지을 때 발굴하여 다시 세운 것입니다. 답사하던 이덕주 교수는 일제시대 신흥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항일투쟁을 기리는 비석 하나쯤 있을 법한데 하며 아쉬워 합니다만, 있다한들 천 년 후에는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 기전학교와 예수병원은 시대의 요구와 인간의 필요에 따라 건물과 장소는 변해왔지만, “학생을 길러내고 병든 자를 치유한다”는 본래의 목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과 시대는 변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의 부르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라질 건물이나 기념비에 의미를 두지 말고,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을 붙잡아야 합니다.“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전도서 7:12절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

본절은 지혜와 재물의 유익과 차이를 보여주나, 지혜 역시 하나님의 섭리를 넘지 못하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교훈으로 이끕니다. 먼저, 전도자는 지혜와 재물을 모두 ‘그늘’(보호)로 비유합니다. 보호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둘은 모두 삶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재물은 현실적 필요를 채우지만, 지혜는 그 지혜자의 삶을 살피고 안전한 길로 인도하여 생명을 보호하므로 우월합니다. 여기서 ‘생명’은 단순한 이 세상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할 때 갖게 되는 참된 의미와 인생의 방향을 포함하고, 신약에서는 영생을 의미합니다(요20:31). 그러므로 참된 지혜을 얻으려면 복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좋은 예가 부자이자 관원이었던 청년이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왔으나,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어 하늘에 보화를 쌓은 뒤, 와서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에 근심하며 갔습니다. 그는 재물은 가지고 세상의 삶은 보호받았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생명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마19:16-22).  그러나 이 지혜조차도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지혜도 인생의 ‘구부러진 것’을 곧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1:15; 7:13). 누가 선천적 맹인을 고치거나 마음의 악을 제거하거나 죽은 자를 살리겠습니까?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꾸지 못합니다. 지혜와 재물의 그늘은 모두 제한적이고 인생은 여전히 ‘수수께끼’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히 그분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언9:10).

전도서 7:13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앞선 두 절에서 전도자는 재물은 그 소유자의 현실적 필요를 채워 주지만 살리지는 못하고, 지혜는 생명을 보호하나 죽지 않게 하거나 삶의 의미를 주지는 못합니다. 즉, 지혜조차 인생의 만능열쇠는 아닙니다. 그 대표적 한계로 본절은 하나님의 섭리를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굽은 면’을 인생에 장치하셨습니다. 건강·재물·자녀 모든 것을 가졌는데, 가정의 불화로 누리지 못하는 경우 등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해결되는 문제이나, 인간의 존재감과 탐욕 때문에 서로 싸우는 것이지요! 그 이외에도 죄, 질병, 죽음, 악한 마음, 예기치 못한 사건들 등은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사람이 곧게 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삶의 불가해성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강조로서, 인간으로 하나님을 찾게 하는 결정적 동인입니다. 한편, 복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치료약이요,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에 대한 답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셔서 구부러진 것들- 맹인, 나병, 죽은 자들을 살리심, 죄인의 회개 등 -을 치유하셨는데, 구부러진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굽은 면이 발생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은 ‘새옹지마’를 새기며 체념하나,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이 하시는 일을 경험할 수 있다는 소망 가운데 기뻐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선천성 맹인)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벧산/ 벧 스안
사무엘상31:12절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

벧산은 원래 므낫세 지파의 몫이나 원주민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고, 이어 블레셋이 차지합니다. 블레셋은 길보아 전투에서 승리한 뒤 사울의 시체를 성벽에 매달아 이스라엘을 조롱하였습니다. 이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가서 시신을 수습하여 40년 전 자신들을 구원한 사울에게 보답하였음을 본절이 보여줍니다. 다윗은 벧산을 정복하고 솔로몬은 갈릴리 행정 중심지로 삼았지만(BC970), 이후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와 헬라 제국을 거쳐 이름도 스키토볼리로 바뀌고 로마의 지배 아래 놓입니다(BC63). 벧산(스키토볼리)은 데가볼리 열 도시 가운데 가장 크고 번영한 로마 도시로 성장하여, 로마식 도로인 카르도를 중심으로 극장, 목욕장, 신전 등 화려한 건축물들이 세워졌습니다. 특히 도시 입구의 웅장한 석문은 스키토볼리 주변 지역과 구별되는 로마 도시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질문이 떠 오릅니다. 왜 므낫세 지파는 분배된 벧산을 정복하지 못하고, 또 다윗이 정복한 그 도시는 끝내 이방인에게 넘어갔을까요? 또, 벧산이 꽃피운 문화는 왜 이방 문화였을까요? 첫째 원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방인들과 이방문화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인지 여부를 확인하고 계셨습니다. 이른바 ‘남은 자’ 사상입니다. 그들은 벧산이라는 세상의 기업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기업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의 믿음이자 소망입니다. “(모세는)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6).


하나님의 그 은혜
로마서 5:21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본절은 구원의 역사 중에 드러난 하나님의 목적을 요약합니다. 예수께서 오시기 이전에는 죄의 권세가 사망 안에서 통치하였으나, 지금은 더 큰 권세가 왔으니 ‘그 은혜’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그 은혜’ 말입니다. ‘그 은혜’는 지금 ‘의’를 통해 통치합니다. ‘의’란 16~19절에서 말하는 ‘의의 그 선물’인데, ‘의롭다 하심을 받음’(16)과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통치’(17)를 지칭합니다. 전자는 칭의로, 후자는 성화로 표현되며 구원 사건의 두 측면입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의 통치로 죄가 정복되었습니다. 신자들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정죄받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 은혜’의 통치는 단순히 ‘의롭다”라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내린 선언을 넘어 실제의 삶에서 ‘의’를 만들어 내는데, 이들이 택함받은 사람이요 중생한 신자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그 은혜’에 감사하고 자신을 위해 죽으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힘들고 손해되더라도, 단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합니다. 이것이 성령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따라서, ‘의의 그 선물’은 반드시 변화된 삶을 포함하며 그 마지막은 영생입니다. 이 영생의 완전한 실현은 부활 시이지만, 현재의 악한 세대에 이미 침투하였고, 영생을 가진 신자들은 마음의 악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능력 때문이죠!(롬8:1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매일묵상(2026/3/16-20)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누가복음 12:33절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많이 변했지요. 그 많던 선교부 땅도 다 넘어가고 집도 대부분 헐렸고. 이젠 흔적만 남았어요”(송기철). 이 말처럼, 화산동 선교부의 모습은 크게 변했습니다. 일제가 사립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이를 거부하고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를 폐교했고(1939. 9), 예수병원에 가미다나 설치를 강요하자 역시 문을 닫고 전주를 떠남으로, 예수에 대한 믿음의 정절을 지켰습니다. 일제는 선교부의 땅과 건물 일체를 몰수했으나, 해방 후 선교부는 돌아와 땅을 되찾았습니다. 비록 6.25 전쟁 중에는 공산군과 국군이 번갈아 점령하면서 시설이 많이 파괴되었지만, 휴전 후, 신흥과 기전이 안정을 되찾았고 예수병원과 성경학원도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1970년대가 들어서자, 남장로회는 “한국 교회는 이제 충분히 자립할 역량이 있다”고 판단하여, 화산동의 방대한 부지를 학교, 병원, 노회 등을 통해 한국 교회와 사회에 이양하고 1980년대까지는 모두 철수하여 100년의 선교를 마무리 하였습니다. 또한 선교부가 세운 병원과 학교의 설립 이념(의료 선교, 기독교 교육)을 한국 교회가 계승토록 하였습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남장로회는 병들고 가난한 한국 민족을 구제하고 섬김으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지혜를 보여주었고, 화산동의 모든 것을 한국 교회에 내어줌으로써 신앙 유산 전수의 참된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창18:19a,새번역).

전도서 7:10절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

본문은 힘든 현실 앞에서 “그때가 좋았지”라고 말하는 태도의 어리석음을 지적합니다. ‘지혜가 아니다’라는 표현은 어리석음을 에두르는 말로 3천 년 전에도 과거의 감상에 젖어 살았던 사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가나안을 향해 전진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은 잊고, 고기와 생선, 파와 마늘, 부추, 오이, 수박을 먹던 기억만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양식인 만나를 매일 아침 기적으로 내려주셨지만, 그 은혜에는 감사하지 않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주셨으나 그들의 영혼을 파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탐욕을 부린 무리들을 큰 재앙으로 심판하사 죽이셨으니, 그곳의 이름이 ‘기브롯 핫다아와(탐욕의 무덤들)로 불리운 이유입니다(민 11장). 전도자는 말합니다. 모든 일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함께 존재한다고(전 7:14). 그럼에도 현재는 어둡고 과거는 모두 좋았다고 여기는 관점은 하나님의 섭리를 보지 못한 채 그분을 불신하고 불평하는 태도입니다. 더구나 우리의 기억은 선택적입니다. “옛날이 더 좋았다”는 말은 대개 정확한 평가가 아니라 감정의 반응일 뿐입니다. 지혜는 감정이 아니라 진실을 보게 하는 능력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과거를 기준으로 현재를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이 오늘 주신 현실 속에서 길을 찾습니다. 이때 예수의 제자들은 믿음의 훈련을 통해 주님의 뜻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입니다(마 5:13).“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5:5).

전도서 7:11절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이 되도다”

전도자는 지혜를 물질적 재산에 비유하며, 그것이 인생을 지탱하는 든든한 기반임을 말합니다. 당시 유산은 단순한 상속재산이 아니라 가문을 지키고 삶을 안정시키는 생존의 토대였습니다. 전도자는 이 이미지를 통해, 지혜가 삶을 살아가는 데 얼마나 실제적이며 우리를 보호하는 힘이 되는지를 강조합니다. 본문이 위치한 문맥입니다. 먼저, 7–10절은 지혜 없는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분노에 쉽게 흔들리고, 과거를 미화하며 현재를 부정하는 태도는 지혜가 아닙니다. 그리고 7:11–12절은 지혜의 필요성을 설명합니다. 지혜는 유산처럼 안정적이며, 그늘처럼 보호를 주고, 무엇보다 생명을 지킵니다. 지혜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현실을 해석하여 견디게 하고, 해결책도 주기 때문입니다. 7:13–14절은 지혜의 실제적 적용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사람이 곧게 할 수 없으므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지혜는 인생의 밝은 날과 어두운 날 모두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보게 하는 눈입니다. 본절은 지혜가 물질적 유산과 같이 아름답다고 하나, 실제에서는 유산보다 더 귀한 자산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하는 보호막입니다(12절). 무엇보다 지혜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하나님께 재물이나 장수가 아니라 재판하는 지혜인 ‘듣는 마음’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왕궁으로 돌아온 솔로몬은 친자 분별 재판을 지혜롭게 판결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갖고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야 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벧산/ 벧 스안
마가복음5:20절
“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벧산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여러 번 무대에 등장한 도시지만, 헬라 시대에 이르러 그 이름은 사라지고 스키토볼리가 되었고 예수님 당시에도 그렇게 불렸습니다. 스키토볼리란 이란을 근원지로 하여 용병 생활을 했던 스키티아인들의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벧산에 스키티아 출신 용병들이 정착하면서 도시의 성격은 점점 헬라 문화 중심지로 변했고, 데가볼리의 핵심 도시로 자리 잡았습니다.  극장, 신전, 체육장 등 화려한 헬라 문명이 이곳을 채웠고, 스키토볼리는 세계사 속에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함 뒤에는 유대 신앙과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헬라 문화의 압박 속에서 유대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저항했고, 마카비 시대에는 이 도시가 반헬라 운동의 격전지가 되었습니다. 대제사장 요나단이 이곳에서 전사했고, 결국 유대인들은 도시를 불태우며 헬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스키토볼리의 역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세상은 언제나 화려한 문화와 매력적인 가치로 우리를 끌어당기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그 속에서도 정체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편리함과 풍요로움이 신앙을 대체하려 할 때,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유대인들이 헬라 문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려 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세상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진정한 승리는 세상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선택하는 데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빌립보서 4: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불천노불이과’(不遷怒 不貳過)란 ‘노를 옮기지 않고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공자가애왕에게 답하면서 안연을 회상한 말입니다. 안연은 공자를 배우기 좋아한 천재로서 그 명석함은 자공을 능가하였습니다. 그는 대나무 밥과 석회석이 많은 물을 먹으며 누추한 거리에서 살았습니다(단표누항). 그러나 벼슬도 마다하고 배워 실천하기를 좋아하였으니 안빈낙도(安貧樂道)의 모범입니다. 그가 실천한 공자의 사상은 ‘인’(仁, 어질다)입니다. 안연이 ‘어짐이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공자는 ‘극기복례’와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라’는 실천지침을 주었고, 그는 행함을 다짐하였습니다. 공자는 평범하게 생각했다가 그의 행함을 보고 놀랍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모범이 있고, 주님을 배운 바울의 삶이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권능을 행하였지만 풍부와 궁핍의 모든 상황에서도 자족하는 비밀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내게 능력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고 고백합니다. 풍부할 때는 교만하지 않도록, 궁핍하고 박해를 받을 때는 낙망하지 않도록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은혜를 경험한 것이죠! 이것이 안연과 결정적 차이입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이 만유의 통치자이심을 깨닫는 과정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경건과 사랑으로 이끌어 갈 때, 성령님은 각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 행하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공자의 형상이 아니라 주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니, 실로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

매일묵상(2026/3/9-13)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느헤미야 8: 8절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에서 돌아온 뒤, 에스라가 율법책을 낭독하는 장면입니다. 백성은 율법의 말씀을 듣고 모두 울었습니다. 말씀을 배우면 감동이 오고, 그 감동은 삶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복음이 이 땅에 들어왔을 때도 같았습니다. 전주의 남장로교 선교부는 성경 교육에 힘을 쏟았습니다. 서원고개 아래쪽에는 남녀 성경학원이 있었습니다. 1909년 무렵부터 사경회를 확대시켜 농한기 때 한달씩 모여 성경을 배우는 ‘달(月) 성경학교’로 시작해 정규성경학원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남자 성경학원은 전주 북부지방 선교를 담당했던 매커첸이 주로 맡아보았는데, 1921년에는 화산동 189번지 언덕에 2층 교사를 마련하고 ‘전북남성경학원’이라 하였습니다. 여자 성경학원도 1928년에 남자성경학원 아래쪽, 화산동 190번지에 2층 벽돌 교사를 마련하고 ‘한예정성경학교’라 하였습니다. ‘한예정’은 1909년 남편과 함께 내한해서 전주에서 활약하다가 1922년 11월, 안식년 휴가 중 미국에서 별세한 클라크 부인의 한국이름입니다. 한예정성경학교는 1961년 광주 이일여자성경학교와 합동하여 ‘한일여자신학교’(현, 한일신학대학교)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전주 양반과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서원고개’에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과 학교, 성경학원이 들어서면서 교육, 의료, 복음이라는 삼각 선교 구도가 정착됩니다. 이렇게 구한말 선교사들과 성경학교의 헌신의 결과 조선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말씀을 가까이하고 배워, 공동체와 세상을 밝히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119:105).

전도서 7:8절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 8절은 “끝이 시작보다 낫다”는 지혜의 원리를 통해,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특히 인내와 겸손—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일을 착수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결실을 맺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이는 성실하고 근면한 삶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단은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고 선언하고, 후단은 좋은 끝을 위해 중요한 태도는 ‘참는 마음’임을 밝힙니다. 어리석은 자는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자기 중심적 사고를 합니다. 그는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거나 만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생각대로 성급히 일을 추진하다가 그르치는데, 시간과 상황을 조절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참는 마음을 가진 겸손한 자는 계획을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며, 온유하고 지혜롭게 자신의 일을 단도리합니다. 본절은 유익한 결과를 얻으려면 조급함을 버리고 불리한 환경 중에도 인내하며 겸손할 것을 교훈하는데, 하나님의 섭리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본절의 교훈을 터득한 분은 모세입니다. 모세는 젊은 시절 자신의 손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려고 성급하게 애굽 사람을 죽이자마자 발각되어 광야로 피신합니다. 그는 40년 동안 이드로의 양을 치면서 하나님의 섭리와 인내를 배운 뒤,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여 내는 사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책무는 백성의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계명들이 간직되지 않은 어떤 사람도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3:23).

전도서 7:9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본절은 8절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8절의 “참는 마음”은 본절에서 “급한 마음”이라는 반대 개념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전단에서, “급한 마음”은 “노를 발하는” 태도로 이어지는데,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고 분개하기 때문입니다. 문맥 상 이것은 어리석은 자의 오만한 분노로서, 후단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우매자의 품에 머문다”는 표현은 분노가 잠시 스쳐 지나가는 감정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터 잡은 상태를 말합니다. 실상 분노는 단순한 기질의 문제를 떠나, 마음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 지표입니다. 후단은 어리석음의 특징은 분노가 마음속에 눌러앉은 자로서, 전단은 그것이 급히 표출되는 모습을 묘사하여, 수욕을 참고 후일을 도모하는 지혜자와 대조를 이룹니다. 사람의 됨됨이는 결국 마음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표출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눅6:45).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약 1:20)는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에 분노 대신 사랑과 지혜가 머물게 해야 합니다. 갈멜의 부자 나발이 도망자 신세였던 다윗을 모욕하자, 분노한 다윗은 나발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때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음식과 함께 다윗에게 나아가, 분노로 인해 명예를 더럽히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다윗은 번뜩 깨닫고 노를 거두어들입니다. 미련한 나발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며칠 뒤 생을 마감했으나, 다윗에게는 어떤 구설이나 흠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분노가 아닌 지혜와 인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거니와,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잠언14:29)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벧산/ 벧 스안
열왕기상 4:12절
“ 다아낙과 므깃도와 이스르엘 아래 사르단 가에 있는 벧스안 온 땅은 아힐룻의 아들 바아나가 맡았으니 벧스안에서부터 아벨므홀라에 이르고 욕느암 바깥까지 미쳤으며”

블레셋이 길보아산 전투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죽인 뒤, 그 시신을 벧산 성벽에 못 박아 전시한 사건(삼상 31:10–12)은 이 도시가 당시 블레셋의 북부 지배 거점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고고학적으로 벧산은 주전 10세기경 대규모 화재로 파괴된 흔적이 발견되는데, 많은 학자들은 이 시기를 다윗의 정복 활동과 연결합니다. 즉, 다윗은 사울 왕가를 모욕한 블레셋의 거점을 제거하여 이스라엘 왕권의 명예 회복과 북부 지역의 안정을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이후 벧산은 이스라엘의 행정 체계 안으로 편입됩니다. 솔로몬 시대 벧산에서는 행정 건물, 이스라엘식 토기, 관료적 활동의 흔적 등이 발견되어, 이 도시가 왕국의 북부 행정 중심지였음을 보여줍니다. 남북 왕국이 분열되면서 벧산은 북이스라엘의 도시가 되었으나, 여전히 갈릴리 지역의 중요한 행정·군사 요충지였다가 앗시리아에 의해 파괴됩니다(BC732). 이렇게 볼 때 벧산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사울 왕조의 몰락, 다윗 왕조의 부상, 이스라엘 왕국의 행정적 확장, 북왕국의 멸망 이라는 성경 역사의 전환점마다 등장하여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울의 죽음과 벧산에서의 치욕은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왕권을 유지하려 했던 결과이나, 반대로 다윗은 오랜 시간 기다림과 인내 속에서 하나님의 때와 방식으로 왕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벧산은 다시 이스라엘의 도시로 회복된 점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편127:1).

생각하고 실천하는 신앙(3)
빌립보서 4:9절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8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사고기준 6가지- 참됨, 고상함, 옳바름, 정결함, 사랑스러움, 칭찬받을만함- 를 제시한 후, 이 덕목들의 실천을 언급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삶을 본 적이 있습니다.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이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 이들은 많이 맞고 옥에 갇혔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찬미를 드리자 주님은 감동하사 옥터를 진동시켜 모든 쇠사슬을 풀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죄수 중 아무도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적을 목격한 간수는 복음을 받아들였고, 빌립보에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행16장). 또한, 바울은 직접 자신의 삶을 상기시키며(빌3:1-16) 교회가 자신을 효과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보기로 삼도록 권면합니다. 따라서,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서 본받아야 할 것들을 본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방이라는 주제가 늘 동행합니다. 이는 평강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삶에만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서신의 서두(1:2)에서처럼 자주 수신자들이 평강하기를 기도하는데, 본절은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말씀에 따라 삶을 정돈한 사람들 중에 있다.” 여기에는 올바르고 질서 잡힌 생각과 선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포함됩니다. 따라서 평강에 대한 두 가지 지침은 서로 보완적입니다. ①불안의 해결책은 ‘기도하라’(4:6.7). ②무질서한 삶의 해결책은 정신적, 실제적 훈련을 통해 바로잡아라’(4:8.9).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매일묵상(2026/2/23-27)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시편 37:27절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선교사들은 ‘교육·의료·복음’이란 삼각 선교의 틀을 잡은 뒤, 1905년 옛 회현당 자리에 8칸 기와집을 지어 남자학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 ‘신학문당’이라 불리던 이 학교가 ‘신흥학교’의 출발입니다. 신흥학교는 1911년 양옥 교사와 한옥 기숙사를 마련했고, 1928년에는 지하 1층·지상 2층, 475평 규모의 웅장한 본관을 세웠습니다. 건축비 8만 원을 기부한 미국 교인 리차드슨의 이름을 따 ‘리차드슨관’이라 명명했습니다. 1936년에는 리차드슨 부인이 오빠 E. 스미스를 기념해 보낸 9천 달러로 165평 규모의 강당을 지어 ‘스미스기념관’이라 하였습니다. 여학교는 ‘서원너머’ 화산동 300번지에 세워졌습니다. 1904년 전킨 부인이 기틀을 잡았고, 1909년 벽돌 교사를 마련하면서 1908년 별세한 전킨 목사를 기념해 ‘전목사기념여자중학교’, 줄여서 ‘기전여학교’라 불렀습니다. 그 후 2층 벽돌 건물을 증축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100년이 넘은 선교의 역사 속에는 한 가지 공통된 주제가 흐릅니다. 바로 ‘선한 일’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선교사들은 일제와 양반 권세에 눌린 서민들에게 단순히 복음만 전하지 않았습니다. 조선 백성의 필요를 먼저 채우고 복음으로 이끄는 전략입니다. 복음과 선한 일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복음을 받아 새 사람이 되면 자연히 그리스도를 본받아 선한 일에 힘쓸 것이며, 이때 교육은 그 도구입니다. 선교사들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이름은 한민족의 마음 속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전도서 7:4절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본절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2)는 메시지를 또 반복하는데, 죽음의 현실을 직시하면 참된 지혜를 얻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우울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유한을 인정하여 오늘을 더 진지한 삶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즐거움만을 좇으며 현실을 외면합니다. 한편, 본절은 전도서 전체에서 반복되는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라’는 권면과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전도자는 때로는 즐거움을 최고의 선이라 말하면서도, 또 다른 곳에서는 그것을 어리석음으로 규정합니다. 이 모순처럼 보이는 긴장은 전도자가 전통적 지혜에 대해 깊은 회의와 갈등을 겪고 있음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즐거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죽음을 잊은 채 쾌락을 절대화하는 태도가 문제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죽음의 현실을 기억하면서도 하나님이 주신 일상의 기쁨을 감사함으로 누릴 것을 권면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삶의 기쁨을 누리되, 그것이 궁극이 아님을 기억합니다. 실로, 유한함을 아는 사람만이 참된 감사와 절제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죽음보다 마지막 심판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부활하여 몸으로 행한 것들을 따라 심판을 받게 됩니다. 좋은 예가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입니다(눅16장). 죽음이 오기까지 두 사람의 운명은 변하지 않았지만, 죽고 나서 두 사람의 운명은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뒤바뀌어집니다. 진실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전도서 7:5절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전도자는 7장에서 ‘지혜로운 삶의 태도’를 교훈합니다. 이를 위해 전도자는 ‘—보다 낫다’(better than) 라는 구문을 사용하여 참된 삶의 방향을 확연히 보여줍니다. 지혜자란 인생의 의미와 닥쳐올 운명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이고, 미련한 자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따라 즐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한 명의 지혜자가 주는 책망은 바보들의 합창보다 낫습니다. 책망은 듣기 불편하지만, 우리를 진짜 현실—특히 인간의 한계, 죄, 죽음, 책임—로 데려갑니다. 우리는 이런 불편하지만 진실한 말을 가치 있게 여겨야 하는데, 이는 진실과 직면하면 지혜가 오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아무리 즐겁고 달콤해도, 현실을 잊게 만드는 도피적 즐거움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 길은 패망의 길입니다. 다니엘서 5장은 벨사살 왕의 행태를 말합니다. 그는 바벨론의 마지막 왕입니다. 페르샤 군대가 바벨론 성을 둘러싸고 있었으나,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하여 온 금 그릇을 술 대접으로 삼고 잔치를 벌리며 우상들을 찬양하였습니다. 그 때 갑자기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 석회벽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너의 시대는 끝났고, 너는 기준에 미달하며, 너의 나라는 곧 무너질 것이다.”)이란 글자를 쓰는 장면을 보자 두려움에 사로잡힌 벨사살 왕은 다니엘을 호출하였습니다. 다니엘은 먼저 왕의 경박하고 불경건한 태도를 책망한 뒤, 나라가 페르샤에게 넘어갔음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날 밤 벨사살 왕은 페르샤 군대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BC 538).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잠언25:1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벧산/ 벧 스안
여호수아 17:16절
“요셉 자손이 이르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 하니”


벧산은 투트모세 3세(BC1479-1425)가 가나안을 정복한 이후 중요한 행정 중심지여서 이집트 제18–20왕조 문서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건물들은 정부 관료의 집, 곡식 저장고, 신전 등으로 대부분 이집트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신전은 가나안 신을 섬겼지만 건축 요소와 제의 용기, 조각상 등은 이집트적 특징을 지녔고, 이는 도시의 종교·문화적 혼합성을 보여줍니다. 관료들의 저택은 대형 구조에 중앙 홀과 여러 방을 갖춘 형태였으며, 건축 자재와 장신구 대부분이 이집트산이었습니다. 이는 벧산의 행정 관료들이 실제로 이집트인이었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세티 1세의 이름이 새겨진 조각상은 이집트가 가나안 도시들의 정복 상황을 기록하고 있어, 벧산이 이집트 지배의 중요한 거점임을 알려줍니다. 이집트의 지배력이 약화되는 시기에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있었지만, 므낫세 지파는 철병거가 있는 벧산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이윽고 가나안 문화와 우상숭배는 므낫세 지파를 타락시킵니다. 그 예가 사사 기드온의 부친입니다. 그는 바알의 제사장이었고, 그의 집에는 바알 신전이 있었습니다. 사사기 1장은 므낫세 지파에 벌어진 현상이 이스라엘 공통이었음을 증언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순종을 하되, 온전해야만 합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12:33).   

생각하고 행하는 신앙
빌립보서 4:8절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바울은 빌립보서 4장 8–9절에서 교회 공동체와 성도 개인이 어떤 마음가짐과 삶의 방향을 가져야 하는지를 제시합니다. 그는 단순히 “좋은 생각을 하라”는 수준을 넘어, 우리의 사고와 삶의 구조를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질서로 재편할 것을 권면합니다. 여기서 ‘(이것들을) 생각하라’의 원어 ‘로기제스세’는 ‘계산, 이성’을 뜻하는 ‘로고스’의 파생어로, 삶의 진로를 그 기준에 따라 계산하고 결정하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9절의 ‘행하라’는 동사는, 지식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바울의 일관된 신앙 이해를 보여 줍니다. 흥미로운 점은, 바울이 제시한 덕목들이 당시 세속 철학자들도 말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들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순히 윤리적 미덕을 나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과 동기 안에서만 이러한 덕목이 참되게 열매 맺을 수 있음을 전제합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적 삶의 핵심은 ‘무엇을 하느냐’보다 ‘누가 우리 안에서 그것을 이루시는가’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요청합니다: 첫째,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치들로 채우고 그것을 기준으로 삶을 정렬하라. 둘째, 그렇게 정돈된 마음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훈련하라. 다음 주에는 바울이 제시한 각각의 덕목을 살펴보며, 그 가치들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성령님의 열매로 나타날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16:8).

매일묵상(2026/2/19-2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벧산/ 벧 스안
여호수아 17:11절
“잇사갈과 아셀에도 므낫세의 소유가 있으니 곧 벧 스안과 그 마을들과 이블르암과 그 마을들과 돌의 주민과 그 마을들이요 또 엔돌 주민과 그 마을들과 다아낙 주민과 그 마을들과 므깃도 주민과 그 마을들 세 언덕 지역이라”


벧산(=평온의 집)은  갈릴리 호수 남쪽 약 27km 지점, 이스르엘 골짜기(평야)와 요단 골짜기가 만나는 곳에 자리해 물이 풍부하고 숲과 비옥한 농경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기원전 5000년경부터 사람이 거주해 왔으며,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과 해안에서 메소포타미아로 이어지는 길목이므로 교통·군사·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벧산은 예루살렘과 떨어져 있었고 갈릴리 지역에 속해 성서 시대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고고학적 관심은 일찍부터 집중되었습니. 텔 엘-후슨(‘요새 언덕’)이라 불린 고대 유적지에서 1920~30년대 발굴을 통해 기원전 3000년경의 마을과 기원전 2000년경의 공동묘지가 발견되었고, 언덕에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까지 20개 층의 거주 흔적도 밝혀졌습니다. 이후 히브리대학교의 발굴로 로마·비잔틴 시대 도시의 모습까지 드러났습니다. 구약성경은 벧산이 므낫세 지파에게 분배되었음을 말하는 본절에서 처음 언급하지만, 므낫세 지파는 이들을 쫓아내지 못합니다(수17:12) 이는 벧산은 교통의 중심지요 비옥한 자연 환경 덕분에 고대부터 강력한 가나안 도시국가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분배받았지만, 실제 점령은 쉽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벧산의 존재는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의 순종 사이의 긴장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히4:1).

빌립보서 4:7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에 대한 해답은 “하나님의 그 평강” 입니다. 바울은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첫째,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평강입니다. 환경이 좋아져서 혹은 필요가 채워져서 오는 평안이 아닙니다. 우리가 처한 외적 조건과 무관하게 주어지는 초월적 평강으로, 염려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침략하듯이 들어오는 하나님의 군사력입니다. 둘째, 그것은 “모든 지각에 뛰어납니다.” ‘지각’(知覺)은 ‘알아 깨닫는 능력’을 말하는데 인간의 인식 능력 전체를 의미하는 헬라어 ‘누스’의 번역입니다. 영어 성경은 통상 ‘understanding’(이해력)으로 번역합니다. ‘뛰어난’은 ‘히페레쿠사’(탁월한)의 번역입니다. 바울은 지각(이해력)과 평강을 대조하면서 ‘평강은 지각(이해력)보다 뛰어나다’고 말합니다. 그는 분명 지식이 불충분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이해와 깨달음 그리고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때로는 우리의 머리로 설명할 수 없거나 설명 자체가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하나님이 침묵하시는지, 왜 고난이 계속되는지 지식으로는 설명이 안 되거나, 설명해도 마음은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평강은 언제나 적절하며 마음의 필요를 채워줍니다. 즉 평강은 그 상황에 ‘항상 맞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셋째, 평강은 마음을 지킵니다. “지키다”는 군사를 보내 지킨다는 ‘프루레오’의 번역이며, 평강이란 하나님의 군사는 근심과 불안을 막아내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지키심을 받아 평안을 누립니다. 주기도문이 간결하게 표현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6:11).

매일묵상(2026/2/9-13)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야고보서 3:17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들 간에 화평이 이룩되었다”는 것이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복음은 생명력이 있어 말에 머물지 않고 선한 행동으로 자라나는데, 전주의 교육과 의료 사역은 화평의 복음이 그 땅에서 어떻게 구체적 현실이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선교사들은 1900년에 정부 요청으로 화산리(현, 중화산동) 서원고개 일대로 이전합니다. 이곳은 일찍이 향교(1441년), 화산서원(1624년) 회현당(1700년) 등이 설립되어 양반 자제를 가르쳤고, 황학대, 다가정, 청양정, 군자정 같은 정각들에서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습니다. 그러나 대원군과 동학혁명을 거치면서 서원과 누각들은 파괴되었고 양반 문화는 쇠퇴하고 있던 중 선교사들은 새로운 기독교 문화를 갖고 들어 왔습니다. 1897년 화산리 언덕 땅 3천여 평을 구입했으니 지금 예수병원 건너편 주차장과 선교사 묘지 동산 일대입니다. 1900년에 약 1만 평의 땅을 양도 받았으니, 지금 예수병원 간호전문대학과 신일아파트 자리입니다. 1905년 경 2만 5천 평을 구입했으니 지금 예수병원과 신흥 및 기전여학교 자리이며, 1910-11년에도 산 8만여 평을 마련했으니 구 예수병원 자리입니다. 그 후에도 계속 땅을 넓혀 1924년 당시 화산동 선교부는 전주천을 끼고 병풍처럼 둘러싼 14만여 평을 확보하고, 교육·의료·전도 사업을 확대시켜 나갔습니다. 다음 주에 보겠지만, 이 같은 선교 사업에 소요되는 막대한 재정은 주로 미국의 성도들이 기부하였습니다. 한국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이미 120년 전에 보여준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6:18).   

전도서 7:2절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1절은 일시적인 부귀영화보다 지속적인 명예의 소중함을 말하고, 2-4절은 일시적 즐거움보다, 마지막 운명인 죽음을 기억함으로 지혜를 얻으라고 교훈합니다. 본절은 ‘초상집에 간다’는 표현을 통해 죽음의 현실을 마음에 둘 때 비로소 지혜가 생김을 강조합니다. 잔칫집의 즐거움은 잠시지만, 초상집은 인간의 끝을 보게 하여 마음을 깨우칩니다. 죽음을 성찰하는 사람은 삶을 바르게 세우지만, 죽음을 잊은 사람은 쉽게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갈멜의 부자 나발이 그 예입니다. 그는 마치 잔칫집에 사는 사람처럼 먹고 마시며 자신의 성공과 부요함에 취해 있었습니다. 죽음을 마음에 두지 않았기에 자신을 도와준 다윗의 선행을 멸시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중재가 아니었다면 그는 다윗의 칼에 죽었을 것입니다. 이튿날 술에 깨어난 나발은 충격을 받아 열흘 만에 죽습니다. 나발의 죽음은 전도서가 말하는 교훈 그대입니다. 죽음을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은 지혜를 잃고, 지혜를 잃은 삶은 결국 파멸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죽음 자체보다 그 너머의 마지막 심판을 기억하며 살아갑니다. 죽음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미 해결되었습니다. 다만, 부활의 생명이 사망을 삼키는 그 날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 날 우리는 우리 일생을 주님 앞에서 결산해야 합니다(마25:14-30). 죽음을 성찰하는 사람은 삶이 겸손해지고, 마지막 심판을 마음에 둔 사람은 오늘의 삶을 주님의 뜻에 맞추어 살게 됩니다. 그 의는 마지막 날 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전도서 7:3절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본절은 “슬픔이 웃음보다 사람을 더 성숙하게 만든다”고 교훈합니다. ‘슬픔’은 ‘카아쓰’의 번역으로, 임신하지 못한 한나의 고통스러운 심경(삼상1:6), 다투는 배우자에 대한 근심(잠21:19) 등에 사용되어 고통에 대한 비참한 심경을 표현합니다. 초상집에서 죽음을 목격하고 인생의 유한함에서 느끼는 숙연함과 겸손함이 배어 있습니다. ‘웃음’은 세상이 주는 일시적 기쁨입니다. 전도자는 인생을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 슬픔이, 세상적이고 허탄한 웃음보다 낫다고 선언합니다. 지혜 문학의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고난은 사람의 내면을 정화하고 지혜를 갖게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세 번째 산에서 살아 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슬픔은 지혜를 얻는 수단 이상입니다. 슬픔은 하나님의 축복의 문으로, 이를 통해 우리의 믿음은 새롭게 빚어집니다. 한나가 좋은 예입니다. 아이가 없는 한나는 온 가족과 함께 실로의 성소로 매년제를 드리러 올라갔습니다. 대적 브닌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는 한나를 질투하여 심한 모욕의 말을 쏟아냈습니다. 남편 엘가나의 위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슬픔에 잠긴 한나는 모든 것이 가능한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서원합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신 뒤 사무엘을 낳게 하십니다. 한나는 5년 뒤 사무엘을 드려서 서원을 이행하였고, 하나님은 다섯 자녀를 더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은사를 주심으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고 한나의 가문은 크게 빛났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은 슬픔을 재료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거라사(3)
마가복음 5: 21절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건너편 거라사에 도착하여 군대 귀신들린 한 남자를 고치셨으나, 돼지 떼 2천 마리가 몰사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주민들은 예수님 일행이 떠날 것을 요청하였고 주님은 다시 갈릴리 지역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요르단의 제라쉬는 바로 그 ‘거라사’로 알려져 왔습니다. 제라쉬는 중동에서 가장 잘 보존된 로마 도시입니다. 1806년 제첸이 발굴을 시작하자 이미 주전 3200~1200년에 주거지가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주전 63년 로마의 정복 후에, 데가볼리 연합도시의 하나로 편입되었고, 주후 90년에는 로마의 아라비아 속주에 포함됩니다. 제라쉬는 ‘중동의 폼페이’라 불릴 만큼 보존 상태가 뛰어나며, 예수님 당시에는 상당히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는 방문하여 개선문을 세웠고, 아르테미스 신전도 이 즈음 건축되었습니다. 또한, 말경기장(1만 명)과 극장(3천석)을 갖추었으며, 인구는 2만~2만5000명 정도로 면적 80만㎡ 규모의 번영한 도시였습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거주하였으며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13개의 교회까지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침략 이후(AD 614) 쇠퇴했고, 주후 749년 지진으로 완전히 몰락했습니다. 지금은 유구한 역사와 현대적인 삶이 공존하는 도시로서, 관광 산업이 주된 경제 활동입니다. 도시의 형태와 경제 구조 및 통치하는 국가는 시대에 따라 바뀌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제라쉬의 역사는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치 않는 것을 붙드는 지혜를 갖게 합니다.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빌립보서 4:6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립보서 4:4-7절에서 바울은 3가지를 당부합니다. 첫째, 기뻐하고 기뻐하라(4), 둘째, 관용을 베풀어라(5), 셋째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아라(6). 그리고 염려의 해답은 하나님의 평강입니다(7). 본절은 염려를 다룹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마 6:25-34)에서 염려의 가장 흔한 원인들을 언급하셨습니다. 그것들은 신체를 의미하는 키(27), 옷(28), 음식과 음료(31), 그리고 미래(34)입니다. 복잡한 현대생활에서도 같음을 볼 때 해 아래 새것은 없습니다. 염려의 치료제는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입니다. 한나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 근심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본절은 기도를 묘사하는 세 단어를 말하는데, 실로 성도의 특권입니다: 기도, 간구, 구함. 기도’는 헬라어 ‘프로수케’의 번역이며, 가장 넓은 의미의 기도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다’는 뜻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간구’는 ‘데에시스’의 번역이며 특정한 필요 때문에 드리는 간절한 요청입니다- ‘하나님, 이것이 꼭 필요합니다!” 구함’은 ‘아이테마’의 번역으로, 구체적인 요청 목록입니다. 사도는 단순히 “기도하라”라고 하지 않고 ‘기도-간구-구함’이란 세 단어를 나란히 배치해 기도의 다양한 모습을 묘사하면서, 기도를 통해 염려가 치유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다만, 그 기도는 ‘감사의 태도’를 갖고 드려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문제가 일어날 수 없고, 하나님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또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받은 줄 믿고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

매일묵상(2026/2/2-6)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누가복음 13:19절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세례교인이 생기면서 전주 선교는 활기를 띠고 작은 시작들이 만들어집니다. 1897년 가을 레이놀즈 부인이 자기 집에서 여성들을 주일학교 형태로 가르쳤는데 이것이 기전여학교의 출발입니다. 이듬해인 1898년 12월 잉골드가 한옥 초가집에서 병원을 열었으니 이것이 예수병원의 출발입니다. 1900. 9월 레이놀즈가 사랑방에서 김창국을 가르쳤으니 이것이 신흥학교의 출발입니다. 이로써 완산 언덕 아래 은송리에는 교회와 병원, 학교로 이루어지는 삼각 선교 거점이 마련됩니다. 이후은송리 선교 근거지는 이씨 왕가의 성역화 정책 때문에 화산동 언덕 일대로 이전합니다. 비록 7년 만에 끝났으나 은송리 선교부는 전주와 전라도 선교의 요람입니다. 여기는 전주에서 첫 예배의 장소요, 첫 세례 교인을 배출하였고, 오늘의 전주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그리고 예수병원이 시작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선교사들보다 앞서 내려와 전도한 정해원의 활동은 전주 선교를 위해 그 의미가 적지 않습니다. 그의 작은 시작이 전주와 전라도 전체의 복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덕주 교수는 정해원의 집을 수소문 끝에 찾아 내자 기념관으로의 매입을 피력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고 결국 헐렸습니다(2004년). 오늘날도 미미한 출발로 보이지만 하나님께 드려진 헌신은 지역과 시대를 변화시킨 씨앗이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스가랴 선지자 시대에도 같았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백성들은 초라한 성전을 20년에 걸쳐 간신히 준공하였으나, 이 성전은 500년 간 이스라엘 예배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슥4:10a).

전도서 7:1절 – 구조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오늘은 새로운 단락인 7장 1–14절의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단락은 1절에서부터 잠언 형식의 교훈 12개가 나오고 13-14절이 결론을 맺습니다. 1–12절의 대부분은 “더 나음(better-than)” 형식의 잠언들입니다. 이는 6장 10–12절의 질문, 즉 “사람에게 무엇이 참으로 좋은가?”라는 물음에 대한 전도자의 간접적 답변입니다. 전도자가 보기에 절대적으로 좋은 것은 없지만, 상대적으로 더 나은 가치들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잠언들에는 죽음과 지혜·우매라는 두 주제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좋다’, ‘지혜’, ‘마음’, ‘우매자’ 같은 단어가 되풀이 되고 있어 문단의 통일성을 갖추었습니다. 결론부인 13–14절은 새로운 단락이 아니라 앞선 잠언들을 결론짓습니다. 특히 7장 14절은 미래의 불확실성 문제를 다시 언급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과 고난의 시기 모두를 받아들이도록 권고합니다. 이 단락은 봉투구조(inclusion)란 문학적 기교를 갖추어서, ‘좋다’와 ‘날’이라는 단어가 문단의 처음(1절)과 끝(14절)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 결과 1–12절의 금지적 성격의 잠언들 전체가 13–14절에 의해 하나의 교훈적 단락으로 완성됩니다(머피). 내일부터 1-14절 단락의 각 구절을 묵상할 예정입니다. 잠언과 전도서가 주는 삶의 지혜는 비록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햇빛을 보는 자들에게 상대적으로 유익합니다. 따라서, ‘지혜가 주는 더 나은 길’을 곰곰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전7:14,새번역).

전도서 7:1절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본절은 두 개의 잠언을 병치하여 외적 성공보다 ‘좋은 이름’을 귀히 여기며, 인간의 연약함과 삶의 한계를 정직하게 바라보게 합니다. 전단은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중요함을 강조하는데,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 자체이며, ‘좋은 기름’은 고대인의 사치품으로 물질적 부요를 상징합니다. 그 의미는, 물질적 풍요보다 의를 추구하며 명예롭게 살아가라는 교훈입니다. 좋은 평판은 물질적 부요보다 가치 있고 오래지속 되기에, 잠언 역시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22:1)을 권고합니다. 그러나, ‘의로움’ 없는 ‘좋은 이름’은 불가능하며, 하나님의 말씀 없는 ‘의로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같이 성경 말씀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해서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후단은 좀 충격적인데, 전도자의 독특한 통찰 때문입니다. 아이가 출생하면 기쁨과 기대감으로 설레지만, 그로 인해 인생무상이나 인간의 한계를 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출생한 날은 부조리하고 불확실한 삶을 시작하는 날이지만, 만약 ‘좋은 이름’을 갖고 있다면 죽는 날은 그 명예를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새기는 날입니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지 530년이 흘렀지만 그분의 충절이 기려지나, 그 당시의 부자는 기억됨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율곡과 이순신은 모두 같은 덕수 이씨로, 두 분은 먼 친족입니다. 그러나 덕수 이씨 후손들은 이순신의 정신을 물려받아 무관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어떻게 살고 죽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좋은 기름’이 아니라, ‘좋은 이름’은 최후의 심판과도 깊이 연결되었므로, 신자들은 본절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서 영원히 살리로다”(시37:29).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거라사(2)
마가복음 5: 13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 동쪽의 거라사인들 지역에 이르자 귀신 들린 한 사람을 만나 치유하신 사건입니다(막5:1-20; 눅8:26-39). 거라사의 위치로, 요르단 수도 암만 북쪽 48km에 위치한 제라쉬가 먼저 거론되지만, 갈릴리 호수로부터 60km 떨어져 있어, 2000마리 돼지 떼의 죽음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갈릴리 남동쪽 해안의 쿠르시 유적이 주목되었습니다. 그 유적은 비잔틴 수도원으로 호수와 연결된 도로, 모자이크로 장식된 교회, 지하 통로 등을 갖춘 대규모 복합 건물의 흔적입니다. 주후 749년 지진 이후 폐허가 되었지만, 이곳이 데가볼리 지역에 속했고, 호수 인근이라는 점에서 돼지 떼 사건의 실제 배경지로 더 설득력을 가집니다. 또한, 비잔틴 시대 수도원도 발굴되었는데, 이 사건을 기념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마태복음은 같은 사건이 가다라(마8:28)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가다라는 현재 갈릴리 호수 남동쪽 야르묵 골짜기에 위치한 하맛 가다라로 보여집니다. 이런 지명 차이는, 데가볼리 지역의 복잡한 지리 구조, 작은 마을 대신 큰 도시 이름을 대표 지명으로 쓰는 관행, 사본 전승 과정에서의 지명 혼동 가능성 등 때문입니다. 비록 성경의 지리적·역사적 연구는 이해를 돕지만, 복음서는 예수의 권세와 구원 사역에 대한 증언이 목적입니다. 따라서, 본 사건 기록의 목적인 예수님의 구원이 모든 경계를 넘어 온 세상으로 확장될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빌립보서 4:5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4절)고 명령한 뒤, 이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관용’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에이케스’는 온유함을 넘어, 자기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지 않고 상대를 품어주는 너그러움, 억울함을 감내할 수 있는 마음의 넓이, 사람을 대할 때의 부드러움과 포용성을 의미합니다. 이 관용은 교회와 세상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야 합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주님의 재림이나(시간), 혹은 주님의 임재(거리) 모두 가능합니다. 이같은 종말론적 소망이나 현실적 주님의 임재에 대한 믿음은 우리 삶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물론, 전절에 언급된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우리가 관용을 베푸는 내적 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는 기뻐할 수 없는 많은 상황이 존재하나, 현실에서는 주님의 도우심이 있고, 후에는 영원한 나라가 기다린다는 소망을 생각하면,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 주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의식은 다른 사람들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큰 동기가 됩니다. 이는 주님이 어떠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요일4:17). 따라서, ‘너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사도의 권면은 합당합니다. 약 15년 전 사도 바울은 마가로 인해 바나바와 다투고 각자의 길로 갔습니다. 이후 바나바는 생질인 마가를 포용하여 바울도 인정하는 유용한 복음의 그릇으로 키워냈습니다. ‘관용’은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한 특질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언 19:1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