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9/1 – 5)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여수 애양원(1)
누가복음 10:36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E. 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조선 선교사들이 행한 아름다운 일 중 하나가 한국 나환자 치료의 요람인 애양원의 설립과 헌신입니다. 애양원은 선교사 포사이드(1873-1918)에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09년 포사이드는 선교사 오웬(1967-1909)의 치료를 위해 두 청년의 안내를 받으며 광주로 가던 중 길에 쓰러진 나환자(여자)를 발견합니다. 나환자는 나병이란 강도를 만난 분들입니다. 어느날 자신이 나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면, 그 가정은 슬픔으로 초토화되고, 얼마 후 가정에서 쫓겨납니다. 그리고 구걸하면서 정처 없이 방황하다가 죽습니다. 그 여성 나환자도 같았습니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말에서 내려 나환자를 팔로 안아 말 위에 태우는 과정에서 그녀는 지팡이를 떨어뜨렸습니다. 포사이드는 안내하는 한 청년에게 괜찮다면서 잡아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합니다. 광주로 데려간 그 환자는 얼마 후 죽고 말았지만, 소문을 듣고 나환자들은 광주로 몰려들었습니다. 닥터 포사이드의 선한 행동은 닥터 윌슨 및 여타 선교사들과 최흥종 모두에게 충격을 줍니다. 선교사들은 1911년 환자들을 위한 초가집을 마련했고, 1912년 영국 에딘버러구라협회에서 보내 준 헌금으로 별도 건물을 마련했는데, 이것이 광주나병원의 출발입니다. 닥터 윌슨은 애양원 원장으로 일생 봉직하였고, 지팡이를 잡지 못한 그  청년은 그 일을 계기로 중생하고, 한국 나병환자의 대부가 됩니다 오방 최흥종 목사(1880-1966)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전도서 4:9절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7–8절에서는 가족도 없이 재산만을 쫓는 한 부자의 삶을 통해 인생의 허무를 보여줍니다. 그 허무의 극복은 9–12절에서 제시되는데, ‘협력하는 삶’이며, 9절은 협력의 장점을 강조합니다. 본문에서 ‘두 사람’은 단순히 숫자 ‘둘’을 넘어, 공동체와 협력의 개념을 포함합니다. ‘상’은 히브리어 ‘사카르’에서 유래된 말로, 상급·보상·품삯을 뜻하나, 여기서는 ‘협력을 통한 성공과 열매’를 의미합니다. 인생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문제에 직면합니다.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있지만, 누군가와 함께할 때 더 수월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더 큰 성취감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전도자는 외로움 속에 살아가는 자들, 특히 이웃과의 관계에 무관심한 구두쇠 부자에게 공동체적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대표적인 예는 결혼입니다. 하나님은 결혼 제도를 통해 두 사람이 사랑을 기반으로 가정을 이루게 하신 뒤, 자녀라는 귀한 선물을 주십니다. 이는  부부가 협력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양육하라는 뜻이죠! 따라서, 결혼이란 단순한 제도나 육체의 결합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수단입니다. 전도서의 메시지와 결혼 제도의 본질은 모두 ‘관계’와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웃과 함께 살아갈 때, 우리는 풍성하고 의미있는 삶을 경험하며, 세상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이 교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적용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주님의 뜻을 행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힘을 합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한다면, 주님은 ‘좋은 상’을 주실 것입니다.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잠언 15:22).

전도서 4:10절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본절은 원인 접속사 ‘키’(왜냐하면)로 시작되어, 앞절에서 말한 ‘함께하는 삶의 유익’에 대한 근거를 제시합니다. 본절의 소재는 여정이며, 주제는 단순합니다: “여행 중 넘어지더라도 동반자가 있다면 그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여기서 ‘넘어짐’은 단순히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넘어, 절벽이나 구덩이에 빠지는 심각한 상황을 암시하며, 인생의 고난 전반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확장됩니다. 누구나 살아가며 넘어질 수 있고, 그 순간 곁에 누군가가 없다면 더 큰 낭패를 겪게 됩니다. 본절은 이를 ‘화’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화’는 실패나 외로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세상은 자아 실현과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복이라 말합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세상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 사이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나사로는 병들고 외롭고 가난하게 죽었기에 세상적으로는 실패자처럼 보였지만,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의 가난과 질병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막지 못했습니다. 반면, 세상적 성공을 누렸던 부자는 ‘모세와 선지자’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에 죽어 음부에 떨어졌습니다. 나사로가 병들고 가난하여 도움을 절실히 요청했을 때, 부자는 그에게 선행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행동으로 증명할 수 있는 은혜의 순간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2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아합의 하솔
예레미야 49:33절
“하솔은 큰 뱀의 거처가 되어 영원히 황폐하리니 거기 사는 사람이나 그 가운데에 머물러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리라 하시니라”

솔로몬의 철병거성들 중 하솔은 아합의 시대(BC8세기 중엽)에 확장되었습니다. 특히 하솔 서쪽의 요새는 넓이는 25×21m, 벽의 두께는 2m에 달했고, 거대한 지하 물 저장고를 갖추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비나 물이 부족하여, 물의 확보는 통치자의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그 지하 물저장고는 하솔의 남서쪽에 있으며, 46m 깊이로 암반까지 닿아 있습니다. 갱의 입구는 한 변이 15m의 사각형이며, 총 123개의 석회반죽으로 된 계단이 만들어져 있고, 계단을 내려가면(19m) 비스듬한 경사를 만납니다. 그 경사면 계단을 따라 다시 25m를 내려가면 지하수와 빗물을 모아놓은 저장고가 있습니다. 고대 하솔의 여인들은 물을 길어 항아리에 담아 이고 매일 이 저장고를 오르내렸을 것입니다. 성밖 적들에게 보이지 않는 수자원이었으며 하솔 주민의 생명의 보고였지만,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은 하솔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영적 전쟁의 연속입니다. 이는 성령님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을 만들어 내기 위함이고, 싸움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적 즉 마귀와 그 사자들입니다. 그들은 거짓된 생각을 우리의 머리에 쏘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 무기 및 보호장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 진리와 거룩의 무장 및 믿음의 방패입니다. 주님의 지원을 위해 성령님 안에서 쉬지말고 기도해야죠! 성패는 갈등 속에 숨겨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서(지성), 의와 화평을 만들어 내는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사랑의 의지).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7).

마태복음 5:9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9절의 화평은 복음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구약의 약속된 메시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평을 이루신 사건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화평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힘없이, 그러나 복수를 외치지 않고 의연히 죽어가셨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 15:39)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준비되지 않은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1세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로마와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 파국으로 끝났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인내하며 겸손히 기다리는 자들에게 약속하셨지, 하나님의 손을 억지로 움직여 ‘화평’이라는 자아실현의 목표를 이루려는 자들에게는 아닙니다. ‘화평’이 고귀해도,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단지 자아실현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화평의 모델은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떠난 세상을 다시 당신과 화목케 하시려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값비싼 희생을 치루셨습니다. 갈등 속에서 화평을 만들어 내려면 한 쪽의 희생과 다른 쪽의 인정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세상적 화평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참된 화평은, 마음이 가난하며, 애통하며, 온유하며, 의에 주리며, 긍휼을 베풀며, 마음이 청결한 요소를 다 갖추어야 가능합니다. 그때 우리는 희생을 감내하고 의를 위한 박해로 기꺼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갈등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애쓰며 기도하십시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