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6/7/13-17)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서문교회(5)
다니엘 3:17절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국가가 멸망하고, 우상숭배가 강제된 상황 하에서 다니엘은 사자굴을, 세 친구는 풀무불이란 각 시험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이방에 드러냈습니다. 배은희 목사 뒤이어, 전남 옥과 출신 김세열 목사가 부임한 기간은 민족의 수난기였습니다(1936~50년). 1937년 신사참배를 거부한 선교사들이 학교를 폐쇄하고 한국을 떠난 후 교회는 무방비 상태로 일제의 탄압과 통제를 받았습니다. 목사와 교인들이 신사로 끌려 나갔으며 예배당까지 가미다나가 설치되었습니다. 해방과 6·25 전쟁 후 빈번한 장로교회 분열 중에도 서문교회는 ‘보수적’ 장로교 노선을 지켰지만, 일부 교인들은 이탈하고 주변 교회들은 교단을 달리하여 교류를 끊었습니다. 따라서, 서문교회는 전주의 모교회이면서도 장로교 선교부나 다수 교회들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이 같은 시련 속에서 서문교회 예배당과 주변 환경도 많이 변했습니다. 1905년 은송리 ‘선교사 사택’을 옮겨 예배당으로 사용하다가 1911년 건물 오른쪽 모서리에 32평짜리 벽돌건물을 내붙여 ‘ㄱ’자 예배당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고딕’ 붉은 벽돌 예배당(1935년)으로 대체되었고, 고딕 예배당은 지금의 방주형 예배당(1983년, 790평)을 지을 때 헐렸으며, 예배당 옆으로 ‘100주년기념관’이 건축되었습니다(1993년). 서문교회는 일제의 탄압, 신사참배 강요, 교단 분열, 주변 교회의 이탈 등 여러 격변을 겪었지만 믿음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견뎌낸 공동체라 하겠습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14:12).  

전도서 8:13절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전도자는 세상에서 한 가지 모순을 발견합니다. 악인이 때로는 형통하고 오래 사는 것처럼 보이며, 의인은 고난을 겪고 잊혀지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현실은 하나님이 선하시고 정의로우시다는 믿음을 흔들 수 있는 강한 시험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이 모순을 이유로 악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는 현실은 혼란하나 경건한 사람이 더 잘됨을 고백합니다. 악인의 번영은 길어 보이나 실체 없는 그림자와 같을 뿐이고, 하나님을 떠난 삶은 허무로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삶은 작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본절의 긴장과 그에 따른 전도자의 교훈은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비록, 악한 사람이 성공하고, 정직한 사람이 손해를 보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경험지만, 눈앞의 현실만을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그분의 정의는 반드시 세워질 것입니다. 이 진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가장 분명합니다. 의로우신 예수께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악한 자들은 잠시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정의를 세우셨습니다. 사자굴로 던져진 다니엘도 구원받았습니다. 의인의 길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경건한 자가 잘 될 것이다”라는 전도자의 고백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현실의 모순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복된 길입니다. 악인의 번영은 잠시뿐이며 인내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약1:12).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전도서 8:14절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도자는 의인이 악인의 몫을 받고, 악인이 의인의 몫을 받는 현실을 보면서 “이것도 헛되다”고 고백합니다. 전도자의 고민은 단순한 철학적 질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탄식입니다. “왜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가? 왜 악한 사람이 잘되는가?” 전도자는 이 질문을 끝내 해결하지 못한 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사건을 우리 앞에 제시합니다. 바로 스데반의 죽음입니다. 스데반은 의인이었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했고, 지혜와 은혜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말은 의인답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짓 증언을 당하고, 돌에 맞아 죽습니다. 전도자의 말처럼 의인이 악인의 몫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주의 영광을 보고 기쁨으로 죽음을 맞습니다. 또한,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위하여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바울과 베드로의 마지막도 같았습니다. 이런 것들은 부활의 승리를 증언합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전도자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의인이 억울하게 죽을 수 있지만, 그 죽음은 패배가 아닙니다. 악인이 승리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잠시뿐입니다. 스데반은 예수께서 성취하신 부활의 영광을 미리 맛본 것이고, 그의 용서와 기쁨 역시 하나님의 정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현실의 모순은 커 보일 수 있으나, 주님의 정의를 믿고 신실하게 살아야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욥바
요나 1:2절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욥바는 텔아비브에 있는 절경의 도시입니다. 가나안 정복 당시 욥바는 철병거를 보유하여 단 지파는 점령하지 못합니다. 다윗·솔로몬 시대에는 해양 무역 세력인 두로와 시돈의 영향 하에 있어, 무력점령 대신 우호조약을 맺고 욥바를 공동무역항으로 사용했습니다. 욥바가 유대인에게 점령 통합된 때는 1200년 뒤인 마카비 시대(BC 2세기)입니다. 욥바는 항만이 없는 이스라엘을 위한 지중해 항구도시여서 시돈과 두로에서 벌목한 백향목은 욥바를 통해 육지로 들어왔습니다(대하 2:16; 스 37). 이 같이 욥바는 오랜 역사를 가졌고 오늘날까지도 인구가 밀집하여 고고학적인 흔적들은 찾기 어렵습니다. 한편, 이 욥바는 선지자 요나와 관련이 있습니다. 요나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4km 떨어진 가드헤벨 출신입니다. 주님이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명령하셨으나, 그는 불순종하여 정반대 방향의 항구 욥바로 도망쳐서 “다시스로 가는 배”에 승선합니다. 그러나 요나의 배가 폭풍을 만나자 요나는 바다에 던져지고, 이어 물고기 배에 들어가 사흘 밤낮을 지냅니다. 회개한 요나는 다시 니느웨로 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잠시 빗나갈 수는 있어도, 결국 하나님이 예비하신 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겪은 불순종과 징계의 사건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예표로 기록됩니다(마12:40).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도 구속사의 빛으로 바꾸어 내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12:40).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3:6).


믿음과 느헤미야(6)
느헤미야 2:4절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상황에 정통했습니다. 지금 아닥사스다 왕은 예루살렘 지역을 안정시킬 신뢰할 만한 인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왕에게 오해를 받을 수 있었고, 명분도 약했기 때문에 섣불리 총독자리를 요청하지 못했습니다. 총독임명의 결정권은 왕이 아니라 왕을 움직이시는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점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성서적 세계관의 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왕을 통해 주어지며, 왕 역시 존중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그 좁은 계명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왕의 마음은 주님 손에 있다”(잠 21:1)는 말씀을 붙들고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동기는 분명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먼저, 느헤미야는 일의 주관자는 왕 아닥사스다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면서,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도록 왕의 허락을 위해 기도합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전 14:1)는 말씀처럼, 바른 동기를 갖고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느헤미야는 이미 마음으로 총독이 될 것을 결심하고 기도했지만 임의로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림은 무려 넉 달이었습니다.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고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분이십니다(전3:11). 따라서 ‘하나님의 때’를 깨닫기까지 계획을 갖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죠! 넉 달 후 적절한 상황에서 기도는 응답되었고 그는 예루살렘 회복의 핵심 인물로 세워졌습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새번역).

매일묵상(2026/7/6-10)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서문교회(5)
마태복음 13:31,32절
“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김인전 목사 후임으로 경북 경산 출신 배은희 목사가 부임했습니다(1921년). 배은희 목사가 담임했던 15년 동안 꾸준하게 교세가 성장하여 시내 완산교회(1926년), 중앙교회(1930년), 동부교회(1934년) 등을 분립했습니다. 또 서문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전주 기독교청년회와 여자기독교청년회가 조직되었고, 전라도 최초로 전주유치원(1921년)도 설립하였습니다. 배은희 목사는 소외계층 선교에 관심이 깊어 1925년 ‘무산아동’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나중에 숭덕학교가 되었습니다. 또한 1927년 전주 여자기독교청년회가 서문교회 전도실을 빌려 시작한 전주고아원은 1931년 서문교회 옆 골목, 일본인 유흥시설을 인수하였습니다. 이 전주고아원은 ‘처녀 선생’ 방애인의 고아 사랑이 유명합니다. 기전여학교 선생이었던 방애인은 고아원에 지극한 정성을 쏟았습니다. 전주 사람들은 그녀가 고아를 업고 추운 밤길을 가는 모습, 다리 밑에서 거지나 ‘나병환자’를 끌어안고 기도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습니다. 결국 장질부사에 걸려 별세 하였는데(1933년) 당시 나이 스물넷이었습니다. 배은희 목사는 그녀를 ‘조선의 성자’라 불렀습니다. 서문교회는 단순히 교세가 커진 것이 아니라 고아원 설립, 무산아동 학교 설립, YMCA·YWCA 조직, 소외계층 선교, 그리고 방애인의 희생적 사랑 등, 이 모든 ‘사랑의 실천’이 교회의 진정한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13:33).

전도서 8:11절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본절은 악의 번성은 심판의 지연 때문임을 통찰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본래 악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그 마음의 모든 계획이 악합니다(창6:5). 그런데 심판이 지연되면, 그 악은 억제되지 않고 오히려 대담해집니다. 이는 악인은 하나님이 없다거나 혹은 하나님이 보지 않는다고 착각하고 있고, 사회는 악을 제어할 힘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해 아래의 큰 모순”으로 전도자는 개탄합니다. 그러나 심판의 지연이 심판의 부재는 아닙니다. 즉시는 아니라 하더라도 심판은 반드시 오는데,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최후의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히 9:27). 심판의 지연은 하나님의 인내와 주권의 신비에 속합니다. 하나님은 당장 악을 제거하기보다, 때로는 회개할 기회를 주시려고, 때로는 당신의 큰 계획 속에서 심판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제사장 엘리의 악한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예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며, 성막의 여인들과 음행하는 등 성막을 더럽히자, 하나님은 선지자와 어린 사무엘을 통해 엘리 집안의 심판을 거듭 선언하셨지만, 20년을 인내하시면서 회개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심판의 기한이 되자 아벡의 전투에서 두 사람을 함께 죽이시고, 130년 후에 엘리의 후손 아비아달이 왕 솔로몬에 의해 제사장직에서 파직됨으로 엘리 집안에 대한 심판을 완성하십니다(왕상2:27). 심판은 150년에 걸쳐 집행되었습니다. 따라서, 심판 지연 등 큰 모순을 겪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인내와 목적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시편37:9).

전도서 8:12절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본절 전반부는 전절(8:11절)에서 제기된 문제—악인이 심판받지 않고 오히려 장수하는 현실—을 다시 강조하며, 응보의 불일치를 토로합니다. “죄인은 백 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한다”는 관찰은, 전통적 지혜가 가르친 “장수는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교훈(잠 3:2, 16, 18)과 충돌합니다. 이는 단순한 예외가 아니라, 전도자가 반복해서 목격한 현실의 모순입니다. 그러나 후반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라는 전통적 가르침을 되풀이 합니다. 성경학자 롱맨은 이 부분이 전도자 자신의 견해가 아니라 전통적 지혜의 목소리를 인용한 것으로 평가합니다. 즉, 전도자가 평소 사용하는 동사 “알다(야다)”의 분사형은 이례적으로써, 고대 지혜 교사들이 전래하는 교훈을 전달할 때 사용하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8:14–15절에서 다시 악인과 의인의 처우가 뒤바뀐 현실의 모순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개탄합니다. 물론 응보의 교훈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전도자는 즉각적 보응은 부정하지만, 궁극적 보응은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현실에서는 악인이 일시적으로 번성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잘되고, 악인의 번영은 오래가지 못합니다(8:13). 따라서, 본절은 현실은 모순처럼 보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며, 악인의 번영은 일시적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바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다윗도 하나님을 신뢰하여 선을 행하며 그분의 성실에 기대어 살아가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시편37:3).”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편37: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므깃도(7)
열왕기하 23: 29절
“요시야 당시에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맞서 나갔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났을 때에 죽인지라”

므깃도는 고대 근동의 견고한 요새 중 하나였지만 앗수르에게 점령당하였습니다(BC722).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점복한 뒤 행정구역을 마깃두(므깃도)와 사메리나(사마리아)로 나눠 통치하였고 므깃도에는 앗수르식 건축 양식이 반영된 행정건물들이 세워졌습니다. 고고학적으로는 중앙에 직사각형 안뜰을 두고 사방에 방이 배치된 1052번, 1369번 건물이 대표적이며, 이는 앗수르 행정체계가 이 지역에 깊이 스며들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후 앗수르가 약화되고 바벨론이 세력을 확장하는 와중에, 요시야 왕은 북왕국 이스라엘 영토의 일부를 되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느고 왕이 앗수르를 돕기 위해 북상하자 요시야는 이를 저지하려고 므깃도에서 전투를 벌였고, 결국 그곳에서 전사합니다(왕하 23:29). 요시야는 경건하고 열정적인 왕이었으나 남유다가 처한 국제정세의 판단 능력은 부족했습니다. 인생에서 열심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듣고 분별하는 귀입니다.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자(BC586) 더 이상 므깃도는 재건되지 못하고 전쟁의 상징적 장소로만 남게 됩니다. 이스르엘 골짜기의 수 많은 전쟁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실패, 그리고 유다 왕국의 멸망 등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는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고, 결국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완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세상 일로 낙심하지 말고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재료 삼아 계획을 성취하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믿음과 느헤미야(5)
느헤미야 1:9절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느헤미야는 성경적 세계관을 갖춘 사람으로 역사와 세상을 신명기적 언약의 틀 안에서 해석하였고, 이 언약의 틀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 선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하면 축복이 오고, 불순종하면 저주가 임하며, 회개하면 반드시 회복이 주어진다는 언약입니다. 느헤미야는 불순종하여 멸망한 남유대 왕국(BC586)과 고레스 칙령(BC 538)을 통해 귀환한 역사를 통해 언약의 성취를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페르시아 왕의 신임을 받는 술관원이라는 독특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페르시아는 유대 땅을 지배하는 제국이었지만, 느헤미야는 그들을 하나님의 징계와 회복을 이루는 도구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제국의 통치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인 것입니다. 같은 믿음을 에스더와 모르드개도 갖고 왕후와 재상의 자리에 각 올랐습니다. 이 경우 부림절 사건은 단순한 하만의 음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권력의 중심에 유대인을 세우시고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시려는 섭리의 역사로 바뀝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제국 안에서 합법적 지위를 위해 노력하였고, 이 또한 하나님이 예비하신 회복의 길 중 하나였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도 같은 세계관을 가집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만유의 주로 임명받아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제사장으로 서서 어둠을 물리치고 의의 열매를 맺을 능력을 갖게 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매일묵상(2026/6/29-7/3)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서문교회(3)
히브리서 11: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차 받을 유업을 향하여 나아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아갔고.”


본절의 말씀은 김인전 목사의 생애를 그대로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 다 알지 못했지만, 교회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찾아 믿음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따라간 롯과 같이 그를 따라 김씨 가문은 이주하였습니다. 김인전 목사는 교회 안팍에서 추앙받았습니다. 한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유학자들을 만나러 향교를 자주 찾았는데 그때마다 세 살 위인 이거두리가 앞에서 “쉬이-물렀거라. 김목사님 나가신다.”하며 길을 열었다고 합니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그는 국권회복의 길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는데 있다고 인식하고, 가산을 출연하여 고향인 충남 서천군에 중등과정의 한영학교(韓英學校)를 설립하고(1906년), 교육계몽운동에 뛰어 들었습니다. 1910년 한입합방이 되자 학교를 숙부에게 인계하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 학교는 서북지역 독립운동의 요람이었습니다. 신학교 졸업(1914) 후 서문교회에 부임한 그는 목회 중에도 독립 의식을 꾸준히 고취하였습니다. 3·1운동 때에는 전주 지역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이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으로 항일투쟁을 벌였습니다. 1923년 별세하여 상해 외인묘지에 묻혔던 그의 유해는 1993년 8월 서울 국립묘지로 옮겨졌습니다. 아브라함이나 김인전 목사의 삶에서 보듯이 믿음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부르심은 무엇이겠습니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전도서 8:9절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

전도서 8:9절은 “해 아래에서 본 모든 것”이라는 말로 시작하며, 전도자가 실제 삶에서 관찰한 권력의 현실을 요약합니다. 그는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장하다(슐라트)”는 앞절에서 왕의 권세를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로, 권력을 가진 자가 타인을 억압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한편, 그 “해(악)”가 피해자에게만 임하는가?  아니면 가해자인 권력자에게도 돌아가는가? 전도자는 둘 다를 염두에 둡니다. 권력자는 타인을 해치지만, 그 악은 자신에게도 돌아옵니다. 전도서 5:13에서, “재물은 그 주인에게 해가 된다”는 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10절은 이 생각을 이어, 악한 권력자의 결말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한때 성전 출입을 자랑하며 스스로를 의롭다 여겼지만, 결국 죽고 묻히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집니다. 그들의 권력은 그들이 생각한 것만큼 크지 않았고, 그들의 악행도 영원히 지속되지 못합니다. 권력이나 권한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부당하게 사용해 타인을 해칠 수 있지만, 그 권력은 제한적이며 악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에스더서의 하만은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는 왕의 권세를 이용해 모르드개와 유대 민족을 멸하려 했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그 악한 계획은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왔습니다. 에스더의 왕비 된 위치, 모르드개의 선행과 그 기록의 망각 등 모든 과정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심판이었음을 증거합니다.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잠언11:21).

전도서 8:10절
“그런 후에 내가 본즉 악인들은 장사지낸 바 되어 거룩한 곳을 떠나 그들이 그렇게 행한 성읍 안에서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본절은 악인에 대한 심판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한탄합니다. 전도자는 악인의 장례를 지켜보며, 그들이 생전에 성전을 자주 드나들던 종교적 외식자였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배는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했고, 그들은 종교의 형식만 취한 채 그 정신을 부인하였습니다. 결국 자신들이 피조물에 불과함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5:2). 그들의 악은 이미 심판을 향해 무르익었지만, 생전에 심판은 없었고, 죽은 뒤에도 악행은 드러나지 않아 후대에 잊혀질 것입니다. 이를 본 전도자는 “헛되다”고 탄식합니다. 우리도 “왜 지금 악인에 대한 심판이 없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온다”(12:14)고 답합니다. 비록 우리에게 지연처럼 보이지만, 지연은 심판의 부재가 아닙니다. 악인이 사는 동안 심판을 피한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린 비극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이 기다립니다. 다윗의 성가대장 아삽도 이 진리를 깨닫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고 미워한 사실을 회개합니다. 그는 악인이 교만하고 권력을 남용해도 형통하며, 자손도 잘 되고, 죽을 때도 평안하나, 경건하게 살려는 자신은 병들고 가난하며 늙어 고통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배 중 악인에게는 영원한 파멸이,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교훈과 영원한 영광이 주어졌음을 깨닫고, 자신이 무지한 짐승과 같았음을 고백합니다(시편 73편).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 15: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므깃도(6)
열왕기하 20: 20절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업적과 저수지와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겨울에만 비가 오고 여름에는 한 방울의 비도 오지 않는 이스라엘에서 수자원을 확보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여러 유적지에서는 각 지역의 지형과 상황에 맞춘 독특한 급수시설들이 발견됩니다. 이러한 기후 조건은 전쟁을 하러 온 적군에게도 유리하지 않았습니다. 각 도시는 포위 중에도 물을 지키기 위해 땅속 깊이 터널을 파서 외부의 샘에 도달하는 비밀 통로를 마련했습니다. 1838년 발굴된 히스기야 터널은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BC 701).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의 침공을 대비하여 기혼샘의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약 533m 길이의 터널을 팠습니다. 두 팀이 양쪽에서 동시에 파 들어가 중간에서 정확히 만나게 된 이 공사는 고대 토목기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유적입니다. 므깃도에도 이와 유사한 급수시설이 있었습니다. 아합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시설은 언덕 꼭대기에서 소용돌이 모양의 층계를 따라 내려가 30m 깊이의 수직 수갱을 파고, 그 바닥에서 다시 성 밖의 샘까지 70m 길이의 수평 터널을 뚫은 구조였습니다. 샘은 적군이 볼 수 없도록 거대한 벽으로 가려져 있었습니다. 이같이 히스기야와 아합은 모두 전쟁을 대비해 수로·터널을 준비했지만, 두 사람의 ‘의지의 대상’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 결과 전자는 앗수르와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였고, 후자는 하나님이 아람과의 전쟁에서 전사토록 하셨습니다. 우리도 당연히 미래를 준비해야 하지만, 우리의 최종 의지처는 누구입니까?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언21:31).”

믿음과 느헤미야(4)
다니엘 1:2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사람의 믿음, 곧 세계관은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힘입니다. 느헤미야는 강대한 고레스 왕도 하나님의 도구여서, 고레스를 사용하여 유대 포로의 귀환을 이루신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권자로서 모든 나라와 왕들을 당신의 뜻대로 사용하신다는 성경적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느헤미야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약 150년 전에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다니엘도 같았습니다. 본절은 바벨론의 침공을 기록하면서 “주께서 여호야김을 그의 손에 넘기셨다”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느브갓네살의 군사적 승리였지만, 다니엘은 그 배후에 하나님의 주권을 보고 기록한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사건은 성경만의 기록이 아닙니다.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느브갓네살 연대기에도 유다 침공과 예루살렘 약탈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기록과 성경 기록의 차이는 해석에 있습니다. 세상은 제국의 힘을 말하나, 성경은 그 제국조차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말합니다. 다니엘과 느헤미야는 이 믿음으로 현실을 바라보았고, 그 믿음이 그들의 삶의 방향을 결정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 쪽을 선택합니까? 혼란과 불안이 가득한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역사를 주관하시며, 보이는 권력보다 더 크신 손으로 세상을 이끌고 계심을 믿고 있습니까? 이런 믿음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현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보이는 힘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을 더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단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