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매곡동 양관들(2)
사도행전 1:6절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어린 시절 양관 언덕은 별천지였지요. 울창한 숲에 사철 따라 온갖 꽃이 피어 아름다웠고, 철조망 안쪽의 파란 잔디밭에서 조랑말을 타고 노는 선교사 자녀들의 모습은 깡통 차기를 하는 우리와는 격이 달랐지요. 겨울에 선교사들이 사냥을 하러 나갈 때면 우리도 따라가 토끼와 노루 몰이꾼이 되곤 했지요. 그래도 우월슨 선교사나 인휴 선교사 같은 분은 한국 아이들을 좋아해서 성탄절 같은 날 자기네 아이 친구들을 집으로 초청해 파티를 열어 주고 과자를 나누어 주었어요. 양관에 들어갔다 온 아이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지요.” 김동철 집사의 증언입니다. 양관 동네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순천의 ‘별유천지’(別有天地), 즉 전혀 다른 세계였습니다. 선교사 중에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신 분들도 계셨지만, 권위적이고 열등하게 여긴 분들도 분명 존재하였습니다. 윤치호(1865-1945) 선생이 원산에서 거주할 때,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가 와서 상당기간 머물렀으나 안부를 전하지 않고 떠난 것을 두고 자신을 무시한 처사라고 일기에 적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차별과 울분 그리고 억압의 환경은 교만한 조선민족의 마음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한 결정적 계기 중 하나였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당장 한민족을 일제로부터 구원 하신 것은 아니나(기복신앙),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기도를 들으셨고 미국을 통해 해방시키셨습니다(섭리신앙). 그 하나님의 때가 오기까지 고난을 겪었음을 생각하면 기복신앙과 섭리신앙의 차이를 깨닫게 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전도서 4:4절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앞선 1-3절은 학대를 받으나 위로자가 없다는 사실을 탄식하며, 죽은 자 심지어 출생하지 않아 그런 비극을 목격하지 않은 자를 복되다고 하나, 4-6절은 그 이외의 여러 이유로 마음의 평안을 얻기 힘든 인생의 허무를 토로합니다. 본절은 사람이 부지런히 일하여 좋은 성과를 내거나, 능숙한 재주를 사용하여 일을 맡아 성공 하여도 남들의 부러움과 시기를 받는 현실을 묘사합니다. 열심히 일한 결과가 결국 사람들의 시기와 비방으로 귀결됨으로, 사회적인 성공이 결코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면 열심히 사는 삶 자체 역시 의미 없습니다. 전도자는 이런 부조리를 보고 한숨을 내뱉는데, 우리 민족은 이런 상활을 하도 많이 겪어 “재인박명”이란 단어까지 나왔습니다. 아무리 재주를 가졌다 하더라도, 성공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는데, 그 모든 난관을 극복하여 성공하였다면 당연히 존경과 찬사를 받아야 마땅함에도, 오히려 타인의 시기의 대상이 된다면 학대받는 사람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열심히 일하고 재주를 습득하여 성공하려는 마음 자체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타락상에 직면하여 자신을 보호하려는 기술이 처신술입니다. 중국 한 나라의 개국공신 장량은 유방을 도와 항우를 이기자, 집에 칩거하다가 신선이 되겠다고 도주하였습니다. 만약 재상의 자리를 가졌다면 유방과 신하들의 시기를 받아 멸문지화를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평안히 장수하다가 죽는 것은 축복 중 으뜸으로 솔로몬도 갖지 못하였고, 아브라함과 같은 경건한 자의 축복입니다.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창15:15).
전도서 4:5절
“어리석은 사람은 팔짱을 끼고 앉아서, 제 몸만 축낸다”고 하지만”(새번역)
4절은 수고하며 일해도 그 결과는 무익할 수 있음을 밝혔지만, 이를 오해하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본절은 그러한 극단을 경계합니다. 열심히 일해 성공하여도 행복 대신 시기를 받을 수도 있으나, 게으르게 살면 반드시 파멸합니다. ‘팔장을 끼고’란 말은 ‘일하기 싫어서 팔장을 낀 채 빈둥거리는 모습’입니다. 특히, 원문은 현재형을 사용하여 잠시 동안의 휴식이 아닌 계속적인 게으른 상태를 표현합니다. 잠언은 게으름의 결국은 ‘가난과 궁핍’임을 거듭 밝히나(잠19:15), 본문의 표현은 더욱 매섭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은 가난하고 배고플 뿐 아니라 그들은 결국 “제 몸만 축냅니다.” 게으른 자가 당할 자포자기 결과와 그 파멸의 모습을 선명히 그려주고 있습니다. ‘제 몸만 축낸다’는 표현은, 재물을 증식하지 못하고 다 써버리거나, 가난 때문에 자신의 몸을 종으로 팔아 사는 모습 등에 대한 묘사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란 우둔하고 완고한 자를 지칭하며 상황에 따른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인생의 노력과 성취가 궁극적인 행복이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팔짱만 끼고 앉아 노는 것은 더욱 어리석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달란트 비유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입니다(마25:24-30). 그는 실패와 이에 따른 질책을 두려워 하여 받은 한 달란트를 묻어 두고 주인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그 결국은 엄한 심판입니다. 신앙과 일의 윤리가 합치된 교훈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바깥 사람을 대하여 품위 있게 살아가야 하고, 또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살전4:12, 새번역).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하솔 임금 야빈의 궁전
사사기 4:2절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하솔 임금 야빈의 궁전 전체는 다 발굴되지 않았지만 궁전의 동쪽 입구 길이는 39m, 현존 벽의 높이는 2.4m가 넘는 것으로 보아 궁전의 크기가 그려집니다. 왕좌가 있었던 중앙 홀의 바닥은 레바논의 백향목이 깔려 있었고 진흙으로 쌓은 벽들은 현무암을 널빤지처럼 깎은 판석들로 입혀졌습니다. 궁전 안에서는 상아 유물, 청동 칼들, 보석을 비롯해 왕 혹은 신의 모습을 표현한 청동상도 출토되었습니다. 발견된 문서 중에는 ‘눈에는 눈’이란 함무라비 법전의 규정도 있습니다. 또한, ‘입니 아디(Ibni Addi)’라 기록된 왕의 이름도 발견되었는데, 입니는 야빈과 어원이 같습니다. 학자들은 ‘입니’를 여호수아와 전쟁을 치른 하솔 왕 야빈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문제는 사사기 4∼5장에서도 바락과 싸운 장군 시스라가 섬겼던 하솔 왕의 이름도 야빈압니다. 고고학자들은 가나안 정복 전쟁 중 동시대에 일어난 일을 각각 다른 주인공의 시점에서 바라본 하나의 전쟁으로 추측하나, 가나안 정복 전쟁은 사사 시대 전(주전 14세기경)이었고, 드보라는 사사 중 한 명이므로 옳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 하솔왕 야빈을 세상 세력의 모형이라 본다면, 한 번의 전쟁에서 이겼다고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통치하는 신약시대는 연이은 영적 전쟁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영적 전쟁에서 그리스도인의 무기는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행하는 것”이고, 목적은 “모든 일에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입니다(엡4:15).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의 생활을 늘 살피십시오. 어리석은 자처럼 살지 말고, 지혜롭게 행동하십시오.”(엡5:15,쉬운성경)
잠언 3:18절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솔로몬의 일대기는 사람의 심리를 꿰뚫는 지혜, 중계무역으로 엄청난 부의 획득, 백과사전적 지식 등을 증언합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에,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잠언4:7)고 강력히 권고합니다. 어떻게 지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배우려는 열정과 교육”입니다. ‘농업의 힘’이라는 책을 저술한 박현출 작가(1956)는 농림수산부 국장과 농촌진흥청장을 지낸 전직 공무원입니다. 이분이 이디오피아를 갔을 때, 그들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예전에 한국은 이디오피아 보다 가난하였는데, 지금은 쳐다보기도 어려울 정도로(이디오피아 국민소득은 일인당 900불이 안됨) 발전하였다. 그 비결이 무엇이냐?” 박현출 씨는 “우리도 과거에는 너희들과 같이 80%가 농민이었지만, 우리 부모세대가 논밭 팔아서 자식들 공부를 시켰다. 그 교육의 힘이 오늘 너희와 우리의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다.” 명치유신 이후 백년 동안 일본의 발전에 가장 효율적 투자는 교육 분야임이 밝혀진 것도 좋은 증거입니다. 그러나, 지식은 교만하게 만들고 교만하면 패망이 옵니다. 하나님 경외하기를 멈춘 솔로몬이나 제국주의에 치달은 일본의 결국이 그렇습니다. 생명에 이르는 지혜의 첫 걸음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배우는 것입니다. 세상 지혜와 지식은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누구나 얻지만, 생명에 이르는 지혜와 지식은 오직 주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여기 인간 노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교만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인 계명을 행하게 하여 달라는 기도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