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주서문교회
누가복음 13:19절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전주 서문교회는 1893년 6월, 서울에서 내려온 정해원이 은송리(동완산동)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구도자를 모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동학혁명으로 한동안 선교가 중단되었으나 3년 뒤 첫 세례교인이 나왔습니다(1897).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화산동으로 이전하나(1900) 교인들은 가난한 부녀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전주 양반들은 여전히 멀리서 바라만 보았습니다. 선교사들이 전주의 선비 문화를 알게 되자 책을 통한 전도를 시도했습니다. 1903년 전주 서문 바로 안쪽에 ‘책방’을 낸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예수교 책’을 팔 수 없어 교인 ‘임씨’를 통해 포목점을 내고 한 구석에 중국에서 들여온 한문 ‘서학서’(西學書)와 한글 전도 책들을 놓고 팔았습니다. ‘책’을 통한 전도는 주효했습니다. 선교사 전킨의 보고입니다. “(1905년) 2월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교회에 고위층 두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뒷골목으로 해서 교회에 왔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에 포사이드 박사가 부상을 입었고 저명한 이씨 집안 사람들이 휘장으로 갈라놓은 예배당 남자 석에 나타났습니다.”(The Korea Mission Field, 1905. 12.). 서문교회의 초기 역사는 단순한 개척 이야기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열매 맺는 모습을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헌신, 작은 씨앗 같은 전도, 눈물 섞인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전도서 7:22절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하였다는 것을 네 마음도 알고 있느니라”
본절은 21절의 권면을 뒷받침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모든 말에 마음을 둘 필요가 없는 이유는, 우리 역시 종종 남을 비방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말로 실수하고, 감정에 흔들리며, 때로는 상처 주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말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지 못하는 모순입니다. 비록 본절의 ‘저주’가 불평이나 투덜거림을 의미한다 해도, 입 밖에 나온 말은 죄가 됩니다. 전도자는 이러한 인간의 보편적 부패성과 연약함을 자기 성찰을 통해 바라봅니다. 자기 성찰은 인격 성숙의 중요한 과정이며, 관용을 낳는 어머니입니다. 베드로의 부인 사건이 좋은 예입니다. 그는 여종 앞에서 저주까지 하며 주님을 부인했지만, 곧바로 밖에 나가 통곡했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경고하신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가장 먼저 베드로를 찾아오셨고, 다시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은혜를 잊지 않았고, 그 경험은 그를 관용과 겸손을 갖춘 사도로 빚어냈습니다. 관용과 겸손은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질이며, 주님은 우리의 실패와 용서를 통해 이 자질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실패 앞에서 지나치게 낙망하지는 말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는 말씀 역시 간직하며 겸손히 살아야 합니다. 전도자는 20–22절을 통해 말합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다. 그러므로 타인의 말에 마음을 두지 말라. 너도 같은 실수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자기 성찰은 겸손을 낳고, 겸손은 관용을 낳습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길입니다. “사람이 분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은 그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자기의 영광이니라.”(잠언19:11).
전도서 7:23절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 하였도다”
본절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해 보았다”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이 모든 것”은 앞선 7:1–22 전체를 말하며, 동시에 전환적 표현입니다. 전도자는 자신의 탐구가 지혜에 의해 이끌린 실험적 탐구임을 다시 확인합니다(1:13; 2:3). 그는 인생의 복잡함과 불공평함, 인간의 불완전성을 지혜로 살펴본 뒤, 다시 한 번 “지혜를 얻고자 결심했다”고 말합니다.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는 표현은 강한 의지를 담은 동사형으로, 그의 결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결심은 곧 한계에 부딪힙니다. 전도자는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지혜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완전한 지혜에 도달할 수 없음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인정이 지혜의 문턱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깊이와 높이를 가짐으로 겸손은 핅수적입니다. 비록 지혜는 유산처럼 유익하기에 반드시 추구해야 하나, 동시에 완전히 붙잡을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사실 이 깨달음 자체가 지혜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조급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히 배우려는 자세가 참된 지혜의 길입니다. 욥은 경건한 삶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고난을 겪고 매우 혼란스러워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창조의 지혜를 드러내시자,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내가 깨닫지 못하던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라는 회개를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안 욥은 비로소 참된 지혜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1:7).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스르엘 성
열왕기하10:1절
“아합의 아들 칠십 명이 사마리아에 있는지라 예후가 편지들을 써서 사마리아에 보내서 이스르엘 귀족들 곧 장로들과 아합의 여러 아들을 교육하는 자들에게 전하니 일렀으되”
이스르엘은 아합 왕조의 실제 권력 중심지였습니다. 아합의 왕궁은 사마리아에도 있었지만, 이스르엘에는 별도의 거대한 왕궁과 군사 요새가 존재했습니다. 따라서 아합 왕조의 핵심 귀족·관리·군 지휘관 상당수가 이스르엘을 기반으로 활동했으며, 나봇의 포도원 사건도 이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를 입증하는 아합 시대 때 건설된 거대한 요새가 아랍어로도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의 어원이 남겨져 있었던 지린이라 불리는 유적지 근처에서 발굴되었습니다(1987년). 289×157m의 직사각형 궁전은 모나게 잘 다듬은 돌을 쌓아 기초를 만들어 건축한 성벽은 물론, 성벽의 각 모서리에는 망대가 있었고 성벽을 둘러 폭 8∼12m, 깊이 6.5m의 해자가 파져 있었습니다. 해자는 성벽을 둘러 웅덩이를 파 주로 물을 붓고 악어 같은 짐승을 풀어 놓아 적들이 성벽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하는 방어용 구조입니다. 망대와 해자를 통해 이 성이 상당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9세기 말 예후의 시대에 아람왕 하사엘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공격 앞에서 멸망하였습니다. 본절의 “아합의 아들들을 교육하는 자들”이란 표현은 의미심장합니다. 한 세대의 죄는 다음 세대의 성품 속에 저장됩니다. 아합의 죄에는 경건한 자녀들을 양육하지 못한 부분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무엇을 성공이라 가르치고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입니까, 아니면 생존과 권력입니까? 참된 안전은 주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언18:10).
세상과 신자(3)
창세기 49:8절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본절은 야곱의 유언 중 유다와 그 후손에 관한 대목입니다.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는 ‘찬송’이란 뜻이나 그의 삶은 ‘찬송’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는 요셉을 은 20량에 팔아넘긴 뒤, 아버지에게는 거짓말을 하여 22년 동안 슬픔 속에 살게 했습니다. 이후 가나안 사람과 사귀고 타락한 문화에 물든 그의 자녀들은 일찍 죽었으며, 며느리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와 수치스러운 관계를 맺는데 헷족속의 관습입니다. 그의 인생은 죄와 무너짐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한 유다를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선택하여 다윗 왕조와 그리스도를 일으키셨습니다. 즉 그의 가장 어두운 순간 속에서 베레스가 태어났고, 베레스의 계보에서 다윗,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이같이 유다의 죄와 실수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막지 못했고, 그 실패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더 깊이 드러났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유다와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실패하고, 무너지고, 부끄러운 선택을 할 때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끝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죄를 심판하시나, 동시에 구속의 길을 여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유다의 이야기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를 통해서도 구원의 길을 여신다.” 따라서, 우리는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그분 앞에 겸손히 돌아오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