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6/8/17-21)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2)
시편 113:7,8절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금산교회의 창립자의 한 분인 이자익 목사는 8남매를 두었으나, 지금은 자녀들 역시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전의 셋째 아들 이성환 집사는 아버지에 대하여 “내는 아버지를 잘 몰러, 일주일이면 하루나 집에 들어오실랑가? 집에 오셔두 자식들한테 얼매나 엄하셨는디…”하면서 “엄하신 목사”로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말년의 이자익 목사를 모셨던 며느리 김양호 권사는 소상히 언급합니다. “긍께, 시아버님은 경상남도 남해군에 사는 장수 이씨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나셨는디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여섯 살 때 친척집에 들어가 살았는디 허구헌날 일만 시켰대유 글씨, 오죽 했으먼 열두 살 땐가 고향을 떠나셨대유. 인자 배를 타고 하동을 거쳐 순천으로 해서 금산까지 와서는 팟정이에서 포목장사를 하는 조덕삼 씨네 집에 들어가 마부 노릇을 하게 된거지……” 이렇게 이자익 목사의 어린 시절은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그를 빚으셨고, 결국 장로, 목사, 총회장으로 세우셨습니다. 요셉도 같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버림받았고, 노예로 팔렸으며,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수모까지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요셉을 빚으셨고, 결국 애굽의 총리로 세워 많은 생명을 살리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역경에 놓이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신실해야 합니다(시편37:3-6). 요셉과 이자익은 청년의 때에 모두 성실하였습니다. 다음 주에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편84:11).

전도서 9:6절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 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


살아 있는 동안만 우리는 사랑하고, 미워하고, 질투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감정의 종결입니다. 죽은 자는 사랑도, 미움도, 질투도 없습니다. 그들은 관계 속에서 움직이지 못하며, 이 땅에서의 모든 몫이 끝났습니다. 전도자는 삶의 고통을 숨기지 않지만, 죽음의 절대적 종결성을 직면하면서 삶이 주는 작은 가능성을 강조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만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설 수 있고, 사랑을 회복할 수 있으며,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신약은 이 메시지를 더 깊고 더 무겁게 확장합니다. 죽음은 감정의 종결일 뿐 아니라, 최후의 심판으로 이어지는 문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감정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죄책감은 회개로 이끌며, 질투와 미움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부수어뜨립니다. 살아 있는 동안만 우리는 회개할 수 있고, 믿음을 고백할 수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더 이상 선택이 없습니다. 심판만이 남습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길 가시던 중 예수께서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을 보시고,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요9:4)고 하셨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사랑, 미움, 질투 등 모든 감정을 이끌어 갈 그 한 방향입니다. 선을 행할 능력과 지혜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12:17).

전도서 9:7절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본절은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도 삶을 붙잡을 것을 가르칩니다. “너의 음식물을 기쁨으로 먹고, 네 포도주를 즐겁게 마시라”는 말씀은 단순한 쾌락을 뜻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불가피함을 직면한 전도자의 결론으로 감사함을 갖고 삶을 누리는 모습입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이 이미 우리의 삶을 기쁘게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망을 결정하셨어도, 삶의 기쁨 역시 허락하셨습니다. 삶은 덧없지만, 그 덧없음 속에서도 하나님은 기쁨을 선물로 주산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모든 것을 종결시키나, 경건한 신자들은 오늘을 감사히 살아갈 줄 압니다. 신약은 이 말씀을 완성합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죽음 이후에도 끝나지 않는 기쁨—죄사함과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전도자가 말한 “하나님이 이미 네 행위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선언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실현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 앞에서 허무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씻김 받고, 그분의 부활로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며 기뻐하는 삶은 단순한 일상의 즐거움이 아니라, 죄사함 받은 자의 감사와 영생의 기쁨을 누리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실 때, 떡과 잔을 들어 거듭 감사하셨습니다. 죽음을 알고도 거듭 감사하시는 그 순간은,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의 선언입니다. 전도서의 “먹고 마시라”는 명령은 우리 주님에 의해 이렇게 완성되었습니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26).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가이사랴(2)

사도행전 11:11절
“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가이사랴는 헤롯대왕이 주전 30년경 건설하기 전까지 ‘스트라톤의 탑’이라 불리던 작은 항구였습니다. 주전 3세기 베니게 사람들이 사용했으나, 지중해의 강한 남서풍과 해안 절벽의 거센 바람으로 항구로서는 부적합하여 버려졌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로마의 후원을 받아 이곳을 새롭게 개발하며, 인공적으로 300척의 배가 동시에 정박할 수 있는 10만㎡ 규모의 거대한 항구를 건설했습니다. 그는 이 항구를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기리기 위해 ‘세바스토스 항구’라 명명했습니다. 이 항구는 자연 지형을 이용하지 않고 완전히 인공적으로 조성된 세계 최초의 대형 항구 중 하나로, 당시 로마의 기술력과 헤롯의 건축적 야망을 보여줍니다. 가이사랴는 이후 로마 군대의 주둔지이자 헤롯의 궁전이 자리한 도시가 되었으며(행 10장, 12장), 그의 아들 헤롯 아켈라오가 통치했으나 실정으로 인해 로마 총독이 파견되었습니다. 총독은 가이사랴를 행정 수도로 삼고 유대를 통치했습니다. 이곳은 로마 시대를 거쳐 비잔틴, 초기 이슬람, 십자군 시대까지 번성하였습니다. 본절에서 누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가 가이사랴에서 무너졌음을 밝힙니다. 베드로는 이곳에서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기 전까지, 복음은 유대인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고 말씀하시며,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의 집으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에 복음의 문은 모든 이방 민족에게 열려졌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사랑 곧 회복의 길
로마서 12:15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정신과 의사 나종호 박사는 말합니다. “열심히, 성실히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닥친 트라우마와 불행으로 인해 인생이 180도 달라지게 됩니다.” 나 박사는 자신이 만난 환자 중 노숙자가 있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대기업 임원이었지만, 아내를 잃은 뒤 마약에 중독되어 사회적으로 몰락했습니다. 그 과정을 보며 그는 깨달았습니다. 사회가 말하는 성공은 신기루 같고, 우리가 이룬 것에는 노력뿐 아니라 운도 많이 작용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과 타인에게 관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괜찮을 수 없습니다. 그 자체를 이해하고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해야 합니다. 나박사와 같은 전문가의 도움이나 따뜻한 말 한마디는 큰 격려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신비한 모습으로 자주 나타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고 희생하며 배려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의 풍랑에서 위협받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구원받을 것을 알려주었으며, 그 말을 믿고 안심합니다(하나님의 계획). 그리고 구조받은 멜리데라는 섬에서 이질에 걸려 고생하는 추장과 여러 환자들에게 안수하여 고칩니다(하나님의 능력). 그러나,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서 70킬로 떨어진 ‘압비오 광장”에 다다랐을 때, 마중 나온 형제들을 보고서 마음에 담대함을 얻었다고 누가는 증언합니다(형제 사랑). 형제 사랑이란 다 그런 것이죠! 여러 가지 인생의 풍랑에 시달리는 우리는 이 세 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