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6/8/31-9/4)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4)
히브리서 11: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이덕주 교수는 물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금산으로 왔을까요? 경상도 남애 섬에서 이곳 전라도 산골까지 들어오게 된 어린 이자익의 동기가 궁금했습니다. 셋째 아들 이성환 집사의 설명입니다. “나가 금산면장을 혀서 아는디, 여그 금산이 본시 전국 팔도 오색 잡놈덜이 몰려드는 곳이 아닌가벼? 징게 맹갱 외야들에서 농사짓넌 집이 많응께 머슴살이라도 할려고 오는 사람덜이 많았고, 여그서 금이 난다고 혀서 금 캐러 오는 사람덜도 많았제. 그 뿐인가? 구한말부터 모악산 자락에 잡술 하는 사람덜이 전국 각지서 몰려 들었제. 하먼, 금산에 본토배기는 삼분지 일도 안 되야.” 한반도 제일의 곡창이라는 “징게, 맹갱”(金堤, 萬頃) 평야가 있어 살기에 넉넉했고, 사금이 나와 일확천금을 노리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것입니다. 빈손으로 들어왔더라도 자기하기에 따라 부를 일굴 수 있는 곳이 금산이었습니다. 어린 이자익은 생존을 위해 금산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현실의 길 위에서 하나님은 그를 만나 주셨고, 머슴살이의 자리에서 목회자의 길로 부르셨습니다. 신앙의 부르심은 언제나 우리가 서 있는 현실에서 시작됩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나안으로 나아갔지만, 그의 시선은 눈앞의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더 큰 도성을 향해 있었습니다(히11:10). 750년 뒤 그의 후손은 여호수아의 지도 하에 가나안 땅을 차지합니다. 믿음은 현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걸으며 그분이 이루실 것을 믿고 살아가는 힘입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11:10).

전도서 9: 10절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본절은 전도자의 가장 강한 권면입니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하라.” 전도자는 삶의 허무를 말하지만, 그 허무 속에서도 주어진 기회를 붙잡으라고 명령합니다. 죽음은 모든 가능성을 끝내며,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습니다. 해 아래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지금뿐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미루지 말고, 주어진 기회를 즉시 붙잡으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단순한 근면의 권면이 아니라, 기회가 있을 때 행동하라는 신앙적 현실주의입니다. 신약에서 더 깊게 확장됩니다. 예수님은 “때가 아직 낮이니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요9:4). 밤이 오면 아무도 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주어진 시간과 기회를 붙잡고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삶은 “지금 해야 할 일을 지금 하는 삶”이었습니다. 바울도 “세월을 아끼라”고 말합니다. 이는 시간이 짧기 때문이 아니라, 기회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과 행할 일을 주셨습니다. 전도자는 죽음의 종결성을 강조하며 지금 행동하라 말하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심판과 연결하십니다.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고 돌아온 주인은 그들의 행한 일을 심판합니다. 달란트를 묻어둔 종은 기회를 사용하지 않은 죄로 영원한 벌을 받습니다. 기회는 현재에만 주어집니다. 종말이 오면 더 이상 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행위는 심판 때 밝히 드러나며, 지금의 충성은 영원한 기쁨으로 이어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깨어 있으라. 너희가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 25:13).

전도서 9: 11절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인간의 능력, 지혜, 경험이 삶의 결과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삶이 ‘때’와 ‘우연’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학자 롱맨은 이 절을 “전도자의 현실주의가 가장 날카롭게 드러나는 구절”이라 말합니다. 본절은 능력이 결과를 결정한다고 믿는 인간의 기대를 무너뜨립니다. 빠른 자가 항상 이기지 않고, 강한 자가 항상 승리하지 않으며, 지혜로운 자가 항상 성공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운명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능력을 갖추었다 하여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지혜는 확실히 우매보다 우월합니다. 그러나 그 지혜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며,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더 나아가 인생은 능력과 노력보다 더 큰 힘—때와 우연—에 의해 흔들립니다. 이것이 전도자가 말하는 허무의 본질입니다. 인간의 능력은 결과를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회를 구하며 겸손히 살아가야 합니다. “때와 우연”에 대한 본절의 가르침은, 신약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로 더 깊게 해석됩니다. 능력, 속도,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때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진리가 선포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과 구원조차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에 달려 있음을 고백합니다(롬9:11). 신자는 믿음 가운데 늘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롬9:11).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가이사랴(4)
사도행전 8: 40절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가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전도자 빌립은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뒤 아소도와 여러 성을 거쳐 가이사랴에 정착하였고 딸 넷을 두었습니다(행 21:8–9). 가이사랴의 항구 세바스토스는 헤롯대왕이 주전 30년경 지중해 연안에 건설한 거대한 인공 항구입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해양 건축 기술이 적용되었고, 요세푸스는 이 항구가 아테네의 피라에우스 항구에 견줄 만큼 크고 아름다웠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주후 1~2세기 거대한 쓰나미로 심각한 손상을 입었으며, 고고학 조사에 따르면 헤롯이 사용한 콘크리트는 로마 본토의 것보다 약해 구조적 결함도 있었습니다. 결국 항구는 비잔틴 시대 이후 더 이상 사용되지 못하고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오늘날 가이사랴는 이스라엘 유물청과 해양고고학자들의 지속적인 연구로 많은 부분이 발굴되었지만, 항구 전체를 완전히 복원하기에는 여전히 많은 부분이 소실된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가이사랴는 로마 시대의 웅장함과 신약 시대 복음의 역사가 함께 숨 쉬는 중요한 유적지로 남아 있습니다. 이 같이 항구 세바스토스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과 권력으로 세워졌지만 자연의 힘 앞에서 무너져 바다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에서 하나님은 베드로와 고넬료를 만나게 하시고 이방 선교의 문을 여셨습니다. 인간의 건축은 사라졌지만 하나님의 구속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항구 뿐 아니라, 인간의 기술과 권력으로 지어진 모든 것이 ‘모래 위의 집’과 같은 운명입니다. 그 반면, 복음의 역사는 ‘반석 위의 집’처럼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모든 것이 가능한 하나님.
마태복음 19:26절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부자 청년은 영생을 얻고자 달려왔습니다. 그는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하며, 무엇이 더 필요한지 물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사랑하사 한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 재물이 많은 청년은 심히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그를 본 주님은 제자들에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심히 어려운데,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놀란 제자들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고 대답하셨습니다.청년의 문제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재물은 세상에서 유용하나 하나님의 나라의 입구를 막는 큰 장애물입니다. 더 나아가 재물은 인간의 마음을 왜곡시키고 죄를 부추깁니다. ‘파우스트’(괴테)의 한 대목입니다: “우리가 금을 파놓으면 도둑질, 오입질이 생겨나고, 오만한 자에게 무기를 주어 대량학살을 꿈꾸게 하지요 세 가지 계율을 여기는 놈 다른 계율 역시 지키지 않는 법 이 모든 게 우리의 잘못은 아니죠” 그러나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부자 청년과 대조되는 분이 선지자 엘리사입니다. 그는 24마리의 소를 부릴 만큼 유복하였지만, 엘리야의 부름을 받자 다 버리고 엘리야를 따랐습니다. 그는 엘리야의 승천을 목격했고, 요단 강을 가르고 마른 땅으로 건넜습니다. 또한, 엘리야의 갑절의 영감을 받아서 불신앙의 북 이스라엘 왕국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입증하였습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

매일묵상(2026/824-28)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3)
창세기 12: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자익 목사의 며느리의 계속된 말입니다. “..긍께 머슴살이 한거지유 뭐. 근데 본시 영민하신 분이라 주인 집 아들들이 한문 공부하는 것을 밖에서 듣고는 천자문을 외우셨대유. 쓸질은 모르셨구유. 스무살이 넘어설랑 같은 동네 살던 김씨 집안에서 보니깐 성실하니 일을 잘허니께 사위를 삼았는디 독립허라구 논 닷마지기까지 받았다 이말이유. 그리구선 언젠가 서양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되앗는디 조덕삼 씨 하구 한 날 한 시에 세례 받고 교회를 시작하셨대유. 인자 선교사 조사가 되어선 외지로 전도하러 다니셨는디 어느 핸가 살림 밑천으로 받은 논 닷마지기를 팔아선 소식두 없이 사라지셨대유. 처갓집에선 배은망덕한 놈이라구 욕도 많이 했대유. 인자 육개월만에 집으로 왔는디 상투를 싹둑 자르고 양복을 해 입구 딴 사람이 되서 나타났시유. 긍께 그 사이에 평양 신학교에 들어갔다 이말이유. 장인은 비록 예수를 안 믿었지만 신사가 되서 돌아온 사위를 보고는 생각을 바꿨대유.” 시아버지의 이야기는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는” 아브라함과 다를 바 없습니다. 가난이 싫어 고향을 떠난 10대 고아 소년에게 금산은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자익이 인정받은 것은 성실과 그에 터잡은 실력입니다. 마치 요셉과 같습니다. 종으로 팔렸을 때나,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나, 바로의 총리가 되었을 때나 요셉은 성실하였고 그 동안 연마한 실력을 발휘합니다. 성실과 실력은 하나님이 높이시는 길로서, 우리가 갖추고 있어야 할 덕목입니다.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그는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언22:29)


전도서 9: 8절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본절은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삶을 기쁨으로 준비하라는 명령입니다. 전도자는 허무 속에서 쾌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아는 자가 하나님이 주신 오늘을 축제처럼 살아가라는 신앙적 명령을 내립니다. 흰 옷은 고대에서 축제와 기쁨의 상징이었고, 머리에 바르는 기름은 환대와 풍성함의 상징이었습니다. 전도자의 말씀 대로 덧없는 삶 속에서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쁨을 적극적으로 누려야 합니다. 신약은 이 기쁨을 더 확장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임을 말합니다. 희락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닙니다. 의가 세워지고, 평강이 자리 잡을 때 성령께서 주시는 종말론적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상황을 넘어서는 기쁨이며,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기쁨입니다. 메시야가 오실 때 모든 사람은 이 희락을 누리게 됩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은 바로 이 종말론적 기쁨의 상징입니다. 잔치의 기쁨이 끊어지려는 순간, 예수님은 더 좋은 포도주를 주심으로 메시야의 시대에 임한 새롭고 넘치는 종말론적 기쁨을 드러내셨습니다. 확실히 신약의 기쁨은 전도자의 명령과 차원이 다릅니다. 전도자는 허무 속에서 기쁨을 찾으라 했지만, 주님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영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허무 자체가 없습니다. 소망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이 영생의 보증이십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의 가정은 바울의 전도로 하나님을 믿고 이런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행16:34).

전도서 9: 9절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본절은 현실은 허무하나 하나님이 주신 ‘관계의 기쁨’을 붙잡을 것을 교훈합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라.” 전도자는 삶이 덧없지만, 하나님은 여러 기쁨들을 선물로 주셨음을 밝힙니다. 즉, 먹고 마시는 기쁨(9:7), 흰 옷과 기름의 기쁨(9:8), 그리고 본절의 관계의 기쁨이 그 예입니다. 부부의 사랑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기쁨이며, 수고 중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우리의 몫이나 사람마다 갖지는 못합니다. 실로, 결혼생활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들이 누리는 복입니다(잠언18:22). 어제도 언급되었지만, 신약은,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임을 선포합니다. 여기서 ‘희락’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의와 평강이 자리 잡을 때 성령께서 주시는 종말론적 기쁨입니다. 이 세상의 순간적 즐거움을 넘어, 부활의 소망을 갖고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고 있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그 성격은 잃어버린 양이 하나님께 돌아올 때 잘 드러납니다. 누가복음의 증언입니다. 삭개오는 돌감람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고 있던 중 부르심을 듣고 기뻐하며 곧장 내려와 집으로 영접합니다. 그때 “죄인의 집에 들어간다”고 이웃들이 수군거리자, 회개하여 “주여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토색한 것이 있으면 네 갑절로 갚겠습니다”고 말씀드리자, 주님은 구원을 선포하며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말씀하십니다(눅19:9). 삭개오는 후에 가이샤라의 주교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가이사랴(3)
사도행전 25: 1절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가이사랴는 로마총독의 관저가 있었으며 로마로 압송되기 전 바울의 재판과 증언(행 25장) 등이 행해진 곳입니다. 가이사랴는 초기 기독교 복음 전파와 신학의 중요한 중심지였습니다. 가이사랴 해변을 내려다보면 바다 속에 잠긴 거대한 방파제의 선명한 흔적이 보입니다. 헤롯이 바다 속에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항구의 기초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묵묵히 쌓아 올린 구조물이 전체 항구를 지탱했습니다. 짐배 위에 시멘트를 붓고 다시 그 위에 짐배를 얹어 바다 속으로 가라앉히는 작업을 반복했고, 북쪽 방파제는 거대한 나무 틀을 바다에 띄운 뒤 잠수부들이 밀어 넣어 시멘트를 채워 올렸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수면 아래에서 이루어졌지만, 그 숨은 기초가 항구의 위용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솔로몬 성전도 같습니다. 성전이 세워질 때 망치나 도끼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돌들은 이미 보이지 않는 채석장에서 다듬어져 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은 숨은 자리에서의 준비가 만들어낸 열매였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보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쌓아 올린 기초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충실히 준비된 사람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가이사랴의 방파제처럼, 우리의 신앙도 깊은 곳에서 단단히 세워져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보다 숨은 충실함이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기초를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기초가 흔들리지 않을 때, 삶의 항구도 견고하게 서게 됩니다. 우리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믿음은 신념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1,2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단순한 주관적 신념이 아닙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능력, 형제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갈멜 산에서 하나님의 불을 경험한 엘리야는 누구보다 강한 믿음의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심판한 그의 담대함은 인간의 용기를 넘어선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이세벨이 “내일 너를 죽이겠다”는 말 한마디에 그의 마음은 무너졌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에서 브엘세바를 지나 광야까지 약 300km를 도망가서 한 로뎀나무 밑에서 쓰러집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책망하는 대신 천사를 보내 떡과 물을 공급하심으로 지친 종을 일으키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힘을 얻은 엘리야가 호렙 산에 이르자, 하나님은 “내가 남겨 둔 칠천 명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모르는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미래를 준비하고 계셨고, 엘리야의 사명도 다시 세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를 만나 제자 삼으라고 명령하심으로, 고독한 엘리야에게 형제 사랑을 경험케 하십니다. 믿음은 홀로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서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자랍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혼란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고, 외로움 속에서 형제 사랑을 회복할 때 믿음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현실을 해석하고 견디게 하는 힘이 됩니다. 우리도 엘리야처럼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먹이시고, 깨우시고, 다시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매일묵상(2026/8/17-21)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2)
시편 113:7,8절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금산교회의 창립자의 한 분인 이자익 목사는 8남매를 두었으나, 지금은 자녀들 역시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전의 셋째 아들 이성환 집사는 아버지에 대하여 “내는 아버지를 잘 몰러, 일주일이면 하루나 집에 들어오실랑가? 집에 오셔두 자식들한테 얼매나 엄하셨는디…”하면서 “엄하신 목사”로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말년의 이자익 목사를 모셨던 며느리 김양호 권사는 소상히 언급합니다. “긍께, 시아버님은 경상남도 남해군에 사는 장수 이씨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나셨는디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여섯 살 때 친척집에 들어가 살았는디 허구헌날 일만 시켰대유 글씨, 오죽 했으먼 열두 살 땐가 고향을 떠나셨대유. 인자 배를 타고 하동을 거쳐 순천으로 해서 금산까지 와서는 팟정이에서 포목장사를 하는 조덕삼 씨네 집에 들어가 마부 노릇을 하게 된거지……” 이렇게 이자익 목사의 어린 시절은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그를 빚으셨고, 결국 장로, 목사, 총회장으로 세우셨습니다. 요셉도 같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버림받았고, 노예로 팔렸으며,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수모까지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요셉을 빚으셨고, 결국 애굽의 총리로 세워 많은 생명을 살리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역경에 놓이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신실해야 합니다(시편37:3-6). 요셉과 이자익은 청년의 때에 모두 성실하였습니다. 다음 주에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편84:11).

전도서 9:6절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 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


살아 있는 동안만 우리는 사랑하고, 미워하고, 질투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감정의 종결입니다. 죽은 자는 사랑도, 미움도, 질투도 없습니다. 그들은 관계 속에서 움직이지 못하며, 이 땅에서의 모든 몫이 끝났습니다. 전도자는 삶의 고통을 숨기지 않지만, 죽음의 절대적 종결성을 직면하면서 삶이 주는 작은 가능성을 강조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만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설 수 있고, 사랑을 회복할 수 있으며,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신약은 이 메시지를 더 깊고 더 무겁게 확장합니다. 죽음은 감정의 종결일 뿐 아니라, 최후의 심판으로 이어지는 문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감정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죄책감은 회개로 이끌며, 질투와 미움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부수어뜨립니다. 살아 있는 동안만 우리는 회개할 수 있고, 믿음을 고백할 수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더 이상 선택이 없습니다. 심판만이 남습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길 가시던 중 예수께서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을 보시고,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요9:4)고 하셨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사랑, 미움, 질투 등 모든 감정을 이끌어 갈 그 한 방향입니다. 선을 행할 능력과 지혜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12:17).

전도서 9:7절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본절은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도 삶을 붙잡을 것을 가르칩니다. “너의 음식물을 기쁨으로 먹고, 네 포도주를 즐겁게 마시라”는 말씀은 단순한 쾌락을 뜻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불가피함을 직면한 전도자의 결론으로 감사함을 갖고 삶을 누리는 모습입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이 이미 우리의 삶을 기쁘게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망을 결정하셨어도, 삶의 기쁨 역시 허락하셨습니다. 삶은 덧없지만, 그 덧없음 속에서도 하나님은 기쁨을 선물로 주산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모든 것을 종결시키나, 경건한 신자들은 오늘을 감사히 살아갈 줄 압니다. 신약은 이 말씀을 완성합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죽음 이후에도 끝나지 않는 기쁨—죄사함과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전도자가 말한 “하나님이 이미 네 행위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선언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실현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 앞에서 허무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씻김 받고, 그분의 부활로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며 기뻐하는 삶은 단순한 일상의 즐거움이 아니라, 죄사함 받은 자의 감사와 영생의 기쁨을 누리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실 때, 떡과 잔을 들어 거듭 감사하셨습니다. 죽음을 알고도 거듭 감사하시는 그 순간은,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의 선언입니다. 전도서의 “먹고 마시라”는 명령은 우리 주님에 의해 이렇게 완성되었습니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26).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가이사랴(2)

사도행전 11:11절
“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가이사랴는 헤롯대왕이 주전 30년경 건설하기 전까지 ‘스트라톤의 탑’이라 불리던 작은 항구였습니다. 주전 3세기 베니게 사람들이 사용했으나, 지중해의 강한 남서풍과 해안 절벽의 거센 바람으로 항구로서는 부적합하여 버려졌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로마의 후원을 받아 이곳을 새롭게 개발하며, 인공적으로 300척의 배가 동시에 정박할 수 있는 10만㎡ 규모의 거대한 항구를 건설했습니다. 그는 이 항구를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기리기 위해 ‘세바스토스 항구’라 명명했습니다. 이 항구는 자연 지형을 이용하지 않고 완전히 인공적으로 조성된 세계 최초의 대형 항구 중 하나로, 당시 로마의 기술력과 헤롯의 건축적 야망을 보여줍니다. 가이사랴는 이후 로마 군대의 주둔지이자 헤롯의 궁전이 자리한 도시가 되었으며(행 10장, 12장), 그의 아들 헤롯 아켈라오가 통치했으나 실정으로 인해 로마 총독이 파견되었습니다. 총독은 가이사랴를 행정 수도로 삼고 유대를 통치했습니다. 이곳은 로마 시대를 거쳐 비잔틴, 초기 이슬람, 십자군 시대까지 번성하였습니다. 본절에서 누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가 가이사랴에서 무너졌음을 밝힙니다. 베드로는 이곳에서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기 전까지, 복음은 유대인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고 말씀하시며,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의 집으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에 복음의 문은 모든 이방 민족에게 열려졌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사랑 곧 회복의 길
로마서 12:15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정신과 의사 나종호 박사는 말합니다. “열심히, 성실히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닥친 트라우마와 불행으로 인해 인생이 180도 달라지게 됩니다.” 나 박사는 자신이 만난 환자 중 노숙자가 있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대기업 임원이었지만, 아내를 잃은 뒤 마약에 중독되어 사회적으로 몰락했습니다. 그 과정을 보며 그는 깨달았습니다. 사회가 말하는 성공은 신기루 같고, 우리가 이룬 것에는 노력뿐 아니라 운도 많이 작용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과 타인에게 관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괜찮을 수 없습니다. 그 자체를 이해하고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해야 합니다. 나박사와 같은 전문가의 도움이나 따뜻한 말 한마디는 큰 격려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신비한 모습으로 자주 나타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고 희생하며 배려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의 풍랑에서 위협받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구원받을 것을 알려주었으며, 그 말을 믿고 안심합니다(하나님의 계획). 그리고 구조받은 멜리데라는 섬에서 이질에 걸려 고생하는 추장과 여러 환자들에게 안수하여 고칩니다(하나님의 능력). 그러나,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서 70킬로 떨어진 ‘압비오 광장”에 다다랐을 때, 마중 나온 형제들을 보고서 마음에 담대함을 얻었다고 누가는 증언합니다(형제 사랑). 형제 사랑이란 다 그런 것이죠! 여러 가지 인생의 풍랑에 시달리는 우리는 이 세 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매일묵상(2026/8/10-14)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
사무엘 16:10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본절은 소년 목동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신 하나님의 기준을 보여줍니다. “전라도 목사가 경상도 가서 목회에 성공한 예는 찾기 어려워도 전라도 와서 목회에 성공한 경상도 목사는 많다.” 한 호남교회사가의 지론입니다. 이를 증명하듯이, 경북 경산 출신인 배은희 목사는 전라도 ‘모교회’인 전주 서문교회의 전성기 15년(1921-1936년)동안 목회하였고 ‘사랑의 원자탄’으로 유명한 여수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도 본래 경남 함안 출신으로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지만 그의 목회와 순교는 전라도 여수 땅에서 이루어졌고 그 기념관도 여수에 있습니다. 아마도 전라도가 경상도보다는 외지인들에 대한 배척이 덜했던 것 같습니다. 이자익(1879-1958)목사도 그렇습니다. 경남 남해 출신인 이자익 목사는 전북 김제와 정읍에서 목회하였고 전북 노회장을 거쳐 조선예수교 총회장을 3번 역임한 바 있습니다. 한 번 들은 것은 잊지 않았으며 복잡한 장로교 헌법과 규칙을 줄줄 꿰고 있어 ‘법통’(法通) 총회장으로 불렸습니다. 특히 머슴의 신분이었으나 주인 조덕삼을 제치고 먼저 장로로 피택된 된 사건은 유명합니다. 그 머슴은 후에 목사가 됩니다. 이런 이자익 목사를 배출한 교회가 지금까지 ‘ㄱ’자 예배당을 간직하고 있는 금산교회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출신과 지역은 장벽이 아니라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어디서든, 그분의 뜻에 따라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쓰임받는 기준은 오직 깨끗하게 준비된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2:21).

전도서 9:4절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전도자는 “살아 있는 자에게는 소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망은 막연한 낙관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만 누릴 수 있는 작은 가능성, 돌이킬 기회, 하나님 앞에서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뜻합니다. 죽음은 모든 활동을 끝내지만, 살아 있음은 비록 미약해도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문을 열어 둡니다(전9:10). 전도자는 이 진리를 강조하려고 후단에서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개는 가장 비천한 존재였고, 사자는 가장 존귀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개는 비천해도 움직이고, 느끼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전도자는 바로 이 작은 활동성을 살아 있음의 가치로 봅니다. 살아 있는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고, 잘못된 길에서 돌아설 수 있으며,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구분을 지우지만, 살아 있음은 하나님 앞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남겨 둡니다. 본절은 신약의 관점에서 구원과 관련된 중요한 교훈을 내포합니다 ㅡ “살아 있음은 하나님 앞에서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십자가 위에서 회개한 강도의 예가 있습니다. 만약 그 강도가 죽었다면 더 이상의 선택도 회개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강도는 다리가 꺾이기 직전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주님은 즉각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살아 있음은 큰 선물입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

전도서 9:5절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9장은 인간 존재의 가장 냉정한 현실을 말합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공통된 운명입니다. 의인과 악인,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경건한 자와 불경건한 자 모두가 이 운명 앞에서 평등해집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죽음의 보편성을 말하면서도, 살아 있는 자가 가진 작은 우위를 강조합니다. 그 우위는 의식, 곧 자기 인식입니다. 살아 있는 자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인식은 비극적이나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또한 제공합니다. 즉 살아 있음은 하나님 앞에서 다시 선택할 여지를 갖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기억도, 감정도, 행동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몫이 끝났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자는 하나님께 돌아설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며, 삶의 방향도 새롭게 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전도서 9:4–5절이 주는 분명한 교훈입니다. 한편, 죽음을 아는 의식, 그것은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부르심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부활의 소망으로 이끕니다. 히스기야는 죽음이 임박하자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였으며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하셨습니다. 히스기야는 죽음을 알았고, 그 인식 때문에 하나님께 돌이켰으며, 그 돌이킴이 그의 삶을 새롭게 만든 예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기회는 늘 주어지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만 사랑하고, 회개하며, 순종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가이사랴
사도행전 10:24절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가이사랴는 헤롯대왕이 건설한 신약 시대의 항구도시입니다. 헤롯대왕은 로마 문화를 유입하고 로마와 직접 연결되는 관문을 만들기 위해 항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욥바는 유대인들의 거주지였고, 그 유대인들은 로마화를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헤롯은 이두메아 출신이란 약점을 가졌기에 욥바를 로마식 도시로 바꾸지 못하고 새로운 항구도시를 건설한 것입니다. ‘가이사랴’라 명명한 이유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가이사랴의 위치는 욥바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지중해 연안입니다. 헤롯은 이곳에 거대한 인공항, 원형경기장, 신전, 행정시설을 갖춘 로마식 도시를 완성했습니다. 이후 가이사랴는 로마 총독부가 자리한 정치 중심지이자, 기독교가 확장되는 중요한 도시로 성장합니다. 요세푸스는 가이사랴의 아름다움과 규모를 상세히 기록했고, 1959년 링크 부부의 탐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발굴되고 있습니다. 본절은 베드로가 가이샤라에 있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여 복음을 선포한 사실을 증언합니다. 이 사건은 유대인 중심의 복음이 이방인에게 확장되는 결정적 전환점이었습니다(행10장, 11장). 일곱 집사 중 한 명인 전도자 빌립은 세 명의 딸과 함께 가이샤라에 거주하였고, 바울은 2년 간 가택연금을 당합니다. 그는 총독의 재판을 거쳐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압송됩니다. 비록 가이사랴는 로마 권력의 상징이었지만, 하나님은 그곳을 복음 확장의 거점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의 편견으로 하나님을 제한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언16:4).

시편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우울함과 관련하여, 나종호 박사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감정을 기록하며 스스로 조절하라. 기분이 좋았던 날 무엇을 했는지, 어떤 행동이 스트레스를 만들었는지 점검하는 것입니다. 글쓰기나 운동처럼 자신을 회복시키는 활동을 정해진 주기로 실천하면 감정의 흐름이 안정됩니다. 둘째는 자책을 내려놓아라. 성공은 노력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시기· 우연· 환경이라는 요소가 개입합니다. 따라서, 자신과 타인에게 관대해져야 합니다. 여기에 심리학은 왜곡된 사고를 교정하는 인지행동치료, 활동을 회복시키는 행동활성화, 관계 유지, 수면·식사·운동 관리 같은 보완적 처방을 더합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다루데 유익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문제를 감정이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에서 찾습니다. 심리학은 스스로 행복을 만들라고 말하나, 우울과 불안의 뿌리에는 죄책감, 두려움, 영적 공허가 자리합니다. 이것은 감정 조절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 관대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에서 회복의 길을 찾습니다. 죄를 범한 다윗의 회복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는 죄를 회개했고, 말씀을 붙들었고, 성령께서 떠나지 않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성령님 안에서 새 생명, 즉 의와 평강과 기쁨을 누리면 우울은 자연히 사라집니다(롬14:17). 이때 심리학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집니다(롬5:5). 사랑과 우울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면(하나님께 아뢰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매일묵상(2026/8/3-7)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서문교회(7)
시편 133:1절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인생을 살다 보면 좋은 일과 어려운 일을 모두 겪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기에 갈등이 생기기 쉽고, 때로는 분열의 아픔을 겪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연합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됨을 지켜 나가는 일입니다. 서문교회 배은희 목사가 “조선의 성자”라 부른 방애인 선생은 스물셋에 장질부사로 별세하여 화산동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묘는 오랫동안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확인한 김대전·김연수 두 장로는 교회에 알리고, 묘소를 서문교회 묘지로 이장했습니다(1999년). 또한 서문교회는 『전주 서문교회 100년사』를 출판한 뒤, 100주년 기념 예배당 지하에 “역사 자료실”을 마련하여 교회와 호남 선교의 귀한 자료들을 전시했습니다. 방문객도 크게 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랑과 헌신이 세운 아름다운 역사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교회를 이끈 당회장 목사의 은퇴 후 후임을 세우는 과정에서 심각한 내분이 일어났고, 김대전 장로를 비롯한 많은 “뿌리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후 서문교회를 여러 차례 답사한 이덕주 교수는 김대전 장로를 다시 만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서문교회의 역사는 분명한 사실을 말합니다. 사랑과 헌신은 공동체를 세우지만, 분열은 그 유산을 무너뜨립니다. 연합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 그리고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할 때 공동체는 다시 하나가 됩니다.겸손함과 온유함으로 깍듯이 대하십시오.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십시오.”(엡 4:2, 새번역)

전도서 9:2절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본절은 의인과 악인, 선인과 죄인, 깨끗한 자와 부정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드리지 않는 자, 맹세하는 자와 맹세를 피하는 자를 나열합니다. 이 구분은 율법과 지혜가 강조하는 바이나, 이 차이들은 죽음 앞에서 무너집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이라는 동일한 운명을 향해 걸어갑니다. 윤리적 차이도, 종교적 차이도, 제의적 차이도 죽음 앞에서는 힘을 잃습니다. 그러나 허무가 그 결론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인간을 철저히 낮추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마지막 날 모두 부활할 때 생명은 사망을 삼키고 승리할 것입니다(고전15:54-56). 그러나, 이 땅에서는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받을 수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있습니다(눅16장). 생전에 부자는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죽은 뒤에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당하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 안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간 것입니다. 나사로의 ‘의’가 언급되지 않았으나, 부자의 허물은 분명합니다. 문 앞에서 고통당하는 나사로를 무시하였습니다. 가인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민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빌2:12).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2:28).

전도서 9:3절
“모두가 다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잘못된 일 가운데 하나다. 더욱이, 사람들은 마음에 사악과 광증을 품고 살다가 결국에는 죽고 만다.”(새번역)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은 죽음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합니다. 의인과 악인, 지혜자와 우매자 모두에게 임합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죽음 자체보다,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을 안타까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에 사악과 광증을 품고 살다가 결국에는 죽는다”고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악’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성을, ‘광기’는 하나님 없이도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뜻합니다. 사람은 죽음을 알면서도 욕망을 쫓고, 하나님보다 자신의 계획을 신뢰합니다. 전도자가 말하는 인간의 광증입니다. ‘결국에는 죽고 만다’라는 말로 돌연 끝나는 본절처럼 죽음은 갑자기 찾아옵니다. 인간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계획과 자랑은 죽음 앞에서 무너집니다. 누가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이 사실을 날카롭게 드러냅니다(눅12:16-21). 그 부자는 더 큰 창고를 짓고 오래도록 풍요를 누리려고 계획하나, 하나님은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겠다”고 결정하십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계산에는 하나님도, 죽음도 없습니다. 그의 죽음은 돌발적으로 찾아오지만, 어리석게도 부자는 이 현실을 무시합니다. 따라서 본절은 죽음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죽음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서 오늘을 지혜롭게 살라는 권면입니다. 죽음을 잊어버리는 삶은 헛된 욕망으로 끝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넘어 영원한 소망으로 이어집니다(롬6:23).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욥바
사도행전 11:13절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많은 욥바 사람들은 죽은 다비다를 살린 베드로의 표적을 보고 주께 돌아왔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욥바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전에는 헬라가 지배를 하여 프톨레미 1세 소테르(주전 367-283)는 욥바에 수비병을 주둔시켰습니다. 이후 헬라에 맞선 유다의 마카비 가문은 욥바를 공격하였고, 약 20년 뒤 시몬 마카비가 욥바를 정복합니다(주전 142년). 시몬 마카비는 셀레우코스 왕조에서 독립하여 하스모니안 왕조(주전 142~63년)를 창립하였으며, 항구 욥바는 하스모니안 왕조의 경제, 군사 기반을 크게 강화시킵니다. 80년이 지나 하스모니안 왕조가 폼페이우스에게 복속되자(주전 63년), 욥바는 다시 이방인(로마)의 지배에 들어갑니다. 한편, 헤롯 대왕이 욥바의 로마화를 시도하자, 유대인들은 강력히 저항하였습니다. 이에 헤롯은 욥바 북쪽 40km 지점에 새로운 항구도시 가이사랴를 건설하게 됩니다(주전 30년경). 욥바는 유대인의 작은 항구로 남아 있다가 1세기 이후 기독교 도시로 성장하였습니다. 한때 수많은 나라가 차지하려 했던 욥바는 복음이 이방 세계로 나아가는 관문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항구를 차지하여 번영하려고 싸웠지만, 하나님은 아무런 다툼 없이 그 항구를 통해 화평의 복음을 전 세계로 보내셨습니다. 세상적인 영토와 번영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2:44).

하나님의 도우심
로마서 12:15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모든 사람이 문제를 갖고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우울증, 무기력 등에 빠집니다. 우울증이란 과거 혹은 먼 미래에 너무 사로잡혀 일상 생활 자체가 힘든 경우입니다. 가족들이 “식사했니?” 하면서, 지속적인 관심을 표현해야 합니다. 물론, 따뜻한 마음을 갖고 해야 하지요. 우울해 보이면, “내게 말해라…대화를 나누면 된다”고 하면서, 혼자되지 않게 해 주어야 합니다. 예일대 의과대학교 교수인 나종호 박사의 레지던트 동기는 극단적 선택을 하여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 교수는 바로 그 전 주에 함께 당직을 선 적이 있습니다. 외롭게 밤을 새운 그 친구에게 ‘잘 지내고 있냐?’하고 문자로 물었더니, 그는 ‘바쁘진 않은데 왜인지 모르게 혼자인 것 같다’고 답했습니다. 나 교수는 친구의 그 회신에 ‘그때 (내가) 조금 더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했더라면…’하고 후회한 뒤, “내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한 명만 있어도 그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나교수의 이런 조언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역시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위로나 따뜻한 말, 즉 사랑으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무거운 바위는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하고 말한다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군대 귀신이 거라사 광인을 붙잡았듯이, 죄의 힘 또는 마귀의 유혹의 힘이 우리를 사로잡으려고 하는 경우입니다. 이땐 지체 없이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막9:29). 그러면, 주님은 강한 자 마귀를 결박하고 참 자유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매일묵상(2026/7/27-31)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서문교회(6)
로마서 12: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서문교회의 종탑 옆에 또 하나 기념물이 있습니다. 1943년 4월에 ‘교회 창립 50주년’을 맞아 세운 기념비입니다. 비석은 화강암의 4각 기둥 형태로 꼭대기에 십자가를 깍아 세웠습니다. 당대 ‘전주 명필’ 설송 최규상의 예서체입니다. 표기법이 특이합니다. 비명 전문이 한자입니다. 일제 말기라 한글을 쓰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간단하게 ‘1893年’이라고 하면 될 것을 ‘명치 26년 계사년 주후1893년’과 같이 복잡하게 표기되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은 미국과 전쟁 중이라 ‘서기’ 연호를 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명치’ ‘대정’ ‘소화’ 같은 일본 연호를 대놓고 쓰기도 뭣해서 생각해 낸 것이 ‘을미(1895)’ ‘을사(1905)’ ‘무진(1928)’과 같은 간지(60갑자) 연호였습니다. 서기 연호를 사용 시에는 일본 연호를 함께 병기하여 감시와 탄압을 완화하려 했습니다. 비석 우측면에 건립연도를 ‘主後一九四三年’과 ‘昭和 十八年’나란히 새겨진 것도 그 때문이나 해방 후 ‘昭和’란 연호를 시멘트로 발라 읽을 수 없었습니다. 비석의 글씨에는 시대의 억압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비석을 세운 교회의 마음에는 하나님 앞에서 흔들리지 않으려는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의 믿음이 떠오릅니다. 포로로 잡혀가 바벨론의 언어와 교육을 받고, 이름은 바뀌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그 청년들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연호와 정권은 바뀌어도 그리스도는 변하지 않으며, 그분을 향한 교회의 사랑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전도서 8:17절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본절은 8장의 최종 결론입니다. 전도자는 오랜 탐구 끝에 지혜의 한계를 선언하는데, 이른바 “회의적 결론” 입니다(롱맨). 아무리 깊이 연구해도, 아무리 밤낮으로 고민해도,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지혜로 그 전모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지혜자조차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는 전도서 전체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3:11; 7:25–29; 9:12; 11:5). 전도자는 자연, 역사,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알 수 없었습니다. ‘계시의 부재’ 때문입니다(라우하). 그러나, ‘죽은 자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의 계시를 가진 신약은 분명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첫째, 악인들이 존경받고 장수하며 아무런 벌도 받지 않은채 죽는 경우(10,11), 전도자는 다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다.’란 권고를 할 뿐입니다. 신약에 따르면 그것은 악인에 대한 저주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악인은 마지막 날 부활하여 영원한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둘째, 악인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의 경우(14), 전도자는 ‘헛되다’고 토로하며 작은 일상을 즐기라고 권면합니다. 신약은 고난 속에서 의인이 하늘에 상을 쌓고 있음을 말합니다. 마지막 날, 의인은 부활하여 의로우신 재판장에게서 반드시 상을 받습니다. 전도자는 계시의 부재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파악하지 못했지만, 신약의 성도는 계시의 빛 아래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됩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전도서 9: 1절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본절은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의인과 지혜자의 삶조차 모두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음을 밝힙니다. 그들이 어떤 길을 걷게 될지는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의인이라 해서 사랑만 받고, 악인이라 해서 미움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사랑과 미움, 형통과 고난이 섞인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현실입니다. 전도자는 이 혼합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합니다. 의인도 고난을 겪고, 악인도 형통을 누립니다. 삶의 경험은 기대와 다르게 흘러갑니다. 지혜로운 자조차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함은 물론, 미래의 “사랑과 미움의 비율”조차 예측불가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 부족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이 가진 본질적 한계입니다. 지혜는 이런 문제점을 인정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하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인간은 경험을 기준으로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주권으로 세상을 이끄십니다. 의인의 고난이 실패를 의미하지 않고, 악인의 형통이 승리를 의미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리고, 감옥에 갇히는 등, 그의 삶은 파란만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높이사 만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십니다. 요셉의 삶은 하나님의 주권적 작품입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으로 인도하심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승리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욥바
여호수아 19:46절
“메얄곤과 락곤과 욥바 맞은편 경계까지라”

욥바 주민들은 철병거가 있었기에, 욥바를 배정받은 단 지파는 밀려나 북쪽의 라이스 땅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이 시기 욥바에서는 블레셋의 토기와 흔적이 발견되어, 이곳이 가나안 사람들이 아닌, 에게 혹은 갑돌 출신 블레셋의 도시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안드로메다라는 욥바의 공주 이야기도 이 지역의 비(非)가나안적 문화 배경을 반영합니다. 블레셋의 신전은 두 기둥이 지붕을 받치는 큰 규모였고, 바닥에서는 사자 해골이 발견되어 ‘사자 신전’이라 불립니다. 한때 욥바는 솔로몬이 베니게의 백향목을 들여온 항구로 알려졌으나, 최근 발굴에 따르면 실제 항구는 북쪽 5km 떨어진 텔 카실레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히스기야 시대에도 욥바는 아스글론 영지였고, 산헤립이 가나안 정복 시에 함락되었습니다(주전 701년). 이후 앗수르가 멸망하자 욥바는 바빌론의 손에 넘어갔고, 알렉산더가 가나안을 점령했을 때는 시돈·두로와 함께 헬라 도시가 되었습니다(주전 332년). 가나안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약속된 유업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완전히 정복한 적이 없었고, 바벨론, 헬라, 로마와 같은 강대국도 이긴 적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당신의 백성에 대한 믿음의 신실함을 시험코자 함입니다. 둘째, 세상은 아무리 완벽해 보여도 영원한 기업이 아닙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약할 때 신자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세가지는 오늘날도 같습니다. 따라서, 좋은 환경과 직장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신실하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

다니엘 1:8절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바벨론에서 포로 다니엘(17살)은 친구 3명과 함께 뽑혀 바벨론의 학문을 배우게 됩니다. 대단한 영예였지만, 왕의 진미는 먼저 우상 말둑에게 진상된 후 배정되기 때문에 다니엘은 먹지 않고자 결심합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가 행한 것은 도덕적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지키려는 결단입니다. 하나님은 지혜와 총명을 더하셨고, 그는 제국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영국 국회의원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는 작은 체구와 약한 시력, 정치적 약세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날을 늘 기억하면서, 두 가지 사명을 붙들었습니다; “노예무역을 막고, 관습을 개혁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노예제도는 단순한 사회문제가 아니라 영국이 회개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죄악이었습니다. 그의 폐지법안은 20년 동안 기득권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1807년 노예무역이, 1833년 노예제도 자체가 폐지됩니다. 윌버포스는 사흘 뒤 세상을 떠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의로운 삶은 착함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열매 맺으려면, 반대와 질시 등 고난은 당연합니다. 이 때문에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습니다. 오늘 우리도 같은 부르심을 받았음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이다. 만약 우리가 그분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을 받고 있다면, 진실로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이다”(롬8:17,사역).

매일묵상(2026/7/20-24)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서문교회(6)
마태복음 13:31절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서문교회는 귀중한 역사적 문헌들이 많습니다. 1908년 ‹제직회록›과 1909년 ‹당회록›, 1910년 ‹세례문답책›과 ‹교적부›등이 대표적이며, 1930년대 ‹예배일지›와 ‹여전도회록›, 고딕 예배당 머릿돌에서 나온 등사본 ‹전라도 선교 35주년 략력› 및 ‹전주서문교회 약사› 두루마리도 귀한 사료입니다. ‘전킨 기념종’의 이야기도 중요합니다. 1908년 전킨 선교사는 폐렴으로 순직하였습니다. 전킨은 이미 세 아들을 먼저 보낸 상태였습니다. 유복자를 뱃속에 품고 미국으로 귀국한 전킨 부인 메리 레이번 여사는 미국 선교부의 도움으로 지름 90㎝짜리 기념종을 제작해 서문교회에 기증했습니다. 종을 받은 교회는 교인들과 인근 교회들이 십시일반으로 정성을 모아 종각을 세웠습니다. 화강암 주춧돌 위에 세 칸 높이(6.8m) 기둥을 세우고 홑처마 팔작지붕을 씌웠습니다. 우아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습니다. 이 종각은 전주의 명물이 되었고 서문교회의 자랑이었습니다. 각각 예배 시작 1시간, 30분, 5분 전에 울리면서 정확한 예배 시각을 알렸는데 웅장하면서도 맑은 종소리는 20리 밖에서도 들렸다고 합니다 1944년 일제가 강제로 떼어 가기 전까지 전킨 기념종은 시간을 알리는 기준이었습니다. 또한, 1935년 헐린 ‘ㄱ’자 예배당 마당에서 모여 찍은 사진은 많은 가정이 서문교회에 나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1893년 시작된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의 헌신은 마침내 열매를 맺었습니다. 오늘날 서문교회는 재정의 1/3을 선교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13:32).

전도서 8:15절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본절은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작은 기쁨을 붙들라는 강한 권면입니다. 이 권면은 벌써 4 번째 반복됩니다(2:24–25, 3:12–13, 5:18–20). 전도자는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받는 현실을 직시합니다. 해 아래의 삶은 불공평하고, 인간의 수고는 때로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절망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오늘의 기쁨을 누리라고 권합니다.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중에 주어지는 소박한 즐거움은 허무를 해결하는 절대적 해답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의 동반자입니다. 쾌락주의나 도피적 즐거움은 아닙니다. 오히려 먹고 마심 같은 일상의 소소한 기쁨, 하루의 수고 속의 작은 쉼, 하나님의 선물 같은 순간들을 말합니다. 그 기쁨은 우리를 지탱하게 하는 은혜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않으셨다는 증거입니다. 엘리야는 바알과 싸움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세벨에게 죽음의 위협을 당하자 도망하여 광야 로뎀나무 밑에서 죽기를 구하였습니다(왕상19:1-8). 하나님은 기적으로 그를 회복시키지 않았습니다. 대신 천사를 통해 떡과 물을 주시고, 잠을 주시고, 다시 먹게 하셨습니다. 아주 작은 기쁨이었지만, 그 기쁨이 엘리야를 다시 살렸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일상에 이런 작은 은혜를 숨겨 두십니다. 그 은혜를 받아 누리며 기뻐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덧 목적지에 도달해 있을 것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편37:4).

전도서 8:16절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았는데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본절은 8장의 결론으로 지혜의 한계를 선언하는 17절을 준비합니다. 먼저, 전도자는 전심전력으로 지혜를 찾았고 땅 위, 즉 세상의 모든 일을 살피려 했습니다. 여기서, ‘일’은 히브리어 ‘인안’의 번역으로 ‘고통스러운 과업’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괴로운 일입니다(1:13;3:10). 후단의 ‘밤낮으로 자지 못한다’의 직역은 ‘낮에도 잠을 본다’는 말로, 밤낮으로 고민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노력은 “고된 일”입니다(3:10). 마치 영원히 돌을 밀어올려야만 하는 시지푸스의 운명과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왜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받는지, 왜 우리의 계획이 무너지는지 묻지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의 시종을 알지 못합니다(3:11). 따라서, 이해가 아니라 신뢰가 우리를 살립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감추어져 있지만, 그분의 선하심은 가려져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욥도 이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는 고난의 이유를 이해하려고 밤낮으로 고민했습니다. 친구들과 논쟁했고,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했지만 아무 답이 없자 침묵합니다. 그때 폭풍과 함께 나타나신 하나님과 변론하고 고백합니다. “내가 깨닫지 못하는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은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주권 앞에 겸손히 엎드렸습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일을 잘 살피는 것은 왕의 영광이다”(잠언25:2,쉬운성경).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욥바
사도행전 9:42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본절은 베드로를 통해 죽었던 다비다가 살아난 사건이 욥바의 복음화 계기였음을 전합니다. 욥바는 오래된 도시로서 주전 18세기의 도시 성벽 흔적들과 주전 16세기에의 진흙벽돌을 쌓아 만든 도시가 발굴되었습니다. 이집트는 욥바를 점령 통치하였습니다. 이집트 기록에 따르면 주전 1440년경 투트모세 3세가 가나안 정복 전쟁을 벌였고, 그의 군장관 제후티는 욥바 통치자를 속이려고 200개의 거대한 바구니를 준비하고 군사를 숨긴 뒤 조공처럼 보내어 도시를 함락했습니다. 이 승리는 투트모세 3세의 카르낙 신전 벽에 기록되었고, 람세스 2세(주전 1279~1213)는 이곳에 화려한 궁전을 지었습니다. 1950년대 캐플란이 발굴한 이 궁전의 입구에서는 사암으로 만든 문기둥과 그 위에 새겨진 람세스 2세의 상형문자가 발견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욥바 문화유산 프로젝트’를 진행한 결과, 주전 2000년경 진흙벽돌로 쌓은 성문이 화재로 전소한 흔적이 발견되어서 투트모세 3세의 정복 기록이 사실임을 밝혀냈습니다. 또한 아멘호텝 3세의 인장과 이집트식 토기들이 출토된 바도 있습니다. 이집트는 해변의 길을 타고 욥바를 침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길은 욥바의 번영을 위한 무역로였습니다. 이 같이 축복과 위험은 병존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축복과 위험의 양 측면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섭리로 이들을 사용하여 통치하지만 우리는 그 섭리의 시종을 알지 못합니다(3:11). 따라서,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재앙의 날에는 살펴보아라. 이 모든 날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미래를 알지 못한다.”(전7:14,쉬운성경).

믿음과 느헤미야(7)
느헤미야 9: 36절
“우리가 오늘날 종이 되었는데 곧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사 그것의 열매를 먹고 그것의 아름다운 소산을 누리게 하신 땅에서 우리가 종이 되었나이다”

기도하는 사람, 경건한 사람은 수동적일 수 없습니다. 그들 안에는 사랑의 불이 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반드시 지혜와 분별을 따라야 합니다(빌1:9-10). 느헤미야는 성벽을 중수하여 예루살렘의 안전을 확보하자, 모세율법의 정착을 위해 통치력을 집중합니다. 이에 대한 불순종이 유다 멸망의 근본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에스라와 함께 이 문제를 풀어갔습니다. 그 첫 걸음은 모세율법의 낭독과 해설입니다. 그러자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안식일 준수, 십일조, 초태생과 첫열매를 드림, 이방인과 통혼의 금지, 제사의 회복, 절기의 준수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다만, 지속적이지는 못하였습니다. 심지어, 느헤미야가 재차 총독으로 귀환하였을 때 벌써 개혁 전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개혁은 총독 주도의 겉으로만의 개혁이었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요14:21-24). 한편, 에스겔이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라”(겔37:24)고 말한 다윗 왕조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유대 땅을 통치할 때, 에스겔이 예언한 진정한 다윗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분은 군사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영원한 왕으로 좌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당신의 백성을 죄의 종에서 해방시키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첫 걸음은,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3:8).

매일묵상(2026/7/13-17)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서문교회(5)
다니엘 3:17절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국가가 멸망하고, 우상숭배가 강제된 상황 하에서 다니엘은 사자굴을, 세 친구는 풀무불이란 각 시험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이방에 드러냈습니다. 배은희 목사 뒤이어, 전남 옥과 출신 김세열 목사가 부임한 기간은 민족의 수난기였습니다(1936~50년). 1937년 신사참배를 거부한 선교사들이 학교를 폐쇄하고 한국을 떠난 후 교회는 무방비 상태로 일제의 탄압과 통제를 받았습니다. 목사와 교인들이 신사로 끌려 나갔으며 예배당까지 가미다나가 설치되었습니다. 해방과 6·25 전쟁 후 빈번한 장로교회 분열 중에도 서문교회는 ‘보수적’ 장로교 노선을 지켰지만, 일부 교인들은 이탈하고 주변 교회들은 교단을 달리하여 교류를 끊었습니다. 따라서, 서문교회는 전주의 모교회이면서도 장로교 선교부나 다수 교회들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이 같은 시련 속에서 서문교회 예배당과 주변 환경도 많이 변했습니다. 1905년 은송리 ‘선교사 사택’을 옮겨 예배당으로 사용하다가 1911년 건물 오른쪽 모서리에 32평짜리 벽돌건물을 내붙여 ‘ㄱ’자 예배당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고딕’ 붉은 벽돌 예배당(1935년)으로 대체되었고, 고딕 예배당은 지금의 방주형 예배당(1983년, 790평)을 지을 때 헐렸으며, 예배당 옆으로 ‘100주년기념관’이 건축되었습니다(1993년). 서문교회는 일제의 탄압, 신사참배 강요, 교단 분열, 주변 교회의 이탈 등 여러 격변을 겪었지만 믿음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견뎌낸 공동체라 하겠습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14:12).  

전도서 8:13절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전도자는 세상에서 한 가지 모순을 발견합니다. 악인이 때로는 형통하고 오래 사는 것처럼 보이며, 의인은 고난을 겪고 잊혀지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현실은 하나님이 선하시고 정의로우시다는 믿음을 흔들 수 있는 강한 시험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이 모순을 이유로 악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는 현실은 혼란하나 경건한 사람이 더 잘됨을 고백합니다. 악인의 번영은 길어 보이나 실체 없는 그림자와 같을 뿐이고, 하나님을 떠난 삶은 허무로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삶은 작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본절의 긴장과 그에 따른 전도자의 교훈은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비록, 악한 사람이 성공하고, 정직한 사람이 손해를 보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경험지만, 눈앞의 현실만을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그분의 정의는 반드시 세워질 것입니다. 이 진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가장 분명합니다. 의로우신 예수께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악한 자들은 잠시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정의를 세우셨습니다. 사자굴로 던져진 다니엘도 구원받았습니다. 의인의 길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경건한 자가 잘 될 것이다”라는 전도자의 고백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현실의 모순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복된 길입니다. 악인의 번영은 잠시뿐이며 인내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약1:12).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전도서 8:14절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도자는 의인이 악인의 몫을 받고, 악인이 의인의 몫을 받는 현실을 보면서 “이것도 헛되다”고 고백합니다. 전도자의 고민은 단순한 철학적 질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탄식입니다. “왜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가? 왜 악한 사람이 잘되는가?” 전도자는 이 질문을 끝내 해결하지 못한 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사건을 우리 앞에 제시합니다. 바로 스데반의 죽음입니다. 스데반은 의인이었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했고, 지혜와 은혜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말은 의인답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짓 증언을 당하고, 돌에 맞아 죽습니다. 전도자의 말처럼 의인이 악인의 몫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주의 영광을 보고 기쁨으로 죽음을 맞습니다. 또한,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위하여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바울과 베드로의 마지막도 같았습니다. 이런 것들은 부활의 승리를 증언합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전도자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의인이 억울하게 죽을 수 있지만, 그 죽음은 패배가 아닙니다. 악인이 승리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잠시뿐입니다. 스데반은 예수께서 성취하신 부활의 영광을 미리 맛본 것이고, 그의 용서와 기쁨 역시 하나님의 정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현실의 모순은 커 보일 수 있으나, 주님의 정의를 믿고 신실하게 살아야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욥바
요나 1:2절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욥바는 텔아비브에 있는 절경의 도시입니다. 가나안 정복 당시 욥바는 철병거를 보유하여 단 지파는 점령하지 못합니다. 다윗·솔로몬 시대에는 해양 무역 세력인 두로와 시돈의 영향 하에 있어, 무력점령 대신 우호조약을 맺고 욥바를 공동무역항으로 사용했습니다. 욥바가 유대인에게 점령 통합된 때는 1200년 뒤인 마카비 시대(BC 2세기)입니다. 욥바는 항만이 없는 이스라엘을 위한 지중해 항구도시여서 시돈과 두로에서 벌목한 백향목은 욥바를 통해 육지로 들어왔습니다(대하 2:16; 스 37). 이 같이 욥바는 오랜 역사를 가졌고 오늘날까지도 인구가 밀집하여 고고학적인 흔적들은 찾기 어렵습니다. 한편, 이 욥바는 선지자 요나와 관련이 있습니다. 요나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4km 떨어진 가드헤벨 출신입니다. 주님이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명령하셨으나, 그는 불순종하여 정반대 방향의 항구 욥바로 도망쳐서 “다시스로 가는 배”에 승선합니다. 그러나 요나의 배가 폭풍을 만나자 요나는 바다에 던져지고, 이어 물고기 배에 들어가 사흘 밤낮을 지냅니다. 회개한 요나는 다시 니느웨로 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잠시 빗나갈 수는 있어도, 결국 하나님이 예비하신 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겪은 불순종과 징계의 사건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예표로 기록됩니다(마12:40).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도 구속사의 빛으로 바꾸어 내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12:40).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3:6).


믿음과 느헤미야(6)
느헤미야 2:4절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상황에 정통했습니다. 지금 아닥사스다 왕은 예루살렘 지역을 안정시킬 신뢰할 만한 인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왕에게 오해를 받을 수 있었고, 명분도 약했기 때문에 섣불리 총독자리를 요청하지 못했습니다. 총독임명의 결정권은 왕이 아니라 왕을 움직이시는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점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성서적 세계관의 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왕을 통해 주어지며, 왕 역시 존중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그 좁은 계명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왕의 마음은 주님 손에 있다”(잠 21:1)는 말씀을 붙들고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동기는 분명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먼저, 느헤미야는 일의 주관자는 왕 아닥사스다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면서,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도록 왕의 허락을 위해 기도합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전 14:1)는 말씀처럼, 바른 동기를 갖고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느헤미야는 이미 마음으로 총독이 될 것을 결심하고 기도했지만 임의로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림은 무려 넉 달이었습니다.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고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분이십니다(전3:11). 따라서 ‘하나님의 때’를 깨닫기까지 계획을 갖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죠! 넉 달 후 적절한 상황에서 기도는 응답되었고 그는 예루살렘 회복의 핵심 인물로 세워졌습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새번역).

매일묵상(2026/7/6-10)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서문교회(5)
마태복음 13:31,32절
“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김인전 목사 후임으로 경북 경산 출신 배은희 목사가 부임했습니다(1921년). 배은희 목사가 담임했던 15년 동안 꾸준하게 교세가 성장하여 시내 완산교회(1926년), 중앙교회(1930년), 동부교회(1934년) 등을 분립했습니다. 또 서문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전주 기독교청년회와 여자기독교청년회가 조직되었고, 전라도 최초로 전주유치원(1921년)도 설립하였습니다. 배은희 목사는 소외계층 선교에 관심이 깊어 1925년 ‘무산아동’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나중에 숭덕학교가 되었습니다. 또한 1927년 전주 여자기독교청년회가 서문교회 전도실을 빌려 시작한 전주고아원은 1931년 서문교회 옆 골목, 일본인 유흥시설을 인수하였습니다. 이 전주고아원은 ‘처녀 선생’ 방애인의 고아 사랑이 유명합니다. 기전여학교 선생이었던 방애인은 고아원에 지극한 정성을 쏟았습니다. 전주 사람들은 그녀가 고아를 업고 추운 밤길을 가는 모습, 다리 밑에서 거지나 ‘나병환자’를 끌어안고 기도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습니다. 결국 장질부사에 걸려 별세 하였는데(1933년) 당시 나이 스물넷이었습니다. 배은희 목사는 그녀를 ‘조선의 성자’라 불렀습니다. 서문교회는 단순히 교세가 커진 것이 아니라 고아원 설립, 무산아동 학교 설립, YMCA·YWCA 조직, 소외계층 선교, 그리고 방애인의 희생적 사랑 등, 이 모든 ‘사랑의 실천’이 교회의 진정한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13:33).

전도서 8:11절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본절은 악의 번성은 심판의 지연 때문임을 통찰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본래 악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그 마음의 모든 계획이 악합니다(창6:5). 그런데 심판이 지연되면, 그 악은 억제되지 않고 오히려 대담해집니다. 이는 악인은 하나님이 없다거나 혹은 하나님이 보지 않는다고 착각하고 있고, 사회는 악을 제어할 힘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해 아래의 큰 모순”으로 전도자는 개탄합니다. 그러나 심판의 지연이 심판의 부재는 아닙니다. 즉시는 아니라 하더라도 심판은 반드시 오는데,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최후의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히 9:27). 심판의 지연은 하나님의 인내와 주권의 신비에 속합니다. 하나님은 당장 악을 제거하기보다, 때로는 회개할 기회를 주시려고, 때로는 당신의 큰 계획 속에서 심판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제사장 엘리의 악한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예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며, 성막의 여인들과 음행하는 등 성막을 더럽히자, 하나님은 선지자와 어린 사무엘을 통해 엘리 집안의 심판을 거듭 선언하셨지만, 20년을 인내하시면서 회개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심판의 기한이 되자 아벡의 전투에서 두 사람을 함께 죽이시고, 130년 후에 엘리의 후손 아비아달이 왕 솔로몬에 의해 제사장직에서 파직됨으로 엘리 집안에 대한 심판을 완성하십니다(왕상2:27). 심판은 150년에 걸쳐 집행되었습니다. 따라서, 심판 지연 등 큰 모순을 겪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인내와 목적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시편37:9).

전도서 8:12절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본절 전반부는 전절(8:11절)에서 제기된 문제—악인이 심판받지 않고 오히려 장수하는 현실—을 다시 강조하며, 응보의 불일치를 토로합니다. “죄인은 백 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한다”는 관찰은, 전통적 지혜가 가르친 “장수는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교훈(잠 3:2, 16, 18)과 충돌합니다. 이는 단순한 예외가 아니라, 전도자가 반복해서 목격한 현실의 모순입니다. 그러나 후반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라는 전통적 가르침을 되풀이 합니다. 성경학자 롱맨은 이 부분이 전도자 자신의 견해가 아니라 전통적 지혜의 목소리를 인용한 것으로 평가합니다. 즉, 전도자가 평소 사용하는 동사 “알다(야다)”의 분사형은 이례적으로써, 고대 지혜 교사들이 전래하는 교훈을 전달할 때 사용하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8:14–15절에서 다시 악인과 의인의 처우가 뒤바뀐 현실의 모순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개탄합니다. 물론 응보의 교훈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전도자는 즉각적 보응은 부정하지만, 궁극적 보응은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현실에서는 악인이 일시적으로 번성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잘되고, 악인의 번영은 오래가지 못합니다(8:13). 따라서, 본절은 현실은 모순처럼 보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며, 악인의 번영은 일시적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바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다윗도 하나님을 신뢰하여 선을 행하며 그분의 성실에 기대어 살아가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시편37:3).”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편37: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므깃도(7)
열왕기하 23: 29절
“요시야 당시에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맞서 나갔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났을 때에 죽인지라”

므깃도는 고대 근동의 견고한 요새 중 하나였지만 앗수르에게 점령당하였습니다(BC722).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점복한 뒤 행정구역을 마깃두(므깃도)와 사메리나(사마리아)로 나눠 통치하였고 므깃도에는 앗수르식 건축 양식이 반영된 행정건물들이 세워졌습니다. 고고학적으로는 중앙에 직사각형 안뜰을 두고 사방에 방이 배치된 1052번, 1369번 건물이 대표적이며, 이는 앗수르 행정체계가 이 지역에 깊이 스며들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후 앗수르가 약화되고 바벨론이 세력을 확장하는 와중에, 요시야 왕은 북왕국 이스라엘 영토의 일부를 되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느고 왕이 앗수르를 돕기 위해 북상하자 요시야는 이를 저지하려고 므깃도에서 전투를 벌였고, 결국 그곳에서 전사합니다(왕하 23:29). 요시야는 경건하고 열정적인 왕이었으나 남유다가 처한 국제정세의 판단 능력은 부족했습니다. 인생에서 열심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듣고 분별하는 귀입니다.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자(BC586) 더 이상 므깃도는 재건되지 못하고 전쟁의 상징적 장소로만 남게 됩니다. 이스르엘 골짜기의 수 많은 전쟁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실패, 그리고 유다 왕국의 멸망 등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는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고, 결국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완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세상 일로 낙심하지 말고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재료 삼아 계획을 성취하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믿음과 느헤미야(5)
느헤미야 1:9절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느헤미야는 성경적 세계관을 갖춘 사람으로 역사와 세상을 신명기적 언약의 틀 안에서 해석하였고, 이 언약의 틀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 선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하면 축복이 오고, 불순종하면 저주가 임하며, 회개하면 반드시 회복이 주어진다는 언약입니다. 느헤미야는 불순종하여 멸망한 남유대 왕국(BC586)과 고레스 칙령(BC 538)을 통해 귀환한 역사를 통해 언약의 성취를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페르시아 왕의 신임을 받는 술관원이라는 독특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페르시아는 유대 땅을 지배하는 제국이었지만, 느헤미야는 그들을 하나님의 징계와 회복을 이루는 도구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제국의 통치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인 것입니다. 같은 믿음을 에스더와 모르드개도 갖고 왕후와 재상의 자리에 각 올랐습니다. 이 경우 부림절 사건은 단순한 하만의 음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권력의 중심에 유대인을 세우시고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시려는 섭리의 역사로 바뀝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제국 안에서 합법적 지위를 위해 노력하였고, 이 또한 하나님이 예비하신 회복의 길 중 하나였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도 같은 세계관을 가집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만유의 주로 임명받아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제사장으로 서서 어둠을 물리치고 의의 열매를 맺을 능력을 갖게 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매일묵상(2026/6/29-7/3)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서문교회(3)
히브리서 11: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차 받을 유업을 향하여 나아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아갔고.”


본절의 말씀은 김인전 목사의 생애를 그대로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 다 알지 못했지만, 교회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찾아 믿음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따라간 롯과 같이 그를 따라 김씨 가문은 이주하였습니다. 김인전 목사는 교회 안팍에서 추앙받았습니다. 한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유학자들을 만나러 향교를 자주 찾았는데 그때마다 세 살 위인 이거두리가 앞에서 “쉬이-물렀거라. 김목사님 나가신다.”하며 길을 열었다고 합니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그는 국권회복의 길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는데 있다고 인식하고, 가산을 출연하여 고향인 충남 서천군에 중등과정의 한영학교(韓英學校)를 설립하고(1906년), 교육계몽운동에 뛰어 들었습니다. 1910년 한입합방이 되자 학교를 숙부에게 인계하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 학교는 서북지역 독립운동의 요람이었습니다. 신학교 졸업(1914) 후 서문교회에 부임한 그는 목회 중에도 독립 의식을 꾸준히 고취하였습니다. 3·1운동 때에는 전주 지역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이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으로 항일투쟁을 벌였습니다. 1923년 별세하여 상해 외인묘지에 묻혔던 그의 유해는 1993년 8월 서울 국립묘지로 옮겨졌습니다. 아브라함이나 김인전 목사의 삶에서 보듯이 믿음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부르심은 무엇이겠습니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전도서 8:9절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

전도서 8:9절은 “해 아래에서 본 모든 것”이라는 말로 시작하며, 전도자가 실제 삶에서 관찰한 권력의 현실을 요약합니다. 그는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장하다(슐라트)”는 앞절에서 왕의 권세를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로, 권력을 가진 자가 타인을 억압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한편, 그 “해(악)”가 피해자에게만 임하는가?  아니면 가해자인 권력자에게도 돌아가는가? 전도자는 둘 다를 염두에 둡니다. 권력자는 타인을 해치지만, 그 악은 자신에게도 돌아옵니다. 전도서 5:13에서, “재물은 그 주인에게 해가 된다”는 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10절은 이 생각을 이어, 악한 권력자의 결말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한때 성전 출입을 자랑하며 스스로를 의롭다 여겼지만, 결국 죽고 묻히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집니다. 그들의 권력은 그들이 생각한 것만큼 크지 않았고, 그들의 악행도 영원히 지속되지 못합니다. 권력이나 권한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부당하게 사용해 타인을 해칠 수 있지만, 그 권력은 제한적이며 악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에스더서의 하만은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는 왕의 권세를 이용해 모르드개와 유대 민족을 멸하려 했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그 악한 계획은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왔습니다. 에스더의 왕비 된 위치, 모르드개의 선행과 그 기록의 망각 등 모든 과정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심판이었음을 증거합니다.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잠언11:21).

전도서 8:10절
“그런 후에 내가 본즉 악인들은 장사지낸 바 되어 거룩한 곳을 떠나 그들이 그렇게 행한 성읍 안에서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본절은 악인에 대한 심판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한탄합니다. 전도자는 악인의 장례를 지켜보며, 그들이 생전에 성전을 자주 드나들던 종교적 외식자였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배는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했고, 그들은 종교의 형식만 취한 채 그 정신을 부인하였습니다. 결국 자신들이 피조물에 불과함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5:2). 그들의 악은 이미 심판을 향해 무르익었지만, 생전에 심판은 없었고, 죽은 뒤에도 악행은 드러나지 않아 후대에 잊혀질 것입니다. 이를 본 전도자는 “헛되다”고 탄식합니다. 우리도 “왜 지금 악인에 대한 심판이 없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온다”(12:14)고 답합니다. 비록 우리에게 지연처럼 보이지만, 지연은 심판의 부재가 아닙니다. 악인이 사는 동안 심판을 피한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린 비극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이 기다립니다. 다윗의 성가대장 아삽도 이 진리를 깨닫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고 미워한 사실을 회개합니다. 그는 악인이 교만하고 권력을 남용해도 형통하며, 자손도 잘 되고, 죽을 때도 평안하나, 경건하게 살려는 자신은 병들고 가난하며 늙어 고통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배 중 악인에게는 영원한 파멸이,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교훈과 영원한 영광이 주어졌음을 깨닫고, 자신이 무지한 짐승과 같았음을 고백합니다(시편 73편).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 15: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므깃도(6)
열왕기하 20: 20절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업적과 저수지와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겨울에만 비가 오고 여름에는 한 방울의 비도 오지 않는 이스라엘에서 수자원을 확보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여러 유적지에서는 각 지역의 지형과 상황에 맞춘 독특한 급수시설들이 발견됩니다. 이러한 기후 조건은 전쟁을 하러 온 적군에게도 유리하지 않았습니다. 각 도시는 포위 중에도 물을 지키기 위해 땅속 깊이 터널을 파서 외부의 샘에 도달하는 비밀 통로를 마련했습니다. 1838년 발굴된 히스기야 터널은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BC 701).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의 침공을 대비하여 기혼샘의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약 533m 길이의 터널을 팠습니다. 두 팀이 양쪽에서 동시에 파 들어가 중간에서 정확히 만나게 된 이 공사는 고대 토목기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유적입니다. 므깃도에도 이와 유사한 급수시설이 있었습니다. 아합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시설은 언덕 꼭대기에서 소용돌이 모양의 층계를 따라 내려가 30m 깊이의 수직 수갱을 파고, 그 바닥에서 다시 성 밖의 샘까지 70m 길이의 수평 터널을 뚫은 구조였습니다. 샘은 적군이 볼 수 없도록 거대한 벽으로 가려져 있었습니다. 이같이 히스기야와 아합은 모두 전쟁을 대비해 수로·터널을 준비했지만, 두 사람의 ‘의지의 대상’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 결과 전자는 앗수르와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였고, 후자는 하나님이 아람과의 전쟁에서 전사토록 하셨습니다. 우리도 당연히 미래를 준비해야 하지만, 우리의 최종 의지처는 누구입니까?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언21:31).”

믿음과 느헤미야(4)
다니엘 1:2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사람의 믿음, 곧 세계관은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힘입니다. 느헤미야는 강대한 고레스 왕도 하나님의 도구여서, 고레스를 사용하여 유대 포로의 귀환을 이루신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권자로서 모든 나라와 왕들을 당신의 뜻대로 사용하신다는 성경적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느헤미야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약 150년 전에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다니엘도 같았습니다. 본절은 바벨론의 침공을 기록하면서 “주께서 여호야김을 그의 손에 넘기셨다”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느브갓네살의 군사적 승리였지만, 다니엘은 그 배후에 하나님의 주권을 보고 기록한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사건은 성경만의 기록이 아닙니다.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느브갓네살 연대기에도 유다 침공과 예루살렘 약탈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기록과 성경 기록의 차이는 해석에 있습니다. 세상은 제국의 힘을 말하나, 성경은 그 제국조차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말합니다. 다니엘과 느헤미야는 이 믿음으로 현실을 바라보았고, 그 믿음이 그들의 삶의 방향을 결정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 쪽을 선택합니까? 혼란과 불안이 가득한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역사를 주관하시며, 보이는 권력보다 더 크신 손으로 세상을 이끌고 계심을 믿고 있습니까? 이런 믿음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현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보이는 힘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을 더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단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