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원탁회
야고보서 1:2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1940년 말, ‘신사참배’에 비협조적인 선교사들이 강제 출국당한 뒤, 일제는 밀정을 풀어 순천 노회 소속 목사들의 행적을 주시하였습니다. 그 무렵 알렉산더병원 서무과장으로 있던 황두연 장로가 순천중앙교회 청년들을 모아 ‘원탁회’라는 성경공부 모임을 이끌었습니다. 경찰은 수상하게 여겨 회원 강창원의 집을 수색,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다’라는 일기를 압수하고 지도자 황 장로를 체포합니다. 또한, 천년왕국을 선전한 혐의로 당회장 박용희 목사 역시 체포하였습니다. 이어 순천노회에 소속된 교회의 목사들 18명 중 14명을 ‘재림 신앙’을 설교했다 하여 구속합니다. 이들은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형을 각 선고받아 옥고를 치뤘고, 특히 양용근 목사는 ‘옥중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순천 노회 소속은 아니나 여수 애양원교회의 손양원 목사와 은퇴 후 우학리교회에서 목회하던 이기풍 목사도 신사참배 문제로 구속 중이었으니 당시 순천노회에는 목사가 있는 교회를 찾아 보기 어려웠습니다. 순천중앙교회 앞마당에 있는 ‘추리 나무’ 두 그루는 암울했던 시절 교회와 노회가 겪은 수난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합니다. 도대체 신앙으로 인한 고난과 박해는 왜 있어야만 할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는 주님의 영적통치전략의 일환 때문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고난과 박해를 이겨낸 교회와 신자는 후대를 위하여 ‘금보다 귀한 믿음’(벧전1:7)의 유산을 확보하게 됩니다. 따라서, 베드로(벧전1:6,7), 바울(롬5:3-5), 야고보(약1:2,3) 세 사도 모두 기뻐하라고 외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1:6).
전도서 3:13절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최선의 삶이란,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12)과, “먹고 마시며 수고함으로 낙을 누림”이 들어 있는 삶이나, 이 또한 하나님의 선물로서(13),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누리지 못합니다. 이 지점에서 전도자는 신은 죽었으니,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성실하고 용기있게 살아가자는 니이체의 초인사상과 결별합니다. 제자의 삶의 큰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소망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과 2:24절은 유사합니다. 한편, ‘낙’은 히브리어 ‘토브(=좋음)’의 번역으로, 여기서는 ‘만족’을 뜻합니다. 먹고 마시고 수고함을 따르는 만족은 인생의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오아시스입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교제의 삶의 필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교제는 주로 식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먹고 마시다’라는 표현은 가족, 친척, 동료들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삶을 향유하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이웃과 함께 삶을 나누며 즐거워 하는 것은 행복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데, 전도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부각시킵니다. (2) 섭리와 즐거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무시하고 자아실현을 추구하거나, 욕망을 채우려는 ‘수고’는 헛되나(3:9),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면서 행하는 ‘수고’는 진정한 만족을 가져 옵니다. 또한, ‘수고’ 없는 게으른 삶, 남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는 삶은 성취감과 만족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를 배우는 제자의 삶은 이보다 한 차원 높은 영적 제사장의 삶입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살전5:15)
전도서 3:14절(1) 하나님의 섭리의 영원성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최선의 삶의 자세’를 논한(3:12,13) 전도자는, 하나님의 영원성에서 그 근거를 찾은 뒤, 그분에 대한 ‘경외’를 강조합니다. 전단은 하나님의 섭리는 영원히 존재하고, 유한한 인간은 거기에 가감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때와 기한을 정하시고(3:1-8), 그 안에서 행하시는데 이러한 방식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본절은 동사 ‘행하시는’을 미완료시제로 써서 계속 진행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영원까지 어느 하나도 예외가 없음을 교훈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은 불완전하고 불확실하여 염려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염려에서 해방되려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고난 속에서도 그분의 계명을 쫓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분이 이루시고, 고난의 밤 중에 우리가 행한 선들을 대낮처럼 밝히 드러내십니다(시37:5,6). 이때 하나님은 즐거워 하십니다. 인내를 믿음의 핵심요소로 꼽는 이유입니다(히12:1-3). 불순종한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사흘 후에 나오자 곧장 니느웨로 가서 전도하자, 니느웨에서 회개가 일어나고 그 성은 구원받습니다. 요나는 매우 실망하나, 이는 단순히 니느웨 백성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부활과 회개를 통한 구원의 예표였습니다. 따라서, 요나의 사건은 주님의 재림 시까지 인구에 회자되면서, 예수의 부활, 회개와 구원을 증거하는 근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함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눅11:3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갈릴리
누가복음 5:1절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본문은 갈릴리 해변에서 가르치신 주님의 모습을 전합니다. 갈릴리 호수는 길이 21km 너비 13km 전체 둘레는 53km이며 깊이는 43m입니다.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만을 나눈 지각변동으로 형성된 계곡에 위치해 있어 해수면이 해저 210m에 이릅니다. 덕분에 산으로 둘러싸인 온화한 기후를 갖고 강우량(평균 900∼1200mm)과 꽃, 나무도 많아 아름답습니다. 북쪽의 헬몬 산이 수원이며 남쪽으로 흘러 호수를 이루었고, 호수 남쪽에 접한 요단 강(100km)을 통해 사해까지 미칩니다. 구약은 이 호수를 ‘키노르’(=하프)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긴네렛(민34:11)으로 불렀습니다. 실제로 갈릴리 호수는 삼각형 모양이며 고대 근동의 하프처럼 생겼습니다. 신약 시대는 게네사렛(눅5:1)이라 불렀습니다. 이는 골짜기를 뜻하는 히브리어 ‘기노사르’가 어원으로 아마 계곡이란 지형적 모습을 따른 것 같습니다. 또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요6:1)로 불리기도 하는데,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를 기념하여 만든 해변 도시 디베랴에서 유래합니다. 구약시대에는 납달리 지파의 땅이었으나,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가나안 우상숭배의 영향이 컸습니다. 이사야의 증언처럼(사9:1,2) 갈릴리 지역은 많은 고통을 받았으나, 그 고통 받은 지역에 주님은 성령의 권능을 갖고 먼저 복음의 주무대로 삼습니다. 복음을 간직한 제자들이 배워야 할 지혜와 능력이며 또 사명입니다. 이로써 이사야의 예언은 성취됐습니다. 마태복음의 증언입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4:15,16)
요한복음 8:56절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야곱이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밧단아람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갔을 때, 미모의 외사촌 라헬을 아내로 맞기 위해 라반에게 7년 간 노동을 제공하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라반은 좋게 여겨 승락하니, 야곱은 그 고된 머슴살이 7년을 며칠 같이 여겼습니다(창29:20). 사랑하는 라헬과 함께 세워갈 가정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왜 주저하지 않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갔겠습니까? 자신이 경외하는 하나님이 직접 지으시고 경영하실 기반들을 가진 성, 즉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과 소망을 갖고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 신앙유산을 이삭과 야곱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기쁨과 소망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소망과, 자신의 후손을 통해 오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믿음을 갖고 100년을 천막에서 살았습니다. 본문은 주님이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약속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중에 쟁점으로 떠오른 아브라함을 다룹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은 자신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고 선언하시며, 자신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존재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거하셨다가, 돌에 맞을 뻔하셨죠!(요8:57-59). 그러나 주님은 부활로써 확증하셨습니다. 믿음 생활이란 아브라함처럼 주님의 뜻을 행하면서 기쁨으로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