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3)
창세기 12: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자익 목사의 며느리의 계속된 말입니다. “..긍께 머슴살이 한거지유 뭐. 근데 본시 영민하신 분이라 주인 집 아들들이 한문 공부하는 것을 밖에서 듣고는 천자문을 외우셨대유. 쓸질은 모르셨구유. 스무살이 넘어설랑 같은 동네 살던 김씨 집안에서 보니깐 성실하니 일을 잘허니께 사위를 삼았는디 독립허라구 논 닷마지기까지 받았다 이말이유. 그리구선 언젠가 서양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되앗는디 조덕삼 씨 하구 한 날 한 시에 세례 받고 교회를 시작하셨대유. 인자 선교사 조사가 되어선 외지로 전도하러 다니셨는디 어느 핸가 살림 밑천으로 받은 논 닷마지기를 팔아선 소식두 없이 사라지셨대유. 처갓집에선 배은망덕한 놈이라구 욕도 많이 했대유. 인자 육개월만에 집으로 왔는디 상투를 싹둑 자르고 양복을 해 입구 딴 사람이 되서 나타났시유. 긍께 그 사이에 평양 신학교에 들어갔다 이말이유. 장인은 비록 예수를 안 믿었지만 신사가 되서 돌아온 사위를 보고는 생각을 바꿨대유.” 시아버지의 이야기는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는” 아브라함과 다를 바 없습니다. 가난이 싫어 고향을 떠난 10대 고아 소년에게 금산은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자익이 인정받은 것은 성실과 그에 터잡은 실력입니다. 마치 요셉과 같습니다. 종으로 팔렸을 때나,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나, 바로의 총리가 되었을 때나 요셉은 성실하였고 그 동안 연마한 실력을 발휘합니다. 성실과 실력은 하나님이 높이시는 길로서, 우리가 갖추고 있어야 할 덕목입니다.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그는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언22:29)
전도서 9: 8절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본절은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삶을 기쁨으로 준비하라는 명령입니다. 전도자는 허무 속에서 쾌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아는 자가 하나님이 주신 오늘을 축제처럼 살아가라는 신앙적 명령을 내립니다. 흰 옷은 고대에서 축제와 기쁨의 상징이었고, 머리에 바르는 기름은 환대와 풍성함의 상징이었습니다. 전도자의 말씀 대로 덧없는 삶 속에서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쁨을 적극적으로 누려야 합니다. 신약은 이 기쁨을 더 확장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임을 말합니다. 희락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닙니다. 의가 세워지고, 평강이 자리 잡을 때 성령께서 주시는 종말론적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상황을 넘어서는 기쁨이며,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기쁨입니다. 메시야가 오실 때 모든 사람은 이 희락을 누리게 됩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은 바로 이 종말론적 기쁨의 상징입니다. 잔치의 기쁨이 끊어지려는 순간, 예수님은 더 좋은 포도주를 주심으로 메시야의 시대에 임한 새롭고 넘치는 종말론적 기쁨을 드러내셨습니다. 확실히 신약의 기쁨은 전도자의 명령과 차원이 다릅니다. 전도자는 허무 속에서 기쁨을 찾으라 했지만, 주님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영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허무 자체가 없습니다. 소망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이 영생의 보증이십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의 가정은 바울의 전도로 하나님을 믿고 이런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행16:34).
전도서 9: 9절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본절은 현실은 허무하나 하나님이 주신 ‘관계의 기쁨’을 붙잡을 것을 교훈합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라.” 전도자는 삶이 덧없지만, 하나님은 여러 기쁨들을 선물로 주셨음을 밝힙니다. 즉, 먹고 마시는 기쁨(9:7), 흰 옷과 기름의 기쁨(9:8), 그리고 본절의 관계의 기쁨이 그 예입니다. 부부의 사랑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기쁨이며, 수고 중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우리의 몫이나 사람마다 갖지는 못합니다. 실로, 결혼생활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들이 누리는 복입니다(잠언18:22). 어제도 언급되었지만, 신약은,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임을 선포합니다. 여기서 ‘희락’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의와 평강이 자리 잡을 때 성령께서 주시는 종말론적 기쁨입니다. 이 세상의 순간적 즐거움을 넘어, 부활의 소망을 갖고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고 있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그 성격은 잃어버린 양이 하나님께 돌아올 때 잘 드러납니다. 누가복음의 증언입니다. 삭개오는 돌감람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고 있던 중 부르심을 듣고 기뻐하며 곧장 내려와 집으로 영접합니다. 그때 “죄인의 집에 들어간다”고 이웃들이 수군거리자, 회개하여 “주여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토색한 것이 있으면 네 갑절로 갚겠습니다”고 말씀드리자, 주님은 구원을 선포하며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말씀하십니다(눅19:9). 삭개오는 후에 가이샤라의 주교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가이사랴(3)
사도행전 25: 1절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가이사랴는 로마총독의 관저가 있었으며 로마로 압송되기 전 바울의 재판과 증언(행 25장) 등이 행해진 곳입니다. 가이사랴는 초기 기독교 복음 전파와 신학의 중요한 중심지였습니다. 가이사랴 해변을 내려다보면 바다 속에 잠긴 거대한 방파제의 선명한 흔적이 보입니다. 헤롯이 바다 속에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항구의 기초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묵묵히 쌓아 올린 구조물이 전체 항구를 지탱했습니다. 짐배 위에 시멘트를 붓고 다시 그 위에 짐배를 얹어 바다 속으로 가라앉히는 작업을 반복했고, 북쪽 방파제는 거대한 나무 틀을 바다에 띄운 뒤 잠수부들이 밀어 넣어 시멘트를 채워 올렸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수면 아래에서 이루어졌지만, 그 숨은 기초가 항구의 위용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솔로몬 성전도 같습니다. 성전이 세워질 때 망치나 도끼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돌들은 이미 보이지 않는 채석장에서 다듬어져 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은 숨은 자리에서의 준비가 만들어낸 열매였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보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쌓아 올린 기초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충실히 준비된 사람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가이사랴의 방파제처럼, 우리의 신앙도 깊은 곳에서 단단히 세워져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보다 숨은 충실함이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기초를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기초가 흔들리지 않을 때, 삶의 항구도 견고하게 서게 됩니다. 우리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믿음은 신념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1,2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단순한 주관적 신념이 아닙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능력, 형제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갈멜 산에서 하나님의 불을 경험한 엘리야는 누구보다 강한 믿음의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심판한 그의 담대함은 인간의 용기를 넘어선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이세벨이 “내일 너를 죽이겠다”는 말 한마디에 그의 마음은 무너졌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에서 브엘세바를 지나 광야까지 약 300km를 도망가서 한 로뎀나무 밑에서 쓰러집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책망하는 대신 천사를 보내 떡과 물을 공급하심으로 지친 종을 일으키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힘을 얻은 엘리야가 호렙 산에 이르자, 하나님은 “내가 남겨 둔 칠천 명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모르는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미래를 준비하고 계셨고, 엘리야의 사명도 다시 세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를 만나 제자 삼으라고 명령하심으로, 고독한 엘리야에게 형제 사랑을 경험케 하십니다. 믿음은 홀로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서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자랍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혼란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고, 외로움 속에서 형제 사랑을 회복할 때 믿음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현실을 해석하고 견디게 하는 힘이 됩니다. 우리도 엘리야처럼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먹이시고, 깨우시고, 다시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