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7/25-8/1)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천 매산학교(4)
누가복음 8:8절
“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지금 순천매산학교는 남녀공학인 중학교와 매산고등학교, 매산여자고등학교로 나뉘어졌습니다. 중학교 운동장 위쪽으로 ‘구레인’관(1921년 교장&선교사 Crane 박사의 한국이름)으로 명명되어 2013년 보수한 본관 건물(3층)이 있고, 그 우편에 일제시대부터 교사로 사용된 ‘매산관’이 있습니다. 매산관은 2층 석조 건물(1916년)로 ‘호랑이돌’이라 불리는 순천 특산 화강암으로 벽을 쌓고 양철 다락 지붕을 올렸습니다. 1999년 6월 경 이덕주 교수의 방문 시, 박종하 교장은 “겉만 그럴듯하지 내부는 병든 암환자 같아요. 학생들은 많고 교실은 적고 혀서 계속 사용하고는 있는디 오래된 건물이라 붕괴 위험에 불안허요. 교사들은 아예 헐어 버리고 새 건물을 짓자고 허는디 매산에 남아 있는 유일한 옛 건물이라 헐기도 뭣하고 혀서 어쩔거나 생각 중입니다”는 고충을 토로하였고, 이 교수는 “그래도 순천 근대 교육의 요람인 이곳에 백년 된 건물 하나쯤은 있어야지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후 매산관은 2017년 전남교육문화유산 제1호에 지정되었고, 노후교실과 문화재는 보수되었습니다(2020). 십년수목 백년수인 (十年樹木 百年樹人) 이란 말이 있듯이,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은 백년을 내다보아야 합니다. 이같이 1916년에 건축된 매산관은 100년의 영욕의 세월을 후손들에게 증언하며 교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의 관점에서는 100년도 찰나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만 영원히 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신앙유산과 교육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눅4:4).

전도서 3:21절
“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전도서 3장 19–21절은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죽음 앞에서의 평등성, 그리고 지식의 한계를 묵상하는 구절입니다. 오늘 본문인 21절은 사람의 혼은 위로, 짐승의 혼은 아래로 간다는 사후 존재의 주장에 의문을 던지며, 인간의 인식의 한계가 강조됩니다. 본절의 초점은, 동물과 차별되는 인간의 존엄성이 아니라, 인간이나 동물의 혼의 방향과 상관 없이 모두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그 허무함에 있습니다. ‘혼’은 ‘루아’의 번역이며, ‘ 숨 혹은 숨결’을 뜻합니다. 인간의 ‘루아’가 죽은 다음에 하나님께 간다는 표현은 12장 7절에 반복되며, 욥기와 시편(욥 34:14-15; 시 104:29-30)에서도 발견됩니다: “사람이 죽으면 ‘루아’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지만 몸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관찰에 근거하여 죽음 이후를 알 수 없습니다. 전도자 역시 ‘누가 알랴’는 수사 의문문을 사용해 자신의 무지를 고백합니다. 이에 반해 주님은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고 선포하십니다. 전도자는 죽음의 평등성만 알고, 죽은 후의 무지를 고백하나, 주님은 죽은 후에 부활이 있으며, 도덕적 책임과 영원한 결과를 선포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관찰(철학)과 계시인 성경의 차이입니다. 인간의 질문은 구약에 있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요한복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각 사람은 선한 일이든지 악한 일이든지, 몸으로 행한 모든 일에 따라, 마땅한 보응을 받아야 합니다.”(고후5:10,새번역).  

전도서 3:22절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전도서 3:1-15절은 받은 분복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결론을, 16-22절은 세상에 존재하는 심각한 불의와 죽음의 문제를 성찰한 뒤, 자신의 일에 만족하면서 즐겁게 살아가라고 교훈합니다(22). 비록 불의나 죽음을 깊이 성찰하면 인생의 덧없음과 무력함을 뼈저리도록 느끼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현재를 모조리 부정할 근거는 아닙니다. 따라서, 본절은 현재의 삶의 긍정적인 측면도 보면서 즐겁게 사는 것이 바람직 함을 논합니다. 실제로, 우리 삶은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을 아울러 갖고 있기 때문에,  양 요소의 조화를 이루어야 바른 인생관이 형성됩니다. 그 열쇠는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입니다. 그분은 불의를 완전히 심판하실 분이라 약자는 공의의 심판에 대한 소망을 갖고, 죽음 역시 그분의 창조물이라 모든 인간은 사망을 영원히 폐하실 그 날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란 소망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사랑의 수고를 다 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구약의 제한된 계시만 갖고 있어, 그의 논의는 죽음과 삶의 모순적 긴장을 완전히 해소시킬 수 없습니다. 이는 오직 우리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담당하여 죽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죽음이란 하나님을 만나는 문이니, 불신자에게는 심판을 뜻하고, 신자에게는 생명으로 넘어가는 문입니다.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15:25,26)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신전
열왕기상 12 : 28절
“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에는 때로 산당들도 놓여 있어서, 요시아 왕은 유다 성문들에 있는 산당을 헐어버렸습니다(열하23:8). 단의 성문에도 5개의 평평한 돌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 돌들 앞에는 제물을 위한 긴 탁자 형태의 돌이 놓여 있어서, 이 돌들은 우상으로 판단됩니다. 왜 우상일까요? 인간의 타락한 마음에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주전 920년 경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의 정치적 입지는 불안정하였고, 백성들이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들이 유다임금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 자신을 죽일까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여로보암은 고심하다가,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열상11:38)을 버리고, 자신의 꾀를 따릅니다. 그것은 단(북쪽)과 벧엘(남쪽)에 각기 신전을 세우는 것으로, 오늘 본문이 증거합니다. 물론, 단과 벧엘은 나름대로의 종교적, 역사적 자취들이 남아 있는 곳이나, 다윗과 솔로몬을 거쳐 400년 만에 예배처소로 확립된 예루살렘은 아닙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신탁을 받고, 그 신탁의 성취로 사울 왕의 목숨을 취할 수 있는 절호의 상황을 두 번이나 맞닥드립니다. 이때 다윗은 계명을 따르고 망명이라는 고난을 선택하여 결국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스스로 두려워 하면서 자신의 꾀를 따라 우상의 길을 선택하고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테스트’가 올 때, 여로보암이 아니라 다윗이 선택한 계명의 길로 가야만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언3:5).

요한복음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핵심으로 정의되는 영생을 가졌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배척하는 영적 죽음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런 우리를 사랑하사 멸망에서 건지시고 영생을 주시고자 독생자를 주셨음을 선포합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죄사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의 인생의 목표는 자아성취도, 자기실현도 아닌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주 가까워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예31:33). 이는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이웃 사랑은 세상의 이웃 사랑과 다릅니다. 그들의 이웃에는 ‘원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의 아들을 보내심으로 우리와 화목하신 복음의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 객관적으로 선포되었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서만 깨닫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하셔서 모든 진리를 행하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반드시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과 능력이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의 사람이 아니다”(롬8:9)라는 사도의 선포는 이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