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7/21 – 25)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천 매산학교(3)
요한복음 12:24절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916년 기독계 사립학교에서 성경 교육을 금지시키자 학교를 폐쇄하고 5년 뒤 재개하였던(1921년) 순천 선교부는 일제 말기에 다시 수난을 받습니다. 남장로회 선교부는 신사참배 문제가 나왔을 때 타협을 통한 생존보다는 폐쇄를 통한 거부를 택했습니다. 광주나 목포, 전주, 군산 등 다른 남장로회 선교지역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매산학교도 1937년 9월 학교 폐쇄를 단행합니다. 학교가 문을 닫는 날 교사와 학생 수백 명이 ‘폐교예배’를 드리고 대성통곡하였습니다. 이렇게 매산학교는 죽었습니다만, 8년 뒤 해방이 찾아 왔습니다(1945). 돌아 온 선교사들은 최정완, 김형모, 나덕환, 고려위, 김원식 등 순천노회 지도자들은 함께 노력하여 1946년 9월 학교를 재건(매산중학교)하여 오늘에 이릅니다. 두 번의 학교폐쇄로 매산학교는 얻거나 잃은 것은 무엇일까요? 학교 교육의 목표는 지덕체의 조화로운 완성입니다. 지식은 학원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다고 전제하면, 덕을 함양하는 것은 가장 중요합니다. 덕의 기본은 정직과 사랑입니다. 신사참배의 강요 상황에서 선교부는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정직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결과는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실패였으나(선교사 추방, 학교폐쇄), 영적 도적적 민족적 관점에서는 성공으로, 순천매산학교는 죽음으로 신앙 유산을 후대에 남겼습니다. 복음의 기본속성에는 원수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이는 주님에 대한 믿음과 함께 복음의 핵심이며 덕의 최고봉입니다. 순교자 스데반의 마지막 말입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60).

전도서 3:19절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반려동물은 인간의 돌봄이 없으면 오염된 먹이나 물을 먹고 병들어 죽는 등  불이익을 당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돌보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본능이자 직분입니다(사랑). 그러나 동물은 인간과 다르므로 연구와 경험을 요합니다. 사자의 표호를 한 번 들으면 누가 사자 옆에 가고 싶겠습니까만, 맹수 사육사는 그 위험한 사자가 좋아 사육사 직업을 택하며(애착), 수의사는 싫어도 사자의 병을 치료해야만 합니다(책임). 인간은 동물을 돌보면서 창조주의 지식을 터득하지만, 또한 그분의 메시지를 함께 받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동물도 인간과 같이 죽을 운명이나, 인간은 자신의 죽음도 짐승의 죽음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통해 솔로몬은 “인간이 당하는 죽음을 짐승도 당한다”는 현실을 겪고 인간과 짐승이 다를 바 없음을 탄식합니다. 즉, 죽음은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 모두에게 일반이지만(2:12-17), 인간과 동물에게도 일반입니다. 절대 강자인 죽음은 지혜자와 우매자, 인간과 짐승을 동일한 평면에서 처리합니다. 만약 인간이 죽음의 진리를 배운다면 겸손하여, 생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계시나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으뜸이라 생각하며- 특히 권세, 지혜, 재물을 가진 자들 – 하나님의 뜻을 저버림으로 허무한 종말을 맞습니다. 오직 그분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허무를 극복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전도서 3:20절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본문은 인간과 동물의 운명이 같음을 그들 모두의 출처와 종착지가 동일함을 통해 밝힙니다. “…으므로…으로”에 해당하는 ‘민…엘’은 ‘∼로부터 ∼를 향해’(from ∼ to)라는 의미로 인간과 동물의 생명의 ‘기원과 끝자락’을 알려줍니다. 이들의 기원과 끝이 모두 흙이라는 인식은 인간의 연약함을 분명하게 각인시킵니다. 인간은 때때로 자신이 흙으로부터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만하며 탐욕을 부려 싸우지만, 이런 사실을 깨달으면 육신의 정욕, 세상적 야망과 명예욕, 재물에 대한 탐욕 등의 허망함을 깊이 인식할 것입니다. 이런 인식은 절망이나, 다른 면에서는 우리를 위의 것, 즉 하나님과 그분의 부르심을 생각하게 만드는 큰 원동력이 됩니다. “고난받는 것이 내게 유익이다”고 시편기자는 토로합니다. 시편기자가 주님의 법을 배우고 길을 바로잡아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시편119:71). 살다보면, 자신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때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를 붙뜨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교만한 모든 사람에게 임하나, 주님 사랑하는 자들은 회개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후회와 고집으로 귀결됩니다. 전자는 생명을 갖고 후자는 영원한 심판을 받음을 선포하는 복음은 오늘의 교훈을 넘어서는 신약의 계시로서, 심판자는 말할 것도 없이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롬2:13-16).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 29)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스라엘의 최북단 도시, 단
룻기 4 : 1절
“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아합 왕 시대(BC 8세기 중엽)로 추정되는 ‘단’의 성문은 도시의 서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성문 입구로 올라가는 길은 경사졌고 바닥은 돌로 포장되었습니다. 거대한 성문은 뜰 하나를 사이에 둔 두 개의 다른 사각형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경사진 길을 올라가면 7개의 탑과 여러 개의 방들로 이루어진 첫 번째 구조물에 도착합니다. 이 구조물을 통과하면 앞서 언급한 뜰이 나오고 4개의 방으로 구성된 직사각형의 본 성문을 만납니다. 성문을 지나면 넓은 도로를 지나 시내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목할 구조물은 뜰의 북서쪽에 있는 단상이며 돌을 직각으로 잘 다듬어 쌓았습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성경에서 성문에 올라가 회합을 주도한 이들-왕 혹은 재판장 등 -이 서 있거나 앉아 있었던 자리로 주장합니다. 이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요소는 단상을 둘러싼 각 코너에 시리아에서 당시 유행하던 꽃잎 모양으로 조각된 둥근 기둥 받침입니다. 아마도 단상의 네 귀퉁이의 받침 위에는 각각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단상 위에서 연설을 하는 자의 위에 그늘을 드리우는 지붕을 받치는 구조였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문에 앉아 있었던 자들이란 성문 위가 아니라 성문과 접해 있는 이런 구조물에 앉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늘 본문도 보아스가 거기에 앉아 있다가 더 가까운 친족 ‘아무개’를 만난 후, 적법하게 룻의 고엘(=친족구속자)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있어 믿음만 강조하지 말고 지혜를 다하여야 합니다. “외부 사람들에게는 지혜롭게 대하고, 기회를 선용하십시오.”(골4:5,새번역)

잠언 3:14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흑토, 풍부한 자원, 넓은 영토, 인구도 4천만 명으로 괜찮지만, 세계 최빈국입니다. 러시아와의 분쟁, 친러 성향의 주민과의 내전, 유럽 제 1위의 부패 등을 이유로 꼽으나, “자원의 저주” 라고 생각됩니다. 일찍 왕이 된 솔로몬은 왕권의 불안요인을 지혜롭게 제거합니다(왕상2:46). 3년의 통치 후 재판할 지혜의 부족을 절감한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예루살렘에서 북서쪽 12킬)으로 갑니다. 재판할 지혜에 대한 소원을 품고 일천번제를 드리자, 주님은 현몽하사 ‘내가 무엇을 줄까?” 물으십니다. 마치 유명한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선택하도록 하여 수준을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처럼, 솔로몬은 즉각 그러나 겸손히 ‘듣는 마음’을 요청합니다. 맡겨진 백성들을 공의로 판단할 지혜를 요구하는 솔로몬의 기도는 주님의 마음에 합당하였습니다. 재판할 지혜만 주시면 되시는데 주님은 선한 하나님이시라, 장수를 제외하고 이것저것을 다 주셨습니다. 솔로몬의 명성은 천하에 퍼지고 많은 재물과 권력을 얻지만, 그는 받은 지혜를 모세 율법의 한계 내에 두지 못합니다(신17:14-20). 끝내 권력, 재물, 여자는 솔로몬의 경건한 지혜를 이기고 타락시킵니다. 신자는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자기 일에 즐거워 하며 거기에 적당한 명예, 재물, 권력 등을 넘어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면 고난도 감수할 지혜와 능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고난’이란 단어는 우리를 신중하게 만들고 간절한 기도로 이끌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전3:22a)

매일묵상(2025/7/14-18)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천 매산학교(2)
데살로니가후서 3: 12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명령합니다. 조용히 일하며 자기 양식을 스스로 마련하도록 하십시오.”(쉬운성경)

본문은 갓 세워진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자 중에 재림신앙을 오해하여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바로잡으려는 메시지입니다. 신자는 수고없이 얻은 게으른 양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1921년 재건된 순천 매산학교는 보통과와 고등과로 나뉘어 보통과는 순천지역 교회들이 고등과는 선교부가 각각 책임졌습니다. 남학교(교장 크레인)는 6개월 사이에 학생이 183명으로 늘었고 여학교(교장 비거)도 발전하여 학교 안에 여자성경학원과 유치원도 설립되었습니다. 선교부는 실업 교육을 강조하였는데, 노동을 천시하는 “양반의식”을 교정하고 가난한 학생들이 학비를 스스로 벌게 하는 2중적 효과를 낳았습니다. 1916년 학교가 폐쇄되기 전에 이미 여학교는 ‘단추공장’을 만들어 동양식 수예 꽃단추를 미국에까지 수출하였으며, 재건 후에는 남학교에 철공장을 만들어 그릇과 생활 용품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1929년 9월에는 엉거 교장이 미국에서 ‘친칠라 토끼’를 가져와 학교 안에 ‘양토장’을 만들었고, 이어 뉴질랜드 화이트종, 앙골라종도 들여와 매곡동 언덕엔 대규모 토끼 사육장이 조성되었습니다. 학생들이 사육한 토끼털과 가죽은 미국으로, 고기는 학생들의 영양식이 되었습니다. 선조들은 공부하면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전3:12)는 성경말씀을 실천하였으나, 이것을 막스주의자는 자본가에게,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각 적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의와 사랑이 균형을 이룬 복음의 맥락을 떠나면 잘못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잠언 31장의 현숙한 여인의 행태입니다. “자기의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잠언31:27).

전도서 3:18절 하나님의 시험 (1)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16,17절에서 전도자는 재판과 행정통치의 영역에서조차 불의가 존재함을 탄식하지만, 언젠가는 내려질 선·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확신하지만, 이어 죽음이란 보편적 사실을 다루고 삶의 허무를 피력합니다(18-20). 이런 주제의 전환은 “왜 지금 당장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는 것일까?”라는 문제에 대한 사색 과정의 산물입니다. 그 대답으로 18절은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기 위해서 임을 밝히고, 만약 공의가 상실된다면 약육강식의 동물과 같은 사회로 전락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먼저 전단의 “그들을 시험하시리니”를 살펴보겠습니다. ‘시험하다’란 원어는 ‘빠라르’이며, ‘시험하다, 택하다, 깨끗이 하다, 밝히다’는 다양한 뜻을 가집니다. 만약 ‘밝히다’라는 의미로 보면, 본문은 하나님께서 인생의 모든 면을 드러내어 밝힌다고 해석 되고, ‘택하다’의 경우,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별하는 것으로 번역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시험하다’로 보아,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 경우, 시험의 목적은, 후단에 기술된 것처럼,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 짐승과 유사한 측면이 많은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신약에 이르면, 심판은 영원한 심판으로 확장되고 이 세상에서 이웃에게 뱉은 한 마디의 욕도 지옥불의 심판이 선포됩니다(마5:22). 신자의 삶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사랑에 기반을 둔 행실로 옷입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3:10).

전도서 3:18절 하나님의 시험 (2)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본문 후단은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시는 직접적인 이유를 밝힙니다.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의 원어는 ‘웰리르오트’로서, 단순히 ‘깨닫다’가 아니라 ‘깨닫게 하도록 만든다’란 의미입니다. 이는 사람이 짐승과 별 차이가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문장 끝에는 ‘헴마 라헴’이란 히브리어 표현이 있는데, 개정개역에서는 ‘그들이 자기가’로 앞에 두어 번역하였습니다. 이는 ‘그들 스스로’라는 재귀적 표현으로,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이 이성과 도덕을 가져 짐승과 구별된다고 생각하나, 호흡이 끊어지면 짐승이나 사람이나 모두 죽기에 인간 역시 짐승과 다름이 없습니다.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그러나 ‘절망’해야 하나님과 부활의 주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젊을 시절에는 자신의 실력과 힘에서 절망을 느끼고, 늙어서는 인생 무상을 느낄 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솔로몬 왕이 그 좋은 예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께 돌아와서도 자신이 세운 우상들, 그것도 하나님의 성전 바로 앞 감람산 중턱에 세운 우상들을 제거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우상들은 여호사밧도 히스기야도 처리하지 못했고, 300년 뒤 요시야 왕 때 부수어집니다. 그 만큼 우상 숭배 -영적으로는 탐심, 자녀, 재물, 번영, 쾌락, 권력 등-는 뽑아내기 무척 어렵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데, 그래서 주님은 우리와 다투시는 것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5:21).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스라엘의 최북단 도시
사사기 20: 1절
“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와서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본문은 범죄한 베냐민 지파를 심판하고자 모인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기록으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란 표현이 중요합니다. 사사 시대 이후 이스라엘 경계는 최북단은 ‘단’이란 도시였고, 사람이 살 수 있는 최남단은 ‘브엘세바’였습니다. 따라서, 다윗(삼하24:2), 솔로몬,(왕상4:25), 히스기야 시대에도 전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대하30:5). 구약 시대에 단은 북쪽에 위치한 아람을 대비하는 요새였으며, 현대사에서도 단은 레바논과 이스라엘의 경계 지역으로 1967년 6일 전쟁의 접전 지역이었습니다. 이런 단의 정치적 성격은 고고학 유적지에 잘 드러납니다. 이 ‘단’에서 아브라함의 성문 외에, 다른 성문이 발견되었습니다(BC9-8세기 추정). 이 성문은 진흙벽돌의 아브라함 성문과는 달리 돌로 건축되었는데, 아합의 건축으로 보입니다. 본문 사건 750년 전 하나님은 아브라함 자손의 경계를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창15:18)로 확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시대를 제외하고는 불순종 때문에 도달 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 순종하였으면, “애굽 강 시내부터 유브라데까지” 지금도 다스렸을 것이나, 오히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도 몇 백년 소유하지 못하고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이스라엘 자신의 욕망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선을 위해 창조된 사람들입니다(엡2:10). 따라서 선(하나님의 뜻)을 심고 거두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

잠언 18:12절- 그리스도인의 겸손
“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어느 궁중요리 연구가는 자신이 전수받았던 궁중요리 조리법을 책으로 남기고 제자를 키우게 된 이유는 그것을 널리 보급하겠다는 사명감에서가 아니라, 어느 날 자기가 기억한 대로 조리한 음식 맛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아이굿뉴스, 유선명). 자신의 노력 실력 등은 물론 기억조차 믿을 수없습니다. 그러나, 겸손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태도가 아닙니다. 겸손한 사람은 타인의 의지와 선택, 예측불허의 환경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주권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겸손의 시작과 끝은 ‘주님에 대한 경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는 말씀은 적절합니다. 그러나, 겸손을 통해 얻는 것을 세상의 부와 존귀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도덕경이나 논어의 가르침만도 못합니다. 그래서 기복신앙이 책망 받는 것입니다. 더구나 세상의 존귀를 얻더라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소용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열심히 살았으나 세상적으로 부족함이 있을지라도(전9:11),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담대하며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의지와 열심에 부요합니다. 이것이 자족을 따르는 신자의 겸손입니다. 반면 솔로몬처럼 세상에서 지혜와 부요를 가져도,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자세가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세상에서의 겸손과 달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자세”가 담겨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시5:12).

매일묵상(2025/7/7-11)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천 매산학교(1)
사도행전 16: 37절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본문은 억울하게 매맞고 감옥에 갇힌 바울 일행이 하나님의 기적을 통해 갓 태어난 빌립보 교회가 무시받지 않도록 로마사람이란 신분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순천 매산학교는 교인 자녀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고(1912), 크레인(남학교 담당)과 더피(여학교 담당) 선교사가 부임히여 학교체계를 갖추었습니다(1913). 1915년 총독부가 기독교 사립학교에서 성경 교육을 금지시키자 학교는 자진 폐쇄하였다가, 3.1운동 후 종교교육을 허용하자 학교를 재개하였습니다. 1920년 순천 선교부 재정 후원자였던 미국인 왓츠 장로가 내한, 총독부를 찾아가 학교 재건을 촉구한 것이 큰 힘이 되었는데, 당시 일본은 강대국 미국과 상호협력적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을 겪고 1921년 4월 15일 ‘매산 남학교’, ‘매산 여학교’란 명칭으로 학교를 재개하였으나 선교사들은 오히려 ‘왓츠남학교’와 ‘왓츠여학교’라 불렀습니다. 바락은 사사 드보라의 명을 받고 다볼 산에서,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철병거 9백승을 갖고 기손강에서 대치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보명 1만명을 이끌고 전차부대로 돌진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바락은 순종하여 대승을 거둡니다. 이는 기손강 상류에 내린 폭우로 철병거는 떠내려가거나 진창에 빠져 보병이 절대적으로 유리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연환경과 국제정세 모두를 사용하시므로 복음을 전하거나, 선을 행하는데 믿음과 지혜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할 때는 지혜롭게 행동하십시오. 기회를 최대한 잘 사용하십시오.”(골4:5,쉬운성경).

전도서 3:16절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

3:1-15절에서 전도자는 하나님의 섭리를 논한 뒤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신 복을 누리라고 권고합니다. 이어 16-22절은 죽음과 재판의 문제를 다루고는, 결론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만족하면서 살라고 강조합니다. 본절은 정의가 행해여야 할 재판과 통치의 영역에도 악이 존재함을 탄식합니다. ‘재판하는 곳’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장소요, 악을 벌하는 장소인데도 불구하고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정의를 행하는 곳’은 ‘재판하는 곳’과 같은 의미로도, 혹은 법을 집행하는 행정관리들의 영역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두 해석 모두 타당하나, ‘거기에도’란 표현이 반복됨을 볼 때 후자가 좀 더 자연스럽습니다. 악은 사법이 시행되는 곳에서부터 행정적인 직무를 시행하는 곳까지 편만하게 번져 있음을 보자, 솔로몬은 ‘거기에도’란 표현을 반복 사용하여 이스라엘 왕국에 정의가 서지 못하였음을 크게 개탄합니다. 그 당시도 권력과 뇌물 등으로 불공정한 판결과 행정이 이루어졌는데, 어디 그 시대 뿐입니까? 이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고, 세상은 악한 자의 손아귀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구조 자체가 악한데 의인이 서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의인이 불이익을 당한 사례는 수 없이 많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통해 억울함을 풀어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교훈하십니다. 이 교훈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억울한 일은 주님이 반드시 풀어주십니다. 그것도 ‘속히’!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18:7)

전도서 3:17절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본절에서 솔로몬은 부조리한 인간 법정을 보면서(16),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의인과 악인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는 무고한 자가 벌을 받고 죄인은 방면되는 현실 속에서도 모든 행위에는 하나님의 계획된 때가 있음을 강조하며, 인간의 정의는 제한적이지만 하나님의 정의는 궁극적으로 실현된다는 확신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또한 그 시기와 방식에 대해 인간의 무지를 인정하여 믿음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표출합니다. 그러므로, 본절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를 가지되, 그분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의 자세를 요청합니다. 즉,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흔들릴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신다는 진리를 품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바벨론 제국의 횡포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그렇게 도와 달라고 부르짖었는데, 언제까지 들어 주지 않으시렵니까? “폭력이 일어나고 있다”고 외쳤는데도 어찌하여 구해 주지 않으십니까?… 율법이 효력을 잃고 공의가 시행되지 않습니다.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고 있으므로, 재판이 잘못 진행되고 있습니다.”(하1:2-4). 이때 하나님은 “(바벨론의 심판에 관한)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하2:3)고 답변하셨습니다. 2,500년 전 하박국 선지자가 이 말씀을 간직하고 인내하면서 살았듯이, 신자는 갈등의 시기에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아브라함의 성문
창세기 14:14절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단’의 발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처음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주전 4500년 경입니다. 놀라운발견은 레셈/라이스의 도시 성문입니다(BC1800년경). 성문은 같은 시대 므깃도 등에서도 발견된 전형적인 ‘시리아’ 형식으로, 건축 당시의 7m 높이가 남아 있을 정도로 잘 보존되었습니다. 이 도시 주민들은 도시 전체의 경계선 바닥에 받침돌을 깔고 그 위에 1.7km의 거대한 땅을 덮어 마치 언덕처럼 쌓아 올려 성을 보호하였습니다. 3년 동안 1,000명이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아치 형태로 이루어진 성문은 햇빛에 말려 만든 진흙 벽돌을 쌓아 올려 세워졌으며, 표면은 흰색으로 회칠 했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성문의 사용 연대가 아브라함 시대와 유사해 ‘아브라함 성문’이라고도 불립니다. 본문에 ‘단’이란 이름이 등장하는데, ‘단’은 아브라함의 증손자입니다. 따라서, “단”은 아브람 시대에는 “라이스”였을 가능성이 높고, 아마 후대에 그 당시 독자에게 익숙한 이름으로 바꾸었을 것입니다(참조삿18장). 지명 변화는 독자가 본문을 어느 시점에서 읽고 있는지를 반영합니다. “예루살렘”은 초기에는 “여부스”로 불렸지만, 다윗이 정복한 후 “예루살렘”이 되었고, 이후에는 종말론적 평화의 도시로 해석되곤 합니다. 이같이 지명 변화는 성경을 단순히 읽는 것을 넘어서, 그 시대의 역사·문화·신학적 맥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성경은 살아있는 문서처럼, 시대에 따라 표현이 달라지지만 그 안의 메시지는 변하지 않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잠언22:4절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새번역)

10년 전 라오스 동남부 산악지역에서 낡은 소련군용트럭 도이싼크앙(라오스어로 산골트럭의 의미)을 몰고 생계를 유지하던 운전기사의 이름은 핫( 42살)입니다. 그는 시속 20km 속도로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만물을 배달합니다. 그의 걱정은 새로운 포장도로가 계속 들어서는 것입니다. 도로가 포장되면 좋은 차들이 다니기 때문에 자신의 일감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트럭 배달일을 하면서, 핫은 장사의 의미를 터득한 것 같습니다. TV에서 보여주는 핫은 돈보다는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상즉인(商卽人) – “장사란 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란 상도의 한 대목이 떠오르는데, 조선 후기 거상 임상옥의 명언입니다. 또 “재상평여수(財上平如水) 인중직사형(人中直似衡)”-“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 정직을 추구하는 그의 명언입니다. 사업의 목적은 돈이 아니라, 돈을 통한 좋은 인간관계를 낳는 것입니다. 돈이란 상대방을 섬기면 자연히 들어옵니다. 그것이 좋은 돈이며, 좋은 돈을 버는 것이 사업의 본질입니다. 그 반면, 돈은 마력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을 신뢰하지 않으면, 경제적 편익에 초점을 두기 마련입니다. 주님을 고려하지 않는 그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 생각 없는 경건 그것은 참된 경건이 아닙니다. 경건의 삶에도 반드시 지혜가 필요합니다. 참된 축복의 길, 생명의 길은 무엇일까요? 오늘 잠언 본문이 그 정답을 알려줍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6:20).

매일묵상(2025/6/30-7/4)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린턴 가문의 ‘결핵 선교’
요한복음 12: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결핵 선교사” 휴 린턴은 1984. 4. 10일 농촌 교회 건축자재를 싣고 귀가하다 순천시내에서 음주운전 버스와 충돌하여 의식을 잃었고 택시로 광주기독병원으로 이송 중 숨졌습니다(58). 당시 응급차 제도는 없었습니다. “응급 시설을 갖춘 구급차만 있었더라면…..”  린턴 집안사람들은 응급 시설을 갖춘 구급차를 미국에서 특별 제작하여 들여왔습니다. 마침 린턴의 막내아들 존 린턴(인요한, 1959-)이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3대 선교사”로 내한하여 세브란스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119구급차’ 제도 탄생을 이끌었습니다. 실로 휴 린턴의 죽음은 생명을 살리는 제도적 변화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린턴 가문은 외증조 할아버지 유진 벨의 내한 100주년되는 1995년, ‘유진벨100주년기념재단’을 설립하였고, 현재 재단 이사장은 휴 린턴의 둘째 아들 스테판(인세반, 1950-)입니다. 그는 1979년부터 북한을 도왔는데, 재단 설립 후에는 북한의 결핵퇴치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1950-60년 대 남한에서 맹위를 떨치던 결핵균이 지금 헐벗고 가난한 북쪽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순천초등학교, 대전외국인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와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Ph.D)한 바 있습니다. 린턴 가문은 신앙, 의학, 인도주의, 교육, 남북 화해라는 키워드로 ‘대를 잇는 선교 헌신’의 모범을 한국민들에게 130년 동안 비추었습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눅8:16).    

전도서 3:15절 (1)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본절은 14절과 함께 ‘하나님의 영원성’을 진술하지만, 강조하는 바는 다릅니다. 14절의 초점은 피조 세계의 무상과 허무이고, 본절의 초점은 하나님의 통치 본질과 신적 질서의 불변성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직역하면, “전에 있었던 것 그것이 무엇이냐? 이미 그것은 있으며 장래 있을 것도 이미 있었다”가 됩니다. 전도자는 수사 의문문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섭리의 영원성, 불변성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흐름과도 관계없이 변함이 없으며, 특히 창조 사역과 구속 사역이 잘 드러냅니다. 본절에 나오는 ‘옛적’, ‘이제’, ‘장래’라는 표현은 인간의 시간적 한계를 뜻하지, 하나님을 구속하지는 못합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모두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다같이 현재일 뿐입니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보여주면서,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현재와 미래에도 반복하여 일어남을 전달합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미리 정해진 순환과 반복 속에 있어서, 인간이 경험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이미 존재했던 것의 반복일 뿐입니다. 마치 켜진 등불이 빛을 내어 집안 모든 사람을 비추듯이,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악인이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사는 현실은 악인에게 벌이 신속히 임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때 의인은 하나님의 지혜와 돌보심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편1:6).  

전도서 3:15절 (2)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다시 찾으시느니라’에 해당하는 ‘예박케쉬’는 ‘찾다’ ‘수색하다’의 동사 ‘빠카쉬’의 미완료형으로, ‘계속하여 집요하게 찾는다’는 의미인데, ‘지난 것’ 혹은 ‘박해당하는 자’로 번역될 수 있는 히브리어 단어 ‘라다프’와 결합하여 두 가지 해석을 낳습니다. (1) ‘지나간 것’이란 입장: 하나님은 지난 일들을 반복하심을 뜻한다. (2) ‘박해당하는 자’란 입장: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즉, 하나님께서 박해받는 자를 돌보시고 악인을 벌하심을 의미한다. 이 두 번역이 모두 가능하나, 문맥은 하나님의 공의보다 영원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전자가 타당합니다(개정개역).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그분에게 과거, 현재, 미래란 모두 현재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시간의 제한을 받는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경외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고대 3대 통치자로 알려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엄청난 규모의 바벨론 성을 건설하였습니다. 그 웅장한 모습을 보면서 교만한 말을 내뱉는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심판하는 말씀이 선포되었고, 그는 정신이상이 되어 7년 동안 들짐승과 함께 살게 됩니다. 7년 후 느부갓네살 왕은 정신이 돌아왔고,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경배하노니”(단 4:34–37)라는 고백과 찬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권력에 취했던 느브갓네살은 비로소 자신이 인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세상 만사의 결론을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켜라. 이것이 사람이 해야 할 본분이다.”(전12:13,쉬운성경)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라이스
사사기 18: 29절
“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난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라이스였더라”

레셈 혹은 라이스 지역은 이미 주전 19세기 이집트의 문서에도 나오고, 아브라함도 조카 롯을 구하려고 헤브론에서 이 도시까지 쫓아와서 메소포타미아 연합군을 무찌른 바 있습니다(창14:1-14). 라이스는 풍부하였기에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살았습니다(삿18:7). 그 이유는 먼저, 단 샘에서 나오는 물로 인해 땅이 비옥하였고, 다음으로, 이집트에서 시작하여 이스라엘과 시리아를 지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연결되는 무역로(해변의 길)에 위치하였기 때문입니다. 단 자손의 일부는 가나안 원주민의 텃세에 밀려 살 곳을 찾던 중 이 성을 뻬앗아 거주하고, ‘단’이라 불렀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재기에 성공한 것입니다(수19:47;삿18:29). 전쟁 과정은 사사기 18장에 자세히 나오는데, 문제는 우상숭배입니다. 단 자손은 미리 보낸 정탐꾼이 보아 두었던 미가의 집에 세워진 드라빔과 제사장을 함께 데리고 라이스로 가서 그 신상을 세워 거주하였습니다. 제사장은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 요나단으로(삿18:25),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후손 일부는 몰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이 실로에 있던 시대에, 단 지파는 미가가 만든 새긴 우상을 섬기며 그들 마음대로 행하였습니다. 5백년 후 북왕국 여로보암 왕은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신(=여호와)이라 선포하고 단과 벧엘에 두었으니, 북이스라엘 백성도 계명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살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주의해야 할 우상은 탐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

갈라디아서 6:8절
“자기 육체의 욕망대로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둘 것이며,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쉬운성경)

2025/6/26일 언론은 일제히 “제프 베이조스가 약혼녀 로렌 산체스와 함께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사흘간 초호화 결혼식을 올린다.”고 보도하였습니다. 전 세계 유명 인사 약 200여 명이 하객으로 참석하였고, 결혼비용은 약 5600만달러로 추산됩니다. 베이조스(1964년생)의 재산은 약 2천억달러(273조원)라 합니다. 배우자가 될 여자는 전 폭스 TV 앵커인 로런 산체스(1969)로 에미상을 수상하였으며, 베이조스가 설립한 블루오리진에서 항공촬영 업무 수행하며 가까워졌다고 합니다. 두 사람 다 결혼 경력이 있습니다. 베이조스는 전 부인 매켄지 베이조스 사이에 세 명의 아들과 1명의 양녀(중국소녀)를 두었고, 산체스는 두 전 남편들 사이에서 세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에서 두 사람은 가정은 온전하지 못했지만, 인생은 성공하였다고 자평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즉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열매입니다. 성경적 기준에서 두 사람은 파산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재물을 믿고 제 멋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은 죄 사함의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였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며,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계14:12)입니다. 포도나무가 아름다운 포도를 맺듯이,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를 배우려고 힘쓰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요, 영원한 생명을 넉넉히 거두게 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