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
사무엘 16:10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본절은 소년 목동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신 하나님의 기준을 보여줍니다. “전라도 목사가 경상도 가서 목회에 성공한 예는 찾기 어려워도 전라도 와서 목회에 성공한 경상도 목사는 많다.” 한 호남교회사가의 지론입니다. 이를 증명하듯이, 경북 경산 출신인 배은희 목사는 전라도 ‘모교회’인 전주 서문교회의 전성기 15년(1921-1936년)동안 목회하였고 ‘사랑의 원자탄’으로 유명한 여수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도 본래 경남 함안 출신으로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지만 그의 목회와 순교는 전라도 여수 땅에서 이루어졌고 그 기념관도 여수에 있습니다. 아마도 전라도가 경상도보다는 외지인들에 대한 배척이 덜했던 것 같습니다. 이자익(1879-1958)목사도 그렇습니다. 경남 남해 출신인 이자익 목사는 전북 김제와 정읍에서 목회하였고 전북 노회장을 거쳐 조선예수교 총회장을 3번 역임한 바 있습니다. 한 번 들은 것은 잊지 않았으며 복잡한 장로교 헌법과 규칙을 줄줄 꿰고 있어 ‘법통’(法通) 총회장으로 불렸습니다. 특히 머슴의 신분이었으나 주인 조덕삼을 제치고 먼저 장로로 피택된 된 사건은 유명합니다. 그 머슴은 후에 목사가 됩니다. 이런 이자익 목사를 배출한 교회가 지금까지 ‘ㄱ’자 예배당을 간직하고 있는 금산교회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출신과 지역은 장벽이 아니라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어디서든, 그분의 뜻에 따라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쓰임받는 기준은 오직 깨끗하게 준비된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2:21).
전도서 9:4절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전도자는 “살아 있는 자에게는 소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망은 막연한 낙관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만 누릴 수 있는 작은 가능성, 돌이킬 기회, 하나님 앞에서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뜻합니다. 죽음은 모든 활동을 끝내지만, 살아 있음은 비록 미약해도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문을 열어 둡니다(전9:10). 전도자는 이 진리를 강조하려고 후단에서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개는 가장 비천한 존재였고, 사자는 가장 존귀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개는 비천해도 움직이고, 느끼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전도자는 바로 이 작은 활동성을 살아 있음의 가치로 봅니다. 살아 있는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고, 잘못된 길에서 돌아설 수 있으며,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구분을 지우지만, 살아 있음은 하나님 앞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남겨 둡니다. 본절은 신약의 관점에서 구원과 관련된 중요한 교훈을 내포합니다 ㅡ “살아 있음은 하나님 앞에서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십자가 위에서 회개한 강도의 예가 있습니다. 만약 그 강도가 죽었다면 더 이상의 선택도 회개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강도는 다리가 꺾이기 직전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주님은 즉각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살아 있음은 큰 선물입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
전도서 9:5절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9장은 인간 존재의 가장 냉정한 현실을 말합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공통된 운명입니다. 의인과 악인,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경건한 자와 불경건한 자 모두가 이 운명 앞에서 평등해집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죽음의 보편성을 말하면서도, 살아 있는 자가 가진 작은 우위를 강조합니다. 그 우위는 의식, 곧 자기 인식입니다. 살아 있는 자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인식은 비극적이나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또한 제공합니다. 즉 살아 있음은 하나님 앞에서 다시 선택할 여지를 갖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기억도, 감정도, 행동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몫이 끝났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자는 하나님께 돌아설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며, 삶의 방향도 새롭게 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전도서 9:4–5절이 주는 분명한 교훈입니다. 한편, 죽음을 아는 의식, 그것은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부르심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부활의 소망으로 이끕니다. 히스기야는 죽음이 임박하자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였으며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하셨습니다. 히스기야는 죽음을 알았고, 그 인식 때문에 하나님께 돌이켰으며, 그 돌이킴이 그의 삶을 새롭게 만든 예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기회는 늘 주어지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만 사랑하고, 회개하며, 순종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가이사랴
사도행전 10:24절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가이사랴는 헤롯대왕이 건설한 신약 시대의 항구도시입니다. 헤롯대왕은 로마 문화를 유입하고 로마와 직접 연결되는 관문을 만들기 위해 항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욥바는 유대인들의 거주지였고, 그 유대인들은 로마화를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헤롯은 이두메아 출신이란 약점을 가졌기에 욥바를 로마식 도시로 바꾸지 못하고 새로운 항구도시를 건설한 것입니다. ‘가이사랴’라 명명한 이유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가이사랴의 위치는 욥바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지중해 연안입니다. 헤롯은 이곳에 거대한 인공항, 원형경기장, 신전, 행정시설을 갖춘 로마식 도시를 완성했습니다. 이후 가이사랴는 로마 총독부가 자리한 정치 중심지이자, 기독교가 확장되는 중요한 도시로 성장합니다. 요세푸스는 가이사랴의 아름다움과 규모를 상세히 기록했고, 1959년 링크 부부의 탐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발굴되고 있습니다. 본절은 베드로가 가이샤라에 있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여 복음을 선포한 사실을 증언합니다. 이 사건은 유대인 중심의 복음이 이방인에게 확장되는 결정적 전환점이었습니다(행10장, 11장). 일곱 집사 중 한 명인 전도자 빌립은 세 명의 딸과 함께 가이샤라에 거주하였고, 바울은 2년 간 가택연금을 당합니다. 그는 총독의 재판을 거쳐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압송됩니다. 비록 가이사랴는 로마 권력의 상징이었지만, 하나님은 그곳을 복음 확장의 거점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의 편견으로 하나님을 제한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언16:4).
시편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우울함과 관련하여, 나종호 박사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감정을 기록하며 스스로 조절하라. 기분이 좋았던 날 무엇을 했는지, 어떤 행동이 스트레스를 만들었는지 점검하는 것입니다. 글쓰기나 운동처럼 자신을 회복시키는 활동을 정해진 주기로 실천하면 감정의 흐름이 안정됩니다. 둘째는 자책을 내려놓아라. 성공은 노력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시기· 우연· 환경이라는 요소가 개입합니다. 따라서, 자신과 타인에게 관대해져야 합니다. 여기에 심리학은 왜곡된 사고를 교정하는 인지행동치료, 활동을 회복시키는 행동활성화, 관계 유지, 수면·식사·운동 관리 같은 보완적 처방을 더합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다루데 유익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문제를 감정이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에서 찾습니다. 심리학은 스스로 행복을 만들라고 말하나, 우울과 불안의 뿌리에는 죄책감, 두려움, 영적 공허가 자리합니다. 이것은 감정 조절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 관대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에서 회복의 길을 찾습니다. 죄를 범한 다윗의 회복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는 죄를 회개했고, 말씀을 붙들었고, 성령께서 떠나지 않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성령님 안에서 새 생명, 즉 의와 평강과 기쁨을 누리면 우울은 자연히 사라집니다(롬14:17). 이때 심리학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집니다(롬5:5). 사랑과 우울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면(하나님께 아뢰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