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매곡리 사건
창세기4:10절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은 1950. 7.26-29일 사이에 충북 영동군 노근리 마을 인근에서 미군의 사격으로 250-300명에 이르는 피난민들이 살해된 사건입니다. 학살 배후가 미군으로 밝혀지자, 클린턴 대통령도 사과한 바 있습니다. 1948. 10. 23일 순천 매곡동에서 민간인(26명)이 학살되었으나범인이 진압군인지 반란군인지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부모, 형님과 형수님, 조카 등 5명을 잃었으나, 유일하게 생존한 황종권 목사(88세)는 진압군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았다면서, 학살자는 진압군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얼마나 원통하겠습니까! 우리 민족 5천년 역사 중 억울하게 희생당한 수 많은 사람들이 있으나, 진상이 밝혀지고 범죄자가 처벌된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최초의 살인을 다룹니다. 아벨의 죽음은 오직 가인의 시기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과 대화까지 나누었으나, 그의 시기심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아벨이 땅 속에서 하나님께 호소하자 하나님은 가인을 추방하시면서, 이마에 표를 하여 죽지 않게 보호하셨는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죄가 가정을 거쳐 살인죄로 자라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범죄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 드리셨으니, “아벨의 피보다 낫게 말하는 뿌린 피”(히12:24)입니다. 용서는 물론 그분의 억울한 죽음이 부활이란 하나님의 공의와 인류 구원의 결과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사적인 복수의 문제에서,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전도서 4:6절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
본절의 요지는 “평화가 있는 소박함(or 의)”을 추구하라 입니다. 먼저, 이 잠언은 늘 일에 몰두하여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는 삶 보다, 일과 휴식이 균형잡힌 삶을 칭찬합니다. 전도자가 이미 수고가 질투를 불러오거나 혹은 질투를 동기로 이루진다면 헛된 것임을 밝혔기에 놀랍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게으름의 파괴적 결과를 묘사한 5절과 긴장관계가 느껴지지만 상충은 없습니다. 잠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외하고 각 사람이 처한 상황을 무시하면서,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교훈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좋은 예는 잠언 26:4절과 5절입니다. 26:4절에서는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 하나, 26:5절에서는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고 정반대의 교훈을 가르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처한 상황에 따라 적용해야 하는 잠언의 차이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지혜죠! 다음으로, 이 짧은 단락(4-6절)의 흐름에 주목해야 합니다. 4:4절은 수고와 성공이 이웃의 질투을 야기하거나 질투에서 비롯된다면 “헛되다”는 평가이나, 4:5절은 게으름은 굶주림으로 가는 길임을 경고합니다. 4:6절은 그 결론으로 화평을 겸한 수고를 칭찬합니다. 지금 전도자는 “다툼이 따르는 풍성한 식사보다 평화를 겸한 작은 조각”을 택하는 삶이 낫다고 암묵적으로 권면합니다. 즉, 수고 후에 질투를 받거나 혹은 수고의 동기가 질투라면 헛되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은 파멸로 귀결되기 때문에, 수고는 하되 화평한 삶이 수반되는 삶(직업 등)을 선택해야 합니다.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잠언16:8)
전도서 4:7,8절
“내가 살펴보니, 해 아래 허무한 것이 또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아들이나 형제도 없는 외톨이지만, 끝없이 수고하며, 자기 재산에 만족할 줄을 모른다. 그는 말한다. “내가 누굴 위해 이렇게 수고를 하지? 왜 나는 즐기지 못하는 걸까?” 이것 역시 허무한 일이다.”(쉬운성경)
솔로몬은 헛된 또 하나가 의미없는 탐욕임을 밝힙니다. 등장 인물은 홀로 사는 구두쇠 부자입니다. 그는 가족도 없지만 가진 소유에 만족 못하고 계속 재산을 축적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소유를 누리지도 못하고, 누구를 위해 수고하는지조차 모릅니다. 재산을 불릴 때는 누군가는 손해를 보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분쟁도 많아서 이웃과 친구 역시 없을 것입니다. 고독한 그 구두쇠의 인생은 하나님은 물론, 자신과 타인에게도 유익이 없습니다. 그의 삶은 헛되고 괴로운 수고만 있을 뿐입니다. 3천 년이 지난 지금도 동일합니다. 물질적 성공을 맨 앞에 세워놓고 살면 관계의 단절과 내면의 공허를 초래합니다. 또한 하나님 없이 쌓은 부는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소유와 존재, 노동과 휴식, 나눔의 가치 등의 문제에 직면하여 늘 갈등할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를 위해 수고하는가?” 혹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은 인생이 반드시 마주쳐 넘어가야만 합니다. 이 성찰을 거친 뒤, 하나님 없는 자는 인생의 허무에 빠지거나, 탐욕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신자는 주님의 뜻과 섭리를 믿으므로 가진 것으로 만족하며, 자신과 이웃 모두에게 화평과 선을 만들어내는 자들이 됩니다. 어떤 길로 가겠습니까? 사람의 칭찬을 바라지 않는 은밀한 선, 그것은 그리스도인만이 가능한데, 주님의 보상(칭찬)을 믿기 때문입니다.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솔로몬의 철병거성
열왕기상 9:15절
“솔로몬 왕이 역군을 일으킨 까닭은 이러하니 여호와의 성전과 자기 왕궁과 밀로와 예루살렘 성과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을 건축하려 하였음이라”
해변의 길에 위치한 하솔은 가나안 정복 이전부터 북부 갈릴리 중심도시였으므로, 솔로몬은 하솔을 철병거성의 하나로 건축하였습니다. 이를 증명하듯 하솔과 므깃도 그리고 게셀에는 같은 형태의 성문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성문은 보통 ‘솔로몬의 성문’으로 불리며, 양쪽에 세 개의 방이 나란히 있는 6개의 방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6방 성문(six chambered gate)’이라고도 합니다. 양쪽의 입구에는 각각 탑 하나씩이 더해져 앞으로 튀어나와 있고 오른쪽으로 도로가 놓여 있습니다. 하솔의 ‘6방 성문’은 벽을 이중으로 쌓고 벽과 벽 사이를 칸으로 막아 위에서 보면 방들을 연결해 성벽을 쌓은 것 같은 ‘포곽벽(casemate wall)’의 모습입니다. 고고학자 이갈 야딘은 이 성벽을 주전 10세기 솔로몬 시대의 독특한 성벽으로 발표했습니다.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은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로 분열되고, 솔로몬의 의도와 달리 므깃도와 하솔 두 철병거성은 북 왕국(여로보암)에 속하게 됩니다. 솔로몬은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이를 아는 순간 두 성의 요새화 작업을 멈추었을 것입니다. 국가안전을 위하여 철병거성은 반드시 필요한 조치이나,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군사력보다 신뢰와 순종입니다. 우리 삶도 같습니다. 세상의 힘과 노력도 있어야 하나, 그보다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신뢰는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셔야만 가능하므로 겸손해야 합니다(마19:26).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16:9)
신명기 8:17절
“당신들이 마음 속으로 ‘이 재물은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모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됩니다.”(새번역)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의 광야 생활을 끝내고 요단 강을 넘기 직전 행한 모세 설교의 한 대목입니다.하나님의 은혜로 획득할 막대한 전리품으로 백성들은 부유해질 것이나, 오해하여 자신들에게 공을 돌릴까 모세는 염려합니다. 키에르케고르(1813-1855)는 신앙 생활은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아, 아차 하는 순간 균형을 잃으면 베이거나 죽는다고 경고합니다. 많은 훈련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인간은 형통하면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실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늘 경외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40년의 광야 훈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하였습니다. 모세는 그 경험과 교훈을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면서(신8:1-18), 다른 신들을 섬기면 반드시 멸망한다는 엄중한 경고를 덧붙입니다(신8:19,20). 당부와 경고도 소용 없이 이스라엘 백성은 목이 곧아 결국 순종을 못 배우고 전 세계에 흩어졌습니다. 모세는 이 운명을 알고 또 한 번 경고한 바 있으니 개탄스럽습니다(신31:27-29). ‘수고한 대로 먹는다’(시128:2)는 말은 축복의 법칙입니다. 노력 없이 획득한 재물과 성공 때문에 분별력을 상실하고 인생을 망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생활은 주님의 도우심을 받는 영적인 삶입니다. 이는 우리의 노력과 능력이 아님을 깨닫고 늘 감사를 겸한 자족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 사랑하면 쉽게 이해되나, 그렇지 못하면 신앙 생활도 자기만족·자아중심의 한 종류가 될 뿐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1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