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서문교회(5)
마태복음 13:31,32절
“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김인전 목사 후임으로 경북 경산 출신 배은희 목사가 부임했습니다(1921년). 배은희 목사가 담임했던 15년 동안 꾸준하게 교세가 성장하여 시내 완산교회(1926년), 중앙교회(1930년), 동부교회(1934년) 등을 분립했습니다. 또 서문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전주 기독교청년회와 여자기독교청년회가 조직되었고, 전라도 최초로 전주유치원(1921년)도 설립하였습니다. 배은희 목사는 소외계층 선교에 관심이 깊어 1925년 ‘무산아동’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나중에 숭덕학교가 되었습니다. 또한 1927년 전주 여자기독교청년회가 서문교회 전도실을 빌려 시작한 전주고아원은 1931년 서문교회 옆 골목, 일본인 유흥시설을 인수하였습니다. 이 전주고아원은 ‘처녀 선생’ 방애인의 고아 사랑이 유명합니다. 기전여학교 선생이었던 방애인은 고아원에 지극한 정성을 쏟았습니다. 전주 사람들은 그녀가 고아를 업고 추운 밤길을 가는 모습, 다리 밑에서 거지나 ‘나병환자’를 끌어안고 기도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습니다. 결국 장질부사에 걸려 별세 하였는데(1933년) 당시 나이 스물넷이었습니다. 배은희 목사는 그녀를 ‘조선의 성자’라 불렀습니다. 서문교회는 단순히 교세가 커진 것이 아니라 고아원 설립, 무산아동 학교 설립, YMCA·YWCA 조직, 소외계층 선교, 그리고 방애인의 희생적 사랑 등, 이 모든 ‘사랑의 실천’이 교회의 진정한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13:33).
전도서 8:11절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본절은 악의 번성은 심판의 지연 때문임을 통찰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본래 악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그 마음의 모든 계획이 악합니다(창6:5). 그런데 심판이 지연되면, 그 악은 억제되지 않고 오히려 대담해집니다. 이는 악인은 하나님이 없다거나 혹은 하나님이 보지 않는다고 착각하고 있고, 사회는 악을 제어할 힘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해 아래의 큰 모순”으로 전도자는 개탄합니다. 그러나 심판의 지연이 심판의 부재는 아닙니다. 즉시는 아니라 하더라도 심판은 반드시 오는데,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최후의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히 9:27). 심판의 지연은 하나님의 인내와 주권의 신비에 속합니다. 하나님은 당장 악을 제거하기보다, 때로는 회개할 기회를 주시려고, 때로는 당신의 큰 계획 속에서 심판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제사장 엘리의 악한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예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며, 성막의 여인들과 음행하는 등 성막을 더럽히자, 하나님은 선지자와 어린 사무엘을 통해 엘리 집안의 심판을 거듭 선언하셨지만, 20년을 인내하시면서 회개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심판의 기한이 되자 아벡의 전투에서 두 사람을 함께 죽이시고, 130년 후에 엘리의 후손 아비아달이 왕 솔로몬에 의해 제사장직에서 파직됨으로 엘리 집안에 대한 심판을 완성하십니다(왕상2:27). 심판은 150년에 걸쳐 집행되었습니다. 따라서, 심판 지연 등 큰 모순을 겪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인내와 목적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시편37:9).
전도서 8:12절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본절 전반부는 전절(8:11절)에서 제기된 문제—악인이 심판받지 않고 오히려 장수하는 현실—을 다시 강조하며, 응보의 불일치를 토로합니다. “죄인은 백 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한다”는 관찰은, 전통적 지혜가 가르친 “장수는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교훈(잠 3:2, 16, 18)과 충돌합니다. 이는 단순한 예외가 아니라, 전도자가 반복해서 목격한 현실의 모순입니다. 그러나 후반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라는 전통적 가르침을 되풀이 합니다. 성경학자 롱맨은 이 부분이 전도자 자신의 견해가 아니라 전통적 지혜의 목소리를 인용한 것으로 평가합니다. 즉, 전도자가 평소 사용하는 동사 “알다(야다)”의 분사형은 이례적으로써, 고대 지혜 교사들이 전래하는 교훈을 전달할 때 사용하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8:14–15절에서 다시 악인과 의인의 처우가 뒤바뀐 현실의 모순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개탄합니다. 물론 응보의 교훈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전도자는 즉각적 보응은 부정하지만, 궁극적 보응은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현실에서는 악인이 일시적으로 번성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잘되고, 악인의 번영은 오래가지 못합니다(8:13). 따라서, 본절은 현실은 모순처럼 보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며, 악인의 번영은 일시적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바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다윗도 하나님을 신뢰하여 선을 행하며 그분의 성실에 기대어 살아가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시편37:3).”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편37: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므깃도(7)
열왕기하 23: 29절
“요시야 당시에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맞서 나갔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났을 때에 죽인지라”
므깃도는 고대 근동의 견고한 요새 중 하나였지만 앗수르에게 점령당하였습니다(BC722).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점복한 뒤 행정구역을 마깃두(므깃도)와 사메리나(사마리아)로 나눠 통치하였고 므깃도에는 앗수르식 건축 양식이 반영된 행정건물들이 세워졌습니다. 고고학적으로는 중앙에 직사각형 안뜰을 두고 사방에 방이 배치된 1052번, 1369번 건물이 대표적이며, 이는 앗수르 행정체계가 이 지역에 깊이 스며들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후 앗수르가 약화되고 바벨론이 세력을 확장하는 와중에, 요시야 왕은 북왕국 이스라엘 영토의 일부를 되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느고 왕이 앗수르를 돕기 위해 북상하자 요시야는 이를 저지하려고 므깃도에서 전투를 벌였고, 결국 그곳에서 전사합니다(왕하 23:29). 요시야는 경건하고 열정적인 왕이었으나 남유다가 처한 국제정세의 판단 능력은 부족했습니다. 인생에서 열심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듣고 분별하는 귀입니다.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자(BC586) 더 이상 므깃도는 재건되지 못하고 전쟁의 상징적 장소로만 남게 됩니다. 이스르엘 골짜기의 수 많은 전쟁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실패, 그리고 유다 왕국의 멸망 등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는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고, 결국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완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세상 일로 낙심하지 말고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재료 삼아 계획을 성취하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믿음과 느헤미야(5)
느헤미야 1:9절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느헤미야는 성경적 세계관을 갖춘 사람으로 역사와 세상을 신명기적 언약의 틀 안에서 해석하였고, 이 언약의 틀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 선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하면 축복이 오고, 불순종하면 저주가 임하며, 회개하면 반드시 회복이 주어진다는 언약입니다. 느헤미야는 불순종하여 멸망한 남유대 왕국(BC586)과 고레스 칙령(BC 538)을 통해 귀환한 역사를 통해 언약의 성취를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페르시아 왕의 신임을 받는 술관원이라는 독특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페르시아는 유대 땅을 지배하는 제국이었지만, 느헤미야는 그들을 하나님의 징계와 회복을 이루는 도구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제국의 통치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인 것입니다. 같은 믿음을 에스더와 모르드개도 갖고 왕후와 재상의 자리에 각 올랐습니다. 이 경우 부림절 사건은 단순한 하만의 음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권력의 중심에 유대인을 세우시고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시려는 섭리의 역사로 바뀝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제국 안에서 합법적 지위를 위해 노력하였고, 이 또한 하나님이 예비하신 회복의 길 중 하나였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도 같은 세계관을 가집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만유의 주로 임명받아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제사장으로 서서 어둠을 물리치고 의의 열매를 맺을 능력을 갖게 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