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5/12-16)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아다무락’에 세워진 순천 선교부
사도행전 16:32절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오늘 본문은 빌립보 옥에 갇힌 바울이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는 장면입니다. 프레스턴, 벨, 윌슨 등 광주 선교사들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광주 선교부 개척 경험을 가진 김윤수를 순천으로 보내 남봉산 자락, 매곡동 언덕 2천여 평 땅을 구입합니다. 신옥우 장로(순천중앙교회)의 말입니다. “본래 여그 일대가 아다무락이라 혀서 아그덜이 죽으면 뼈를 항아리에 넣어 갖다 버리거나 돌무더기로 시체를 덮어 놓던 곳이지라. 사람덜이 잘 오덜 안던 곳이제잉. 그런께 선교사덜이 적은 돈 들여 넓은 땅 살 수 있었던게라.” 광주, 목포처럼 순천 선교부도 버려진 땅에 자리잡았습니다. 즉, 어려서 죽은 아이 시체나 돈 없어 무덤을 제대로 쓸 수 없던 가난한 집에서 풍장 지내던 땅을 헐값에 구입한 것으로 선교사들의 지혜입니다. 문제는, 선교사들의 집과 병원, 학교를 지을 자금 그리고 가족의 생활비였습니다. 이 책무는 1911년 8월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하는 선교사 프레스턴에게 맡겨졌습니다. 프레스턴은 막막하였겠지만, 하나님은 이미 더럼의 실업가 왓츠 장로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2천년 전 사도 바울의 일행이 배를 타고 빌립보로 갈 때 유럽의 문명을 싣고 갔다고 평가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구원을 얻는다”는 선포는 단순히 말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뜻합니다. 복음의 삶에 적합한 교육(학교), 근대화된 치료 수단(병원)은 필수적이므로, 삼각전략은 단순히 교인확보 수단만은 아닙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36).

전도서3:6절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본문의 전단과 후단은 목적어가 분명하지 않아서 여러 해석이 등장하나, 일반적으로 재산이나 소유물을 의미합니다. 물건을 찾고 잃을 때와, 성을 지키고 버릴 때가 있는 것 같이 인생은 이 양 극단의 상황이 언제든지 교차될 수 있습니다. 좋은 예가 항해입니다. 고대에서 무역을 위해 항해할 때, 여기 저기 다니며 벌어들인 재산으로 기뻐하지만, 폭풍이 몰아쳐 배가 위태하면 아무리 귀중한 물건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원거리 항해가 본격화 된 근대에는 배를 공동 소유하거나 손실을 분산하는 해상 보험이 발달합니다. 예측불허의 세상에서 얻은 삶의 지혜입니다.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재산을 얻고 지킬 때가 있고, 단념하거나 잃어버릴 상황이 나타납니다. 양단을 모두 겪으면, 부와 가난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토로합니다. 신자는 최선을 다하지만 그 밖에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합니다. 그가 참된 지혜자입니다. 지금 솔로몬은 양극단에 놓여 아무 관계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조차 하나님의 섭리의 한 부분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기한이 되면 생명은 죽음으로, 울음은 웃음으로, 전쟁은 평화로 뒤바뀌듯이, 인생에는 역경과 순경, 성공과 실패가 교차하며, 부함과 가난도 이와 같습니다. 만약 본문을 통해 인생의 한편에서 다른 극단을 보는 법을 배우면 삶의 균형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땐, 성공 중에 교만하지 않고, 실패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 숨겨진 ‘천국이란 보화’를 발견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소망 중에 즐거워 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라고 권면합니다(롬12:12). 산상수훈의 시작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전도서3:7절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본절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1) 연결된 하나의 상황을 전제: 전단은 극도의 슬픔으로 옷을 찢어 비통함을 표시하고, 슬픔이 누그러지면 다시 옷을 수선하여 입었던 이스라엘의 관습을 반영하며, 후단은 슬픔이 너무 클 경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슬픔이 사라진 후 비로소 입을 열어 말하는 모습을 함께 묘사하며, 슬픔과 비통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교훈한다. (2) 각각 다른 상황을 전제: 전단은 극도의 슬픔을 나타내나 후단은 겸손히 자신을 숨기며 잠잠히 있을 때와 활발히 자신을 드러낼 때가 있음을 알려주는데, 그 판단 기준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전자의 해석도 가능하나 후자의 해석이 더 보편적입니다. 성경의 예 두 개를 들겠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왕 여호람 때, 아람 장군 나아만은 왕의 친서를 들고 나병을 고쳐달라고 찾아옵니다. 왕 여호람은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면서 옷을 찢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선지자 엘리사는 나아만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요청하고, 나아만이 오자 하룻 길 되는 요단 강으로 보내어 고칩니다. 기적의 치유를 경험한 나아만은 이스라엘 하나님만 참 신임을 깨닫고 믿습니다. 사람의 절망은 하나님의 구원의 시작입니다. 한편, 전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베냐민 지파 사울이 왕으로 지명되었을 때 일부는 비웃었으나 그는 잠잠하였습니다. 얼마 후 암몬 족속의 길르앗 침공 소식을 듣자, 백성을 이끌고 구원합니다. 감복한 백성들은 사울의 왕 됨을 비웃은 자들을 죽이자고 할 때, 사울은 덕을 베풀고 백성의 마음을 얻습니다. 사리분별력이 중요합니다.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잠언15:2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에돔의 멸망
시편137: 7절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고대에 종이 대신 도자기 조각이나 석회석 조각을 필기 매체로 사용된 것을 오스트라콘이라 부릅니다. 고대인들의 생활과 신앙을 엿볼 수 있고, 이집트나 이스라엘 등 여러 곳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인 호르밧 우자(이스라엘)에서 주전 6-7세기경의 히브리어와 에돔어 오스트라콘들이 발견되었으며, 한 히브리어 조각은 아랏 요새에 보내는 에돔의 침략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유다의 속국에서 벗어난 에돔은 오히려 유다를 위협하고,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파괴 시(BC586) 함께 유다인들을 학살하였습니다. 본 시편은 그 에돔의 심판을 호소합니다(사34:9;겔25-12-14). 시편의 기도와 선지자들의 저주는 응답되어, 에돔 왕국은 BC553년 바벨론에게 멸망됩니다. 이후 에돔 사람들은 유다 남부 지역으로 이동했고, 우여곡절 끝에 바벨론에서 돌아와 재건된 유대 사회에 통합되어 사라집니다. 모세 율법을 통해서는 에돔 족속은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께 갈 수 없지만, 예수의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에돔이나 상관 없이 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선포합니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암9:12)와 같이 아모스 선지자는 800년 전에 이 은혜를 예언하였고, 야고보의 주도로 예루살렘 총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세 율법 적용을 배제하였습니다(행15:13-29).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엡2:18,새번역)

마태복음11: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라, 그러면 단 하루도 일할 필요가 없다”(작자 미상).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이 그러하였습니다. 아담의 일은 에덴 동산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수고의 대가로 각종 아름답고 맛 있는 과일을 먹고, 주신 배우자 하와와 가정을 이루고, 지식과 지혜를 얻었습니다. 동산 관리를 위해서는 토질, 물과 동식물의 특성 등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지식 중 일부분입니다.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의 보고에 들어갈 특권을 받았던 것입니다. 지식의 즐거움을 일찍이 공자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않은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토로하였듯이, 아담은 일하면서 배우니 얼마나 행복하였을까요?. 다만, 선악과에 대한 금령을 받았는데, 그것은 지키기 정말 쉬웠습니다. 날씨는 좋았고, 일은 즐거웠고,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금령을 어기자,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동물은 말을 듣지 않고, 생존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저주받은 땅에서 심한 생존경쟁으로 내몰렸지만, 그리스도의 오심은 여기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저주를 친히 그 몸으로 담당하셨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타락 전 아담의 지위 이상으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자녀”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저주 받은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주님의 능력은 절대적입니다. 주님은 기도 응답의 약속을 남겨 놓으시고 부활승천하셨습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같이 우리의 일을 즐겁게 하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바로 주님과의 동행입니다. 따라서, 일도 구속의 관점에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