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사도행전 8:1절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본문에서 누가는 30년 전 스데반의 순교 후 몰아닥친 박해를 회고합니다. 이 박해로 사마리아와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고 결국 박해자 사울이 사도 바울로 회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1905년 여천(장천교회), 벌교(무만동교회), 광양(신황리교회)에서 교회가 먼저 세워지고, 이들의 전도로 순천읍에서도 최사집, 최정의, 김억평, 윤병열, 최사중, 김창수 등이 믿기 시작하여 1906년 순천중앙교회가 설립됩니다. 처음엔 서문안 강시섭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교인이 늘자 북문 밖 양사재(養士齋)로 옮겨 예배를 드렸습니다. 양사재는 숙종 때(1718년) 순천 부사 황익재가 석현 개울 건너 향림사 입구에 세운 유생교육기관이었지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것을 빌린 것입니다. 1910년 매곡동 144번지 현 위치에 ‘T자형’으로 목조 예배당(20평)을 지은 뒤 증축과 신축을 거쳐 1983년 지금의 현대식 벽돌 건물(789평)이 들어섰습니다. “일제말기 선교사님덜이 쫓겨 들어가시구, 박용희 목사님과 황두연 장로님이 원탁회 사건으로 잡혀가시구…..교인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지라. 새 세상이 올 것을 믿었응께.” “새 세상에 대한 믿음”은 광복이 아니라 재림신앙을 의미합니다. 일제는 신사참배 가결 후 순천노회를 주목하고 있었기에 박해는 필연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를 통해 후대의 믿음을 확립하셨으니,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는 주님의 영적통치전략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전도서3:12절(1)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12-15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성을 부여받은 사람의 바른 자세와 삶의 허무의 극복 방법을 구체화 합니다. 먼저, 12절은 전도자가 경험한 최선의 삶입니다. 원문 서두는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의미를 갖는 ‘야다’의 완료형을 사용하여, 전도자가 가만히 앉아 생각함으로 얻은 결론이 아니라 인생을 실제로 살아보고 나서 터득하였음을 알려줍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을 앞세우지 않고 자신의 지혜로 이것 저것을 얻고 쾌락을 누리며, 자아 실현을 해 보았지만,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삶의 결국은 허무로 귀결됨을 뼈에 사무치게 깨달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성경에서 말하는 소위 악인으로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본절은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해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기뻐하는 것이고, 둘째 능동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기뻐하며’의 원어는 능동 혹은 수동 모두 가능한데, 수동의 뜻이 좀 더 강합니다. ‘행복(幸福)’이란 단어가 ‘운’의 뜻을 내포하듯이, 행복은 노력으로만 얻어지기 보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은총을 누릴 때 옵니다. 하나님 만큼 선하신 분이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참된 행복을 위해 당신의 아들도 아낌 없이 내어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주신 삶을 기뻐하십시오! 어떤 형편에 있든지, 거기서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로부터 배우는 삶이 신앙생활입니다(마11:28-30). 만유의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에는 자족을 통한 평강이 있습니다. 내일은 ‘선을 행하는 것’을 묵상하겠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4:11)
전도서3:12절(2)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또 하나의 행복 요소로 제시되는데, 본문에서 ‘선’이란 무엇일까요? 인생의 여정 중 즐거움을 누리라는 의미로도, 도덕적이고 신앙적인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단어 자체만 보면 후자에 가깝습니다. 이경우, ‘선을 행하는 것’이란 개인과 사회, 더 나아가 인류의 보편적 유익을 추구하고, 자신의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활용함을 말합니다. 그러나, 12절의 ‘선’은 13절에서 ‘낙’으로 번역된 ‘토브(=good)’이므로, 문맥상 전자가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즐거움을 누리도록 기회를 주셨을 때, 즐기면서 살아가라는 것이지만, 최선의 삶을 보면 이 두 가지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은총과 행복을 누리는 동시에(기뻐하며), 이웃에게 선행을 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보다 더 나은 삶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둘을 모두 갖추어야 하나 외식을 주의해야 합니다. 유대인의 종교법전 미쉬나는 ‘손을 씻고 음식을 먹으라’고 규정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를 따르지 않고 음식을 먹는 제자들을 비난하자, 주님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죄악된 생각임”을 밝히고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막7:18,19). 신앙의 핵심은 외적 규례가 아니라 마음의 정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음식을 대할 때 감사와 기쁨으로 받음은 물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4,5).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헤롯 가문
누가복음 3:1절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헤롯 대왕의 부친은 이두메 사람 안티파테르이며, 로마의 유대 지역 행정관에 임명(BC47) 받으나 암살당합니다. 둘째 아들 헤롯이 유대 왕위를 계승(BC37-4)하였고 그의 통치 말년 예수께서 태어나십니다. 헤롯은 이두메(에돔) 사람인 탓에 유대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헤롯 사후 유대 지역은 아켈라오, 갈릴리와 베레아는 헤롯 안티파스(BC 3~AD 39), 이두래와 드라고닛(→골란고원과 시리아 남부)은 빌립에게 각 분배되나(분봉왕). 아켈라오는 곧 파면되어 총독이 유대지역을 통치하며(AD 6), 디베리우스 황제 재임(AD14~37년) 중 침례 요한이 등장합니다(AD28,9년). 헤롯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 1세(AD 37~44)는 교회의 원수이지만(행12장), 유능한 왕으로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 베레아, 이두메 전 지역을 통치합니다. 그 아들 헤롯 아그립바 2세(AD44~70)는 헤롯의 마지막 왕(행 25, 26장)입니다. 이두메 사람인 헤롯 가문이 이스라엘을 통치하였으나 이두메아 사람들은 서서히 유대화되어 갔고, AD70년 로마가 이스라엘을 정복할 때 2만 명의 이두메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도왔습니다. 유대인은 지금까지 남아 있으나, 이두메아 사람들은 역사에서 사라졌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응하였다 하겠습니다(오바댜 등). 그러나 유대 땅을 마지막으로 다스린 민족이 이들임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역사적 경륜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됩니다. “그러나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의 예언을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벧후1:20,현대인의성경).
마태복음 6: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성실히, 열심히 살려는 인간에게는 두 종류의 삶이 놓여있습니다: 초인의 삶과 제자의 삶. 니이체를 따르면, 신은 죽었으므로 율법과 선악의 기준을 만들어 내던 신의 개념을 집어던지고, 닥쳐오는 인간의 문제들은 초인의 길을 걸으면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위버맨쉬’를 번역한 ‘초인’은 자신만이 가치척도가 되어 문제극복의 ‘힘’을 추구하고 책임과 약속을 지키는 새로운 인간상입니다. 따라서, ‘초인 철학’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중심의 사상이며, 그 열매는 사르트르의 실존사상입니다. 신이 없는 사르트르는 자유분방하게 살았습니다. 한편, 제자의 삶은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를 배우는 삶입니다. 우리 주님은 성부의 뜻을 받들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비록 하나님은 그분을 지극히 높여 만유의 주로 임명하셨으나, 주님의 목적은 언제나 성부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문제를 당할 경우 그분의 뜻을 배우는 절호의 기회로 보고 기뻐합니다(약1:2). 그리고 초인의 길이 아니라, 제자의 길 즉, 겸손히 계명을 지키며 주님의 도우심을 기도하고 인내합니다. 교부 이그나티우스(AD35∼107?)는 로마로 압송되어 가면서, “나는 비로소 제자가 되기 시작했다”는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초인의 길은 자신의 문제해결과 행복추구가 목표이고 늘 긴장하고 살아가나, 제자의 길은 자신을 부정하고 계명을 지켜 행하며 주님의 보상을 고대합니다. 그 보상은 금생 혹은 내생에 반드시 주어지기 때문에, 손해를 당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평강과 여유가 있습니다.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4)

