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8/25-29)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매곡리 사건
창세기4:10절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은 1950. 7.26-29일 사이에 충북 영동군 노근리 마을 인근에서 미군의 사격으로 250-300명에 이르는 피난민들이 살해된 사건입니다. 학살 배후가 미군으로 밝혀지자, 클린턴 대통령도 사과한 바 있습니다. 1948. 10. 23일 순천 매곡동에서 민간인(26명)이 학살되었으나범인이 진압군인지 반란군인지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부모, 형님과 형수님, 조카 등 5명을 잃었으나, 유일하게 생존한 황종권 목사(88세)는 진압군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았다면서, 학살자는 진압군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얼마나 원통하겠습니까! 우리 민족 5천년 역사 중 억울하게 희생당한 수 많은 사람들이 있으나, 진상이 밝혀지고 범죄자가 처벌된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최초의 살인을 다룹니다. 아벨의 죽음은 오직 가인의 시기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과 대화까지 나누었으나, 그의 시기심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아벨이 땅 속에서 하나님께 호소하자 하나님은 가인을 추방하시면서, 이마에 표를 하여 죽지 않게 보호하셨는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죄가 가정을 거쳐 살인죄로 자라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범죄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 드리셨으니, “아벨의 피보다 낫게 말하는 뿌린 피”(히12:24)입니다. 용서는 물론 그분의 억울한 죽음이 부활이란 하나님의 공의와 인류 구원의 결과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사적인 복수의 문제에서,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전도서 4:6절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

본절의 요지는 “평화가 있는 소박함(or 의)”을 추구하라 입니다. 먼저, 이 잠언은 늘 일에 몰두하여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는 삶 보다, 일과 휴식이 균형잡힌 삶을 칭찬합니다. 전도자가 이미 수고가 질투를 불러오거나 혹은 질투를 동기로 이루진다면 헛된 것임을 밝혔기에 놀랍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게으름의 파괴적 결과를 묘사한 5절과 긴장관계가 느껴지지만 상충은 없습니다. 잠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외하고 각 사람이 처한 상황을 무시하면서,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교훈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좋은 예는 잠언 26:4절과 5절입니다. 26:4절에서는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 하나, 26:5절에서는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고 정반대의 교훈을 가르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처한 상황에 따라 적용해야 하는 잠언의 차이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지혜죠! 다음으로, 이 짧은 단락(4-6절)의 흐름에 주목해야 합니다. 4:4절은 수고와 성공이 이웃의 질투을 야기하거나 질투에서 비롯된다면 “헛되다”는 평가이나, 4:5절은 게으름은 굶주림으로 가는 길임을 경고합니다. 4:6절은 그 결론으로 화평을 겸한 수고를 칭찬합니다. 지금 전도자는 “다툼이 따르는 풍성한 식사보다 평화를 겸한 작은 조각”을 택하는 삶이 낫다고 암묵적으로 권면합니다. 즉, 수고 후에 질투를 받거나 혹은 수고의 동기가 질투라면 헛되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은 파멸로 귀결되기 때문에, 수고는 하되 화평한 삶이 수반되는 삶(직업 등)을 선택해야 합니다.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잠언16:8)

전도서 4:7,8절
“내가 살펴보니, 해 아래 허무한 것이 또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아들이나 형제도 없는 외톨이지만, 끝없이 수고하며, 자기 재산에 만족할 줄을 모른다. 그는 말한다. “내가 누굴 위해 이렇게 수고를 하지? 왜 나는 즐기지 못하는 걸까?” 이것 역시 허무한 일이다.”(쉬운성경)

솔로몬은 헛된 또 하나가 의미없는 탐욕임을 밝힙니다. 등장 인물은 홀로 사는 구두쇠 부자입니다. 그는 가족도 없지만 가진 소유에 만족 못하고 계속 재산을 축적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소유를 누리지도 못하고, 누구를 위해 수고하는지조차 모릅니다. 재산을 불릴 때는 누군가는 손해를 보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분쟁도 많아서 이웃과 친구 역시 없을 것입니다. 고독한 그 구두쇠의 인생은 하나님은 물론, 자신과 타인에게도 유익이 없습니다. 그의 삶은 헛되고 괴로운 수고만 있을 뿐입니다. 3천 년이 지난 지금도 동일합니다. 물질적 성공을 맨 앞에 세워놓고 살면 관계의 단절과 내면의 공허를 초래합니다. 또한 하나님 없이 쌓은 부는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소유와 존재, 노동과 휴식, 나눔의 가치 등의 문제에 직면하여 늘 갈등할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를 위해 수고하는가?” 혹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은 인생이 반드시 마주쳐 넘어가야만 합니다. 이 성찰을 거친 뒤, 하나님 없는 자는 인생의 허무에 빠지거나, 탐욕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신자는 주님의 뜻과 섭리를 믿으므로 가진 것으로 만족하며, 자신과 이웃 모두에게 화평과 선을 만들어내는 자들이 됩니다. 어떤 길로 가겠습니까? 사람의 칭찬을 바라지 않는 은밀한 선, 그것은 그리스도인만이 가능한데, 주님의 보상(칭찬)을 믿기 때문입니다.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솔로몬의 철병거성
열왕기상 9:15절
“솔로몬 왕이 역군을 일으킨 까닭은 이러하니 여호와의 성전과 자기 왕궁과 밀로와 예루살렘 성과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을 건축하려 하였음이라”

해변의 길에 위치한 하솔은 가나안 정복 이전부터 북부 갈릴리 중심도시였으므로, 솔로몬은 하솔을 철병거성의 하나로 건축하였습니다. 이를 증명하듯 하솔과 므깃도 그리고 게셀에는 같은 형태의 성문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성문은 보통 ‘솔로몬의 성문’으로 불리며, 양쪽에 세 개의 방이 나란히 있는 6개의 방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6방 성문(six chambered gate)’이라고도 합니다. 양쪽의 입구에는 각각 탑 하나씩이 더해져 앞으로 튀어나와 있고 오른쪽으로 도로가 놓여 있습니다. 하솔의 ‘6방 성문’은 벽을 이중으로 쌓고 벽과 벽 사이를 칸으로 막아 위에서 보면 방들을 연결해 성벽을 쌓은 것 같은 ‘포곽벽(casemate wall)’의 모습입니다. 고고학자 이갈 야딘은 이 성벽을 주전 10세기 솔로몬 시대의 독특한 성벽으로 발표했습니다.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은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로 분열되고, 솔로몬의 의도와 달리 므깃도와 하솔 두 철병거성은 북 왕국(여로보암)에 속하게 됩니다. 솔로몬은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이를 아는 순간  두 성의 요새화 작업을 멈추었을 것입니다. 국가안전을 위하여 철병거성은 반드시 필요한 조치이나,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군사력보다 신뢰와 순종입니다. 우리 삶도 같습니다. 세상의 힘과 노력도 있어야 하나, 그보다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신뢰는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셔야만 가능하므로 겸손해야 합니다(마19:26).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16:9)

신명기 8:17절
“당신들이 마음 속으로 ‘이 재물은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모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됩니다.”(새번역)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의 광야 생활을 끝내고 요단 강을 넘기 직전 행한 모세 설교의 한 대목입니다.하나님의 은혜로 획득할 막대한 전리품으로 백성들은 부유해질 것이나, 오해하여 자신들에게 공을 돌릴까 모세는 염려합니다. 키에르케고르(1813-1855)는 신앙 생활은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아, 아차 하는 순간 균형을 잃으면 베이거나 죽는다고 경고합니다. 많은 훈련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인간은 형통하면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실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늘 경외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40년의 광야 훈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하였습니다. 모세는 그 경험과 교훈을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면서(신8:1-18), 다른 신들을 섬기면 반드시 멸망한다는 엄중한 경고를 덧붙입니다(신8:19,20). 당부와 경고도 소용 없이 이스라엘 백성은 목이 곧아 결국 순종을 못 배우고 전 세계에 흩어졌습니다. 모세는 이 운명을 알고 또 한 번 경고한 바 있으니 개탄스럽습니다(신31:27-29). ‘수고한 대로 먹는다’(시128:2)는 말은 축복의 법칙입니다. 노력 없이 획득한 재물과 성공 때문에 분별력을 상실하고 인생을 망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생활은 주님의 도우심을 받는 영적인 삶입니다. 이는 우리의 노력과 능력이 아님을 깨닫고 늘 감사를 겸한 자족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 사랑하면 쉽게 이해되나, 그렇지 못하면 신앙 생활도 자기만족·자아중심의 한 종류가 될 뿐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17:17).

매일묵상(2025/8/18-22)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매곡동 양관들(2)
사도행전 1:6절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어린 시절 양관 언덕은 별천지였지요. 울창한 숲에 사철 따라 온갖 꽃이 피어 아름다웠고, 철조망 안쪽의 파란 잔디밭에서 조랑말을 타고 노는 선교사 자녀들의 모습은 깡통 차기를 하는 우리와는 격이 달랐지요. 겨울에 선교사들이 사냥을 하러 나갈 때면 우리도 따라가 토끼와 노루 몰이꾼이 되곤 했지요. 그래도 우월슨 선교사나 인휴 선교사 같은 분은 한국 아이들을 좋아해서 성탄절 같은 날 자기네 아이 친구들을 집으로 초청해 파티를 열어 주고 과자를 나누어 주었어요. 양관에 들어갔다 온 아이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지요.” 김동철 집사의 증언입니다. 양관 동네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순천의 ‘별유천지’(別有天地), 즉 전혀 다른 세계였습니다. 선교사 중에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신 분들도 계셨지만, 권위적이고 열등하게 여긴 분들도 분명 존재하였습니다. 윤치호(1865-1945) 선생이 원산에서 거주할 때,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가 와서 상당기간 머물렀으나 안부를 전하지 않고 떠난 것을 두고 자신을 무시한 처사라고 일기에 적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차별과 울분 그리고 억압의 환경은 교만한 조선민족의 마음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한 결정적 계기 중 하나였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당장 한민족을 일제로부터 구원 하신 것은 아니나(기복신앙),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기도를 들으셨고 미국을 통해 해방시키셨습니다(섭리신앙). 그 하나님의 때가 오기까지 고난을 겪었음을 생각하면 기복신앙과 섭리신앙의 차이를 깨닫게 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전도서 4:4절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앞선 1-3절은 학대를 받으나 위로자가 없다는 사실을 탄식하며, 죽은 자 심지어 출생하지 않아 그런 비극을 목격하지 않은 자를 복되다고 하나, 4-6절은 그 이외의 여러 이유로 마음의 평안을 얻기 힘든 인생의 허무를 토로합니다. 본절은 사람이 부지런히 일하여 좋은 성과를 내거나, 능숙한 재주를 사용하여 일을 맡아 성공 하여도 남들의 부러움과 시기를 받는 현실을 묘사합니다. 열심히 일한 결과가 결국 사람들의 시기와 비방으로 귀결됨으로, 사회적인 성공이 결코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면 열심히 사는 삶 자체 역시 의미 없습니다. 전도자는 이런 부조리를 보고 한숨을 내뱉는데, 우리 민족은 이런 상활을 하도 많이 겪어 “재인박명”이란 단어까지 나왔습니다. 아무리 재주를 가졌다 하더라도, 성공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는데, 그 모든 난관을 극복하여 성공하였다면 당연히 존경과 찬사를 받아야 마땅함에도, 오히려 타인의 시기의 대상이 된다면 학대받는 사람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열심히 일하고 재주를 습득하여 성공하려는 마음 자체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타락상에 직면하여 자신을 보호하려는 기술이 처신술입니다. 중국 한 나라의 개국공신 장량은 유방을 도와 항우를 이기자, 집에 칩거하다가 신선이 되겠다고 도주하였습니다. 만약 재상의 자리를 가졌다면 유방과 신하들의 시기를 받아 멸문지화를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평안히 장수하다가 죽는 것은 축복 중 으뜸으로 솔로몬도 갖지 못하였고, 아브라함과 같은 경건한 자의 축복입니다.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창15:15).

전도서 4:5절
“어리석은 사람은 팔짱을 끼고 앉아서, 제 몸만 축낸다”고 하지만”(새번역)

4절은 수고하며 일해도 그 결과는 무익할 수 있음을 밝혔지만, 이를 오해하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본절은 그러한 극단을 경계합니다. 열심히 일해 성공하여도 행복 대신 시기를 받을 수도 있으나, 게으르게 살면 반드시 파멸합니다. ‘팔장을 끼고’란 말은 ‘일하기 싫어서 팔장을 낀 채 빈둥거리는 모습’입니다. 특히, 원문은 현재형을 사용하여 잠시 동안의 휴식이 아닌 계속적인 게으른 상태를 표현합니다. 잠언은 게으름의 결국은 ‘가난과 궁핍’임을 거듭 밝히나(잠19:15), 본문의 표현은 더욱 매섭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은 가난하고 배고플 뿐 아니라 그들은 결국 “제 몸만 축냅니다.” 게으른 자가 당할 자포자기 결과와 그 파멸의 모습을 선명히 그려주고 있습니다. ‘제 몸만 축낸다’는 표현은, 재물을 증식하지 못하고 다 써버리거나, 가난 때문에 자신의 몸을 종으로 팔아 사는 모습 등에 대한 묘사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란 우둔하고 완고한 자를 지칭하며 상황에 따른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인생의 노력과 성취가 궁극적인 행복이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팔짱만 끼고 앉아 노는 것은 더욱 어리석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달란트 비유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입니다(마25:24-30). 그는 실패와 이에 따른 질책을 두려워 하여 받은 한 달란트를 묻어 두고 주인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그 결국은 엄한 심판입니다. 신앙과 일의 윤리가 합치된 교훈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바깥 사람을 대하여 품위 있게 살아가야 하고, 또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살전4:12, 새번역).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하솔 임금 야빈의 궁전
사사기 4:2절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하솔 임금 야빈의 궁전 전체는 다 발굴되지 않았지만 궁전의 동쪽 입구 길이는 39m, 현존 벽의 높이는 2.4m가 넘는 것으로 보아 궁전의 크기가 그려집니다. 왕좌가 있었던 중앙 홀의 바닥은 레바논의 백향목이 깔려 있었고 진흙으로 쌓은 벽들은 현무암을 널빤지처럼 깎은 판석들로 입혀졌습니다. 궁전 안에서는 상아 유물, 청동 칼들, 보석을 비롯해 왕 혹은 신의 모습을 표현한 청동상도 출토되었습니다. 발견된 문서 중에는 ‘눈에는 눈’이란 함무라비 법전의 규정도 있습니다. 또한, ‘입니 아디(Ibni Addi)’라 기록된 왕의 이름도 발견되었는데, 입니는 야빈과 어원이 같습니다. 학자들은 ‘입니’를 여호수아와 전쟁을 치른 하솔 왕 야빈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문제는 사사기 4∼5장에서도 바락과 싸운 장군 시스라가 섬겼던 하솔 왕의 이름도 야빈압니다. 고고학자들은 가나안 정복 전쟁 중 동시대에 일어난 일을 각각 다른 주인공의 시점에서 바라본 하나의 전쟁으로 추측하나, 가나안 정복 전쟁은 사사 시대 전(주전 14세기경)이었고, 드보라는 사사 중 한 명이므로 옳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 하솔왕 야빈을 세상 세력의 모형이라 본다면, 한 번의 전쟁에서 이겼다고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통치하는 신약시대는 연이은 영적 전쟁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영적 전쟁에서 그리스도인의 무기는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행하는 것”이고, 목적은 “모든 일에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입니다(엡4:15).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의 생활을 늘 살피십시오. 어리석은 자처럼 살지 말고, 지혜롭게 행동하십시오.”(엡5:15,쉬운성경)

잠언 3:18절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솔로몬의 일대기는 사람의 심리를 꿰뚫는 지혜, 중계무역으로 엄청난 부의 획득, 백과사전적 지식 등을 증언합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에,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잠언4:7)고 강력히 권고합니다. 어떻게 지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배우려는 열정과 교육”입니다. ‘농업의 힘’이라는 책을 저술한 박현출 작가(1956)는 농림수산부 국장과 농촌진흥청장을 지낸 전직 공무원입니다. 이분이 이디오피아를 갔을 때, 그들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예전에 한국은 이디오피아 보다 가난하였는데, 지금은 쳐다보기도 어려울 정도로(이디오피아 국민소득은 일인당 900불이 안됨) 발전하였다. 그 비결이 무엇이냐?” 박현출 씨는 “우리도 과거에는 너희들과 같이 80%가 농민이었지만, 우리 부모세대가 논밭 팔아서 자식들 공부를 시켰다. 그 교육의 힘이 오늘 너희와 우리의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다.” 명치유신 이후 백년 동안 일본의 발전에 가장 효율적 투자는 교육 분야임이 밝혀진 것도 좋은 증거입니다. 그러나, 지식은 교만하게 만들고 교만하면 패망이 옵니다. 하나님 경외하기를 멈춘 솔로몬이나 제국주의에 치달은 일본의 결국이 그렇습니다. 생명에 이르는 지혜의 첫 걸음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배우는 것입니다. 세상 지혜와 지식은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누구나 얻지만, 생명에 이르는 지혜와 지식은 오직 주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여기 인간 노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교만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인 계명을 행하게 하여 달라는 기도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매일묵상(2025/8/11-15)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매곡동 양관들
에베소서 5:15절
“때가 악하니 가능하면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잘 붙드시기 바랍니다.”(쉬운성경)

선교부가 철수 후(1981) 여수 애양원은 부지 1천 여평을 인수하여 나병 환자 재활병원을 세우지만, 잔존한 양관(洋館) 3채를 보존합니다. 하나는 순천 최초의 양관으로(1913) 지하실(100평), 테라스 등을 갖춘 미국 남부 장원 주택입니다. 순천 개척 선교사 프레스턴 가족의 사택이었으나, 1930년대 이후에는 여수 애양원 원장 윌슨(우월순) 가족이, 지금은 재활병원 직원들이 사용합니다. 그 위쪽에 2층 석조 양관(1975년 이전 신축)이 있습니다. 그 건물은 지하실(100평)을 갖춘 짙은 회색의 화강암으로 벽체를 쌓고, 우진각 지붕 형태에 조선식 기와를 올렸으며, 다락 지붕의 내림 마루와 합각 양식이 조선식입니다. 전통의 멋이 담겼으며 애양원 원장 사택입니다. 그 왼쪽 아래에는 단층 양관으로 비어 있습니다. 본래는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외국인 학교와 교회였습니다. 순천에 살았던 40명 넘는 선교사 가족들은 자녀의 모국(미국) 학교 진학을 위한 기초 교육과, 모국어(영어)를 사용하여 예배드릴 ‘자유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논어는 공자를 ‘시중(時中)의 사람’으로 평가합니다. 시중은 “때와 상황에 맞게 처신한다”는 뜻으로, ‘때를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은 ‘때’를 알아야 노력이 열매 맺게 됩니다(전3:9). 이는 하나님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기 때문이지만, 유교는 하나님을 모르고 신자는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의 마음에는 늘 경외와 감사 그리고 선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에 대한 신뢰가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전도서 4:2절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전도자는 약자가 억압당하는 부조리를 개탄합니다. 그는 이런 세상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의견을 피력하면서, 더 좋은’(better-than) 형식을 사용합니다.왜 그럴까요? 산 자는 계속된 억압을 피할 수 없지만, 죽은 자들은 ‘억압’ 자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에 전도자는 죽음이 아닌 쾌락을 칭찬(전8:15)합니다. ‘모순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도자는 죽음과 쾌락 모두를 삶의 고통을 마비시키는 수단으로 보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사용된 “복되다”(šbḥ)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시편 도처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사용됩니다(시편 63:4).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성경에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기도한 두 분이 있습니다: 엘리야(왕상19:4)와 요나(욘4:3)입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기도하여 하늘로부터 불이 떨어지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죽인 뒤 3년 만에 비를 다시 오게 합니다. 그러나, 다음 날 이세벨의 협박을 받자 브엘세바로 도망쳐 죽기를 구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간섭으로 다시 니느웨 성으로 가서 ‘40일 후 성이 무너진다’고 외쳤습니다. 허나, 40일 후에도 성이 건재하자 화가 나서 죽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은 두 선지자 모두 책망하셨습니다. 한편, 바울은 몸 안에 있으면 복음의 열매를 맺고, 몸을 떠나면 주님과 함께 있게 되므로, 선택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3,24).

전도서 4:3절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

본절은 억압과 고통을 목격하느니 차라리 출생하지 않는 자를 복되다고 하는데, 염세주의로 치부할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게 만연한 악을 깊이 성찰한 결과이며, 또 삶의 의미를 묻고 있기도 합니다. ‘출생하지 아니하여’의 원문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자’란 의미로써, 유산이란 함의를 넘어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존재하지 않은 자를 말합니다. 인간은 악한 일을 겪지 않을 수 없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비존재의 평온함’이라 하겠으나, 소극적인 삶의 태도가 느껴집니다. 고난 중의욥의 독백입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욥3:1-26). 성경은 절대로 고통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본절의 ‘악한 일’은 권력자의 학대에 방점이 있습니다. 악한 일의 전형으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 사건을 논하게 됩니다. 3중의 악함이 보입니다. (1)우리야는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장군으로 미모의 아내 때문에 죄 없이 살해당합니다. (2) 자신이 충성하는 왕과 군대장관의 손에 의해 죽습니다. (3)우리야는 헷 족속이나, 다윗과 요압은 의로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우리 모두 너무 분하고 삶도 무의미해지며, 당연히 하나님께 심판을 호소하게 됩니다. 그땐 그분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고 우리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다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하솔
여호수아11:10절

“하솔은 본래 그 모든 나라의 머리였더니 그 때에 여호수아가 돌아와서 하솔을 취하고 그 왕을 칼날로 쳐죽이고”

2005년 유네스코는 므깃도, 브엘세바, 하솔을 세계유산으로 선정했습니다. 그중 하솔은 가장 큰 유적지로서,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하며, 상부도시(0.1㎢)와 하부도시(0.8㎢)로 구분됩니다. 하솔의 이름은 이미 메소포타미아 유적지 마리(BC18세기)의 문서나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BC14세기)에 등장합니다. 또한, 여호수아서는 하솔이 이끄는 많은 가나안 연합군과의 전쟁을 증언하는데 가나안 정복 전 하솔의 위상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솔 왕을 죽이고, 하솔 성을 불살랐습니다. 발굴된 주전 2000∼1200년경의 부유하고 요새화된 하부도시와 가나안 신전들의 모습은 놀랍다고 합니다. 신전 앞마당(18×33m)에는 사자상 두 마리(1.8m)가 성소를 지켰고, 성전 내부에는 바알이 조각된 석상과 함께 헌물용 석탁들도 있습니다. 또, 돌을 깎아 만든 가나안의 신상 마쩨봇 석상(石像), 제의용 점토 가면, 그리고 은 홀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우상은 보이는 것을 의지하려는 욕망이나, 미래의 불안을 잠재우거나, 소원 성취 등 인간의 뜻대로 움직여 줄 신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영원히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도록 편리한 하나님 대체물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상을 극복하려면 참 하나님을 영접하고 그분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이 볼 수도 알 수도 가까이 갈 수도 없는 분으로, 오직 우리 주님만이 그분을 알려주셨습니다. 여기에 기독교 복음의 근거가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14:7).

열왕기상 3:9,10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오늘 본문은 나라를 안정시킨 솔로몬이 백성의 송사 분별의 지혜가 부족함을 깨닫고 일천 번제를 드린 후 현몽하신 주님과 나눈 대화입니다. 2006년 작고한 세명대학교 설립자이신 권영우 명예 총장의 일화입니다. 1970년대 초 용인 지역에 자연농원(에버랜드)을 만들려는 사전 토지 구입작업이 삼성가에서 진행되고 있었습지만, 요지에 토지를 소유한 권영우 청년(30대)은 선뜻 응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이병철 회장이 보고자 한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회장실에 들어갔더니 잿떨이와 함께 이회장의 호통이 날라왔습니다. “사업을 해서 알만 한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느냐?” 권청년은 “아 그런 것이 아니라, 저는 회장님이 매입하고자 한 것을 몰랐습니다. 만약 알았더라면, 즉시 드렸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토지 구입 가격에 그 동안의 이자만 붙여주시면 매각해 드리겠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감동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이병철 회장의 적극지원하에 운수사업을 하여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리고 국회의원과 건설부 장관을 역임 한 뒤, 교육사업이 이름을 알릴 가장 훌륭한 방법임을 깨닫고 세명대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물론 권영우 이사장과 달리 솔로몬은 오직하나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에 주님을 감동시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감사를, 은밀한 가운데, 선행과 구제, 그리고 기도로써 하나님께 드림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바랍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3,4).

매일묵상(2025/8/4-8)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천 매산학교(5)
전도서 1:4절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다.”(새번역)

1983년 매산고등학교에서 분리된 매산여고는 선교사들이 살던 매곡동 166번지 일대에 아파트형 교사를 지으면서 양관 두 채를 남겨 놓았습니다. 이 둘은 운동장을 사이에 두고 학교 양쪽에 위치하며, 지하실을 갖춘 2층 석조 건물(60평)입니다. 창문이나 현관을 화려한 장식 없이 단순하게 처리하여 견고하면서도 실용적입니다. 건축연대는 지붕 모양이나 건축 재질로 보아 1920년대로 추정됩니다. 전형적인 선교사 주택 건물인데 운동장 오른쪽 건물은 해방 후 보이어, 토플 가족이 살았고, 지금은 도서실과  어학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운동장 왼쪽 건물은 ‘결핵 선교사’ 린턴 가족이 살았지만, 음악실, 미술실, 체육실, 인쇄실 등의 용도로 변천되었습니다. 선교사 사택으로 지어진 두 개의 양관의 용도가 바뀐 것은 환경의 변화를 반영합니다. 60년이 지나자, 선교사의 도움으로 지어진 매산학교는 더 이상 선교사의 도움이 불필요 하였고, 선교사들은 모두 본국으로 철수하거나 은퇴하였습니다. 따라서, 불필요한 사택은 헐어버리거나 아니면 다른 용도를 찾아야 하였는데, 도서관, 음악실 등은 좋은 대체 사용처입니다. 그러나, 그 도서관과 음악실 등을 사용하는 학생들의 마음에는 선교사들의 교육 유산이 남아 있습니다. 그 유산의 뿌리는 그리스도로서, 천 마디의 설교 보다 훌륭한 복음의 증거자입니다. 다음 세대를 말 없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세대는 오고 가지만, 세상은 여전히 구원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선교, 장학, 구제와 같은 선한 사업에 힘써야 하는 이유입니다. “(부한 자를 명하여)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후6:18)

전도서 4:1절- 학대와 위로자(1)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전도서의 본론부(1:12-12:7)는 인생의 절대 허무의 복합적인 양상을 논하면서, 그 극복 가능성 및 최선의 삶을 탐구합니다. 그 중 4장은 학대와 수고(1-12), 권력과 영화의 허무함(13-16)을 다룹니다. 본절은 모든 악 중 ‘학대’에 초점을 맞춘 뒤, 위로자 없음을 깊이 탄식합니다.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란 표현에는 수동 분사형이 사용되어,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 없이 학대를 받고(수동태), 그 학대가 쉼없이 가해지고 있음(분사형)’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학대’란 권력 남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단순한 폭력이나 괴롭힘을 넘어서, 권력 있는 자들이 약자에게 가하는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억압입니다. ‘권력’이란 그 백성을 섬기라고 주신 하나님의 은사로서 책임이 따릅니다. 그러나 권력을 가지면 마치 신이라도 되는 양 행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인간 타락의 전형입니다. 부조리하며, 인간으로는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솔로몬은 이 부조리를 목격하고 깊은 슬픔과 무력감을 호소합니다. 이들을 누가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런 학대의 문제에 부닺치면 분노하지 말고, 주님 앞에 가져가야 합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단락에서 교훈하신 대로, 주님은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실 것입니다. 믿음이 필요하지만,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눈을 좀 더 높이 들어 학대의 영적 구조와 배경까지 간파해야 합니다. 내일 보겠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5:7).

전도서 4:1절- 학대와 위로자(2)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이제 곧 광복절입니다. 1945년 8월에 북은 소련군이, 남은 미군이 각 진군해 일본의 무장을 해제하면서, 조선인들의 절대적 환영을 받았습니다. 물론 조선인들은 이것이 남북분단과 좌우대립의 서곡임을 몰랐습니다. 압제 받는 자의 소원은 구원자이나, 사람을 의지하면 예외 없이 허무와 구토로 귀결됩니다. 본절에서 솔로몬은 해 아래 인생들이 권력자들에게 당하는 학대를 살피고는, 그들을 구원할 자 내지 그런 소망을 갖고 견디게 할 위로자가 없음을 발견하고 큰 불행임을 토로합니다. 한편, 구원자와 위로자를 생각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구조의 영적인 성격을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죄의 본성입니다. 권력추구라는 죄의 본성을 해결하지 않고는 천국이 와도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사 속죄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롬8:3,4). 둘째, 죽음입니다. 세상에는 가시와 엉겅퀴가 내재되었고,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질 운명입니다. 하나님은 기도 응답의 약속과 함께 불의와 허무로 가득찬 세상 속에 우리를 제사장으로 남겨두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권한·책임을 잘 인식해야 합니다. 셋째, 마귀의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들과의 영적 전쟁, 즉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충성)’을 지키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자 예수님과 위로자 성령님이 계심으로, 여호수아처럼 담대해야 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단의 신전
아모스 8:14절
“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들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가 위하는 것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이 벧엘(남쪽)과 단(북쪽)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워, 우상을 섬기지도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모세율법을 정면으로 어겼습니다. 실제로 텔 단에서는 여로보암 시대에 세워졌다가 아합의 시대에 증축되어 제사가 행해진 성소구역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은 여러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신전은 사라졌지만 신전이 서 있었던 단상(19ⅹ19m)과 거대한 돌제단(높이3m, 크기 5ⅹ6m)이 있었습니다. 건물 전체는 베니게 곧 두로와 시돈의 건축 양식이었고, 정교하게 다듬은 돌들로 지진에도 견디도록 벽돌쌓기 방식이 적용되었습니다. 발견된 제단은 3m 높이에, 잘 다듬은 돌로 된 계단이 설치되었습니다. 모세율법은 제단을 만들 때 ‘다듬은 돌’이나 ‘층계’를 만들지 말라고 금지합니다(출20:25,26). 따라서, 단의 종교적 부패를 엿보게 됩니다. 비옥하나 저주받은 땅 단은 주전 732년 앗수르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주전 4세기까지 버려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권은, 모세율법이라는 하나님의 법을 간직하고 그에 따라 예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떠나는 순간 하나님과의 언약은 파괴되고 받은 땅에서 뽑혀졌습니다. 율법 없는 백성은 이방인과 다름이 없으며, 에덴에서 추방된 아담의 재판(再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계명을 간직하고 성령님을 따라 걷는 자들입니다(롬8:4).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전도서 3:22절a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배우 김혜자(모태신앙, 권사)는 63년 동안의 친근하고 뛰어난 연기를 통해 우리의 삶을 즐겁고 풍요롭게 하였습니다. 또한, 실제의 삶도 굴곡이 없었고, 신앙과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여 후배들의 본이 됩니다. 집안은 유복하였으며, 명문 경기여중·고를 졸업할 정도로 공부도 잘하였지만, 천직을 즐긴 진정한 ‘연기의 프로’입니다. 그녀는 연기 재능을 타고 났습니다. 장남(임현식)의 말입니다. “어머니를 통해 연예인이란 타고나야 한다는 걸 옆에서 여실히 느꼈으며,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받은 재능을 열심히 닦았습니다. 어느 아나운서는 휴식 중 김혜자 씨가 나무 밑에서 ‘나무아미타불”의 연습을 백 번이나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배우 윤여정은, ’사랑이 뭐길래’를 찍을 때 탈진하였으나, 김혜자 선배는 ‘너 병원가면 모두 기다려야 해 초콜렛 먹고 다시 찍어라’며 자신의 입에 초콜렛을 물려준 ‘늑대’라고 불렀습니다. 김혜자 선생님은 말합니다 “끝장을 볼 때까지!” 과연 연기에서는 인정사정 없는 ‘늑대’였고 그렇게 그녀는 성공하였습니다. 공자는 논어 옹야 편에서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고 설파합니다. 최선의 삶을 살려면 즐길 수 있는 자신의 일을 가져야 하는데, 배우 김혜자의 삶이 입증합니다. 솔로몬은 수고 중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은 주님의 선물이며(전3:13), 그의 몫임을 강조하나,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아가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1:12).

매일묵상(2025/7/25-8/1)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천 매산학교(4)
누가복음 8:8절
“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지금 순천매산학교는 남녀공학인 중학교와 매산고등학교, 매산여자고등학교로 나뉘어졌습니다. 중학교 운동장 위쪽으로 ‘구레인’관(1921년 교장&선교사 Crane 박사의 한국이름)으로 명명되어 2013년 보수한 본관 건물(3층)이 있고, 그 우편에 일제시대부터 교사로 사용된 ‘매산관’이 있습니다. 매산관은 2층 석조 건물(1916년)로 ‘호랑이돌’이라 불리는 순천 특산 화강암으로 벽을 쌓고 양철 다락 지붕을 올렸습니다. 1999년 6월 경 이덕주 교수의 방문 시, 박종하 교장은 “겉만 그럴듯하지 내부는 병든 암환자 같아요. 학생들은 많고 교실은 적고 혀서 계속 사용하고는 있는디 오래된 건물이라 붕괴 위험에 불안허요. 교사들은 아예 헐어 버리고 새 건물을 짓자고 허는디 매산에 남아 있는 유일한 옛 건물이라 헐기도 뭣하고 혀서 어쩔거나 생각 중입니다”는 고충을 토로하였고, 이 교수는 “그래도 순천 근대 교육의 요람인 이곳에 백년 된 건물 하나쯤은 있어야지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후 매산관은 2017년 전남교육문화유산 제1호에 지정되었고, 노후교실과 문화재는 보수되었습니다(2020). 십년수목 백년수인 (十年樹木 百年樹人) 이란 말이 있듯이,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은 백년을 내다보아야 합니다. 이같이 1916년에 건축된 매산관은 100년의 영욕의 세월을 후손들에게 증언하며 교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의 관점에서는 100년도 찰나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만 영원히 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신앙유산과 교육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눅4:4).

전도서 3:21절
“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전도서 3장 19–21절은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죽음 앞에서의 평등성, 그리고 지식의 한계를 묵상하는 구절입니다. 오늘 본문인 21절은 사람의 혼은 위로, 짐승의 혼은 아래로 간다는 사후 존재의 주장에 의문을 던지며, 인간의 인식의 한계가 강조됩니다. 본절의 초점은, 동물과 차별되는 인간의 존엄성이 아니라, 인간이나 동물의 혼의 방향과 상관 없이 모두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그 허무함에 있습니다. ‘혼’은 ‘루아’의 번역이며, ‘ 숨 혹은 숨결’을 뜻합니다. 인간의 ‘루아’가 죽은 다음에 하나님께 간다는 표현은 12장 7절에 반복되며, 욥기와 시편(욥 34:14-15; 시 104:29-30)에서도 발견됩니다: “사람이 죽으면 ‘루아’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지만 몸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관찰에 근거하여 죽음 이후를 알 수 없습니다. 전도자 역시 ‘누가 알랴’는 수사 의문문을 사용해 자신의 무지를 고백합니다. 이에 반해 주님은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고 선포하십니다. 전도자는 죽음의 평등성만 알고, 죽은 후의 무지를 고백하나, 주님은 죽은 후에 부활이 있으며, 도덕적 책임과 영원한 결과를 선포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관찰(철학)과 계시인 성경의 차이입니다. 인간의 질문은 구약에 있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요한복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각 사람은 선한 일이든지 악한 일이든지, 몸으로 행한 모든 일에 따라, 마땅한 보응을 받아야 합니다.”(고후5:10,새번역).  

전도서 3:22절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전도서 3:1-15절은 받은 분복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결론을, 16-22절은 세상에 존재하는 심각한 불의와 죽음의 문제를 성찰한 뒤, 자신의 일에 만족하면서 즐겁게 살아가라고 교훈합니다(22). 비록 불의나 죽음을 깊이 성찰하면 인생의 덧없음과 무력함을 뼈저리도록 느끼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현재를 모조리 부정할 근거는 아닙니다. 따라서, 본절은 현재의 삶의 긍정적인 측면도 보면서 즐겁게 사는 것이 바람직 함을 논합니다. 실제로, 우리 삶은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을 아울러 갖고 있기 때문에,  양 요소의 조화를 이루어야 바른 인생관이 형성됩니다. 그 열쇠는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입니다. 그분은 불의를 완전히 심판하실 분이라 약자는 공의의 심판에 대한 소망을 갖고, 죽음 역시 그분의 창조물이라 모든 인간은 사망을 영원히 폐하실 그 날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란 소망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사랑의 수고를 다 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구약의 제한된 계시만 갖고 있어, 그의 논의는 죽음과 삶의 모순적 긴장을 완전히 해소시킬 수 없습니다. 이는 오직 우리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담당하여 죽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죽음이란 하나님을 만나는 문이니, 불신자에게는 심판을 뜻하고, 신자에게는 생명으로 넘어가는 문입니다.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15:25,26)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신전
열왕기상 12 : 28절
“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에는 때로 산당들도 놓여 있어서, 요시아 왕은 유다 성문들에 있는 산당을 헐어버렸습니다(열하23:8). 단의 성문에도 5개의 평평한 돌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 돌들 앞에는 제물을 위한 긴 탁자 형태의 돌이 놓여 있어서, 이 돌들은 우상으로 판단됩니다. 왜 우상일까요? 인간의 타락한 마음에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주전 920년 경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의 정치적 입지는 불안정하였고, 백성들이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들이 유다임금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 자신을 죽일까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여로보암은 고심하다가,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열상11:38)을 버리고, 자신의 꾀를 따릅니다. 그것은 단(북쪽)과 벧엘(남쪽)에 각기 신전을 세우는 것으로, 오늘 본문이 증거합니다. 물론, 단과 벧엘은 나름대로의 종교적, 역사적 자취들이 남아 있는 곳이나, 다윗과 솔로몬을 거쳐 400년 만에 예배처소로 확립된 예루살렘은 아닙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신탁을 받고, 그 신탁의 성취로 사울 왕의 목숨을 취할 수 있는 절호의 상황을 두 번이나 맞닥드립니다. 이때 다윗은 계명을 따르고 망명이라는 고난을 선택하여 결국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스스로 두려워 하면서 자신의 꾀를 따라 우상의 길을 선택하고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테스트’가 올 때, 여로보암이 아니라 다윗이 선택한 계명의 길로 가야만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언3:5).

요한복음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핵심으로 정의되는 영생을 가졌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배척하는 영적 죽음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런 우리를 사랑하사 멸망에서 건지시고 영생을 주시고자 독생자를 주셨음을 선포합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죄사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의 인생의 목표는 자아성취도, 자기실현도 아닌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주 가까워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예31:33). 이는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이웃 사랑은 세상의 이웃 사랑과 다릅니다. 그들의 이웃에는 ‘원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의 아들을 보내심으로 우리와 화목하신 복음의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 객관적으로 선포되었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서만 깨닫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하셔서 모든 진리를 행하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반드시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과 능력이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의 사람이 아니다”(롬8:9)라는 사도의 선포는 이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