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6/5/25-29)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이거두리
호세아 6:6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선지자 호세아는 북왕국 말기(주전 8세기)에 활동했습니다. 이 시기는 겉으로는 풍요로웠지만, 실제로는 영적·도덕적 타락이 심하였기에 선지자는 백성들을 질타하였습니다. 그 중 본절은 “형식보다 사랑, 제사보다 관계”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담겼습니다.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자 바리새인들이 비난하였습니다. 그때 이 말씀을 인용하시며(마9:13)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 신앙이 아니라 실제적 사랑임을 강조하셨고, 회심한 이보한은 직설적으로 이 말씀을 실천합니다. 그는 서자 출신에다 어려서 열병으로 한쪽 눈을 잃었고 ‘반골’ 기질이 농후했습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교회의 제도권 밖에서 ‘파격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상갓집에서 노래해 주고 받은 품삯으로 거지들을 먹이거나, 혹은 그들을 끌고 부잣집으로 가서 거둬 먹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소작인들의 빚을 받아오기는커녕 오히려 빚을 탕감해주고 돌아온 이야기, 나무를 팔지 못한 나뭇꾼들을 부잣집에 데리고 다니면서 팔아준 이야기, 부잣집 아들과 거지의 옷을 바꿔 입힌 이야기, 거드름 피는 서울 양반들의 ‘줄 빰’ 돌린 이야기, 교인 변호사를 찾아가 ‘천국에 달아 두라.”며 돈을 빌려 거지들을 먹인 이야기 등, 전라도 땅에는 그의 선행에 관한 이야기들이 풍부합니다. 그 어려운 일제 시대 가난한 이들을 돌본 그의 행동은 율법보다 사랑, 형식보다 긍휼, 종교보다 사람을 선택한 용기 있는 삶입니다.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전도서 7:28절
“내 마음이 계속 찾아 보았으나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천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내가 찾았으나 이 모든 사람들 중에서 여자는 한 사람도 찾지 못하였느니라”

전도자는 인생 전체를 설명하는 궁극적 원리는 찾지 못했지만, 부지런한 탐구 끝에 세 가지 중요한 발견을 기록합니다. ① 악의 유혹은 파괴적이다(7:26) ② 덕 있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7:28) ③ 인간은 본래 정직하게 지음 받았으나 스스로 타락했다(7:29). 본절(28)은 두 번째 발견, 즉 인간의 도덕적 결핍에 대한 관찰입니다. “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극히 드물다는 뜻으로, 전도자는 “참된 덕을 가진 사람을 거의 찾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자는 한 사람도 찾지 못했다’는 표현은, 여자가 먼저 유혹되어 타락한 창세기의 증언을 반영하며, 인간 전체의 타락이란 29절의 결론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덕과 의를 갖춘 명철한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전도자뿐 아니라,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신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노아입니다. 노아는 홍수 이전의 시대, 즉 “모든 사람의 생각이 항상 악할 뿐”이던 시대(창 6:5)에 하나님이 찾으신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증언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롭게 살았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주신 홍수 심판의 경고를 받자 믿음으로 방주를 준비하고 자신과 가족을 구원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입니다(전12:14). 따라서, 겸손히 주님 뜻을 행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전도서 7:29절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본절은 전도자의 세 번째 관찰로서,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선택 결과임을 밝힙니다. 창세기 1–3장이 그 배경입니다(롱맨).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신 뒤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본절의 ‘정직함’은 인간이 하나님과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있는 도덕적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은 처음부터 악하거나 왜곡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선한 본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스스로 “많은 꾀”를 찾았습니다. “많은 꾀”는 단순한 계산이나 지적 활동이 아니라 악을 꾀하는 마음의 계략’이며, 창세기 6:5절,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롱맨).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정직함을 버리고 자기 욕망과 계산을 따라 악을 선택하는 존재로 변한 것입니다. 7:26–28절에서 전도자가 여자를 “죽음보다 쓰다”고 표현하거나 “천 사람 중 한 사람만 찾았다”고 말한 궁극적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특정 성별이 초점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보편적 타락이 강조되어 있는 것이며 일종의 문학적 장치입니다. 따라서, 남자나 여자나 모두 동일하게 타락했지만,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 같은 결론은 신구약 성경과 일치합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돌아간 뒤,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1).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스르엘 골짜기 – 므깃도
요한계시록 16:16절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므깃도는 지중해변을 이루는 갈멜산 능선을 타고 동쪽으로 내려가면 이스르엘 골짜기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며, 세 방향의 길이 만나는 교통의 핵심입니다: ①남북을 잇는 해변길, ②지중해에서 이스르엘 골짜기로 들어오는 와디 아라, ③요단 계곡으로 이어지는 동서 교통로. 따라서, “므깃도를 지배하는 자가 팔레스타인의 교통을 지배한다”고 일컬어집니다. 실제로 가서 보면 광대한 평야 가장자리에 우뚝 솟은 언덕입니다. 이 때문에 이 지역은 군사적 충돌이 반복되었습니다. 이 므깃도 언덕에서 무려 26개의 도시층이 발견되어 반복된 파괴 · 재건 · 전쟁을 보여주면서, 고고학적으로도 므깃도가 “전쟁의 역사 그 자체” 임을 증명합니다. 므깃도는 성경뿐 아니라 이집트·아시리아·바벨론 문서에도 등장합니다. 투트모세 3세의 유명한 므깃도 전투 기록에, “므깃도를 얻는 자는 천하를 얻는다”는 문구가 남아 있으며,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 에살핫돈, 아슈르바니팔의 원정 기록,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군사 이동 경로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므깃도는 전쟁의 장소로 등장하는데, 드보라와 바락이 야빈의 군대를 무찌른 곳(삿5장), 요시야 왕이 전사한 곳입니다(열하23장). 한편,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전쟁의 장소를 아마겟돈이라 부릅니다. 이는 히브리어 ‘할-므깃도’(므깃도 산)에서 온 말로써, 므깃도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하나님과 악의 세력의 최종적 충돌을 상징하는 종말론적 장소” 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므깃도의 역사를 보면서 인간의 전쟁은 반복되지만, 역사의 결말은 하나님이 결정하심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언21:31).

세상과 신자(6)
창세기 44:33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유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특별계시와 언약을 물려받았고, 할례의 표식도 몸에 가졌지만, 그의 삶은 자격 미달의 연속이었습니다. 동생 요셉을 팔아넘기고, 아버지를 속이고, 가정은 무너졌으며, 창녀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판 지 22년이 흐르자, 그는 이밀의 진정표보다 더 감동적인 웅변을 하고, 동생과 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나서 요셉을 감동시킵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했을까요?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거친 세파에서 살아가는 ‘노동의 은혜’입니다(창3:17-19). 아담의 자손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수고와 눈물은 죄를 치료하는 하나님의 약입니다. 이때, 유다는 땀 흘려 일하며 가정을 세우려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안되는 것을 깨닫습니다. 즉, 악한 두 아들의 죽음이란 하나님의 징계를 인내하면서, 악인의 집에는 평강이 없음을 경험한 것입니다. 둘째, 자신과 형제들의 거짓과 죄 때문에 당하는 아버지의 고뇌를 보았습니다. 셋째, 유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그들의 믿음의 삶을 반추하면서, 조상들을 돌보시는 하나님과, 조상들의 믿음과 소망을 배웠습니다. 그들의 삶의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언젠가 야곱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만민이 복을 받는다는 그 약속을 유다도 간직하였습니다. 이제 유다는 마흔이 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길이 인생의 본분임을 깨닫고 그의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12:11).

매일묵상(2026/5/11-15)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누가복음 13:21절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1905년) 2월 처음으로 교회에 고위층 두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뒷골목으로 해서 교회에 왔습니다. 후에 포사이드 박사가 부상을 입었고 저명한 이씨 집안 사람들이 휘장으로 갈라놓은 예배당 남자 석에 나타났습니다…그 결과 따뜻한 봄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전킨의 보고에 나온 두 사람은 10년 동안 관직에 있던 관리출신과 구한국 부대 장교 출인이었습니다. 이어서 ‘저명한 이씨 집안’ 사람들과 “김 주사, 이 주사”로 불리던 양반들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교회를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선교사를 “양대인”(洋大人)이라 부르면서 신변 보호를 받으러 나오는 교인들도 생겼는데, 그 결정적 계기가 ‘포사이드 사건’입니다. 1904년 9월에 내한한 포사이드는 곧바로 전주로 내려와 서원고개 언덕에 시약소를 차렸습니다. 그가 ‘저명한 이씨 집안’에 왕진을 간 것은 1905년 3월 11일입니다. 포사이드는 ‘강도’를 만나 중상을 입은 집 주인을 치료하고 그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그날 밤 ‘강도들’이 또 들이닥쳐 포사이드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혹자는 ‘강도들’은 의병들로서 일진회에 우호적인 ‘부자 양반’을 응징하였고, 그를 치료하러 간 ‘검은 양복’의 포사이드를 일본 경찰로 오인하여 공격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건 보다, 사건 다음입니다. 선교사 포사이드에 대해 감사와 송구한 마음으로 이씨 집안에서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고, 그 아들 중 이보한은 완전히 개종합니다. 실로 포사이드의 선행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6:10).

전도서 7:24절
“이미 있는 것은 멀고 또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전도자는 반복적 표현과 수사적 질문을 사용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이미 있는 것”이란 히브리어 완료형으로, 이미 일어났고 지금도 지속되는 하나님의 섭리를 가리킵니다. 그 안에는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만물의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멀고 또 깊고 깊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삼중 표현은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이해를 완전히 초월한다는 사실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깊음’은 하나님의 행위와 통치의 근간이 되는 절대적 지혜의 차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삶과 환경을 주권적으로 정하실 때, 인간은 그 앞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누가 통달하랴”라는 질문은 바로 그 사실을 선언하는 수사적 고백입니다. 이에 대한 두 가지 예증입니다. 첫째, 창조의 지혜입니다. 욥기에서 보듯이, 악어조차도 하나님의 깊은 지혜의 산물입니다. 단단한 갑옷 같은 표피, 온도에 따라 성별이 결정되는 신비로운 생태 등인데, 이것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새겨진 창조의 다양성입니다. 관리자인 우리는 겸손히 연구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둘째, 복음 속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아래 가두어 두셨는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함입니다(롬 11:32). 인간의 눈에는 이해되지 않는 방식이지만, 그 안에는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히 배우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생의 본질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혜의 시작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전도서 7:25절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연구하여 악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얼마나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전도자는 먼저 지혜의 한계를 인정한 뒤에도(7:23–24) 계속 탐구합니다. 그는 지혜와 명철을 살피며, 악이 얼마나 어리석고 파괴적인지 연구했습니다(7:25). 이것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의도적이고 철저한 탐구입니다. 지혜는 인간이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그렇다고 추구를 멈출 수 없는 가치입니다. 그 일환으로 전도자는 본절에서 악의 본질을 파헤쳤고 그 결론은 26절입니다. 26절은 악의 구체적 예—특히 유혹과 함정—를 제시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선택하라고 교훈합니다. 본절은 악은 단순한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 지혜의 반대편, 곧 어리석음과 미친 행동으로 나타남을 밝힙니다. 그러면 지혜란 무엇입니까? 지혜는 단순히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악을 악으로 미련함을 미련함으로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솔로몬은 일찍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아도니야를 처형하는 등 왕권을 확립합니다. 3년의 통치 후 그의 왕위는 견고해졌지만, 하나님이 맡기신 많은 백성들의 선악을 판단할 지혜의 부족을 절감합니다(왕상3:9). 이에 솔로몬은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자기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백성을 섬기기 위해 ‘듣는 마음’ 즉, 재판할 지혜를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후히 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웃을 살리고 세우는 지혜를 요청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후히 주실 것입니다(약1:5). 이것이 이웃 사랑이요 하나님 사랑입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1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다아낙
사사기 1:27절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다아낙(Taanach)은 이스르엘 평야 남단에 위치하며, 군사적·교역적으로 중요한 므깃도 근처의 전략적 요충지로 므낫세 지파의 성읍입니다. 지명은 ‘모래로 된 땅’이란 뜻이며, 여호수아가 정복한 가나안 31개 왕 중 하나였고 잇사갈 지파 내에 있던 므낫세의 고립 도시입니다. 다아낙은 1966년 발굴이 시작되었고, 가나안의 종교적 모습을 잘 묘사하는 제대(祭臺)가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습니다. 발굴된 제대는 주전 10세기로 추정되는 점토를 빚어 만들어졌고, 높이 53센티이며 모두 4층입니다. 여러 가지 종교적 형상들이 묘사되어 있고 꼭대기 부분이 안으로 살짝 움푹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제물을 올렸거나 제수를 담았던 것 같습니다. 제대는 마치 가나안 신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비록 4층으로 되어 있으나 이를 평면으로 재배치한다면 1층부터 입구로 보고 성소를 지나 마지막 신전의 가장 대표적인 신의 형상이 서 있는 곳까지 도착하는 구조로 볼 수 있습니다. 다아낙 제대의 존재는, 가나안 문화가 어떤 것이었는지, 그것이 왜 철저히 제거되어야 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실로 가나안의 우상 문화는 사사기 전체를 흔드는 영적 타락의 근원입니다. 이스라엘은 반복해서 넘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습니다. 이는 개인의 축복을 하나님의 계명보다 앞세운 결과입니다만, 진정한 복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언22:4).

세상과 신자(4)
창세기 44:33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본절은 유다가 애굽총리 요셉에게 베냐민 대신 자신이 종이 되겠다는 간곡한 요청입니다. 이전에 유다는 다른 형제들과 같이 아버지 야곱의 요셉에 대한 ‘편애’를 질투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팔고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유다는 두 아들을 잃었고, 뜻하지 않게 근친상간의 죄까지 저질러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의 고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지금 막내 동생 베냐민이 노예로 전락하는 갈림길에서 서자, 더 이상 불효하지 않도록 결단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효와 형제 사랑 계명의 선택입니다. 유다의 진정은 조모를 섬기고자 하는 이밀의 진정표보다 훨씬 숭고하며, 진정표의 일반계시에 비추어 탁월한 특별계시의 교훈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계명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결과 사랑의 열매를 많이 맺게 되며, 주님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리시고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로 발견됩니다. 한편, 22년 전 19살 유다는 곤경에 처한 이복동생 요셉을 미워하여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22년 후 41살의 유다는 요셉에 의해 똑같은 시험을 받지만, 자신을 희생하여 훌륭하게 통과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의 시험에서 실패하면 하나님은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계명을 통과하는 여부를 궁궁하게 여기십니다. 모두 주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축복을 갖기 바랍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12).

매일묵상(2026/5/4-8)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주서문교회
누가복음 13:19절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전주 서문교회는 1893년 6월, 서울에서 내려온 정해원이 은송리(동완산동)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구도자를 모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동학혁명으로 한동안 선교가 중단되었으나 3년 뒤 첫 세례교인이 나왔습니다(1897).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화산동으로 이전하나(1900) 교인들은 가난한 부녀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전주 양반들은 여전히 멀리서 바라만 보았습니다. 선교사들이 전주의 선비 문화를 알게 되자 책을 통한 전도를 시도했습니다. 1903년 전주 서문 바로 안쪽에 ‘책방’을 낸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예수교 책’을 팔 수 없어 교인 ‘임씨’를 통해 포목점을 내고 한 구석에 중국에서 들여온 한문 ‘서학서’(西學書)와 한글 전도 책들을 놓고 팔았습니다. ‘책’을 통한 전도는 주효했습니다. 선교사 전킨의 보고입니다. “(1905년) 2월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교회에 고위층 두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뒷골목으로 해서 교회에 왔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에 포사이드 박사가 부상을 입었고 저명한 이씨 집안 사람들이 휘장으로 갈라놓은 예배당 남자 석에 나타났습니다.”(The Korea Mission Field, 1905. 12.). 서문교회의 초기 역사는 단순한 개척 이야기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열매 맺는 모습을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헌신, 작은 씨앗 같은 전도, 눈물 섞인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전도서 7:22절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하였다는 것을 네 마음도 알고 있느니라”

본절은 21절의 권면을 뒷받침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모든 말에 마음을 둘 필요가 없는 이유는, 우리 역시 종종 남을 비방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말로 실수하고, 감정에 흔들리며, 때로는 상처 주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말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지 못하는 모순입니다. 비록 본절의 ‘저주’가 불평이나 투덜거림을 의미한다 해도, 입 밖에 나온 말은 죄가 됩니다. 전도자는 이러한 인간의 보편적 부패성과 연약함을 자기 성찰을 통해 바라봅니다. 자기 성찰은 인격 성숙의 중요한 과정이며, 관용을 낳는 어머니입니다. 베드로의 부인 사건이 좋은 예입니다. 그는 여종 앞에서 저주까지 하며 주님을 부인했지만, 곧바로 밖에 나가 통곡했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경고하신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가장 먼저 베드로를 찾아오셨고, 다시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은혜를 잊지 않았고, 그 경험은 그를 관용과 겸손을 갖춘 사도로 빚어냈습니다. 관용과 겸손은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질이며, 주님은 우리의 실패와 용서를 통해 이 자질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실패 앞에서 지나치게 낙망하지는 말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는 말씀 역시 간직하며 겸손히 살아야 합니다. 전도자는 20–22절을 통해 말합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다. 그러므로 타인의 말에 마음을 두지 말라. 너도 같은 실수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자기 성찰은 겸손을 낳고, 겸손은 관용을 낳습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길입니다. “사람이 분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은 그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자기의 영광이니라.”(잠언19:11).

전도서 7:23절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 하였도다”

본절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해 보았다”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이 모든 것”은 앞선 7:1–22 전체를 말하며, 동시에 전환적 표현입니다. 전도자는 자신의 탐구가 지혜에 의해 이끌린 실험적 탐구임을 다시 확인합니다(1:13; 2:3). 그는 인생의 복잡함과 불공평함, 인간의 불완전성을 지혜로 살펴본 뒤, 다시 한 번 “지혜를 얻고자 결심했다”고 말합니다.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는 표현은 강한 의지를 담은 동사형으로, 그의 결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결심은 곧 한계에 부딪힙니다. 전도자는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지혜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완전한 지혜에 도달할 수 없음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인정이 지혜의 문턱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깊이와 높이를 가짐으로 겸손은 핅수적입니다. 비록 지혜는 유산처럼 유익하기에 반드시 추구해야 하나, 동시에 완전히 붙잡을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사실 이 깨달음 자체가 지혜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조급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히 배우려는 자세가 참된 지혜의 길입니다. 욥은 경건한 삶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고난을 겪고 매우 혼란스러워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창조의 지혜를 드러내시자,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내가 깨닫지 못하던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라는 회개를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안 욥은 비로소 참된 지혜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1:7).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스르엘 성
열왕기하10:1절
“아합의 아들 칠십 명이 사마리아에 있는지라 예후가 편지들을 써서 사마리아에 보내서 이스르엘 귀족들 곧 장로들과 아합의 여러 아들을 교육하는 자들에게 전하니 일렀으되”

이스르엘은 아합 왕조의 실제 권력 중심지였습니다. 아합의 왕궁은 사마리아에도 있었지만, 이스르엘에는 별도의 거대한 왕궁과 군사 요새가 존재했습니다. 따라서 아합 왕조의 핵심 귀족·관리·군 지휘관 상당수가 이스르엘을 기반으로 활동했으며, 나봇의 포도원 사건도 이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를 입증하는 아합 시대 때 건설된 거대한 요새가 아랍어로도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의 어원이 남겨져 있었던 지린이라 불리는 유적지 근처에서 발굴되었습니다(1987년). 289×157m의 직사각형 궁전은 모나게 잘 다듬은 돌을 쌓아 기초를 만들어 건축한 성벽은 물론, 성벽의 각 모서리에는 망대가 있었고 성벽을 둘러 폭 8∼12m, 깊이 6.5m의 해자가 파져 있었습니다. 해자는 성벽을 둘러 웅덩이를 파 주로 물을 붓고 악어 같은 짐승을 풀어 놓아 적들이 성벽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하는 방어용 구조입니다. 망대와 해자를 통해 이 성이 상당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9세기 말 예후의 시대에 아람왕 하사엘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공격 앞에서 멸망하였습니다. 본절의 “아합의 아들들을 교육하는 자들”이란 표현은 의미심장합니다. 한 세대의 죄는 다음 세대의 성품 속에 저장됩니다. 아합의 죄에는 경건한 자녀들을 양육하지 못한 부분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무엇을 성공이라 가르치고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입니까, 아니면 생존과 권력입니까? 참된 안전은 주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언18:10).

세상과 신자(3)
창세기 49:8절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본절은 야곱의 유언 중 유다와 그 후손에 관한 대목입니다.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는 ‘찬송’이란 뜻이나 그의 삶은 ‘찬송’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는 요셉을 은 20량에 팔아넘긴 뒤, 아버지에게는 거짓말을 하여 22년 동안 슬픔 속에 살게 했습니다. 이후 가나안 사람과 사귀고 타락한 문화에 물든 그의 자녀들은 일찍 죽었으며, 며느리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와 수치스러운 관계를 맺는데 헷족속의 관습입니다. 그의 인생은 죄와 무너짐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한 유다를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선택하여 다윗 왕조와 그리스도를 일으키셨습니다. 즉 그의 가장 어두운 순간 속에서 베레스가 태어났고, 베레스의 계보에서 다윗,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이같이 유다의 죄와 실수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막지 못했고, 그 실패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더 깊이 드러났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유다와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실패하고, 무너지고, 부끄러운 선택을 할 때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끝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죄를 심판하시나, 동시에 구속의 길을 여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유다의 이야기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를 통해서도 구원의 길을 여신다.” 따라서, 우리는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그분 앞에 겸손히 돌아오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매일묵상(2026/4/25-30)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요한복음 10: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영조 때(1767년) 전주에 큰 불이 나서 전주 성 안에 천여 채가 넘는 민가와 성문들이 소실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전라 관찰사였던 사도세자의 처남 홍낙인은 전주를 대대적으로 복구한 후, ‘풍패지향’(豊浿之鄕)으로 부르고 귀빈의 객사에 ‘풍패지관’(豊浿之館), 남문에 ‘풍남문’(豊南門), 서문에 ‘패서문’(浿西門)이란 현판을 내걸었습니다. ‘풍패’는 기원전 3세기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 이름입니다. 조선 사대부들은 이를 ‘왕의 본향’으로 해석했습니다. 이에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를 한고조 유방에 비유하여 이성계의 본향인 전주를 성역화하면서 ‘풍패’라 부른 것입니다. 이 같은 봉건적 ‘사대주의’ 문화가 담긴 전주 유적은 다 사라졌고, 객사와 풍남문만 남아 있습니다. 패서문의 경우 1907년 신작로가 뚫리면서 성곽과 함께 철거되었으나, ‘서문’이란 이름은 그때 이미 세워진 전주 서문교회의 이름에 남았습니다. 교회는 영원한 생명의 문이신 예수께로 인도하는 영적 관문입니다. 세상의 자부심이었던 패서문이 허물어진 자리에 복음을 통해 서문교회가 세워졌듯이, 우리 삶에도 세속적 가치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이 심겨야 합니다. 인간의 계획이 좌절되는 고통의 순간에도 주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따라서 스스로를 높이려는 ‘풍패’의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이 온전히 서는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 문 위에는 어떤 이름이 걸려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특권, 즉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셨습니다.”(빌1:29,새번역).

전도서 7:20절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7장15절 이후에는 두 가지 주제가 이어집니다. 첫째는 지혜, 의, 악 등 극단을 피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삶의 균형을 잡으라(15–18절). 둘째는 지혜가 권력보다 강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조차 완전하지 않음을 기억하라(19–22절). 이러한 흐름 속에서 본절은 인간의 보편적 불완전성을 선언합니다. 인간은 완전할 수 없습니다. 선지자 모세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땅 위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민 12:3)으로 칭찬받았으나, 광야에서 거듭되는 백성들의 불평과 불신앙을 겪자 분노하고 그로 인해 실수합니다. 하나님은 물이 없어 불평하는 백성을 위해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으나, 모세는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민 20:10)하고 지팡이로 반석을 쳤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한 것을 책망하셨으며, 그 결과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습니다(민 20:12–13). 그럼에도 모세의 겸손은 높이 평가받아야 합니다. 아마 과거에 애굽 사람을 쳐죽였던 경솔함에 대한 자각이 겸손의 원인으로 보입니다. 한 인간을 완전하게 만드는 일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마19:26). 따라서, 우리는 주님이 일하심을 믿고 기다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속죄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나, 여전히 ‘의인된 죄인들’로 불려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같이 연약하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하나님의 이 온전하심을 우리 삶의 지향점으로 삼아야 합니다.“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전도서 7:21절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

20절은 “완전한 의인은 없다”고 선언하고, 21–22절은 그 죄의 보편성이 실제 삶에서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사람의 말은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하고,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 자체보다 마음의 중심입니다. 따라서, 지혜자는 사람들의 모든 말을 마음에 담지 않습니다. 본절의 권면은 이러한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통찰에서 나온 것입니다. 후단의 내용은 종들이 주인에 대해 종종 불평하거나 비방하는 현실을 알기에 나온 경험적 조언입니다. 험담을 들으면 누구라도 화가 납니다. 항우가 진중을 시찰 중 진나라 군사의 비방을 듣고 분노하여 20만 명을 죽인 사건은, 분노에 사로잡힌 어리석음이 낳는 비극을 보여줍니다. 반면, 위기에 처한 자신을 저주한 베냐민 지파 시므이를 즉시 죽이지 않고, 그 처리를 솔로몬에게 맡긴 다윗은 민족의 분열을 막아낸 지혜로운 사례입니다. 본문에서 ‘저주하다’라는 단어는 강한 저주라기보다 ‘비방하다’, ‘투덜거리다’에 가까운 의미이지만, 이것 역시 죄의 한 형태입니다. 누구나 죄를 짓고, 누구나 남을 비방할 수 있으며, 그 안에는 주인 자신도 포함됩니다(22절). 자기 성찰을 통해 자신의 불완전함과 죄인됨을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는 타인에 대한 관용을 낳습니다. 전도자는 20–22절을 통해 “사람은 완전하지 않다”(20절), “그러므로 타인의 말에 너무 마음을 두지 말라”(21절), “너도 같은 실수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22절)고 말하며, 겸손·관용·자기 성찰이라는 지혜의 핵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잠언3:3).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스르엘 성
사무엘하21:1절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의 왕 아합의 왕궁에서 가깝더니”

이스르엘 골짜기는 이스르엘이란 도시를 따라 명명되었고, 이 도시는 곡창지대에 위치해 전략적으로 중요하였습니다. 다윗의 아내 아히노암이 이스르엘 출신인데(삼상25:43), 아마 다윗은 이 결혼을 통해 식량을 지원받았을 것입니다. 솔로몬의 통일왕국을 이은 분열왕국 시대에 이스르엘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고, 특히 아합 왕과 나봇의 포도원, 그리고 엘리야의 심판 선언으로 잘 알려졌습니다. 아합의 여름 별궁이 이곳에서 발굴되었는데 화려한 상아궁이었고, 그의 아들 요람도 전쟁 부상 후 이곳으로 돌아온 사실을 보면 이스르엘은 견고한 요새 도시였습니다. 예후가 요람을 치러 올 때 파수꾼이 망대에서 그를 보았다 하고, 예후의 말에 여종이 왕비 이세벨을 창에서 던져 죽인 사건은 도시의 높은 성벽 구조를 말합니다. 1987년 지린이라 불린 유적지에서 우연히 유물이 발견되자 대규모 조사가 착수되었고, 아합 시대의 거대한 요새가 발굴되었습니다. 그것은 성벽, 망대, 해자 등 강력한 방어시설을 갖춘 도시였으나 아람 왕 하사엘의 공격으로 파괴된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스르엘 성의 흥망의 역사는 권력과 요새, 군사력도 영원하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아합의 탐욕, 이세벨의 악행, 요람의 불순종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왔고, 이스르엘 성은 견고했으나 무너졌습니다. 인간이 쌓아 올린 힘과 성취는 잠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참으로 안전하고 영원한 신앙유산을 후손들에게 남깁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편127:1)

세상과 신자(2)
에베소서 6:1절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신에게 조모께서 계시질 않았다면 오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며, 조모께서도 신이 없다면 여생을 마칠 수가 없습니다. 조모와 손자 두 사람이 서로의 목숨이 되어주고 있으므로 이 사사로운 정을 버리고 멀리 떠날 수가 없습니다.이 글은 제갈량의 출사표, 한유의 제십이랑문과 함께 중국 3대 명문으로 평가받는 이밀의 진정표의 한 대목으로, 진무제의 부름을 받았으나 할머니(96세)의 봉양 때문에 떠날 수 없다는 상주문입니다. 이밀(224-287)은 난지 6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고, 네 살 때 어머니가 개가하여, 조모 유씨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진무제는 감동하여 노비를 하사하고 조모에게 의식을 제공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 이밀은  충과 효가 충돌하는 지점에 이르러, 효를 택합니다. 그에게 세상은 출세를 위한 곳이 아니라,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곳입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유교 이상의 실천이죠!. 세상을 보는 많은 시각이 존재하나, 성경의 관점은 “세상은 하나님의 뜻(계명)을 행하도록 창조된 곳”입니다. 일반계시를 통하여 부모공경의 계명을 행한 이밀은 성경의 관점(특별계시)에서도 칭찬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특별히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성경은 부모공경에 대하여 무엇을 말씀합니까?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칩니다. 주님과 부모에 대한 순종이 충돌할 때 주님을 우선시 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박해가 일어날 때 비취는 중요한 등불입니다. 황제 진무제도 이밀을 돌보았는데, 만유의 주님이 어찌 당신의 백성을 돌보지 않겠습니까?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