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11/24-28)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교자 손양원 목사(3)
데살로니가전서 1:3절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1939년 7월부터 ‘손양원 목사’의 ‘애양원 목회’가 시작됨과 함께 새 바람이 불었습니다. 마스크를 벗는 직원들이 늘어났고 애양원 환자들도 그런 직원을 신뢰하였습니다. 나병을 겁 내지 않는 청년 목사는 신사참배 역시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1940년 9월 25일 수요 예배 후, 형사에게 연행되어 그의 애양원 목회는 1년 만에 중단되었습니다.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이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습니다. 형의 만기가 되자 검사는 석방 조건으로 ‘사상 전향’을 요구하였습니다: “덴꼬(轉向)해야 나갈 수 있다.” 그의 대답은 간명했습니다: “당신에겐 덴꼬가 문제지만 내게는 ‘신꼬’(信仰)가 문제다” 그의 출소는 8·15 해방 후로 미루어졌습니다. 성결교단에서 존경 받는 이명직 목사님은 성결의 체험(1920년)을 바탕으로 교단에 큰 부흥을 가져 왔으나 신사참배에는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손양원 목사님은 신앙인의 참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의 큰 아들(손동인)이 면회를 왔을 때도 신사참배만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손동인은 형사의 설득을 통해 이미 신사참배를 한 뒤였기에, 깊은 죄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후에 그의 죽음(순교)으로 이끈 원인이었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사랑을 통해 움직여야 합니다(갈5:6).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붙잡아 주신 그 주님의 온전하심은 좋은 본보기입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21:19).

전도서 5:14절
“어떤 사람은 재난을 만나서, 재산을 다 잃는다. 자식을 낳지만, 그 자식에게 아무것도 남겨 줄 것이 없다.”(새번역)

본절은 ‘부의 불안정성’을 다룹니다. 부자가 힘써 지켰던 재물을 잃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방면에서 타격을 입을 것이며, 그 영향은 자식에게까지 미칩니다. 재물을 잃는 원인 중 본절은 ‘재난’을 제시합니다. ‘재난’의 원어는 ‘고통스런 일’이란 의미입니다. 이를 재물의 관점에서 보면, ‘잘못된 투자’, ‘잘못된 모험’, ‘악한 재난’ 등을 말합니다. 갑자기 강도떼나, 큰 폭풍과 같은 자연 재해로 재산을 모두 잃어버린 욥의 경우나, 공산주의가 중국과 북한을 점령하여 예기치 않게 모든 재산을 잃은 분들이 그 예입니다. ‘다 잃는다’라고 번역된 ‘아바드’는 ‘멸망하다’라는 의미로써,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재산을 모두 상실했음을 강조합니다. 후단은 ‘그 자식에게 아무것도 남겨 줄 것이 없다’로 그 비극적 결과를 표현합니다. 수고는 하지만 상속인이 없는 상황도 문제이나(2:18), 아들을 낳았지만 모두 잃어 물려줄 재산이 없는 처지 역시 참담합니다. 재물은 이렇게 불안정하므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필요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선한 일에 힘 쓰라는 것이 본절의 교훈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것은 자녀들이 복을 받는 비결임을(시편37:26), 바울은 ‘장래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기반)’를 쌓는 길임을 밝힙니다(딤전6:19). 재물은 주님이 주셔야 합니다. 따라서, 노력하되 주님 안에서 노력하고,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시면 이런 교훈들을 간직해야 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딤전6:17).

전도서 5:15절
“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본절 서두의 ‘그’는 재산을 모두 상실한 14절의 그 부자를 지칭합니다. 그는 부를 쌓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재난을 당하자 그의 수고는 헛되었습니다. 그러나 본절은 재산 상실보다 더 무서운 사망을 생각합니다. 사망은 전도서 전체에 걸쳐 솔로몬을 사로잡는 주제입니다. 지금 전도자는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1:21a)는 욥기의 시적이며 처절한 고백을, 산문으로 담담하게 재진술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벌거벗은 아기로 이 세상에 도착했을 때, 자신의 소유라고 할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이윽고 성장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더라도 같은 상태로 세상을 떠납니다. 재물을 위해 모든 것을 쏟은 부자에게는 매우 ‘불행한 일’이며, 불공평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절대 강자의 결정입니다: “너는 아무 것도 취할 수 없다.” 그렇다면,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그 사람은 더 큰 허무를 절감하게 되니 인생의 큰 역설이 여기 존재합니다. 부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삶과 가정을 독립적으로 영위할 정도의 재산은 꼭 필요합니다. 다만, 재산을 모을수록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인간이 스스로 다스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반드시 다가오며,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멈추어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 뇌물처럼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늘 마음을 초상집에 두고(전 7:4), 덕을 베풀며 가난한 이웃이 없는지 살펴봅니다 “저가 흩어 가난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롭게 들리리로다.”(시편112:9).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가버나움(1)
마태복음 11:23a절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쪽 해변에 위치한 ‘크파르 나훔’이라는 유적지입니다. ‘크파르 나훔’은 히브리어로, ‘나훔의 마을’을 뜻합니다. 주전 2세기부터 유대인들이 정착하였기 때문에 구약의 나훔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이 이름은 후대에도 이어져 아랍어로 ‘탈훔(=훔의 폐허 언덕)’이라 불려져 왔기 때문에, 1830년대 성서학자 에드워드 로빈슨이 쉽게 가버나움을 찾았습니다. 19세기 후반에 프랑스 수도사들이 발굴에 착수하여 신약 및 비잔틴 시대의 유적을 발견하였으나, 본격적 발굴은 20세기 초반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발굴을 통해 회당, 집터, 그리고 베드로의 집으로 알려진 교회터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원래 예수님은 나사렛이란 시골에서 자라나셨습니다. 그러나 침례를 받으신 후, 예수님의 가족은 가버나움으로 이사하셨고, 가버나움은 선교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특히,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을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곧이어 베드로의 집에 머물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십니다(막1:21-29).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많은 기적과 말씀을 경험한 도시이나, 고라신과 벳새다처럼 회개하지 않았고, 오병이어의 표적을 경험한 제자들조차 회당에서 선포된 말씀 앞에서 예수님을 떠난 곳이기도 합니다(요 6:66). 가버나움은 상업, 농업, 어업 모두 번창한 국제적 도시였으므로, 사람들은 부유하고 종류 또한 다양해서 영적 무감각과 교만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회개와 순종이 없다면, 가버나움처럼 책망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전6:1).

그리스도인의 감사
데살로니가전서 5:18절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본절에서 ‘범사凡事’의 사전적인 뜻은 “모든 일 혹은 상황”이란 의미입니다. ‘범’은 모두 ‘범’자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후단의 ‘이것’이란 ‘항상 기뻐하라’(16), ‘쉬지말고 기도하라’(17), ‘범사에 감사하라’(18a)를 모두 지칭하는지, 아니면 ‘범사에 감사하라’만을 지칭하는지 다툼이 있지만, 후자라고 보는 것이 문법상· 문맥상 타당합니다. 그 만큼 감사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때 세상적인 여러 감사도 마땅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감사, 즉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에 대한 감사가 제일 중요하고, 또 영원합니다. 이 은혜가 감사의 영적 기원으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가름하는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자, 당신과 예수 믿는 우리 사이에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더구나,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 하시니 이 보다 더 감사하고 기쁠 수가 없습니다(롬8:31-39). 그래서 성경은 걱정 근심이 되는 모든 것들- 가정, 직장, 자녀, 직업, 재산, 건강, 결혼, 질병 등 -을 주님께 던져 버리라 명령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 짐을 하나님께 맡기면 만유를 아버지께 상속받은 주님이 책임지고 해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벧전 5:7).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 살아갈 때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주신 근거입니다. 모든 환경에서 주님을 신뢰하면 주님이 인도하십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3:6).

매일묵상(2025/11/17-22)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교자 손양원 목사(2)
마태복음 8: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1936년 손양원 전도사가 사경회를 인도할 당시, 애양원 교회를 담임하던 분은 김응규 목사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애양원 규칙을 지켰고 행여나 애양원 환자나 직원이 그 규칙을 어길까 감시하여서, 환자들은 그를 ‘김 목사’가 아니라 ‘김 감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사경회가 끝난 후 바뀐 교회 분위기 때문에 김 목사의 애양원 목회는 힘들게 되었습니다. 결국 1938년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나면서 그는 교회를 떠났습니다. 애양원을 운영하던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병원을 폐쇄해도 신사참배는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고, 노회는 신사참배를 수용하였기에 양자 사이에서 곤란을 느끼던 중 제주도에 교회가 나서 임지를 옮겼던 것입니다. 한편, 손양원 전도사는 교회를, 애양원 교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분을 구하였기에, 더구나 사경회 때 교인들이 은혜를 많이 받아 청빙이 성사되었습니다. 그러나 손 전도사의 나환자 목회는 애양원이 처음이 아니라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이 하던 상애원이란 나환자 요양원에서 한 달간 봉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겁이 나서 ‘냄새가 안 나게 코를 막아 달라’고 기도했지만, 은혜를 받은 후부터 겁없이 환자들을 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선교사들은 어떻게 이국 땅의 나환자들을 돌볼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과 나환자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의학에 대한 지식 이 두 가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값없이 받는 은혜의 결과요 후자는 주님을 본받아 섬기려고 하는 우리 노력의 산물입니다. “(천국은)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눅13:18).

전도서5:12절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

전도자는 세 구절에 걸쳐 부의 문제점을 제시합니다. 첫째, 사람은 재물로 만족을 얻지 못한다(5:10). 둘째, 부유한 사람은 그 부를 온전히 누리기 어렵다(5:11). 셋째, 부요함은 오히려 불면의 원인이 된다(5:12). 불면의 이유가 걱정이든 소화불량이든 중요하지 않지만, 전도자는 부자가 재산을 늘리려는 욕망이나 상실의 두려움에 잠 못이룬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반면, 노동자는 부유하지 않아도 깊은 잠을 잡니다. 이는 부의 역설로서, “우유를 배달받아 먹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말로 표현됩니다. 신자는 사람들이 갈망하는 재물이 오히려 평안을 방해할 수 있음을 갈파는 본절의 지혜를 간직해야 합니다. 물론 가난도 고통이지만, 성경은 오히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란 ‘가난하나 경건한 자’를 말합니다. 가난 자체는 좋은 것이 아니지만, 가난해도 경건한 자는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성실히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그를 붙드시고 항상 돌보아주십니다. 넉넉하지는 못해도 언제나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삶의 중심에 놓으므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는 축복을 저절로 받게 됩니다. 부자는 재물을 의지하고 잠 못이루지만, 그리스도인은 재산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잠을 달게 잡니다.” 신앙생활의 은밀한 축복입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편127:2).

전도서5:13절
“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

전도자는 부를 인생의 목표로 삼을 될 경우 빠지는 함정을 경고합니다: ① 부는 중독적이지만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10) ②부는 인간 기생충(?)들을 끌어당기나, 그들은 평안을 주지 못한다(11a) ③부는 쓰임이 없을 때, 단지 눈요기일 뿐이다(11b) ④ 부 때문에 부자는 잠 못 이룬다(12) ⑤ 부를 사랑하여 모은 재산은 해를 끼친다(13). 14절과 15절에서는 부의 해악 두 가지- 부의 불안정성과 사망에 따른 무익- 를 더 언급하나, 오늘은 13절의 ‘폐단’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부자의 비극은 그가 사랑하여 모아둔 돈 자체 때문에 발생합니다. 로버트 고디스는 이 문제를 잘 지적합니다: “부를 지키는 것은 불안과 근심을 수반한다.” 재물은 삶에 유익을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부자의 돈은 쓰이지 않고 쌓일 뿐이어서, 단지 소유했다는 만족감만 남습니다. 결국 더 많은 재물을 탐하고, 가진 것을 지키려는 근심만 커질 뿐입니다. 그 결과 ‘자기에게 해가 된다’는 ‘큰 폐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마 부자는  경제적 변동으로 인해 부의 가치 저락, 혹은 강도나 도둑에 대한 근심, 혹은 돈으로 인한 가족 간의 재산다툼, 혹은 빌게이츠처럼 이름을 남기는 데 관심이 커서 평안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 형과 유업을 나누어 달라는 동생에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도다”(눅12:15)라고 교훈하신 것도 이때문입니다. 아굴의 기도입니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언30: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고라신(2)
마태복음 23:2,3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회당은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에 세워진 종교 및 공동체 중심지이며, 성전이 파괴된 이후 기도와 구약 연구의 장소로 기능하였습니다. 바빌론 포로기 무렵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가장 오래된 회당은 그리스 델로스 섬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회당은 기둥과 벤치 구조를 갖추었고, 회당장이 의식을 주관하였습니다. 신약 시대에서도 회당은 기도, 예식, 재판, 정치 모임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한 중요한 공간이었습니다. 회당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활동은 토라, 즉 구약의 율법서를 읽고 토론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주 회당에서 토라를 읽고 가르치셨으며, 사도들도 이 전통을 따라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토라는 회당의 높은 단상에서 읽혔고, 강론과 토론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지도자들이 이끌었습니다. 고라신 회당에서는 실제로 ‘모세의 자리’라 새겨진 의자가 발견되어 성경의 기록을 뒷받침합니다. 또한 이 회당에는 유대 전통과 달리 동물 형상과 메두사 조각 등이 있어 예수님의 고라신에 대한 책망을 떠올리게 합니다. 400년 만에 등장한 선지자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언한 사건은 온 유대 사회를 흔들었습니다. 더구나 고라신 주민들은 예수님의 많은 기적을 목격했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기적이나 체험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복음에 순종하며 삶의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참된 증거입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5).

그리스도인의 정체성(4)
에베소서 4: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복음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바른 정체성을 가집니다. 복음은, “몸이 하나고, 성령님도 한 분,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고, 주님도 한 분, 믿음도 하나, 침례도 하나, 하나님도 한 분으로, 만유의 아버지시이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다”라는 고백을 담고 있는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그 고백이 현실의 삶을 돕고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 각 자에게 주신 은사를 활용해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재주나 지식들은 남을 돕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교회를 세우는 은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언이나 방언 기적행함 등의 은사가 있기는 하지만 큰 흐름을 보면 그렇습니다. 축구 선수가 복음을 받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면, 그의 뛰어난 축구 실력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은사로 쓰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준비되어야 하며, 목사의 가르침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주어진 은사를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사랑으로 섬기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청지기’란 우리의 다섯 번째 정체성입니다(벧전2:10-11). 선한 청지기’는 선한 일에 능숙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공자의 말은 도움이 됩니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즐거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선한 일에 능숙해 지고 또 지혜롭게 됩니다(시37:30).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딤후3:17,새번역).

매일묵상(2025/11/17-21)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교자 손양원 목사(2)
마태복음 8: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1936년 손양원 전도사가 사경회를 인도할 당시, 애양원 교회를 담임하던 분은 김응규 목사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애양원 규칙을 지켰고 행여나 애양원 환자나 직원이 그 규칙을 어길까 감시하여서, 환자들은 그를 ‘김 목사’가 아니라 ‘김 감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사경회가 끝난 후 바뀐 교회 분위기 때문에 김 목사의 애양원 목회는 힘들게 되었습니다. 결국 1938년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나면서 그는 교회를 떠났습니다. 애양원을 운영하던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병원을 폐쇄해도 신사참배는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고, 노회는 신사참배를 수용하였기에 양자 사이에서 곤란을 느끼던 중 제주도에 교회가 나서 임지를 옮겼던 것입니다. 한편, 손양원 전도사는 교회를, 애양원 교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분을 구하였기에, 더구나 사경회 때 교인들이 은혜를 많이 받아 청빙이 성사되었습니다. 그러나 손 전도사의 나환자 목회는 애양원이 처음이 아니라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이 하던 상애원이란 나환자 요양원에서 한 달간 봉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겁이 나서 ‘냄새가 안 나게 코를 막아 달라’고 기도했지만, 은혜를 받은 후부터 겁없이 환자들을 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선교사들은 어떻게 이국 땅의 나환자들을 돌볼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과 나환자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의학에 대한 지식 이 두 가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값없이 받는 은혜의 결과요 후자는 주님을 본받아 섬기려고 하는 우리 노력의 산물입니다. “(천국은)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눅13:18).

전도서5:12절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

전도자는 세 구절에 걸쳐 부의 문제점을 제시합니다. 첫째, 사람은 재물로 만족을 얻지 못한다(5:10). 둘째, 부유한 사람은 그 부를 온전히 누리기 어렵다(5:11). 셋째, 부요함은 오히려 불면의 원인이 된다(5:12). 불면의 이유가 걱정이든 소화불량이든 중요하지 않지만, 전도자는 부자가 재산을 늘리려는 욕망이나 상실의 두려움에 잠 못이룬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반면, 노동자는 부유하지 않아도 깊은 잠을 잡니다. 이는 부의 역설로서, “우유를 배달받아 먹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말로 표현됩니다. 신자는 사람들이 갈망하는 재물이 오히려 평안을 방해할 수 있음을 갈파는 본절의 지혜를 간직해야 합니다. 물론 가난도 고통이지만, 성경은 오히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란 ‘가난하나 경건한 자’를 말합니다. 가난 자체는 좋은 것이 아니지만, 가난해도 경건한 자는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성실히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그를 붙드시고 항상 돌보아주십니다. 넉넉하지는 못해도 언제나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삶의 중심에 놓으므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는 축복을 저절로 받게 됩니다. 부자는 재물을 의지하고 잠 못이루지만, 그리스도인은 재산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잠을 달게 잡니다.” 신앙생활의 은밀한 축복입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편127:2).

전도서5:13절
“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

전도자는 부를 인생의 목표로 삼을 될 경우 빠지는 함정을 경고합니다: ① 부는 중독적이지만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10) ②부는 인간 기생충(?)들을 끌어당기나, 그들은 평안을 주지 못한다(11a) ③부는 쓰임이 없을 때, 단지 눈요기일 뿐이다(11b) ④ 부 때문에 부자는 잠 못 이룬다(12) ⑤ 부를 사랑하여 모은 재산은 해를 끼친다(13). 14절과 15절에서는 부의 해악 두 가지- 부의 불안정성과 사망에 따른 무익- 를 더 언급하나, 오늘은 13절의 ‘폐단’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부자의 비극은 그가 사랑하여 모아둔 돈 자체 때문에 발생합니다. 로버트 고디스는 이 문제를 잘 지적합니다: “부를 지키는 것은 불안과 근심을 수반한다.” 재물은 삶에 유익을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부자의 돈은 쓰이지 않고 쌓일 뿐이어서, 단지 소유했다는 만족감만 남습니다. 결국 더 많은 재물을 탐하고, 가진 것을 지키려는 근심만 커질 뿐입니다. 그 결과 ‘자기에게 해가 된다’는 ‘큰 폐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마 부자는  경제적 변동으로 인해 부의 가치 저락, 혹은 강도나 도둑에 대한 근심, 혹은 돈으로 인한 가족 간의 재산다툼, 혹은 빌게이츠처럼 이름을 남기는 데 관심이 커서 평안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 형과 유업을 나누어 달라는 동생에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도다”(눅12:15)라고 교훈하신 것도 이때문입니다. 아굴의 기도입니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언30: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고라신(2)
마태복음 23:2,3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회당은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에 세워진 종교 및 공동체 중심지이며, 성전이 파괴된 이후 기도와 구약 연구의 장소로 기능하였습니다. 바빌론 포로기 무렵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가장 오래된 회당은 그리스 델로스 섬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회당은 기둥과 벤치 구조를 갖추었고, 회당장이 의식을 주관하였습니다. 신약 시대에서도 회당은 기도, 예식, 재판, 정치 모임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한 중요한 공간이었습니다. 회당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활동은 토라, 즉 구약의 율법서를 읽고 토론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주 회당에서 토라를 읽고 가르치셨으며, 사도들도 이 전통을 따라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토라는 회당의 높은 단상에서 읽혔고, 강론과 토론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지도자들이 이끌었습니다. 고라신 회당에서는 실제로 ‘모세의 자리’라 새겨진 의자가 발견되어 성경의 기록을 뒷받침합니다. 또한 이 회당에는 유대 전통과 달리 동물 형상과 메두사 조각 등이 있어 예수님의 고라신에 대한 책망을 떠올리게 합니다. 400년 만에 등장한 선지자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언한 사건은 온 유대 사회를 흔들었습니다. 더구나 고라신 주민들은 예수님의 많은 기적을 목격했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기적이나 체험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복음에 순종하며 삶의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참된 증거입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5).

그리스도인의 정체성(4)
에베소서 4: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복음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바른 정체성을 가집니다. 복음은, “몸이 하나고, 성령님도 한 분,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고, 주님도 한 분, 믿음도 하나, 침례도 하나, 하나님도 한 분으로, 만유의 아버지시이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다”라는 고백을 담고 있는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그 고백이 현실의 삶을 돕고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 각 자에게 주신 은사를 활용해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재주나 지식들은 남을 돕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교회를 세우는 은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언이나 방언 기적행함 등의 은사가 있기는 하지만 큰 흐름을 보면 그렇습니다. 축구 선수가 복음을 받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면, 그의 뛰어난 축구 실력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은사로 쓰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준비되어야 하며, 목사의 가르침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주어진 은사를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사랑으로 섬기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청지기’란 우리의 다섯 번째 정체성입니다(벧전2:10-11). 선한 청지기’는 선한 일에 능숙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공자의 말은 도움이 됩니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즐거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선한 일에 능숙해 지고 또 지혜롭게 됩니다(시37:30).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딤후3:17,새번역).

매일묵상(2025/11/10-14)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교자 손양원 목사
고린도후서 2:15절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새번역)

“(1936년)음력 6월인가 사경회를 하기로 하고 강사를 고르는디…평양신학교에 손양원이란 청년 전도사가 있는디 별명이 ‘손 불덩어리’라고 능력이 많다는 거요. 그래서 그분을 초청해서 사경회를 하게 되었는디 아닌게 아니라 첫날부터 대단했어.”(김수남) 그러나, 손양원 전도사의 행동은 더 큰 화제였습니다. 그 당시 외부 사람은 철저한 검사와 흰가운· 흰 모자· 장갑· 마스크를 하고 눈만 내놓고 애양원에 들어왔으며, 균이 공기를 통해 전염된다는 오해로 예배당 안조차 유리 칸막이로 환자석과 직원석이 구분되었습니다. 손양원은 마스크와 장갑을 벗어 던지고, “나환자들을 구하려면 환자들 속으로 들어가야지 병이 무섭다고 마스크를 한다면 누가 마음 문을 열겠소?” 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나환자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설교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반면, 유리창 안의 흰 옷 입은 사람들에겐 ‘침례 요한’의 외침이었습니다. 인간의 매사가 그렇습니다. 정책이나 메시지가 자신들과 맞으면 감동을 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반대하기 마련입니다. 이때 자신의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권력을 잡는 기술자들이 정치가들이고, 사랑으로 섬기는 기회로 삼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님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베풀자 군중들로부터 왕으로 추대받았으나 오히려 제자들을 먼저 보내시고 무리들을 해산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전도서 5:10절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존 록펠러에게 어느 기자가 물었습니다. “지금 많은 재산을 갖고 계신데 어느 정도면 만족하겠습니까?” 그는 “조금만 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본절은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으로 만족하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이는 아무리 부해도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망 때문입니다. 문제는 인간의 마음은 끝없는 욕망을 품고 더 많은 것을 추구하나, 그 끝은 허무입니다. 재산은 긍정과 부정의 양 측면이 있습니다. 잠언은 부를 하나님의 선물이란 긍정적인 측면을, 전도서는 부 자체는 궁극적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현실을 통찰합니다. 결국 문제는 돈이 아니라, 돈을 향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부는 공허를 낳지만, 하나님 안에서의 부는 감사와 나눔의 통로입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 때문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르지 못하나, 바울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4:11)라며 환경을 초월한 만족을 고백하는데, 그 자신이 터득한 삶의 지혜입니다. 바울은 때를 따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여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재물의 종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안에서 자유와 만족을 누릴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참된 만족은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참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경건이며, 경건을 뒷받침하는 자세가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를 추구하기보다, 주어진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서의 교훈입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620).

전도서5:11절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10절은 ‘돈에 대한 사랑’이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함을, 11절에서는 부의 증가는 관리 비용을 증가시킬 뿐 소유주의 몫은 지켜보는 것뿐임을 밝힙니다. 따라서, 그 결론은 역시 허무입니다. 부의 증가가 곧 행복의 증가는 아닙니다. 재물이 늘어나면 그것을 나누어 쓰는 사람도 늘어나고, 관리와 염려도 함께 커집니다. 주인은 단지 그것을 바라보며 만족하려 하지만, 실제로 누리는 기쁨은 제한적입니다. 이는 지혜와 부를 동시에 가졌던 솔로몬이 체득한 고백이므로, 무한경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교훈을 간직해야 합니다. 부자는 많은 이해관계자에게 둘러싸여 있고 부가 커지면 이해관계자들은 더욱 많아집니다. 그러나 부자가 가장 신경써야할 이해관계자는 그 재산을 맡기신 하나님입니다. 이를 간과하면 재산이 아니라 더 중요한 생명을 빼앗깁니다. 누가복음(12:16-21)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자가 그렇습니다. 그는 밭의 소출이 많아지자 곡간을 크게 짓고 안심하려 했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거두셨을 때 재물은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재산은 인격 만큼만 가지라”고 하는데, 저는 노력한 만큼 벌고 생활하는 자족의 삶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재물도 중요하지만 그 재물을 주신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신 것을 감사히 누릴 줄 알 때, 재물은 허무가 아니라 축복의 도구가 됩니다. 전도서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재물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 안에서 자족과 감사의 삶을 배우라는 교훈입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2:15).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고라신(1)
누가복음 10:13절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고라신은 갈릴리 호수 북쪽, 가버나움에서 동북쪽으로 약 3.2㎞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 가버나움·벳새다와 함께 ‘복음의 삼각지역’ 혹은 ‘저주의 삼각지대’로 불립니다. 1962~64년 발굴된 유적은 주후 3~4세기경 현무암으로 지어진 건축물들이며, 도시 면적은 약 10만㎡에 달합니다. 재료는 갈릴리 지역에서 흔한 화산석 현무암입니다. 중심 회당을 기준으로 5구역으로 나뉘었고, 유대인의 정결례 장소인 미크베가 발견되어 유대인 거주지였음을 보여줍니다. 유적지 도처에서 발견되는 올리브기름 압착 돌은 고라신 사회에서 올리브 기름이 차지한 경제적 중요성을 알려줍니다. 발굴된 회당은 갈릴리 전형 양식으로 두 줄의 기둥들이 세워져 전체 건물을 세 부분으로 나누는 바실리카 구조입니다. 세 개의 입구 중 중앙이 가장 크고, 벽면에는 돌 의자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회당은 주후 4세기에 파괴 후 6세기에 재건되었습니다. 고라신의 유적은 화려한 종교적 흔적을 남겼지만, 결국 “저주의 도시”로 기억됩니다. 이는 예수께서 오셔서 구약에 기록된 많은 이적을 베풀어 당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약속된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였으나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건물이나 제도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회개와 순종에 있습니다. 많은 은혜와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책임이 무겁습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 경고합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들이 좋은 예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그리스도인의 정체성(3)
에베소서 4: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성령님도 한 분이시며, 그분에 의해 형성되는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도 하나입니다. 우리는 모두 몸의 부활이란 의의 소망을 향하여,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교회의 일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네 번째 정체성입니다. 성령님의 인도란 무슨 의미일까요? 먼저, ‘인도하다’는 헬라어 ‘아고’의 번역입니다. 바울의 호송을 책임맡은 베뢰아 형제들이 “그를 데리고(=아고) 아덴까지”(행17:15) 갔을 때의 묘사처럼,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신자의 삶을 이끌고 계십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신자에게는 ‘선한 자(의인)가 받는 생명의 부활’(요5:29)입니다. 타락한 인류는 성령님이 중생시키고, 의의 길로 이끌어 주셔야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롬8:7,8). 그리스도인이 중생하고 죄사함 받은 표징은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이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육신이란 자기중심성을 이겨나갑니다(롬8:13). 따라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들”(롬8:14)임을 선포합니다. 그분의 인도 속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가르침, 교제, 돌보심, 도움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므로” 이미 율법을 성취하였습니다(롬13:8-10). 율법은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나, 사랑은 “도둑질하지 않는 것은 물론 네 손으로 수고하여 가난한 자를 도와라”(엡4;28)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삶은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하는 삶으로 모세율법은 불필요 합니다(갈5:18).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롬8:9후단,사역).

매일묵상(2025/11/3-7)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애양원 왕의 무덤
마가복음10:45절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새번역)

애양원은 자치였고, 원장이 2명, 환자들이 3명을 뽑은 ‘부장(部長)회의’가 사실상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이들은 치료에 관한 사항을 제외하고, 애양원에 관한 입법,행정,사법권을 행사하였습니다. 많을 때는 수용 인원이 1,700명에 이르러 각종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그때마다 부장회가 소집되어 일을 처리했으며, 자체 화폐까지 유통하였으니 ‘애양원 공화국’이라 하겠습니다. 선출된 부장들은 신앙이나 인품 면에서 존경받는 분들이어서 그 권위는 매우 컸습니다. 특히, 수석 부장은 대통령 버금가는 권위를 갖고 있다 할 정도였습니다. 가장 오랜 기간 수석 부장을 역임한 인물은 일제시대를 살아간 맹인 김태옥 장로입니다. 이분은 1909년 광주나병원이 개설됐을 때 들어온 최초 환자의 한 사람이었고, 애양원교회 장로요 ‘부장들의 우두머리’로 이곳 사람들에게는 경외의 대상이었습니다. 선교사들도 ‘성경을 줄줄 외우는’그를 존경했습니다. 1939년 별세하자 윌슨 원장은 그를 ‘애양원 지도자였고 왕이었습니다’며 추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덕주 교수가 본 무덤은 무연고자의 무덤이었으며, 건너편 손양원 목사의 무덤과는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왕은 무슨 왕···, 종이었을 따름이지”(이덕주). 생각해 보면, 나병환자요 맹인입니다. 무슨 낙이 있었겠습니까만, 김태옥 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주어진 환경에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가히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모습이며, 부활 시에 갚음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6).

전도서 5:8절
“너는 어느 지방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는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도 있음이니라”

본절은 새 주제를 성찰합니다. 빈민을 억압하고 정의를 짓밟는 학대와 강탈은 삶의 허무를 키우며, 이는 불공정한 판결과 비도덕을 드러냅니다. 주 대상은 빈민으로 표현된 약자들입니다. ‘빈민’이란 ‘라쉬’의 번역으로 돈이 없고 재산이 적은 가난한 사람들을 지칭하며, 9절을 함께 고려하면 ‘가난한 농민’을 말합니다. 전도자는 4:1-3절에서 압제받는 자들을 위로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놀라워 하였지만, 본절에서는 압제를 목격하더라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그 근거는 세 단계의 심판자들의 존재입니다: 높은 자, 더 높은 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 이 말은 관료체계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전도서의 취지에 비추어 보면 악을 행하는 관리, 그를 감찰하는 왕, 그 왕까지 감찰하시는 하나님(장엄복수)으로 이해됩니다. 결국 인간 제도의 한계를 경험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를 믿으라는 의도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 역시 동일한 질문을 제기하자 “의인 그 믿음으로 살리라”(합2:4)는 답변을 받습니다.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가 있습니다(눅18:1-8). 주님은 불의를 당하여 밤낮 부르짖는 신자의 기도가 속히 응답되심을 단언하신 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결실하여 100배, 60배, 30배의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마13:23).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5:39).

전도서5:9절
“땅의 소산물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

본절은 권력자든 평민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의존함을 상기시킵니다. 이는 곧, 땅의 소산은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선언입니다. 전도자가 언급한 ‘빈민에 대한 학대’(8)는, 종종 토지의 불법 점유에서 비롯됩니다. 잠언 23:10–11에서 경계석을 옮기는 자에 대한 경고는, 당시 사회에서 토지 소유권이 얼마나 중요한 생존의 기반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왕은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라, 정의를 보장하고 경작지를 공정하게 분배하여 모든 백성이 땅의 소출을 누리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쟁기질한 밭을 위한 왕”이라는 속담은 바로 그런 이상적인 통치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한 사건(왕하 21장)은 권력 남용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이며, 전도자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도덕과 정의만으로는 타락한 인류의 생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아담 스미스는 ‘제빵업자의 도덕심이 아니라 이기심이 내일 아침의 빵을 보장한다’고 갈파하여 이기심이 자본주의의 원동력임을 밝혔습니다. 자본주의는 생존을 보장하는 데 기여했지만, 그 이기심 때문에 병폐도 분명 존재합니다. 이때, 성경의 메시지는 자본주의의 방향을 교정하는 윤리적 나침반입니다. 예를들어, 마태복음의 포도원 품꾼 비유(20장)는,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계산을 초월하며 모든 이에게 동일한 자비를 베푸신다는 진리를 담았는데, 이 교훈을 깨닫고 이기심과 균형을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지혜롭습니다(시편119:99).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마20:1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벳새다
마태복음 11:21절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벳새다는 구약에는 보이지 않으나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BC1400 경)에 기록된 갈릴리 북쪽에 살았던 그술 사람의 주요 도시로 판단됩니다. 가나안 정복 당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술 족속과 마아갓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습니다(수13:13). 400년 뒤 다윗은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와 결혼하여 압살롬을 낳습니다(삼하3:3). 압살롬은 모친을 따라서 딸을 마아가로 짓고, 그녀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과 결혼하여 아사를 낳습니다. 그러나 아세라 목상 때문에 아사에게 폐위당하는데, 그술 출신인 할머니로부터 전수된 가나안 신앙을 답습한 것이 분명합니다(왕상15:6). 한편, 벳새다는 앗수르에게 함락되었는데(BC732), 화재로 불탄 흔적이 그대로 발굴되었고, 많은 유물 중 현무암으로 만든 석상이 특이합니다. 이 석상은 주상으로 한 쪽 면에는 두 뿔이 달린 황소가 마치 인간처럼 서 있는 모습이 조각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석상을 황소가 상징인 가나안의 천둥 번개의 신 바알 하다드로 봅니다. 벳새다는 오랫동안 작은 마을로 존재하다가 헤롯 빌립 당시에 번성하였으나 AD 70년 로마에게 멸망당합니다. 우상숭배는 뿌리뽑기 매우 어렵습니다. 다윗은 정치적 계산으로 율법이 금지한 가나안 땅 내의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아 우상숭배의 단초를 만들자, “삼사 대까지 벌하겠다”(출20:5)는 우상숭배를 금지한 제2계명은 작동합니다. 그 결과 솔로몬 때(2대) 우상숭배는 확장되고 르호보암 때(3대) 나라는 분열되었으니, 마땅히 경계해야 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5:21).


그리스도인의 정체성(2)
에베소서4: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사람들의 견해와 상관 없이 아메리카 신대륙은 늘 존재하였으나, 유럽인들은 15세기에나 알게 됩니다. 그 후 이들은 멀리 떨어진 신대륙으로 이주하고, 문명을 이루었지만, 늘 인간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는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원수이기 때문입니다(롬5:10). 인간은 자신을 우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고 막상 주인되신 하나님의 존재는 부인합니다. 특히, 인문주의자들이 그렇습니다. 시인 오인태의 ‘밥상머리 인문학”을 읽으면 그도 역시 같습니다. 신을 인정하면 그들의 모임에서 멸시를 당합니다. 그들의 자랑은 고통을 극한까지 참아내고, 모든 문제를 인간들의 연대와 노력 그리고 능력을 통해 풀어가는 것입니다. 니이체의 초인사상이 그 전형입니다. 기도는 당연히 없고, 명상만이 있을 뿐입니다. 자신들 안에 있는 초인이나 초능력을 불러와서 신이 없이도- 만약 있다면 신을 마음대로 부려서- 문제들을 해결하려 합니다. 이렇게 신이 없다는 전제가 인간 정체성의 출발점이며, 원죄입니다. 원죄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청지기직을 벗어 던지고 주인처럼 군림하려는 태도이며, 모든 죄의 원천입니다. 이는 국립공원을 구경하면서 자신의 소유로 착각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쉽습니다. 따라서, 주인의 자리를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는데,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문제해결의 시작일 뿐입니다. 죄인은 자신의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 벌은 영원한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아들께서 모두 담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마귀로부터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란 진리는 우리의 두 번째 정체성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