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누가복음 12:33절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많이 변했지요. 그 많던 선교부 땅도 다 넘어가고 집도 대부분 헐렸고. 이젠 흔적만 남았어요”(송기철). 이 말처럼, 화산동 선교부의 모습은 크게 변했습니다. 일제가 사립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이를 거부하고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를 폐교했고(1939. 9), 예수병원에 가미다나 설치를 강요하자 역시 문을 닫고 전주를 떠남으로, 예수에 대한 믿음의 정절을 지켰습니다. 일제는 선교부의 땅과 건물 일체를 몰수했으나, 해방 후 선교부는 돌아와 땅을 되찾았습니다. 비록 6.25 전쟁 중에는 공산군과 국군이 번갈아 점령하면서 시설이 많이 파괴되었지만, 휴전 후, 신흥과 기전이 안정을 되찾았고 예수병원과 성경학원도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1970년대가 들어서자, 남장로회는 “한국 교회는 이제 충분히 자립할 역량이 있다”고 판단하여, 화산동의 방대한 부지를 학교, 병원, 노회 등을 통해 한국 교회와 사회에 이양하고 1980년대까지는 모두 철수하여 100년의 선교를 마무리 하였습니다. 또한 선교부가 세운 병원과 학교의 설립 이념(의료 선교, 기독교 교육)을 한국 교회가 계승토록 하였습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남장로회는 병들고 가난한 한국 민족을 구제하고 섬김으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지혜를 보여주었고, 화산동의 모든 것을 한국 교회에 내어줌으로써 신앙 유산 전수의 참된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창18:19a,새번역).
전도서 7:10절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
본문은 힘든 현실 앞에서 “그때가 좋았지”라고 말하는 태도의 어리석음을 지적합니다. ‘지혜가 아니다’라는 표현은 어리석음을 에두르는 말로 3천 년 전에도 과거의 감상에 젖어 살았던 사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가나안을 향해 전진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은 잊고, 고기와 생선, 파와 마늘, 부추, 오이, 수박을 먹던 기억만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양식인 만나를 매일 아침 기적으로 내려주셨지만, 그 은혜에는 감사하지 않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주셨으나 그들의 영혼을 파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탐욕을 부린 무리들을 큰 재앙으로 심판하사 죽이셨으니, 그곳의 이름이 ‘기브롯 핫다아와(탐욕의 무덤들)로 불리운 이유입니다(민 11장). 전도자는 말합니다. 모든 일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함께 존재한다고(전 7:14). 그럼에도 현재는 어둡고 과거는 모두 좋았다고 여기는 관점은 하나님의 섭리를 보지 못한 채 그분을 불신하고 불평하는 태도입니다. 더구나 우리의 기억은 선택적입니다. “옛날이 더 좋았다”는 말은 대개 정확한 평가가 아니라 감정의 반응일 뿐입니다. 지혜는 감정이 아니라 진실을 보게 하는 능력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과거를 기준으로 현재를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이 오늘 주신 현실 속에서 길을 찾습니다. 이때 예수의 제자들은 믿음의 훈련을 통해 주님의 뜻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입니다(마 5:13).“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5:5).
전도서 7:11절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이 되도다”
전도자는 지혜를 물질적 재산에 비유하며, 그것이 인생을 지탱하는 든든한 기반임을 말합니다. 당시 유산은 단순한 상속재산이 아니라 가문을 지키고 삶을 안정시키는 생존의 토대였습니다. 전도자는 이 이미지를 통해, 지혜가 삶을 살아가는 데 얼마나 실제적이며 우리를 보호하는 힘이 되는지를 강조합니다. 본문이 위치한 문맥입니다. 먼저, 7–10절은 지혜 없는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분노에 쉽게 흔들리고, 과거를 미화하며 현재를 부정하는 태도는 지혜가 아닙니다. 그리고 7:11–12절은 지혜의 필요성을 설명합니다. 지혜는 유산처럼 안정적이며, 그늘처럼 보호를 주고, 무엇보다 생명을 지킵니다. 지혜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현실을 해석하여 견디게 하고, 해결책도 주기 때문입니다. 7:13–14절은 지혜의 실제적 적용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사람이 곧게 할 수 없으므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지혜는 인생의 밝은 날과 어두운 날 모두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보게 하는 눈입니다. 본절은 지혜가 물질적 유산과 같이 아름답다고 하나, 실제에서는 유산보다 더 귀한 자산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하는 보호막입니다(12절). 무엇보다 지혜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하나님께 재물이나 장수가 아니라 재판하는 지혜인 ‘듣는 마음’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왕궁으로 돌아온 솔로몬은 친자 분별 재판을 지혜롭게 판결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갖고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야 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벧산/ 벧 스안
마가복음5:20절
“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벧산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여러 번 무대에 등장한 도시지만, 헬라 시대에 이르러 그 이름은 사라지고 스키토볼리가 되었고 예수님 당시에도 그렇게 불렸습니다. 스키토볼리란 이란을 근원지로 하여 용병 생활을 했던 스키티아인들의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벧산에 스키티아 출신 용병들이 정착하면서 도시의 성격은 점점 헬라 문화 중심지로 변했고, 데가볼리의 핵심 도시로 자리 잡았습니다. 극장, 신전, 체육장 등 화려한 헬라 문명이 이곳을 채웠고, 스키토볼리는 세계사 속에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함 뒤에는 유대 신앙과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헬라 문화의 압박 속에서 유대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저항했고, 마카비 시대에는 이 도시가 반헬라 운동의 격전지가 되었습니다. 대제사장 요나단이 이곳에서 전사했고, 결국 유대인들은 도시를 불태우며 헬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스키토볼리의 역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세상은 언제나 화려한 문화와 매력적인 가치로 우리를 끌어당기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그 속에서도 정체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편리함과 풍요로움이 신앙을 대체하려 할 때,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유대인들이 헬라 문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려 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세상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진정한 승리는 세상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선택하는 데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빌립보서 4: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불천노불이과’(不遷怒 不貳過)란 ‘노를 옮기지 않고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공자가애왕에게 답하면서 안연을 회상한 말입니다. 안연은 공자를 배우기 좋아한 천재로서 그 명석함은 자공을 능가하였습니다. 그는 대나무 밥과 석회석이 많은 물을 먹으며 누추한 거리에서 살았습니다(단표누항). 그러나 벼슬도 마다하고 배워 실천하기를 좋아하였으니 안빈낙도(安貧樂道)의 모범입니다. 그가 실천한 공자의 사상은 ‘인’(仁, 어질다)입니다. 안연이 ‘어짐이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공자는 ‘극기복례’와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라’는 실천지침을 주었고, 그는 행함을 다짐하였습니다. 공자는 평범하게 생각했다가 그의 행함을 보고 놀랍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모범이 있고, 주님을 배운 바울의 삶이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권능을 행하였지만 풍부와 궁핍의 모든 상황에서도 자족하는 비밀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내게 능력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고 고백합니다. 풍부할 때는 교만하지 않도록, 궁핍하고 박해를 받을 때는 낙망하지 않도록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은혜를 경험한 것이죠! 이것이 안연과 결정적 차이입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이 만유의 통치자이심을 깨닫는 과정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경건과 사랑으로 이끌어 갈 때, 성령님은 각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 행하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공자의 형상이 아니라 주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니, 실로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