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6/7/13-17)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서문교회(5)
다니엘 3:17절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국가가 멸망하고, 우상숭배가 강제된 상황 하에서 다니엘은 사자굴을, 세 친구는 풀무불이란 각 시험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이방에 드러냈습니다. 배은희 목사 뒤이어, 전남 옥과 출신 김세열 목사가 부임한 기간은 민족의 수난기였습니다(1936~50년). 1937년 신사참배를 거부한 선교사들이 학교를 폐쇄하고 한국을 떠난 후 교회는 무방비 상태로 일제의 탄압과 통제를 받았습니다. 목사와 교인들이 신사로 끌려 나갔으며 예배당까지 가미다나가 설치되었습니다. 해방과 6·25 전쟁 후 빈번한 장로교회 분열 중에도 서문교회는 ‘보수적’ 장로교 노선을 지켰지만, 일부 교인들은 이탈하고 주변 교회들은 교단을 달리하여 교류를 끊었습니다. 따라서, 서문교회는 전주의 모교회이면서도 장로교 선교부나 다수 교회들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이 같은 시련 속에서 서문교회 예배당과 주변 환경도 많이 변했습니다. 1905년 은송리 ‘선교사 사택’을 옮겨 예배당으로 사용하다가 1911년 건물 오른쪽 모서리에 32평짜리 벽돌건물을 내붙여 ‘ㄱ’자 예배당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고딕’ 붉은 벽돌 예배당(1935년)으로 대체되었고, 고딕 예배당은 지금의 방주형 예배당(1983년, 790평)을 지을 때 헐렸으며, 예배당 옆으로 ‘100주년기념관’이 건축되었습니다(1993년). 서문교회는 일제의 탄압, 신사참배 강요, 교단 분열, 주변 교회의 이탈 등 여러 격변을 겪었지만 믿음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견뎌낸 공동체라 하겠습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14:12).  

전도서 8:13절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전도자는 세상에서 한 가지 모순을 발견합니다. 악인이 때로는 형통하고 오래 사는 것처럼 보이며, 의인은 고난을 겪고 잊혀지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현실은 하나님이 선하시고 정의로우시다는 믿음을 흔들 수 있는 강한 시험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이 모순을 이유로 악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는 현실은 혼란하나 경건한 사람이 더 잘됨을 고백합니다. 악인의 번영은 길어 보이나 실체 없는 그림자와 같을 뿐이고, 하나님을 떠난 삶은 허무로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삶은 작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본절의 긴장과 그에 따른 전도자의 교훈은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비록, 악한 사람이 성공하고, 정직한 사람이 손해를 보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경험지만, 눈앞의 현실만을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그분의 정의는 반드시 세워질 것입니다. 이 진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가장 분명합니다. 의로우신 예수께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악한 자들은 잠시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정의를 세우셨습니다. 사자굴로 던져진 다니엘도 구원받았습니다. 의인의 길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경건한 자가 잘 될 것이다”라는 전도자의 고백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현실의 모순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복된 길입니다. 악인의 번영은 잠시뿐이며 인내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약1:12).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전도서 8:14절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도자는 의인이 악인의 몫을 받고, 악인이 의인의 몫을 받는 현실을 보면서 “이것도 헛되다”고 고백합니다. 전도자의 고민은 단순한 철학적 질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탄식입니다. “왜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가? 왜 악한 사람이 잘되는가?” 전도자는 이 질문을 끝내 해결하지 못한 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사건을 우리 앞에 제시합니다. 바로 스데반의 죽음입니다. 스데반은 의인이었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했고, 지혜와 은혜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말은 의인답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짓 증언을 당하고, 돌에 맞아 죽습니다. 전도자의 말처럼 의인이 악인의 몫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주의 영광을 보고 기쁨으로 죽음을 맞습니다. 또한,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위하여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바울과 베드로의 마지막도 같았습니다. 이런 것들은 부활의 승리를 증언합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전도자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의인이 억울하게 죽을 수 있지만, 그 죽음은 패배가 아닙니다. 악인이 승리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잠시뿐입니다. 스데반은 예수께서 성취하신 부활의 영광을 미리 맛본 것이고, 그의 용서와 기쁨 역시 하나님의 정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현실의 모순은 커 보일 수 있으나, 주님의 정의를 믿고 신실하게 살아야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욥바
요나 1:2절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욥바는 텔아비브에 있는 절경의 도시입니다. 가나안 정복 당시 욥바는 철병거를 보유하여 단 지파는 점령하지 못합니다. 다윗·솔로몬 시대에는 해양 무역 세력인 두로와 시돈의 영향 하에 있어, 무력점령 대신 우호조약을 맺고 욥바를 공동무역항으로 사용했습니다. 욥바가 유대인에게 점령 통합된 때는 1200년 뒤인 마카비 시대(BC 2세기)입니다. 욥바는 항만이 없는 이스라엘을 위한 지중해 항구도시여서 시돈과 두로에서 벌목한 백향목은 욥바를 통해 육지로 들어왔습니다(대하 2:16; 스 37). 이 같이 욥바는 오랜 역사를 가졌고 오늘날까지도 인구가 밀집하여 고고학적인 흔적들은 찾기 어렵습니다. 한편, 이 욥바는 선지자 요나와 관련이 있습니다. 요나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4km 떨어진 가드헤벨 출신입니다. 주님이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명령하셨으나, 그는 불순종하여 정반대 방향의 항구 욥바로 도망쳐서 “다시스로 가는 배”에 승선합니다. 그러나 요나의 배가 폭풍을 만나자 요나는 바다에 던져지고, 이어 물고기 배에 들어가 사흘 밤낮을 지냅니다. 회개한 요나는 다시 니느웨로 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잠시 빗나갈 수는 있어도, 결국 하나님이 예비하신 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겪은 불순종과 징계의 사건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예표로 기록됩니다(마12:40).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도 구속사의 빛으로 바꾸어 내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12:40).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3:6).


믿음과 느헤미야(6)
느헤미야 2:4절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상황에 정통했습니다. 지금 아닥사스다 왕은 예루살렘 지역을 안정시킬 신뢰할 만한 인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왕에게 오해를 받을 수 있었고, 명분도 약했기 때문에 섣불리 총독자리를 요청하지 못했습니다. 총독임명의 결정권은 왕이 아니라 왕을 움직이시는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점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성서적 세계관의 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왕을 통해 주어지며, 왕 역시 존중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그 좁은 계명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왕의 마음은 주님 손에 있다”(잠 21:1)는 말씀을 붙들고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동기는 분명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먼저, 느헤미야는 일의 주관자는 왕 아닥사스다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면서,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도록 왕의 허락을 위해 기도합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전 14:1)는 말씀처럼, 바른 동기를 갖고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느헤미야는 이미 마음으로 총독이 될 것을 결심하고 기도했지만 임의로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림은 무려 넉 달이었습니다.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고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분이십니다(전3:11). 따라서 ‘하나님의 때’를 깨닫기까지 계획을 갖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죠! 넉 달 후 적절한 상황에서 기도는 응답되었고 그는 예루살렘 회복의 핵심 인물로 세워졌습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