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9)
고린도전서 3: 16절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본문은 1908년 4월 3일, 금산교회 ‘ㄱ’자 예배당 여자 석 상량문에 기록된 성경구절입니다. 이후 80년이 지나 새 예배당을 지을 당시 오래된 ‘ㄱ’자 예배당을 헐고 그 자리에서 새 예배당을 짓자는 교인도 있었지만, 이인수 목사는 ‘문화적 가치가 있는 ‘ㄱ’자 예배당을 그대로 보존하고 새 예배당을 지으려 하니 도와 달라’고 해야 모금도 될 것이라며 교인들을 설득해서 교회 앞마당 유광학교의 자리에 새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1988년 총 6천만 원 들여 벽돌 예배당(78평)을 짓자 교인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ㄱ’자 예배당은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상당합니다. 모악산 너머 배재에 있던 전주 이씨 집안의 재실을 옮겨다 지은 것이라는데 건물 구조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중부지방의 단층 고패집 형태입니다. 남북으로 다섯 칸 집을 앉히고 북쪽 모서리에서 동쪽으로 두 칸 집을 이어 붙여 외형으로 보면 ㄱ자를 뒤집어 놓은 형태인데 모두 합쳐 27평입니다. 전라북도 역시 그 가치를 인정하여 1997년 도지방문화재 136호로 지정하였습니다. 1908년에 세워졌으나 아직도 주일학교 교육관 등으로 사용됩니다. 바로 이웃한 천년 고찰 금산사에 비해, 금산교회의 ‘ㄱ’자 예배당은 작고 초라해 보였지만, 그 안에는 118년의 신앙의 흔적, 박해와 혼란을 견딘 믿음, 복음의 씨앗을 지켜낸 공동체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이의 보존은 단순한 건물 보존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작은 공간을 통해 이루신 은혜의 역사를 기억하고 이어가려는 신앙적 선택입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13:32).
전도서 10:1절
“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느니라”
본절은 전도서 9장 마지막 절, “지혜는 무기보다 강하지만,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뜨린다”(9:18)는 말씀을 일상적 이미지로 구체화합니다. 이는 “작은 악이 큰 선을 망가뜨리는 원리를 가장 생생하게 드러낸 구절”(롱맨)입니다. 전도자는 먼저 일상적이고 매우 구체적인 이미지를 제시합니다. 향기로운 기름 속에 작은 파리 한 마리가 떨어지면, 그 귀한 기름 전체가 악취로 변하는데, 지혜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지혜와 영예는 향기로운 기름처럼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단 한 조각의 우매, 단 한 번의 어리석은 행동, 단 한 사람의 잘못이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나아만의 의복과 은에 대한 탐욕 때문에 부패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으며, 아간의 금과 의복에 대한 탐욕은 전 이스라엘을 패배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끈질긴 유혹을 이겨내었습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다니는 영전에서 틈을 보이면 죄악이 들어옵니다. 무릇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또한, 오늘날도 우리가 쌓은 모든 선과 업적이 단 한 번의 실수나 어리석은 행동으로 무너질 수 있으므로 늘 겸손하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말씀은 큰 위로가 되는데, 지혜와 존귀도 적은 우매로 무너진다는 전도서의 허무가 복음의 능력으로 극복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전도서 10:2절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
본절은 지혜와 우매의 차이를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이미지로 보여줍니다. 지혜로운 자는 오른쪽으로, 우매한 자는 왼쪽으로 간다는 전도자의 말은, 단순한 방향의 차이가 아니라, 삶의 방향성과 존재의 질을 가르는 근본적 차이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롱맨은 이 절을 “지혜와 우매가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는 사실을 두 시각에서 보여주는 전형적 대구 잠언”으로 설명합니다. 오른쪽과 왼쪽은 고대 세계에서 종종 선과 악, 안정과 불안, 능력과 무능을 상징했습니다. 비록 전도자가 이 상징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지혜가 우월하고 우매가 열등하다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지혜는 삶을 바르게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가나, 우매는 삶을 빗나가게 하고 파괴로 이끕니다. 지혜와 우매는 단순한 성향의 차이가 아니라, 삶 전체를 다른 길로 이끄는 방향성의 차이입니다. 여기서 지혜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지혜는 단순한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지혜는 하나님을 향한 방향이며, 우매는 자기 중심의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마음은 오른쪽으로—하나님을 향한 길로—나아가지만, 우매한 마음은 왼쪽으로—자기 욕망과 죄의 길로—흘러갑니다. 룻기에는 룻과 오르바라는 두 여인의 선택이 등장합니다. 오르바는 자신의 길—익숙함과 안전을 향한 길—로 돌아갔습니다. 그 길은 왼쪽의 길처럼 보입니다. 반면 룻은 하나님을 향한 길—믿음과 헌신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은 오른쪽의 길이었고, 결국 그녀는 다윗과 메시아의 계보에 섰습니다. 두 사람의 방향의 차이가 인생 전체, 나아가 영원한 운명까지 바꾸었습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가이사랴(8)
사도행전 12:23절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로마의 극장은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라, 제국의 권력과 문화를 드러내는 상징적 공간이었습니다. 그리스가 자연 언덕을 활용해 연극을 했다면, 로마는 그 언덕을 건물로 재현하여 계단식 관중석과 웅장한 무대를 갖춘 극장을 만들었습니다. 헤롯대왕은 로마의 건축 문화를 유대 땅에 이식하며 가이사랴에 3,500명을 수용하는 대형 극장을 세웠습니다.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이 극장은 로마식 반원형 구조, 무대 뒤편의 장식벽, 그리고 귀족석을 갖춘 전형적인 로마 극장의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극장이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연설하던 장소로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12장 역시 헤롯 아그립바 1세에 대하여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가이샤라의 극장 중앙에는 귀족과 고위층이 앉던 특별석이 있었고, 헤롯 아그립바(1세)는 예루살렘에서 야고보를 참수하고 가이사랴로 내려왔다가 이 자리에서 연설하였습니다(행12:19-23). 오늘날 가이사랴 극장은 발굴과 복원을 통해 거의 완전한 형태로 서 있으면서, 현대 공연도 열리는 살아 있는 유적이 되었습니다. 고대의 돌과 계단은 여전히 그 시대의 권력, 영광, 그리고 심판의 흔적을 품고 있습니다. 왕이 연설하고, 백성이 환호하고, 권력이 빛나던 공간이었으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헤롯의 교만을 꺾으셨습니다. 본절은 그 심판을 증언합니다. 헤롯 아그립바(1세)의 연설을 듣고 백성들이 “이것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소리다!”라고 외쳤을 때, 헤롯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습니다. 주의 사자가 치자 벌레에게 먹혀 죽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떡보다 말씀」
마태복음 4:4절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이집트 혁명의 불씨는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빵을 달라”는 절규였습니다. 러시아의 밀 수출 중단으로 빵값이 폭등하자 민심은 폭발했고, 30년간 권력을 잡았던 무바라크는 무너졌습니다. 빵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 필요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먹기 위해 일하고, 가족을 위해 땀을 흘립니다. 성경도 죄 이후 인간에게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라”고 말씀합니다(창 3:19). 그러므로 노동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삶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주리신 예수께서 마귀에게 대답하신 본문의 취지는, 떡은 필요하나 떡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신을 위한 떡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더 필요합니다. 이는 떡이 우리의 하루를 연장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 하루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하되 노동을 하나님보다 앞세우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땀을 흘려도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천지의 주인을 아는 우리의 노동은 두려움에 매인 노예의 일이 아니라 감사가 담긴 섬김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떡을 얻기 위해 일하지만, 마음까지 떡에 빼앗기지는 않습니다. 손에는 일을 붙들고,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떡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떡보다 더 귀한 생명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노동은 감사가 되고, 우리의 하루는 예배가 됩니다. 우리는 떡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떡을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