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5/26-30)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왓츠기념 선교부
마태복음 19: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순천 선교부의 출발은 늦었으나 체계적인 선교로 순탄하게 발전합니다. 매곡동 산자락의 토지를 계속 사들여 2만6천 평의 넓은 땅을 확보하였고(1924), 교회, 유치원, 남·여학교, 병원과 기숙사, 남녀 성경학교를 세웠습니다. 순천 선교부가 종합 선교부로서 “교회·학교·병원”이란 삼각전략을 효과적으로 구사하였던 것은, 더럼제일교회 왓츠 장로의 전폭적인 지원 덕택입니다. 왓츠는 매년 약속된 선교비 외에, 특별 헌금도 자주 하였습니다. 1920년에 내한해서 폐교된 학교 재건을 위해 상당 액을 기부하였고, 1930년 재 방문 시 병원과 학교 시설비로 무려 8만 달러를 기부하였습니다. 이는 한화로 80만 원에 해당하며, 서울 기와집 8백 채 값입니다. 전형필 선생은 존 개스비에게 40만 원을 지불하고 고려청자 20점(현재, 4점은 국보, 7점은 보물로 지정)을 구입(1937년) 한 것과 비교되는 금액입니다. 더구나 당시 미국은 대공황 중이었으나, 그는 조선 선교와 조선인의 행복을 위해 아낌 없이 기부하였습니다. 왓츠 장로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그 결과 남쪽에서는 최초로 군 단위 노회가 조직되었습니다(순천노회). “이런 의미에서 순천노회는 ‘왓츠기념노회’, 순천 선교부는 ‘왓츠기념선교부’라 할 만하다”고 이덕주 교수는 평가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7-19)

전도서3:9,10절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예증한(3:1-8) 전도자는,  9-10절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는 수고의 헛됨을 논합니다. 하나님의 시기를 모르면, 인간의 수고 그 자체는 아무런 유익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유익(재산, 명예, 업적)을 위해 무진 애를 쓰는 것은, 하나님께서 노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10). ‘노고(勞苦)’에 해당하는 원어는 ‘종사하다’란 동사를 어근으로 파생한 명사로서 ‘직업’이나 ‘업무’ 등을 의미합니다. 전도서에서 사용된 8번은 모두 ‘수고, 노고, 일, 재난’ 등 부정적인 뜻을 내포합니다. 전도자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인생의 여러 가지 고난을 이 단어 하나로 표현합니다. 즉 밭을 가꾸는 것,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 사람들의 삶의 과정 모두를 ‘노고’에 포함시켜 하나님의 섭리와 인생의 삶을 숙고한 것입니다. 이 노고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인간은 피할 수 없음을 깨닫자 전도자는 신음을 토하고 있습니다(10절). 인간 특히 솔로몬과 같은 지혜자의 교만과 자존심을 여지없이 깨부수는 하나님의 망치라 하겠습니다. 전도자는 “내가 보았노라”는 문구를 삽입하여, 자신의 성찰의 결과를 적어 놓고 있습니다. ‘천라지망’은 듬성듬성한 것처럼 보여도 어떤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그물입니다. 이 수고스러운 인생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직분에 충실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우리의 기쁨으로 삼고, 그분의 명령(예수에 대한 믿음, 부모공경, 형제와 이웃사랑 등)을 지키는 삶이 제일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전도서3:11절 (1)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만드시고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가 없다.”            

9~10절은 하나님의 섭리를 외면한 인간 수고의 허무함이 강조되나, 11~15절은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올바른 삶의 자세를 논합니다. 본절이 1~8절 바로 뒤에 나온다면, 처음 여덟 구절은 매우 긍정적이었겠지만, 이제 또 다른 좌절감을 호소합니다. 모든 것에는 적절한 시기가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인간은 그분의 행하심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탄식입니다. 먼저, 11절 첫 부분을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만드시고”. 창세기 1,2장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다’고 반복하십니다. 창조 다음에 섭리가 옵니다. 섭리는 창조하신 만물을 당신의 뜻을 따라 유지·완성하여 아름답게 하시는 것입니다. 꽃씨를 심고 자라서 꽃이 활짝 펴는 모습과 같습니다. 원문은 ‘모든 것’을 서두에 배치합니다. 여기서 전도자의 의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일은 원래는 하나님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만드시는 선한 섭리 때문이므로, 만약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아름다운 결과에 도달하여, 인간은 두려움과 허무가 아니라 흥분과 기대로 꽉 들어찬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타락의 본질이며, 모든 허무와 불행의 씨앗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는 소망의 삶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두메아 사람들(2)
로마서 9:13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본절은 말라기1:2,3절의 인용입니다(BC 430). 이 시기는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100년이 지난 때입니다. 에돔 지역은 나바테아 사람들이 정착하였고, 에돔 사람들은 갈렙이 정복하였으나 바벨론에서 귀환한 후손들은 버린 땅 마레사로 이주합니다. 이 도시가 은퇴한 그리스 군인의 거주지로 되어 헬라와 가나안 문명이 뒤섞여 다양한 문화를 형성한 것은 알렉산더의 정복이후입니다(BC332). 유적지로는 이두메아 사람들이 살던 동굴과 지하구조가 유명합니다. 일반적인 가옥과 가축우리, 작업장 그리고 비둘기 집 등 석회 동굴을 뚫어 만든 이 구조물들은 때로는 지하의 길로 연결되었습니다. 85개의 비둘기 집들이 발견되었고, 그 중 길이 30미터의 터널형 비둘기 집은 벽에 3000마리 이상의 비둘기들의 서식을 위한 1900개 벽감(벽에 오목하게 판 공간)을 갖추었습니다. 비둘기는 식용 목적이고 변은 연료였습니다. 지하 공간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주거지로, 침략에도 대비하고, 농업 및 공예 산업에도 이용되었습니다. 땅을 포함한 세상의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인간의 노력에 따르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임을 오늘 본문은 밝힙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으로 야곱과 같이 이삭의 자손이나 이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자녀들도 같습니다. 따라서, 신앙유산을 반드시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것은,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영생이고 가장 큰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14:23)

마가복음 4: 39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오늘 본문은 공관 복음서 모두가 증언합니다. 주님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큰 무리를 가르친 저녁,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명령하십니다. 저편은 이방인들과 거라사의 광인이 사는 곳입니다. 그때 큰 광풍이 일어나 침몰의 순간이 오자, 물결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십니다. 이분이 누구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을 따라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대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롬1:3,4)고 밝힌 분입니다. 먼저, 예수를 모시고 사는 삶은 결코 육신적 평안과 안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아 성취하는 삶입니다. 거기에는 광풍, 바다, 이방인, 광인 등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문제 많은 인생을 살아가며 주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둘째, 제자들의 배처럼, 우리의 인생의 배에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분은 친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마28:18)고 선포하셨으니, 믿음을 갖고 염려와 두려움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때때로 인생의 풍랑이 몰아닥치곤 하나, 그런 풍랑은 모든 사람이 겪습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들과 함께 살아가면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따라서, 예수의 멍에를 지는 믿음 생활은 힘들지 않고 배우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즉,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된 인격을 연단된 인격은 소망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광풍 속에서 주님의 능력을 친히 경험한 사도 베드로는 세상풍파에 시달리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권고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매일묵상(2025/5/19-23)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왓츠기념 선교부
이사야 42:6,7절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1911년 8월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는 선교사 프레스톤은 선교 개척비와 선교사 모집의 책임을 떠맡았습니다. 36세의 프레스톤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만, 담당해야만 하죠! 그 무렵 미국 남장로회 교인들은 해외 선교비로 ‘교인 한 명이 매년 4달러씩’ 헌금하자는 평신도 선교운동이 활발하였습니다. 순회 강연을 하던 프레스톤은 그린빌에서 실업가 그레이엄을 만납니다. 그는 1909년 전주 신흥학교 건립비로 1만 달러(약 20억원)를 기부한 바 있는데, 더럼의 실업가 왓츠를 소개하며 “큰 것을 요구하라.”고 귀띔했습니다. 마침, 왓츠가 장로로 봉직하던 더럼제일교회 담임 목사는 전주의 전킨 선교사 처남이었습니다. 왓츠는 “순천 선교부 전체를 맡아달라.”는 프레스톤의 요청을 받은 뒤, 순천 선교부 개척에 필요한 선교사 13명의 생활비로 매년 13,000 달러(약26억원)를 부담하겠다고 약속합니다. 1912. 8월 이 소식을 보고받은 남장로회 선교부는 순천 선교부 개척 작업을 서둘렀습니다. 순천 선교의 특징은 과학적·체계적·이성적인 선교정책이지만 그 안에는 주님과 조선인에 대한 선교사들의 뜨거운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1910. 8월 한일합방을 당하여 조선이 역사에서 사라짐으로 절망하는 순천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은 순천 선교부의 복음과 선진문물(병원과 학교)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계셨습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전도서3:8절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3:1절은 인생의 모든 일에는 적절한 시기가 있음을 선언하고, 2-8절은 반복 예증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밝힙니다. 본절은 그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사랑과 미움, 그리고 국가들의 애증관계인 전쟁과 평화의 때를 다룹니다. 전단의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의 표현은 사랑이 미움으로 미움이 사랑으로 언제든지 변할 수 있음을 내포합니다. 인간의 감정은 예측불가입니다. 사랑할 때는 마치 사랑만 있고, 미워할 때는 증오만 있는 것 같지만, 이런 감정들은 시간과 상황에 따라 변하게 마련입니다. 감정의 문제는 아주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사항이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여기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을 증언하는 책이 성경입니다. 사울 왕은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온 다윗을 신임하여 군대의 장을 삼으나, 전쟁터에서 돌아올 때 영접나온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다’이라는 노래를 듣자 분노하여 평생 다윗의 대적이 됩니다. 결국 다윗은 쫓겨나 도망다니다가 블레셋으로 망명합니다만, 이는 블레셋을 통해 사울을 죽이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의 시작이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을 막을 가장 뛰어난 장수였기 때문입니다. 개인을 넘어 국가 간의 전쟁과 평화는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은 BC 609년 갈그미스에서 바벨론과 애굽 왕 느고의 전쟁을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으로 설명합니다. 유다 왕 요시야는 고집 부리다가 느고의 손에 죽지만(역하35:20-27), 유다의 멸망을 보지 않도록 배려하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언16:7).  

전도서3:9절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3:1-8절은 세상의 모든 일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가 작동함을 예증하고,  9-10절에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는 수고의 헛됨을 밝힙니다. 본절은 ‘마 이트론’ 즉, ‘무슨 이익이 있느냐?’로 시작됩니다(참고 1:3절). 이 수사적 질문의 방식은 상대방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 효과적인 교육 수단이나 본서에서는 부정적 대답을 전제합니다. 하나님의 시기를 알지 못하는 한, 인간의 수고 그 자체는 아무런 유익도 없습니다. 농사의 경험이 없는 일반인은 파종의 때를 모릅니다. 파종의 시기를 무시하고 파종한다면 헛수고입니다. 또 한국의 농사 경험을 가지고 팔레스틴에서 봄에 밀을 심고 가을에 거두려는 시도는 잘못입니다. 팔레스타인은 지중해성 기후를 가지고 있어, 겨울철 강우량이 많고 여름은 건조합니다. 이러한 기후 조건은 밀이 겨울 동안 충분히 자라도록 돕고, 봄철에 수확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에서는 가을(10-11월)에 밀을 심고 봄(4-5월)에 거두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굽게 만드신 것들을 사람이 아무리 노력하여도 곧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을 공동 창업했지만, 1985년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해고당하는 시련을 겪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잡스의 교만과 독단 때문입니다. 잡스는 픽사(Pixar)를 창업한 뒤 토이 스토리의 성공을 거두자, 비로소 전문가들이 상대방을 존중하며 일할 때 큰 성과가 산출됨을 깨닫습니다. 그 즈음 애플은 위기에 처하고 잡스의 복귀를 요청하자 성공의 묘리를 깨달은 잡스는 아이폰 성공의 신화를 써 올립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전3: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두메아 사람들
오바댜 1: 21절
“구원 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본문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멸망(BC586)에 동참한 에돔을 다스리나, 그 모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속할 것을 말합니다. 세속사에서 에돔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지만(BC553), 바벨론이 페르샤에게 패망한(BC539) 이후. 아라비아의 부족인 나바테아 사람들이 에돔 땅을 차지하고, 에돔 사람들은 네게브 북쪽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헤브론을 수도로 삼고, 마레사와 벧술을 건설합니다. 이 도시들은 물론 유다인들에게 속하였던 곳이나, 유대 백성은 바벨론에서 귀환 후 예루살렘 중심으로 거주함으로 이 지역은 버려졌습니다. 에돔 사람들은 헬라어로 이두메아로 불리웠고, 유대인들은 경멸하였습니다. 외경 집회서(BC180)의 한 대목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민족들이 있다. 그들은 정말로 혐오스럽다. 세겜에 사는 사마리아인들과 블레셋 사람들, 그리고 거만하게 살아가는 에돔 사람들이다.”(집회서 50: 25, 26).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약속하셨으나 야곱 후손이 범죄하자 쫓겨났습니다. 에서의 후예인 에돔은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나,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민족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쫓겨난 이스라엘 민족 대신 약속의 땅의 일부를 차지하고 헤롯 시대에는 유다인들도 다스리게 됩니다. 내생의 삶은 은혜에 의해 주어져 믿음으로 받지만, 금생에 속한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노력하고 순종하는 자가 차지합니다. 따라서, 자녀들에게 신앙유산을 물려주고 삶의 기술을 습득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예레미야애가3:33절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일이란 창조물을 돌보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배우고, 보람을 느끼는 즐거움의 수단이었으나, 타락 이후 땅이 저주를 받아 수고로움이라는 요소가 들어왔을 뿐입니다. 그 저주는 그리스도 안에서 제거되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의 멍에를 메고 부활하신 예수로부터 배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신앙을 떠나서, 지혜자들은 일의 즐거움을 토로합니다. 호학(好學)의 사람 공자는 배움과 즐거움의 관계를 “지지(知之), 호지(好之), 낙지(樂之)”로 설명하는데, 어떤 것을 아는 사람은(지지자),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호지자),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낙지자)고 평가합니다. 또, 노벨상을 수상자 리차드 파인만은 “발견하는 즐거움”이 물리학 공부의 원동력임을 밝힌 바 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서 우리의 일에 숨겨두신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편, 신앙 생활은, 믿음의 즐거움, 고된 노동, 안식을 담고 있습니다. 세상 지혜와 차이는 단연 ‘믿음의 즐거움’입니다. 노동이 즐거움을 주더라도, 노동은 수고를 요구하고 그 결과는 헛되기 마련입니다. 이는 죽은 뒤에 모든 사람에게 잊혀지는 망각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노동도 ‘믿음의 이야기’ 내에 위치하면 즐거움으로 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저주를 제거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발견의 즐거움도 중요하지만, 예수의 멍에를 메고 그분으로부터 배우는 즐거움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잡아야 합니다. 그분의 멍에를 져 보면, 그 멍에는 자비롭고 그분의 짐은 가벼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매일묵상(2025/5/12-16)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아다무락’에 세워진 순천 선교부
사도행전 16:32절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오늘 본문은 빌립보 옥에 갇힌 바울이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는 장면입니다. 프레스턴, 벨, 윌슨 등 광주 선교사들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광주 선교부 개척 경험을 가진 김윤수를 순천으로 보내 남봉산 자락, 매곡동 언덕 2천여 평 땅을 구입합니다. 신옥우 장로(순천중앙교회)의 말입니다. “본래 여그 일대가 아다무락이라 혀서 아그덜이 죽으면 뼈를 항아리에 넣어 갖다 버리거나 돌무더기로 시체를 덮어 놓던 곳이지라. 사람덜이 잘 오덜 안던 곳이제잉. 그런께 선교사덜이 적은 돈 들여 넓은 땅 살 수 있었던게라.” 광주, 목포처럼 순천 선교부도 버려진 땅에 자리잡았습니다. 즉, 어려서 죽은 아이 시체나 돈 없어 무덤을 제대로 쓸 수 없던 가난한 집에서 풍장 지내던 땅을 헐값에 구입한 것으로 선교사들의 지혜입니다. 문제는, 선교사들의 집과 병원, 학교를 지을 자금 그리고 가족의 생활비였습니다. 이 책무는 1911년 8월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하는 선교사 프레스턴에게 맡겨졌습니다. 프레스턴은 막막하였겠지만, 하나님은 이미 더럼의 실업가 왓츠 장로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2천년 전 사도 바울의 일행이 배를 타고 빌립보로 갈 때 유럽의 문명을 싣고 갔다고 평가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구원을 얻는다”는 선포는 단순히 말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뜻합니다. 복음의 삶에 적합한 교육(학교), 근대화된 치료 수단(병원)은 필수적이므로, 삼각전략은 단순히 교인확보 수단만은 아닙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36).

전도서3:6절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본문의 전단과 후단은 목적어가 분명하지 않아서 여러 해석이 등장하나, 일반적으로 재산이나 소유물을 의미합니다. 물건을 찾고 잃을 때와, 성을 지키고 버릴 때가 있는 것 같이 인생은 이 양 극단의 상황이 언제든지 교차될 수 있습니다. 좋은 예가 항해입니다. 고대에서 무역을 위해 항해할 때, 여기 저기 다니며 벌어들인 재산으로 기뻐하지만, 폭풍이 몰아쳐 배가 위태하면 아무리 귀중한 물건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원거리 항해가 본격화 된 근대에는 배를 공동 소유하거나 손실을 분산하는 해상 보험이 발달합니다. 예측불허의 세상에서 얻은 삶의 지혜입니다.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재산을 얻고 지킬 때가 있고, 단념하거나 잃어버릴 상황이 나타납니다. 양단을 모두 겪으면, 부와 가난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토로합니다. 신자는 최선을 다하지만 그 밖에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합니다. 그가 참된 지혜자입니다. 지금 솔로몬은 양극단에 놓여 아무 관계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조차 하나님의 섭리의 한 부분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기한이 되면 생명은 죽음으로, 울음은 웃음으로, 전쟁은 평화로 뒤바뀌듯이, 인생에는 역경과 순경, 성공과 실패가 교차하며, 부함과 가난도 이와 같습니다. 만약 본문을 통해 인생의 한편에서 다른 극단을 보는 법을 배우면 삶의 균형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땐, 성공 중에 교만하지 않고, 실패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 숨겨진 ‘천국이란 보화’를 발견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소망 중에 즐거워 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라고 권면합니다(롬12:12). 산상수훈의 시작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전도서3:7절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본절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1) 연결된 하나의 상황을 전제: 전단은 극도의 슬픔으로 옷을 찢어 비통함을 표시하고, 슬픔이 누그러지면 다시 옷을 수선하여 입었던 이스라엘의 관습을 반영하며, 후단은 슬픔이 너무 클 경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슬픔이 사라진 후 비로소 입을 열어 말하는 모습을 함께 묘사하며, 슬픔과 비통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교훈한다. (2) 각각 다른 상황을 전제: 전단은 극도의 슬픔을 나타내나 후단은 겸손히 자신을 숨기며 잠잠히 있을 때와 활발히 자신을 드러낼 때가 있음을 알려주는데, 그 판단 기준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전자의 해석도 가능하나 후자의 해석이 더 보편적입니다. 성경의 예 두 개를 들겠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왕 여호람 때, 아람 장군 나아만은 왕의 친서를 들고 나병을 고쳐달라고 찾아옵니다. 왕 여호람은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면서 옷을 찢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선지자 엘리사는 나아만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요청하고, 나아만이 오자 하룻 길 되는 요단 강으로 보내어 고칩니다. 기적의 치유를 경험한 나아만은 이스라엘 하나님만 참 신임을 깨닫고 믿습니다. 사람의 절망은 하나님의 구원의 시작입니다. 한편, 전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베냐민 지파 사울이 왕으로 지명되었을 때 일부는 비웃었으나 그는 잠잠하였습니다. 얼마 후 암몬 족속의 길르앗 침공 소식을 듣자, 백성을 이끌고 구원합니다. 감복한 백성들은 사울의 왕 됨을 비웃은 자들을 죽이자고 할 때, 사울은 덕을 베풀고 백성의 마음을 얻습니다. 사리분별력이 중요합니다.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잠언15:2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에돔의 멸망
시편137: 7절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고대에 종이 대신 도자기 조각이나 석회석 조각을 필기 매체로 사용된 것을 오스트라콘이라 부릅니다. 고대인들의 생활과 신앙을 엿볼 수 있고, 이집트나 이스라엘 등 여러 곳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인 호르밧 우자(이스라엘)에서 주전 6-7세기경의 히브리어와 에돔어 오스트라콘들이 발견되었으며, 한 히브리어 조각은 아랏 요새에 보내는 에돔의 침략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유다의 속국에서 벗어난 에돔은 오히려 유다를 위협하고,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파괴 시(BC586) 함께 유다인들을 학살하였습니다. 본 시편은 그 에돔의 심판을 호소합니다(사34:9;겔25-12-14). 시편의 기도와 선지자들의 저주는 응답되어, 에돔 왕국은 BC553년 바벨론에게 멸망됩니다. 이후 에돔 사람들은 유다 남부 지역으로 이동했고, 우여곡절 끝에 바벨론에서 돌아와 재건된 유대 사회에 통합되어 사라집니다. 모세 율법을 통해서는 에돔 족속은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께 갈 수 없지만, 예수의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에돔이나 상관 없이 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선포합니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암9:12)와 같이 아모스 선지자는 800년 전에 이 은혜를 예언하였고, 야고보의 주도로 예루살렘 총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세 율법 적용을 배제하였습니다(행15:13-29).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엡2:18,새번역)

마태복음11: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라, 그러면 단 하루도 일할 필요가 없다”(작자 미상).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이 그러하였습니다. 아담의 일은 에덴 동산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수고의 대가로 각종 아름답고 맛 있는 과일을 먹고, 주신 배우자 하와와 가정을 이루고, 지식과 지혜를 얻었습니다. 동산 관리를 위해서는 토질, 물과 동식물의 특성 등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지식 중 일부분입니다.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의 보고에 들어갈 특권을 받았던 것입니다. 지식의 즐거움을 일찍이 공자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않은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토로하였듯이, 아담은 일하면서 배우니 얼마나 행복하였을까요?. 다만, 선악과에 대한 금령을 받았는데, 그것은 지키기 정말 쉬웠습니다. 날씨는 좋았고, 일은 즐거웠고,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금령을 어기자,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동물은 말을 듣지 않고, 생존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저주받은 땅에서 심한 생존경쟁으로 내몰렸지만, 그리스도의 오심은 여기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저주를 친히 그 몸으로 담당하셨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타락 전 아담의 지위 이상으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자녀”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저주 받은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주님의 능력은 절대적입니다. 주님은 기도 응답의 약속을 남겨 놓으시고 부활승천하셨습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같이 우리의 일을 즐겁게 하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바로 주님과의 동행입니다. 따라서, 일도 구속의 관점에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4).

매일묵상(2025/5/5-9)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천 선교부
사도행전 10:36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을 보내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새번역)

순천은 연산군 시절(1500년) 유배된 김굉필(1454~1504)에 의해 성리학적 심신 수양을 중심으로 한 도학 사상이 뿌리내리며 ‘호남 사림’의 근원이 됩니다. 옥천서원 등 많은 서원이 설립된 것은 그 영향입니다. 불교 세력 또한 강하여, 백제 시대(514년)에 창건된 송광사는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승보 사찰이며, 태고종의 본산인 선암사도 자리잡고 있어서, 순천의 기독교 선교는 쉽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외곽 지역에 먼저 전파되어 여러 곳에 교회들이 세워졌고, 교인의 주류는 양반 선비가 아닌 가난한 농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신앙 열정은 매우 뜨거웠습니다. 순천 읍내에는 1906년경 최초의 교회가 설립되나, 남장로교에 의한 본격적인 선교는 오웬, 프레스톤, 코잇 선교사에 의해 시작됩니다(1909). 이들은 부임 직후 순천 지역을 둘러보았습니다. 순천은 이미 96개 교회가 설립되어 있었고, 세례 지원자가 7,367명, 주일 예배 참석자는 6,374명에 달하였습니다. 이에 남장로회 선교회에 순천 선교부 개설을 강력히 요청하여, 선교부가 설립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에도 이성과 상식은 중요합니다. 유교와 불교를 공격하여 신자를 얻는 것이 교회의 확장이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순종입니다. 순종은 삶 가운데 말씀의 실천으로 나타나며, 이 과정에서 성령님의 능력은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효과적인 복음 전도는 우리의 기도를 절실히 요청합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6:19).

전도서3:4절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4절은 인간의 모든 감정을 두 쌍의 대조되는 감정으로 묘사합니다: ‘울음과 슬픔’(부정적 측면), ‘웃음과 춤’(긍정적 측면)입니다. “울고 웃는다”는 개인의 슬픔과 기쁨의 감정을, ‘슬퍼하고 춤춘다’는 장례식이나 결혼식 등 공적인 감정에 대한 표현입니다. 특히, ‘슬퍼할 때’로 번역된 히브리어 ‘쎄포드’는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가슴을 친다’는 의미로서, 지인의 죽음 앞에서, 또는 인생의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표출하는 생생한 슬픔의 감정을 형상화한 말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하여 감정적 반응을 갖습니다: 좋다, 싫다, 평범하다 등. 그 감정이 증폭되면 울거나 웃게 되고, 공적인 자리에서는 애도(슬픔)와 춤으로 나타는데, 전도자는 그 감정을 유발하는 각각의 상황도 하나님의 섭리하에 있음을 교훈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그냥 울고 웃고 슬퍼하고 춤추면 안 됩니다. 그 배후에 서 계신 주님을 바라볼 줄 아는 믿음, 인내 그리고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욥의 신앙의 정수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이 죽을 병에 들자, 예수께 엎드려 살려달라고 간구합니다. 그 간절하심을 보신 주님은 일어나 그의 집에 들어가셔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아람어로 ‘달리다굼’(=귀여운 소녀야 일어나거라)이라 하시자, 죽었던 소녀가 일어납니다. 심히 울고 애통하던 모든 자들의 감정은 경이감과 함께 웃고 춤추는 감정으로 변했으나, 야이로의 딸은 수 십년 후 또 죽었습니다. 이는 죽은 자를 살려 영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막1:1).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전도서3:5절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인간의 희로애락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룬 4절에 이어, 본절은 ‘돌을 모으고 흩으며, 안거나 안아주지 않는 일’의 배후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언급합니다. 전단은 돌을 던지거나 모으는 목적이, 후단은 안거나 안아주지 않는 대상이 제시되지 않아 해석의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돌과 관련한 해석입니다: (1)돌을 건물의 재료로 보아 건축 재료를 모으거나 제거하는 행위라는 주장(왕상3:19,25). (2)돌을 밭의 방해물로 보아 돌을 모으거나 던짐으로 밭을 비옥하게 하거나 황폐하게 하는 행위라는 주장(사5:2). (3) 돌을 보석으로 보아 부를 축적하거나 분배하는 행위라는 주장(출25:7). 위 세 가지는 모두 성경적 근거와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므로, 함께 고려하면 될 것입니다. 후단의 경우, 이성에 대한 애정 표현으로 해석한다면, ‘안을 때’는 사랑할 때, ‘안는 일을 멀리할 때’는 사랑이 식었을 때란 의미가 되어, 애정 관계와 같이 매우 개인적인 부분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하에 있음을 말합니다. 사실, 사람의 마음은 주님의 손 안에 있고,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임의로 주관하십니다. 따라서, 주님만 두려워 하여야만 합니다. 페르샤 왕궁의 술관원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훼파 소식에 먼저 민족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왕의 허락을 받아 유다 총독으로 부임하여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도록 간구합니다. 넉달이 지나 아닥사스다 왕 앞에서 술 잔을 올릴 때, 주님은 왕의 마음을 움직여서 유다 총독의 직을 받게 하신 것이 좋은 예입니다. “여호와께서 왕의 마음을 다스리시며 그 생각의 방향을 도랑물처럼 마음대로 바꾸신다.”(잠언21:1,현대인의성경)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에돔의 신: 코스
역대하 25:14절
“아마샤가 에돔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

유다 왕 아마샤(796-767 BC)는 에돔을 쳐서 그 신들을 가져와 경배하나, 복은커녕 선지자의 심판을 받습니다. 이 에돔 신은 ‘코스’로 추정됩니다. 앗수르의 에돔 조공 기록에 따르면, 디글랏빌레셀(745-727 BC)과 산헤립(705-681 BC)의 시대에는 에돔 왕의 이름이 ‘코스 신은 왕’이라는 뜻의 ‘코스말락’이었고, 에살하돈(680-669 BC) 시대에는 ‘코스는 위대함’이라는 뜻의 ‘코스가바르’가 왕이었습니다. 에돔 지역의 호르밧 키트밋 유적지에서 발견된 인장 주인의 이름은 ‘슈브나코스’로 역시 ‘코스’ 신이 등장합니다. 가나안 지역은 자신의 신을 이름에 넣어 짓곤 하였기에 ‘코스’는 에돔 신들 중 하나이나 그 우상의 모습은 밝혀진 바 없습니다. 다만, 신약 시대 에돔 지역 거주인 나바테안 사람들의 신 ‘두슈라’(= 산의 신)와 유사한 역할, 즉 ‘산신령’으로 보입니다. 셔우드 홀의  「조선회상」에 따르면, 조선은 무당의 지배하에 있었고, 서양의학의 진출은 그들의 고객을 빼았아 갔기 때문에, 의료사고가 발생한다면 큰 공격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의사의 치료(수술)는 매우 조심스러웠습니다. 조선의 공포의 병은 폐병으로, 미신과 무당의 굿이 치유할 수 없었지만, 과학지식으로 무장한 서양의학은 정복했습니다. 복음이 의학과 함께 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치료 자체는 주님의 능력이므로 병, 특히 중병의 경우 반드시 교회에 알려 함께 기도해야만 합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5:14).

복음과 역사
사도행전 17:31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일전에 한국사 통서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자는 유명한 한국사 태두이나 그의 결론은 “평생 역사를 연구하였으나 역사의 주체나 방향, 목적도 잘 모르겠다”입니다. 그 학자 뿐 아니라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는 세속사가들은 “도대체 역사란 무엇이며, 그 역사를 움직여 가는 주체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늘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공부할수록 오리무중입니다. 이는 많은 우연과 필연이 결합되어 사건이 만들어지고 해결되지만, 그 인과관계나 일반법칙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면, “세상이란 무엇일까요?” 성경만이 바른 답을 줍니다. 성경은 “세상이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창조하셨으나, 인간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심판하에 있는 곳이다”고 단언합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습니다. 재판장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만, 주님의 죽으심은 그분을 영접한 모든 자의 죄를 대속하시려는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무궁한 긍휼과 사랑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고, 방향은 심판 날로 곧장 직행하고, 목적은 모든 불순종하는 것들(불법, 사망, 병, 마귀, 악인 등)을 바로잡아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것으로, 인간의 구원과 부활은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

매일묵상(2025/4/28-5/2)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남장로회 순천 선교부
요한1서 3:23절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고려 시대 승평(지금의 순천)에서는 사또가 이임할 때 8필의 말을 선물로 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삿짐을 위한 배려였겠지만, 괸리들이 말을 되돌려 주지 않자 아예 말을 선물로 주었던 것입니다. 충렬왕에 이르러 양심적인 관리 부사 최석은 말 여덟필이 딸려 오자, 그 사이에 태어난 망아지를 포함 아홉 마리의 말을 돌려 보냈습니다. 승평 사람들은 감동하여 “팔마비”(八馬碑)를 세웠고, 이것이 조선시대 ‘선정비’ (善政碑)의 효시입니다. 부사 최석 이후 이임 사또에게 말바치는 전통은 끊어졌지만, 말 대신 다른 것으로 바뀌어졌을 뿐입니다. 순천의 교회들도 같은 문화가 있었듯 싶습니다. 이덕주 교수의 말입니다: “팔마비 앞에 “50대 1의 경쟁을 뚫고” 부임한 후배 목사가 찾아와 털어놓은 푸념이 불현듯 생각난다. 백 명 조금 넘는 교인들이 원로 목사님 은퇴금에다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느라 등골이 휘어져 고생하고 있는 것이 너무 안쓰러워 밀린 부담금은 입 밖에도 꺼내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나, 팔마비의 고을 순천은 나주와 쌍벽을 이루는 남도 “양반 고을”입니다. 교회는 교회가 터 잡고 있는 지역의 문화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순천 선교의 특징도 이 문화에서 유래합니다. 다만, 교회는 최석처럼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능력인데, 그들만이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전도서 3:3절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2절에서는 인간의 생사와 국가의 존망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를, 본절부터는 삶의 제반 사건들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하에 있음을 선포합니다. 3절 전단은 ‘죽일 때와 치료할 때’를 병치합니다. ‘죽인다’는 표현은 전쟁 혹은 형 집행을 의미합니다. 전쟁의 발발이나,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선친께서도 6.25 당시 한 전투에서, 불룩한 양쪽 바지 주머니에 여러 개의 총알이 뚫고 지나갔으나 부상은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열왕기상 22장은 이스라엘 왕 아합의 죽음과 관련된 하늘의 결정 과정을 기록합니다. 아합은 아람에게 빼앗긴 길르앗 라못을 치기로 회의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은 길르앗 라못에서 범죄한 아합을 죽이시려고 회의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 회의 내용은 선지자 미가야를 통해 아합과 백성들에게 전달됩니다. 분노한 아합은 병사로 변장하여 참전하나 우연히 쏜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역사의 주인되신 주님이 두렵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편, ‘치료시킨다’는 표현은 상처나 질병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을 살려 건강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도 중한 병에 걸리면 치료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데, 고대에는 더 하였을 것입니다. 세균이란 존재도 모르고, 신체 내부의 장기 위치나, 암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그 시대에, 병에 걸리면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도저히 살아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가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는 권면의 배경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죠! 하나님은 우리가 건강하기를 원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5:15).

전도서 3:3절(2)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3절의 후단 “헐 때와 세울 때”는 어구는, 성벽, 건물, 포도원 등을 세우거나 허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솔로몬은 성전, 성벽, 왕궁, 정원 등 많은 건축물을 지었습니다(2:4). 시바 여왕은 솔로몬이 건축한 왕궁, 시종들의 관복, 성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크게 감동할 정도였습니다(열상10:3-5). 솔로몬은 이 모든 것들을 자신의 계획과 건축이라 생각하였으나, 후일에 보니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세우고 헐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본문은 건축물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계획과 활동을 포함합니다. 경건한 한나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으셨다”는 사실을 모르는 한나는 심히 괴로워하였고, 서원기도를 합니다. 그때서야 주님은 한나의 태를 열고 사무엘을 주십니다. 약 5년 뒤, 한나가 실로로 가서 서원을 이행하자, 제사장 엘리는 감동하여 자녀의 축복을 빌어줍니다. 그 후 주님은 한나에게 다섯 자녀를 주셨습니다. 20년이 지나 사무엘은 선지자와 사사로서 이스라엘의 사표요, 왕정을 세우는 토대가 되나, 주님은 불순종한 엘리의 두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이같이 사무엘서는 역사의 배후에서 가정과 국가를 ‘세우고 허시는’ 주님을 증언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격변의 시기입니다. 세상은 자신이 좋아하는 정치인들과 정당에 투표하여 자신들의 정부를 세우고자 하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통치를 자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른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하고 투표해야 합니다. 지금은 나라를 통치할 바른 대통령과 정부를 “세울 때”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2:7)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에돔, 유다의 속국
역대하 8:17절
“그 때에 솔로몬이 에돔 땅의 성읍인 에시온게벨 항구와 엘롯 항구로 갔더니”(새번역)

성경의 에돔 땅은 사해 남쪽지역으로 수도는 보스라입니다(암1:12). 에돔(=붉다) 땅은 나무가 없고 붉은 바위로 이뤄진 산악이라 농업과 목축업에는 부적합하여, 에돔 경제는 사해에서 추출한 소금과 바위에서 얻어낸 향신료 수출에 의존하였습니다. 에돔 땅 자체는 매력이 없었지만 구리광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무역로(왕의 대로), 그리고 에시온게벨과 엘롯이란 홍해 항구 때문에 내지국가 유다에게는 매력적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이 항구들을 통해 오빌에서 금을 수입한 바 있습니다. 에돔의 홍해 항구 중 하나인 엘롯과 관련하여 중요한 유적지(‘텔 엘-켈레이페’)가 1936년 발굴되었습니다(넬슨 글루엑). 이 유적지는 주전 10세기경 토기들이 출토되었으며 솔로몬 시대의 요새가 있었음도 밝혀졌고, 유다 임금 요담(왕하15:32-38)의 것으로 보이는 인장 역시 발견된 바 있어, 에돔이 유다의 속국이었음을 입증합니다. 에돔은 다윗 왕 때부터 여호사밧 왕의 시대까지 약 150년 동안 유다의 속국이었으나, 여호사밧이 죽자 왕을 세워 독립하였습니다(왕하8:20). 에돔과 이스라엘은 동일한 이삭의 육신의 후손이나, 성경은 에돔을 이방민족 중 하나로 여깁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누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자인가?’라는 영적 기준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냐 에돔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는 말씀처럼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고 부활하사 아브라함의 언약을 상속받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부가 중요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9).

히브리서12:1절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지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모든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목표를 향해 꾸준히 달려갑시다.”(현대인의성경)

“2019년 SBS 금토드라마 ‘열혈사제’의 주인공 김인경 수녀(백지원 배우)는 구담구의 비리 세력을 잡기 위해 잠시 수녀복을 벗고 ‘전설의 타짜 평택 십미호’로 변신하여 강렬한 카리스마를 선보였습니다. 그녀가 도박을 떠난 이유는 죽은 남동생에 대한 죄책감, 죽고 죽이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도박의 허무함과 죄악을 통감한 결과입니다. 김인경 수녀는 주님께 귀의한 이후 20년간 숨어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살았지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다시 한 번 평택 십미호로 돌아갑니다. 작가는 그녀의 행동을 ‘단 한 번이다’는 전제와 주임 수녀의 허락, 고해성사를 내세워 정당화합니다. 이러한 작가의 설정에 대하여 시청자들이 얼마나 납득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작품은 작가의 일방적인 의도만으로 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독자를 감동과 열광으로 몰고가는 별점 만점의 드라마가 있습니다. 역사란 무대에서 상영되는 드라마입니다. 그 배우는 인간이고, 작가는 하나님이십니다. 통상의 드라마의 배우가 죽었다고 퇴장하나 실제는 살아 있는 것과 같이, 죽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모든 사람들은 마지막날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는 살아 있는 드라마입니다. 결론과 과정이 모두 열려 있으며, 배우와 작가는 서로 상호작용을 통하여 이야기를 만들어갑니다. 작가의 스토리와 반전에 놀라며, 배우들의 삶에 감탄하는 독자들은 천만천사들입니다. 그들은 부자나 권력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