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6/6/8-12)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이거두리
마태복음 9:13절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본절은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마태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바리새인들이 보고 비난하자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이 예수께 잡힌 거두리 이보한은 무엇보다 전도인이었습니다. 그의 전도는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방향을 돌리라고 촉구하는 절박한 외침이었습니다. 그가 지긋지긋한 양반의 권위와 체통에서 벗어나 우월감과 교만, 거짓과 위선, 음모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자신을 자유케 한 복음의 평화와 기쁨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웃들에게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전도인만은 아니며, 조선을 사랑한 애국자였습니다. 전주 3‧13 만세 시위 때 걸인들을 이끌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그들의 긍지와 애국심을 일깨웠고 여러 차례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부자들과 기생들에게서 모은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상해 임시정부에 자주 보냈습니다. 한 번에 2만 원을 전달하였는데, 당시 쌀 한 말이 70~80전, 하루 품삯이 1원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그의 노고를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양반 신분을 내려놓고 전도를 본업으로 삼으며 걸인과 빈민의 친구가 되었고, 비밀리에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살아온 그는 1931년 완산동에서 별세하였습니다. 그의 장례에는 전라도의 걸인들이 모여 ‘걸인장’을 치렀는데, 상업은행을 창설한 전주 부자 박영철의 부친상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모였다고 전해집니다. 시간이 흘러도 거두리의 이름은 남아 있으나, 박영철과 그가 세운 상업은행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전도서 8:3절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본절은 왕 앞에서의 처신을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권력의 본질을 꿰뚫고 그에 따라 바른 처신을 합니다. 왕이란 원하는 바를 행하는 권력자입니다. 만약 왕의 결정이 내려졌다면, 그 결정은 집행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왕의 분노를 자극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본절이 경고하는 “악한 일”은 반역이나 음모가 아니라, 왕 앞에서 무리하게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이는 “나쁜 제안”에 가깝습니다. 이미 거절된 의견을 계속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지혜는 현실을 정확히 읽고, 때를 분별하며,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게 합니다. 우리 역시 직장, 가정, 혹은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생각을 밀어붙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고집과 논쟁으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물러나는 것이 더 큰 지혜이며, 관계를 지키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 전도자는 “왕 앞에서 서둘러 떠나지 말라”고 권면하나, 잠언은 왕이 분노할 때는 피하라고 조언합니다(잠언16:14). 상황에 따라 다른 처신이 필요합니다. 이는 비굴함이 아니라, 권위를 가진 자를 존중하며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겸손입니다. 에스더가 그 모범입니다. 그녀는 즉시 왕 앞에 나아가지 않고 금식하며 때를 기다렸습니다. 왕의 마음이 열릴 때를 분별했고, 지혜로운 접근으로 민족을 구했습니다. 농부가 파종과 추수의 때를 분별하며 기다리듯이, 지혜자는 적절한 상황의 도래를 기다립니다. 그는 말하고 침묵할 때,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알고 있어 마침내 의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잠언25:11).

전도서 8:4절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2-3절에서 전도자는 왕의 명령에 순복하고, 왕이 분노할 때는 조심히 처신할 것을 권면한 뒤, 본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왕의 말은 절대적이며, 그의 결정 앞에서 감히 따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전도자 시대의 왕권은 절대적입니다. 따라서, 첫째, 왕에게 책임을 물을 자가 없습니다. 이런 왕에게 맞서거나 고집을 부리는 것은 화를 부르는 “악한 일”이므로, 권력의 현실을 분별해야 합니다. 둘째, 욥은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욥 9:12)고 말합니다. 전도자는 이 표현을 인간 왕에게 적용하여, 권력 앞에서 지혜롭게 처신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는 절대적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왕도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는 존재임을 가르칩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왕궁 지붕에서 교만한 말을 하던 중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7년 동안 짐승처럼 살았던 사건이 그 예입니다(단 4장). 또한 잠언은 “왕의 마음은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신다”(잠 21:1)고 선언합니다. 전도서는 “현실의 권력”을 말하고, 잠언은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나, 지혜자는 이 둘을 모두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현실을 무시하지 않되, 권력의 최종 심판자가 하나님이심을 또한 잊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권력과 권위 앞에서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모하게 맞서는 것도, 비굴하게 굴복하는 것도 지혜가 아닙니다. 때를 알고, 말을 삼가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처신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언19:21).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므깃도(3)
열왕기상 9:15절
“솔로몬 왕이 역군을 일으킨 까닭은 이러하니 여호와의 성전과 자기 왕궁과 밀로와 예루살렘 성과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을 건축하려 하였음이라”

므깃도는 지중해 연안에서 동쪽 내륙으로 이어지는 와디 아라 길과 남쪽 이집트에서 북쪽 시리아·메소포타미아로 향하는 ‘바닷길’이 교차하는 지정학적 요충지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다윗 왕국을 계승한 후 예루살렘과 함께 하솔, 게셀, 그리고 므깃도를 요새화하였으며, 오늘 본문은 그가 이곳에 성을 건축했다고 기록합니다. 고고학자들은 솔로몬 시대의 병거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후대 건축물들이 겹겹이 쌓여 있어 명확한 윤곽을 밝히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합 시대의 므깃도는 확실히 요새화되었고, 그의 건축물 상당 부분이 솔로몬 시대의 구조와 중첩된다는 사실이 밝혀져 이스라엘 왕국 시대의 행정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아합 시대의 므깃도에 들어서면 거대한 돌을 다듬어 쌓은 성문을 지나게 되는데, 이 성문은 양쪽에 두 개씩의 방이 있는 ‘4방 성문’ 구조로 병거가 통과할 만큼 넓게 설계되었습니다. 또한 이중문과 청동 장식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함락된 이후에는 성문이 양쪽에 방 하나씩만 있는 ‘2방 성문’으로 개조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발굴은 므깃도가 고대 전쟁과 왕국 행정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이처럼 므깃도는 솔로몬과 아합이 요새화한 강력한 군사 도시였고, 거대한 성문과 병거성으로 고대 근동에서 손꼽히는 요새였지만, 앗수르에 무너졌습니다(BC722).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도움이시요 피난처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시편118:6).

믿음과 느헤미야(1)
느헤미야 1:11절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수년 전 갑자기 한 지인의 소천하셨다는 부고를 받고 세브란스 장례식장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80 후반의 권사님으로 혈압이 0으로 떨어졌으나 목사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자 다시 소생하여 기도를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기적과도 같은 이 체험은 유족들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주었지만, 그분들의 삶에 큰 변화는 주지 못했습니다. 사실 죽었다고 우리가 판단할 때도, 귀는 살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망자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여야 합니다. 다 듣고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장례식 후에는 망자에 대한 평가만이 남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난 그 권사님 사건이 남기는 큰 교훈은, 우리 각자도 결국 죽게 되며, 그 후에는 영원한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히9:27). 따라서, 주님의 속죄에 대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우리의 현실 또한 쉽지 않습니다.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 갈 것입니까? 먼저, 부활하신 주님이 만유를 통치하시며, 우리의 보호자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이는 성경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돌보신 실제 역사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전제된다면, 이 세상은 살만 합니다. 어려워도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을 돌보고자 한 술관원 느헤미야 역시 그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며 큰 응답을 받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