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7/14-18)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천 매산학교(2)
데살로니가후서 3: 12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명령합니다. 조용히 일하며 자기 양식을 스스로 마련하도록 하십시오.”(쉬운성경)

본문은 갓 세워진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자 중에 재림신앙을 오해하여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바로잡으려는 메시지입니다. 신자는 수고없이 얻은 게으른 양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1921년 재건된 순천 매산학교는 보통과와 고등과로 나뉘어 보통과는 순천지역 교회들이 고등과는 선교부가 각각 책임졌습니다. 남학교(교장 크레인)는 6개월 사이에 학생이 183명으로 늘었고 여학교(교장 비거)도 발전하여 학교 안에 여자성경학원과 유치원도 설립되었습니다. 선교부는 실업 교육을 강조하였는데, 노동을 천시하는 “양반의식”을 교정하고 가난한 학생들이 학비를 스스로 벌게 하는 2중적 효과를 낳았습니다. 1916년 학교가 폐쇄되기 전에 이미 여학교는 ‘단추공장’을 만들어 동양식 수예 꽃단추를 미국에까지 수출하였으며, 재건 후에는 남학교에 철공장을 만들어 그릇과 생활 용품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1929년 9월에는 엉거 교장이 미국에서 ‘친칠라 토끼’를 가져와 학교 안에 ‘양토장’을 만들었고, 이어 뉴질랜드 화이트종, 앙골라종도 들여와 매곡동 언덕엔 대규모 토끼 사육장이 조성되었습니다. 학생들이 사육한 토끼털과 가죽은 미국으로, 고기는 학생들의 영양식이 되었습니다. 선조들은 공부하면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전3:12)는 성경말씀을 실천하였으나, 이것을 막스주의자는 자본가에게,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각 적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의와 사랑이 균형을 이룬 복음의 맥락을 떠나면 잘못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잠언 31장의 현숙한 여인의 행태입니다. “자기의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잠언31:27).

전도서 3:18절 하나님의 시험 (1)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16,17절에서 전도자는 재판과 행정통치의 영역에서조차 불의가 존재함을 탄식하지만, 언젠가는 내려질 선·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확신하지만, 이어 죽음이란 보편적 사실을 다루고 삶의 허무를 피력합니다(18-20). 이런 주제의 전환은 “왜 지금 당장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는 것일까?”라는 문제에 대한 사색 과정의 산물입니다. 그 대답으로 18절은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기 위해서 임을 밝히고, 만약 공의가 상실된다면 약육강식의 동물과 같은 사회로 전락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먼저 전단의 “그들을 시험하시리니”를 살펴보겠습니다. ‘시험하다’란 원어는 ‘빠라르’이며, ‘시험하다, 택하다, 깨끗이 하다, 밝히다’는 다양한 뜻을 가집니다. 만약 ‘밝히다’라는 의미로 보면, 본문은 하나님께서 인생의 모든 면을 드러내어 밝힌다고 해석 되고, ‘택하다’의 경우,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별하는 것으로 번역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시험하다’로 보아,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 경우, 시험의 목적은, 후단에 기술된 것처럼,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 짐승과 유사한 측면이 많은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신약에 이르면, 심판은 영원한 심판으로 확장되고 이 세상에서 이웃에게 뱉은 한 마디의 욕도 지옥불의 심판이 선포됩니다(마5:22). 신자의 삶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사랑에 기반을 둔 행실로 옷입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3:10).

전도서 3:18절 하나님의 시험 (2)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본문 후단은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시는 직접적인 이유를 밝힙니다.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의 원어는 ‘웰리르오트’로서, 단순히 ‘깨닫다’가 아니라 ‘깨닫게 하도록 만든다’란 의미입니다. 이는 사람이 짐승과 별 차이가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문장 끝에는 ‘헴마 라헴’이란 히브리어 표현이 있는데, 개정개역에서는 ‘그들이 자기가’로 앞에 두어 번역하였습니다. 이는 ‘그들 스스로’라는 재귀적 표현으로,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이 이성과 도덕을 가져 짐승과 구별된다고 생각하나, 호흡이 끊어지면 짐승이나 사람이나 모두 죽기에 인간 역시 짐승과 다름이 없습니다.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그러나 ‘절망’해야 하나님과 부활의 주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젊을 시절에는 자신의 실력과 힘에서 절망을 느끼고, 늙어서는 인생 무상을 느낄 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솔로몬 왕이 그 좋은 예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께 돌아와서도 자신이 세운 우상들, 그것도 하나님의 성전 바로 앞 감람산 중턱에 세운 우상들을 제거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우상들은 여호사밧도 히스기야도 처리하지 못했고, 300년 뒤 요시야 왕 때 부수어집니다. 그 만큼 우상 숭배 -영적으로는 탐심, 자녀, 재물, 번영, 쾌락, 권력 등-는 뽑아내기 무척 어렵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데, 그래서 주님은 우리와 다투시는 것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5:21).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스라엘의 최북단 도시
사사기 20: 1절
“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와서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본문은 범죄한 베냐민 지파를 심판하고자 모인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기록으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란 표현이 중요합니다. 사사 시대 이후 이스라엘 경계는 최북단은 ‘단’이란 도시였고, 사람이 살 수 있는 최남단은 ‘브엘세바’였습니다. 따라서, 다윗(삼하24:2), 솔로몬,(왕상4:25), 히스기야 시대에도 전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대하30:5). 구약 시대에 단은 북쪽에 위치한 아람을 대비하는 요새였으며, 현대사에서도 단은 레바논과 이스라엘의 경계 지역으로 1967년 6일 전쟁의 접전 지역이었습니다. 이런 단의 정치적 성격은 고고학 유적지에 잘 드러납니다. 이 ‘단’에서 아브라함의 성문 외에, 다른 성문이 발견되었습니다(BC9-8세기 추정). 이 성문은 진흙벽돌의 아브라함 성문과는 달리 돌로 건축되었는데, 아합의 건축으로 보입니다. 본문 사건 750년 전 하나님은 아브라함 자손의 경계를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창15:18)로 확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시대를 제외하고는 불순종 때문에 도달 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 순종하였으면, “애굽 강 시내부터 유브라데까지” 지금도 다스렸을 것이나, 오히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도 몇 백년 소유하지 못하고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이스라엘 자신의 욕망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선을 위해 창조된 사람들입니다(엡2:10). 따라서 선(하나님의 뜻)을 심고 거두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

잠언 18:12절- 그리스도인의 겸손
“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어느 궁중요리 연구가는 자신이 전수받았던 궁중요리 조리법을 책으로 남기고 제자를 키우게 된 이유는 그것을 널리 보급하겠다는 사명감에서가 아니라, 어느 날 자기가 기억한 대로 조리한 음식 맛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아이굿뉴스, 유선명). 자신의 노력 실력 등은 물론 기억조차 믿을 수없습니다. 그러나, 겸손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태도가 아닙니다. 겸손한 사람은 타인의 의지와 선택, 예측불허의 환경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주권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겸손의 시작과 끝은 ‘주님에 대한 경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는 말씀은 적절합니다. 그러나, 겸손을 통해 얻는 것을 세상의 부와 존귀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도덕경이나 논어의 가르침만도 못합니다. 그래서 기복신앙이 책망 받는 것입니다. 더구나 세상의 존귀를 얻더라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소용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열심히 살았으나 세상적으로 부족함이 있을지라도(전9:11),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담대하며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의지와 열심에 부요합니다. 이것이 자족을 따르는 신자의 겸손입니다. 반면 솔로몬처럼 세상에서 지혜와 부요를 가져도,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자세가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세상에서의 겸손과 달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자세”가 담겨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시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