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야고보서 3:17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들 간에 화평이 이룩되었다”는 것이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복음은 생명력이 있어 말에 머물지 않고 선한 행동으로 자라나는데, 전주의 교육과 의료 사역은 화평의 복음이 그 땅에서 어떻게 구체적 현실이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선교사들은 1900년에 정부 요청으로 화산리(현, 중화산동) 서원고개 일대로 이전합니다. 이곳은 일찍이 향교(1441년), 화산서원(1624년) 회현당(1700년) 등이 설립되어 양반 자제를 가르쳤고, 황학대, 다가정, 청양정, 군자정 같은 정각들에서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습니다. 그러나 대원군과 동학혁명을 거치면서 서원과 누각들은 파괴되었고 양반 문화는 쇠퇴하고 있던 중 선교사들은 새로운 기독교 문화를 갖고 들어 왔습니다. 1897년 화산리 언덕 땅 3천여 평을 구입했으니 지금 예수병원 건너편 주차장과 선교사 묘지 동산 일대입니다. 1900년에 약 1만 평의 땅을 양도 받았으니, 지금 예수병원 간호전문대학과 신일아파트 자리입니다. 1905년 경 2만 5천 평을 구입했으니 지금 예수병원과 신흥 및 기전여학교 자리이며, 1910-11년에도 산 8만여 평을 마련했으니 구 예수병원 자리입니다. 그 후에도 계속 땅을 넓혀 1924년 당시 화산동 선교부는 전주천을 끼고 병풍처럼 둘러싼 14만여 평을 확보하고, 교육·의료·전도 사업을 확대시켜 나갔습니다. 다음 주에 보겠지만, 이 같은 선교 사업에 소요되는 막대한 재정은 주로 미국의 성도들이 기부하였습니다. 한국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이미 120년 전에 보여준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6:18).
전도서 7:2절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1절은 일시적인 부귀영화보다 지속적인 명예의 소중함을 말하고, 2-4절은 일시적 즐거움보다, 마지막 운명인 죽음을 기억함으로 지혜를 얻으라고 교훈합니다. 본절은 ‘초상집에 간다’는 표현을 통해 죽음의 현실을 마음에 둘 때 비로소 지혜가 생김을 강조합니다. 잔칫집의 즐거움은 잠시지만, 초상집은 인간의 끝을 보게 하여 마음을 깨우칩니다. 죽음을 성찰하는 사람은 삶을 바르게 세우지만, 죽음을 잊은 사람은 쉽게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갈멜의 부자 나발이 그 예입니다. 그는 마치 잔칫집에 사는 사람처럼 먹고 마시며 자신의 성공과 부요함에 취해 있었습니다. 죽음을 마음에 두지 않았기에 자신을 도와준 다윗의 선행을 멸시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중재가 아니었다면 그는 다윗의 칼에 죽었을 것입니다. 이튿날 술에 깨어난 나발은 충격을 받아 열흘 만에 죽습니다. 나발의 죽음은 전도서가 말하는 교훈 그대입니다. 죽음을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은 지혜를 잃고, 지혜를 잃은 삶은 결국 파멸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죽음 자체보다 그 너머의 마지막 심판을 기억하며 살아갑니다. 죽음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미 해결되었습니다. 다만, 부활의 생명이 사망을 삼키는 그 날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 날 우리는 우리 일생을 주님 앞에서 결산해야 합니다(마25:14-30). 죽음을 성찰하는 사람은 삶이 겸손해지고, 마지막 심판을 마음에 둔 사람은 오늘의 삶을 주님의 뜻에 맞추어 살게 됩니다. 그 의는 마지막 날 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전도서 7:3절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본절은 “슬픔이 웃음보다 사람을 더 성숙하게 만든다”고 교훈합니다. ‘슬픔’은 ‘카아쓰’의 번역으로, 임신하지 못한 한나의 고통스러운 심경(삼상1:6), 다투는 배우자에 대한 근심(잠21:19) 등에 사용되어 고통에 대한 비참한 심경을 표현합니다. 초상집에서 죽음을 목격하고 인생의 유한함에서 느끼는 숙연함과 겸손함이 배어 있습니다. ‘웃음’은 세상이 주는 일시적 기쁨입니다. 전도자는 인생을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 슬픔이, 세상적이고 허탄한 웃음보다 낫다고 선언합니다. 지혜 문학의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고난은 사람의 내면을 정화하고 지혜를 갖게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세 번째 산에서 살아 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슬픔은 지혜를 얻는 수단 이상입니다. 슬픔은 하나님의 축복의 문으로, 이를 통해 우리의 믿음은 새롭게 빚어집니다. 한나가 좋은 예입니다. 아이가 없는 한나는 온 가족과 함께 실로의 성소로 매년제를 드리러 올라갔습니다. 대적 브닌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는 한나를 질투하여 심한 모욕의 말을 쏟아냈습니다. 남편 엘가나의 위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슬픔에 잠긴 한나는 모든 것이 가능한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서원합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신 뒤 사무엘을 낳게 하십니다. 한나는 5년 뒤 사무엘을 드려서 서원을 이행하였고, 하나님은 다섯 자녀를 더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은사를 주심으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고 한나의 가문은 크게 빛났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은 슬픔을 재료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거라사(3)
마가복음 5: 21절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건너편 거라사에 도착하여 군대 귀신들린 한 남자를 고치셨으나, 돼지 떼 2천 마리가 몰사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주민들은 예수님 일행이 떠날 것을 요청하였고 주님은 다시 갈릴리 지역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요르단의 제라쉬는 바로 그 ‘거라사’로 알려져 왔습니다. 제라쉬는 중동에서 가장 잘 보존된 로마 도시입니다. 1806년 제첸이 발굴을 시작하자 이미 주전 3200~1200년에 주거지가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주전 63년 로마의 정복 후에, 데가볼리 연합도시의 하나로 편입되었고, 주후 90년에는 로마의 아라비아 속주에 포함됩니다. 제라쉬는 ‘중동의 폼페이’라 불릴 만큼 보존 상태가 뛰어나며, 예수님 당시에는 상당히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는 방문하여 개선문을 세웠고, 아르테미스 신전도 이 즈음 건축되었습니다. 또한, 말경기장(1만 명)과 극장(3천석)을 갖추었으며, 인구는 2만~2만5000명 정도로 면적 80만㎡ 규모의 번영한 도시였습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거주하였으며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13개의 교회까지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침략 이후(AD 614) 쇠퇴했고, 주후 749년 지진으로 완전히 몰락했습니다. 지금은 유구한 역사와 현대적인 삶이 공존하는 도시로서, 관광 산업이 주된 경제 활동입니다. 도시의 형태와 경제 구조 및 통치하는 국가는 시대에 따라 바뀌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제라쉬의 역사는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치 않는 것을 붙드는 지혜를 갖게 합니다.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빌립보서 4:6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립보서 4:4-7절에서 바울은 3가지를 당부합니다. 첫째, 기뻐하고 기뻐하라(4), 둘째, 관용을 베풀어라(5), 셋째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아라(6). 그리고 염려의 해답은 하나님의 평강입니다(7). 본절은 염려를 다룹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마 6:25-34)에서 염려의 가장 흔한 원인들을 언급하셨습니다. 그것들은 신체를 의미하는 키(27), 옷(28), 음식과 음료(31), 그리고 미래(34)입니다. 복잡한 현대생활에서도 같음을 볼 때 해 아래 새것은 없습니다. 염려의 치료제는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입니다. 한나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 근심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본절은 기도를 묘사하는 세 단어를 말하는데, 실로 성도의 특권입니다: 기도, 간구, 구함. ‘기도’는 헬라어 ‘프로수케’의 번역이며, 가장 넓은 의미의 기도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다’는 뜻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간구’는 ‘데에시스’의 번역이며 특정한 필요 때문에 드리는 간절한 요청입니다- ‘하나님, 이것이 꼭 필요합니다!” ‘구함’은 ‘아이테마’의 번역으로, 구체적인 요청 목록입니다. 사도는 단순히 “기도하라”라고 하지 않고 ‘기도-간구-구함’이란 세 단어를 나란히 배치해 기도의 다양한 모습을 묘사하면서, 기도를 통해 염려가 치유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다만, 그 기도는 ‘감사의 태도’를 갖고 드려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문제가 일어날 수 없고, 하나님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또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받은 줄 믿고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