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5/5-9)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천 선교부
사도행전 10:36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을 보내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새번역)

순천은 연산군 시절(1500년) 유배된 김굉필(1454~1504)에 의해 성리학적 심신 수양을 중심으로 한 도학 사상이 뿌리내리며 ‘호남 사림’의 근원이 됩니다. 옥천서원 등 많은 서원이 설립된 것은 그 영향입니다. 불교 세력 또한 강하여, 백제 시대(514년)에 창건된 송광사는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승보 사찰이며, 태고종의 본산인 선암사도 자리잡고 있어서, 순천의 기독교 선교는 쉽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외곽 지역에 먼저 전파되어 여러 곳에 교회들이 세워졌고, 교인의 주류는 양반 선비가 아닌 가난한 농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신앙 열정은 매우 뜨거웠습니다. 순천 읍내에는 1906년경 최초의 교회가 설립되나, 남장로교에 의한 본격적인 선교는 오웬, 프레스톤, 코잇 선교사에 의해 시작됩니다(1909). 이들은 부임 직후 순천 지역을 둘러보았습니다. 순천은 이미 96개 교회가 설립되어 있었고, 세례 지원자가 7,367명, 주일 예배 참석자는 6,374명에 달하였습니다. 이에 남장로회 선교회에 순천 선교부 개설을 강력히 요청하여, 선교부가 설립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에도 이성과 상식은 중요합니다. 유교와 불교를 공격하여 신자를 얻는 것이 교회의 확장이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순종입니다. 순종은 삶 가운데 말씀의 실천으로 나타나며, 이 과정에서 성령님의 능력은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효과적인 복음 전도는 우리의 기도를 절실히 요청합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6:19).

전도서3:4절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4절은 인간의 모든 감정을 두 쌍의 대조되는 감정으로 묘사합니다: ‘울음과 슬픔’(부정적 측면), ‘웃음과 춤’(긍정적 측면)입니다. “울고 웃는다”는 개인의 슬픔과 기쁨의 감정을, ‘슬퍼하고 춤춘다’는 장례식이나 결혼식 등 공적인 감정에 대한 표현입니다. 특히, ‘슬퍼할 때’로 번역된 히브리어 ‘쎄포드’는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가슴을 친다’는 의미로서, 지인의 죽음 앞에서, 또는 인생의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표출하는 생생한 슬픔의 감정을 형상화한 말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하여 감정적 반응을 갖습니다: 좋다, 싫다, 평범하다 등. 그 감정이 증폭되면 울거나 웃게 되고, 공적인 자리에서는 애도(슬픔)와 춤으로 나타는데, 전도자는 그 감정을 유발하는 각각의 상황도 하나님의 섭리하에 있음을 교훈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그냥 울고 웃고 슬퍼하고 춤추면 안 됩니다. 그 배후에 서 계신 주님을 바라볼 줄 아는 믿음, 인내 그리고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욥의 신앙의 정수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이 죽을 병에 들자, 예수께 엎드려 살려달라고 간구합니다. 그 간절하심을 보신 주님은 일어나 그의 집에 들어가셔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아람어로 ‘달리다굼’(=귀여운 소녀야 일어나거라)이라 하시자, 죽었던 소녀가 일어납니다. 심히 울고 애통하던 모든 자들의 감정은 경이감과 함께 웃고 춤추는 감정으로 변했으나, 야이로의 딸은 수 십년 후 또 죽었습니다. 이는 죽은 자를 살려 영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막1:1).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전도서3:5절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인간의 희로애락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룬 4절에 이어, 본절은 ‘돌을 모으고 흩으며, 안거나 안아주지 않는 일’의 배후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언급합니다. 전단은 돌을 던지거나 모으는 목적이, 후단은 안거나 안아주지 않는 대상이 제시되지 않아 해석의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돌과 관련한 해석입니다: (1)돌을 건물의 재료로 보아 건축 재료를 모으거나 제거하는 행위라는 주장(왕상3:19,25). (2)돌을 밭의 방해물로 보아 돌을 모으거나 던짐으로 밭을 비옥하게 하거나 황폐하게 하는 행위라는 주장(사5:2). (3) 돌을 보석으로 보아 부를 축적하거나 분배하는 행위라는 주장(출25:7). 위 세 가지는 모두 성경적 근거와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므로, 함께 고려하면 될 것입니다. 후단의 경우, 이성에 대한 애정 표현으로 해석한다면, ‘안을 때’는 사랑할 때, ‘안는 일을 멀리할 때’는 사랑이 식었을 때란 의미가 되어, 애정 관계와 같이 매우 개인적인 부분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하에 있음을 말합니다. 사실, 사람의 마음은 주님의 손 안에 있고,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임의로 주관하십니다. 따라서, 주님만 두려워 하여야만 합니다. 페르샤 왕궁의 술관원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훼파 소식에 먼저 민족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왕의 허락을 받아 유다 총독으로 부임하여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도록 간구합니다. 넉달이 지나 아닥사스다 왕 앞에서 술 잔을 올릴 때, 주님은 왕의 마음을 움직여서 유다 총독의 직을 받게 하신 것이 좋은 예입니다. “여호와께서 왕의 마음을 다스리시며 그 생각의 방향을 도랑물처럼 마음대로 바꾸신다.”(잠언21:1,현대인의성경)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에돔의 신: 코스
역대하 25:14절
“아마샤가 에돔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

유다 왕 아마샤(796-767 BC)는 에돔을 쳐서 그 신들을 가져와 경배하나, 복은커녕 선지자의 심판을 받습니다. 이 에돔 신은 ‘코스’로 추정됩니다. 앗수르의 에돔 조공 기록에 따르면, 디글랏빌레셀(745-727 BC)과 산헤립(705-681 BC)의 시대에는 에돔 왕의 이름이 ‘코스 신은 왕’이라는 뜻의 ‘코스말락’이었고, 에살하돈(680-669 BC) 시대에는 ‘코스는 위대함’이라는 뜻의 ‘코스가바르’가 왕이었습니다. 에돔 지역의 호르밧 키트밋 유적지에서 발견된 인장 주인의 이름은 ‘슈브나코스’로 역시 ‘코스’ 신이 등장합니다. 가나안 지역은 자신의 신을 이름에 넣어 짓곤 하였기에 ‘코스’는 에돔 신들 중 하나이나 그 우상의 모습은 밝혀진 바 없습니다. 다만, 신약 시대 에돔 지역 거주인 나바테안 사람들의 신 ‘두슈라’(= 산의 신)와 유사한 역할, 즉 ‘산신령’으로 보입니다. 셔우드 홀의  「조선회상」에 따르면, 조선은 무당의 지배하에 있었고, 서양의학의 진출은 그들의 고객을 빼았아 갔기 때문에, 의료사고가 발생한다면 큰 공격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의사의 치료(수술)는 매우 조심스러웠습니다. 조선의 공포의 병은 폐병으로, 미신과 무당의 굿이 치유할 수 없었지만, 과학지식으로 무장한 서양의학은 정복했습니다. 복음이 의학과 함께 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치료 자체는 주님의 능력이므로 병, 특히 중병의 경우 반드시 교회에 알려 함께 기도해야만 합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5:14).

복음과 역사
사도행전 17:31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일전에 한국사 통서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자는 유명한 한국사 태두이나 그의 결론은 “평생 역사를 연구하였으나 역사의 주체나 방향, 목적도 잘 모르겠다”입니다. 그 학자 뿐 아니라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는 세속사가들은 “도대체 역사란 무엇이며, 그 역사를 움직여 가는 주체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늘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공부할수록 오리무중입니다. 이는 많은 우연과 필연이 결합되어 사건이 만들어지고 해결되지만, 그 인과관계나 일반법칙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면, “세상이란 무엇일까요?” 성경만이 바른 답을 줍니다. 성경은 “세상이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창조하셨으나, 인간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심판하에 있는 곳이다”고 단언합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습니다. 재판장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만, 주님의 죽으심은 그분을 영접한 모든 자의 죄를 대속하시려는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무궁한 긍휼과 사랑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고, 방향은 심판 날로 곧장 직행하고, 목적은 모든 불순종하는 것들(불법, 사망, 병, 마귀, 악인 등)을 바로잡아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것으로, 인간의 구원과 부활은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