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7/21 – 25)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천 매산학교(3)
요한복음 12:24절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916년 기독계 사립학교에서 성경 교육을 금지시키자 학교를 폐쇄하고 5년 뒤 재개하였던(1921년) 순천 선교부는 일제 말기에 다시 수난을 받습니다. 남장로회 선교부는 신사참배 문제가 나왔을 때 타협을 통한 생존보다는 폐쇄를 통한 거부를 택했습니다. 광주나 목포, 전주, 군산 등 다른 남장로회 선교지역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매산학교도 1937년 9월 학교 폐쇄를 단행합니다. 학교가 문을 닫는 날 교사와 학생 수백 명이 ‘폐교예배’를 드리고 대성통곡하였습니다. 이렇게 매산학교는 죽었습니다만, 8년 뒤 해방이 찾아 왔습니다(1945). 돌아 온 선교사들은 최정완, 김형모, 나덕환, 고려위, 김원식 등 순천노회 지도자들은 함께 노력하여 1946년 9월 학교를 재건(매산중학교)하여 오늘에 이릅니다. 두 번의 학교폐쇄로 매산학교는 얻거나 잃은 것은 무엇일까요? 학교 교육의 목표는 지덕체의 조화로운 완성입니다. 지식은 학원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다고 전제하면, 덕을 함양하는 것은 가장 중요합니다. 덕의 기본은 정직과 사랑입니다. 신사참배의 강요 상황에서 선교부는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정직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결과는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실패였으나(선교사 추방, 학교폐쇄), 영적 도적적 민족적 관점에서는 성공으로, 순천매산학교는 죽음으로 신앙 유산을 후대에 남겼습니다. 복음의 기본속성에는 원수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이는 주님에 대한 믿음과 함께 복음의 핵심이며 덕의 최고봉입니다. 순교자 스데반의 마지막 말입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60).

전도서 3:19절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반려동물은 인간의 돌봄이 없으면 오염된 먹이나 물을 먹고 병들어 죽는 등  불이익을 당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돌보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본능이자 직분입니다(사랑). 그러나 동물은 인간과 다르므로 연구와 경험을 요합니다. 사자의 표호를 한 번 들으면 누가 사자 옆에 가고 싶겠습니까만, 맹수 사육사는 그 위험한 사자가 좋아 사육사 직업을 택하며(애착), 수의사는 싫어도 사자의 병을 치료해야만 합니다(책임). 인간은 동물을 돌보면서 창조주의 지식을 터득하지만, 또한 그분의 메시지를 함께 받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동물도 인간과 같이 죽을 운명이나, 인간은 자신의 죽음도 짐승의 죽음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통해 솔로몬은 “인간이 당하는 죽음을 짐승도 당한다”는 현실을 겪고 인간과 짐승이 다를 바 없음을 탄식합니다. 즉, 죽음은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 모두에게 일반이지만(2:12-17), 인간과 동물에게도 일반입니다. 절대 강자인 죽음은 지혜자와 우매자, 인간과 짐승을 동일한 평면에서 처리합니다. 만약 인간이 죽음의 진리를 배운다면 겸손하여, 생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계시나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으뜸이라 생각하며- 특히 권세, 지혜, 재물을 가진 자들 – 하나님의 뜻을 저버림으로 허무한 종말을 맞습니다. 오직 그분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허무를 극복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전도서 3:20절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본문은 인간과 동물의 운명이 같음을 그들 모두의 출처와 종착지가 동일함을 통해 밝힙니다. “…으므로…으로”에 해당하는 ‘민…엘’은 ‘∼로부터 ∼를 향해’(from ∼ to)라는 의미로 인간과 동물의 생명의 ‘기원과 끝자락’을 알려줍니다. 이들의 기원과 끝이 모두 흙이라는 인식은 인간의 연약함을 분명하게 각인시킵니다. 인간은 때때로 자신이 흙으로부터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만하며 탐욕을 부려 싸우지만, 이런 사실을 깨달으면 육신의 정욕, 세상적 야망과 명예욕, 재물에 대한 탐욕 등의 허망함을 깊이 인식할 것입니다. 이런 인식은 절망이나, 다른 면에서는 우리를 위의 것, 즉 하나님과 그분의 부르심을 생각하게 만드는 큰 원동력이 됩니다. “고난받는 것이 내게 유익이다”고 시편기자는 토로합니다. 시편기자가 주님의 법을 배우고 길을 바로잡아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시편119:71). 살다보면, 자신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때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를 붙뜨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교만한 모든 사람에게 임하나, 주님 사랑하는 자들은 회개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후회와 고집으로 귀결됩니다. 전자는 생명을 갖고 후자는 영원한 심판을 받음을 선포하는 복음은 오늘의 교훈을 넘어서는 신약의 계시로서, 심판자는 말할 것도 없이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롬2:13-16).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 29)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스라엘의 최북단 도시, 단
룻기 4 : 1절
“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아합 왕 시대(BC 8세기 중엽)로 추정되는 ‘단’의 성문은 도시의 서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성문 입구로 올라가는 길은 경사졌고 바닥은 돌로 포장되었습니다. 거대한 성문은 뜰 하나를 사이에 둔 두 개의 다른 사각형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경사진 길을 올라가면 7개의 탑과 여러 개의 방들로 이루어진 첫 번째 구조물에 도착합니다. 이 구조물을 통과하면 앞서 언급한 뜰이 나오고 4개의 방으로 구성된 직사각형의 본 성문을 만납니다. 성문을 지나면 넓은 도로를 지나 시내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목할 구조물은 뜰의 북서쪽에 있는 단상이며 돌을 직각으로 잘 다듬어 쌓았습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성경에서 성문에 올라가 회합을 주도한 이들-왕 혹은 재판장 등 -이 서 있거나 앉아 있었던 자리로 주장합니다. 이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요소는 단상을 둘러싼 각 코너에 시리아에서 당시 유행하던 꽃잎 모양으로 조각된 둥근 기둥 받침입니다. 아마도 단상의 네 귀퉁이의 받침 위에는 각각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단상 위에서 연설을 하는 자의 위에 그늘을 드리우는 지붕을 받치는 구조였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문에 앉아 있었던 자들이란 성문 위가 아니라 성문과 접해 있는 이런 구조물에 앉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늘 본문도 보아스가 거기에 앉아 있다가 더 가까운 친족 ‘아무개’를 만난 후, 적법하게 룻의 고엘(=친족구속자)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있어 믿음만 강조하지 말고 지혜를 다하여야 합니다. “외부 사람들에게는 지혜롭게 대하고, 기회를 선용하십시오.”(골4:5,새번역)

잠언 3:14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흑토, 풍부한 자원, 넓은 영토, 인구도 4천만 명으로 괜찮지만, 세계 최빈국입니다. 러시아와의 분쟁, 친러 성향의 주민과의 내전, 유럽 제 1위의 부패 등을 이유로 꼽으나, “자원의 저주” 라고 생각됩니다. 일찍 왕이 된 솔로몬은 왕권의 불안요인을 지혜롭게 제거합니다(왕상2:46). 3년의 통치 후 재판할 지혜의 부족을 절감한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예루살렘에서 북서쪽 12킬)으로 갑니다. 재판할 지혜에 대한 소원을 품고 일천번제를 드리자, 주님은 현몽하사 ‘내가 무엇을 줄까?” 물으십니다. 마치 유명한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선택하도록 하여 수준을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처럼, 솔로몬은 즉각 그러나 겸손히 ‘듣는 마음’을 요청합니다. 맡겨진 백성들을 공의로 판단할 지혜를 요구하는 솔로몬의 기도는 주님의 마음에 합당하였습니다. 재판할 지혜만 주시면 되시는데 주님은 선한 하나님이시라, 장수를 제외하고 이것저것을 다 주셨습니다. 솔로몬의 명성은 천하에 퍼지고 많은 재물과 권력을 얻지만, 그는 받은 지혜를 모세 율법의 한계 내에 두지 못합니다(신17:14-20). 끝내 권력, 재물, 여자는 솔로몬의 경건한 지혜를 이기고 타락시킵니다. 신자는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자기 일에 즐거워 하며 거기에 적당한 명예, 재물, 권력 등을 넘어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면 고난도 감수할 지혜와 능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고난’이란 단어는 우리를 신중하게 만들고 간절한 기도로 이끌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전3:22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