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 김제 금산교회(9)
왕기상 6:4절
“성전을 위하여 창틀 있는 붙박이 창문을 내고”
‘ㄱ’자 예배당은 자연석을 다듬어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사각기둥을 세웠으며 하인방 아래 환기 구멍을 내고 중인방과 상인방 사이에 창문을 해 달았습니다. 지붕은 홑처마에 우진각 지붕 형태를 하고 있는데 처음엔 초가로 해 올렸다가 1920년대 함석지붕으로 바꾸었으며 해방 후 지금의 시멘트 기와로 올렸습니다. 남쪽과 동쪽의 출입문은 여닫이 격자무늬 종이문입니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 통마루 바닥에 오르면 천장 가구가 그대로 드러난 연등천장에다 칸막이가 없는 통간(通間) 건물이 주는 시원함에 압도됩니다. 다만 천장과 벽면에 칠한 흰색 수성페인트 가루 때문에 들보가 뿌옇게 변한 것이 아쉽습니다. 천장 가구는 납도리 5량식(= 깍은 단면이 납작한 도리가 5개)인데 지붕 용마루를 받치고 있는 마루도리와 가운데 중도리를 겹으로 올린 것이 탄탄한 느낌입니다. 휘어 자란 아름드리 소나무를 자연 그대로 다듬어 올린 대들보가 육중합니다. 건물 북서쪽 모서리에 있는 강단(5평)은 2단으로 꾸며 결과적으로 3층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 전래의 제단 구조이면서 동시에 뜰-성소-지성소로 이루어지는 구약 성막의 3중 구조를 상징합니다. 복음의 토착화를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백향목, 금장식, 성소와 지성소의 3중 구조, 이스라엘의 건축 전통이 총동원된 건축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의 진정한 가치는 하나님의 임재에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이스라엘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냈듯, 복음은 ‘ㄱ’자 예배당이란 한국의 전통 건축 속에서뿌리내리고 성령께서 임재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전도서 10:3절
“우매한 자는 길을 갈 때에도 지혜가 부족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가 우매함을 말하느니라”
지혜로운 마음은 삶을 바르게 이끌지만, 어리석은 마음은 말과 행동에서 자신의 우매를 알립니다. 이는 길을 걸어가는 작은 행동 속에서도 여실히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매함이란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마음의 결핍,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결핍된 상태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면 삶은 자연스럽게 빗나가고, 그 빗나감은 숨길 수 없습니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걷는 길로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사울은 왕으로서 많은 지식을 가졌지만,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점점 우매함을 드러냈고, 질투와 두려움이 그의 길을 어둡게 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방향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능력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에 있습니다.우리 삶도 같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면 지혜가 행동 속에 드러나고, 작은 선택 속에서도 바른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면 우매함이 말과 행동 속에서 드러나고, 자신도 모르게 잘못된 길을 가게 됩니다. 이 같이 마음은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심축입니다. 지혜는 바로 이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작은 교만, 작은 욕망, 작은 방심이 마음의 방향을 바꾸고, 삶 전체를 뒤흔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일을 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살핍니다. 그때 삶은 오른쪽 길, 즉 하나님 뜻에 합한 길로 나아갑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4:23).
전도서 10:4절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손함이 큰 허물을 용서 받게 하느니라”
본절은 실천적 잠언으로 지혜가 실제 삶 속에서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전도자는 “지도자가 화를 낼 때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말하며, 분노한 상관이나 권력자 앞에서 지혜로운 태도를 취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고대의 궁정 지혜와 연결되며, 잠언과 다른 지혜문학에서도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롱맨은 이 구절을 “분노한 지도자 앞에서 부드러운 태도가 갈등을 해결한다는 실용적 지혜”로 설명합니다. ‘공손함’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페’는 ‘온유함’을 나타냅니다. 이는 단순한 부드러움이 아니라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황을 치유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히브리어 어근이 ‘치유하다’(rpʾ)와 ‘가라앉히다’(rph) 사이에 걸쳐 있는 것도 이중적 의미를 암시합니다. 즉, 온유함은 관계를 치유하고, 분노를 가라앉히는 힘을 가진 태도입니다. 전도자는 또한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담습니다. 첫째, 도망치거나 회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회피는 지도자의 의심을 더 키우고 분노를 악화시킵니다. 둘째, 침착함으로 상황을 안정시키라는 뜻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위기 속에서도 마음을 지키고, 부드러운 태도로 갈등을 완화합니다. 전도서 8장 2–9절은 “왕의 분노를 피하라”고 말하는 것과 모순처럼 보이지만, 상황이 다릅니다. 8장은 일반적 권력의 위험을 말하고, 10장은 이미 분노가 자신을 향한 상황입니다. 본절을 요약하면, “지혜는 힘 있는 자 앞에서 두려움이나 충돌이 아니라, 침착함과 온유함을 드러낸다.” 이것이 지혜자가 가는 오른 쪽 길입니다(잠10:2).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언15:1).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가이사랴(9)
사도행전 9:30절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주후 69년 베스파시아누스가 가이사랴를 유대의 수도로 삼은 이후, 이 도시는 로마 권력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주후 70년 디도의 예루살렘 정복을 기념하기 위해 가이사랴에서는 대규모 검투사 경기가 열렸고, 고고학적 기록과 요세푸스에 따르면 약 2,500명의 유대인이 이 경기장에서 학살되었습니다. 가이사랴의 경기장과 원형극장은 로마의 잔혹한 오락과 제국의 힘을 드러내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은 이 도시가 단지 로마의 도시만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가이사랴에는 초기 기독교의 흔적이 깊게 남아 있습니다. 발굴된 주후 6세기 교회 유적,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집터, 그리고 초대교부 오리겐과 유세비우스가 활동했던 도서관·신학센터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오리겐은 이곳에서 성서주석과 신학 작업을 완성했고, 사도시대부터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기까지의 초대 교회의 역사를 쓴 유세비우스는 가이사랴의 주교였습니다. 또한 가이사랴 항구 주변에서는 로마 총독부 건물과 바울이 갇혔던 감옥으로 추정되는 공간이 발견되어, 사도행전의 역사성을 뒷받침합니다. 가이사랴는 바울이 유대인의 위협을 피해 도망한 도시였고(행 9:30), 로마로 가기 전 2년 동안 복음을 증언한 자리였으며(행 24장), 베드로가 이방인(고넬료)에게 처음 침례를 베풀었던 곳입니다(행 10장). 로마의 피비린내 나는 경기장이 있던 도시가, 불과 100여 년 후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음은 고고학과 성경이 함께 증언하는 놀라운 역사의 반전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만유의 주로서 통치하심을 믿어야 변화하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5:5).
「빵, 자유 그리고 복음」
요한복음 8: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 땅의 소산을 먹은 다음 날, 만나가 그쳤습니다. 이제 약속의 땅에서 빵과 자유를 얻으려면 싸워야 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빵’을 얻기 위한 투쟁의 역사입니다. 고대부터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에게 호소했고, 종교는 죄와 죽음뿐 아니라 ‘빵’의 문제와도 깊이 결부되었습니다. 그러나 ‘빵’의 문제는 곧 ‘자유’의 문제입니다. 또스또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이 재림 예수에게 한 말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원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유의 무거운 책임을 견디지 못해 빵과 안전을 제공하는 권위에 자신을 맡기려 한다. 그런데 네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기에 인간은 불행해졌다.” 대심문관의 논지는 분명합니다. 인간은 자유보다 빵을 택하고, 진리보다 안정을 택하며, 결국 스스로 속박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정반대의 길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빵 때문에 자유를 포기하는 존재가 아니라, 진리를 통해 참된 자유를 누리는 존재임을 말씀하십니다. 즉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은 생존 문제의 부정이 아니라, 인간은 빵을 넘어서는 존재라는 선언입니다. 복음은 빵을 주되 자유를 빼앗지 않으며, 자유를 주되 빵 문제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알아야 자유를 얻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결국 ‘빵, 자유, 그리고 복음’은 인간이 무엇을 의지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질문입니다: 인간 자신이냐 하나님이냐?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