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6/2/23-27)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시편 37:27절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선교사들은 ‘교육·의료·복음’이란 삼각 선교의 틀을 잡은 뒤, 1905년 옛 회현당 자리에 8칸 기와집을 지어 남자학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 ‘신학문당’이라 불리던 이 학교가 ‘신흥학교’의 출발입니다. 신흥학교는 1911년 양옥 교사와 한옥 기숙사를 마련했고, 1928년에는 지하 1층·지상 2층, 475평 규모의 웅장한 본관을 세웠습니다. 건축비 8만 원을 기부한 미국 교인 리차드슨의 이름을 따 ‘리차드슨관’이라 명명했습니다. 1936년에는 리차드슨 부인이 오빠 E. 스미스를 기념해 보낸 9천 달러로 165평 규모의 강당을 지어 ‘스미스기념관’이라 하였습니다. 여학교는 ‘서원너머’ 화산동 300번지에 세워졌습니다. 1904년 전킨 부인이 기틀을 잡았고, 1909년 벽돌 교사를 마련하면서 1908년 별세한 전킨 목사를 기념해 ‘전목사기념여자중학교’, 줄여서 ‘기전여학교’라 불렀습니다. 그 후 2층 벽돌 건물을 증축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100년이 넘은 선교의 역사 속에는 한 가지 공통된 주제가 흐릅니다. 바로 ‘선한 일’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선교사들은 일제와 양반 권세에 눌린 서민들에게 단순히 복음만 전하지 않았습니다. 조선 백성의 필요를 먼저 채우고 복음으로 이끄는 전략입니다. 복음과 선한 일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복음을 받아 새 사람이 되면 자연히 그리스도를 본받아 선한 일에 힘쓸 것이며, 이때 교육은 그 도구입니다. 선교사들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이름은 한민족의 마음 속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전도서 7:4절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본절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2)는 메시지를 또 반복하는데, 죽음의 현실을 직시하면 참된 지혜를 얻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우울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유한을 인정하여 오늘을 더 진지한 삶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즐거움만을 좇으며 현실을 외면합니다. 한편, 본절은 전도서 전체에서 반복되는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라’는 권면과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전도자는 때로는 즐거움을 최고의 선이라 말하면서도, 또 다른 곳에서는 그것을 어리석음으로 규정합니다. 이 모순처럼 보이는 긴장은 전도자가 전통적 지혜에 대해 깊은 회의와 갈등을 겪고 있음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즐거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죽음을 잊은 채 쾌락을 절대화하는 태도가 문제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죽음의 현실을 기억하면서도 하나님이 주신 일상의 기쁨을 감사함으로 누릴 것을 권면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삶의 기쁨을 누리되, 그것이 궁극이 아님을 기억합니다. 실로, 유한함을 아는 사람만이 참된 감사와 절제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죽음보다 마지막 심판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부활하여 몸으로 행한 것들을 따라 심판을 받게 됩니다. 좋은 예가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입니다(눅16장). 죽음이 오기까지 두 사람의 운명은 변하지 않았지만, 죽고 나서 두 사람의 운명은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뒤바뀌어집니다. 진실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전도서 7:5절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전도자는 7장에서 ‘지혜로운 삶의 태도’를 교훈합니다. 이를 위해 전도자는 ‘—보다 낫다’(better than) 라는 구문을 사용하여 참된 삶의 방향을 확연히 보여줍니다. 지혜자란 인생의 의미와 닥쳐올 운명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이고, 미련한 자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따라 즐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한 명의 지혜자가 주는 책망은 바보들의 합창보다 낫습니다. 책망은 듣기 불편하지만, 우리를 진짜 현실—특히 인간의 한계, 죄, 죽음, 책임—로 데려갑니다. 우리는 이런 불편하지만 진실한 말을 가치 있게 여겨야 하는데, 이는 진실과 직면하면 지혜가 오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아무리 즐겁고 달콤해도, 현실을 잊게 만드는 도피적 즐거움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 길은 패망의 길입니다. 다니엘서 5장은 벨사살 왕의 행태를 말합니다. 그는 바벨론의 마지막 왕입니다. 페르샤 군대가 바벨론 성을 둘러싸고 있었으나,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하여 온 금 그릇을 술 대접으로 삼고 잔치를 벌리며 우상들을 찬양하였습니다. 그 때 갑자기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 석회벽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너의 시대는 끝났고, 너는 기준에 미달하며, 너의 나라는 곧 무너질 것이다.”)이란 글자를 쓰는 장면을 보자 두려움에 사로잡힌 벨사살 왕은 다니엘을 호출하였습니다. 다니엘은 먼저 왕의 경박하고 불경건한 태도를 책망한 뒤, 나라가 페르샤에게 넘어갔음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날 밤 벨사살 왕은 페르샤 군대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BC 538).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잠언25:1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벧산/ 벧 스안
여호수아 17:16절
“요셉 자손이 이르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 하니”


벧산은 투트모세 3세(BC1479-1425)가 가나안을 정복한 이후 중요한 행정 중심지여서 이집트 제18–20왕조 문서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건물들은 정부 관료의 집, 곡식 저장고, 신전 등으로 대부분 이집트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신전은 가나안 신을 섬겼지만 건축 요소와 제의 용기, 조각상 등은 이집트적 특징을 지녔고, 이는 도시의 종교·문화적 혼합성을 보여줍니다. 관료들의 저택은 대형 구조에 중앙 홀과 여러 방을 갖춘 형태였으며, 건축 자재와 장신구 대부분이 이집트산이었습니다. 이는 벧산의 행정 관료들이 실제로 이집트인이었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세티 1세의 이름이 새겨진 조각상은 이집트가 가나안 도시들의 정복 상황을 기록하고 있어, 벧산이 이집트 지배의 중요한 거점임을 알려줍니다. 이집트의 지배력이 약화되는 시기에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있었지만, 므낫세 지파는 철병거가 있는 벧산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이윽고 가나안 문화와 우상숭배는 므낫세 지파를 타락시킵니다. 그 예가 사사 기드온의 부친입니다. 그는 바알의 제사장이었고, 그의 집에는 바알 신전이 있었습니다. 사사기 1장은 므낫세 지파에 벌어진 현상이 이스라엘 공통이었음을 증언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순종을 하되, 온전해야만 합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12:33).   

생각하고 행하는 신앙
빌립보서 4:8절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바울은 빌립보서 4장 8–9절에서 교회 공동체와 성도 개인이 어떤 마음가짐과 삶의 방향을 가져야 하는지를 제시합니다. 그는 단순히 “좋은 생각을 하라”는 수준을 넘어, 우리의 사고와 삶의 구조를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질서로 재편할 것을 권면합니다. 여기서 ‘(이것들을) 생각하라’의 원어 ‘로기제스세’는 ‘계산, 이성’을 뜻하는 ‘로고스’의 파생어로, 삶의 진로를 그 기준에 따라 계산하고 결정하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9절의 ‘행하라’는 동사는, 지식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바울의 일관된 신앙 이해를 보여 줍니다. 흥미로운 점은, 바울이 제시한 덕목들이 당시 세속 철학자들도 말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들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순히 윤리적 미덕을 나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과 동기 안에서만 이러한 덕목이 참되게 열매 맺을 수 있음을 전제합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적 삶의 핵심은 ‘무엇을 하느냐’보다 ‘누가 우리 안에서 그것을 이루시는가’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요청합니다: 첫째,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치들로 채우고 그것을 기준으로 삶을 정렬하라. 둘째, 그렇게 정돈된 마음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훈련하라. 다음 주에는 바울이 제시한 각각의 덕목을 살펴보며, 그 가치들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성령님의 열매로 나타날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16:8).

매일묵상(2026/2/19-2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벧산/ 벧 스안
여호수아 17:11절
“잇사갈과 아셀에도 므낫세의 소유가 있으니 곧 벧 스안과 그 마을들과 이블르암과 그 마을들과 돌의 주민과 그 마을들이요 또 엔돌 주민과 그 마을들과 다아낙 주민과 그 마을들과 므깃도 주민과 그 마을들 세 언덕 지역이라”


벧산(=평온의 집)은  갈릴리 호수 남쪽 약 27km 지점, 이스르엘 골짜기(평야)와 요단 골짜기가 만나는 곳에 자리해 물이 풍부하고 숲과 비옥한 농경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기원전 5000년경부터 사람이 거주해 왔으며,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과 해안에서 메소포타미아로 이어지는 길목이므로 교통·군사·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벧산은 예루살렘과 떨어져 있었고 갈릴리 지역에 속해 성서 시대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고고학적 관심은 일찍부터 집중되었습니. 텔 엘-후슨(‘요새 언덕’)이라 불린 고대 유적지에서 1920~30년대 발굴을 통해 기원전 3000년경의 마을과 기원전 2000년경의 공동묘지가 발견되었고, 언덕에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까지 20개 층의 거주 흔적도 밝혀졌습니다. 이후 히브리대학교의 발굴로 로마·비잔틴 시대 도시의 모습까지 드러났습니다. 구약성경은 벧산이 므낫세 지파에게 분배되었음을 말하는 본절에서 처음 언급하지만, 므낫세 지파는 이들을 쫓아내지 못합니다(수17:12) 이는 벧산은 교통의 중심지요 비옥한 자연 환경 덕분에 고대부터 강력한 가나안 도시국가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분배받았지만, 실제 점령은 쉽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벧산의 존재는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의 순종 사이의 긴장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히4:1).

빌립보서 4:7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에 대한 해답은 “하나님의 그 평강” 입니다. 바울은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첫째,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평강입니다. 환경이 좋아져서 혹은 필요가 채워져서 오는 평안이 아닙니다. 우리가 처한 외적 조건과 무관하게 주어지는 초월적 평강으로, 염려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침략하듯이 들어오는 하나님의 군사력입니다. 둘째, 그것은 “모든 지각에 뛰어납니다.” ‘지각’(知覺)은 ‘알아 깨닫는 능력’을 말하는데 인간의 인식 능력 전체를 의미하는 헬라어 ‘누스’의 번역입니다. 영어 성경은 통상 ‘understanding’(이해력)으로 번역합니다. ‘뛰어난’은 ‘히페레쿠사’(탁월한)의 번역입니다. 바울은 지각(이해력)과 평강을 대조하면서 ‘평강은 지각(이해력)보다 뛰어나다’고 말합니다. 그는 분명 지식이 불충분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이해와 깨달음 그리고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때로는 우리의 머리로 설명할 수 없거나 설명 자체가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하나님이 침묵하시는지, 왜 고난이 계속되는지 지식으로는 설명이 안 되거나, 설명해도 마음은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평강은 언제나 적절하며 마음의 필요를 채워줍니다. 즉 평강은 그 상황에 ‘항상 맞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셋째, 평강은 마음을 지킵니다. “지키다”는 군사를 보내 지킨다는 ‘프루레오’의 번역이며, 평강이란 하나님의 군사는 근심과 불안을 막아내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지키심을 받아 평안을 누립니다. 주기도문이 간결하게 표현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6:11).

매일묵상(2026/2/9-13)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야고보서 3:17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들 간에 화평이 이룩되었다”는 것이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복음은 생명력이 있어 말에 머물지 않고 선한 행동으로 자라나는데, 전주의 교육과 의료 사역은 화평의 복음이 그 땅에서 어떻게 구체적 현실이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선교사들은 1900년에 정부 요청으로 화산리(현, 중화산동) 서원고개 일대로 이전합니다. 이곳은 일찍이 향교(1441년), 화산서원(1624년) 회현당(1700년) 등이 설립되어 양반 자제를 가르쳤고, 황학대, 다가정, 청양정, 군자정 같은 정각들에서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습니다. 그러나 대원군과 동학혁명을 거치면서 서원과 누각들은 파괴되었고 양반 문화는 쇠퇴하고 있던 중 선교사들은 새로운 기독교 문화를 갖고 들어 왔습니다. 1897년 화산리 언덕 땅 3천여 평을 구입했으니 지금 예수병원 건너편 주차장과 선교사 묘지 동산 일대입니다. 1900년에 약 1만 평의 땅을 양도 받았으니, 지금 예수병원 간호전문대학과 신일아파트 자리입니다. 1905년 경 2만 5천 평을 구입했으니 지금 예수병원과 신흥 및 기전여학교 자리이며, 1910-11년에도 산 8만여 평을 마련했으니 구 예수병원 자리입니다. 그 후에도 계속 땅을 넓혀 1924년 당시 화산동 선교부는 전주천을 끼고 병풍처럼 둘러싼 14만여 평을 확보하고, 교육·의료·전도 사업을 확대시켜 나갔습니다. 다음 주에 보겠지만, 이 같은 선교 사업에 소요되는 막대한 재정은 주로 미국의 성도들이 기부하였습니다. 한국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이미 120년 전에 보여준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6:18).   

전도서 7:2절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1절은 일시적인 부귀영화보다 지속적인 명예의 소중함을 말하고, 2-4절은 일시적 즐거움보다, 마지막 운명인 죽음을 기억함으로 지혜를 얻으라고 교훈합니다. 본절은 ‘초상집에 간다’는 표현을 통해 죽음의 현실을 마음에 둘 때 비로소 지혜가 생김을 강조합니다. 잔칫집의 즐거움은 잠시지만, 초상집은 인간의 끝을 보게 하여 마음을 깨우칩니다. 죽음을 성찰하는 사람은 삶을 바르게 세우지만, 죽음을 잊은 사람은 쉽게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갈멜의 부자 나발이 그 예입니다. 그는 마치 잔칫집에 사는 사람처럼 먹고 마시며 자신의 성공과 부요함에 취해 있었습니다. 죽음을 마음에 두지 않았기에 자신을 도와준 다윗의 선행을 멸시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중재가 아니었다면 그는 다윗의 칼에 죽었을 것입니다. 이튿날 술에 깨어난 나발은 충격을 받아 열흘 만에 죽습니다. 나발의 죽음은 전도서가 말하는 교훈 그대입니다. 죽음을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은 지혜를 잃고, 지혜를 잃은 삶은 결국 파멸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죽음 자체보다 그 너머의 마지막 심판을 기억하며 살아갑니다. 죽음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미 해결되었습니다. 다만, 부활의 생명이 사망을 삼키는 그 날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 날 우리는 우리 일생을 주님 앞에서 결산해야 합니다(마25:14-30). 죽음을 성찰하는 사람은 삶이 겸손해지고, 마지막 심판을 마음에 둔 사람은 오늘의 삶을 주님의 뜻에 맞추어 살게 됩니다. 그 의는 마지막 날 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전도서 7:3절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본절은 “슬픔이 웃음보다 사람을 더 성숙하게 만든다”고 교훈합니다. ‘슬픔’은 ‘카아쓰’의 번역으로, 임신하지 못한 한나의 고통스러운 심경(삼상1:6), 다투는 배우자에 대한 근심(잠21:19) 등에 사용되어 고통에 대한 비참한 심경을 표현합니다. 초상집에서 죽음을 목격하고 인생의 유한함에서 느끼는 숙연함과 겸손함이 배어 있습니다. ‘웃음’은 세상이 주는 일시적 기쁨입니다. 전도자는 인생을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 슬픔이, 세상적이고 허탄한 웃음보다 낫다고 선언합니다. 지혜 문학의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고난은 사람의 내면을 정화하고 지혜를 갖게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세 번째 산에서 살아 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슬픔은 지혜를 얻는 수단 이상입니다. 슬픔은 하나님의 축복의 문으로, 이를 통해 우리의 믿음은 새롭게 빚어집니다. 한나가 좋은 예입니다. 아이가 없는 한나는 온 가족과 함께 실로의 성소로 매년제를 드리러 올라갔습니다. 대적 브닌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는 한나를 질투하여 심한 모욕의 말을 쏟아냈습니다. 남편 엘가나의 위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슬픔에 잠긴 한나는 모든 것이 가능한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서원합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신 뒤 사무엘을 낳게 하십니다. 한나는 5년 뒤 사무엘을 드려서 서원을 이행하였고, 하나님은 다섯 자녀를 더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은사를 주심으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고 한나의 가문은 크게 빛났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은 슬픔을 재료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거라사(3)
마가복음 5: 21절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건너편 거라사에 도착하여 군대 귀신들린 한 남자를 고치셨으나, 돼지 떼 2천 마리가 몰사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주민들은 예수님 일행이 떠날 것을 요청하였고 주님은 다시 갈릴리 지역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요르단의 제라쉬는 바로 그 ‘거라사’로 알려져 왔습니다. 제라쉬는 중동에서 가장 잘 보존된 로마 도시입니다. 1806년 제첸이 발굴을 시작하자 이미 주전 3200~1200년에 주거지가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주전 63년 로마의 정복 후에, 데가볼리 연합도시의 하나로 편입되었고, 주후 90년에는 로마의 아라비아 속주에 포함됩니다. 제라쉬는 ‘중동의 폼페이’라 불릴 만큼 보존 상태가 뛰어나며, 예수님 당시에는 상당히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는 방문하여 개선문을 세웠고, 아르테미스 신전도 이 즈음 건축되었습니다. 또한, 말경기장(1만 명)과 극장(3천석)을 갖추었으며, 인구는 2만~2만5000명 정도로 면적 80만㎡ 규모의 번영한 도시였습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거주하였으며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13개의 교회까지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침략 이후(AD 614) 쇠퇴했고, 주후 749년 지진으로 완전히 몰락했습니다. 지금은 유구한 역사와 현대적인 삶이 공존하는 도시로서, 관광 산업이 주된 경제 활동입니다. 도시의 형태와 경제 구조 및 통치하는 국가는 시대에 따라 바뀌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제라쉬의 역사는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치 않는 것을 붙드는 지혜를 갖게 합니다.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빌립보서 4:6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립보서 4:4-7절에서 바울은 3가지를 당부합니다. 첫째, 기뻐하고 기뻐하라(4), 둘째, 관용을 베풀어라(5), 셋째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아라(6). 그리고 염려의 해답은 하나님의 평강입니다(7). 본절은 염려를 다룹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마 6:25-34)에서 염려의 가장 흔한 원인들을 언급하셨습니다. 그것들은 신체를 의미하는 키(27), 옷(28), 음식과 음료(31), 그리고 미래(34)입니다. 복잡한 현대생활에서도 같음을 볼 때 해 아래 새것은 없습니다. 염려의 치료제는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입니다. 한나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 근심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본절은 기도를 묘사하는 세 단어를 말하는데, 실로 성도의 특권입니다: 기도, 간구, 구함. 기도’는 헬라어 ‘프로수케’의 번역이며, 가장 넓은 의미의 기도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다’는 뜻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간구’는 ‘데에시스’의 번역이며 특정한 필요 때문에 드리는 간절한 요청입니다- ‘하나님, 이것이 꼭 필요합니다!” 구함’은 ‘아이테마’의 번역으로, 구체적인 요청 목록입니다. 사도는 단순히 “기도하라”라고 하지 않고 ‘기도-간구-구함’이란 세 단어를 나란히 배치해 기도의 다양한 모습을 묘사하면서, 기도를 통해 염려가 치유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다만, 그 기도는 ‘감사의 태도’를 갖고 드려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문제가 일어날 수 없고, 하나님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또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받은 줄 믿고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

매일묵상(2026/2/2-6)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누가복음 13:19절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세례교인이 생기면서 전주 선교는 활기를 띠고 작은 시작들이 만들어집니다. 1897년 가을 레이놀즈 부인이 자기 집에서 여성들을 주일학교 형태로 가르쳤는데 이것이 기전여학교의 출발입니다. 이듬해인 1898년 12월 잉골드가 한옥 초가집에서 병원을 열었으니 이것이 예수병원의 출발입니다. 1900. 9월 레이놀즈가 사랑방에서 김창국을 가르쳤으니 이것이 신흥학교의 출발입니다. 이로써 완산 언덕 아래 은송리에는 교회와 병원, 학교로 이루어지는 삼각 선교 거점이 마련됩니다. 이후은송리 선교 근거지는 이씨 왕가의 성역화 정책 때문에 화산동 언덕 일대로 이전합니다. 비록 7년 만에 끝났으나 은송리 선교부는 전주와 전라도 선교의 요람입니다. 여기는 전주에서 첫 예배의 장소요, 첫 세례 교인을 배출하였고, 오늘의 전주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그리고 예수병원이 시작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선교사들보다 앞서 내려와 전도한 정해원의 활동은 전주 선교를 위해 그 의미가 적지 않습니다. 그의 작은 시작이 전주와 전라도 전체의 복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덕주 교수는 정해원의 집을 수소문 끝에 찾아 내자 기념관으로의 매입을 피력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고 결국 헐렸습니다(2004년). 오늘날도 미미한 출발로 보이지만 하나님께 드려진 헌신은 지역과 시대를 변화시킨 씨앗이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스가랴 선지자 시대에도 같았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백성들은 초라한 성전을 20년에 걸쳐 간신히 준공하였으나, 이 성전은 500년 간 이스라엘 예배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슥4:10a).

전도서 7:1절 – 구조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오늘은 새로운 단락인 7장 1–14절의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단락은 1절에서부터 잠언 형식의 교훈 12개가 나오고 13-14절이 결론을 맺습니다. 1–12절의 대부분은 “더 나음(better-than)” 형식의 잠언들입니다. 이는 6장 10–12절의 질문, 즉 “사람에게 무엇이 참으로 좋은가?”라는 물음에 대한 전도자의 간접적 답변입니다. 전도자가 보기에 절대적으로 좋은 것은 없지만, 상대적으로 더 나은 가치들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잠언들에는 죽음과 지혜·우매라는 두 주제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좋다’, ‘지혜’, ‘마음’, ‘우매자’ 같은 단어가 되풀이 되고 있어 문단의 통일성을 갖추었습니다. 결론부인 13–14절은 새로운 단락이 아니라 앞선 잠언들을 결론짓습니다. 특히 7장 14절은 미래의 불확실성 문제를 다시 언급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과 고난의 시기 모두를 받아들이도록 권고합니다. 이 단락은 봉투구조(inclusion)란 문학적 기교를 갖추어서, ‘좋다’와 ‘날’이라는 단어가 문단의 처음(1절)과 끝(14절)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 결과 1–12절의 금지적 성격의 잠언들 전체가 13–14절에 의해 하나의 교훈적 단락으로 완성됩니다(머피). 내일부터 1-14절 단락의 각 구절을 묵상할 예정입니다. 잠언과 전도서가 주는 삶의 지혜는 비록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햇빛을 보는 자들에게 상대적으로 유익합니다. 따라서, ‘지혜가 주는 더 나은 길’을 곰곰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전7:14,새번역).

전도서 7:1절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본절은 두 개의 잠언을 병치하여 외적 성공보다 ‘좋은 이름’을 귀히 여기며, 인간의 연약함과 삶의 한계를 정직하게 바라보게 합니다. 전단은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중요함을 강조하는데,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 자체이며, ‘좋은 기름’은 고대인의 사치품으로 물질적 부요를 상징합니다. 그 의미는, 물질적 풍요보다 의를 추구하며 명예롭게 살아가라는 교훈입니다. 좋은 평판은 물질적 부요보다 가치 있고 오래지속 되기에, 잠언 역시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22:1)을 권고합니다. 그러나, ‘의로움’ 없는 ‘좋은 이름’은 불가능하며, 하나님의 말씀 없는 ‘의로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같이 성경 말씀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해서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후단은 좀 충격적인데, 전도자의 독특한 통찰 때문입니다. 아이가 출생하면 기쁨과 기대감으로 설레지만, 그로 인해 인생무상이나 인간의 한계를 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출생한 날은 부조리하고 불확실한 삶을 시작하는 날이지만, 만약 ‘좋은 이름’을 갖고 있다면 죽는 날은 그 명예를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새기는 날입니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지 530년이 흘렀지만 그분의 충절이 기려지나, 그 당시의 부자는 기억됨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율곡과 이순신은 모두 같은 덕수 이씨로, 두 분은 먼 친족입니다. 그러나 덕수 이씨 후손들은 이순신의 정신을 물려받아 무관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어떻게 살고 죽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좋은 기름’이 아니라, ‘좋은 이름’은 최후의 심판과도 깊이 연결되었므로, 신자들은 본절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서 영원히 살리로다”(시37:29).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거라사(2)
마가복음 5: 13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 동쪽의 거라사인들 지역에 이르자 귀신 들린 한 사람을 만나 치유하신 사건입니다(막5:1-20; 눅8:26-39). 거라사의 위치로, 요르단 수도 암만 북쪽 48km에 위치한 제라쉬가 먼저 거론되지만, 갈릴리 호수로부터 60km 떨어져 있어, 2000마리 돼지 떼의 죽음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갈릴리 남동쪽 해안의 쿠르시 유적이 주목되었습니다. 그 유적은 비잔틴 수도원으로 호수와 연결된 도로, 모자이크로 장식된 교회, 지하 통로 등을 갖춘 대규모 복합 건물의 흔적입니다. 주후 749년 지진 이후 폐허가 되었지만, 이곳이 데가볼리 지역에 속했고, 호수 인근이라는 점에서 돼지 떼 사건의 실제 배경지로 더 설득력을 가집니다. 또한, 비잔틴 시대 수도원도 발굴되었는데, 이 사건을 기념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마태복음은 같은 사건이 가다라(마8:28)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가다라는 현재 갈릴리 호수 남동쪽 야르묵 골짜기에 위치한 하맛 가다라로 보여집니다. 이런 지명 차이는, 데가볼리 지역의 복잡한 지리 구조, 작은 마을 대신 큰 도시 이름을 대표 지명으로 쓰는 관행, 사본 전승 과정에서의 지명 혼동 가능성 등 때문입니다. 비록 성경의 지리적·역사적 연구는 이해를 돕지만, 복음서는 예수의 권세와 구원 사역에 대한 증언이 목적입니다. 따라서, 본 사건 기록의 목적인 예수님의 구원이 모든 경계를 넘어 온 세상으로 확장될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빌립보서 4:5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4절)고 명령한 뒤, 이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관용’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에이케스’는 온유함을 넘어, 자기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지 않고 상대를 품어주는 너그러움, 억울함을 감내할 수 있는 마음의 넓이, 사람을 대할 때의 부드러움과 포용성을 의미합니다. 이 관용은 교회와 세상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야 합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주님의 재림이나(시간), 혹은 주님의 임재(거리) 모두 가능합니다. 이같은 종말론적 소망이나 현실적 주님의 임재에 대한 믿음은 우리 삶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물론, 전절에 언급된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우리가 관용을 베푸는 내적 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는 기뻐할 수 없는 많은 상황이 존재하나, 현실에서는 주님의 도우심이 있고, 후에는 영원한 나라가 기다린다는 소망을 생각하면,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 주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의식은 다른 사람들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큰 동기가 됩니다. 이는 주님이 어떠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요일4:17). 따라서, ‘너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사도의 권면은 합당합니다. 약 15년 전 사도 바울은 마가로 인해 바나바와 다투고 각자의 길로 갔습니다. 이후 바나바는 생질인 마가를 포용하여 바울도 인정하는 유용한 복음의 그릇으로 키워냈습니다. ‘관용’은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한 특질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언 19:11절).

매일묵상(2026/1/26-30)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갈라디아 6: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

동학혁명이 진압되자 선교사들은 다시 전주에 내려왔으나(1895.2), 이미 선교의 기반은 사라졌습니다. 레이놀즈의 보고입니다. “세례지원자 여섯 명 중에 딱 한 사람만 이번 봄에 우리에게 나타나서 장날만 아니면 매주일 3마일을 걸어서 우리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다른 사람과 달리 그는 ‘밝고도 특별한 별’ 처럼 비쳤습니다만 몇 주 후에는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한 대가로 10달러를 요구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했겠습니까?”(the Christian Observer, 1895. 10. 9). 레이놀즈는 그를 ‘쌀 교인’이란 불렀습니다. 은송리 선교사 동네를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장터에 나가 전도지를 나누어 주어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서양 귀신 나가라’고 외쳐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1500달러를 들여 선교부지를 넓혔고, 해리슨(=하위겸)과 여의사 잉골드에 의해 시약소가 세워지고 치료받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전주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집니다. 마침내 다섯 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1897.7). 테이트의 집안 일을 도와주던 소년 김창국(14세)과 그의 어머니(강씨), 옆집의 유씨 부인, 함씨 부인, 그리고 김내윤 등 입니다. 사람들은 선한 일을 경험해야 마음문이 열리고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은 자신의 재물을 들여 주님의 선교를 섬긴 여인들을 기록하는데, 그들 모두는 병고침을 통해 주님의 선한심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눅 8:2-3).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의 주님을 따라 선한 행실로 믿음의 표지를 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6:10).

전도서 6:11절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나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본절은 “말이 많으면 의미는 줄어들고, 삶의 본질적 문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는 내용이며, “말을 아끼라”는 조언을 넘어서 인간의 근본적 무력함을 보여줍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말은 아무 유익도 없습니다. 말의 증가는 허무의 증가일 뿐이기에, 말의 한계를 인정할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이는 말은 때로 진실을 밝히는 도구이지만, 많은 경우 불만과 불안의 출구가 되어 더 큰 허무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고난 속에서는 많은 말보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잠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로운 욥 역시 고난을 당하자 비로소 이 교훈을 배웁니다. 고난이 오자 욥은 많은 말로 고통과 억울함을 토로합니다. 친구들과 논쟁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고, 하나님께 이유를 묻고 따지기도 하다가, 다 부질 없음을 깨닫자 침묵합니다. 그래서 욥은 자기보다 연소한 엘리후의 통박을 받아도 잠잠합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고 욥과 장시간 변론하시자, 비로소 욥은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회개합니다. 그뿐 아니라, 욥은 이를 통해 하나님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말로 삶을 통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분의 신비 앞에 조용히 서게 됩니다. 한편,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들에게 욥을 통해 속죄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욥이 친구들을 위해 제사드리자, 하나님은 욥의 고난을 회복시킵니다. 고난의 목적을 다 이루신 것이죠! 실로 그분은 지혜롭고도 가장 자비하신 분이십니다(약5:11).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42:3).

전도서 6:12절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본절은 인간의 한계를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인간은 무엇이 진정 자기에게 좋은지조차 모르는 존재입니다. 또한 삶은 짧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수많은 선택 앞에서 흔들리며, 모든 것은 그림자 같이 스쳐 지나갑니다. 이러한 인간의 무지와 불확실함은 단순한 현실 진단의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 결과 세상은 교만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처럼’ 될 수 없음을 인정하게 하는 진실의 거울로 작동하고 있지만, 그래도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메시지를 읽어 내는 신학과 설교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미래를 예측하려 애쓰나 모조리 실패합니다. 전도자는 담담히 말합니다. “인생은 그림자와 같아서, 스스로의 앞날조차 알 수 없다.” 이 고백은 교만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도록 이끕니다. 미래는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무엇이 참으로 좋은지 판단할 능력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림자 같은 인생이지만, 그 그림자를 비추는 빛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한계를 인정할 때 비로소 참된 평안과 지혜는 시작됩니다. 다윗이 좋은 예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길 때 계명을 벗어나서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려고 수단 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수없이 불확실한 상황과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께 묻고 또 물어 지혜를 얻었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거라사(1)
마가복음 5: 1절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신약 시대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고, 유대인과 로마인이 함께 살며 서로 다른 문화적 관습을 유지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종교적 기념일 외에 매일 일을 했지만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고, 돼지고기나 비늘 없는 생선은 먹지 않는 등 음식 규례 또한 크게 달랐습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호수 동편, 헬라·로마 문화권이었던 데가볼리 지역으로 가셨고, 그곳에서 무덤 사이에 살며 쇠고랑도 끊을 만큼 강한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났습니다. 예수께서 귀신을 내쫓자 귀신들은 2000마리 돼지 떼로 들어가 몰사시켰고, 치유된 남자는 데가볼리 지역에서 예수께 받은 은혜를 전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데가볼리는 다메섹, 스키토볼리스, 가다라, 거라사 등 10개 도시의 연합체로, 돼지를 기르던 헬라·로마 문화권이었습니다. 사건의 정확한 장소는 ‘가다라’(마8:28)인지 ‘거라사’(막5:1;눅8:26)인지 논란이 있으나, 두 도시 모두 데가볼리에 속해 있었기에 갈릴리 동편의 이방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임은 분명합니다. 이 사건은 예수의 권세가 문화·지역·영적 장벽을 넘어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이 꺼리던 이방 지역, 돼지를 기르던 로마 문화권에서도 예수의 능력은 동일하였습니다. 또한 귀신 들린 자가 완전히 회복되어 곧바로 복음의 증인이 된 모습은, 예수의 구원이 단순한 치유를 넘어 삶의 방향을 바꾸는 능력임을 드러냅니다. 그 이방인이자 광인은 모든 사람 심지어 자신에게도 버림받았지만, 하나님은 회복시키고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의 본질과 능력을 다시 깨닫게 합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1:16).

빌립보서 4: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도착한 때는 AD 50년 경입니다. 먼저 강가에 모인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나 주님은 유대교에 입교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의 마음만을 여십니다(행16:14). 그러므로, 전도는 우리가 하나 영접은 주님의 몫입니다. 이어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치유하고, 옥터가 흔들리는 기적과 함께 간수와 그의 가족 전부를 구원합니다. 거라사의 광인의 치유와 구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복음은 지역, 성별, 인종을 구별하지 않고, 구원은 영혼 뿐 아니라 육신의 치유와 삶의 방향 전환까지 포함합니다. 최초의 신자 루디아의 집에 교회는 세워졌고, 누가를 목회자로 남겨둔 후 바울 일행은 떠났습니다(행16:10-40;17:1). 6년이 지나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의 끝무렵 빌립보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누가는 다시 합류합니다(행20:5).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성전에서 잡혀 2년 간 가이샤라에서 가택 연금을 당합니다. 빌립보인들은 이때 선교헌금을 보냈고, 바울이 감사의 편지를 쓴 것이 빌립보서입니다(AD60년). 사도는 언제 풀려날지 몰랐지만 기쁨이 넘쳤는데,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빌립보서는 예수 중심의 복음 메시지와 경험된 믿음에 그 토대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즉 구원하신 주님에 대한 사랑,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경험, 고난을 은혜로 보는 믿음, 주님의 통치와 기도 응답의 확신(자족의 비밀),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견고한 인식입니다. 이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에 이르고자 하는 과정으로부터 생겨났으며, 영생의 정의와 부합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매일묵상(2026/1/19-23)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잠언16: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가족과 함께 정착한 정해원은 전주 지역에서 상당수의 구도자를 모았습니다. 테이트가 본국에 보낸 보고입니다: “선교 개척 사업은 상당히 희망적입니다. 우리가 이곳(=전주)에 미리 보낸 사람이 지난 겨울 동안 꽤 많은 사람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그들이 복음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여섯이 세례를 받겠다고 합니다. 아직은 세례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지만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역사하신다면 가을 전에 적어도 세 명 정도는 세례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1895. 장로교 해외선교 연차 보고서). 1894. 3월 테이트 남매가 전주에 도착하자, 처음 보는 서양 여자를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들 중 몇몇은 복음에 관심을 보여서 테이트는 가을 전에 세 명에게 세례를 줄 수 있다고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1894년 4월 전라북도 고부에서 동학혁명이 발발하였습니다. 미국 공사의 급전을 받고 테이트 남매와 정해원 가족들은 모두 철수 하였으며, 약 2주 후에 전주성은 정부군에 함락됩니다. 이듬해(1895. 2) 어느 정도 사태가 진정되어서 선교사들이 내려와 보니 ‘희망적이었던’ 전주 구도자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테이트의 계획은 일단 좌절되었지만, 남장로회는 전주를 거점으로 전라도 북부 지역에 복음을 전파할 전략을 세웁니다. 이른바 삼각 선교 전략으로, 교육과 의료를 통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계획입니다. 드디어 3년 뒤 5명의 세례자가 나왔는데(1897.7월), 전주 지역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의 터가 놓여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계획은 사람들의 뜻을 모아서 세우고, 전쟁은 전략을 세워 놓고 하여라.”(잠언20:18,새번역).

전도서 6:9절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본절의 요지는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돈이나 지식 등-에 만족하라’ 입니다. 전도서 6:7–9절은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그로 인한 만족의 부재를 다루며, 전도서 전체의 주제인 “헛됨”을 다시 강조합니다. 사람은 평생 수고하지만 그 수고가 욕망을 채우지 못합니다(7). 여기서 ‘욕망(네페쉬)’은 단순한 식욕이 아니라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근원적 갈망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먹고, 아무리 소유해도 만족 못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지혜자, 우매자, 가난한 자 모두 같습니다(8). 지혜가 있다고 해서 욕망이 채워지는 것도 아니며, 가난한 자가 처세 즉, 삶의 기술을 배워 재물을 얻어도 자동적으로 만족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같이 인간은 신분과 지혜의 차이를 넘어 욕망 앞에서는 모두 동일합니다. 따라서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의 욕망보다 낫다”는 본절의 교훈은 현실적인 지혜입니다. 이는 끝없이 더 많은 것을 바라며 떠도는 욕망을 통해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현재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누리는 것이 지혜인데, “손에 든 새 한 마리가 숲 속의 두 마리보다 낫다”는 속담이 말해줍니다. 부를 포함한 모든 욕망은 충족될 수 없으며, 충족되더라도 거기에 만족이란 없습니다. 그러나, 경건에 속한 모든 것들, 즉, 신뢰·순종·사랑이 기반된 하나님과의 바른관계, 말씀과 기도를 실천하는 삶, 영생에 대한 사모 등은 바람직하며, 기쁨과 상급이 주어지면서 만족 또한 갖게됩니다. 주님을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의 경건한 소원들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편37:4).

전도서 6:10절
“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이 이미 불린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새번역)

본절은 서두에서 세상의 모든 것이 지난 것들의 반복일 뿐이라고 선언합니다. 성서에서 이름은 명칭 뿐만 아니라 성격, 특성, 능력 등 전존재를 함축합니다. ‘사람’은 ‘아담’의 번역입니다. ‘아담’은 고유명사이자 일반명사로서, ‘아다마’(=흙)에서 파생되어 ‘흙에서 나온 자’란 뜻을 갖습니다. 아담(=사람)은 지식을 갖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수고와 사망이 찾아왔습니다. 전도자는 이 사실을 회상하며, 인간은 하나님보다 강할 수 없으며, 그분의 섭리를 넘어서지 못함을 지적합니다. 우리도 종종 아담처럼 지식을 통해 삶을 통제하고, 미래를 예측하고자 하는데 아담이 행한 모습의 반복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경험해도, 인간은 여전히 흙에서 온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다투려는 시도를 중단하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지혜의 출발점입니다(잠1:7).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고, 인간이 인간 됨을 인정할 때 평안은 찾아옵니다. 그러나, 이 진리는 실패를 경험해야 얻는 진주입니다. 아담 역시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야 ‘사람은 자기보다 강한 이와 다툴 수 없다’는 자명한 진리를 깨달았고, 전도자 자신도 하나님 없는 삶의 허무를 접하고 나서 ‘하나님 경외’에 이른 것을 보니. 사람은 자신의유한성을 인식할 때, ‘하나님 경외’라는 최고의 지혜에 도달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 실패는 축복의 원천입니다.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전5:7).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예수 시대의 배
마태복음 8:24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예수님의 12제자 중 어부들이 많은데 그 시대의 배가 가뭄으로 발견되었습니다(1986년). 갈릴리호수 북서쪽에 위치한 기노사르 키부츠의 두 어부가 해변가 탐사 중, 진흙탕 속에 묻혀 있는 오래된 목조 구조물을 발견합니다. 이스라엘 유물청이 발굴하였고, 7년 동안 복구와 보존 작업을 거쳐 복구되었습니다. 배는 길이 8.27m이며 너비 2.3m, 높이 1.3m로 아랫부분만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배의 재료는 백향목으로, 노와 돛대의 흔적이 남아 있고, 바닥은 평평합니다. 배의 구조는 물고기를 잡으면서도 충분히 해안가에 가깝게 머물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과 배에서 발견된 토기와 못 등의 측정 결과 이 배는 BC 40년쯤 만들어져 AD 50년쯤까지 100년 동안 수선하면서 사용되었습니다. 배의 수명이 다하자 선주는 물속으로 침몰시켰습니다. 분명 그 당시는 불필요하여 버려졌지만, 2천년이 지난 지금 그 배는 고고학이나 성서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그 당시 어부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신약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도록 이끄는 훌륭한 도구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이나 백성들에게 병이나 고치며 자신들을 비판하고 기적을 행하여 백성의 인기몰이나 하고 다니는 그리스도는 불필요하였습니다. 그들은 버리기로 작정하고 로마인의 손을 빌려 죽였으나 주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흘만에 살아나사 성전의 모퉁잇돌이 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대표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굳건한 믿음과 지혜가 요청됩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118:22,23).

룻기 4:21,22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룻기는 기근, 병, 노동, 보리, 마음씨 좋은 농부, 베이비 등을 엮어 만드신 아름다운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신뢰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믿음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소원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내 노력도 중요하지만, 모든 환경을 주관하시는 주님의 주권은 더욱 중요합니다. 따라서, “진인사대천명”이란 말이 옳습니다. 그 믿음을 갖고 룻처럼 현실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비와 양식과 사람들을 보내사 당신의 이야기를 완성하십니다. 나오미와 룻에게는 보리, 보아스, 베이비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룻기는 왕이 된 다윗 가문에 모압 여인의 피가 흘렀음을 보여줍니다. 모압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영접하지 않았고, 발람을 시켜 저주하고자 하였기에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주받은 모압 여인 룻은 믿음과 효성을 보였고, 다윗 왕가의 조상이 됩니다. 이 다윗 가문도 멸망하였으나,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나오미, 룻, 보아스는 몰랐지만 그들의 선한 행동을 통해 하나님은 영원한 당신의 나라를 세우고 계셨습니다. 유한한 인간의 지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철학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말고,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얻어야 합니다. 복음은 부활의 주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선포하고 세상에 생명을 주고 있습니다(요6:33). 따라서, 복음과 철학은 차원이 다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3).

매일묵상(2026/1/12-16)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요나3:4절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온’ 문화의 산실인 전주는 조선시대 전라도 정치와 문화의 중심였습니다. 그래서 전라도 선교의 시발점이 되었는데, 선교 주체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였습니다. 서울에 도착한 남장로회 7인의 선발대는(1892. 10월), 매코믹 출신인 테이트(최의덕), 그의 여동생 데이트(최구덕), 유니온신학교출신 레이놀즈(이병서) 부부, 전킨(전형겸) 부부와 데이비입니다. 1893년 1월 선교 협력기구인 선교회연합공의회가 조직되어서 남장로회는 충청남도와 전라도를 배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외국인들이 지방 여행을 맘 놓고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고, 고부를 중심으로 동학교도들의 ‘외세 배척’ 움직임도 점차 고양되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은 먼저 믿을 수 있는 한국인 전도자를 전주에 보내 집을 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적임자가 레이놀즈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던 서울 출신 교인 정해원이었습니다. 정해원은 1893년 6월 전주 은송리에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하였습니다. 그 당시 은송리 사람들은 나무를 해다 팔거나 전주천에서 닷새마다 열리는 장날 손님들을 상대로 장사하던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성 밖, 개울 건너’ 마을에 집을 구한 정해원은 가족을 데리고 내려와서 이웃의 의심을 불식시켰고 기대 이상으로 선교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이렇게 보면 전주의 선교 문을 연 사람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아니라, 정해원이라는 한국인 신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해원의 작은 순종이 전주 선교의 문을 열었듯, 하나님은 언제나 작은 시작을 통해 큰 일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편37:5,새번역)

전도서 6:7절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


본절부터 9절까지는 행복의 또 하나의 요소인 자족을 다룹니다. 누구든지 자신에게 주어진 분복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동안 ‘수고’는 필연입니다. ‘수고’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말’이며, ‘진저리나는 노력’, ‘고역’을 뜻합니다. ‘다(=모든)’란 낱말과 함께 볼 때, ‘수고’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고통스럽고 힘겨운 모든 일상의 노동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무엇 때문에 수고할까요? 솔로몬은 ‘자기 입’을 위함이라 밝힙니다. ‘입을 위함’이란 배를 채우고 식욕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생존과 쾌락 때문입니다. 한편, 후단은 식욕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나, 그의 욕구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현실을 지적합니다. ‘식욕’이란 ‘살아 있는 존재’ ‘생명’ ‘영혼’ ‘욕구, 갈망’ 등을 모두 포괄하는 ‘네페쉬’의 번역입니다. 전도자는 지·정·의 등과 같은 총체적 인간 중 특히 욕구적인 측면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식욕은 ‘네페쉬’로서의 인간이 가진 많은 욕망 중 대표적인 것으로 생존을 위해 필요하나, 식욕을 완전히 충족시키고 다시는 식욕을 갖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만족시키면 또 다시 만족 시켜야 합니다. 식욕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생기므로  살아 있는 동안 식욕의 만족 과정은 끝이 없습니다. 식욕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욕망이 그렇습니다. 따라서, 자족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이 보화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 안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면 비로소 주어집니다. 자족은 경건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딤전 6:6,새번역).

전도서 6:8절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살아 있는 자들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에게는 무슨 유익이 있는가”

7-9절은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서 수고해도 그 욕망을 채우거나 마음이 만족을 얻지 못함을 밝힙니다. 8절은 이 중간에서 ‘지혜와 부의 관계’를 다시 묻고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고, 지혜는 부를 창출한다고 생각하나 전도자는 이 통념을 뒤흔듭니다. 만약 부가 진정한 유익이 아니라면, 지혜 자체의 효용도 의심받게 됩니다. 전단은 지혜자가 어리석은 자보다 나은 점을 묻습니다. 지혜를 가졌더라도 반드시 재물을 얻는 것은 아니나(전9:11), 재물이 많더라도 더 갖고자 하는 욕망은 물론, 기타 다른 욕망들도 충족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와 우매를 비교한 2:12-17절의 결론도 이와 같습니다. 후단의 ‘행할 줄 아는’이란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를 아는’의 뜻으로 처세에 대한 은유입니다. 처세술을 통해 가난한 자는 부자가 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얻은 부 역시 자신의 모든 욕망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세상 지혜의 한계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나는 무엇으로 만족을 얻으려 하는가?” “지혜도, 부도, 성공도 마음의 갈증을 채우지 못한다면, 참된 만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하나님이며,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을 말합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교제의 삶이 그 본질이며 영원합니다(요17:3). 어렵고 수고로워도 그리스도인들은 이 영생의 기쁨을 간직하며 살아갑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입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편4:7절).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타브가(2)
요한복음 21:1절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본문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3번 째 나타나신 대목이며, 그 장소는 타브가로 추정됩니다. 타브가는 물고기가 많고 가버나움 바로 밑에 위치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는 여부를 세 번이나 묻고 베드로로부터 세 번 같은 대답을 받자 ‘나를 따르라’고 이르십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감수하고 주님의 교회를 맡아 세우라는 사명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따라 순교하였고 교회는 세워졌습니다. 타브가에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마지막 대화를 기념하는 베드로수위권교회가 있습니다. 1933년 건축된 교회 내부에는 주후 4세기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교회의 기초석도 남아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의 해수면이 내려가면, 교회 밖 호수 바닥에서 12제자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던 하트 모양의 기둥 받침이 드러납니다. 또한 교회 내부에는 전통적으로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아침을 준비했다는 바위가 있습니다. 이 바위와 해안가에 접해 있는 기초석이 연결되어 있으며, 계단을 비롯한 고대 항구의 모습 등이 남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복음의 이야기가 생산한 역사의 흔적들입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같은 역사의 이야기는 일시적이나, 복음의 이야기는 영원한데 주 예수께서 부활하사 살아 있는 소망을 교회에 남기셨기 때문입니다. 한 분의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가 구원을 얻게 되었고, 죽기까지 부르심에 충성한 한 제자를 통해 교회는 세워져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복음은 한반도까지 이르렀습니다. 이후 우주(땅) 끝까지 전파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룻과 섭리적 돌보심
룻기 2:3절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반드시 성공한다는 믿음을 가지되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하여 살아가라”는 월남전 영웅 스톡테일대령의 조언입니다. 그의 말은 신념에 찼으나 우리 영혼의 닻이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룻기가 주는 메시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의 섭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시모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에 온 룻은 양식이 없어 보리 이삭이라도 주워야 하였습니다. 룻에게는 낯선 사람들, 그리고 고된 노동이 예상되었으나, 시모와 자신을 위해 결단하고 이삭을 주우러 갑니다. 하나님은 그 룻에게 보리, 보아스를 보내시는데, 방법은 우연입니다. 룻은 이삭을 따라 가다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고 그때 우연히 보아스가 자신의 밭에 도착합니다. 보아스는 룻의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고 환대합니다. 그 결과 룻은 한 에바(20L)나 되는 보리를 갖고 집으로 돌아갔고 나오미에게 보아스의 이름을 들려줍니다. 나오미는 모세율법이 규정한 ‘친족구속자’ 제도를 떠올리면서 룻과 보아스와의 결혼을 성사시킵니다. 오벳이 태어났고, 엘리멜렉의 가계는 되살아 납니다. 룻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는 오늘날도 같아서, 주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구속의 이야기를 만들고 계십니다. 실패와 성공, 눈물과 두려움, 탄식과 가난 그리고 기쁨과 놀라움 등이 있겠지만, 주님은 이들을 낱줄과 씨줄로 사용하셔서 선이란 아름다운 옷을 만드실 것입니다. 그 과정은 인간에게는 우연이나, 주님에게는 완전한 계획일 뿐입니다. “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매일묵상(2026/01/5-9)


사도행전 16:9절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전주의 문화를 흔히 ‘온’ 문화라고 부릅니다. 전주의 본래 이름인 완산(完山)의 ‘완’(完)이나 ‘전주’의 ‘전’(全)은 모두 ‘온전’ 혹은 ‘모든’의 뜻입니다. 전라도 땅은 북쪽에서 내려온 북방족과 남방에서 올라온 남방족들이 섞여 사는 곳이었으며, 중국이나 일본과 교류가 많았던 곳입니다. 그만큼 개방적이고 넉넉해서, 문화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지혜를 터득했습니다. 남북전쟁 때 갈라진 미국 교회들은 비록 남북으로 나뉘어 한국에 들어와 선교하였지만 피선교지인 한국에서만큼은 서로 협력하였습니다. 북장로회 개척 선교사였던 언더우드가 1891년 가을 미국에 휴가차 들어갔다가 매코믹신학교와 내슈빌에서 개최된 신학대학 연합선교대회에서 연설할 때 마침 밴더빌트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인 최초 남감리교인인 윤치호도 참석해서 한국 선교에 대해 강연하였습니다. 이에 감명을 받은 남장로회 소속 신학생들이 한국 선교에 자원하였고, 언더우드 가족이 내놓은 선교비를 바탕으로 남장로회 선교부에서 한국 선교를 결정하였습니다. 1892년 10-11월 7인의 선발대가 서울에 도착 남장로회 선교는 시작되었습니다. 선교의 출발점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보내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주님은 직접 실천하셨고, 죄인들 영접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직접 우리 모든 죄를 담당하사 구속의 완성을 이루셨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자들이 하나이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는 진리가 복음의 내용이요 선교의 가장 중요한 동력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전도서 6:4,5절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의 이름이 어둠에 덮이니 햇빛도 보지 못하고 또 그것을 알지도 못하나 이가 그보다 더 평안함이라”


본문의 ‘그보다’는 부유하나 안식을 갖지 못하는 사람이며, 그의 비극은 ‘낙태된 자’와 비교됩니다. 낙태된 자는 빛을 보지 못하고 기억조차 남지 않아서 심판과 고통의 상징입니다(시편58:8; 욥3:16). 그러나 본문은 이들이 오히려 부유하나 만족과 쉼을 갖지 못한 사람보다 더 낫다고 선언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삶의 만족과 이에 따른 쉼’의 존재 여부입니다. 전도자가 보기에 ‘부와 많은 자녀’라는 소위 인생의 자기성취는 ‘쉼’이란 중요한 축복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전도자는 부유하나 열심히 일하였고, 쾌락과 자아성취까지 누렸지만, 삶은 만족도 쉼도 없었고 허무만이 가득했음을 고백합니다. 따라서, 이는 인간의 성취나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합니다. 수고해도 얻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찾겠습니까? 하나님이며 그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마치신 후 안식하시고 축복하셨으나(창2:3), 아담의 타락 후 땅은 저주를 받았고 인간은 일과 수고로부터 쉼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라멕은 쉼을 기대하고 아들의 이름을 노아(=안식)라고 지었습니다(창5:28,29). 그러나 노아는 쉼은커녕 홍수의 심판에서 겨우 살아남았을 뿐입니다. 노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평화를 가져오시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면 경건과 자족이라는 축복의 선물을 갖게 되니, 우리 모두 예수께 가야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전도서 6:6절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인생이 원하는 장수의 축복의 언급은 본절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인류 초기 조상들은 천 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제일 오래 산 분은 므두셀라(969세)입니다. 그는 에녹의 아들이며 라멕의 아버지이고 노아의 할아버지로서, 홍수가 일어나던 해 죽었습니다. 라멕은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셨다고 탄식하며 수고로운 삶을 자기 아들이 ‘안식’시켰으면 한다는 뜻으로 ‘노아’라 이름하였습니다. 그리고 595년 동안 자녀들을 낳고 살다가 홍수 5년 전 777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홍수의 심판으로 죽었습니다. 솔로몬은 수고롭게 살아간 이들의 삶도 허무하며, 이들보다 갑절을 더 살더라도 ‘행복’ 즉, 즐거움과 만족이 없다면 의미없다고 단언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죠! 장수하나 행복을 누리지 못한 자나, 낙태되어 햇빛조차 보지 못한 자나, 많은 후손을 남겼으나 만족이 없었던 자나, 죽었으나 매장되지 못한 불행한 자들 모두 하나로 귀결됩니다: ‘사망.’ 그러나 창세기에는 한 명의 예외가 있습니다. 에녹입니다. 에녹이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쁘시게 하자,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였으며(창5:24; 히11:5), 우리 주님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부활과 영생이 있습니다. 에녹이 증거하며, 회리바람 중 승천한 엘리야가 또 증거합니다. 수고롭더라도 그 마음에 낙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으로 전도자는 부러워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그 정답입니다(벧전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타브가(헵타페곤)
마가복음 1:16절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는 대목입니다. 이들은 밤새 수고하였으나 수확이 없어 뱃일을 정리하던 중 예수께서 오사 배에 오르시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이르셨습니다. 순종하자 심히 많은 고기를 잡았고 놀란 그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베드로가 밤새 그물을 내렸던 장소는 현재 타브가로 불리워지는 마을로 추정됩니다. 주후 1세기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타브가는 가버나움에서 멀지 않은 갈릴리 해안가에 위치하였고, ‘가버나움의 우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에인 쉐바(7개의 샘), 헬라어로는 헵타페콘(7개의 장소)으로 불렸습니다. 타브가는 아랍어로 헬라어 헵타페콘에서 유래합니다. 이는 해안가에 7개의 따뜻한 물이 솟는 샘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물이 있는 곳에는 플랑크톤이 풍부하고 따라서 물고기들이 많이 몰려들어 그물을 던지기에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수천 년 동안 갈릴리 호수에서 가장 많은 물고기를 수확할 수 있었던 이 장소에서 베드로와 안드레 역시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 후 다시 갈릴리로 돌아간 이 어부들은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또 헛되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서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고, 이에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손수 아침을 준비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신 후 다시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타브가는 갈릴리에서 가장 물고기가 잘 잡히는 장소이고, 복음을 잘 깨달을 수 있는 곳은 우리의 일터입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마9:9).

하나님의 말씀과 룻의 거듭남
룻기 1:16절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본절은 룻의 신앙고백입니다. 룻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야기를 가슴속에 담았습니다. 그녀는 시모 나오미로부터 전해받은 이스라엘 하나님이 참된 신임을 깨닫습니다. 어느 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애굽을 재앙으로 치고 홍해를 갈라 2백만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올 수 있을까? 어느 신이 넘쳐 흐르는 요단 강을 가르며 그 견고한 성 여리고조차 무너뜨릴 수 있었을까? 이같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 생겨나며, 이것이 거듭남입니다(벧전1:23). 거듭나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감사가 넘칩니다. 성령님의 역사이죠! 이 당시는 여리고 성이 무너진지 60년 정도 지났을 때로,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산 증인인 부모님에게 이 사건을 직접 들어 간직하였습니다. 그들의 부모 세대는 여호수아와 함께 요단 강을 건넜고 가나안 전쟁에 참여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보아스는 정탐꾼 살몬과 여리고 기생 라합의 아들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를 듣고 깨달은 룻은 마음에 담고, 그 하나님을 섬기며 홀로된 시어머니를 섬기기로 결단합니다. 그것이 본절의 고백입니다. 그녀에게는 자식을 얻을 기대도, 물질의 풍요도, 친척들의 만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가난이 기다리는 곳, 낯선 유대 민족, 자신들을 이방인으로 경멸하는 그 백성에게 가서, 하나님과 시어머니를 섬기고자 한 자기 부인의 결단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7).

매일묵상(2025/12/29-31)


전도서 6: 2절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2절은 1절의 ‘불행한 일’, 즉  돈, 물질적 풍요, 권력 등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그것을 누릴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돈, 부요, 존귀를 하나님께 받은 솔로몬은 이중의 좌절감을 갖습니다. 먼저, 통상의 사람들은 부와 권력을 갖지 못하고 오직 그런 것들을 소유하면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것들은 환상일 뿐 삶의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다음으로, 돈, 부요, 존귀는 원하다고 갖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셔야 하지만, 받아도 누리기 위해서는 누림을 허락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타인 그것도 낯선 다른 사람이 누리게 됩니다. 본문에서 ‘다른 사람’은 소유자와 상관 없는 낯선 사람을 말합니다. 2:18절에서 솔로몬은 자신이 수고한 것들을 수고하지 않은 상속인이 받아 누리게 됨도 한탄하였는데, 하물며 본인이 모은 모든 재산을 전혀 상관도 없는 사람이 가져간다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실로 ‘헛되어 악한 병’입니다. 그러나, 5:19절에서 솔로몬은 정반대의 상황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재물, 권세, 부요를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사람으로 솔로몬은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단언합니다. 따라서, 주시는 분, 누리게 하시는 분, 누리게 하지 못하시는 분 모두 같은 하나님입니다. 생사화복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으니 그분을 경외하고 살아가야 하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귀한 영생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허락받은 우리는 그 은혜를 찬양해야 합니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편128:2).

전도서 6: 3절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

전도서 6장 3–5절은 재산을 가지고도 누릴 능력을 받지 못한 사람의 비극을 계속 다루되, 본절은 많은 자녀와 장수라는 고대의 대표적 축복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시편 127편은 자녀가 많은 것을 큰 복으로 선언하고(4), 잠언은 부모의 교훈을 따르면 장수할 것이라 약속합니다(3:2). 그러나 전도자는 이러한 축복을 모두 누린 사람이라도 만족이 없거나, 죽은 뒤 존중받는 장례조차 받지 못한다면, 차라리 “낙태된 자가 그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4절과 5절이 밝히며, 이미 학대 받는 자보다는 낙태 등으로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 악을 보지 못한 자들이 더 낫다고 말한 취지와 같습니다(4:2). 그는 탐욕과 인색함 때문에 삶의 기쁨을 알지 못했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장례조차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실로, 살아서 만족이 없었고, 죽어서도 존중받지 못한 인생이라면, 전도자의 말이 옳다 하겠습니다. 만족 특히 ‘자족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얻기 어렵습니다(5:19). 솔로몬은 말년에야 이 진리를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는 장수를 제외하고 모든 축복을 받았으나, 하나님을 떠난 시기에는 참된 만족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그의 왕국을 사후에 분열시킴으로 솔로몬이 기울인 이스라엘 통합 노력은 헛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없이 얻은 세상 축복들은 누림과 만족이 없고 더 나아가 축복은커녕 오히려 불행이 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2025년 한 해를 마무리 하며)
시편23: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벌써 2025년이 저물고, 2026년이 다가왔습니다. ‘매일묵상’은 누가복음13:13절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에서 출발하였습니다.18년 간 귀신들어 앓으며 조금도 펴지 못하던 여자가, 어느 안식일 예배드리러 회당에 가자 마침 예수께서 순회 설교차 참석하셨습니다. 주님은 보시고 그녀를 불러 내어 고치셨습니다. 18년 동안 꼬부라진 허리로 매 안식일마다 회당에 참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을 사랑하였기에 힘들어도 계속 예배드리러 왔으니,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호칭하신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던 어느 안식일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여자는 중한 병에서 놓임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이 여자처럼 올 한 해 힘들고 어려웠지만, 꾸준히 주님을 찾고 예배드림으로 은혜도 받고, 문제도 해결받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경우가 있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절이 증거하듯이, 주님은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도 우리를 축복하시고, 또 축복하기 원하시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끝맺음은 자녀와 장수의 축복을 받더라도 만족을 누리지 못하면 헛되다고 갈파한 전도서 6:3절입니다. 만족, 특히 경건과 자족의 삶은 함께 가야만 합니다. 경건은 삶의 방향이고, 자족은 그 삶을 지속시켜주는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므로 그 은혜를 잊지 않는 2026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매일묵상(2025/12/29-31)


전도서 6: 2절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2절은 1절의 ‘불행한 일’, 즉  돈, 물질적 풍요, 권력 등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그것을 누릴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돈, 부요, 존귀를 하나님께 받은 솔로몬은 이중의 좌절감을 갖습니다. 먼저, 통상의 사람들은 부와 권력을 갖지 못하고 오직 그런 것들을 소유하면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것들은 환상일 뿐 삶의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다음으로, 돈, 부요, 존귀는 원하다고 갖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셔야 하지만, 받아도 누리기 위해서는 누림을 허락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타인 그것도 낯선 다른 사람이 누리게 됩니다. 본문에서 ‘다른 사람’은 소유자와 상관 없는 낯선 사람을 말합니다. 2:18절에서 솔로몬은 자신이 수고한 것들을 수고하지 않은 상속인이 받아 누리게 됨도 한탄하였는데, 하물며 본인이 모은 모든 재산을 전혀 상관도 없는 사람이 가져간다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실로 ‘헛되어 악한 병’입니다. 그러나, 5:19절에서 솔로몬은 정반대의 상황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재물, 권세, 부요를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사람으로 솔로몬은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단언합니다. 따라서, 주시는 분, 누리게 하시는 분, 누리게 하지 못하시는 분 모두 같은 하나님입니다. 생사화복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으니 그분을 경외하고 살아가야 하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귀한 영생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허락받은 우리는 그 은혜를 찬양해야 합니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편128:2).

전도서 6: 3절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

전도서 6장 3–5절은 재산을 가지고도 누릴 능력을 받지 못한 사람의 비극을 계속 다루되, 본절은 많은 자녀와 장수라는 고대의 대표적 축복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시편 127편은 자녀가 많은 것을 큰 복으로 선언하고(4), 잠언은 부모의 교훈을 따르면 장수할 것이라 약속합니다(3:2). 그러나 전도자는 이러한 축복을 모두 누린 사람이라도 만족이 없거나, 죽은 뒤 존중받는 장례조차 받지 못한다면, 차라리 “낙태된 자가 그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4절과 5절이 밝히며, 이미 학대 받는 자보다는 낙태 등으로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 악을 보지 못한 자들이 더 낫다고 말한 취지와 같습니다(4:2). 그는 탐욕과 인색함 때문에 삶의 기쁨을 알지 못했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장례조차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실로, 살아서 만족이 없었고, 죽어서도 존중받지 못한 인생이라면, 전도자의 말이 옳다 하겠습니다. 만족 특히 ‘자족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얻기 어렵습니다(5:19). 솔로몬은 말년에야 이 진리를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는 장수를 제외하고 모든 축복을 받았으나, 하나님을 떠난 시기에는 참된 만족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그의 왕국을 사후에 분열시킴으로 솔로몬이 기울인 이스라엘 통합 노력은 헛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없이 얻은 세상 축복들은 누림과 만족이 없고 더 나아가 축복은커녕 오히려 불행이 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2025년 한 해를 마무리 하며)
시편23: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벌써 2025년이 저물고, 2026년이 다가왔습니다. ‘매일묵상’은 누가복음13:13절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에서 출발하였습니다.18년 간 귀신들어 앓으며 조금도 펴지 못하던 여자가, 어느 안식일 예배드리러 회당에 가자 마침 예수께서 순회 설교차 참석하셨습니다. 주님은 보시고 그녀를 불러 내어 고치셨습니다. 18년 동안 꼬부라진 허리로 매 안식일마다 회당에 참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을 사랑하였기에 힘들어도 계속 예배드리러 왔으니,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호칭하신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던 어느 안식일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여자는 중한 병에서 놓임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이 여자처럼 올 한 해 힘들고 어려웠지만, 꾸준히 주님을 찾고 예배드림으로 은혜도 받고, 문제도 해결받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경우가 있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절이 증거하듯이, 주님은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도 우리를 축복하시고, 또 축복하기 원하시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끝맺음은 자녀와 장수의 축복을 받더라도 만족을 누리지 못하면 헛되다고 갈파한 전도서 6:3절입니다. 만족, 특히 경건과 자족의 삶은 함께 가야만 합니다. 경건은 삶의 방향이고, 자족은 그 삶을 지속시켜주는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므로 그 은혜를 잊지 않는 2026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