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5/19-23)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왓츠기념 선교부
이사야 42:6,7절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1911년 8월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는 선교사 프레스톤은 선교 개척비와 선교사 모집의 책임을 떠맡았습니다. 36세의 프레스톤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만, 담당해야만 하죠! 그 무렵 미국 남장로회 교인들은 해외 선교비로 ‘교인 한 명이 매년 4달러씩’ 헌금하자는 평신도 선교운동이 활발하였습니다. 순회 강연을 하던 프레스톤은 그린빌에서 실업가 그레이엄을 만납니다. 그는 1909년 전주 신흥학교 건립비로 1만 달러(약 20억원)를 기부한 바 있는데, 더럼의 실업가 왓츠를 소개하며 “큰 것을 요구하라.”고 귀띔했습니다. 마침, 왓츠가 장로로 봉직하던 더럼제일교회 담임 목사는 전주의 전킨 선교사 처남이었습니다. 왓츠는 “순천 선교부 전체를 맡아달라.”는 프레스톤의 요청을 받은 뒤, 순천 선교부 개척에 필요한 선교사 13명의 생활비로 매년 13,000 달러(약26억원)를 부담하겠다고 약속합니다. 1912. 8월 이 소식을 보고받은 남장로회 선교부는 순천 선교부 개척 작업을 서둘렀습니다. 순천 선교의 특징은 과학적·체계적·이성적인 선교정책이지만 그 안에는 주님과 조선인에 대한 선교사들의 뜨거운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1910. 8월 한일합방을 당하여 조선이 역사에서 사라짐으로 절망하는 순천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은 순천 선교부의 복음과 선진문물(병원과 학교)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계셨습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전도서3:8절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3:1절은 인생의 모든 일에는 적절한 시기가 있음을 선언하고, 2-8절은 반복 예증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밝힙니다. 본절은 그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사랑과 미움, 그리고 국가들의 애증관계인 전쟁과 평화의 때를 다룹니다. 전단의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의 표현은 사랑이 미움으로 미움이 사랑으로 언제든지 변할 수 있음을 내포합니다. 인간의 감정은 예측불가입니다. 사랑할 때는 마치 사랑만 있고, 미워할 때는 증오만 있는 것 같지만, 이런 감정들은 시간과 상황에 따라 변하게 마련입니다. 감정의 문제는 아주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사항이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여기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을 증언하는 책이 성경입니다. 사울 왕은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온 다윗을 신임하여 군대의 장을 삼으나, 전쟁터에서 돌아올 때 영접나온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다’이라는 노래를 듣자 분노하여 평생 다윗의 대적이 됩니다. 결국 다윗은 쫓겨나 도망다니다가 블레셋으로 망명합니다만, 이는 블레셋을 통해 사울을 죽이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의 시작이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을 막을 가장 뛰어난 장수였기 때문입니다. 개인을 넘어 국가 간의 전쟁과 평화는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은 BC 609년 갈그미스에서 바벨론과 애굽 왕 느고의 전쟁을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으로 설명합니다. 유다 왕 요시야는 고집 부리다가 느고의 손에 죽지만(역하35:20-27), 유다의 멸망을 보지 않도록 배려하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언16:7).  

전도서3:9절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3:1-8절은 세상의 모든 일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가 작동함을 예증하고,  9-10절에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는 수고의 헛됨을 밝힙니다. 본절은 ‘마 이트론’ 즉, ‘무슨 이익이 있느냐?’로 시작됩니다(참고 1:3절). 이 수사적 질문의 방식은 상대방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 효과적인 교육 수단이나 본서에서는 부정적 대답을 전제합니다. 하나님의 시기를 알지 못하는 한, 인간의 수고 그 자체는 아무런 유익도 없습니다. 농사의 경험이 없는 일반인은 파종의 때를 모릅니다. 파종의 시기를 무시하고 파종한다면 헛수고입니다. 또 한국의 농사 경험을 가지고 팔레스틴에서 봄에 밀을 심고 가을에 거두려는 시도는 잘못입니다. 팔레스타인은 지중해성 기후를 가지고 있어, 겨울철 강우량이 많고 여름은 건조합니다. 이러한 기후 조건은 밀이 겨울 동안 충분히 자라도록 돕고, 봄철에 수확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에서는 가을(10-11월)에 밀을 심고 봄(4-5월)에 거두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굽게 만드신 것들을 사람이 아무리 노력하여도 곧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을 공동 창업했지만, 1985년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해고당하는 시련을 겪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잡스의 교만과 독단 때문입니다. 잡스는 픽사(Pixar)를 창업한 뒤 토이 스토리의 성공을 거두자, 비로소 전문가들이 상대방을 존중하며 일할 때 큰 성과가 산출됨을 깨닫습니다. 그 즈음 애플은 위기에 처하고 잡스의 복귀를 요청하자 성공의 묘리를 깨달은 잡스는 아이폰 성공의 신화를 써 올립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전3: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두메아 사람들
오바댜 1: 21절
“구원 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본문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멸망(BC586)에 동참한 에돔을 다스리나, 그 모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속할 것을 말합니다. 세속사에서 에돔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지만(BC553), 바벨론이 페르샤에게 패망한(BC539) 이후. 아라비아의 부족인 나바테아 사람들이 에돔 땅을 차지하고, 에돔 사람들은 네게브 북쪽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헤브론을 수도로 삼고, 마레사와 벧술을 건설합니다. 이 도시들은 물론 유다인들에게 속하였던 곳이나, 유대 백성은 바벨론에서 귀환 후 예루살렘 중심으로 거주함으로 이 지역은 버려졌습니다. 에돔 사람들은 헬라어로 이두메아로 불리웠고, 유대인들은 경멸하였습니다. 외경 집회서(BC180)의 한 대목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민족들이 있다. 그들은 정말로 혐오스럽다. 세겜에 사는 사마리아인들과 블레셋 사람들, 그리고 거만하게 살아가는 에돔 사람들이다.”(집회서 50: 25, 26).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약속하셨으나 야곱 후손이 범죄하자 쫓겨났습니다. 에서의 후예인 에돔은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나,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민족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쫓겨난 이스라엘 민족 대신 약속의 땅의 일부를 차지하고 헤롯 시대에는 유다인들도 다스리게 됩니다. 내생의 삶은 은혜에 의해 주어져 믿음으로 받지만, 금생에 속한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노력하고 순종하는 자가 차지합니다. 따라서, 자녀들에게 신앙유산을 물려주고 삶의 기술을 습득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예레미야애가3:33절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일이란 창조물을 돌보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배우고, 보람을 느끼는 즐거움의 수단이었으나, 타락 이후 땅이 저주를 받아 수고로움이라는 요소가 들어왔을 뿐입니다. 그 저주는 그리스도 안에서 제거되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의 멍에를 메고 부활하신 예수로부터 배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신앙을 떠나서, 지혜자들은 일의 즐거움을 토로합니다. 호학(好學)의 사람 공자는 배움과 즐거움의 관계를 “지지(知之), 호지(好之), 낙지(樂之)”로 설명하는데, 어떤 것을 아는 사람은(지지자),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호지자),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낙지자)고 평가합니다. 또, 노벨상을 수상자 리차드 파인만은 “발견하는 즐거움”이 물리학 공부의 원동력임을 밝힌 바 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서 우리의 일에 숨겨두신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편, 신앙 생활은, 믿음의 즐거움, 고된 노동, 안식을 담고 있습니다. 세상 지혜와 차이는 단연 ‘믿음의 즐거움’입니다. 노동이 즐거움을 주더라도, 노동은 수고를 요구하고 그 결과는 헛되기 마련입니다. 이는 죽은 뒤에 모든 사람에게 잊혀지는 망각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노동도 ‘믿음의 이야기’ 내에 위치하면 즐거움으로 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저주를 제거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발견의 즐거움도 중요하지만, 예수의 멍에를 메고 그분으로부터 배우는 즐거움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잡아야 합니다. 그분의 멍에를 져 보면, 그 멍에는 자비롭고 그분의 짐은 가벼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