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6/5/11-15)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누가복음 13:21절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1905년) 2월 처음으로 교회에 고위층 두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뒷골목으로 해서 교회에 왔습니다. 후에 포사이드 박사가 부상을 입었고 저명한 이씨 집안 사람들이 휘장으로 갈라놓은 예배당 남자 석에 나타났습니다…그 결과 따뜻한 봄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전킨의 보고에 나온 두 사람은 10년 동안 관직에 있던 관리출신과 구한국 부대 장교 출인이었습니다. 이어서 ‘저명한 이씨 집안’ 사람들과 “김 주사, 이 주사”로 불리던 양반들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교회를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선교사를 “양대인”(洋大人)이라 부르면서 신변 보호를 받으러 나오는 교인들도 생겼는데, 그 결정적 계기가 ‘포사이드 사건’입니다. 1904년 9월에 내한한 포사이드는 곧바로 전주로 내려와 서원고개 언덕에 시약소를 차렸습니다. 그가 ‘저명한 이씨 집안’에 왕진을 간 것은 1905년 3월 11일입니다. 포사이드는 ‘강도’를 만나 중상을 입은 집 주인을 치료하고 그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그날 밤 ‘강도들’이 또 들이닥쳐 포사이드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혹자는 ‘강도들’은 의병들로서 일진회에 우호적인 ‘부자 양반’을 응징하였고, 그를 치료하러 간 ‘검은 양복’의 포사이드를 일본 경찰로 오인하여 공격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건 보다, 사건 다음입니다. 선교사 포사이드에 대해 감사와 송구한 마음으로 이씨 집안에서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고, 그 아들 중 이보한은 완전히 개종합니다. 실로 포사이드의 선행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6:10).

전도서 7:24절
“이미 있는 것은 멀고 또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전도자는 반복적 표현과 수사적 질문을 사용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이미 있는 것”이란 히브리어 완료형으로, 이미 일어났고 지금도 지속되는 하나님의 섭리를 가리킵니다. 그 안에는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만물의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멀고 또 깊고 깊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삼중 표현은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이해를 완전히 초월한다는 사실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깊음’은 하나님의 행위와 통치의 근간이 되는 절대적 지혜의 차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삶과 환경을 주권적으로 정하실 때, 인간은 그 앞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누가 통달하랴”라는 질문은 바로 그 사실을 선언하는 수사적 고백입니다. 이에 대한 두 가지 예증입니다. 첫째, 창조의 지혜입니다. 욥기에서 보듯이, 악어조차도 하나님의 깊은 지혜의 산물입니다. 단단한 갑옷 같은 표피, 온도에 따라 성별이 결정되는 신비로운 생태 등인데, 이것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새겨진 창조의 다양성입니다. 관리자인 우리는 겸손히 연구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둘째, 복음 속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아래 가두어 두셨는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함입니다(롬 11:32). 인간의 눈에는 이해되지 않는 방식이지만, 그 안에는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히 배우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생의 본질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혜의 시작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전도서 7:25절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연구하여 악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얼마나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전도자는 먼저 지혜의 한계를 인정한 뒤에도(7:23–24) 계속 탐구합니다. 그는 지혜와 명철을 살피며, 악이 얼마나 어리석고 파괴적인지 연구했습니다(7:25). 이것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의도적이고 철저한 탐구입니다. 지혜는 인간이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그렇다고 추구를 멈출 수 없는 가치입니다. 그 일환으로 전도자는 본절에서 악의 본질을 파헤쳤고 그 결론은 26절입니다. 26절은 악의 구체적 예—특히 유혹과 함정—를 제시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선택하라고 교훈합니다. 본절은 악은 단순한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 지혜의 반대편, 곧 어리석음과 미친 행동으로 나타남을 밝힙니다. 그러면 지혜란 무엇입니까? 지혜는 단순히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악을 악으로 미련함을 미련함으로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솔로몬은 일찍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아도니야를 처형하는 등 왕권을 확립합니다. 3년의 통치 후 그의 왕위는 견고해졌지만, 하나님이 맡기신 많은 백성들의 선악을 판단할 지혜의 부족을 절감합니다(왕상3:9). 이에 솔로몬은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자기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백성을 섬기기 위해 ‘듣는 마음’ 즉, 재판할 지혜를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후히 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웃을 살리고 세우는 지혜를 요청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후히 주실 것입니다(약1:5). 이것이 이웃 사랑이요 하나님 사랑입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1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다아낙
사사기 1:27절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다아낙(Taanach)은 이스르엘 평야 남단에 위치하며, 군사적·교역적으로 중요한 므깃도 근처의 전략적 요충지로 므낫세 지파의 성읍입니다. 지명은 ‘모래로 된 땅’이란 뜻이며, 여호수아가 정복한 가나안 31개 왕 중 하나였고 잇사갈 지파 내에 있던 므낫세의 고립 도시입니다. 다아낙은 1966년 발굴이 시작되었고, 가나안의 종교적 모습을 잘 묘사하는 제대(祭臺)가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습니다. 발굴된 제대는 주전 10세기로 추정되는 점토를 빚어 만들어졌고, 높이 53센티이며 모두 4층입니다. 여러 가지 종교적 형상들이 묘사되어 있고 꼭대기 부분이 안으로 살짝 움푹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제물을 올렸거나 제수를 담았던 것 같습니다. 제대는 마치 가나안 신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비록 4층으로 되어 있으나 이를 평면으로 재배치한다면 1층부터 입구로 보고 성소를 지나 마지막 신전의 가장 대표적인 신의 형상이 서 있는 곳까지 도착하는 구조로 볼 수 있습니다. 다아낙 제대의 존재는, 가나안 문화가 어떤 것이었는지, 그것이 왜 철저히 제거되어야 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실로 가나안의 우상 문화는 사사기 전체를 흔드는 영적 타락의 근원입니다. 이스라엘은 반복해서 넘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습니다. 이는 개인의 축복을 하나님의 계명보다 앞세운 결과입니다만, 진정한 복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언22:4).

세상과 신자(4)
창세기 44:33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본절은 유다가 애굽총리 요셉에게 베냐민 대신 자신이 종이 되겠다는 간곡한 요청입니다. 이전에 유다는 다른 형제들과 같이 아버지 야곱의 요셉에 대한 ‘편애’를 질투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팔고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유다는 두 아들을 잃었고, 뜻하지 않게 근친상간의 죄까지 저질러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의 고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지금 막내 동생 베냐민이 노예로 전락하는 갈림길에서 서자, 더 이상 불효하지 않도록 결단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효와 형제 사랑 계명의 선택입니다. 유다의 진정은 조모를 섬기고자 하는 이밀의 진정표보다 훨씬 숭고하며, 진정표의 일반계시에 비추어 탁월한 특별계시의 교훈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계명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결과 사랑의 열매를 많이 맺게 되며, 주님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리시고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로 발견됩니다. 한편, 22년 전 19살 유다는 곤경에 처한 이복동생 요셉을 미워하여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22년 후 41살의 유다는 요셉에 의해 똑같은 시험을 받지만, 자신을 희생하여 훌륭하게 통과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의 시험에서 실패하면 하나님은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계명을 통과하는 여부를 궁궁하게 여기십니다. 모두 주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축복을 갖기 바랍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