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6/9/21-23)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7)
갈라디아서 4:13절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건강 문제로 갈라디아에 머무를 때 세워졌는데, 섭리 중에 세워진 교회도 많습니다. 처음에 ‘팟정이교회’로 불리던 금산교회는 1892년 내한한 선교사 테이트(1862-1929)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데이트는 1901년 이후 익산 등 전주 서남부 지역 선교를 맡아 나귀를 타고 순회하였는데, 1904년 어간에 금산 팟정이 마을에서 이자익과 조덕삼을 만났습니다. 테이트는 교회법 이론에 밝아, 1907년 독로회 창설 때 한국 장로교회의 법과 체계의 기틀을 마련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성실하고 암기력이 뛰어난 이자익(1882-1958)에게 기대를 걸었습니다. 이자익이 훗날 ‘법통’ 총회장이 된 것도 테이트의 영향 때문이었고, 이자익은 테이트의 ‘믿음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디모데’로 불렸습니다. 이자익은 ‘옛 주인’ 조덕삼과 함께 테이트가 전하는 ‘구세주’(救世主)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를 시작했는데, 그 당시는 ‘제세주’(濟世主)를 자칭한 강일순이 ‘후천개벽’을 선포하며 추종자들을 모악산 자락으로 불러 모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와 증산교가 같은 시기에 “세상을 구원한다.”는 같은 메시지를 전하며 금산에 들어온 셈입니다. 두 종교의 경쟁은 불가피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복음을 전도받은 사마리아 여인이 생각납니다. 그 여인이 혼란 속에서 참된 구원을 만났듯, 금산의 종교적 혼란 속에서도 조덕삼과 이자익은 참된 구세주 예수를 만났습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요4:42).

전도서 9:16절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나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앞절에서 전도자는 한 가난한 지혜자가 성을 구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가진 것도 없고 사회적 힘도 없었지만, 그의 지혜는 성을 살릴 만큼 강력했습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분명히 말합니다. “지혜가 힘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곧 역설이 나타납니다. 그렇게 성을 구한 사람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지혜는 당장의 위기에서는 힘보다 뛰어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지혜마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이것이 전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그 지혜의 한계입니다. 다윗의 삶도 비슷하였습니다. 그는 골리앗 앞에서 군대의 힘이나 갑옷이 아니라 믿음과 지혜, 그리고 용맹으로 이겼습니다. 이에 공로를 인정하여 상을 주려던 사울은 돌연 변하여 다윗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사람의 기억과 평가는 쉽게 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인정이나 사람들의 기억을 삶의 보상으로 삼는다면 허무를 경험하게 됩니다. 지혜롭게 살았는데도 잊힐 수 있고, 충성했는데도 인정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사람에게 잊힌 지혜자의 말과 달리 하나님의 지혜인 복음과 그 삶은 영원합니다(벧전 1:25; 요일2:17). 인간의 기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지혜는 한 시대를 살릴 수 있어도 결국 잊힙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주님의 복음은 시대를 넘어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름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억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를 믿어 죄사함 받고 복음에 근거한 의를 생산하는 현실적 이유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40:8).

전도서 9:17절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세상에서는 큰 소리, 강한 목소리와 화려한 말, 많은 사람을 거느린 자의 외침이 힘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지혜자의 말은 조용하지만 우매한 자들의 지도자의 고함보다 낫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뚜렷한 대조가 있습니다. 한쪽에는 조용한 지혜자의 말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어리석은 자들을 이끄는 지도자의 외침이 있지만, 후자가 큰 영향력을 가지고 큰 소리로 외쳐도 지혜자의 조용한 말 한마디보다 못합니다. 진리는 목소리의 크기로 증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말은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그 내용 자체로 사람을 설득하고 생명을 살립니다. 좋은 예가 갈멜 산의 대결입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큰 소리로 부르짖고 자신들의 몸을 상하게 하며 외쳤습니다. 그러나 저녁까지 아무 응답도 없었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고 간절히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드러냈습니다. 많은 외침은 무의미했으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한 사람의 진실한 말은 열납되었고 백성의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우리도 큰 소리에 쉽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말하고, 강한 사람이 주장하며, 세상의 여론이 한 방향으로 흐를 때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무엇이 더 크게 들리는가보다 무엇이 참된 말씀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기적으로 치유하셨으나, 바리새인들의 질시를 당하자 조용히 떠나셨습니다.이에 마태는 이사야의 성취를 증언하는데(사42:1-3), 온유와 겸손한 삶의 모범이 되십니다.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마12:19).

매일묵상(2026/8/31-9/4)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4)
히브리서 11: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이덕주 교수는 물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금산으로 왔을까요? 경상도 남애 섬에서 이곳 전라도 산골까지 들어오게 된 어린 이자익의 동기가 궁금했습니다. 셋째 아들 이성환 집사의 설명입니다. “나가 금산면장을 혀서 아는디, 여그 금산이 본시 전국 팔도 오색 잡놈덜이 몰려드는 곳이 아닌가벼? 징게 맹갱 외야들에서 농사짓넌 집이 많응께 머슴살이라도 할려고 오는 사람덜이 많았고, 여그서 금이 난다고 혀서 금 캐러 오는 사람덜도 많았제. 그 뿐인가? 구한말부터 모악산 자락에 잡술 하는 사람덜이 전국 각지서 몰려 들었제. 하먼, 금산에 본토배기는 삼분지 일도 안 되야.” 한반도 제일의 곡창이라는 “징게, 맹갱”(金堤, 萬頃) 평야가 있어 살기에 넉넉했고, 사금이 나와 일확천금을 노리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것입니다. 빈손으로 들어왔더라도 자기하기에 따라 부를 일굴 수 있는 곳이 금산이었습니다. 어린 이자익은 생존을 위해 금산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현실의 길 위에서 하나님은 그를 만나 주셨고, 머슴살이의 자리에서 목회자의 길로 부르셨습니다. 신앙의 부르심은 언제나 우리가 서 있는 현실에서 시작됩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나안으로 나아갔지만, 그의 시선은 눈앞의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더 큰 도성을 향해 있었습니다(히11:10). 750년 뒤 그의 후손은 여호수아의 지도 하에 가나안 땅을 차지합니다. 믿음은 현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걸으며 그분이 이루실 것을 믿고 살아가는 힘입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11:10).

전도서 9: 10절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본절은 전도자의 가장 강한 권면입니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하라.” 전도자는 삶의 허무를 말하지만, 그 허무 속에서도 주어진 기회를 붙잡으라고 명령합니다. 죽음은 모든 가능성을 끝내며,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습니다. 해 아래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지금뿐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미루지 말고, 주어진 기회를 즉시 붙잡으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단순한 근면의 권면이 아니라, 기회가 있을 때 행동하라는 신앙적 현실주의입니다. 신약에서 더 깊게 확장됩니다. 예수님은 “때가 아직 낮이니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요9:4). 밤이 오면 아무도 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주어진 시간과 기회를 붙잡고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삶은 “지금 해야 할 일을 지금 하는 삶”이었습니다. 바울도 “세월을 아끼라”고 말합니다. 이는 시간이 짧기 때문이 아니라, 기회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과 행할 일을 주셨습니다. 전도자는 죽음의 종결성을 강조하며 지금 행동하라 말하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심판과 연결하십니다.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고 돌아온 주인은 그들의 행한 일을 심판합니다. 달란트를 묻어둔 종은 기회를 사용하지 않은 죄로 영원한 벌을 받습니다. 기회는 현재에만 주어집니다. 종말이 오면 더 이상 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행위는 심판 때 밝히 드러나며, 지금의 충성은 영원한 기쁨으로 이어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깨어 있으라. 너희가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 25:13).

전도서 9: 11절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인간의 능력, 지혜, 경험이 삶의 결과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삶이 ‘때’와 ‘우연’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학자 롱맨은 이 절을 “전도자의 현실주의가 가장 날카롭게 드러나는 구절”이라 말합니다. 본절은 능력이 결과를 결정한다고 믿는 인간의 기대를 무너뜨립니다. 빠른 자가 항상 이기지 않고, 강한 자가 항상 승리하지 않으며, 지혜로운 자가 항상 성공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운명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능력을 갖추었다 하여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지혜는 확실히 우매보다 우월합니다. 그러나 그 지혜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며,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더 나아가 인생은 능력과 노력보다 더 큰 힘—때와 우연—에 의해 흔들립니다. 이것이 전도자가 말하는 허무의 본질입니다. 인간의 능력은 결과를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회를 구하며 겸손히 살아가야 합니다. “때와 우연”에 대한 본절의 가르침은, 신약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로 더 깊게 해석됩니다. 능력, 속도,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때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진리가 선포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과 구원조차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에 달려 있음을 고백합니다(롬9:11). 신자는 믿음 가운데 늘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롬9:11).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가이사랴(4)
사도행전 8: 40절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가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전도자 빌립은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뒤 아소도와 여러 성을 거쳐 가이사랴에 정착하였고 딸 넷을 두었습니다(행 21:8–9). 가이사랴의 항구 세바스토스는 헤롯대왕이 주전 30년경 지중해 연안에 건설한 거대한 인공 항구입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해양 건축 기술이 적용되었고, 요세푸스는 이 항구가 아테네의 피라에우스 항구에 견줄 만큼 크고 아름다웠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주후 1~2세기 거대한 쓰나미로 심각한 손상을 입었으며, 고고학 조사에 따르면 헤롯이 사용한 콘크리트는 로마 본토의 것보다 약해 구조적 결함도 있었습니다. 결국 항구는 비잔틴 시대 이후 더 이상 사용되지 못하고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오늘날 가이사랴는 이스라엘 유물청과 해양고고학자들의 지속적인 연구로 많은 부분이 발굴되었지만, 항구 전체를 완전히 복원하기에는 여전히 많은 부분이 소실된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가이사랴는 로마 시대의 웅장함과 신약 시대 복음의 역사가 함께 숨 쉬는 중요한 유적지로 남아 있습니다. 이 같이 항구 세바스토스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과 권력으로 세워졌지만 자연의 힘 앞에서 무너져 바다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에서 하나님은 베드로와 고넬료를 만나게 하시고 이방 선교의 문을 여셨습니다. 인간의 건축은 사라졌지만 하나님의 구속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항구 뿐 아니라, 인간의 기술과 권력으로 지어진 모든 것이 ‘모래 위의 집’과 같은 운명입니다. 그 반면, 복음의 역사는 ‘반석 위의 집’처럼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모든 것이 가능한 하나님.
마태복음 19:26절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부자 청년은 영생을 얻고자 달려왔습니다. 그는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하며, 무엇이 더 필요한지 물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사랑하사 한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 재물이 많은 청년은 심히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그를 본 주님은 제자들에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심히 어려운데,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놀란 제자들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고 대답하셨습니다.청년의 문제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재물은 세상에서 유용하나 하나님의 나라의 입구를 막는 큰 장애물입니다. 더 나아가 재물은 인간의 마음을 왜곡시키고 죄를 부추깁니다. ‘파우스트’(괴테)의 한 대목입니다: “우리가 금을 파놓으면 도둑질, 오입질이 생겨나고, 오만한 자에게 무기를 주어 대량학살을 꿈꾸게 하지요 세 가지 계율을 여기는 놈 다른 계율 역시 지키지 않는 법 이 모든 게 우리의 잘못은 아니죠” 그러나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부자 청년과 대조되는 분이 선지자 엘리사입니다. 그는 24마리의 소를 부릴 만큼 유복하였지만, 엘리야의 부름을 받자 다 버리고 엘리야를 따랐습니다. 그는 엘리야의 승천을 목격했고, 요단 강을 가르고 마른 땅으로 건넜습니다. 또한, 엘리야의 갑절의 영감을 받아서 불신앙의 북 이스라엘 왕국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입증하였습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