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시편 37:27절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선교사들은 ‘교육·의료·복음’이란 삼각 선교의 틀을 잡은 뒤, 1905년 옛 회현당 자리에 8칸 기와집을 지어 남자학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 ‘신학문당’이라 불리던 이 학교가 ‘신흥학교’의 출발입니다. 신흥학교는 1911년 양옥 교사와 한옥 기숙사를 마련했고, 1928년에는 지하 1층·지상 2층, 475평 규모의 웅장한 본관을 세웠습니다. 건축비 8만 원을 기부한 미국 교인 리차드슨의 이름을 따 ‘리차드슨관’이라 명명했습니다. 1936년에는 리차드슨 부인이 오빠 E. 스미스를 기념해 보낸 9천 달러로 165평 규모의 강당을 지어 ‘스미스기념관’이라 하였습니다. 여학교는 ‘서원너머’ 화산동 300번지에 세워졌습니다. 1904년 전킨 부인이 기틀을 잡았고, 1909년 벽돌 교사를 마련하면서 1908년 별세한 전킨 목사를 기념해 ‘전목사기념여자중학교’, 줄여서 ‘기전여학교’라 불렀습니다. 그 후 2층 벽돌 건물을 증축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100년이 넘은 선교의 역사 속에는 한 가지 공통된 주제가 흐릅니다. 바로 ‘선한 일’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선교사들은 일제와 양반 권세에 눌린 서민들에게 단순히 복음만 전하지 않았습니다. 조선 백성의 필요를 먼저 채우고 복음으로 이끄는 전략입니다. 복음과 선한 일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복음을 받아 새 사람이 되면 자연히 그리스도를 본받아 선한 일에 힘쓸 것이며, 이때 교육은 그 도구입니다. 선교사들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이름은 한민족의 마음 속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전도서 7:4절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본절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2)는 메시지를 또 반복하는데, 죽음의 현실을 직시하면 참된 지혜를 얻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우울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유한을 인정하여 오늘을 더 진지한 삶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즐거움만을 좇으며 현실을 외면합니다. 한편, 본절은 전도서 전체에서 반복되는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라’는 권면과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전도자는 때로는 즐거움을 최고의 선이라 말하면서도, 또 다른 곳에서는 그것을 어리석음으로 규정합니다. 이 모순처럼 보이는 긴장은 전도자가 전통적 지혜에 대해 깊은 회의와 갈등을 겪고 있음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즐거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죽음을 잊은 채 쾌락을 절대화하는 태도가 문제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죽음의 현실을 기억하면서도 하나님이 주신 일상의 기쁨을 감사함으로 누릴 것을 권면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삶의 기쁨을 누리되, 그것이 궁극이 아님을 기억합니다. 실로, 유한함을 아는 사람만이 참된 감사와 절제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죽음보다 마지막 심판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부활하여 몸으로 행한 것들을 따라 심판을 받게 됩니다. 좋은 예가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입니다(눅16장). 죽음이 오기까지 두 사람의 운명은 변하지 않았지만, 죽고 나서 두 사람의 운명은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뒤바뀌어집니다. 진실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전도서 7:5절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전도자는 7장에서 ‘지혜로운 삶의 태도’를 교훈합니다. 이를 위해 전도자는 ‘—보다 낫다’(better than) 라는 구문을 사용하여 참된 삶의 방향을 확연히 보여줍니다. 지혜자란 인생의 의미와 닥쳐올 운명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이고, 미련한 자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따라 즐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한 명의 지혜자가 주는 책망은 바보들의 합창보다 낫습니다. 책망은 듣기 불편하지만, 우리를 진짜 현실—특히 인간의 한계, 죄, 죽음, 책임—로 데려갑니다. 우리는 이런 불편하지만 진실한 말을 가치 있게 여겨야 하는데, 이는 진실과 직면하면 지혜가 오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아무리 즐겁고 달콤해도, 현실을 잊게 만드는 도피적 즐거움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 길은 패망의 길입니다. 다니엘서 5장은 벨사살 왕의 행태를 말합니다. 그는 바벨론의 마지막 왕입니다. 페르샤 군대가 바벨론 성을 둘러싸고 있었으나,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하여 온 금 그릇을 술 대접으로 삼고 잔치를 벌리며 우상들을 찬양하였습니다. 그 때 갑자기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 석회벽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너의 시대는 끝났고, 너는 기준에 미달하며, 너의 나라는 곧 무너질 것이다.”)이란 글자를 쓰는 장면을 보자 두려움에 사로잡힌 벨사살 왕은 다니엘을 호출하였습니다. 다니엘은 먼저 왕의 경박하고 불경건한 태도를 책망한 뒤, 나라가 페르샤에게 넘어갔음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날 밤 벨사살 왕은 페르샤 군대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BC 538).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잠언25:1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벧산/ 벧 스안
여호수아 17:16절
“요셉 자손이 이르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 하니”
벧산은 투트모세 3세(BC1479-1425)가 가나안을 정복한 이후 중요한 행정 중심지여서 이집트 제18–20왕조 문서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건물들은 정부 관료의 집, 곡식 저장고, 신전 등으로 대부분 이집트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신전은 가나안 신을 섬겼지만 건축 요소와 제의 용기, 조각상 등은 이집트적 특징을 지녔고, 이는 도시의 종교·문화적 혼합성을 보여줍니다. 관료들의 저택은 대형 구조에 중앙 홀과 여러 방을 갖춘 형태였으며, 건축 자재와 장신구 대부분이 이집트산이었습니다. 이는 벧산의 행정 관료들이 실제로 이집트인이었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세티 1세의 이름이 새겨진 조각상은 이집트가 가나안 도시들의 정복 상황을 기록하고 있어, 벧산이 이집트 지배의 중요한 거점임을 알려줍니다. 이집트의 지배력이 약화되는 시기에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있었지만, 므낫세 지파는 철병거가 있는 벧산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이윽고 가나안 문화와 우상숭배는 므낫세 지파를 타락시킵니다. 그 예가 사사 기드온의 부친입니다. 그는 바알의 제사장이었고, 그의 집에는 바알 신전이 있었습니다. 사사기 1장은 므낫세 지파에 벌어진 현상이 이스라엘 공통이었음을 증언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순종을 하되, 온전해야만 합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12:33).
생각하고 행하는 신앙
빌립보서 4:8절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바울은 빌립보서 4장 8–9절에서 교회 공동체와 성도 개인이 어떤 마음가짐과 삶의 방향을 가져야 하는지를 제시합니다. 그는 단순히 “좋은 생각을 하라”는 수준을 넘어, 우리의 사고와 삶의 구조를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질서로 재편할 것을 권면합니다. 여기서 ‘(이것들을) 생각하라’의 원어 ‘로기제스세’는 ‘계산, 이성’을 뜻하는 ‘로고스’의 파생어로, 삶의 진로를 그 기준에 따라 계산하고 결정하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9절의 ‘행하라’는 동사는, 지식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바울의 일관된 신앙 이해를 보여 줍니다. 흥미로운 점은, 바울이 제시한 덕목들이 당시 세속 철학자들도 말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들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순히 윤리적 미덕을 나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과 동기 안에서만 이러한 덕목이 참되게 열매 맺을 수 있음을 전제합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적 삶의 핵심은 ‘무엇을 하느냐’보다 ‘누가 우리 안에서 그것을 이루시는가’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요청합니다: 첫째,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치들로 채우고 그것을 기준으로 삶을 정렬하라. 둘째, 그렇게 정돈된 마음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훈련하라. 다음 주에는 바울이 제시한 각각의 덕목을 살펴보며, 그 가치들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성령님의 열매로 나타날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1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