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6/6/1-5)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이거두리(2)
마가복음 2:3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네 사람은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주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은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신 뒤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말씀하셨고, 그는 곧 일어나 모든 사람 앞에서 걸어 나갔습니다. 중풍병은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에게 선포된 죽음의 그림자이며,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영적 상태—곧 죄성—를 상징합니다. 육체의 병은 의사가 고치지만, 영혼의 병인 죄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치유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가 필요합니다. 거두리 이보한의 전도 일화입니다. 한 번은 집안의 진사 벼슬을 한 양반을 끈질기게 찾아가 전도하여 마침내 “다음 주일에 나가보세”라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진사는 주일이 가까워지자 멀리 떨어진 절로 숨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주일 아침, 거두리는 이미 절간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전날 밤 눈이 내린 것을 핑계로, 진사는 “양반 체면에 어찌 눈밭을 헤치고 가겠나, 다음으로 미루세”라고 하자, 거두리는 “걱정 마시고 따라만 오십시오”라며 앞장섰습니다. 진사가 따라 나서보니, 절간 마당에서 예배당까지 이어지는 30리 산길의 눈이 이미 말끔히 치워져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주일 예배에 참석했고, 그날 목사의 설교에 깊은 감동을 받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후에는 장로가 되었습니다. 전도는 사랑의 한 표현입니다. 사랑은 장애물을 제거해 주고, 대신 길을 열어주며, 상대가 주님께 나아올 수 있도록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도라는 사랑은 믿음의 눈이 열릴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사랑은)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7).

전도서 8:1절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사람의 내면이 변하면 얼굴도 변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비참한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 속에서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 마음의 무거움이 얼굴에 드러나자 아닥사스다 왕은 즉시 그의 근심을 알아차렸고, 결국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 유다 총독으로 파송됩니다(느 2:1–9). 내면의 상태가 얼굴에 드러난 대표적 장면입니다. 그러나 본절은 지혜가 사람의 얼굴을 밝히고, 굳고 사나운 표정까지 변화시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광채가 나게 한다’는 얼굴에 생기가 돌고 밝아진다는 뜻이며, ‘사나움’은 완고하고 굳어진 표정을 의미합니다. 지혜는 사람의 태도와 인격을 부드럽게 변화시키는 힘을 가졌습니다. 사실, 어리석은 사람은 쉽게 분노하고 얼굴이 굳어 있고 남을 정죄하지먄, 지혜로운 사람은 표정이 밝고 태도가 부드럽고 사람을 편안하게 합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자가 배워 지혜롭게 되면 당연히 얼굴조차 변하게 마련입니다. 지혜 중의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굴과 태도를 변화시킨 사례가 거듭 등장합니다.  한나는 제사장 엘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뒤 “다시는 근심 빛이 없었”습니다(삼상 1:18). 또한 사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후 살기등등한 표정과 태도가 사라지고,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이유는,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깨달을 때, 사람의 마음이 바뀌고 결국 얼굴과 삶 전체가 변화합니다.“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전도서 8:2절
“내가 권하노라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여러방면에서 바른 판단이 필요하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섭리 아래 세워진 왕에 대한 복종의 문제는 중요합니다(2-4절). 인간의 본성이 순종을 싫어하여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처럼, 왕에게 순종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왜 통치자에게 순종해야 할까요? 솔로몬은 그 이유를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한 것”에서 찾습니다. 그 맹세는 왕에 대한 충성 서약인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한 언약입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죽은 후 이스라엘 장로들이 헤브론에 모여 하나님 앞에서 다윗과 언약을 맺고 기름부어 왕으로 세운 사건이 그 예입니다(삼하 5:3). 물론 왕의 권한이 무제한은 아닙니다. 왕에 대한 순종은 왕이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점이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원리를 모든 권세로 확장합니다(롬13:1). 정당한 권세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순종이며, 불순종은 권세자의 칼을 부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양심 때문에 순종하라고 말하는데, 권세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정의실현의 역할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현실의 통치자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현하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선거를 통해 통치자를 세우고, 국민이 주기적으로 정치적 심판을 행함으로 권력의 남용이 없도록 통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더 성숙한 체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 선행이나, 국가의 정의나,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도 결국 ‘사랑’이라는 율법의 완성으로 귀결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13: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므깃도
역대하 35:22절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주전 609년 유다 왕 요시야는 므깃도에서 전사하는데, 애굽과 앗수르가 연합하여 바벨론과 대립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무리하게 군사적 개입을 시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역대기자는 느고의 말을 ‘하나님의 입에서 나왔다’고 평가합니다. 요시야는 정치적 판단을 잘못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고, 유다의 멸망을 앞당겼다는 사실은 바른 판단의 중요성을 일깨우지만, 바벨론 침공과 유다의 멸망을 보지 못한 것은 축복입니다. 므깃도 요새는 1925년 록펠러의 후원을 받은 시카고대학교 근동연구소에 의해 발굴이 시작되었습니다. 연구소는 아합 시대의 므깃도를 발굴하는 등 고고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지만 고고학 기술의 미흡으로 여러 문제들이 드러났습니다. 그에 따라, 현대고고학은 유적지 전체를 발굴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70% 이상을 남겨둡니다. 이후 이스라엘 장군이자 고고학자인 이갈 야딘이 히브리대학교 프로젝트로 1960~1971년 사이 네 차례 발굴을 진행했지만, 그 결과는 당시 출판되지 못하고 2005년에야 정리되어 보고서로 나왔습니다. 시카고대와 히브리대가 주로 철기 시대(이스라엘 왕국 시대)에 집중했다면, 1994년 이후 텔아비브대학교의 발굴은 청동기 시대, 즉 성서 이전 시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최근 발굴은 다양한 과학자들의 참여로 더 정확한 연대기와 시대상이 제시되어 그 학문적 성과가 큽니다. 이 세상은 지혜로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사랑 가운데서 행하되, 분별력과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1:9).

창세기 45:5절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본절은 유다의 효성과 형제사랑을 듣고 감동한 요셉이 자신들 드러내고 형제들의 죄를 용서하는장면입니다. 박혜란 목사는 『목사의 딸』에서 아버지 박윤선 박사의 신학과 인격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신학적 평가보다 더 깊은 상처는 부친의 편애 문제로 보입니다. 그녀는 전처 소생으로서 후처와 그 자녀들에 대한 부친의 편애는 그녀의 마음에 분노를 남겼습니다. 좋은 학벌, 3년의 신학공부, 난지도 목회, 기도, 성경 읽기로도 그 상처는 치유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녀는 한국교회의 우상화를 막으려고 책을 썼다고 하나, 자녀로서 아버지의 명예를 지켜야 할 부분까지 폭로한 점은 아쉬웠습니다. 또한 후처 소생들과의 대화 시도 없이 일방적 서술로 끝난 점도 한계로 보입니다. 그 반면, 유다는 편애 속에서 상처받고 범죄의 길로 갔지만, 세월 속에서 징계와 아버지의 슬픔을 보며 변화되었고, 결국 부친과 동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고 결단합니다. 감동한 요셉은 자신을 드러내며, 그들의 범죄를 용서합니다. 회개와 그에 따라 주어지는 용서는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과 행동의 변화이며, 그 시작은 사랑, 특히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세상에 보내사 우리를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결핍은 사람을 무너뜨리지만, 무너진 자리에서도 사랑은 치유와 회복의 힘을 갖고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형제 사랑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긴 야곱의 아들 요셉과 유다는 그 빛나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매일묵상(2026/5/25-29)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이거두리
호세아 6:6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선지자 호세아는 북왕국 말기(주전 8세기)에 활동했습니다. 이 시기는 겉으로는 풍요로웠지만, 실제로는 영적·도덕적 타락이 심하였기에 선지자는 백성들을 질타하였습니다. 그 중 본절은 “형식보다 사랑, 제사보다 관계”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담겼습니다.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자 바리새인들이 비난하였습니다. 그때 이 말씀을 인용하시며(마9:13)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 신앙이 아니라 실제적 사랑임을 강조하셨고, 회심한 이보한은 직설적으로 이 말씀을 실천합니다. 그는 서자 출신에다 어려서 열병으로 한쪽 눈을 잃었고 ‘반골’ 기질이 농후했습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교회의 제도권 밖에서 ‘파격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상갓집에서 노래해 주고 받은 품삯으로 거지들을 먹이거나, 혹은 그들을 끌고 부잣집으로 가서 거둬 먹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소작인들의 빚을 받아오기는커녕 오히려 빚을 탕감해주고 돌아온 이야기, 나무를 팔지 못한 나뭇꾼들을 부잣집에 데리고 다니면서 팔아준 이야기, 부잣집 아들과 거지의 옷을 바꿔 입힌 이야기, 거드름 피는 서울 양반들의 ‘줄 빰’ 돌린 이야기, 교인 변호사를 찾아가 ‘천국에 달아 두라.”며 돈을 빌려 거지들을 먹인 이야기 등, 전라도 땅에는 그의 선행에 관한 이야기들이 풍부합니다. 그 어려운 일제 시대 가난한 이들을 돌본 그의 행동은 율법보다 사랑, 형식보다 긍휼, 종교보다 사람을 선택한 용기 있는 삶입니다.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전도서 7:28절
“내 마음이 계속 찾아 보았으나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천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내가 찾았으나 이 모든 사람들 중에서 여자는 한 사람도 찾지 못하였느니라”

전도자는 인생 전체를 설명하는 궁극적 원리는 찾지 못했지만, 부지런한 탐구 끝에 세 가지 중요한 발견을 기록합니다. ① 악의 유혹은 파괴적이다(7:26) ② 덕 있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7:28) ③ 인간은 본래 정직하게 지음 받았으나 스스로 타락했다(7:29). 본절(28)은 두 번째 발견, 즉 인간의 도덕적 결핍에 대한 관찰입니다. “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극히 드물다는 뜻으로, 전도자는 “참된 덕을 가진 사람을 거의 찾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자는 한 사람도 찾지 못했다’는 표현은, 여자가 먼저 유혹되어 타락한 창세기의 증언을 반영하며, 인간 전체의 타락이란 29절의 결론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덕과 의를 갖춘 명철한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전도자뿐 아니라,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신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노아입니다. 노아는 홍수 이전의 시대, 즉 “모든 사람의 생각이 항상 악할 뿐”이던 시대(창 6:5)에 하나님이 찾으신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증언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롭게 살았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주신 홍수 심판의 경고를 받자 믿음으로 방주를 준비하고 자신과 가족을 구원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입니다(전12:14). 따라서, 겸손히 주님 뜻을 행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전도서 7:29절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본절은 전도자의 세 번째 관찰로서,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선택 결과임을 밝힙니다. 창세기 1–3장이 그 배경입니다(롱맨).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신 뒤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본절의 ‘정직함’은 인간이 하나님과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있는 도덕적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은 처음부터 악하거나 왜곡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선한 본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스스로 “많은 꾀”를 찾았습니다. “많은 꾀”는 단순한 계산이나 지적 활동이 아니라 악을 꾀하는 마음의 계략’이며, 창세기 6:5절,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롱맨).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정직함을 버리고 자기 욕망과 계산을 따라 악을 선택하는 존재로 변한 것입니다. 7:26–28절에서 전도자가 여자를 “죽음보다 쓰다”고 표현하거나 “천 사람 중 한 사람만 찾았다”고 말한 궁극적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특정 성별이 초점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보편적 타락이 강조되어 있는 것이며 일종의 문학적 장치입니다. 따라서, 남자나 여자나 모두 동일하게 타락했지만,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 같은 결론은 신구약 성경과 일치합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돌아간 뒤,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1).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스르엘 골짜기 – 므깃도
요한계시록 16:16절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므깃도는 지중해변을 이루는 갈멜산 능선을 타고 동쪽으로 내려가면 이스르엘 골짜기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며, 세 방향의 길이 만나는 교통의 핵심입니다: ①남북을 잇는 해변길, ②지중해에서 이스르엘 골짜기로 들어오는 와디 아라, ③요단 계곡으로 이어지는 동서 교통로. 따라서, “므깃도를 지배하는 자가 팔레스타인의 교통을 지배한다”고 일컬어집니다. 실제로 가서 보면 광대한 평야 가장자리에 우뚝 솟은 언덕입니다. 이 때문에 이 지역은 군사적 충돌이 반복되었습니다. 이 므깃도 언덕에서 무려 26개의 도시층이 발견되어 반복된 파괴 · 재건 · 전쟁을 보여주면서, 고고학적으로도 므깃도가 “전쟁의 역사 그 자체” 임을 증명합니다. 므깃도는 성경뿐 아니라 이집트·아시리아·바벨론 문서에도 등장합니다. 투트모세 3세의 유명한 므깃도 전투 기록에, “므깃도를 얻는 자는 천하를 얻는다”는 문구가 남아 있으며,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 에살핫돈, 아슈르바니팔의 원정 기록,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군사 이동 경로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므깃도는 전쟁의 장소로 등장하는데, 드보라와 바락이 야빈의 군대를 무찌른 곳(삿5장), 요시야 왕이 전사한 곳입니다(열하23장). 한편,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전쟁의 장소를 아마겟돈이라 부릅니다. 이는 히브리어 ‘할-므깃도’(므깃도 산)에서 온 말로써, 므깃도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하나님과 악의 세력의 최종적 충돌을 상징하는 종말론적 장소” 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므깃도의 역사를 보면서 인간의 전쟁은 반복되지만, 역사의 결말은 하나님이 결정하심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언21:31).

세상과 신자(6)
창세기 44:33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유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특별계시와 언약을 물려받았고, 할례의 표식도 몸에 가졌지만, 그의 삶은 자격 미달의 연속이었습니다. 동생 요셉을 팔아넘기고, 아버지를 속이고, 가정은 무너졌으며, 창녀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판 지 22년이 흐르자, 그는 이밀의 진정표보다 더 감동적인 웅변을 하고, 동생과 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나서 요셉을 감동시킵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했을까요?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거친 세파에서 살아가는 ‘노동의 은혜’입니다(창3:17-19). 아담의 자손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수고와 눈물은 죄를 치료하는 하나님의 약입니다. 이때, 유다는 땀 흘려 일하며 가정을 세우려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안되는 것을 깨닫습니다. 즉, 악한 두 아들의 죽음이란 하나님의 징계를 인내하면서, 악인의 집에는 평강이 없음을 경험한 것입니다. 둘째, 자신과 형제들의 거짓과 죄 때문에 당하는 아버지의 고뇌를 보았습니다. 셋째, 유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그들의 믿음의 삶을 반추하면서, 조상들을 돌보시는 하나님과, 조상들의 믿음과 소망을 배웠습니다. 그들의 삶의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언젠가 야곱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만민이 복을 받는다는 그 약속을 유다도 간직하였습니다. 이제 유다는 마흔이 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길이 인생의 본분임을 깨닫고 그의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12:11).

매일묵상(2026/5/11-15)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누가복음 13:21절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1905년) 2월 처음으로 교회에 고위층 두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뒷골목으로 해서 교회에 왔습니다. 후에 포사이드 박사가 부상을 입었고 저명한 이씨 집안 사람들이 휘장으로 갈라놓은 예배당 남자 석에 나타났습니다…그 결과 따뜻한 봄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전킨의 보고에 나온 두 사람은 10년 동안 관직에 있던 관리출신과 구한국 부대 장교 출인이었습니다. 이어서 ‘저명한 이씨 집안’ 사람들과 “김 주사, 이 주사”로 불리던 양반들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교회를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선교사를 “양대인”(洋大人)이라 부르면서 신변 보호를 받으러 나오는 교인들도 생겼는데, 그 결정적 계기가 ‘포사이드 사건’입니다. 1904년 9월에 내한한 포사이드는 곧바로 전주로 내려와 서원고개 언덕에 시약소를 차렸습니다. 그가 ‘저명한 이씨 집안’에 왕진을 간 것은 1905년 3월 11일입니다. 포사이드는 ‘강도’를 만나 중상을 입은 집 주인을 치료하고 그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그날 밤 ‘강도들’이 또 들이닥쳐 포사이드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혹자는 ‘강도들’은 의병들로서 일진회에 우호적인 ‘부자 양반’을 응징하였고, 그를 치료하러 간 ‘검은 양복’의 포사이드를 일본 경찰로 오인하여 공격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건 보다, 사건 다음입니다. 선교사 포사이드에 대해 감사와 송구한 마음으로 이씨 집안에서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고, 그 아들 중 이보한은 완전히 개종합니다. 실로 포사이드의 선행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6:10).

전도서 7:24절
“이미 있는 것은 멀고 또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전도자는 반복적 표현과 수사적 질문을 사용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이미 있는 것”이란 히브리어 완료형으로, 이미 일어났고 지금도 지속되는 하나님의 섭리를 가리킵니다. 그 안에는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만물의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멀고 또 깊고 깊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삼중 표현은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이해를 완전히 초월한다는 사실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깊음’은 하나님의 행위와 통치의 근간이 되는 절대적 지혜의 차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삶과 환경을 주권적으로 정하실 때, 인간은 그 앞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누가 통달하랴”라는 질문은 바로 그 사실을 선언하는 수사적 고백입니다. 이에 대한 두 가지 예증입니다. 첫째, 창조의 지혜입니다. 욥기에서 보듯이, 악어조차도 하나님의 깊은 지혜의 산물입니다. 단단한 갑옷 같은 표피, 온도에 따라 성별이 결정되는 신비로운 생태 등인데, 이것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새겨진 창조의 다양성입니다. 관리자인 우리는 겸손히 연구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둘째, 복음 속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아래 가두어 두셨는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함입니다(롬 11:32). 인간의 눈에는 이해되지 않는 방식이지만, 그 안에는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히 배우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생의 본질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혜의 시작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전도서 7:25절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연구하여 악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얼마나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전도자는 먼저 지혜의 한계를 인정한 뒤에도(7:23–24) 계속 탐구합니다. 그는 지혜와 명철을 살피며, 악이 얼마나 어리석고 파괴적인지 연구했습니다(7:25). 이것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의도적이고 철저한 탐구입니다. 지혜는 인간이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그렇다고 추구를 멈출 수 없는 가치입니다. 그 일환으로 전도자는 본절에서 악의 본질을 파헤쳤고 그 결론은 26절입니다. 26절은 악의 구체적 예—특히 유혹과 함정—를 제시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선택하라고 교훈합니다. 본절은 악은 단순한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 지혜의 반대편, 곧 어리석음과 미친 행동으로 나타남을 밝힙니다. 그러면 지혜란 무엇입니까? 지혜는 단순히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악을 악으로 미련함을 미련함으로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솔로몬은 일찍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아도니야를 처형하는 등 왕권을 확립합니다. 3년의 통치 후 그의 왕위는 견고해졌지만, 하나님이 맡기신 많은 백성들의 선악을 판단할 지혜의 부족을 절감합니다(왕상3:9). 이에 솔로몬은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자기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백성을 섬기기 위해 ‘듣는 마음’ 즉, 재판할 지혜를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후히 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웃을 살리고 세우는 지혜를 요청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후히 주실 것입니다(약1:5). 이것이 이웃 사랑이요 하나님 사랑입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1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다아낙
사사기 1:27절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다아낙(Taanach)은 이스르엘 평야 남단에 위치하며, 군사적·교역적으로 중요한 므깃도 근처의 전략적 요충지로 므낫세 지파의 성읍입니다. 지명은 ‘모래로 된 땅’이란 뜻이며, 여호수아가 정복한 가나안 31개 왕 중 하나였고 잇사갈 지파 내에 있던 므낫세의 고립 도시입니다. 다아낙은 1966년 발굴이 시작되었고, 가나안의 종교적 모습을 잘 묘사하는 제대(祭臺)가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습니다. 발굴된 제대는 주전 10세기로 추정되는 점토를 빚어 만들어졌고, 높이 53센티이며 모두 4층입니다. 여러 가지 종교적 형상들이 묘사되어 있고 꼭대기 부분이 안으로 살짝 움푹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제물을 올렸거나 제수를 담았던 것 같습니다. 제대는 마치 가나안 신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비록 4층으로 되어 있으나 이를 평면으로 재배치한다면 1층부터 입구로 보고 성소를 지나 마지막 신전의 가장 대표적인 신의 형상이 서 있는 곳까지 도착하는 구조로 볼 수 있습니다. 다아낙 제대의 존재는, 가나안 문화가 어떤 것이었는지, 그것이 왜 철저히 제거되어야 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실로 가나안의 우상 문화는 사사기 전체를 흔드는 영적 타락의 근원입니다. 이스라엘은 반복해서 넘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습니다. 이는 개인의 축복을 하나님의 계명보다 앞세운 결과입니다만, 진정한 복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언22:4).

세상과 신자(4)
창세기 44:33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본절은 유다가 애굽총리 요셉에게 베냐민 대신 자신이 종이 되겠다는 간곡한 요청입니다. 이전에 유다는 다른 형제들과 같이 아버지 야곱의 요셉에 대한 ‘편애’를 질투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팔고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유다는 두 아들을 잃었고, 뜻하지 않게 근친상간의 죄까지 저질러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의 고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지금 막내 동생 베냐민이 노예로 전락하는 갈림길에서 서자, 더 이상 불효하지 않도록 결단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효와 형제 사랑 계명의 선택입니다. 유다의 진정은 조모를 섬기고자 하는 이밀의 진정표보다 훨씬 숭고하며, 진정표의 일반계시에 비추어 탁월한 특별계시의 교훈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계명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결과 사랑의 열매를 많이 맺게 되며, 주님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리시고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로 발견됩니다. 한편, 22년 전 19살 유다는 곤경에 처한 이복동생 요셉을 미워하여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22년 후 41살의 유다는 요셉에 의해 똑같은 시험을 받지만, 자신을 희생하여 훌륭하게 통과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의 시험에서 실패하면 하나님은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계명을 통과하는 여부를 궁궁하게 여기십니다. 모두 주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축복을 갖기 바랍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12).

매일묵상(2026/5/4-8)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주서문교회
누가복음 13:19절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전주 서문교회는 1893년 6월, 서울에서 내려온 정해원이 은송리(동완산동)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구도자를 모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동학혁명으로 한동안 선교가 중단되었으나 3년 뒤 첫 세례교인이 나왔습니다(1897).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화산동으로 이전하나(1900) 교인들은 가난한 부녀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전주 양반들은 여전히 멀리서 바라만 보았습니다. 선교사들이 전주의 선비 문화를 알게 되자 책을 통한 전도를 시도했습니다. 1903년 전주 서문 바로 안쪽에 ‘책방’을 낸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예수교 책’을 팔 수 없어 교인 ‘임씨’를 통해 포목점을 내고 한 구석에 중국에서 들여온 한문 ‘서학서’(西學書)와 한글 전도 책들을 놓고 팔았습니다. ‘책’을 통한 전도는 주효했습니다. 선교사 전킨의 보고입니다. “(1905년) 2월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교회에 고위층 두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뒷골목으로 해서 교회에 왔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에 포사이드 박사가 부상을 입었고 저명한 이씨 집안 사람들이 휘장으로 갈라놓은 예배당 남자 석에 나타났습니다.”(The Korea Mission Field, 1905. 12.). 서문교회의 초기 역사는 단순한 개척 이야기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열매 맺는 모습을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헌신, 작은 씨앗 같은 전도, 눈물 섞인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전도서 7:22절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하였다는 것을 네 마음도 알고 있느니라”

본절은 21절의 권면을 뒷받침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모든 말에 마음을 둘 필요가 없는 이유는, 우리 역시 종종 남을 비방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말로 실수하고, 감정에 흔들리며, 때로는 상처 주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말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지 못하는 모순입니다. 비록 본절의 ‘저주’가 불평이나 투덜거림을 의미한다 해도, 입 밖에 나온 말은 죄가 됩니다. 전도자는 이러한 인간의 보편적 부패성과 연약함을 자기 성찰을 통해 바라봅니다. 자기 성찰은 인격 성숙의 중요한 과정이며, 관용을 낳는 어머니입니다. 베드로의 부인 사건이 좋은 예입니다. 그는 여종 앞에서 저주까지 하며 주님을 부인했지만, 곧바로 밖에 나가 통곡했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경고하신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가장 먼저 베드로를 찾아오셨고, 다시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은혜를 잊지 않았고, 그 경험은 그를 관용과 겸손을 갖춘 사도로 빚어냈습니다. 관용과 겸손은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질이며, 주님은 우리의 실패와 용서를 통해 이 자질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실패 앞에서 지나치게 낙망하지는 말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는 말씀 역시 간직하며 겸손히 살아야 합니다. 전도자는 20–22절을 통해 말합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다. 그러므로 타인의 말에 마음을 두지 말라. 너도 같은 실수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자기 성찰은 겸손을 낳고, 겸손은 관용을 낳습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길입니다. “사람이 분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은 그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자기의 영광이니라.”(잠언19:11).

전도서 7:23절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 하였도다”

본절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해 보았다”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이 모든 것”은 앞선 7:1–22 전체를 말하며, 동시에 전환적 표현입니다. 전도자는 자신의 탐구가 지혜에 의해 이끌린 실험적 탐구임을 다시 확인합니다(1:13; 2:3). 그는 인생의 복잡함과 불공평함, 인간의 불완전성을 지혜로 살펴본 뒤, 다시 한 번 “지혜를 얻고자 결심했다”고 말합니다.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는 표현은 강한 의지를 담은 동사형으로, 그의 결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결심은 곧 한계에 부딪힙니다. 전도자는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지혜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완전한 지혜에 도달할 수 없음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인정이 지혜의 문턱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깊이와 높이를 가짐으로 겸손은 핅수적입니다. 비록 지혜는 유산처럼 유익하기에 반드시 추구해야 하나, 동시에 완전히 붙잡을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사실 이 깨달음 자체가 지혜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조급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히 배우려는 자세가 참된 지혜의 길입니다. 욥은 경건한 삶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고난을 겪고 매우 혼란스러워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창조의 지혜를 드러내시자,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내가 깨닫지 못하던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라는 회개를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안 욥은 비로소 참된 지혜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1:7).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스르엘 성
열왕기하10:1절
“아합의 아들 칠십 명이 사마리아에 있는지라 예후가 편지들을 써서 사마리아에 보내서 이스르엘 귀족들 곧 장로들과 아합의 여러 아들을 교육하는 자들에게 전하니 일렀으되”

이스르엘은 아합 왕조의 실제 권력 중심지였습니다. 아합의 왕궁은 사마리아에도 있었지만, 이스르엘에는 별도의 거대한 왕궁과 군사 요새가 존재했습니다. 따라서 아합 왕조의 핵심 귀족·관리·군 지휘관 상당수가 이스르엘을 기반으로 활동했으며, 나봇의 포도원 사건도 이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를 입증하는 아합 시대 때 건설된 거대한 요새가 아랍어로도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의 어원이 남겨져 있었던 지린이라 불리는 유적지 근처에서 발굴되었습니다(1987년). 289×157m의 직사각형 궁전은 모나게 잘 다듬은 돌을 쌓아 기초를 만들어 건축한 성벽은 물론, 성벽의 각 모서리에는 망대가 있었고 성벽을 둘러 폭 8∼12m, 깊이 6.5m의 해자가 파져 있었습니다. 해자는 성벽을 둘러 웅덩이를 파 주로 물을 붓고 악어 같은 짐승을 풀어 놓아 적들이 성벽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하는 방어용 구조입니다. 망대와 해자를 통해 이 성이 상당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9세기 말 예후의 시대에 아람왕 하사엘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공격 앞에서 멸망하였습니다. 본절의 “아합의 아들들을 교육하는 자들”이란 표현은 의미심장합니다. 한 세대의 죄는 다음 세대의 성품 속에 저장됩니다. 아합의 죄에는 경건한 자녀들을 양육하지 못한 부분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무엇을 성공이라 가르치고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입니까, 아니면 생존과 권력입니까? 참된 안전은 주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언18:10).

세상과 신자(3)
창세기 49:8절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본절은 야곱의 유언 중 유다와 그 후손에 관한 대목입니다.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는 ‘찬송’이란 뜻이나 그의 삶은 ‘찬송’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는 요셉을 은 20량에 팔아넘긴 뒤, 아버지에게는 거짓말을 하여 22년 동안 슬픔 속에 살게 했습니다. 이후 가나안 사람과 사귀고 타락한 문화에 물든 그의 자녀들은 일찍 죽었으며, 며느리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와 수치스러운 관계를 맺는데 헷족속의 관습입니다. 그의 인생은 죄와 무너짐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한 유다를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선택하여 다윗 왕조와 그리스도를 일으키셨습니다. 즉 그의 가장 어두운 순간 속에서 베레스가 태어났고, 베레스의 계보에서 다윗,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이같이 유다의 죄와 실수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막지 못했고, 그 실패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더 깊이 드러났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유다와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실패하고, 무너지고, 부끄러운 선택을 할 때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끝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죄를 심판하시나, 동시에 구속의 길을 여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유다의 이야기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를 통해서도 구원의 길을 여신다.” 따라서, 우리는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그분 앞에 겸손히 돌아오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매일묵상(2026/4/25-30)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요한복음 10: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영조 때(1767년) 전주에 큰 불이 나서 전주 성 안에 천여 채가 넘는 민가와 성문들이 소실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전라 관찰사였던 사도세자의 처남 홍낙인은 전주를 대대적으로 복구한 후, ‘풍패지향’(豊浿之鄕)으로 부르고 귀빈의 객사에 ‘풍패지관’(豊浿之館), 남문에 ‘풍남문’(豊南門), 서문에 ‘패서문’(浿西門)이란 현판을 내걸었습니다. ‘풍패’는 기원전 3세기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 이름입니다. 조선 사대부들은 이를 ‘왕의 본향’으로 해석했습니다. 이에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를 한고조 유방에 비유하여 이성계의 본향인 전주를 성역화하면서 ‘풍패’라 부른 것입니다. 이 같은 봉건적 ‘사대주의’ 문화가 담긴 전주 유적은 다 사라졌고, 객사와 풍남문만 남아 있습니다. 패서문의 경우 1907년 신작로가 뚫리면서 성곽과 함께 철거되었으나, ‘서문’이란 이름은 그때 이미 세워진 전주 서문교회의 이름에 남았습니다. 교회는 영원한 생명의 문이신 예수께로 인도하는 영적 관문입니다. 세상의 자부심이었던 패서문이 허물어진 자리에 복음을 통해 서문교회가 세워졌듯이, 우리 삶에도 세속적 가치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이 심겨야 합니다. 인간의 계획이 좌절되는 고통의 순간에도 주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따라서 스스로를 높이려는 ‘풍패’의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이 온전히 서는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 문 위에는 어떤 이름이 걸려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특권, 즉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셨습니다.”(빌1:29,새번역).

전도서 7:20절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7장15절 이후에는 두 가지 주제가 이어집니다. 첫째는 지혜, 의, 악 등 극단을 피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삶의 균형을 잡으라(15–18절). 둘째는 지혜가 권력보다 강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조차 완전하지 않음을 기억하라(19–22절). 이러한 흐름 속에서 본절은 인간의 보편적 불완전성을 선언합니다. 인간은 완전할 수 없습니다. 선지자 모세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땅 위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민 12:3)으로 칭찬받았으나, 광야에서 거듭되는 백성들의 불평과 불신앙을 겪자 분노하고 그로 인해 실수합니다. 하나님은 물이 없어 불평하는 백성을 위해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으나, 모세는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민 20:10)하고 지팡이로 반석을 쳤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한 것을 책망하셨으며, 그 결과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습니다(민 20:12–13). 그럼에도 모세의 겸손은 높이 평가받아야 합니다. 아마 과거에 애굽 사람을 쳐죽였던 경솔함에 대한 자각이 겸손의 원인으로 보입니다. 한 인간을 완전하게 만드는 일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마19:26). 따라서, 우리는 주님이 일하심을 믿고 기다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속죄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나, 여전히 ‘의인된 죄인들’로 불려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같이 연약하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하나님의 이 온전하심을 우리 삶의 지향점으로 삼아야 합니다.“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전도서 7:21절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

20절은 “완전한 의인은 없다”고 선언하고, 21–22절은 그 죄의 보편성이 실제 삶에서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사람의 말은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하고,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 자체보다 마음의 중심입니다. 따라서, 지혜자는 사람들의 모든 말을 마음에 담지 않습니다. 본절의 권면은 이러한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통찰에서 나온 것입니다. 후단의 내용은 종들이 주인에 대해 종종 불평하거나 비방하는 현실을 알기에 나온 경험적 조언입니다. 험담을 들으면 누구라도 화가 납니다. 항우가 진중을 시찰 중 진나라 군사의 비방을 듣고 분노하여 20만 명을 죽인 사건은, 분노에 사로잡힌 어리석음이 낳는 비극을 보여줍니다. 반면, 위기에 처한 자신을 저주한 베냐민 지파 시므이를 즉시 죽이지 않고, 그 처리를 솔로몬에게 맡긴 다윗은 민족의 분열을 막아낸 지혜로운 사례입니다. 본문에서 ‘저주하다’라는 단어는 강한 저주라기보다 ‘비방하다’, ‘투덜거리다’에 가까운 의미이지만, 이것 역시 죄의 한 형태입니다. 누구나 죄를 짓고, 누구나 남을 비방할 수 있으며, 그 안에는 주인 자신도 포함됩니다(22절). 자기 성찰을 통해 자신의 불완전함과 죄인됨을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는 타인에 대한 관용을 낳습니다. 전도자는 20–22절을 통해 “사람은 완전하지 않다”(20절), “그러므로 타인의 말에 너무 마음을 두지 말라”(21절), “너도 같은 실수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22절)고 말하며, 겸손·관용·자기 성찰이라는 지혜의 핵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잠언3:3).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스르엘 성
사무엘하21:1절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의 왕 아합의 왕궁에서 가깝더니”

이스르엘 골짜기는 이스르엘이란 도시를 따라 명명되었고, 이 도시는 곡창지대에 위치해 전략적으로 중요하였습니다. 다윗의 아내 아히노암이 이스르엘 출신인데(삼상25:43), 아마 다윗은 이 결혼을 통해 식량을 지원받았을 것입니다. 솔로몬의 통일왕국을 이은 분열왕국 시대에 이스르엘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고, 특히 아합 왕과 나봇의 포도원, 그리고 엘리야의 심판 선언으로 잘 알려졌습니다. 아합의 여름 별궁이 이곳에서 발굴되었는데 화려한 상아궁이었고, 그의 아들 요람도 전쟁 부상 후 이곳으로 돌아온 사실을 보면 이스르엘은 견고한 요새 도시였습니다. 예후가 요람을 치러 올 때 파수꾼이 망대에서 그를 보았다 하고, 예후의 말에 여종이 왕비 이세벨을 창에서 던져 죽인 사건은 도시의 높은 성벽 구조를 말합니다. 1987년 지린이라 불린 유적지에서 우연히 유물이 발견되자 대규모 조사가 착수되었고, 아합 시대의 거대한 요새가 발굴되었습니다. 그것은 성벽, 망대, 해자 등 강력한 방어시설을 갖춘 도시였으나 아람 왕 하사엘의 공격으로 파괴된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스르엘 성의 흥망의 역사는 권력과 요새, 군사력도 영원하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아합의 탐욕, 이세벨의 악행, 요람의 불순종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왔고, 이스르엘 성은 견고했으나 무너졌습니다. 인간이 쌓아 올린 힘과 성취는 잠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참으로 안전하고 영원한 신앙유산을 후손들에게 남깁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편127:1)

세상과 신자(2)
에베소서 6:1절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신에게 조모께서 계시질 않았다면 오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며, 조모께서도 신이 없다면 여생을 마칠 수가 없습니다. 조모와 손자 두 사람이 서로의 목숨이 되어주고 있으므로 이 사사로운 정을 버리고 멀리 떠날 수가 없습니다.이 글은 제갈량의 출사표, 한유의 제십이랑문과 함께 중국 3대 명문으로 평가받는 이밀의 진정표의 한 대목으로, 진무제의 부름을 받았으나 할머니(96세)의 봉양 때문에 떠날 수 없다는 상주문입니다. 이밀(224-287)은 난지 6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고, 네 살 때 어머니가 개가하여, 조모 유씨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진무제는 감동하여 노비를 하사하고 조모에게 의식을 제공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 이밀은  충과 효가 충돌하는 지점에 이르러, 효를 택합니다. 그에게 세상은 출세를 위한 곳이 아니라,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곳입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유교 이상의 실천이죠!. 세상을 보는 많은 시각이 존재하나, 성경의 관점은 “세상은 하나님의 뜻(계명)을 행하도록 창조된 곳”입니다. 일반계시를 통하여 부모공경의 계명을 행한 이밀은 성경의 관점(특별계시)에서도 칭찬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특별히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성경은 부모공경에 대하여 무엇을 말씀합니까?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칩니다. 주님과 부모에 대한 순종이 충돌할 때 주님을 우선시 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박해가 일어날 때 비취는 중요한 등불입니다. 황제 진무제도 이밀을 돌보았는데, 만유의 주님이 어찌 당신의 백성을 돌보지 않겠습니까?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

매일묵상(2026/4/18-22)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이사야 8:13절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조선시대 사대부에게 중국은 영원한 ‘대국’이었고, 중국인들은 ‘대인’(大人)이었습니다. 그들은 중국 황제가 바뀌어야 비로소 새 세상이 되었다고 여겨서, 조선 왕이 아무리 바뀌어도 만력, 숭정, 강희, 건률, 광서 같은 중국 연호를 고집했습니다.. ‘호남’(湖南)이란 명칭도 같습니다. 양자강 상류에 동정호란 넓은 호수가 있는 그 남쪽에 넓고 비옥한 땅을 ‘호남’이라 하였습니다. 이를 본 따 별로 큰 호수도 없는 전라도의 너른 들을 호남이라 부른 것입니다. 실로 조선 선비들은 조선에 살면서도 중국 땅에 사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미국의 많은 지명이 이주 전 본토인 영국의 지명을 따른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이 모습은 성경이 경고하는 인간의 약함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은 강해 보이는 존재나, 눈에 보이는 힘에 기대려고 하는데, 우상숭배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 이는 두려움으로 인한 우상숭배의 특효약입니다. 도움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히스기야 왕의 본보기입니다. 북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30여년 동안 팔레스틴 지역에 영향력을 키워가던 중 ‘여호와 중심’의 정책으로 돌아선 히스기야를 공격합니다. 주님께 충성스러웠던 히스기야와 선지자 이사야의 필사적인 기도를 들으신 주님은 천사 한 명을 보내어 185,000 명의 앗수르 군사를 하루에 전멸시키고  유다를 구원하셨습니다. 성서는 믿음의 책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시편118:8,9)

전도서 7:18절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전도서 7장은 “지혜로운 삶의 균형”을 강조합니다. “악을 너무 많이 행하지 말라”, “지나치게 어리석지도 말라”(17)고 하며, 또 “지나치게 의롭거나 지혜롭지도 말라”(16)고 교훈하여 극단을 경계합니다. 본절(18)은 그 결론으로, “이것도 잡고 저것도 놓지 말라”는 말로 지혜로운 균형을 가르칩니다. 어떻게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요? 전도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면 극단의 함정을 벗어난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판단은 언제나 한 극단에 치우칠 수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면 그 마음이 중심을 잡아줍니다. 즉, 오뚜기 같이 ‘경외’가 균형을 만들어 냅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이라는 불타는 사명과 열심을 가졌으나, 정치적 음모, 경제적 문제, 백성의 피로 등 현실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많은 반대에 직면하였지만 빠른 시일 내에 성벽을 재건하고 모세율법 중심의 생활방식을 확립합니다. 사도들의 예도 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를 만나 자신의 복음을 진술하였으나, 베드로는 다른 언급 없이 오직 예루살렘 성도의 궁핍함을 도와줄 것을 요청합니다(갈2:1-10). 두 사도는 모두 순교하면서까지 주님을 사랑한 분들이나 동시에 가난한 자들 구제도 열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균형잡힌 지성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 외딴 곳으로 온 수만 명의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사 오병이어의 표적을 베푸시고, 귀가할 때 기진하지 않게 배려하셨습니다. 이 기사를 읽으면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담겨 있어 우리로 균형잡힌 사고를 갖게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6:11).

전도서 7:19절
“지혜가 지혜자를 성읍 가운데에 있는 열 명의 권력자들보다 더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압살롬의 반역이 진압된 후,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세력을 규합하여 다윗에게 반역하였습니다. 다윗이 요압과 모든 군대를 보내자 세바는 아벨 성으로 피신하였고 요압의 군대가 아벨 성을 포위합니다. 성이 멸망의 위기에 처했으나, 아벨 성에서 지혜로운 여인 한 명이 등장하여 요압과 대화를 나누고 세바의 목을 조건으로 철군 확답을 받습니다. 그녀가 아벨 성의 모든 백성들을 설득하여 세바의 머리를 벤 후, 성벽에서 던지자 요압은 포위를 풀고 돌아갔습니다.(삼하 20장) 지혜는 적을 제압하는 힘을 갖고 있으며, 군사력보다 강합니다. 따라서, 잠언은 “지략을 베풀고 전쟁하라”(20:18)고 조언합니다. 손자병법의 핵심은 ‘‘부전이굴인지병(不戰而屈人之兵)’입니다. 즉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는 전쟁 전략 4가지를 언급합니다. 적의 의도를 깨뜨리는 것을 상책, 적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을 중책, 적의 군대를 공격하는 것을 하책, 적의 성을 공격하는 것을 최하책으로 놓습니다. 한 여인의 지혜로 아벨 성과 요압 모두 싸우지 않고 승리하였는데, 상책입니다. 그러나 본절에서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담고 있으므로, 양 극단을 피하고 균형잡힌 생각을 갖고 행동하게 합니다. 그것이 성서가 가르치는 지혜의 본질이고 세상 지혜와 결정적 차이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참된 지혜가 생기고, 그 지혜는 권력보다 강하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지혜는 만유의 주님을 존경하고 두려워 하는데서 나오며 그것이 삶의 중심을 잡고 삶을 지키는 가장 큰 힘입니다.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잠언 20:15).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스르엘 골짜기
사무엘하1:21절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니라.”

본절은 사울과 요나단이 블레셋과 전쟁 중 길보아 산에서 전사한 것을 슬퍼하는 다윗의 ‘활 노래’의 한 대목입니다. 길보아 산은 이스르엘 골짜기 남동쪽에 위치합니다. 이스라엘은 험준한 산지를 가졌으나, 이스르엘 골짜기는 교통과 무역의 요충지이며 비옥한 평야 지대입니다. 지중해와 요단강, 남북의 대륙을 잇는 이 길목은 붉은 테라로사 토양 덕분에 풍요로운 녹색 물결(곡창지대)을 이뤘고, 고대 근동 무역상들의 중심통로였습니다. 그러나 이 편리한 지형과 풍요로움이 바로 전쟁의 화근이었기에, 가나안 족속은 고대의 전차인 강력한 철 병거를 이 골짜기에 배치하여 지켰습니다. 성경 속 주요 전쟁들도 이곳을 배경으로 합니다. 사사 드보라와 바락이 시스라의 군대를 전멸시킨 곳이며, 사사 기드온이 미디안 대군에 맞서기 위해 300명의 용사를 선발했던 ‘하롯 샘’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르엘 골짜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강력한 군사력과 맞닥뜨려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했던 신앙의 격전지였지만, 환경의 풍요로움이나 세상의 힘(철 병거)이 곧 영적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영적 승리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 결정됩니다.미디안을 이긴 기드온은 금 에봇을 만들어 오브라에 두자 그것이 백성의 우상숭배 대상이 되었고, 그 가문의 올무로 변합니다. 세상의 능력도 무시하면 안 되나, 주님의 돌보심을 더 신뢰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영적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세상과 신자
시편 90:10절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수년 전, 삼성 이재용 회장이 “2030년에 무슨 일이 전개될까”라는 주제로 열린 사장간담회에서, “2050년엔 저도 이 자리에 없습니다”는 농담을 던졌습니다. 그 당시 서울경제신문에서는 재벌 경영의 장점을 사라지게 만드는 상속세 및 증여세법을 뜯어 고치자는 기사를 냈습니다. 그 논지는 막대한 상속세를 내려면 기업을 팔아야 하니 한국의 경제성장의 동인이 사라지므로, 시대에 맞도록 상증법을 고쳐야 2050년에도 번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회장의 말은 지금은 열심히 삼성의 발전을 위해 일하지만, 24년 후의 미래는 모르고, 알아도 자신의 역할은 없다는 점을 진담반 농담반 밝혔다고 생각됩니다. 소규모의 중소기업도 제대로 경영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삼성전자와 같은 세계적인 대기업을 지속적 성장으로 이끄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2050년에 이회장은 82살이 되어 지혜와 힘은 다하고, 그 후에는 자신이 살아 온 삶과 세인의 평가만 남게 됩니다. 또한,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가 등장하면 영원히 역사 속에 묻힐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24년 뒤가 아니라 영원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기억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마지막 날 부활하여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세상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만 하겠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영원을 가름하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믿음의 열매, 선의 열매, 말씀의 열매, 그리스도를 통한 의의 열매, 성령님의 9가지 열매를 맺어 주님의 제자로 발견되야 합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매일묵상(2026/4/13-17)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여호수아 4:7절
“주님의 언약궤 앞에서 요단 강 물이 끊기었다는 것과, 언약궤가 요단 강을 지날 때에 요단 강 물이 끊기었으므로 그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토록 기념물이 된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해 주십시오.”

기전 여학교는 선교사의 기념비는 있지만, 항일투쟁과 관련된 ‘기전 결사대’ 기념비는 없습니다. 1915년 기전 학생 임영신, 오자현, 송귀내 등이 숭의 출신 박현숙 선생의 지도로 ‘구국결사대’를 조직해서 매일 구국 기도회를 갖고 ‘천황 사진에 먹칠하기’와 ‘쓰개치마 벗기 운동’을 벌였고, 3·1운동 때 임영신, 김공순, 김신희, 최애경 등 ‘14인 결사대’가 만세 시위를 주도 하였습니다. 광주학생사건 때도 문유덕, 전순덕, 신애덕, ‘삼총사’와 오원애 김순길, 이준례, 진태순 등 ‘결사대’가 만세시위를 이끌었습니다. 따라서, 기전 여학교는 이를 기념하는 무엇인가를 세워야 했습니다. 예전 경기고등학교의 교정에는 4.19 혁명 당시 희생당한 학생들의 기념 부조가 있어 항상 그때의 사건을 회상케 하였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초석입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불의에 항거하고 잘못된 제도의 개혁 노력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희생이 따르나, 치루어진 그 희생의 의미는 꼭 남겨야 합니다. 신앙유산도 같습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고, 반드시 하나님의 모든 가르침과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위해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 희생의 결과가 신앙유산이며, 비로소 후세에게 물려줄 수 있습니다. 신앙유산 없는 신앙은 겨우 자기만 구원받는 정도의 신앙입니다. 기복신앙의 한계이죠!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1:29).  

전도서 7:16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본절은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왜 그렇게까지 완전해지려 하는가?” 이는 우리 삶의 목적을 터치하는 말씀입니다.극단은 인간을 무너뜨리므로, 그 교훈의 핵심은 균형과 겸손입니다. 지나치게 의인(특히 종교적 의인)이 되려는 예는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의식적 율법을 지키려는 열심이 지나쳐 사람을 정죄하는 자리에 섰고, 그들의 의로움의 추구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무거운 갑옷이었습니다. 지나치게 지혜자가 되려는 사람의 예는 솔로몬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누렸지만, 그 지혜를 통제하지 못해 수많은 아내와 우상을 받아들이며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떠났습니다. 의로움도 지혜도 모두 좋은 것이나, 극단에 이르면 인간은 무너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상은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존재입니다. 세상은 이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도 많지만, 우리의 능력을 넘는 것은 더 많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도우심은 절대적입니다. 겸손히 그런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인간의 모습, 그것이 원래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이 목적을 모르고 지나친 ‘의’- 특히 종교적 ‘의’ – 를 추구한다면, ‘의’가 아니라 오히려 판단만 만들어 비판의 죄를 짓게 하며, 지혜의 지나친 추구는 자신을 과신하는 함정에 빠집니다. 전자는 하나님보다 율법을 더 사랑하고, 후자는 자신을 우상의 자리에 놓습니다. 마땅히 피해야 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6:8).

전도서 7:17절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17절은 16절과 구조적으로 평행을 이루며, 네 가지 성품—의로움, 지혜, 악함, 어리석음—을 두 축으로 대비시킵니다. 원문에는 세 가지(의로움, 지혜, 악함)에 대해서는 “지나치게”라는 수식을 붙이나 우매에 대해서는 없는데, 이는 전도자에게 어리석음은 절대 용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5절은 “의인이 망하고 악인이 장수하는” 모순된 현실의 증언입니다. 보응의 원리가 항상 작동하는 것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16절은 “지나치게 의로워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말라”고 경고했고, 이어 17절은 “지나치게 악하여 일찍 죽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모두 극단이 인간을 파멸로 이끔을 강조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전도자가 “지나친 악함”을 경고하면서도, 마치 “적당한 악함”의 여지를 남겨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9:2)는 말씀과 충돌하는 듯 보이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본절은 절대적 의가 아니라, 인생의 현실을 관찰하며 그 한계 속에서 “지혜롭게 살아남는 법”을 말합니다. 악인이 항상 장수하거나 형통하는 것은 아닐 뿐더러, 그 악함도 처세의 수준을 넘어 지나치면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는 지름길입니다. 그 파멸의 원인이 하나님의 심판인지, 악함의 결과인지는 명시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어 일찍 죽은 사람의 대표는 나발입니다. 나발은 부자였지만, 교만하고 분별력이 없어 다윗의 손에 죽을 뻔하게 된 사실을 뒤늦게 알자 충격을 받고 몸이 돌처럼 굳어져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악함과 어리석음의 길을 떠나, 겸손과 지혜의 길을 걷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잠언1: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스르엘 골짜기
열왕기상 21:1절
“그 일이 있은 후였습니다. 나봇이라는 사람이 이스르엘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밭은 아합의 궁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새번역)

이스르엘 골짜기는 아합이 탐냈던 나봇의 포도원이 있던 곳입니다. 아합은 포도원을 얻지 못하자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도 거부했고, 이를 본 이세벨은 거짓 증인을 세워 나봇을 돌로 쳐 죽여 빼앗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어 이세벨의 시신을 이스르엘의 개들이 먹게 될 것이라 선언하셨고, 15년이 흘러 예후의 반란으로 성취됩니다(열하9:30-37). 이 비극의 무대인 이스르엘 골짜기는, 번역이 골짜기이지 넓은 평야요 고대부터 이스라엘의 대표적 곡창지대입니다. 또한, “이스르엘”이란 이름은 “신이 밭을 갈다”는 뜻인데, 이름조차 이 땅의 비옥함을 반영합니다. 지질학적으로 약 200만 년 전 지중해와 요단 계곡 사이에서 형성된 충적 평야이며, 북쪽의 갈릴리, 남쪽의 사마리아 산지, 동쪽의 요단 계곡, 서쪽의 갈멜산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므깃도·벧산·이스르엘 등 주요 도시가 여기에 위치해 있으며, 초기 청동기(주전 4500–3300년) 유물이 발견되어 고고학적으로도 중요합니다. 특히 므깃도에서는 솔로몬 시대의 성문과 병거 도시 유적이 발굴되어 이 지역의 전략적·경제적 중요성을 입증합니다. 나봇의 포도원 사건에서 보듯이, 성경은 이 풍요로운 땅에서 인간의 탐욕이 일으킨 범죄와 전쟁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신 땅이라도, 그 선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순간 저주의 장소가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 가운데서 주신 것에 만족하는 법인 ‘자족’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4:11)

세상 창조의 목적과 사랑
갈라디아서 5:5절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전투기의 1세대는 제트기, 2세대는 초음속 제트기(미그21, F-5), 3세대는 레이다와 공대공 미사일(팬텀, 미그23, 25), 4세대는 첨단 항전장비(-F16, 15), 5세대는 스텔스(F-22, 35)로 특징지울 수 있습니다. 전투기 세대 구분 이유는 기술의 진보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3세대는 4세대를 당할 수 없습니다 1982년 베카계곡의 전투에서 F-15,16의 4세대와 미그23,25 3세대가 공중전을 하여 85:1로 승패가 4세대 승리로 판가름 났습니다. 그러나, 4세대도 5세대에는 아예 전투자체가 안됩니다. F-22와 F-15의 모의 공중전에서 144:0으로 F-15가 패배하였습니다. 스텔스인 5세대를 레이다로 탐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술이 전투기를 갈라놓듯이,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이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갈라놓습니다. 그 믿음은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서 아는 지성을 갖추고, 그것의 심장은 사랑이며, 그것의 에너지는 소망의 약속입니다. 세상 창조의 목적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선의 열매를 맺는데 있습니다. 좋은 예가 가정입니다. 가정에서는 가장 연약한 자가 가장 귀한 돌봄을 받는데, 사랑이외에는 해석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창조된 세상은 바로 이 목적을 이루도록 디자인되었습니다. 다른 목적- 명예, 재물, 욕망, 출세 – 이 우선시 되면 이구동성으로 그것은 잘못되었다고 규정합니다. 사랑의 첫 번째는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를 도외시 한 삶이 우상숭배이며, 이런 의미에서 무신론자들은 모두 우상숭배자들입니다. 띠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합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14)

매일묵상(2026/4/6-10)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요한일서 3:18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기전여학교에 오르는 언덕 길 옆에 1956년에 세운 <선교사 인톤 목사 · 인사례 여사 공적 기념비>가 있습니다. 윌리엄 린튼(인톤)은 1912년 내한해서 군산 영명학교와 전주 신흥학교 교장을 지냈고, 해방 후에는 신흥과 기전 재건 사업을 주도했으며 대전 한남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지낸 분입니다. 린튼 부인(인사례)은 광주 개척 선교사 벨의 딸로 태어나 1922년 린튼과 결혼해서 해방 후 기전여학교 교장을 역임했습니다. 송기철 장로의 회고입니다. “인톤 목사님은 아주 엄격하고 원리 원칙을 잘 따졌고 일본 사람을 아주 싫어 했어요. 일본 관리가 호구 조사를 나왔는대, ‘이 집 식구가 몇이오?’ 하니깐 손가락을 꼽아 보더니, ‘한 여섯 될라나?’ 하셨대요. 당시 자녀들은 미국에 유학 중이라 내외분만 살고 계셨는디 사정을 알고 있던 일본 사람이 ‘당신네 두 식구 뿐이잖소?’ 하니깐, ‘사람은 둘이지만 우리 집에 개가 한 마리, 쥐가 두 마리, 고양이가 한 마리 있는데 그들도 밥을 같이 먹고 있으니 우리 식구 아니요?’ 했다고 해요. 반면에 인사례 부인은 자상하고 정이 많았어요. 밤 새워 색실로 뜨개질을 해서 수건 같은 것을 만들어 시골 가난한 부인들에게 나누어주며 격려했지요.” 인톤 부부는 40년 간 전라지역 선교의 핵심 인물로서, 섬김이란 말이 아니라 행동이며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보여주는 삶입니다. 그의 셋째 아들 휴 린튼, 손자 스티브 린튼과 손자 존 린튼 모두 한국 선교를 위해 헌신한 분들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

전도서 7:14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본문은 인생의 밝음과 어두움, 좋은 날과 나쁜 날 모두를 하나님이 만드셨기에, 인간은 미래를 통제 못하고 다만 겸손히 수용하라는 교훈입니다(롱맨).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인생의 두 날을 섞어 놓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의지케 하시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지혜자도 내일을 모르고, 경건한 자도 고난을 피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한계입니다. 고생스러울 때는, “왜 이런 날이 왔는가”를 묻지 말고, “이 날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시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지만, 형제들의 질투를 받아 노예로 팔리고, 감옥에 갇힙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하게 하시자, 총리가 된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가정은 물론 만 백성의 생명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것입니다. 형제들이 두려워 하여 요셉에게 엎드려 용서를 구할 때에도 요셉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50:20)라고 말하며 간곡히 위로하였습니다. 요셉은 좋고 나쁜 모든 날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음을 알았으니, 미래가 보이지 않은 날에도 하나님은 모두의 선을 위해 길을 만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도 이렇습니다(롬8:28). 따라서, 기쁨의 날은 감사로 채우고, 고난의 날은 성찰과 신뢰로 채우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고 계십니다. 오늘이 어떤 날이든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사드리기 바랍니다.“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니라.”(잠언16:9).

전도서 7:15절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이라는 표현은 지혜롭고 부유했던 전도자의 삶조차 결국 덧없음을 고백하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사랑 없는 삶이 도달하는 종착점이며, 자기 유익만을 추구하는 타락한 세상이 겪는 영적 저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실천하는 사랑의 수고는 전혀 다릅니다. 그 삶은 보람과 소망이 넘칩니다. 이는 욥이나 요셉처럼 삶을 회고할 때 선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깨닫게 되고 그분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전단에서 언급한 “그 모든 일”은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 즉 그가 직접 경험한 삶의 모든 현실을 가리킵니다. 그 안에는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형통하며 장수하는, 우리가 기대하는 질서와는 전혀 다른 부조리한 현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도자는 이를 억지로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도 시험을 피할 수 없고, 심판받아야 할 악인이 오히려 번성하는 이유를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나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불확실하고 불가해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에 전도자는 왜곡된 세상에 당황해 하지 말며 하나님을 믿고 신실하게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에스더서의 증언입니다. 모르드개는 잠시 동안은 악한 자가 득세하나 이윽고 의로운 자를 높이고 악한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하였고, 그를 높이시자 동족 유대인들을 보호하며 지혜롭게 통치합니다. “악인은 백 번이나 죄를 짓고도 장수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알기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섬기는 사람들이 잘 될 것이다.”(전8:12,쉬운성경).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벧산/ 벧 스안
마태복음 24:2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본문은 성전 건물을 찬탄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로마 도시 스키토볼리(벧산)의운명도 같습니다. 도시 기둥들은 로마식 홈이 파여 있고 고린도·이오니아의 화려한 양식이 새겨져 있습니다. 도로마다 건설을 후원한 인물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남북을 가르는 실바누스 도로는 56m 길이에 7m 높이의 기둥이 입구를 지킵니다. 주변에는 디오니소스 신전, 바실리카 광장, 샘터, 목욕탕 등이 늘어서 있습니다. 도로는 검은 현무암으로 포장되었고 공공건물은 흰 석회석과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도시의 부유함을 보여줍니다. 특히 70×30m 규모의 바실리카 시장과 110m 지름의 극장은 7000명을 수용할 만큼 거대했습니다. 도시는 주후 363년 지진으로 파괴되었으나 409년 팔레스티나 세쿤다의 수도가 되며 다시 번영합니다. 로마가 기독교화되자 제우스 신전은 교회로 대체되고, 도로를 따라 교회와 회당이 함께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749년 강진으로 완전히 파괴돼 사라집니다. 어거스틴은 『신국론』에서 이 땅의 도성은 욕망과 권력 위에 세워지기 때문에 반드시 흔들리고 무너진다고 말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도성은 눈에 보이는 건축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백성의 삶 속에서 세워집니다. 스키토볼리의 흥망성쇠는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남깁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도성은 무너지는 돌과 기둥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삶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지혜의 자녀누가복음 7:35절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본문은 지혜는 말이 아니라 열매로 판명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은 침례 요한이 떡도 포도주도 먹고 마시지 아니하자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은 먹고 마시자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분의 사역이 맺은 회개의 열매들이 이분들의 삶과 일의 참됨을 증언합니다. 오늘날도 같습니다. 신앙은 말이나 주장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삶의 열매로 드러나며, 그 열매는 주님 뜻을 행하는 자녀, 제자 등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포사이드 선교사의 삶입니다. 그는 위급한 오웬 선교사를 치료하고자 광주 제중원으로 가던 중 길에서 죽어가는 한 나병환자를 발견하고, 손수 안아 자신의 말에 태워 갔습니다. 도착했을 때 오웬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포사이드의 헌신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그 나환자도 얼마 후 사망합니다. 그러나 조선판 선한 사마리아인의 그 모습은 세 사람의 인생을 바꿉니다. (1)후배 의사인 윌슨은 40년 동안 나환자들을 맡아 치료하면서 애양원을 설립하였고, (2) 청년 최흥종은 자신의 봉선동 토지 1000평을 나환자를 위해 기증하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된 후 나환자의 대부가 됩니다. (3) 오웬의 미망인 휘팅은 나환자와 함께 늦게 도착하여 남편을 치료하지 못한 포사이드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염을 두려워 하지 않고 성심껏 불쌍한 나환자를 치료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아, ‘나환자와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제목으로 미국 남장로본부에 선교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로써 포사이드의 행실은 세상에 알려집니다(1910).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매일묵상(2026/3/27-4/1)


종려주일과 월요일: 2026년 부활절은 4/5일입니다.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구약의 유월절과의 관계 때문에 춘분(3/20-양력)이 지나고 첫 보름달 후 첫 일요일을 부활하신 날로 정했습니다. 3/20일 후  첫 만월은 4/2일이며 그 후 첫 일요일은 4/5일입니다. 부활절 날짜가 결정되면 그 전 주가 고난주간입니다(3/29-4/5). 유월절 엿새 전 토요일(3/28),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잔치 중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주님의 장례를 예비한 사건이었습니다(요12:1-8). 이튿날 일요일(3/29, 종려주일), 주님은 감람산 동쪽 중턱에 위치한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가파른 언덕을 넘어가셨고, 벳바게에 이르자 오후였습니다.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향하시자(마21:1-11/ 슥9:9성취), 길에서 많은 사람들이 따랐는데(호산나 찬양), 약 두 달 전 죽은 나사로를 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요12:17-19). 군중들은 환호하였지만 주님은 당신을 거부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아시고 우셨습니다(눅19:41-44). 성전을 둘러보신 후 저녁이 되자 베다니로 가셨습니다(막11:11). 월요일(3/30) 아침 성전으로 가시다가 시장하여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가셨으나, 열매를 얻지 못하자 주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열매 맺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의 상징이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꾼들을 몰아내시는 등 정결케 하신 뒤, 날이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가셨습니다(막11:12-1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9:9).

화요일: 아침에 성전으로 가는 중, 어제 저주하신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본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묻자,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0-24)하시고, 형제를 용서해야 응답 받음을 교훈하십니다. 성전에 들어가시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왔습니다: “무슨 권위로 가르치는가?” 그러자 주님은 상속자를 죽이는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로 대답하십니다(막11:27-12:12). 바리새인들은 헤롯 당과 함께 와서 세금문제로 시험하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는 지혜의 말씀을 듣자 침묵합니다. 이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왔습니다. 사두개인들은 형제가 죽으면 다른 형제가 그 여자를 취할 수 있는 계대혼을 규정한 모세율법을 따라, 한 여자를 차례대로 취하고 죽은 7명의 형제의 예를 갖고 부활의 문제점을 제기하였습니다. 주님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른다고 책망하신 뒤, 부활 시에는 결혼이 없는 하늘의 천사들과 같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음을 가르치십니다(막12:13-27).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이나, 악인의 부활은 심판을 뜻합니다. 따라서 의인의 부활인 생명의 부활만이 의미가 있습니다(요5:28,2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1-52).

화요일: 성전에 계실 때 한 서기관이 가장 큰 계명을 물었습니다. 주님은 즉시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언급하십니다(막12:28-34). 그 지혜에 놀란 서기관들, 율법사들,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더 이상 질문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님이 되묻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을 마가복음은 증언합니다(막12:35-37). 주님은 성경을 잘못 가르치고, 또 이를 행하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을 질타하시고(마23장; 막12:38-40),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는 과부를 칭찬하십니다(막12:41-44). 성전에서 나가실 때 웅장한 성전을 감탄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철저한 파괴를 선언하십니다. 그날 저녁 제자들은 성전 파괴 시기와 주님이 다시오실 때의 징조를 물었습니다. 주님은 상세하게 답변을 주십니다(마24장, 막13장, 눅21장). 주님은 한 세대 내에 성전이 파괴될 것이고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쌓일 때 신속하게 성에서 빠져나올 것을 분부하시나, 주님의 재림일은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성전은 약 40년 뒤인 AD 70년 로마의 티토 장군에게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베다니로 가신 것으로 보이며 수요일에는 아무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5-46).

목요일: 유월절 하루 전 주님은 큰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유월절을 드셨습니다(눅22:7-13). 식사 중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제자들(가룟유다포함)의 발을 씻기시고 자리에 앉으사 다시 옷을 입으셨습니다. 영광의 주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인간이 되시고 죽고 부활하여 다시 영광의 자리에 앉는 모습의 축약입니다. 가룟 유다는 밀고하러 떠났으며, 베드로는 순교를 장담하자 주님의 경고가 이어지는 등 분위기는 침울하였습니다(요13장). 주님은 곧 영광(십자가와 부활)을 받으실 것과 성령님을 보낸다는 약속 후(요14:16,17,26;15:26;16:7-15), 모든 제자들(후에 믿을 신자들 포함)을 위한 대제사장의 기도를 드립니다(요17장). 찬미와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유다가 인솔하는 무리를 기다리면서, 1시간 동안 피땀의 기도와 함께 통곡합니다. 잡히시자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이어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안나스의 사위)에게 심문과 곤욕을 당합니다. 이 대제사장들은 수일 전 성전에서 ‘무슨 권세로 가르치냐?’고 주님께 직접 힐문한 자들입니다. “네가 찬송받으실 자의 아들이냐”는 가야바의 물음에, 주님은 ‘그렇다’고 하신 뒤 당신이 선지자 다니엘이 예언한(단7:13) 그 ‘인자 人子 Son of Man’임을 밝힙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선고를 내렸고(마26:62-66), 주님은 다시 능욕을 당하시는데(마26:67-68), 베드로는 3번 부인하였습니다(눅22:54-62). 이 같이 우리를 위한 주님의 고난은 700년 전 이사야 예언의 성취입니다(사53: 7-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이사야 53: 8).

금요일: 아침에 주님은 총독 빌라도와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를 왔다 갔다 하셨습니다(눅23:6-12). 결국 빌라도가 심문합니다: “네가 왕이냐?” 주님은 당신이 왕이나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당신은 진리를 증언하가 위해 세상에 왔음을 밝힙니다(요18:36-37). 진리란 복음을 뜻하며, 복음온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하에 있으나, 주 예수께서 보냄을 받아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하셨으며, 이를 믿는 자는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죄가 없었지만, 군중들의 위세에 눌린 총독은 십자가의 형을 선고합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7마디를 하셨습니다 (오전9시-오후3시). (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2) 한 명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4) “내가 목마르다”(요19:28) (5) 오후 3시경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  (6) 이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23:46) (7)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요19:30). 오후 3시는 유대인들이 1,500년 동안 유월절 양을 잡아온 바로 그 시간입니다(출12:6). 부자이자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주님의 시체를 받아, 자기 묘실에 둠으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됩니다(마27:59-60;사53:9). 사흘 뒤 부활 시까지 무덤에 계셨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주님의 죽으심이 대속의 죽음인 것을 잘 설명합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

매일묵상(2026/3/23-27)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시편 102:26절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1910년, 기전여학교는 현재의 예수병원 본관 자리에 아름다운 2층 홍벽돌 교사를 신축했습니다. 당시 이 건물은 호남 지역 여성 교육의 요람이었으며, 상징적인 근대 건축물이었습니다. 1960년대 들어 예수병원은 현대식 종합병원으로 도약하기 위해 대규모 부지와 새로운 건물이 절실했습니다. 이때 홍벽돌 교사 자리에 예수병원이 들어서고, 학교는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습니다. 그 아래쪽으로 린튼, 보이어 같은 선교사들이 살던 ‘양관’ 들도 모두 헐렸고, 신흥학교의 해방 전 건물로는 강당으로 지은 ‘스미스기념관’(1936년) 만 남아 있습니다. 강당 옆 ‘리차드슨관’(1928년)은 1982년 화재로 전소되었습니다. 해방 후 건축한 ‘인톤기념관’ 옆으로 <희현당사적비>(1707년)와 <희현당중수사적비>(1784년)가 나란히 서 있는데, 1905년 신흥학교를 지을 때 발굴하여 다시 세운 것입니다. 답사하던 이덕주 교수는 일제시대 신흥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항일투쟁을 기리는 비석 하나쯤 있을 법한데 하며 아쉬워 합니다만, 있다한들 천 년 후에는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 기전학교와 예수병원은 시대의 요구와 인간의 필요에 따라 건물과 장소는 변해왔지만, “학생을 길러내고 병든 자를 치유한다”는 본래의 목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과 시대는 변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의 부르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라질 건물이나 기념비에 의미를 두지 말고,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을 붙잡아야 합니다.“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전도서 7:12절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

본절은 지혜와 재물의 유익과 차이를 보여주나, 지혜 역시 하나님의 섭리를 넘지 못하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교훈으로 이끕니다. 먼저, 전도자는 지혜와 재물을 모두 ‘그늘’(보호)로 비유합니다. 보호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둘은 모두 삶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재물은 현실적 필요를 채우지만, 지혜는 그 지혜자의 삶을 살피고 안전한 길로 인도하여 생명을 보호하므로 우월합니다. 여기서 ‘생명’은 단순한 이 세상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할 때 갖게 되는 참된 의미와 인생의 방향을 포함하고, 신약에서는 영생을 의미합니다(요20:31). 그러므로 참된 지혜을 얻으려면 복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좋은 예가 부자이자 관원이었던 청년이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왔으나,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어 하늘에 보화를 쌓은 뒤, 와서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에 근심하며 갔습니다. 그는 재물은 가지고 세상의 삶은 보호받았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생명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마19:16-22).  그러나 이 지혜조차도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지혜도 인생의 ‘구부러진 것’을 곧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1:15; 7:13). 누가 선천적 맹인을 고치거나 마음의 악을 제거하거나 죽은 자를 살리겠습니까?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꾸지 못합니다. 지혜와 재물의 그늘은 모두 제한적이고 인생은 여전히 ‘수수께끼’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히 그분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언9:10).

전도서 7:13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앞선 두 절에서 전도자는 재물은 그 소유자의 현실적 필요를 채워 주지만 살리지는 못하고, 지혜는 생명을 보호하나 죽지 않게 하거나 삶의 의미를 주지는 못합니다. 즉, 지혜조차 인생의 만능열쇠는 아닙니다. 그 대표적 한계로 본절은 하나님의 섭리를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굽은 면’을 인생에 장치하셨습니다. 건강·재물·자녀 모든 것을 가졌는데, 가정의 불화로 누리지 못하는 경우 등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해결되는 문제이나, 인간의 존재감과 탐욕 때문에 서로 싸우는 것이지요! 그 이외에도 죄, 질병, 죽음, 악한 마음, 예기치 못한 사건들 등은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사람이 곧게 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삶의 불가해성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강조로서, 인간으로 하나님을 찾게 하는 결정적 동인입니다. 한편, 복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치료약이요,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에 대한 답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셔서 구부러진 것들- 맹인, 나병, 죽은 자들을 살리심, 죄인의 회개 등 -을 치유하셨는데, 구부러진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굽은 면이 발생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은 ‘새옹지마’를 새기며 체념하나,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이 하시는 일을 경험할 수 있다는 소망 가운데 기뻐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선천성 맹인)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벧산/ 벧 스안
사무엘상31:12절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

벧산은 원래 므낫세 지파의 몫이나 원주민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고, 이어 블레셋이 차지합니다. 블레셋은 길보아 전투에서 승리한 뒤 사울의 시체를 성벽에 매달아 이스라엘을 조롱하였습니다. 이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가서 시신을 수습하여 40년 전 자신들을 구원한 사울에게 보답하였음을 본절이 보여줍니다. 다윗은 벧산을 정복하고 솔로몬은 갈릴리 행정 중심지로 삼았지만(BC970), 이후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와 헬라 제국을 거쳐 이름도 스키토볼리로 바뀌고 로마의 지배 아래 놓입니다(BC63). 벧산(스키토볼리)은 데가볼리 열 도시 가운데 가장 크고 번영한 로마 도시로 성장하여, 로마식 도로인 카르도를 중심으로 극장, 목욕장, 신전 등 화려한 건축물들이 세워졌습니다. 특히 도시 입구의 웅장한 석문은 스키토볼리 주변 지역과 구별되는 로마 도시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질문이 떠 오릅니다. 왜 므낫세 지파는 분배된 벧산을 정복하지 못하고, 또 다윗이 정복한 그 도시는 끝내 이방인에게 넘어갔을까요? 또, 벧산이 꽃피운 문화는 왜 이방 문화였을까요? 첫째 원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방인들과 이방문화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인지 여부를 확인하고 계셨습니다. 이른바 ‘남은 자’ 사상입니다. 그들은 벧산이라는 세상의 기업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기업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의 믿음이자 소망입니다. “(모세는)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6).


하나님의 그 은혜
로마서 5:21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본절은 구원의 역사 중에 드러난 하나님의 목적을 요약합니다. 예수께서 오시기 이전에는 죄의 권세가 사망 안에서 통치하였으나, 지금은 더 큰 권세가 왔으니 ‘그 은혜’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그 은혜’ 말입니다. ‘그 은혜’는 지금 ‘의’를 통해 통치합니다. ‘의’란 16~19절에서 말하는 ‘의의 그 선물’인데, ‘의롭다 하심을 받음’(16)과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통치’(17)를 지칭합니다. 전자는 칭의로, 후자는 성화로 표현되며 구원 사건의 두 측면입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의 통치로 죄가 정복되었습니다. 신자들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정죄받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 은혜’의 통치는 단순히 ‘의롭다”라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내린 선언을 넘어 실제의 삶에서 ‘의’를 만들어 내는데, 이들이 택함받은 사람이요 중생한 신자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그 은혜’에 감사하고 자신을 위해 죽으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힘들고 손해되더라도, 단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합니다. 이것이 성령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따라서, ‘의의 그 선물’은 반드시 변화된 삶을 포함하며 그 마지막은 영생입니다. 이 영생의 완전한 실현은 부활 시이지만, 현재의 악한 세대에 이미 침투하였고, 영생을 가진 신자들은 마음의 악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능력 때문이죠!(롬8:1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