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애양원 왕의 무덤
마가복음10:45절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새번역)
애양원은 자치였고, 원장이 2명, 환자들이 3명을 뽑은 ‘부장(部長)회의’가 사실상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이들은 치료에 관한 사항을 제외하고, 애양원에 관한 입법,행정,사법권을 행사하였습니다. 많을 때는 수용 인원이 1,700명에 이르러 각종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그때마다 부장회가 소집되어 일을 처리했으며, 자체 화폐까지 유통하였으니 ‘애양원 공화국’이라 하겠습니다. 선출된 부장들은 신앙이나 인품 면에서 존경받는 분들이어서 그 권위는 매우 컸습니다. 특히, 수석 부장은 대통령 버금가는 권위를 갖고 있다 할 정도였습니다. 가장 오랜 기간 수석 부장을 역임한 인물은 일제시대를 살아간 맹인 김태옥 장로입니다. 이분은 1909년 광주나병원이 개설됐을 때 들어온 최초 환자의 한 사람이었고, 애양원교회 장로요 ‘부장들의 우두머리’로 이곳 사람들에게는 경외의 대상이었습니다. 선교사들도 ‘성경을 줄줄 외우는’그를 존경했습니다. 1939년 별세하자 윌슨 원장은 그를 ‘애양원 지도자였고 왕이었습니다’며 추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덕주 교수가 본 무덤은 무연고자의 무덤이었으며, 건너편 손양원 목사의 무덤과는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왕은 무슨 왕···, 종이었을 따름이지”(이덕주). 생각해 보면, 나병환자요 맹인입니다. 무슨 낙이 있었겠습니까만, 김태옥 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주어진 환경에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가히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모습이며, 부활 시에 갚음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6).
전도서 5:8절
“너는 어느 지방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는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도 있음이니라”
본절은 새 주제를 성찰합니다. 빈민을 억압하고 정의를 짓밟는 학대와 강탈은 삶의 허무를 키우며, 이는 불공정한 판결과 비도덕을 드러냅니다. 주 대상은 빈민으로 표현된 약자들입니다. ‘빈민’이란 ‘라쉬’의 번역으로 돈이 없고 재산이 적은 가난한 사람들을 지칭하며, 9절을 함께 고려하면 ‘가난한 농민’을 말합니다. 전도자는 4:1-3절에서 압제받는 자들을 위로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놀라워 하였지만, 본절에서는 압제를 목격하더라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그 근거는 세 단계의 심판자들의 존재입니다: 높은 자, 더 높은 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 이 말은 관료체계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전도서의 취지에 비추어 보면 악을 행하는 관리, 그를 감찰하는 왕, 그 왕까지 감찰하시는 하나님(장엄복수)으로 이해됩니다. 결국 인간 제도의 한계를 경험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를 믿으라는 의도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 역시 동일한 질문을 제기하자 “의인 그 믿음으로 살리라”(합2:4)는 답변을 받습니다.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가 있습니다(눅18:1-8). 주님은 불의를 당하여 밤낮 부르짖는 신자의 기도가 속히 응답되심을 단언하신 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결실하여 100배, 60배, 30배의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마13:23).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5:39).
전도서5:9절
“땅의 소산물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
본절은 권력자든 평민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의존함을 상기시킵니다. 이는 곧, 땅의 소산은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선언입니다. 전도자가 언급한 ‘빈민에 대한 학대’(8)는, 종종 토지의 불법 점유에서 비롯됩니다. 잠언 23:10–11에서 경계석을 옮기는 자에 대한 경고는, 당시 사회에서 토지 소유권이 얼마나 중요한 생존의 기반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왕은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라, 정의를 보장하고 경작지를 공정하게 분배하여 모든 백성이 땅의 소출을 누리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쟁기질한 밭을 위한 왕”이라는 속담은 바로 그런 이상적인 통치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한 사건(왕하 21장)은 권력 남용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이며, 전도자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도덕과 정의만으로는 타락한 인류의 생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아담 스미스는 ‘제빵업자의 도덕심이 아니라 이기심이 내일 아침의 빵을 보장한다’고 갈파하여 이기심이 자본주의의 원동력임을 밝혔습니다. 자본주의는 생존을 보장하는 데 기여했지만, 그 이기심 때문에 병폐도 분명 존재합니다. 이때, 성경의 메시지는 자본주의의 방향을 교정하는 윤리적 나침반입니다. 예를들어, 마태복음의 포도원 품꾼 비유(20장)는,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계산을 초월하며 모든 이에게 동일한 자비를 베푸신다는 진리를 담았는데, 이 교훈을 깨닫고 이기심과 균형을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지혜롭습니다(시편119:99).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마20:1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벳새다
마태복음 11:21절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벳새다는 구약에는 보이지 않으나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BC1400 경)에 기록된 갈릴리 북쪽에 살았던 그술 사람의 주요 도시로 판단됩니다. 가나안 정복 당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술 족속과 마아갓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습니다(수13:13). 400년 뒤 다윗은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와 결혼하여 압살롬을 낳습니다(삼하3:3). 압살롬은 모친을 따라서 딸을 마아가로 짓고, 그녀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과 결혼하여 아사를 낳습니다. 그러나 아세라 목상 때문에 아사에게 폐위당하는데, 그술 출신인 할머니로부터 전수된 가나안 신앙을 답습한 것이 분명합니다(왕상15:6). 한편, 벳새다는 앗수르에게 함락되었는데(BC732), 화재로 불탄 흔적이 그대로 발굴되었고, 많은 유물 중 현무암으로 만든 석상이 특이합니다. 이 석상은 주상으로 한 쪽 면에는 두 뿔이 달린 황소가 마치 인간처럼 서 있는 모습이 조각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석상을 황소가 상징인 가나안의 천둥 번개의 신 바알 하다드로 봅니다. 벳새다는 오랫동안 작은 마을로 존재하다가 헤롯 빌립 당시에 번성하였으나 AD 70년 로마에게 멸망당합니다. 우상숭배는 뿌리뽑기 매우 어렵습니다. 다윗은 정치적 계산으로 율법이 금지한 가나안 땅 내의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아 우상숭배의 단초를 만들자, “삼사 대까지 벌하겠다”(출20:5)는 우상숭배를 금지한 제2계명은 작동합니다. 그 결과 솔로몬 때(2대) 우상숭배는 확장되고 르호보암 때(3대) 나라는 분열되었으니, 마땅히 경계해야 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5:21).
그리스도인의 정체성(2)
에베소서4: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사람들의 견해와 상관 없이 아메리카 신대륙은 늘 존재하였으나, 유럽인들은 15세기에나 알게 됩니다. 그 후 이들은 멀리 떨어진 신대륙으로 이주하고, 문명을 이루었지만, 늘 인간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는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원수이기 때문입니다(롬5:10). 인간은 자신을 우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고 막상 주인되신 하나님의 존재는 부인합니다. 특히, 인문주의자들이 그렇습니다. 시인 오인태의 ‘밥상머리 인문학”을 읽으면 그도 역시 같습니다. 신을 인정하면 그들의 모임에서 멸시를 당합니다. 그들의 자랑은 고통을 극한까지 참아내고, 모든 문제를 인간들의 연대와 노력 그리고 능력을 통해 풀어가는 것입니다. 니이체의 초인사상이 그 전형입니다. 기도는 당연히 없고, 명상만이 있을 뿐입니다. 자신들 안에 있는 초인이나 초능력을 불러와서 신이 없이도- 만약 있다면 신을 마음대로 부려서- 문제들을 해결하려 합니다. 이렇게 신이 없다는 전제가 인간 정체성의 출발점이며, 원죄입니다. 원죄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청지기직을 벗어 던지고 주인처럼 군림하려는 태도이며, 모든 죄의 원천입니다. 이는 국립공원을 구경하면서 자신의 소유로 착각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쉽습니다. 따라서, 주인의 자리를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는데,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문제해결의 시작일 뿐입니다. 죄인은 자신의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 벌은 영원한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아들께서 모두 담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마귀로부터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란 진리는 우리의 두 번째 정체성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