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6/8/3-7)


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서문교회(7)
시편 133:1절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인생을 살다 보면 좋은 일과 어려운 일을 모두 겪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기에 갈등이 생기기 쉽고, 때로는 분열의 아픔을 겪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연합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됨을 지켜 나가는 일입니다. 서문교회 배은희 목사가 “조선의 성자”라 부른 방애인 선생은 스물셋에 장질부사로 별세하여 화산동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묘는 오랫동안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확인한 김대전·김연수 두 장로는 교회에 알리고, 묘소를 서문교회 묘지로 이장했습니다(1999년). 또한 서문교회는 『전주 서문교회 100년사』를 출판한 뒤, 100주년 기념 예배당 지하에 “역사 자료실”을 마련하여 교회와 호남 선교의 귀한 자료들을 전시했습니다. 방문객도 크게 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랑과 헌신이 세운 아름다운 역사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교회를 이끈 당회장 목사의 은퇴 후 후임을 세우는 과정에서 심각한 내분이 일어났고, 김대전 장로를 비롯한 많은 “뿌리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후 서문교회를 여러 차례 답사한 이덕주 교수는 김대전 장로를 다시 만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서문교회의 역사는 분명한 사실을 말합니다. 사랑과 헌신은 공동체를 세우지만, 분열은 그 유산을 무너뜨립니다. 연합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 그리고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할 때 공동체는 다시 하나가 됩니다.겸손함과 온유함으로 깍듯이 대하십시오.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십시오.”(엡 4:2, 새번역)

전도서 9:2절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본절은 의인과 악인, 선인과 죄인, 깨끗한 자와 부정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드리지 않는 자, 맹세하는 자와 맹세를 피하는 자를 나열합니다. 이 구분은 율법과 지혜가 강조하는 바이나, 이 차이들은 죽음 앞에서 무너집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이라는 동일한 운명을 향해 걸어갑니다. 윤리적 차이도, 종교적 차이도, 제의적 차이도 죽음 앞에서는 힘을 잃습니다. 그러나 허무가 그 결론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인간을 철저히 낮추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마지막 날 모두 부활할 때 생명은 사망을 삼키고 승리할 것입니다(고전15:54-56). 그러나, 이 땅에서는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받을 수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있습니다(눅16장). 생전에 부자는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죽은 뒤에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당하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 안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간 것입니다. 나사로의 ‘의’가 언급되지 않았으나, 부자의 허물은 분명합니다. 문 앞에서 고통당하는 나사로를 무시하였습니다. 가인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민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빌2:12).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2:28).

전도서 9:3절
“모두가 다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잘못된 일 가운데 하나다. 더욱이, 사람들은 마음에 사악과 광증을 품고 살다가 결국에는 죽고 만다.”(새번역)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은 죽음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합니다. 의인과 악인, 지혜자와 우매자 모두에게 임합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죽음 자체보다,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을 안타까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에 사악과 광증을 품고 살다가 결국에는 죽는다”고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악’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성을, ‘광기’는 하나님 없이도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뜻합니다. 사람은 죽음을 알면서도 욕망을 쫓고, 하나님보다 자신의 계획을 신뢰합니다. 전도자가 말하는 인간의 광증입니다. ‘결국에는 죽고 만다’라는 말로 돌연 끝나는 본절처럼 죽음은 갑자기 찾아옵니다. 인간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계획과 자랑은 죽음 앞에서 무너집니다. 누가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이 사실을 날카롭게 드러냅니다(눅12:16-21). 그 부자는 더 큰 창고를 짓고 오래도록 풍요를 누리려고 계획하나, 하나님은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겠다”고 결정하십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계산에는 하나님도, 죽음도 없습니다. 그의 죽음은 돌발적으로 찾아오지만, 어리석게도 부자는 이 현실을 무시합니다. 따라서 본절은 죽음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죽음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서 오늘을 지혜롭게 살라는 권면입니다. 죽음을 잊어버리는 삶은 헛된 욕망으로 끝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넘어 영원한 소망으로 이어집니다(롬6:23).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욥바
사도행전 11:13절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많은 욥바 사람들은 죽은 다비다를 살린 베드로의 표적을 보고 주께 돌아왔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욥바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전에는 헬라가 지배를 하여 프톨레미 1세 소테르(주전 367-283)는 욥바에 수비병을 주둔시켰습니다. 이후 헬라에 맞선 유다의 마카비 가문은 욥바를 공격하였고, 약 20년 뒤 시몬 마카비가 욥바를 정복합니다(주전 142년). 시몬 마카비는 셀레우코스 왕조에서 독립하여 하스모니안 왕조(주전 142~63년)를 창립하였으며, 항구 욥바는 하스모니안 왕조의 경제, 군사 기반을 크게 강화시킵니다. 80년이 지나 하스모니안 왕조가 폼페이우스에게 복속되자(주전 63년), 욥바는 다시 이방인(로마)의 지배에 들어갑니다. 한편, 헤롯 대왕이 욥바의 로마화를 시도하자, 유대인들은 강력히 저항하였습니다. 이에 헤롯은 욥바 북쪽 40km 지점에 새로운 항구도시 가이사랴를 건설하게 됩니다(주전 30년경). 욥바는 유대인의 작은 항구로 남아 있다가 1세기 이후 기독교 도시로 성장하였습니다. 한때 수많은 나라가 차지하려 했던 욥바는 복음이 이방 세계로 나아가는 관문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항구를 차지하여 번영하려고 싸웠지만, 하나님은 아무런 다툼 없이 그 항구를 통해 화평의 복음을 전 세계로 보내셨습니다. 세상적인 영토와 번영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2:44).

하나님의 도우심
로마서 12:15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모든 사람이 문제를 갖고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우울증, 무기력 등에 빠집니다. 우울증이란 과거 혹은 먼 미래에 너무 사로잡혀 일상 생활 자체가 힘든 경우입니다. 가족들이 “식사했니?” 하면서, 지속적인 관심을 표현해야 합니다. 물론, 따뜻한 마음을 갖고 해야 하지요. 우울해 보이면, “내게 말해라…대화를 나누면 된다”고 하면서, 혼자되지 않게 해 주어야 합니다. 예일대 의과대학교 교수인 나종호 박사의 레지던트 동기는 극단적 선택을 하여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 교수는 바로 그 전 주에 함께 당직을 선 적이 있습니다. 외롭게 밤을 새운 그 친구에게 ‘잘 지내고 있냐?’하고 문자로 물었더니, 그는 ‘바쁘진 않은데 왜인지 모르게 혼자인 것 같다’고 답했습니다. 나 교수는 친구의 그 회신에 ‘그때 (내가) 조금 더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했더라면…’하고 후회한 뒤, “내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한 명만 있어도 그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나교수의 이런 조언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역시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위로나 따뜻한 말, 즉 사랑으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무거운 바위는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하고 말한다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군대 귀신이 거라사 광인을 붙잡았듯이, 죄의 힘 또는 마귀의 유혹의 힘이 우리를 사로잡으려고 하는 경우입니다. 이땐 지체 없이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막9:29). 그러면, 주님은 강한 자 마귀를 결박하고 참 자유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