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천 매산학교(1)
사도행전 16: 37절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본문은 억울하게 매맞고 감옥에 갇힌 바울 일행이 하나님의 기적을 통해 갓 태어난 빌립보 교회가 무시받지 않도록 로마사람이란 신분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순천 매산학교는 교인 자녀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고(1912), 크레인(남학교 담당)과 더피(여학교 담당) 선교사가 부임히여 학교체계를 갖추었습니다(1913). 1915년 총독부가 기독교 사립학교에서 성경 교육을 금지시키자 학교는 자진 폐쇄하였다가, 3.1운동 후 종교교육을 허용하자 학교를 재개하였습니다. 1920년 순천 선교부 재정 후원자였던 미국인 왓츠 장로가 내한, 총독부를 찾아가 학교 재건을 촉구한 것이 큰 힘이 되었는데, 당시 일본은 강대국 미국과 상호협력적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을 겪고 1921년 4월 15일 ‘매산 남학교’, ‘매산 여학교’란 명칭으로 학교를 재개하였으나 선교사들은 오히려 ‘왓츠남학교’와 ‘왓츠여학교’라 불렀습니다. 바락은 사사 드보라의 명을 받고 다볼 산에서,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철병거 9백승을 갖고 기손강에서 대치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보명 1만명을 이끌고 전차부대로 돌진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바락은 순종하여 대승을 거둡니다. 이는 기손강 상류에 내린 폭우로 철병거는 떠내려가거나 진창에 빠져 보병이 절대적으로 유리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연환경과 국제정세 모두를 사용하시므로 복음을 전하거나, 선을 행하는데 믿음과 지혜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할 때는 지혜롭게 행동하십시오. 기회를 최대한 잘 사용하십시오.”(골4:5,쉬운성경).
전도서 3:16절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
3:1-15절에서 전도자는 하나님의 섭리를 논한 뒤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신 복을 누리라고 권고합니다. 이어 16-22절은 죽음과 재판의 문제를 다루고는, 결론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만족하면서 살라고 강조합니다. 본절은 정의가 행해여야 할 재판과 통치의 영역에도 악이 존재함을 탄식합니다. ‘재판하는 곳’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장소요, 악을 벌하는 장소인데도 불구하고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정의를 행하는 곳’은 ‘재판하는 곳’과 같은 의미로도, 혹은 법을 집행하는 행정관리들의 영역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두 해석 모두 타당하나, ‘거기에도’란 표현이 반복됨을 볼 때 후자가 좀 더 자연스럽습니다. 악은 사법이 시행되는 곳에서부터 행정적인 직무를 시행하는 곳까지 편만하게 번져 있음을 보자, 솔로몬은 ‘거기에도’란 표현을 반복 사용하여 이스라엘 왕국에 정의가 서지 못하였음을 크게 개탄합니다. 그 당시도 권력과 뇌물 등으로 불공정한 판결과 행정이 이루어졌는데, 어디 그 시대 뿐입니까? 이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고, 세상은 악한 자의 손아귀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구조 자체가 악한데 의인이 서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의인이 불이익을 당한 사례는 수 없이 많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통해 억울함을 풀어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교훈하십니다. 이 교훈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억울한 일은 주님이 반드시 풀어주십니다. 그것도 ‘속히’!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18:7)
전도서 3:17절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본절에서 솔로몬은 부조리한 인간 법정을 보면서(16),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의인과 악인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는 무고한 자가 벌을 받고 죄인은 방면되는 현실 속에서도 모든 행위에는 하나님의 계획된 때가 있음을 강조하며, 인간의 정의는 제한적이지만 하나님의 정의는 궁극적으로 실현된다는 확신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또한 그 시기와 방식에 대해 인간의 무지를 인정하여 믿음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표출합니다. 그러므로, 본절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를 가지되, 그분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의 자세를 요청합니다. 즉,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흔들릴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신다는 진리를 품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바벨론 제국의 횡포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그렇게 도와 달라고 부르짖었는데, 언제까지 들어 주지 않으시렵니까? “폭력이 일어나고 있다”고 외쳤는데도 어찌하여 구해 주지 않으십니까?… 율법이 효력을 잃고 공의가 시행되지 않습니다.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고 있으므로, 재판이 잘못 진행되고 있습니다.”(하1:2-4). 이때 하나님은 “(바벨론의 심판에 관한)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하2:3)고 답변하셨습니다. 2,500년 전 하박국 선지자가 이 말씀을 간직하고 인내하면서 살았듯이, 신자는 갈등의 시기에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아브라함의 성문
창세기 14:14절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단’의 발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처음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주전 4500년 경입니다. 놀라운발견은 레셈/라이스의 도시 성문입니다(BC1800년경). 성문은 같은 시대 므깃도 등에서도 발견된 전형적인 ‘시리아’ 형식으로, 건축 당시의 7m 높이가 남아 있을 정도로 잘 보존되었습니다. 이 도시 주민들은 도시 전체의 경계선 바닥에 받침돌을 깔고 그 위에 1.7km의 거대한 땅을 덮어 마치 언덕처럼 쌓아 올려 성을 보호하였습니다. 3년 동안 1,000명이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아치 형태로 이루어진 성문은 햇빛에 말려 만든 진흙 벽돌을 쌓아 올려 세워졌으며, 표면은 흰색으로 회칠 했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성문의 사용 연대가 아브라함 시대와 유사해 ‘아브라함 성문’이라고도 불립니다. 본문에 ‘단’이란 이름이 등장하는데, ‘단’은 아브라함의 증손자입니다. 따라서, “단”은 아브람 시대에는 “라이스”였을 가능성이 높고, 아마 후대에 그 당시 독자에게 익숙한 이름으로 바꾸었을 것입니다(참조삿18장). 지명 변화는 독자가 본문을 어느 시점에서 읽고 있는지를 반영합니다. “예루살렘”은 초기에는 “여부스”로 불렸지만, 다윗이 정복한 후 “예루살렘”이 되었고, 이후에는 종말론적 평화의 도시로 해석되곤 합니다. 이같이 지명 변화는 성경을 단순히 읽는 것을 넘어서, 그 시대의 역사·문화·신학적 맥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성경은 살아있는 문서처럼, 시대에 따라 표현이 달라지지만 그 안의 메시지는 변하지 않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잠언22:4절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새번역)
10년 전 라오스 동남부 산악지역에서 낡은 소련군용트럭 도이싼크앙(라오스어로 산골트럭의 의미)을 몰고 생계를 유지하던 운전기사의 이름은 핫( 42살)입니다. 그는 시속 20km 속도로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만물을 배달합니다. 그의 걱정은 새로운 포장도로가 계속 들어서는 것입니다. 도로가 포장되면 좋은 차들이 다니기 때문에 자신의 일감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트럭 배달일을 하면서, 핫은 장사의 의미를 터득한 것 같습니다. TV에서 보여주는 핫은 돈보다는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상즉인(商卽人) – “장사란 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란 상도의 한 대목이 떠오르는데, 조선 후기 거상 임상옥의 명언입니다. 또 “재상평여수(財上平如水) 인중직사형(人中直似衡)”-“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 정직을 추구하는 그의 명언입니다. 사업의 목적은 돈이 아니라, 돈을 통한 좋은 인간관계를 낳는 것입니다. 돈이란 상대방을 섬기면 자연히 들어옵니다. 그것이 좋은 돈이며, 좋은 돈을 버는 것이 사업의 본질입니다. 그 반면, 돈은 마력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을 신뢰하지 않으면, 경제적 편익에 초점을 두기 마련입니다. 주님을 고려하지 않는 그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 생각 없는 경건 그것은 참된 경건이 아닙니다. 경건의 삶에도 반드시 지혜가 필요합니다. 참된 축복의 길, 생명의 길은 무엇일까요? 오늘 잠언 본문이 그 정답을 알려줍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