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11/10-14)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교자 손양원 목사
고린도후서 2:15절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새번역)

“(1936년)음력 6월인가 사경회를 하기로 하고 강사를 고르는디…평양신학교에 손양원이란 청년 전도사가 있는디 별명이 ‘손 불덩어리’라고 능력이 많다는 거요. 그래서 그분을 초청해서 사경회를 하게 되었는디 아닌게 아니라 첫날부터 대단했어.”(김수남) 그러나, 손양원 전도사의 행동은 더 큰 화제였습니다. 그 당시 외부 사람은 철저한 검사와 흰가운· 흰 모자· 장갑· 마스크를 하고 눈만 내놓고 애양원에 들어왔으며, 균이 공기를 통해 전염된다는 오해로 예배당 안조차 유리 칸막이로 환자석과 직원석이 구분되었습니다. 손양원은 마스크와 장갑을 벗어 던지고, “나환자들을 구하려면 환자들 속으로 들어가야지 병이 무섭다고 마스크를 한다면 누가 마음 문을 열겠소?” 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나환자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설교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반면, 유리창 안의 흰 옷 입은 사람들에겐 ‘침례 요한’의 외침이었습니다. 인간의 매사가 그렇습니다. 정책이나 메시지가 자신들과 맞으면 감동을 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반대하기 마련입니다. 이때 자신의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권력을 잡는 기술자들이 정치가들이고, 사랑으로 섬기는 기회로 삼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님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베풀자 군중들로부터 왕으로 추대받았으나 오히려 제자들을 먼저 보내시고 무리들을 해산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전도서 5:10절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존 록펠러에게 어느 기자가 물었습니다. “지금 많은 재산을 갖고 계신데 어느 정도면 만족하겠습니까?” 그는 “조금만 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본절은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으로 만족하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이는 아무리 부해도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망 때문입니다. 문제는 인간의 마음은 끝없는 욕망을 품고 더 많은 것을 추구하나, 그 끝은 허무입니다. 재산은 긍정과 부정의 양 측면이 있습니다. 잠언은 부를 하나님의 선물이란 긍정적인 측면을, 전도서는 부 자체는 궁극적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현실을 통찰합니다. 결국 문제는 돈이 아니라, 돈을 향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부는 공허를 낳지만, 하나님 안에서의 부는 감사와 나눔의 통로입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 때문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르지 못하나, 바울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4:11)라며 환경을 초월한 만족을 고백하는데, 그 자신이 터득한 삶의 지혜입니다. 바울은 때를 따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여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재물의 종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안에서 자유와 만족을 누릴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참된 만족은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참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경건이며, 경건을 뒷받침하는 자세가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를 추구하기보다, 주어진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서의 교훈입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620).

전도서5:11절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10절은 ‘돈에 대한 사랑’이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함을, 11절에서는 부의 증가는 관리 비용을 증가시킬 뿐 소유주의 몫은 지켜보는 것뿐임을 밝힙니다. 따라서, 그 결론은 역시 허무입니다. 부의 증가가 곧 행복의 증가는 아닙니다. 재물이 늘어나면 그것을 나누어 쓰는 사람도 늘어나고, 관리와 염려도 함께 커집니다. 주인은 단지 그것을 바라보며 만족하려 하지만, 실제로 누리는 기쁨은 제한적입니다. 이는 지혜와 부를 동시에 가졌던 솔로몬이 체득한 고백이므로, 무한경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교훈을 간직해야 합니다. 부자는 많은 이해관계자에게 둘러싸여 있고 부가 커지면 이해관계자들은 더욱 많아집니다. 그러나 부자가 가장 신경써야할 이해관계자는 그 재산을 맡기신 하나님입니다. 이를 간과하면 재산이 아니라 더 중요한 생명을 빼앗깁니다. 누가복음(12:16-21)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자가 그렇습니다. 그는 밭의 소출이 많아지자 곡간을 크게 짓고 안심하려 했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거두셨을 때 재물은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재산은 인격 만큼만 가지라”고 하는데, 저는 노력한 만큼 벌고 생활하는 자족의 삶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재물도 중요하지만 그 재물을 주신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신 것을 감사히 누릴 줄 알 때, 재물은 허무가 아니라 축복의 도구가 됩니다. 전도서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재물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 안에서 자족과 감사의 삶을 배우라는 교훈입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2:15).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고라신(1)
누가복음 10:13절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고라신은 갈릴리 호수 북쪽, 가버나움에서 동북쪽으로 약 3.2㎞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 가버나움·벳새다와 함께 ‘복음의 삼각지역’ 혹은 ‘저주의 삼각지대’로 불립니다. 1962~64년 발굴된 유적은 주후 3~4세기경 현무암으로 지어진 건축물들이며, 도시 면적은 약 10만㎡에 달합니다. 재료는 갈릴리 지역에서 흔한 화산석 현무암입니다. 중심 회당을 기준으로 5구역으로 나뉘었고, 유대인의 정결례 장소인 미크베가 발견되어 유대인 거주지였음을 보여줍니다. 유적지 도처에서 발견되는 올리브기름 압착 돌은 고라신 사회에서 올리브 기름이 차지한 경제적 중요성을 알려줍니다. 발굴된 회당은 갈릴리 전형 양식으로 두 줄의 기둥들이 세워져 전체 건물을 세 부분으로 나누는 바실리카 구조입니다. 세 개의 입구 중 중앙이 가장 크고, 벽면에는 돌 의자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회당은 주후 4세기에 파괴 후 6세기에 재건되었습니다. 고라신의 유적은 화려한 종교적 흔적을 남겼지만, 결국 “저주의 도시”로 기억됩니다. 이는 예수께서 오셔서 구약에 기록된 많은 이적을 베풀어 당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약속된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였으나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건물이나 제도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회개와 순종에 있습니다. 많은 은혜와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책임이 무겁습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 경고합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들이 좋은 예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그리스도인의 정체성(3)
에베소서 4: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성령님도 한 분이시며, 그분에 의해 형성되는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도 하나입니다. 우리는 모두 몸의 부활이란 의의 소망을 향하여,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교회의 일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네 번째 정체성입니다. 성령님의 인도란 무슨 의미일까요? 먼저, ‘인도하다’는 헬라어 ‘아고’의 번역입니다. 바울의 호송을 책임맡은 베뢰아 형제들이 “그를 데리고(=아고) 아덴까지”(행17:15) 갔을 때의 묘사처럼,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신자의 삶을 이끌고 계십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신자에게는 ‘선한 자(의인)가 받는 생명의 부활’(요5:29)입니다. 타락한 인류는 성령님이 중생시키고, 의의 길로 이끌어 주셔야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롬8:7,8). 그리스도인이 중생하고 죄사함 받은 표징은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이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육신이란 자기중심성을 이겨나갑니다(롬8:13). 따라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들”(롬8:14)임을 선포합니다. 그분의 인도 속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가르침, 교제, 돌보심, 도움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므로” 이미 율법을 성취하였습니다(롬13:8-10). 율법은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나, 사랑은 “도둑질하지 않는 것은 물론 네 손으로 수고하여 가난한 자를 도와라”(엡4;28)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삶은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하는 삶으로 모세율법은 불필요 합니다(갈5:18).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롬8:9후단,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