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10/27-31)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애양원 가나안 복지되다!
마태복음25:40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애양원은 남자부와 여자부 마을을 조성하여 각기 모여 살게 하였으나, 젊은 환자들 간에는 ‘풍속 관련’ 범죄가 종종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남녀 환자들의 ‘결혼 사업’이 추진되었습니다. 단종 수술을 받은 후, 남녀환자를 짝짓고 어린 아이 한 명을 붙여, 교회에서 합동결혼식을 올린 후 가정촌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이 사업은 점점 확대되어 1976년 선교부는 선교부 땅 14만평을 위에 정착촌을 건설합니다. 은성동, 다윗촌, 도성촌과 인사동 마을이 그것으로 불모의 땅이 가나안 복지로 탈바꿈했다 하겠습니다. 70년 넘게 여자부 돌집에 살고 있는 김수남 권사의 증언입니다(1999년). “우월손 원장님은 공주서 농촌사업 허는 사람 데려다 우리헌티 농사 짓넌 벱과 퇴끼, 도야지 기를 벱을 가르쳐 주시고…전구 다마를 가져와서는 양말 기워 신으라 허시고… 한 번은 감나무 묘목을 싣고 와서 나눠 심었는디 이 근방 단감나무는 모다 그때 심은 게요. 그런께 황무지 같던 이곳이 가나안 복지가 되었지.” 성서적 관점에서 볼 때,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결혼 사업, 정착촌 조성, 농업 교육 등은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흔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6:10)는 말씀을 오해하여 더 나은 삶과 소득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특단의 사정이 없다면 사회통상의 소득은 확보되어야 사랑의 계명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롬13:8). 이 계명을 실천하는데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기도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고”(마6:10,쉬운성경).

전도서 5:6절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본절은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경히 여겨 실수라고 변명하며 이행하지 않으려는 사람에 대한 경고입니다(수사의문문). ‘사자’란 천사, 제사장, 하나님, 혹은 서원을 듣고 기록하는 직책의 사람 등 여러 해석이 있으나, ‘제사장’이란 해석이 타당합니다(말2:7). ‘네 목소리’는 서원을 실수라고 변명하는 말을 뜻하며, ‘너의 핑계(변명)’로 의역됩니다.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신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에 대한 생생한 묘사입니다. 즉, 재난, 실패, 질병 따위로 그 사람이 성취한 사업, 재물, 성공이나 어떤 업적을 물거품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또한, 자원하여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기로 작정한 것을 드리지 않을 때 하나님은 합당한 징벌의 범위에서 그 사람의 것을 가져가신다는 의미도 가능합니다. 토마스로드 침례교회의 한 신자가 제리 파월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그동안 하나님께 작정한 헌금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모두 소급하여 드려야 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모저모로 당신의 작정한 부분을 다 거두어 가셨으니, 다음부터 내시면 됩니다.” 법관이 사건을 맡았으면 공의롭게 판결을 내려 갈등을 해소하든지 범죄에 합당한 벌을 선언합니다. 하물며,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얼마나 공의로우시겠습니까? 마땅히 두려워하여 서원을 했으면 갚는 것이 당사자에게 어떤 면으로든 유익합니다. 사정이 있는 경우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다짐과 함께 이행바랍니다.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이 있지만, 정말 귀한 보배는 지각 있게 말하는 입이다.”(잠언20:15,새번역)

전도서 5:7절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부활의 주님을 모르는 전도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을 허무 극복의 유일한 방법으로 전제하며, 단락 5:1-7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실례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제사(or 예배와 기도)이고, 또 하나는 서원과 그 이행입니다. 제사는 계명에 대한 순종이 수반되야 하고, 서원은 신중하게 따져서 약속하되 반드시 이행하라는 경고입니다. 다만, 이것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경건한 삶)의 한 부분이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이 단락은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란 서론적 명령으로 시작해서,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는 결론적 명령으로 끝맺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아는 신자들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와 그분이 주신 영원한 생명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가 넘치고, 이 감사가 ‘서로 사랑하라’는 그분의 명령을 우리 마음에 새기게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태도가 삶의 근간이며, ‘서로 사랑하라’는 이웃 사랑의 사명을 이루는데 골몰합니다. 세상을 짓누르는 인생의 허무, 절망, 회의 따위는 결코 우리 마음에 머무를 틈이 없습니다. 실로, 구속받은 신자의 삶 속에는 이사야 35: 10절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으므로, 만약 삶의 문제가 닥치면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기도하십시오!(빌4:6,7)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35:1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벳새다
요한복음 1:44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1839년 성서학자 로빈슨은 요단강 동편, 갈릴리 호수 북쪽에서 2㎞ 떨어진 엣-텔(et-Tell)을 벳새다로 추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유적지가 호수변에서는 너무 멀고, ‘어부의 집’이란 벳새다의 이름에 비추어, 분명 어업이 성행했을 것이서 보다 해변가에 위치한 현재 엘-아라즈(el-Araz)를 벳새다라는 주장이 많았습니다. 최근 갈릴리 해수면은 과거에 보다 높았고 고대 지진으로 인해 해수면의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과 라미 아라브(Rami Arav)의 발굴을 통해 엣-텔 지역이 벳새다로 입증되었습니다. 엣-텔에서는 주후 1세기경 어업을 생업으로 한 도시와 여러 채의 가옥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어부의 집이라고 불릴 만큼 낚싯바늘이라든가, 납으로 만든 그물 추, 돌로 만든 닻 같은 물고기 잡이와 관련된 여러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심지어 선두가 말 머리 모양을 한 베니게 어선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새겨진 인장도 발견된 바 있습니다. 또 다른 유명한 집은 포도주 제작자의 집으로 헬라시대의 포도주 항아리 4통과 값비싼 수입산 도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벳새다에서 맹인을 고치셨으며(막 8:22),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셨지만(눅 9:10-17), 벳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마 11:21). 표적(이적)이 반드시 믿음을 만들지는 못하나, 성경의 성취로서의 그리스도의 표적(이적)은 믿음을 뒷받침합니다. 또한 모든 표적(이적)의 절정은 예수님의 부활이며, 영생에 대한 우리 믿음의 실체적 근거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14:11,새번역).

그리스도인의 정체성(1)
에베소서4:6절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오인태의 시: 「달력을 걸며」 – “또, 깎아 곶감 한 줄 달다”

오 시인에게 영향을 준 분은 부모님입니다: “어머니는 밥상에 차려내는 음식으로, 아버지는 그 밥상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를 몸소 보여줌으로써 자식들을 가르치셨다. 아버지는 한번도 밥상 앞에서 반찬투정을 하거나 어머니를 핀잔하지 않으셨고, 훈계조로 자식들을 나무라거나 우격다짐으로 강요하지 않았으며, 식구 누구도 꼭 찍어 타박하거나 차별하지 않으셨다.” 오인태의 인생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삶’이라,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불필요하지요! 따라서, 시인 오인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은 없습니다. 한편, 오인태 시인은 “당신은 누구입니까?” 할 때 그 시작은 부모입니다. 그 위는 조부모이지만 얼굴도 보지 못하였다고 하니, 오직 부모의 전승을 듣고 사진을 보면서 믿을 뿐입니다. 5대조 이상은 족보의 기록만 믿고 있을 것이나, 족보는 틀려도 그의 삶에 큰 영향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성경의 증언과 천지만물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죄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입니다. 하나님 없는오인태 시인은 반성과 후회만이 있지 죄사함과 영생은 없으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참된 회개와 용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따라서, “죄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란 표지는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정체성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매일묵상(2025/10/20-24)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소록도와 애양원의 차이
누가복음 10:36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조선 총독부가 운영하던 소록도 나병원(1916년 창립)처럼, 애양원도 철조망과 감시 초소를 세우는 등 삼엄한 경비와 통제가 있었으나 오래지 않아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배병심 장로의 증언입니다. “소록도에서는 환자들이 죽어도 나가야겠다며 탈출하다가 죽은 사람이 허다했는디 애양원에서는 반대로 죽어도 안나겠다고 버쳤다는 것 아니요? 소록도에서는 당국의 비인도적인 처사에 환자들이 항의하여 폭력 시위를 종종 벌였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어요. 애양원에서 제일 큰 벌은 퇴소명령이라. 환자들은 이곳에서 쫓겨날까 봐 겁을 냈다잖여?” 이처럼 애양원이 ‘나환자천국’이 된 데는 이곳 의사와 직원들이 보여준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사랑’이 큰 몫을 차지하지만, 선교사들이 취한 자립과 자활 정책도 중요했는데, 선교부는 치료를 넘어 자립 생활인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애양원은 치료가 끝난 환자 중에서 의사와 간호사 직원을 뽑아 진료와 행정 사무를 맡겼습니다. 이런 조치는 나환자들의 자존감과 사회적 회복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수십 만평의 땅을 준비하여 거동이 가능한 환자들은 직접 농사에 참여, 일한 만큼 소득을 얻게 하였고 소득도 높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많은 나병환자들을 치유하셨으나, 자립은 각자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승천 후 교회는 고아와 과부 등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았고, 2천년의 유산을 이어받은 광주선교부는 애양원을 세워 나환자들의 치료는 물론, 자립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영적인 삶은 현실과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37).  

전도서 5:4절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인생의 허무는 주님을 경외하면서 그분과 동행하면 극복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경건한 삶으로 첫째 예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제사)와 기도입니다(1-3). 둘째 예는 서원이며 전도자는 교훈 3개를 말합니다(4-6). ‘서원’이란 히브리어 ‘나다르’의 번역으로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어떤 것을 약속한다’는 뜻입니다. 한나의 서원(삼상1:11)이 좋은 예입니다. ‘맹세’는 ‘샤바’의 번역이며 ‘하나님 혹은 사람 앞에서 진실을 담보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언약(창21:31)이 그렇습니다. 본절은 ‘서원하였으면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서원을 한 뒤 속히 이행하지 않으면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우롱하는 처사입니다. 전도자는 그를 ‘우매한 자’로 정의하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고 희생제사를 드리는 자와 같이 취급합니다(5:1). 모범 사례는 한나입니다. 브닌나의 멸시를 받은 한나는 자녀를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눈물어린 서원을 하였고, 사무엘을 주시자 그 약속을 지켜 성막봉사를 위해 드렸습니다. 성막봉사는 레위인만 가능합니다만, 사무엘은 그핫 자손으로 레위인입니다. 따라서, 한나의 서원은 신중했고, 그 이행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한나의 경우처럼 살다보면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때 서원이 필요하고, 그 자체가 경건한 삶의 하나입니다. 시편 116: 18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공동체 앞에서 서원을 지키는 신실함을 선포하는데 좋은 본보기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시편116:18).

전도서 5:5절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

민수기는 하나님께 서원하면 반드시 갚으라고 규정합니다(민30:2). 이에 따라 전도자는 서원은, “갚기를 더디말라”(4절)고 한 뒤, “서원하고 갚지 않는다면, 아예 서원하지 말라”(5절)고 교훈합니다. 기도할 때 어려운 처지에 있거나,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본 뒤, 혹은 감정에 북받쳐 즉흥적으로 서원을 하고는 이행이 없다면 죄를 얻게 됩니다. 1980년 여의도에서 열린 민족대복음화대성회 시, 은혜에 감격하여 많은 사람들이 선교의 서원을 하였지만, 그 서원을 이행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 신실한 일본인 신자가 있습니다. 임상병리학자 기무라 선생은 고등학생 시절 방치된 네팔 한센환자의 참담한 사진을 보자, 그 자리에서 의사가 되어 이들을 돌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후 30년이 흐르면서 그는 임상병리학의 석학이 되었으나 어린 시절 약속은 분주함 속에 묻혀졌습니다. 어느 날 ‘해부병리학자를 구한다’는 간곡한 호소의 편지가 네팔에서 전 세계로 발송되었고 일본에도 도착하여, 부인이 받았습니다. 퇴근하는 남편에게 그 소식지를 전하면서 “이제 하나님께 한 약속을 지켜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부인 수니타 여사는 말하였습니다. 기무라 선생은 이미 대학으로부터 종신교수 청빙을 받아 놓았으나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집 한 칸 없었지만, 사재를 털어 병리학 연구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하였습니다. 기무라 선생은 7년 동안 네팔에서 제자를 양성하는 등 많은 임상병리학 공헌을 한 뒤  귀국하였습니다. 그가 잃어버린 것은 ‘종신교수직’이고 얻은 것은 ‘주님의 인정’입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언22:1).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찌포리(2)
전도서 1:11절
“지나간 세대는 잊혀지고, 앞으로 올 세대도 그 다음 세대가 기억해 주지 않을 것이다.”(새번역)

나사렛 인근의 유적지 찌포리는 로마에 협력하여(AD66) 번성하였으나, 완전히 로마화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동전으로 사람이나 신이 아닌 식물 문양이 새겨져 유대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이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도시는 바르 코크바 반란(AD 135)이후, 유대인들이 대거 유입되며 갈릴리 유대인의 종교 중심지가 되었고, 랍비 유다 하나시도 이주하여 미쉬나를 편집하였습니다. 지진으로 일시적으로 파괴된 적도 있으나, 유대인·로마인·기독교인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도시로 발전하였습니다. 찌포리의 부유함은 ‘갈릴리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모자이크가 있는 로마 빌라에서 확인됩니다. 주후 200년경 건축된 이 빌라는 연회 공간과 디오니소스, 판, 헬라클레스가 등장하는 모자이크로 장식되었으며,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은 비너스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도시 곳곳에서는 유대인의 흔적도 풍부하게 발견됩니다. 자갈길 위 낙서, 정결례탕 ‘미크베’, 성전 촛대 그림 등이 있으며, 5세기경 회당 바닥의 모자이크에는 제사 장면과 함께 헬리오스와 황동 12궁도가 묘사되어 유대교에 미친 로마 문화의 영향을 알게 합니다. 한편, 기독교의 세력이 커지면서 유대교는 도시 외곽으로 밀려났습니다. 지금 찌포리는 고고학적 유적지일 뿐, 현대 도시로서의 찌포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뿐으로 지금 세워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어린 양 예수의 피뿌림을 받은 자들이며,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는 용사들입니다.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전도서 7:13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이 구부려 놓으신 것을 누가 펼 수 있겠는가?”(새번역)

시인 오인태(1962~)의 시‘인생’입니다.
  “
밥술 뜨다 뜨리라”

그의 인생입니다: “나는 진학도 진로도 내 원대로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교대에 들어간 건 그때로서는 등록금이 가장 싼 교대 외엔 대학 갈 형편이 못 되었던 까닭이 컸다. 교대를 나와 저절로 교사가 되었고, 뒤늦게 공부에 재미를 붙여 학위도 받고 모교에서 시간 강사도 했다. 그러나 교육 전문직 공채에 응시해서 장학사도 하고, 교육 연구사를 겨쳐 교육 연구관을 지낸 끝에 지금은 시골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을 눈앞에 두고 있다. 교직에 들어와서 해 볼 건 다 해 본 셈이다. 그러나 어떤 성취나 직위를 위해 목을 맨 적은 없었다. 살다 보니 어떻게든 된 것일 뿐. 여러 단체에 참가하면서 소신껏 발언하며 살아왔다. …..사실 스스로 생각하는 가장 큰 자산은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자각과 자부심이다.…..살아오면서 어떤 갈림길에 썼을 때 늘 선택의 기준은 이 길을 가면 시를 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분의 정체성은 시인입니다. 그러나, 시인보다는 난독증·난서증 등의 문제를 갖고 괴로워 하는 학생을 조기발견하여 한 사람의 인격체로 세워주는 교직이 더 낫다고 보입니다. 그 만큼 교직은 하나님의 일에 가깝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구부려 놓으신 것들 -난독증, 난서증 등 -을 펴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영혼이 자기중심으로 구부려진 사람들을 주님 앞에 인도하는 복음의 제사장들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십시오.”(살전5:14,새번역).  

매일묵상(2025/10/13-17)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여수 애양병원
열왕기하5:14절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1911년 광주나병원으로 시작된 여수애양병원은 현대식 의료시설을 갖추고 정형외과, 내과, 피부과 등 다양한 진료과를 통해 많은 외래 환자 또한 받고 있습니다. 또한 병원은 한센병 환자와 일반 장애인을 대상으로 치료와 재활을 통해 복음을 전도하고 영혼구원이 그 설립목적이기에, 전인적 치유사역은 그 핵심입니다. 1970년대 이후 나환자 수는 급격히 줄었고, 그에 따라 병원의 관심은 한센병 기형 환자와 소아마비 환자를 거쳐 인공관절 수술 환자로 확대되었습니다. 토플 원장이 무릎 인공관절 수술에 성공한 이후(1973년), 병원은 관련 기술과 노하우를 축적하였고 비용도 상당히 저렴합니다. 과거에는 공기로 전염된다는 오해까지 받아 환자들이 마을에서 추방되기도 하였습니다. 레위기 13장에는 나병의 진단과 격리 방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시대에 따라 문둥병, 나병, 한센병으로 명칭이 변화해왔습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디디에스와 푸르토밍 같은 신약이 개발되면서 완치가 가능한 병이 되었고, 이곳에서는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닙니다. 나병은 인간의 한계를 상징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치유할 수 있는 병으로 여겨졌던 시절, 그 치유는 선지자나 메시야의 권위를 입증하는 표적이었습니다. 나아만을 고친 엘리사와 많은 나환자를 기적으로 치유하신 예수께서 그 대표적 예입니다. 우리에게서 고난은 주님을 증거하는 기회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도우심을 믿고 살아가면 구원을 경험하고 믿음은 큰 담력을 얻게 됩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14:31).

전도서 5:2절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1절이 경청과 순종을 강조했다면, 2절은 경솔한 말과 기도를 경계합니다. 말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마음의 반영이며, 하나님 앞에서 한 말은 책임을 동반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예배자는 말씀을 먼저 듣고 그 뜻을 헤아린 뒤 기도합니다. 이것이 바른 기도생활입니다. 왜 사람들은 부주의한 말을 쏟아낼까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마음은 절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절박함이 경솔함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너는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의 원어는 ‘성급하다’는 뜻이고, “급한 마음으로”는 ‘빠르다’는 의미입니다. 전도자는 이 두 동사를 겹쳐 사용하여, 쫓기듯 서두르는 기도의 자세가 문제의 원인임을 지적합니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먼저,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으로 그분의 뜻대로 신실하게 살아가면 필요한 것들을 알아서 채워주십니다. 서원과 요청이 없어도 이미 우리 부엌은 필수품으로 가득 채워짐을 경험합니다(눅12:29,30). 이런 신뢰와 경험은 우리로 말을 절제하도록 합니다. 따라서 서원할 때도 깊이 생각한 뒤 지킬 수 있는 말만 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미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선하시고, 인자하시며, 우리의 중심을 아시는 분입니다. 사사 입다는 암몬 자손과의 전쟁을 앞두고 승리를 위해 어리석은 서원을 했고, 결국 딸을 제물로 바치게 됩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한 것, 그것이 입다 비극의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8).

전도서 5:3절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2절은 주님을 경외하는 한 사례로서 바른 기도 생활을 제시하고, 3절은 그 당시 잘 알려져 있던 경구를 덧붙여 마무리 합니다. 3절은 독립된 평행 대구 구조로서, 다음은 직역입니다: (a) ‘그러므로 그 꿈이 생긴다’ (b) ‘일이 많으면’, (a’) ‘그리고 우매자의 소리’ (b’) ‘말들이 많으면.’ 먼저 전단을 보면,  ‘일이 많으면’은 지나치게 욕심을 추구하는 상황을, ‘꿈이 생긴다’는 비현실적인 망상 혹은 모든 일의 덧없음을 표현합니다. 후단의 경우, ‘말들이 많으면’을 통해 ‘일’과 대비되는 ‘말들’을 강조하고, 그 결과 ‘꿈이 생기듯’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남을 교훈합니다. ‘우매자의 소리’는 ‘꿈’과 같이 ‘헛된 말들’을 뜻합니다. 사람 앞에서도 그러한데, 하물며 만유의 통치자 되신 하나님 면전에서는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비록 그분이 선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 아버지가 되시지만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전도자는 동의적 표현을 대구법으로 거듭 강조한 이 경구를 통해, 생각 없이 욕심과 말만 많으면 어리석은 자의 허황된 소리로 귀결됨을 경고합니다. 주님에 대한 경외가 자연스럽게 마음에 새겨지게 하는 경구이며, 멋진 글솜씨입니다. 욥은 닥친 고난이 중하자, 하나님께 수많은 질문과 항변을 하고, 친구들과도 자신의 의를 주장하며 많은 말을 합니다. 그러나 폭풍 가운데 나타나신 주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자 자신의 무지를 회개합니다(욥42:3-6). 의로운 욥도 그러한데, 우리는 마땅히 마음을 다스려 말을 적게 해야 할 것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찌포리(1)
요한복음 1:46절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나사렛은 찌포리 남동쪽 약 6km에 위치한 작은 유대인 마을이었기에, 예수님은 갈릴리 행정 중심지 찌포리를 잘 아셨고, 부친 요셉과 함께 목수(건축가)로서 찌포리의 건축에도 참여하셨을 것입니다. 고고학자들의 발굴 결과 주후 1세기 찌포리는 매우 번성한 도시로서, 어머니 마리아의 부모의 고향이란 전승도 있으나 신구약 성경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주전 37년 헤롯 대왕은 눈보라를 뚫고 도시를 점령하여 로마에 바쳤습니다. 주전 4년 헤롯이 죽자 찌포리의 유대인들은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다 전멸 당하고, 로마군은 찌포리에서 사마리아까지 약 50km의 로마식 도로를 건설하였습니다. 갈릴리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는 찌포리를 한 때 수도로 삼고 ‘갈릴리의 보석’이라 불렀습니다. 주후 66년 로마에 저항하는 유대인의 반란이 갈릴리에서 시작되었지만, 찌포리 주민들은 오히려 성문을 열고 로마의 베스파시안 장군을 환영하여, 그 도시는 보존되었고, 유대인들의 흔적도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세력이 점차 커지면서 유대교의 위상은 점점 작아졌습니다. 찌포리는 세속적으로는 그토록 번성하였지만 성경에 그 지명조차 등장하지 않고, 천시받은 나사렛은 ‘나사렛 예수’처럼 세세토록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주민 중에는 오직 예수님의 가족들만 기억됩니다. 왜 그럴까요? 이들은 메시야 예수를 배척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 즉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천 수단에 불과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무엇이 당신의 박스에 담겨 있습니까?
누가복음 4: 9절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2018년 작고한 밥 버포드(Bob Buford)는 미디어 사업에서 성공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둔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중심에 둘 때, 삶은 의미로 채워지고 성공에 대한 갈증은 해소되었음을 고백합니다. 40대 중반, 그는 무신론자이지만 뛰어난 컨설턴트인 마이크 가미를 만나 진로를 상담하는 중, “당신의 박스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라는 가미의 질문에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후 그는 큰 수익이 예상되는 사업기회를 접하게 되었고, 워싱턴행 비행기에서 우연히 그 사업과 관련된 사무소장이자 자신의 이전 변호사를 만났습니다. 밥이 자신의 기업가적 은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한다고 그 사업에 관해 말하자, 상대는 “당신은 지금 유혹의 산꼭대기에 서 있습니다”라며 경고했습니다. 호텔에 도착한 밥은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사탄의 두 번째 유혹을 받는 장면을 읽으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되새겼습니다. 그 사업은 밥이 전혀 모르는 분야로, 수익의 핵심은 절세에 있었습니다. 이는 그의 비즈니스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내면의 음성은 “네가 아는 것에 붙어 있으라”고 말했고, 그는 결국 그 사업에 불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밥은 그 선택을 단순한 손실이나 승리로 보지 않고, 자신이 누구이며 왜 이 땅에 존재하는지를 되새기게 한 초월적 경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성공을 위해 균형을 잃지 말라”는 그의 교훈은, 모든 탐심을 물리치고 “신앙과 삶의 중심”을 지키라는 자족의 교훈과 닿아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눅4:12).

매일묵상(2025/9/29-10/3)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여수 애양원(4)
잠언 22:2절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옛날 조선시대 유서 깊은 고을 어귀엔 어김없이 그곳을 거쳐 간 관리들의 선정비와 공덕비가 줄지어 있듯, 애양원 입구에도 화강암 비석 네 개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애양원 설립의 계기를 만들어 준 포사이드 선교사, 초대 원장 윌슨과 그를 이은 보이어와 토플 원장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 그것들입니다. 그 중에 포사이드와 윌슨 것은 모양이나 크기가 같습니다. 광주에 있던 나환자들이 동냥을 해서 세웠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석을 세운 날짜가 똑같이 1926년 11월 13일로 광주나병원이 철수 명령을 받은 지 나흘째 되는 날입니다. 나환자들은 이 비석을 세운 직후 여수 신풍리 애양원으로 ‘출애굽 여정’을 시작하였고 그때 비석도 함께 왔습니다. 보이어의 것은 1965년 9월 정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들어갈 때, 토플 것은 1981년 한국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떠난 이듬해 세웠습니다. 애양원 입구의 네 비석은 소외된 이들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흔적이며, 포사이드, 윌슨, 보이어, 토플 네 분에 대한 나환자들의 깊은 감사의 표현입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인류애로 아프리카를 섬겼듯, 이들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여 섬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에게 맡겨진 나환자들은 단순한 환자가 아니라 주님께서 맡기신 양들이었습니다. 세상은 그 차이를 작게 여기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섬김의 동기가 하늘에 속한 증거가 됩니다. 그들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영원한 비석입니다.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요21:16).

전도서 5:1절 (1)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5장의 주제는 두 개이며, ‘언어와 예배’(1-7)와 ‘해 아래 세상’(8-20)입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 발걸음을 조심하라고 권고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거주지이므로 무심히 접근하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유다 왕국 말기,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전 문 앞에서,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고, 오히려 “너희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러면 가나안 땅에 계속 살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렘7:1-4). 신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의 희생”을 바치기보다 그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 성전에 가야합니다. ‘희생제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달래고 자신의 양심을 침묵시키려는 의도’가 문제입니다. 전도자는 그런 피상적인 예배의 위험성을 알고 있습니다. 시편 40:6절 후단, “당신께서 나를 위하여 귀를 파셨나이다” 라는 은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기 어려움을 감동적으로 표현합니다. 피터슨의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경청해야 하나 경청하는 귀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그래서 하나님은 곡갱이와 삽을 들고 두개골의 화강암을 파내어 안에 깊숙이 있는 생각과 마음에 접근할 통로를 여신다….그 결과는 성경의 회복이며, “눈은 귀로 변한다.” 이런 경청은 통상 공적 예배에서 이루어집니다. 예배는 ‘은혜의 방편’ 중 하나로서, 예배 중 하나님이 지혜를 가르치시며 바로 그때 우리는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귀를 돌리고 율법을 듣지 않으면, 그의 기도마저도 역겹게 된다.”(잠언28:9,새번역).

전도서 5:1절 (2)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바보란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로서,  순종이 결여되어 있다”(머피). 어리석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책망이 필요하여 잠언에는 ‘책망’이란 단어가 12번 등장합니다.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솔로몬의 열망이 느껴집니다. 구약의 지혜는 구약의 율법과 상통합니다. 본절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표현은,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율법을 읽고 가르침으로써 받을 교훈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로핑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세의 율법을 듣는 것을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본절은 성전의 이중적 기능을 드러냅니다. 하나는 율법과 그 율법을 통해 제사장들이 백성을 가르치는 장소이며, 다른 하나는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백성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브리젠은, “야훼께서 어떤 장소에 자신을 나타내실 때, 이는 사실 항상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행해진다. … 그분의 임재로 영원히 거룩해진 성전에서,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거듭거듭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물리적 성전이 아니라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요4:24)안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물리적 성전이 아니라 ‘예배공동체’(고전3:16)와 ‘신자의 몸’(6:19)이라는 영적 성전에 거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과 공동체가 성전이라면 우리는 각자의 공동체와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할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며, 그 지침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베이트 쉐아림의 공동묘지
마태복음 27:52,53절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두 개의 문들을 가진 집’이라는 뜻의 ‘베이트 쉐아림’ 도시는 주전 1세기경 건설되었으며 주로 유대인들의 거주지로 사용되다가 주후 352년 반란으로 황폐하였습니다. 가장 큰 유적지는 유대인 공동묘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2002).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유대의 최고 법원인 산헤드린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도시는 번성하였습니다. 특히 주후 220년 산헤드린 최고 수장이었던 랍비 유다 하나시는 이곳에서 미쉬나를 편집하다가 묻혔는데, 실제 14번 무덤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됐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성전 주변에 무덤을 갖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곳이며, 유대교 전통에서는 메시야가 재림할 장소로서 그때 죽은 자들이 부활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성전 근처에 묻힌다는 것은 경건하고 존경받는 삶을 살았다는 사회적 인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예루살렘으로 갈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베이트 쉐아림’을 공동묘지로 삼았습니다. 이곳에서는 바위를 깎아 만든 커다란 방을 지하에 만든 30여 개의 무덤들, 다양한 언어로 기록된 비문들과 함께 화려한 장식이 조각된 석관들이 발견됐습니다. 이들의 믿음대로 메시야가 과연 왔고 죽은 많은 성도들이 부활한 바 있음을 본절은 증언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의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증거를 배척하고 자신들의 율법해석만 고집하였습니다. 최후의 심판 때 이들은 모세오경의 저자인 부활한 모세와 다투어야 할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창세기 32:10절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본문은 에서를 두려워 하여 야곱이 드린 기도 중 감사의 대목입니다. 하나님은 들으시고 야곱을 에서의 손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강성갑 목사님은 기독교 농촌교육을 실현하고자 한얼 중학교를 세웠습니다(1948). 6.25 동란으로 부산에 피난 갔던 30살의 김형석 선생은 그 학교를 방문한 뒤 힘껏 도우리라 다짐하고 잠들었습니다(1950.8.1). 그날 밤 꿈에 평양에 있던 여동생이 나타나서 “오빠, 여기가 어디라고 오셨어요? 잠에서 깨어나는 대로 곧 떠나셔야 합니다.”라고 또렸이 말했습니다. 심상치 않다고 느낀 김선생은 급한 일이 있다고 말씀드린 후 떠났습니다. 그때는 다시 걸음하면 되겠다 싶었는데 다음 날 조간 신문에 소위 “김해 지역 양민 학살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군이 명령한 불순분자 색출에 따라 강성갑 목사님 등 양민 200여명이 총살되었습니다. 김교수님은 회상합니다. “그분들의 죽음은 참 가슴아프지만, 그 급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건져 내신 것에 대하여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 사건을 겪다 보면 겸허해질 수밖에 없으며,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는, 내 마음대로, 내 뜻으로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움직이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의 것들은 그 무엇이든지 자랑할 것이 없고, 또 상실하였다고 분노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할 따름입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